哲學

도올 논어 II- 김용옥

이강기 2015. 9. 18. 08:19

도올 논어 II- 김용옥



                                                                           논어집주서설

                                                                       나의 해석학적 입장

  해석(Interpretation)은 이해(Understandng)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해석의 과정에는 매우 중층적이고 복잡한 이해의 구조가 얽혀있다. 지금 내가 해석하려는 것은 논어라는 텍스트다. 현존하는 나의 논어 텍스트는 이미 선진시대에 성립한 것이다. 최근에 묘혈에서 나오는 간백의 문자들로 미루어 생각해 볼때 거의 상응되는(identical) 문자체계의 고본이 양천여년 지속성(continuity)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해에 얽힌 주체들은 시공에 따라 다르지만 이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텍스트 그 자체는 동일성을 유지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참으로 서양문화권에서는 흔히 있기 어려운 현상이다. 희랍텍스트나 에집트 텍스트는 이미 사어화된 반면 한문 텍스트는 활어로서 역사적 삶속에서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논 : 춘추전국시대의 중국대륙의 사람,  어 : 21세기의 한국인인 나

논어의 성립과정 자체가 역사적이고 복잡한 삶의 관계속에 있기 때문에 그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일단 공자라는 역사적 개인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단순화해서 상정해보자! 이때 공자는 발신자(source)가 된다. 공자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의미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공자라는 발신자의 언어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년 전의 산동반도의 곡부지역에서 소통되고 있던 언어체계였다(당시의 방언은 지금 정확하게 재구되기 어렵다). 그러데 인간의 언어의 발설은 반드시 타인의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의 발신체계는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이나 제자들에 의하여 이해되었던 것들이다. 나는 말한다. 인간의 언어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해되기 위한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언어가 아니다.

논어는 공자라는 발신자가 그 발설된 상황에 있던 제자들이라는 수신자(receptor)에게 던져진 멧세지(message)인 것이다. 그 멧세지를 어느 기자가 문자(the written form)의 형태로 기록한 것이 바로 논어인 것이다. 이것이 곧 논어(the Analects)의 1차적 이해의 구조를 형성한다.


그런데 내가 지금 논어를 읽는다고 하는 행위는 이러한 1차적 이해의 구조와는 또 다른 차원의 구조를 갖는 것이다. 나는 2500년 전의 수신자(R1)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같은 멧세지를 2500년 후에 수신하는 사람(R)이다.(보다 정확하게는 M1을 직접 수신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W1]의 해석을 거친 A를 수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수신은 나흘로의 이해로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신자(R)인 동시에 발신자(S2)가 된다. 나는 나의 이해를 나와 동일한 시공에 사는 사람들, 나의 제자들(R2)에게 전달하는 행위를 통해 나의 이해를 확인한다. 이것이 바로 나를 둘러싼 2차적 이해의 구조이다. 이 두 차원의 이해의 구조를 간단히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S1과 R1의 사이는 기본적으로 일국어 통용의 체계(monolingual)이다. 그러나 나( R / S2)는 반드시 2개국어화자(bilingual)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또다시 S2와 R2 사이는 일국어통용의 체계이다. 공자의 언어통용체계는 네모꼴로 나의 언어통용체계는 원형으로 표시되었다.

위의 도식에서 M1과 R1의 관계와 M2와 R2의 관계는 제각기 상이한 문화권 속에 있다. 언어와 풍습과 제도와 관습을 달리하는 각기 다른 독자적 장에 놓여있다. 이 각기 다른 장을 다른 삶의 양식(Lebensform)으로 이해한다면, 삶의 양식은 보편적 공통성과 상대적 상이성의 양측면을 동시에 보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논어의 이해의 궁극적 의미가 M2와 R2의 관계에 집중되어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딜타이류의 주관주의(subjectivism)에 빠진다. 내가 말하는 이해는 주관주의로써도 객관주의로써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해석 그 자체가 이상적인 기준(M1 -- R1)도, 현실적인 기준(M2 -- R2)도 아닌 어떤 새로운 역동적 객관성을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번역(translation)이란 구극적 나의 실존적 이해의 구조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은 M1을 M2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다.
                                              
                                             X  
공자의 멧세지: M1 ---------------------------------------> 나의 멧세지: M2
                                                          번역

그런데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2개국어 화자의 번역행위를 지칭한다. 그것은 축어적 일치성(verval consister)이나 양식적 상응성(formal correspondence)을 지향하는 번역행위이다. 나는 이러한 번역과 그 번역에 깔린 이해의 구조를 혐오한다.

내가 말하는 번역이란 M1에서 M2로의 일방적 전환이 아니라, M1과 R1사이에 성립하는 반응의 체계(System of Response)와, M2와 R2사이에 성립하는 반응의 체계 사이의 상응성이다. 상응성은 동일성과 구분되는 것이다. 그것은 축어적 일치가 아닌 맥락적 일치(contextual consistency)며, 양식적 상응이 아닌 역동적 상응(dynamic equivalence)이다. 그리고 이 두 반응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쌍방적일 수 밖에 없다.

M1 <----- Respnse, 반응의 체계 -----> R1                   M2 <------ Response, 반응의 체계 ----> R2
                              :                                                                                                                :
                              :                                                    O                                                            :  
                              :<-------------------------------------------------------------------------->:
                                                                                 번역

이러한 번역의 구조가 곧 나의 이해의 구조며 이것이 곧 나의 해석학적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응의 관계가 쌍방적이라 사실을 좀 부연설명할 필요가 있다. 번역이 M1에서 M2로의 일방통행이라고 한다면 이때 M1은 절대적인 의미체계로서의 그 무엇이다. 그리고 M2는 M1라는 절대적 기준에 접근하는 도수로서만 그 가치서열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번역과 이해는 전혀 이러한 것이 아니다. 우선 나는 M1과 M2의 주체인 S1과 S2의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무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와 나는 다 같이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며, 시간적, 공간적 점이 아니다. 그것은 점이 아닌 면이며, 그 면은 수없는 관계로 착종된 면인 것이다. S1의 발설체계인 M1이나 S2의 발설체계인 M2는 그 자체로 고정적일 수 없으며, 그것은 오직 각기 R1, R2와의 관계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술어적인 것이다. M1, M2는 모두 주어적인 실체가 아니라 술어적인 상태이다. 따라서 역동적 상응이라고 하는 것은 M1-R1의 반응체계라고 하는 이해의 지평과 M2-R2의 반응체계라고 하는 이해의 지평 사이에 융합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두 반응체계는 상응되는 관계를 통해 나의 이해의 지평속에 출현(emergence)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 두 반응체계가 비록 2500년의 시간을 격하고, 황해라는 공간을 격하고 있을지라도, 그 반응체계 자체가 궁극적으로 실체적, 주어적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비실체적으로, 술어적으로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해석의 지평은 열려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지평간의 융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2500년전의 공자(S1)와 제자(R1) 사이의 반응의 체계는 학문적으로 역사적으로 축적된 주소학의 성과를 통하여 그 객관적 실체성을 전제할 수는 있지만, 그 실체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적이며, 따라서 유동적이고 상황적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나는 술어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사실 공자와 제자 사이의 반응의 체계의 실재는 구극적으로 불가지론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 불가지론을 가지론으로 끊임없이 극복하는 과정이 곧 지평의 융합이요, 해석이요, 이해다.

나는 언어를 논리로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는 느낌(Feeling)일 뿐이다. 논리도 느낌의 반복적 정형일 뿐이다. 언어는 논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의 총체성을 전달키 위한 것이다.

나의 번역에는 다음의 5가지 우선의 체계가 있다.

1. 맥락적 일치성이 축어적 일치성에 우선한다.
2. 역동적 상응성이 양식적 상응성에 우선한다.
3.언어의 청각적 형태가 문어적 형태에 우선한다.
4. 번역이 의도하고 있는 대상에 의하여 받아들여지고 쓰여지는 양식이 전통적으로 더 권위있는 양식에 우선한다.
5. 삶의 총체적 느낌이 형식 논리적 의미에 우선한다.

이상의 논의는 나이다와 타버의 번역의 이론과 실제를 참고하였다.(Eugene A. Nida and Charles R. Taber, The Theory and Practice of Translation, Published for the United Bible Societies by E. J. Brill, Leiden 1974.) 나의 책, 도올논문집(통나무, 1991)에 본서의 우리말 번역이 실려있다.

범례

1. 주자집주본의 원문을 기본텍스트로 하고 그 장절의 구분을 따른다. 제임스 레게(James Legge)의 영역본 번호와 동일하다. 집주판본은, 사서대전을 우리나라 조선왕조에서 간행한 정유자(1777) 내각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2. 해석의 지평이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은 나의 소신이다. 나는 논어 텍스트에 대한 어떤 독단도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주와 소, 금주를 막론하고 역사적 주석의 모든 지평들을 수용할 것이다. 나는 동경대학 유학시절에 토가와 요시오(호천방랑)선생 밑에서 소라이(적생조협)의 논어징을 감명깊게 읽었다. 그때 논어징을 같이 읽은 동반동학이 현 동경대 쿠로즈미 마코토(흑주진)교수다. 대체적으로 나는 그의 설을 취하지는 않지만 다산의 논어고금주 보다는 나에게 주는 계발의 공이 컸다. 다산은 주자학과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지만 소라이나 진사이(이등인제)는 그러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진사이의 논어고의나 어맹자의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

3. 금주의 약점을 보완하고 보다 고의를 충실히 살려내려고 노력한 청대의 유보남의 논어정의나, 북경대, 청화대에서 교편을 잡으며 일생을 논어 주석의 집대성에 힘쓴 정수덕(1877~1944)의 논어집석, 그리고 백화 번역본으로서는 가장 탁월한 양백춘의 논어역주, 정주한간본의 연구성과를 도입하여 새롭게 논어를 영역한, 에임즈(Roger T. Ames)와 로즈몬트(Henry Rosemont, Jr.)의 The Analects of Confucious: A Philosophical Translation(Ballantine Book, 1998)를 위시하여 20세가, 중국, 한국, 일본, 영어 문화권에서 배출된 방대한 연구성과를 될 수 있는대로 폭넓게 참작하려고 노력하였다.

4. 20세기 논어 고본에 관한 가장 주목할 만한 두개의 위대한 발견이 있다. 그 하나는 사라졌던 정현주(뻬리오가 감숙성 천불동 석실에서 반출해간 돈황문서와, 신강성 위구르지방의 토노번 당묘에서 발견된 복천수사본, 그리고 그 후에 발견된 잔편들)의 발견이다. 또 하나는 1973년 서한 중산회왕 유수의 분묘에서 출토된 정주한묘죽간본 논어이다. 이 두 문헌의 연구성과도 참작하였다.

5. 나의 평소 논어 이해는 요시카와 코오시로오(길천행차랑)선생께 사숙한 바 크다. 그리고 시라카와(백천정)선생의 공자전(중공총서, 1972), 브룩스(E. Bruce Brooks and A. Taeko Brooks)의 논어변(The Original Analects, N. Y.: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도 논어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많은 참신한 시각을 제공하였다. 시라카와 선생의 정신세계는 공자라는 한 인간의 내면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

학이 제일

논어의 편명이 정확히 언제 결정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상당히 일찍, 최소한 한대에 이르기 전에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름을 삼는 방식이 사실 백남준의 예술 못지않게, 아주 콘템포라리한 냄새가 난다. 그냥 무작위로 편의 맨 먼저 두 글자를 떼어낸 것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라는 문장에서 학이를 떼어낸다는 것은 사실 백남준의 플룩수스예술과도 같은 발상이다. 도무지 의미론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기호적 약속 이상의 그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편명이 일찍 정착되었다는 것은 매 편이 그 나름대로 독자적 편집체께를 지니고 있었으며 단행본으로 유통된 성격이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논어는 기본적으로 각편이 증식되어 쌓여 편집된 것이다. 관자의 첫 편의 이름은 목민이요, 장자의 첫 편의 이름은 소묘유다. 이것은 곧 그 편의 내용의 테마를 전체적으로 의미있게 나타낸 것이다. 논어의 편명과는 사뭇 다르다. 논어가 이렇게 편명이 자의적인 기호체계가 된 것은 아마도 그 내용이 단편들(fragments)의 꼴라쥬며, 그 단편들 사이에 아무런 통일적 성격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팔일편과 같이 아주 균일하게 예락이라고 하는 테마를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의도적으로 편집된 경우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된다. 카오스 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카오스적인 단편속에서 우리는 코스모스적 질서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이와 같은 식으이 편명작법의 예를 시경과 맹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학이편은 매우 기분나쁜 편이다. 이 편은 사실 논어의 첫머리에 와서는 아니되었을 편이다. 다행스럽게도 맨 처음에 온 제 1장의 공자말을 빼놓으면, 대부분이 진부하고 도식화된 공자의 후기제자들의 말들이다. 유자의 본입이도생이니, 효제가 인지본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은 너무 개념적인 조작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말들이며 생생한 공자의 살아있는 모습을 전혀 전달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학이편이 천하제일지서인 논어의 관을 차지하는 바람에 논어에 대한 인상이 도식화된 가족주의적 규범윤리, 그리고 복종만을 강조하는(범상은 안된다) 권위주의적 노모스로서 왜곡되었다. 우리 조선조 유생들의 통폐가 모두 이렇게 잘못 편집된 논어의 체계에서 유래된 것일 수도 있다. 이 편은 논어 전편 중에서도 매우 후대에 성립한 것으로 보여진다. 브룩스는 이 편을 위령공 제 15와 계씨 제 16 사이에 집어넣고 있다.

집주  차, 위서지수편. 고소기다무본지의, 내입도지문, 적덕지기, 학자지선무야. 범십육장.

1-1. 자왈 :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1-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배워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뜻을 같이 하는 자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도주  자왈이라는 표현은 논어에서 모두 예외없이 공자님께서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이때 자라는 것은 제자들이 아마도 선생님을 높여 부른 말이다. 이것 또한 매우 특이한 용법이다. 아마도 공자 이전에는 자라는 것은, 특별한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었을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의 자의 첫 글자가 자로 시작하는 예가 많은데, 아마 그것도 그런 과거의 신분적 유습이 보편화된 특수한 상황으로 여겨진다. 논어로부터 자의 의미가, 본격적으로 오늘날의 master, teacher 으 뜻을 갖는 맥락으로 통용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다음 구적의 유자왈 과 같은 표현도, 그것은 유약의 제자들이 그를 선생님으로 모시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표현이다. 자왈(공자왈)과 구분키 위하여 유자왈이라고 한 것이다.

논어의 관을 차지하는 이 말은 얼핏 생각하면 매우 진부하게 들린다. 배워서 예습, 복습 잘 하니 기쁘다는 얘기가 뭐 그다지도 위대한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요한의 말이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창세기의 말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하고 비속하고 진부하고, 너무 일상적인 쇄사로 들린다. 여기에 우리는 해석학적 인식의 지평의 문제를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많은 공자 전기작가들이 이 세마디의 함축적인 공자의 말을 공자의 청년시절, 그러니까 왕성하게 공부하려고 하던 시적의 의욕이 넘치는 언급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은 공자의 전생애를 압축시킨 공자말년의 달인적 회상으로 풀이한다. 대철인이 죽기전에 그의 생애에 대해 남긴 매우 함축적인 언사였을 것이다. 이 언급이 바로 유자(36세 혹은 43세 연하)니 증자(46세 연하)니 하는 공자말년의 어린 제자들의 말과 같이 편집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입증해준다.

여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공자의 학의 의미는 반드시 일차적으로 공자라는 발신자(S1)와 수신자인 그 제자들(R1) 사이에서 통용된 이해구조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지금 우리말로 공부하고 예습, 복습 잘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발신자(S2)와 오늘날의 수신자(R2) 사이에서 일어난 이해의 구조속에서 해석된 것이다. 단순히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고 하는 현재의 우리말의 멧세지(M2)가 의미하는 바는 모두 우리 현존재의 일상적 체험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밥먹고 학교에 가고 학교에 가서 영어, 수학 공부하고 집에 와서 예습, 복습 잘하다가 언뜻 뭔 뜻인지 깨달음이 올때 즐거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옆의 친구나 엄마에게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를 외친다면 과연 그것이 정당한 논어의 이해가 될 것인가?

오늘 나의 논어 이해는 분명 나의 체헙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체험의 의미체계는 반드시 공자와 공자제자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즉 M1와 R1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어떤 상황에 맥락적으로 상응되는 방향으로 해석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M2 <------------------ 반응 -----------> R2                   M1 <------------------ 반응 ------------>R1
                                       :                                                                                                    :            
                                       :                                                  상응                               :
                             :------------------------------------------>:
                                                                  <해석>

공자는 분명 나처럼 학교에 다니고 학점을 따고 입시를 걱정하고 박사학위를 딸 생각을 했던 사람은 아닌 것이다. 공자는 기존의 어떤 커리큐럼이 존재하고 그 커리큐럼이 규정하는 제도권내에서 배움을 지향한 사람이 아니다. 공자가 말하는 학이란 바로 학이라는 의미의 창출 그 자체인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의 학이란 무지로부터의 탈출이며 미지의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이다. 그리고 그가 십유오이지우학이라 했을 때의 학은 분명히 구체적인 예라는 미지의 대상을 갖는 것이었다. 과연 예가 무엇이냐? 예! 그것을 알아보자!

공자의 일생을 통해 추구한 학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학문(wissenschaft)이 아닌 예, 락, 사, 어, 수 로 통칭되는 육예를 말한 것이다. 그것이 문, 무의 구분이 전혀 없는 매우 실용적인 개념이라는 것은 이미 도서에서 상설한 바와 같다. 이러한 육예를 전제로 다음의 구절이 분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학어시습지라 할때, 우선 갈지가가 정확하게 학을 반복하여 목적으로 받은 지시대명사가 아니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구어의 리듬에서 발생한(논어의 문제는 당대의 구어였다) 막연한 조사에 불과한 것이다. 습은 학과 병치되는 독립된 개념이다. 습(익힌다)이라는 것은 학이 미지의 세계로의 던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실천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실천은 반드시 때(시)를 갖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논어를 피상적으로 읽어, 시습지를 때때로 익힌다.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크게 잘못된 해석이다. 여기서 시란 때때로(occasionally)의 뜻이 아니라 때로 때에 맞추어(timely)의 뜻이다. 율곡이 이를 훈하여 이르기를:

자고로샤데 학하야 시로 습하면 또한 열홉디아니랴!

율곡이 시로 습하면이라 한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다산은 때에 맞추어로 해석한 황간의 소를 박하여 줄곡 계속하여 익힌다(시시습지)의 뜻으로 새기고 있으나, 내가 생각컨대 다산이 틀린 것이다. 황각의 설이 더 적확하다. 다산의 고금주는 때로 발명하는 바가 있으나 대체적으로 너무 사소한 문제에 구애되고 있고 대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애석한 일이다. 문무가 통합된 육예를 익히는 과정이란 반드시 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린 아이가 서, 수를 할 수는 있으나 사, 어 를 할 수는 없다. 장년이 되어도 여름의 맑은 날씨에 말달리고 활을 쏠 수는 있으나 추운 겨울날씨에 빙판에서 말달리는 일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황간은 신중시, 년중시, 일중시의 삼시를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배움의 익힘이란 내 몸의 상태, 즉 유, 약, 장, 강, 예, 기 등의 모든 상태에 따라 그 익힘의 형태가 달라질 것이요(신중시), 또 계절의 형태에 따라(년중시), 또 하루 중에서 아침, 점심, 저녁에 따라(일중시) 익힘이 달라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용의 가르침이요, 역의 가르침이요, 노자가 동선시라 말한 바요, 맹자가 성지시라 한 뜻의 시일 것이다. 때를 잘못 타서 배우고 익히면 그것이 병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평생을 통해 때를 맞추어 끊임 없이 정진하여 삶의 기쁨을 만끽했다는 뜻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 한 뜻이 어찌 요즈음 어린 수험생들의 학습에 비유할 수 있으랴!

불역열호라 한 구문에서역의 뜻도, 딴 즐거움도 있는데 이것 또한 즐겁다라는 식으로 새기면 안 된다. 여기서 역이란 자기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남에게 전달하고 남의 동의를 얻고자 하는 강조의 뜻으로 새겨야 한다. 그것은 생대적인 역이 아니라 기쁨의 절대적 경지를 구가하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구문의 불역낙호의 락과 첫 구문의 열은 어떻게 다른가? 반드시 명료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열 = 열 은 나의 실존적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뜻이요, 락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즐거움을 표현한 말로 보아야 한다. 열은 즉자적이요, 락은 대자적이다.

유붕자원방래라 할때 유붕의 유는 잘 해석이 되질 않는다. 우붕이라고 한 텍스트도 있음으로 아마도 우붕으로 고쳐 읽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필사과정에서 자형상 유와 우는 쉽게 혼동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달리 생각하면, 시경의 유붕 유주의 용법처럼 별 의미 없는 접두어일 수 도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붕의 해석이다. 이 구문의 뜻 또한 S2-R2 간의 좁은 인식체계에서 해석될 수 없다. S1-R1의 오리지날한 인식체게로 환원시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물론 공자의 삶의 전체의 조망이다. 여기서 공자는 친구가 먼곳에서 찾아오니 즐겁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랫만에 타지에 가 있는 동창생이 찾아와서 그 날 저녁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유붕자원방래면 불역낙호야 하고 고달픈 세파를 안위하는 그런 자위의 탄성이 아닌 것이다.

공자는 인생을 통하여 학에 대한 자각의 년ㅁ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자기 삶의 현세적 의미를 철저히 추구하였다. 공자에게서 그 실존의 추구가 역사속에서 위대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공자 개인의 내면의 차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추구되었다는데 있는 것이다. 바로 공자의 교단은 학을 위한 최초의 자발적 집단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의 전형을 정립했던 것이다. 여기서 발하는 붕이란 우리말의 단순한 친구(friend)가 아니다. 붕이란 고금의 주소가 다 지적하고 있듯이 붕당이요, 동문이요, 동지다. 그것은 개인적 친구가 아니라, 학을 위하여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붕이란 실제로 그의 학단을 구성한 제자들이었다. 공자에게 있어서 붕이라는 의미는 친구와 제자의 명료한 구분이 없었다. 자로는 제자이자 친구였다. 어린 안회도 제자이자, 그에게 무한한 깨달음을 일깨워주는 벗이었다. 이런 동지들이 큰 뜻을 위하여 배움을 위하여, 정치적 개혁을 위하여 사방에서 모여든다! 어찌 즐겁지 아니할 수 있으랴! 그런데 문제는 원방의 해석에 있다. 여기서 원방(먼 곳)이란, 노나라 도성내의 사람들만이 아닌 먼나라 사람들까지 찾아온다는 뜻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공자의 제자들은 위나라, 송나라, 제나라, .....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그러나 원방의 더 중요한 의미는 국과 국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국을 벗어난 비야의세계, 즉 편벽한 서인의 세계까지를 포함해서 말한 것이다. 즉 자로와 같은 변의 야인들도 찾아왔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공자의 유교무류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실현을 위하여 배움을 같이 하는 붕당이 형성되었다는 것, 공자의 인생을 회고할 때, 가장 큰 즐거움이엇을 것이다.

인불지이불온에서 인은 남(타인)의 뜻이다. 옛말에서는 인은 기(자기)와 대비되는 말이다. 부지는 단순히 알아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자의 인생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해줄 명군을 만나기 위하여 주유한 삶이었다. 결국 인부지란 뜻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할때, 정치적으로 등용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된 소인으로서 마감한다는 뜻이다. 은이란 단순히 부끄러운의 뜻이 아니라, 하안의 말대로 속에서 치밀어 오느는 분노(은, 노야.), 일본말로 우라미, 우리말로 한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여한이 없다! 왜냐? 바로 군자됨을 추구했기 때뭉디라는 것이다.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는 이러한 맥락에서 요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치적 실현과 군자라고 하는 도덕적 이상과의 갈등 사이에서 궁극적으로 공자는 군자라는 도덕적 이상을 선택한 것이다. 이 마지막 구문을 역설적으로 뒤집는다면, 공자의 일생은 분노와 한에 찬 인생이었다. 알아주는 이 없이는 고독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최후의 위안은 바로 자신이 군자요 대인유라고 하는 자부감, 즉 소인으로부터의 탈출의 기쁨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렇게 본다면 이 세 병치되는 탄성처럼 공자의 인생의 토탈리티를 그려내는 명구는 없다. 후속되는 학이 편의 내용이 제자들의 졸한 언급임에도 불구하고 학이편이 논어를 관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세마디 때문일 것이다.

집주  설, 열동.  학지위언, 교야. 인성개선, 이각유선후, 후각자필교선각지소위, 내가이명선이복기초야. 습, 조수비야. 학지불이, 여조수비야. 설, 희의야. 개학이우시시습지, 즉소학자숙이중심희설, 기심자불능이의. 정자왈: 습, 중습야. 시복사역, 협흡어중, 즉설야. 우왈: 학자, 장이행지야. 시습지, 즉소학자재아, 고열. 사씨왈: 시습자, 무시이불습. 좌여시, 좌시습야: 입여제, 입시습야.
락, 음낙.   붕, 동류야. 자원랑래, 즉근자가지. 정자왈: 이선급인, 이신종자중, 고가락. 우왈: 설, 재심; 락, 주발산, 재외. 온, 우문반.    온, 함노의. 군자, 성덕지명. 윤씨왈: 학, 재기; 지부지, 재인. 하온지유? 정자왈: 수락어급인, 불견시이무민, 내소위군자. 우위, 급인이락자, 순이역; 부지이불온자, 역이난. 고유성덕자능지. 연덕지소이성, 역유학지정, 습지숙, 설지심이불이언이.    정자왈: 락, 유설이후득. 비락, 부족이어군자.

1-2. 유자왈: 기위인야효제, 이호범상자, 선의; 불호범상, 이호작란자, 미지유야. 궂자무본, 본립이도생.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

1-2. 유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 사람됨이 효제스러우면서도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드물다.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있어본 적이 없다. 군자는 근본을 힘쓴다. 근본이 서면 길이 생겨난다. 효제라고 하는 것은 실천하는 근본일 것이다.

도주   이것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 유약의 말이다. 유약이라하지 않고 유자(Master You)라고 한 것은 유약을 스승으로 모시는 집단에 의하여 그렇게 기록되었음을 말해준다. 정자를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이 그렇게 기록되엇음을 말해준다. 정자를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이 그 많은 중니의 제자들을 칭함에 유독 증삼과 유약만을 자로 존칭했다는 사실을 들어 논어 자체의 편집이 증자와 유자 계열의 제자들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설을 펴지만 그것은 편협한 생각이다. 아마도 증삼과 유약만이 공자 사후에 강력한 교단을 형성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그들이 곧 전체 논어 편찬의 주체세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유약은 공자보다, 13세 연하, 33세 연하, 36세 연하(공자가어), 43세 연하(중니제자열전)라는 제설이 분분하나, 나는 36세 연하라는 가어의 설을 취한다. 가어에는 그가 기억력이 뛰어났으며(위인강식), 고도를 숭상하였다(호고도)라고 말했을 뿐, 더 이상의 언급이 없다. 그런데 유약은 원래 노나라 사람이며 무인 출신이었다. 유약은 BC 487년(노애공 8년) 오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했을 때 노나라의 결사대 3백명 중의 한사람으로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유약은 이때만해도 공자를 만나지도 못했고 아직 제자가 아니었다. 유약은 아마도 뒤늦게 자유를 통하여 공자문하에 들어갔을 것이다.

공자가 죽었을때 남은 어린 제자들은 어쩔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그래서 자하, 자장, 자유 등 중추를 이루고 있던 제자들이 제안을 했다. 아마도 유약은 공자처럼 키가 컸고 덩치가 좋았고 무장의 기품이 서렸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공자와 비슷하게 생긴 유약을 공자를 대했던 예로써 대하여 공자집단을 유지하자고 제안했다. 유약을 스승대리로 모시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소꼽장난 같은 발상이었다. 공자의 말년제자들의 발상의 유치함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러자 증삼이 버럭 화를 냈다.: 알될 일이다! 우리 공자선생님의 덕성은 저 맑은 한강과도 같고, 저 푸른 가을하늘의 태양과도 같다. 거기에 뭐 구질구질하게 덧붙이겠다는 거냐!

이것은 맹자 등문공 상4의 기록이다. 이것은 아마 공자 사후, 공자 교단의 리더십의 계승을 놓고 유약과 증삼이 갈등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재주는 고사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노나라 사람이었던 유약은 공분 집단을 어느 기간동안 리드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사마천의 제자열전에는 유약의 제자가 유약에게 교묘한 질문을 던졌는데, 유약이 대답을 못하고 어물쭈물하는 궁색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자 그 제자가 분연히 일어나 유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시요! 그 자리는 그대가 앉아 있을 자리가 아니요!(유자피지, 차비자지좌야.)라고 성토하는 장면이 매우 소상히 그려져 있다. 이 일화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유약은 내가 생각하기에 역부족의 인간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유약의 말이 이 학이 편에만 세번 나온다. 모두 규범적인 예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예의 스페시알리스트였다. 그래서 같은 유파인 증삼과 라이벌 관계에 있었을지 모른다. 이 학이편 두째번 장에 나오는 유악의 생각은 공자의 인의 사상이 매우 규범윤리화된 후대의 타락상의 단초를 보여주는 것이다. 공자의 사상과는 이미 거리가 멀어져 있다.

효는 분명 부모와 자식간의 덕목이다. 그것은 종적(vertical)이다. 제는 형제간의 덕목이다. 그것은 횡적(horizontal)이다. 제는 횡적인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공손함(fraternal submission, Legge 역)을 나타내는 일반적 덕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유가의 생각은 바로 이러한 혈연적 관계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느낌을 모든 인륜의 덕성의 근본(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까운 인간에 대한 선의를 확충해나가는 것이 모든 도리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입이도생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노자가 말하는 우주론적 근본원리로서의 도가 아니라, 인륜의 길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를 범상이니 작란이니 하는 따위의 논리맥락에 꿰어 맞춘 것은 별로 현명치 못하다. 유약은 머리가 좀 아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선의라고 할 때의 의는 강한 단정을 나타내는 조사이다. 그에 반해 제일 마지막 구절의 기위인지본여의 여는 단정을 주저시키는 조사이다. .......라고나 할까? 정도의 의문을 내포하는 서술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효제야자라고 살 때의 야자의 용법은 주어를 한 번 객관화시키면서 무게를 실리게 하는 조사이다. 우리말의 ...라고 하는 것은 정도에 해당되는 어기를 나타낸다. 그리고 미지유야는 미유지야의 지를 동사앞으로 도치시킨 것이다. 이것은 미라는 부정사를 강화시키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제일 마지막 구문,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 에 관한 송유들의 재미있는 논의가 있다. 문제는 이 부분이 딴 판본에 효제지자, 기인지본여라고 되어 있어 발단되는 것인데, 이러한 타본의 논리를 따른다면 효제라는 덕목이 곧 인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즉 효제 그 자체와 인의 뿌리(본)와 가치상으로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효제라는 것은 구체적인 개별적인 덕목에 불가하다. 그렇다면 인의 핵심적 가치가 효제의 레벨로 격하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가 정자에게 묻는다.

효제가 곧 인의 근본이라면, 이것은 곧 효제를 통하여 인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효제위인지본. 차시유효제가이지인불?

이에 정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럴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라는 글자이다. 그것은 실천이다. 인을 실천하는 것이 효제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했을 따름이다. 효제는 인의 한 행위일 뿐이다. 따라서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라고 말하면 되어도, 막바로 인의 근본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대저 인은 성이요 체다. 효제는 용이다. 성중에는 인의예지 사단밖에는 없다. 성중에 효제라는 덕목은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은 사랑(애)를 주로 하고, 사랑이란 가까운 사람(혈연)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효제라고 하는 것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일 것이다. 라고 유자가 말한 것이다.

비야. 위행인자효제시. 효제, 시인지일사, 위지행인지본즉가, 위시인지본즉불가. 개인, 시성야; 효제, 시용야. 성중, 지유개인의예지사안이이. 갈사유효제래? 연인주어애, 애막대어애친. 고왈: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

이미 소유들도 유약의 언급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 그자체가 아닌 위인이라는 표현에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인이란 결코 후대의 유자가 말하는 바 구체적 덕목을 고정적으로 실체적으로 지적한 바가 없다. 공자에게 있어서 인이란 정의 불가능한 것(the Undefinable)이며 한정불가능한 것(the Unconditioned)이며, 오직 삶의 유동적 현실속에서만 끊임없이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노모스(nomos)적 울타리에 갇힐 수 없는 것이다.(노모스[vouos]의 원뜻에는 가축을 사육하는 장소라는 뜻이 있다).

송유나 기타 주석가들의 문제는 바로 논어의 권위를 절대시한다는데 있다. 우리는 논어의 권위를 인정해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오직 인간의 권위만을 인정해야 한다. 이 유약의 언급은 근본적으로 공자사상을 잘못 이해한 공자의 아류, 어린 제자의 인식구조를 나타내는 저급한 언어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유약류의 인식구조가 논어와 공자를 형해화한 노모서적 세계로 몰고 갔고, 그 궁극점에 있는 것이 곧 예기의 곡예인 것이다. 그것은 장자가 혐기하는 바, 일욕지사의 곡례(세세한 예의 덕목의 나열)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점을 해결하지 못한 송유는 이를 체용론으로 바꾸어 도식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니 어찌 딱한 일이 아니겠는가?

성(체) --- 인       , 용 -------- 효제

뿐만 아니라 인을 맹자가 말하는 사단의 일단으로 논의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한 논변이 아니리오? 공자가 말하는 인은 맹자가 양묵에 대하여 아폴로제틱하게 설정한 사단 즉 인의예지의 한 덕목으로서의 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단을 초월하는개념이며, 사단을 총괄하는 개념이며, 그것은 인성론적인 개념이자 곧 우주론적 개념인 것이다. 어찌 성속에 인의예지만 있고 효제는 없다 하는 구차스러운 말을 하고 있는가? 아니 인간의 성이라는게 무슨 인터넷 사이트와도 같은 것이래서 그 속을 검색해보니 무엇은 있고 무엇은 없다라는 식으로 논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참으로 유치하고 어리석고 졸열한 것이 송유의 주석이다!

다산 또한 이러한 송유의 오류를 근본적으로 벗어나고 있지는 못하나 공자가 말하는 인의 가치가 효제라는 구체적 덕목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느냐에 관하여 비교적 차분하고 일리있는 말을 하고 있다. 한번 다산의 말에 귀를 기우려보자!

인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 더불어하는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스럽다는 것이 곧 인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어버이와 자식간의 두 사람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형을 섬김에 공경스러운 것이 곧 인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형과 아우 사이의 두 사람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임금을 섬김에 충성스러운 것이 곧 인이 되는 것이니, 그것은 임금과 신하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백성을 지도하는데 인자스러운 것이 곧 인이 되는 것이니, 그것은 지도자와 백성 사이의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부부, 붕우의 사이로부터 시작하여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 모두 인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효제가 그 근본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인자, 이인상여야. 사친효위인, 부여자이인야; 사형제위인, 형여제이인야; 사군충위인, 군여신이인야; 목민자위인, 목여민이인야. 이지부부붕우, 범이인지간, 진기도자, 개인야. 연효제위지근.

정약용은 구구하게 위 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송유의 해석방식을 취하지는 않으나 그가 말하는 이인상여는 인이라는 자형으르 분해하여 이인으로 푼 매우 상투적인 글자풀이에 기초하고 있다. 인의 고자형인 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두사람이 마주보고 있는 자형으로 풀이될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이 따뜻한 방석위에 앉은 모습이며, 온화롭고 따뜻한 사람의 모습이다. 인의 이 형태에 두 사람의 뜻이 없다. 그것은 임석온난의 뜻이며 그 의미로부터 유교의 최고덕목으로서 확대해석되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해의 논의를 떠나 인이 두사람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다산의 관계론적 사유(Relational Thiking)는 정당하다. 인간을 고립된 존재로 파악하지 않고 간의 존재로 파악하는 것은 동양적 인간론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러나 다산의 문제점은 그러한 관계론적 사유가 기껏해야 인간중심주의적이고 또 에토스(ethos)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은 분명히 관계론적인 것이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 인적 관계, 물적 관계, 우주론적 관계의 총상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성격이 윤리적인데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공자의 인은 윤리적인 범주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윤리적(ethical)이라기 보다는 감성적(Feeling-orientical)인 것이요, 감성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심미적(esthetical)인 것이다. 그것은 이성적 판단에 기초한 도덕적 요구(postulation)가 아니다. 다산의 논어는 너무 지나치게 이성적인 측면에 치우쳐 있다. 그는 조선 유학의 특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도 결국 심의 토탈리티와 관계되는 것이요, 어떤 이나 성적인 측면만을 척출하여 낸 것이 아니다.

집주   네, 호, 개거성. 선, 상성. 하동.     유자, 공자제자, 명약. 선사부모위효, 선사형장위제. 범상, 위간범재상지인. 선, 소야. 작란, 즉위패역정투지사의. 차언인능효제, 즉기심지순, 소호범상, 필불호작란야.
여, 평성.            무, 전력야. 본, 유근야. 인자, 애지라, 심지덕야. 위인, 유왈행인. 여자, 의사, 겸퇴불감질언야. 언군자범사, 전용력어근본. 근본기립, 즉기도자생. 약상문소위효제, 내시위인지본. 학자무차, 즉인도자차이생야.                       정자왈: 효제, 순덕야. 고불호범상, 기복유역리난상지사? 덕유본. 본립, 즉기도충대. 효제행어가, 이후인애급어물, 소위친친이인민야. 고위인, 이효제위본. 논성즉이인위효제지본. 혹문: 효제위인지본, 차시유효제가이지인불? 왈: 비야. 위행인자효제시. 효제, 시인지일사, 위지행인지본즉가, 위시인지본즉불가. 개인, 시성야; 효제, 시용야. 성중, 지유개인의예지사자이이. 갈사유효제래? 연인주어애, 애막대어애친. 고왈: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

1-3. 자왈: 교언영색, 선의인!

1-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말 잘하고 표정을 꾸미는 사람치고 인한 이가 드물다.

도주       이것과 완전히 동일한 구문이 양화편에 중출하고 있다(17-17).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공자의 어록중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어떤 조형적 파편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 조형적 파편이 학이 편의 기자에게 또 양화 편의 기자에게 공유된 것이다.

공자의 교언영색에 대한 혐오는 단순히 우리가 일상적인 콤멘트로 이해해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공자의 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핵심적인 인식론적 틀을 나타내는 중요한 발언이다. 교언이란 문재 그대로는 교묘한 말이다. 영색이란 문자 그대로 요염한 안색 정도의 의미가 된다. 색은 때때로 여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기미, 분위기, 발출되는 표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너무 공자를 유가, 즉 유교철학이라고 하는 선입적 편견 속에서 해석하는데 익숙해 있다. 공자는 단 한번도 유교를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인간을 말했고 삶을 말했을 뿐이다. 따라서 공자라는 인간의 생각 속에는 유, 불, 도의 모든 면모가 엿보인다. 그에게는 양묵도 맹순도 한비도 다 들어있는 것이다. 정통과 이단의 터무니 없는 분별심 속에서 공자를 읽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교언영색은 분명 인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의인이란 표현은 본시 인선의를 도치시킨 것으로 선(드물다)이라는 술어를 강화시킨 것이다. 선은 소와 성모를 같이 하고 있다. 통자이다. 인은 교언이나 영색으로는 절대 잡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덕목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데 대한 깊은 불신을 나타낸 것이다. 언어적 표현의 교묘함에 대한 깊은 저주를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노자가 도경의 모두에서 도가도비삼도라 말한 것과 대차가 없다. 도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인 또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노자는 이것을 우주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말한 것이다. 공자는 이것을 일상적 삶의 느낌속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말 잘하는 자치고 인한 자가 드물다!

교언영색에 대한 공자의 혐오감은 바로 불립문자를 외치는 대승불학의 선의 정신의 조형적 가치관을 형성한 것이다. 동양인들은 말 잘하는 자를 평가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소피스트를 공자는 기피한다. 이인 편에서 공자는 이와 같이 말한다: 오직 인한 자래야 사람을 미워할 자격이 있다(4-3). 무엇을 미워하는가? 그것이 바로 교언영색인 것이다.

공야장에 보면 혹자가 공자의 제자 염옹을 평가하여 그는 인하되 말재주가 없다(불녕)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공자는 얼굴을 붉히며 분노하며 상기된 모습으로 외친다: 그 놈이 인한 지는 내가 알 바 없으되 도대체 말재주라는 것을 어디에다 써먹겠는가(5-4). 영옹이 인하다는 것을 공자는 함부로 허여할 수 없다. 인은 너무도 본직적인 인간의 덕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세속적 평가에 있어서 그가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은 인함(인)과 말재주 없음(불녕)이 이에 의하여 같이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인한 자가 말재주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인하다고 평가를 하는 동시에 말재주가 없다로 하는데 대한 유감을 표명할 수 있는가?

도대체 말재주(녕=교언)를 어디다 써 처먹겠다는 거냐! 이 바보 머저리 같은 놈들아! 그렇게도 내가 말하는 인의 의미를 못알아 듣느냐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명저 트락타투스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내고 있다.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remain silent.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 지어다.

전통적으로 이 말은 매우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즉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말하게 하기 위하여 말할 수 없는 세계를 배제시키고자 하는 반형이상학적(anti-metaphysical) 명제로 비트겐슈타인을 오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나의 궁극적 관심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 써 놓은 것이 아니라 여기에 쓰여질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여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신비롱누 것이다. 내가 말하는 우주는 사실의 체계뿐 아니라 가치의 세계를 포괄한다. 상징적 표상의 세계뿐만 아니라 신비적 직관의 세계까지를 포섭하는 것이다. 그는 침묵의 세계를 배제하려 노력한 것이 아니라, 침묵의 세계를 보전하기 위하여 말할 수 있는 세계의 한계를 명료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자는 그의 주장은 말할 수 없는 세계를 묵살하려 함이 아니요,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현묘한 세계를 더욱 현묘하게 인식하려는 것이다. 공자가 교언영색을 혐오한 것은 바로 공자가 말하는 인의 세계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침묵의 세계에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교언영색의 혐오는 공자의 사상의 가장 근원적인 기저를 형성하는 것이다.

집주        교, 호 ; 영, 선야. 호기언, 선기색, 치식어의, 무이열인, 즉인용사이본심지덕, 망의. 성인, 사불박절, 전언선, 즉절무가지, 학자소당심계야.      정자왈: 지교언영색지비인, 즉지인의.

1-4. 증자왈: 오일삼성오신, 위인모이불충호? 여붕우교이불신호? 전불습호?

1-4. 증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날마다 세가지로 내 몸을 돌이켜 본다. 남을 위해 도모함에 충성스럽지 못하지 않았나? 벗을 사귐에 믿음직스럽지 못하지 않았나? 가르침 받은 것을 익히지 못하지 않았나?

도주     증자는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보다 46세 연하의 사람이다. 그러니까 공자의 말년의 제자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아버니 증석(증절)이 공자의 제자였음으로 그러한 연줄로 인해 자연스럽게 제자가 되었을 것이지만. 안연이 그의 부친 안로와의 인연으로 공자와 사제의 정을 맺은 것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 한다. 증자는 결코 공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공자 자신에 의하여 중요하게 언급된 바가 없다. 공자가 말년에 잠깐 가르쳤던 인물인 것 같다. 공자가 선진 편에서 손꼽은 사과십절의 명단에도 끼어있지 않다. 공자는 그가 좀 아둔한 인간이라고 가볍게 평했을 뿐이다.(삼야, 노. 선진 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자는 논어 속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효경의 저자로서 유교학사에서 매우 중후한 인물로 다루어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파라독시칼한 현상의 배면에는 모종의 역사적 음모나 유전의 획책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태백편 3장에서 7장까지 증자에 대한 기술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을 보아도 여기서 우리가 받는 증자에 대한 성스러운 느낌은 전혀 공자와는 무관한 사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공자가 죽고 난 멀고 먼 훗날에 증자의 제자들이 증자를 추념하여 쓴 것으로 단지 논어에 삽입된 것이다. 증자의 제자들은 증자를 공자 이상으로 중후한 인물로서 다루고 있고 논어를 읽는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증자가 성인인 것처럼 인식을 강요당하게 된다. 태백 3~7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공자의 사후에 어느 일정기간 증자가 노나라의 공자교단을 확고하게 리드했다는 사실이며, 그 공자-증자 교단 속에서 자사가 교육되었고, 또 자사의 문하에서 맹자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맹자는 곡부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추현(추) 지방의 사람이다. 맹자는 청년시절 한 때,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자사도 죽고 없었다. 맹자는 자사의 문하생에게 배웠던 것이다. 따라서 맹자의 증자에 대한 존경심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권위 때문에 후대에 증자는 효경의 저자로서 추앙되었을 것이다. 증자가 효와 관련된 어떤 덕성의 구현자로서 그 역사적 이미지가 구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효경이라는 문헌의 저자라는 사실을 확보하지는 않는다. 효경은 려씨춘추에 그 구절들이 정확하게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려불위의 시대 이전에 서무로서 확실하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효경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그것은 대강 전국말기에 성립한 것으로 간주된다. 전국말기에 증자 계열의 학자의 손에 의하여 집필되었을 것이다. 증자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본격적인 평은 잠깐 뒤로 미루고 우선 본문을 세밀히 검토해보자!

우선 오의 용법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일삼성오신에서 오는 주격과 소유격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둘 필요가 있다. 일은 날마다 매일매일 의 뜻이다. 항상(always)의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삼은 세가지로 라는 뜻으로 다음에 이어지고 있는 세개의 주제를 나타낼 수도 있고, 하루에 세번(삼차)의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위인모이불충호? 의 호는 의문스럽게 반추하는 느낌을 나타내기 위하여 구말에 붙인 조사로, 현대 중국어의 마와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문제는 가장 끝 구절이다. 전불습호? 의 해석은 다양한 가능성이 생겨난다. 불충호,불신호, 불습호 라는 말구의 패러랄리즘을 존중한다면 일단, 전과 불습 사이에는 이가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전불습호의 해석은 다음의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1. 내가 남에게 전한 것을 내가 익히지 않고 있지는 아니한가?
2. 내가 남에게서 가르침으로서 전하여 받은 것을 익히지 않고 있지는 아니한가?

즉, 전한다는 행위의 주체를 누구로 설정하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본문을 해석하는데 있어 제 2의 뜻을 따랐다. 주자는 전을 수지어사로, 습을 숙지어기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다산도 주자를 따랐다. 1의 해석은 인제가 따르고 있다.

그러나 불습호의 윗문장과의 패러랄리즘을 존중치 않고 전과 불습사이를 그냥 접합시킬 경우 또 다른 두가지의 해석이 생겨난다.

3. 내가 익히지도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4. 전(고전)을 익히지 못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3의 경우 전은 동사가 되며 불습은 전의 직접목적이 된다. 그리고 4의 경우는 전이 명사화되어 습이라는 동사의 목적이 된다. 전은 전하여 내려온 것의 뜻으로 공자시데에 존재하던 고전의 의미가 될 수 있다. 상기의 네 해석이 어느 것도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시카와(길천)는 제 3의 해석을 따랐다. 나는 주자의 해석이 가장 부드럽다고 생각되었다.

우선 이 절의 증자의 말은 매우 유치하다. 삼성이라는 말이 한자 문화권에서 출판사 등의 로고로 쓰일 만큼 일반에게 잘 알려진 말이지만, 하루에 세번이라든가 하루에 세가지로 라는 등의 표현은 꼭 유치원 생도를 가르치기 위해 짜여진 것과도 같은 정격화된 형식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논어 전체를 통해 숫자의 카테고리에 의하여 표현된 논어들은 거개가 모두 후대에 날조된 것이다. 논어의 파편 중에서 거의 모두가 후대에 성립된 것이다. 일예를 들면 양화 8에 공자가 자로에게 육언육폐를 말하는 따위의 구절들은 참으로 구역질나는 후대의 날조임이 너무도 명백하다. 그 도식적 내용에는 전혀 공자의 생생한 사상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여기 삼성 운운하는 것도 고자의 사상과는 무관한 후대의 형식화도니 첨유의 사고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인간이 하루에 세가지만 반성함으로써 그 인함이 달성될 수 있으리오? 마치 중고생이 책상머리 방학계획표에 몇 가지 도식을 그려놓고 실천한다 하다가 하나도 하지 못하고 마는 차원의 이야기 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진사이(인재)가 이 구절을 평하기를 고인들이 말하는 수신이란 후세의 사람들이 외계와 단절된 상태에서 홀로 허령한 사유에만 빠지는 것과는 달리, 타인과의 관계에서 모하고 교하고 전하는데서 달성되는 것임으로, 이 구절은 증자 말년의 가언선행의 대표적 표현으로 높게 평가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진사이 역시 고학을 말하면서 논어의 본질에는 접근치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의 사상은 충, 신, 습의 삼성이라고 하는 도식적 이해로는 도저히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증자 사상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며, 그가 공자사상의 본질에 접근치 못한 아웃사이더에 지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증자가 하루에 세가지로 반성한다는 이야기나, 예수가 베드로에게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마가 14:30) 한 이야기나, 예수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 2:19)한 이야기가 모두 후대의 설화적 양식에 불과한 것이다. 다산이 주자의 말을 빌어 삼성, 고비성인지사(세번 성찰한다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도무지 성인 차원의 일이 될 수가 없다. 논어집주대전)라고 한 것도 무언가 이 구절에서 불안감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인 15에서 공자가 증삼에게 오도는 일이관지라 하니 삼의 이에 긍정을 한 후, 공자가 나간 후에 (자출), 문인이 그 대화의 내용을 증자에게 묻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 증자는 대답한다.: 부자의 도는 충노일 뿐이다. 이 유명한 구절 때문에 공자 사상을 일이관지하고 있는 것은 충노일 뿐이라는 유교의 대논쟁이 두 밀레니엄 이상을 지속되어 왔고, 그 논의의 주체세력으로서의 증자의 권위는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 이인의 구문은 분명한 후대의 날조다. 전혀 공자의 삶에서 이루어진 대화일 수가 없다.

우선 공자가 증자를 부르는 말은 삼(애명)으로 되어 있는데 그 전체적 기술은 모두가 증자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증삼을 증자(Master Zeng)로 높여 부르는 증자계열의 교단에서 기록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증자에게 공자와의 대화의 내용을 물은 문인은 공자 당대의 타제자라기 보다는 역시 증자의 제자가 될 수 밖에 없다. 황간은 소에서 이 일이관지의 대화는 공자가 증자집을 방문했을 때 이루어진 것이며, 자출이라 한 것은 공자가 증자의 집의 문을 나섰다는 의미녀, 문인문왈이란 증자의 집에 남아 있던 증자의 제자들이 그 내용을 되물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문인이 증자의 제자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형병의 소도 그 입장이 동일하다.

그렇다면 이미 공자가 살아 있을 때 증자가 문인을 거느리는 독립된 교단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은 도무지 어불성설이다. 증자는 공자의 문하에 들어온지 몇 년 되지도 않았고 당시 20대 초반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증자로 불릴 수 있는 하등의 위치를 확보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공자와 그렇게 중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공자의 사상을 일이관지(일관)하는 것이 곧 충노라 한 것은 후대의 증자학파의 전화된 공자인식을 나타내는 한 전형이다. 공자의 사상은 근원적으로 충노 따위로 논의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인 편에서 말하는 충노의 충과 여기 학이편에서 말하는 위인모이충의 충은 결국 동일한 후대 증자학파의 인식체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서의 충은 아직 군신관계에 있어서의 충성(loyalty)의 의미로 전화되어 있지는 않다. 논어에서 충이 거론되는 대목을 전부 일별해보아도 그 충의 의미는 역시 내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됨(truthfulness) 정도의 개인 내면의 실존적 가치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증자가 지었다고 하는 효경에 오면 사태는 일변한다. 효경은 1장에서 6장까지가 전반을 형성하고 그 나머지 7장에서 18장까지가 후반을 형성한다.(금문경은 18장으로 구성되고 고문경은 2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인 전반부의 장이름만 일별해 보아도 그 구성이 얼마나 정치적인 위계질서속에서 공자의 사상을 틀지우고 있는가 하는 것을 쉽사리 간파할 수 있다.

제일 : 개종명의장
제이 : 천자장
제삼 : 제후장
제사 : 경대부장
제오 : 사장
제육 : 서인장

제 1장의 개종명의란 뜻은 효경의 종지를 열고(개), 오효의 대의를 밝힌다(명)는 뜻으로 총론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총론에서 이미 효의 시는 사친이요, 그 중은 사군이요, 그 종은 입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사친의 효를 철저히 사군의 충으로 전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효의 시작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사친)이지만, 그 종국적 존재의의는 입신이다. 입신이란 곧 정치적 출세를 말하는 것이다. 정치적 출세란 곧 그 이름을 후세에 날리어 부모을 영예로운 이름을 역사에 드러내는 것이다.(양명어후세, 이현부모.) 우리나라의 모든 지식인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하거나 정계에 나가 장관 한 자리라도 해먹고 죽을려는 사유의 원형이 모두 효경의 개종명의에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효는 다섯 레벨이 있다. 즉, 천자의 층차, 제후의 층차, 경대부의 층차, 사의 층차, 서인의 층차가 있는 것이다. 이 다섯 층차를 관통하는 일관된 덕성이 곧 효이다. 이미 효는 논어에서 말하는 일개 덕목이 아니라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는 정치적 세계 전체를 일이관지하는 근원적인 이념이다. 그 핵심을 구성하는 사의 효를 보면 이와 같은 말이 있다.

고이효사군즉충, 이경사장즉순. 충순부실, 이사기상. 연후능보기작록, 이수기제사. 개사지효야.

그러므로 효로써 임금을 섬기면 충하고 경으로써 윗사람을 섬기면 순하다. 충순함을 잃지 않으면서 윗사람을 섬겨야 한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사(선비)는 그 작위와 봉록을 보전할 수 있으며, 제사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의 효다.

여기서 핵심적인 말은 효가 사군으로 전화되어 있으며, 그것이 곧 충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충에는 중심(표심)이라고 하는 논어의 원래적 의미가 사라져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충은 다시 순(순종함)이라는 말로 재해석되고 있다. 사의 최고 덕성은 효에서 충순으로 전화되고, 이 충순이야말로 작록(직위와 봉급)을 유지하는 최대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집안의 제사를 이어갈 수 있는 전통의 고수자가 된다는 것이다. 공자사상이 우리나라 조선왕조에서 이해된 핵심적 틀은 논어에서 제공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효경인 것이다. 왜 13경 중에서 유독 효경만이 경의 타이틀을 당초로부터(아마도 한대로부터) 보유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하다. 한왕조가 공자사상을 국가종교(state religion)의 이념체계로서 활용하기 위하여 그 효를 절대시하는 과정에서 효경은 태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의 대세를 미리 간파한 증자 계열의 학파에서 이미 전국 말기에 효경의 텍스트를 성립시켰다.

증자는 효와 충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증자가 논어에서 비중있는 인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은 맹자가 자사-증자 계열을 존숭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기 보다는 전국말의 유가에서 충효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기 위한 음모로서 철저히 증자의 이미지를 재구축시켰고, 그렇게 구축된 이미지에 따라 증자 설화가 날조되었고, 그 권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날조된 설화들이 논어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논어의 증자관계의 모든 파편은 그러한 후대의 윤색의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증자 설화의 왜곡때문에 공자사상이 충노 따위로 왜곡되는 비극이 초래된 것이다. 공자의 진실 위에 증자의 이데올로기가 덮어 씌워진 것이다. 이로써 유교는 철저히 정치화되어 갔다. 그러나 공자는 정치 자체를 유교화하고 도덕화하려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할 작업은 증자라는 역사적 인물이 과연 어떤 인간이었나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다.

사마천의 중니제자열전에는 증자에 관한 기록이 놀라웁게도 간략하게 적혀있다.

증삼, 남무성인, 자자여. 소공자사십육세. 공자이위능 통효도, 고수지업. 작효경. 사어노.

증삼은 남무성 사람이다. 자는 자여이다. 공자보다 46세 연하이다. 공자는 그가 효의 길에 능통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는 효경을 지었다. 노나라에서 생애를 마치었다.

우리가 보통 중니제자에 관해 상고할 때 대표적인 문헌으로서 사기 권육십칠의 중니제자열전과 공자가어 제삼십팔편의 칠십이제자해를 든다. 문헌의 성립연대로 본다면 물론 사기가 공자가어보다 앞선다. 가어는 위 왕숙(AD 195~256)의 위작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가어의 내용이 기존의 서물에 있는 공자관련기사와 그가 공자 22세손인 공맹으로부터 얻은 가전의 서에 기초했다고 보는 만큼 위작의 의미를 날조로 간주할 수는 없다. 위작이지만 전거가 있는 것이므로 위작의 내용이 왕숙시대의 소산은 아니다. 사기의 제자열전과 사기의 제자열전과 가어의 칠십이제자해는 모두 공씨 집안에 내려오던 제자적이라는 어떤 문헌에 기초하고 있다고 사료되는데, 사기와 가어를 비교해볼때, 오히려 후대의 왕숙작품이 그 원사료인 제자적의 모습을 보다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고 있다고 추론된다. 사기 열전은 가어 제자해를 논어의 관련기사와 사마천 자신의 풍부한 역사적 지식에 기초하여 가감한 느낌이 든다. 가어 제자해가 훨씬 더 간결하고 오리지날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증삼의 경우 가어 제자해에는 열전에 생략된 재미있는 고사들이 붙어있다.

남무성은 당시에 북무성도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무성은 지금 산동 비현 서남 90리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인데 그곳이 바로 공자의 제자인 자유가 성재를 지냈던 곳이다. (옹야12, 양화 4) 그 근처에 있는 비읍도 계씨의 본거지로서 공산불요가 한 때 그 곳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 공자를 부르려 한 적이 있고, 자로가 삼환의 무장을 해제시키려고 했을 때 주요활동 무대이기도 했고, 또 자로가 자고를 비읍의 읍재로 삼었다는 이야기가 선진 24에 나오고 있다. 계씨가 민자건을 비재로 삼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옹야 7에 나온다. 하여튼 이 지역이 공자의 교단과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러한 코넥션으로 증자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부상했다는 추측도 가할 수 있다. 효경에 관하여는 가어 제자해의 언급이 열전과 약간 다르다.

지존효도, 고공자인지이작.  효경

그 사람됨의 뜻이 효도를 보존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증자 때문에 효경을 짓게 되었다.

제자열전에는 증자가 직접 효경을 지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제자해에는 증자에게 촉발받아 공자 자신이 효경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현존하는 효경에도 공자가 어린 증삼을 앞에 앉혀 놓고 훈시하는 것을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마천은 제자해의 기록을 왜곡하여 전한 것이다. 증자가 효경의 저자라고 하는 사마천의 당대의 통념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증자가 노나라에서 태어나 노나라에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노나라에서 줄곧 살면서 공자교단의 적통을 이었다는 스토리가 입증된다. 그는 아마도 맹무백의 아들인 맹경자의 후원을 얻어 공자교단을 이끌어 갔을 것이다.(태백 4) 그리고 증씨는 원래 증이라는 나라의 후손들인데 양공 6년에 거가 증을 멸망시키자 노나라로 이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시외전에는 증자가 한때 월나라에 가서 높은 벼슬(존관)을 하고 구인이나 되는 고당에서 으리떵떵하게 살았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사기 열전 정의) 그런데 가어 제자해에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증자의 삶에 관한 중요한 정설로 실려 있다.

첫번째 고사는 제나라가 그를 초빙하여 경(대부와 같은 급이지만 대부보다 더 존귀한 자리, 즉 식읍이 부여된다)으로 삼으려 했던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제나라로 가기를 거절한다. 그 이유인 즉:

오부모노, 식인지록, 즉우인지사, 고오불인원친이위인역.

내 부모님이 연로하신데 남의 녹을 먹으면 남의 일만을 걱정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차마 부모님을 떠나 남 심부름일 하는 짓은 못하겠다.

두번째 고사는 그의 계모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그의 계모가 심지가 고약한 악모였던 모양이다. 그를 항상 박대하였다. 그러나 증자는 계모의 박대에도 불구하고 계모를 극진하게 모시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삼후모우지무은, 이공양불쇠.)

그런데 증삼의 실상을 전달해주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는 다음의 세번째 고사인 것이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고급 중국음식점에 가면 배(이)를 푹 삶어 내어놓는 맛있는 요리가 있다. 담을 삭히는데 좋은 요리라 한다. 그런데 이런 요리의 역사가 꽤 오래된 모양이다. 증자의 시대에도 가정식탁에 오른 요리였던 것 같다. 어느날 증자는 부인에게 배찌는 요리를 부탁했다. 그리고 요리할 때 반드시 푸욱 익히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그 부인이 배를 푸구 익히지 않았다. 그러자 증자는 화가 나서 부인을 내쫓아버렸다.(옛날에는 이혼의 개념이 이렇게 남성일방적인 것이었다. 급기처이이증불숙, 이출지.)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항의를 했다.

당신 부인은 칠거지악을 범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사소한 일로 매정하게 내쫓을수 있소?(비칠출야)

그러자 증삼은 이런 항의에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배를 찌는 일은 작은 일에 지나지 않소. 나는 그 배를 잘 익혀 달라고 당부했소. 그런데도 그 여자는 내 명령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소. 그렇다면 이렇게 작은 일에도 내 말을 듣지 않는데 큰 일에는 어떠하겠소?(이증소물이. 오욕사숙, 이불용어명. 황대사호!)

그리고는 주위의 만류도 듣지 않고 결국 부인을 내쫓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죽을때까지 부인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증삼의 아들 증원이 재취를 할 것을 청원했다. 그러자 증삼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은나라의 고종은 후처때문에 효심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주나라 선왕의 대신이었던 윤길보는 후처때문에 자기 두째 아들 백기를 내쫓고 말았다. 나는 위로는 고종에 못미치고, 중간으로는 길보에도 비견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 내가 그와 같은 잘못을 또 안저지르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고종이후처살효이, 윤길보이후처방백기. 오상불급고종, 중불비길보. 용지기득연우비호?)

사마천은 이 고사가 증자의 이미지에 손상이 간다고 판단되어 중니제자열전에서 빼버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고사야말로 증자라는 한 인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전달하는 위대한 고사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냐 아니냐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문제는 이러한 설화에 나타나고 있는 증삼의 자기인식구조와 당대 사람들의 증삼이라는 인격체를 파악하는 인식구조,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남존여비의 시대라고 하지만 무뢰한 계모에게는 무조건 충성을 다하고, 자기를 떠받들고 애까지 낳은 양처에게는 요리하나 잘못했다고 내쫓아버리는 그 인식구조가 증자라는 인격체가 상징하는 효라고 한다면 그러한 효의 개념의 정합성, 즉 인테그리티(integrity)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백호통 에 이 고사를 비꼬아 말하기를: 그렇게 작은 일로 마누라를 내쫓는데 세상 어느 구석에 증사 마누라 노릇할 여자 있겠나! 그놈의 계모는 그렇게 무은무의하건만 증삼이 그렇게 극진히 섬겼으니 증삼 계모해먹기는 정말 누워 떡먹기로다!

이것은 분명 남존여비의 시대정신이나 봉건시대의 관습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증자라는 인격체의 성스러운 모습이 얼마나 조작된 것인가? 아마도 이 고사는 우리의 조작된 관념과 역사적 인격체의 실상과의 괴리감을 잘 나타내주는 명고사 중의 명고사인 것이다. 이러한 인테그리티(integrity)의 결여를 공자가 노둔한 놈(삼야, 노.)이라 평한 것은 매우 적확한 평가였던 것이다. 이를 후대의 주석가들이 미화시켜, 증삼은 비록 아둔한 사람이었지만 그러한 아둔함 때문에 오히려 효성이 지극할 수 있었고 공자사상의 적통을 이었다고 극찬한 것은 모두 논어라는 텍스트 그 자체의 오독에서 초래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맹자시대에 맹자가 인식한 증자라는 인격체의 문제점을 한번 다시 살펴보자! 맹자 이루 상 18에 사친이 사지본이요, 수신이 수지본이라 역설하면서 증자가 그의 아버지 증석을 모시는 고사를 이례로 들어 설명하는 장면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이루 편의 언어는 나에게는 그렇게 석연하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여튼 그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우리가 어릴 때는 큰방에서 식구가 다 함께 먹는데, 아버지는 진지상을 따로 독상으로 받아 잡수셨다. 물론 아버지 진지상에는 식구가 삥 둘러앉아 먹는 큰상에 오느를 반찬보다는 귀하고 좋은 것들이 올라갔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가 진지를 다 잡수시고 그 상을 물릴때의 상황이었다. 남은 잔반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 먹을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와 유사한 상황을 전제로 해서 이 일화를 읽어야 할 것이다.

증자는 그 아버지 증석을 봉양하는데 그 진지상에는 반드시 술과 고기가 올라갔다.(증자양증석, 필유주육) 그런데 아버지가 증석이 진지를 다 잡수시고 상을 물릴 때, 증자는 상을 들고 나오면서 꼭 아버지께 여쭈었다: 이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줄까요? (장철, 필청소여.)

그리고 때때로 아버지 증석은 증자에게 묻곤 하였다.: 아직도 더 먹을 여분이 있느냐? 이럴 때, 비록 남은 음식이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증자는 반드시: 네 있습니다.(문유여, 필왈유.)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증석이 죽고 이제는 증자의 아들 증원이 증자를 봉양하는 상황이 되었다. 증원이 증자가 진지상을 올릴 때도 반드시 술과 고기는 있었다. 그런데 증자가 진지상을 물릴 때, 그 아들 증원이는 증자가 하던 것과는 달리, 잔반이 있어도 그것을 누구에게 줄까요 하고 묻는 적이 없었다.(증석사, 증원양증자, 필유주육. 장철, 불청소여.)

뿐만 아니라 증자가 증원에게 아직도 남은 음식이 있느냐고 물으면 증원이는 반드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문유여, 왈망의.)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증원이는 음식을 옹고로시 남겨두었다가 증자 진지상에 다시 올릴 생각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원의 태도는 증자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 아구창과 몸뚱이만 모실려고 하는 태도라는 것이다.9장이복진야. 차소위양구체자야.) 이에 비한다면 증자가 증석을 모시는 태도는, 아버지 증석의 기분과 주변상황을 다 고려한 것으로, 그 뜻을 모시는 태도라는 것이다.(약증자, 즉가위양지야.) 증원의 효는 단지 몸뚱이만을 멕이려는 물질적인 효였고, 증자의 효는 아버지의 모든 상황을 고려한 정신적이고도 고차원적인 효였다는 것이다. 논어 위정 7에 자유가 공자에게 효를 묻는 대목이 있다. 이때 공자가 말하기를, 요새 효라는 것은 멕이는 것만 장땡으로 아는데, 개나 말도 멕이기는 마찬가진데, 경함이 없다면 도대체 뭐가 다르겠냐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아마도 맹자가 말하고 있는 증자의 고사는 이러한 논어의 정신을 발현한 어떤 설화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바로 맹자에게 있어서 존경하는 스승 증자의 효성스러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고사가 바로 이 이루 상19의 이야기라고 할때 도대체 증자의 효라는 것이 이렇게 진지상을 둘러싼 프로토콜상의 번쇄하고도 말초적인 형식,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비판을 우리는 안심하고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맹자 시대에 존속된 증자의 효의 일화도 이러한 의례적인 사소한 형식을 반영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소한 의례적 행위에도 물론 깊은 인간의 마음이나 정감이 표현되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우리에게 어떤 은은한 감동이나 드라마틱한 감격을 전달해주는 바가 없다.

이루 하 31에는 또 하나의 재미난 고사가 실려있다.

증자가 큰 스승이 되어(공자교단의 리더가 되어) 자기의 고향인 무성에 돌아와 잠깐 거할 때의 일이었다. 무성의 사람들은 성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증자를 극진하게 대접하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때마침 월나라로부터 도둑떼가 침략하여 들어왔다. 그때 무성의 시자가 말하였다: 떠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증자는 사양하지도 않고 말했다: 암 떠나구 말구. 그리곤 집은 지키는 사람에게 엄명을 내리는 것이었다. 내가 이 집에 없을 동안 어떠한 사람도 여기 들어와 살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풀 한포기도 나무 한그루라도 다치지 말게 하여라(무우인어아실, 훼상기신목.)

그리곤 얼마 있다가 월나라 도둑떼가 물러나려 하자 피난가있던 증자는 무성사람에게 전갈을 보내었다: 우리집 담장과 기와를 잘 수리하여라. 내가 곧 돌아가리라.(수아장옥, 아장반.)

그리고 도둑떼가 완전히 물러나자 증자는 유유히 돌아왔다. 그런데 이러한 증자의 모습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매우 얌체짓거리처럼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좌우의 제자들이 증자에게 간언하였다.: 선생님! 여기 무성사람들은 선생님을 극진하게 모시기를 충성스럽게 하고 또 공경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적국의 도둑떼가 몰려오자 선생님께서는 먼저 잽싸게 피해 도망가시었고 백성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도둑떼가 물러나니까 비로소 유유히 돌아오셨습니다. 뭔가 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선생, 여차기충차경야. 구지즉선거, 이위민망. 구퇴즉반, 치어불가.)

그러자 그 중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심유행이 증자를 변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네들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닐쎄! 옛날에 선생님께서 우리 심유씨 동네에 머문 적이 계셨네. 그때 우리 동네에 가을 수확을 도둑질해가는 도둑떼가 몰려들었네. 그때 선생님을 모시고 있던 제자들이 70명이나 되었는데 한 사람도 그 재난에 간여하여 싸운 사람이 없었네.(침유행왈: 시, 비여소지야. 구, 침유유구퇴지화, 종선생자칠십인, 미유여언.)

그런데 자사가 위나라에 거할 때, 제나라로부터 도둑떼가 침략해온 적이 있었다. 이때 주변 사람들이 자사에게 여쭈었다: 도둑떼가 몰려오니 피난을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혹왈: 구지, 합거제?) 그러자 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도망가다니 만약 내가 떠나면 임금께서는 이 땅을 누구와 더불어 지키실 수 있겠는가?(자사왈: 여급거, 군수여수?)

물론 증자와 자사의 태도는 동일한 사태에 대하여 매우 대조적이다. 증자는 비겁했고 이기적이었고 고답적이었고 형식적이었다. 그런데 자사는 용감했고, 남의 입장을 생각할 줄 알았고, 긴박한 상황을 대중과 더불어 해결할려고 노력하였다. 증자와 자사의 이러한 대조적 모습에 우리는 과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맹자는 이에 대해 무리하게 증자를 옹호하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외관적으로 이 두 분의 행위는 매우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 같은 원칙 위에 서 있다. 증자께서는 당시 스승이요 부형과 같은 입장에 계셨다. 그런데 자사는 단지 신하였을 뿐이요, 미천한 존재였다. 그러니 행동방식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이 두 분이 서로 입장이 바뀌었다면 두 분 다 동일한 행동을 하셨을 것이다.(증자자사동도. 증자, 사야, 부형야. 자사, 신야, 미야. 증자자사역야, 즉개연.)

과연 우리는 이러한 맹자의 판결을 증자의 행동에 대한 정당화로서 받아들이리 수 있을 것인가? 왜구의 침략을 피해 의주로 도망가는 임금 선조의 행차가마에 우리 민중들은 돌을 던졌다. 과연 임금도 아닌 일개 학자가 극진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월구를 피해 도망가는 모습을 무성의 사람들은 과연 경외롭게 바라보았을까? 그러면서 그 피난통에도 내 집엔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도 건들지 못하게 하나 고 엄명을 내리는 증자의 모습을 과연 우리는 효의 휴매니스트적 전범으로서 기릴 수 있을 것인가?

여기 우리가 분명히 생각해야 할 것은 이미 맹자 시대에 전달된 증자의 일화들은 맹자가 구구한 변명을 일삼아야 할 정도의 구질구질한 이야기 밖에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신화화 되어버린 위대한 인물들의 역사적 실상에 대한 통찰은 비단 그 인물을 깎아내리는 효능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통찰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정보들에 대한 총체적 조감을 새롭게 감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공자말년의 제자들, 공자의 유랑의 장정의 고난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한 적이 없는 어린 세대들은 공자의 인간내면의 핵심적 생각들을 파악할 길이 없었다. 그들에게 공자는 이미 너무도 멀리 있었다. 그들은 이미 신화화 되어버린 공자의 형해만을 쫓고 있었다. 공자의 사상은 안회와 더불어 죽은 것이다. 증자의 효행은 공자의 인의 지극히 협애한 일면만을 포착한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증자의 문인들에 의하여 증자의 효에 대한 생각은 점점 형식주의적으로 윤색되어갔고 그것은 결국 곡례 스타일의 제식으로 고착화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종교적인 충효의 사상으로 비약의 전기를 맞는다. 아마도 콘스탄티누스대제(280~337)의 기독교 신앙의 공인(the Edict of Milan, 313년)이나, 한무제가 유술을 독존한 것이나 우리는 보편사의 문제의식속에서 동일한 성격의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해야 할지도 모른다.

집주            성, 실정반. 위, 거성. 전, 평성.           증자, 공자제자, 명삼, 자자여. 진기지위충, 이실지위신. 전, 위수지어사; 습, 위숙지어기. 증자이차삼자, 일성기신. 유즉개지, 무즉가면. 기자치성절, 여차, 가위득위학지본의. 이삼자지서, 즉우이충신위전습지본야.           윤씨왈: 증자수약, 고동필구제신. 사씨왈: 제자지학, 개출어성인, 기후유원이유실기진. 독증자지학, 전용심어내. 고전지무폐, 관어지사맹자, 가견의. 석호! 기가언선행, 부진전어세야. 기행존이미민자, 학자기가부진심호?

1-5. 자왈: 도천승지국, 경사이신,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1-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천수레의 나라를 다스릴 때는 매사를 공경스럽게 하여 믿음이 가게하며, 쓰임을 절도있게 하며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백성을 부리는 데는 반드시 때에 맞추어 한다.

도주      옛날에는 지식인의 당연한 임무는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정치에 참여한다 하는 것을 요즈음 논어를 읽는 많은 사람들이 장관자리에 앉거나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공자의 시대에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오히려 요새말로 하면 국방의무를 다한다 는 뜻에 더 가까운 의미로 새겨야 할 것이다. 공자의 시대는 기본적으로 전쟁국가시대였다. 작은 성읍간에 잦은 전쟁으로 인민이 시달림을 받던 그런 시대였다. 정치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전쟁이었다. 따라서 공자의 말씀으로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빈번한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조금도 어색한 일이 아니다. 그 처서 이야기가 학이 편의 다섯번 째 장에 나오고 있는 것이다. 브룩스는 이 장을 양화 편 뒤로 옮겨 놓고 있는데 나는 그 필연성을 찾을 수 없다.

공자세가에는 공자가 35세 전후에 제나라에 갔을 때, 제나라 경공을 만나는 장면에서 이 장과의 관련성을 시사하는 이야기가 한 대목 나오고 있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물었을 때, 공자가 한 대답은 군군, 신신, 부부, 자자. (안연 11)였다. 즉 제나라의 정치가 명분에서 이미 어그러져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경공이 공자의 이러한 지적에 크게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자 공자는 물러났다. 며칠 있다가(타일) 경공은 공자를 다시 불러 정치에 관해 또 묻는다. 그 때 공자가 한 유명한 대답이 다음의 한 마디다.

정재절재.
정치란 재화의 쓰임새를 절도있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공자가 제나라의 경제구조가 너무 대국의 소비지향적인 낭비에 빠져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경공은 감명을 받아 공자를 이계에 봉하여 대부로 삼으려 한다. 이때 법가 계열의 제나라 재상인 안견이 가만히 좌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안견의 혹독한 비판으로 공자는 출세의 기회를 좌절당한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공자의 정치적 입장, 특히 경제를 바라보는 그의 생각이 정재절재 이 한마디에 압축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세가의 절재와 이 장의 절용은 같은 뜻이다. 아마도 세가의 논의를 따른다면 이 장은 공자가 제나라에서 한 말로 비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천승지국은 제나라가 될 것이다. 일승은 말이 네마리가 끄는 병차다. 천승이면 말이 4천마리가 된다. 계씨 12에는 제경공이 말 4천마리를 소유하였다는 이야기가 명기되어 있다.(유마천사)

그리고 한 수레에 말모는 사람이 한 명, 활 쏘는 사람이 한 명, 그리고 모과등의 장예 병기를 휘두르는 사람이 한 명, 도합 3명이 타게 된다. 그렇다면 천승이면 수레인원만 해도 3천명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보병과 치중대를 어떻게 편성하냐에 따라 그 숫자는 천문학적 숫자로 늘어난다. 공자시대에는 보병의 위치가 전쟁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 전차당 보병이 10명 정도 할당되고, 춘추말기, 전국시대로 내려올 수록 그 숫자는 불어나서 약 70~100 명 정도는 되었다고 본다. 손자 작전편에 보면, 전차 천승이면, 치중차가 천대, 그리고 무장군인 보병이 10만명(대갑십만)이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마어마한 편제인 것이다. 그런데 실상 천승지국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보유의 최대규모를 말한 것이며 실제 전쟁에 천승이 동원되는 상황은 흔치 않았다. 춘추 시기에는 대국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병차 천승을 구비하지는 못했다. 좌전 희승 28년조에 기재되어 있는 성복의 전쟁에도 진문공이 칠백승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도 전쟁이 점점 빈번하게 일어나 병탄의 현상이 생기면서 전차보유대수는 급속히 불어났다. 같은 진국이 평구의 회맹에 이르렀을때 숙향의 말에 의하면 이미 사천승을 보유하고 있었다.(좌전 소공 13년) 따라서 공자의 시대에도 이미 천승지국이 꼭 대국만을 의미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선진 25의 그 유명한 증석의 무우영귀의 장에 자로가 천승지국이 대국 사이에 끼어 죽을 못쓰는 형편인데(천승지국, 섭호대국지간.) 운운하는 것을 보아도 천승지국이 이미 대국 사이에서 압박을 받는 약소국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오히려 맹자 양혜왕 첫머리에 만승지국에 임금을 시해하는 반란자는 반드시 천승지가에서 나온다. 운운하는 시대상황을 반영함으로 오히려 역으로 무우영귀의 장이 이미 내가 도서에서 말한 바대로 후대의 조작이라는 것, 즉 맹자 이후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공자 시대에 이미 노나라의 정치규모를 천승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맹자 만장 하7에는 노나라의 무공이 자사와 맞먹을려고 같이 벗하자고 하니까, 자사가 섬긴다(사지)하는 말은 있을 수 있어도 벗한다(우지)하는 말은 있을 수 없다 하며 무공을 엿멕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노나라의 무공은 자신을 천승지국의 군주로 자처하고 있다. 자사의 시대에는 이미 노나라는 선승지국이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여튼 대체적으로 이 공자의 말은 천승지국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공자가 젊은 시대에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때의 발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카지(가지선행)씨는 이 밀을 공자가 대하구가 되었을 때의 그의 정강정책을 나타내는 언급으로 풀이하고있다.(공자 동경:집영사, 1994, p.147). 이것은 그가 노나라를 떠나 유랑의 가시밭길을 걷게 되는 거노의 이유와 맞물리는 언급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공자가 사구가 되어 감행한 정치의 기조는 노나라와 같은 소국의 실정에 적합한 농업공동체적인 에토스에 기초한 절약형 경제정책이었다. 노나라 정공과 계환자가 제나라에서 보내온 80명의 미녀와 문마 30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노나라가 공자의 절약혀 ㅇ경제정책을 거부하고 제나라의 소비형 경제정책을 받아들임으로써 공자를 실각시키는 정변을 일으킨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성사시킴으로써 급작스럽게 매판자본의 팽창주의적 일로로서 국가운영정책을 일변시킨 사건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태속에 공자는 실각되고 삼가의 공격을 받게 되어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 이 장의 마지막 두 구절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제도사적 사실을 발견한다.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여기 분명 인과 민은 분별되어 사용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은 국의 인을 말하는 것이요, 민은 야의 민을 말하는 것이다. 애인의 인은 국인이요 그들은 노나라의 도성내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강 사의 계층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서 서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본시 절약하는 사람들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살 한톨을 아끼는 사람들이다. 노나라의 경제의 문제는 바로 성내 즉 국중의 문제인 것이다. 국인들이 절약하는 생활을 해야만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공자가 절용의 에토스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국인, 즉 사, 즉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부패는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ㅇ다. 애인의 애는 본시 아낀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소구화된 의미에서의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다. 공자가 절용을 강조하는 대상을 곧 사이다. 그 대신 그가 아껴야 할 계층이 바로 사인 것이다. 사민이시의 사민은 주로 전역과 관련된 것이다. 민은 전차를 탈 수 없으며, 보병이나 치중대의 노역에 동원된다. 사민 즉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반드시 농한기를 틈타지 않으면 아니된다. 농번기에 전쟁을 일으키면 그것은 승리했더라도 패배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국고가 텅 비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장의 대강의 뜻은 공자라고 하는 고급관리의 입장에서 자기 이외의 세 계층을 대상으로 말한 멧세지나를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경사이신은 공자가 자기의 상관들에 대한 태도를 말한 것이다. 이 때 싸는 공무원으로서 수행하는 공무를 일컫는 것이다. 위령공 37에 사군, 경기사이후기식이라 했을 때의 사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사군에서 발생하는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은 반드시 공경되이 처리하여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이라는글자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이라는 의미 때문에 현대어에서 크게 왜곡된 글자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본시 말하는 믿음이란 싱앙이나 신조(Credo)를 말하는 것이 신험의 뜻이다. 즉 경험적으로 증명이 된다는 뜻이다. 즉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 신의 일차적 의미는 증험될 수 있는 것만 말한다. 는 뜻이다. 신은 영어의 Verification에 가깝다. Belief의 뜻으로 왜곡되면 안된다.

다음의 절용이애인은 고급관리로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아래의 사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사민이시는 사에 대하여, 밖에 사는 야인들을 함부로 괴롭히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멧세지  : 경사이선,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그 대상 : 제후와 대부,        사,       서인

소라이(조래)는 천승지국의 정치가 이 정도의 소략한 언급에서 끝날 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도를 도(치)로 해석치 않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아주 색다른 해석을 내렸다. 도는 문자 그대로 길낸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천자가 천승지국인 제후국들을 훈생할 때의 상황에 관한 몇가지 주의사항이라는 것이다. 일견 재미있는 해석이지만 이러한 해석은 곧 그가 본문 그 자체의 중층적 구조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할 뿐인 것이다. 조래는 논어를 도덕적 교과서로 읽어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선왕지도(sennonomichi)의 제도사적 측면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왕지도는 문명의 제도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육경에 요약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육경으로써 사서를 읽어야지, 사서로써 육경을 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사서는 송유가 생각하는 도덕의 표방이 아니라. 육경에서 구현된 선진의 제도문물으 표방이라는 것이다. 소라이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 고전세계에 있어서는 참으로 특이한 사회과학적 발상을 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정신을 고학(코가쿠, kogaku)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고학적 발상의 대부분이 지나치게 참신하여 대세를 포착하지 못하고 본의를 그르치고 있다. 지나친 창조성(originality)에의 충동은 때로 망발에 머물고 마는 우를 범한다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집주       도, 승, 개거성.            도, 치야. 천승, 제후지국, 기지가출 병차천승자야. 경자, 주일무적지위. 경사이신자, 경기사이신어민야. 시, 위농극지시. 언치국지요, 재차오자, 역무본지의야.           정자왈: 차언지천, 연당시제후과능차, 역족이치기국의. 성인, 언수지근, 상하개통. 차삼언자, 약추기극, 요순지치, 역불과차. 약상인지언, 근즉천근이이의. 양씨왈: 상불경즉하만, 불신즉하의, 하만이의, 사불입의. 경사이신, 이신선지야. 역왈: 절이제도, 불상재, 불해민. 개치용즉상재, 상재필지어해민. 고애민, 필선어절용. 연사지불이기시, 즉력본자불획자진. 수유애인지심, 이인불피기택의. 연차특론기소존이이, 미금위정야. 구무시심, 즉수유정, 불행언. 호씨왈: 범차수자, 우개이경위주. 우위, 오자반복상인, 각유차제, 독자의세추지.

1-6. 자왈 : 제자, 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중이친인,. 행유여력, 즉이학문

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젊은이들이여! 들어가서는 효성스럽게 하고, 나와서는 다정하게 하시요. 말은 삼가하되 믿음있는 말만 하시요. 많은 사람을 널리 사랑하되 인한 자를 가까이 하시요. 이 모든 것으르 실천하고 남음이 이씅면 곧 문자를 배우시요.

도주     이 장은 비교적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제자는 자기 문하의 학생을 가리킬 적도 있지만, 그냥 일반적으로 손하의 젊은이들을 가리킬 적도 있다. 여기서의 제자는 young fellow 정도의 느낌이 드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나이 먹은 공자가 오로지 당대의 젊은이들을 향하여 외친 말로서 해석되어야 한다(유보남설).

여기서의 입과 출은 중국의 가옥구조상 각기 독립된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양백준설). 예기 내측편에 보면 유명사이상, 부자재이군. 이라는 말이 있다. 즉 명사(관직에 있는 선비) 이상이 되면 반드시 아버지와 아들이 집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입은 아버지 처소로 들어간다는 의미고, 출은 자기 집을 나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시대에 모든 사가 이렇게 궁을 달리해서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었을리 만무함으로 나는 별 의미가 없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의 가옥구조는 대부분 부자가 한 집에서 살았음으로 입출이 동일한 집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즉 우리 과거 유생들이 그렇게 해석하였어도 결코 틀린 해석이 아니다.

제는 반드시 친 형제간의 관계에만 귀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관본에 따라 제는 제로 되어있기도 하다.) 효를 수직적 관계의 덕목이라고 한다면 제는 수평적 관계의 덕목을 개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출발은 형제간의 우애다.

근은 말을 삼가하는 것이다. 신은 평소 말을 삼가하되 말을 일단 하면 반드시 신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친은 근(가까이 한다)의 뜻이다. 인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사람의 뜻이다. 인은 곧 인인이요, 인자다.

이 장에서 가장 핵심에 놓인 말은 행유여력, 즉이학문이라는 마지막 구문이다. 이 한마디를 위하여 앞의 모든 교훈이 존재한 것이다. 행유여력, 즉........ 이라는 구문을 반드시 행하고 나서 요유가 생기면이라는 시간의 단계적 선후를 말하는 것으로 풀면 안된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의 단계적 절차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학문과 일상적 덕목의 실천사이에서, 즉 학과 행 사이에서 행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이디엄적인 표현일 뿐이다. 여기서 문은 막연한 글이나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다. 문의 고 용례의 뜻은 형성자나 회의자가 아닌, 삼형, 지사와 같은 가장 단순한 유니트의 글자(조문)를 의미하는 것이다. 문의 복문, 금문의 자형은 사람의 정면형의 흉부에 문신의 문양을 새겨넣은 모습이다. 그것은 종교적 제식에 있어서의 성스러운 기호였다.

공자 당대의 누구든지 사람이라면 말은 할 줄을 알았다. 공자교단의 특징은 문맹의 퇴치인 것이다. 당대의 사람들은 요즈음과는 달리 거개가 문맹이었다. 식자율(literacy rate)이 총인구의 1%도 안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권을 향한 갈망이 공자 당시의 젊은이들에게는  강렬했을 것이다. 이들에게 공자는 야단을 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어투는 상장히 반주지주의적(anti-intellectualistic)이다. 그것은 교언용색에 대한 혐오감과 상통하는 것이다. 나 도올도 요즈음의 젊은이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싶다: 제자들이여! 공연히 인터넷을 두드리기 전에, 들어가서는 효성스럽고 나와서는 다정한 인간이 되시요.!

집주         제자지제, 상성, 즉제지제, 거성.                근자, 행지유상야. 신자, 언지유실야. 벌, 광야. 중, 위중인. 친, 근야. 인, 위인자. 여력, 유언가일. 이, 용야. 문, 위시서육예지문,             정자왈: 위제자지식, 역유여즉학문. 불수기직이선문, 비위기지학야. 윤씨왈: 덕행, 본야; 문예, 말야. 궁기불말, 지소선후, 가이입덕의. 홍씨왈: 미유여력이학문, 즉문멸기질; 유여력이불학문, 즉질승이야. 우위, 역행이불학문, 즉무이고성현지성법, 식사리지당연, 이소행혹출어사의, 비단실지어야이이.

1-7. 자하왈: 현현역색; 사부모, 능갈기력; 사군, 능치기신; 여붕우고, 언이유신. 수왈미학; 오필위지학의.

1-7. 자하가 말하였다: 어진이를 어진이로서 대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을 조하아하듯 해라. 부모를 섬길때는 있는 힘을 다하여라. 임금을 섬길때는 그 몸을 다 바쳐라. 친구와 사귈때는 믿을 수 있는 말만 하여라. 그리하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일컬을 것이다.

도주       나는 올 봄 치박시의 들판을 헤매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 임치고성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서였다. 임치도성은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데 동서, 남북 각각 4km 정도인데, 전장은 약 20km 에 가깝다. 전국책에 유세가 소진이 월나라와의 합종을 제선왕에게 역설한 말 가운데 임치의 인구를 7만호로 묘사하고 있고, 그곳에서 소집할 수 있는 남자장정을 21만으로 잡고 있으니까 아마도 그곳의 당대 인구가 6, 70만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대성읍이었다. 그런데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직문이었다.

임치의 도성은 성문이 13개나 있었다. (서울의 도성은 대문과 소문을 합쳐 8개) 그런데 그 중 서문의 하나가 직문이었다. 이 직문밖에 즉 직하에 큰 저택이 즐비하게 자리잡아 큰 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대부의 대접을 받았다. 이곳에는 당대의 저명한 학자나 사상가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들을 직하선생이라고 불렀다.(사기 맹자순경열전) 실상 전국시대의 풍토는 바로 이 직하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 유명한 맹자도 직하의 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맹자 자신은 자기를 왕을 가르치는 왕사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 욍밑에 소속한 식하학파의 일원으로 간주되는 것에 모멸감을 느낄 것이다. 직하의 초대 총장격의 인물이 순우곤이었고, 그 성쇠의 역사의 마지막 리더로서 우리는 순자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순자 밑에서 한비자와 이사와 같은 전국의 역사를 마감지운 대사상가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제나가 명재상 관중의 명을 탁한 사상서, 관자가 바로 이 직하의 학사들의 선집(the anthology of the Ji Xia School)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유가, 도가, 병가의 사상이 마구 섞여 있는 잡가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방대한 서물이지만 항상 실제적 정치사상을 중시하고 경제문제를 외면치 않으며 구체적인 시책을 언급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어떤 통일성이 엿보인다.

나는 이 직하의 거리를 꼭 베스비우스 화산 밑의 폼페이(Pompeii)거리를 걷듯이 한 번 걸어보고 싶었다. 직하의 거리를 나는 서대문밖 인왕산 자락의 느낌 정도로 생각했다. 일설에 의하면, 직문이라는 이름은 인왕산과도 같은 직산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은 완벽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직문의 꿈은 찾아볼 한터럭의 실오라기조차 없었다. 황량한 밀밭에 뿌연 황하의 황사바람만 뒹굴고 있었다.

직하는 제나라 위왕때부터 시작하여 선왕때 크게 번창했다. 그런데 제나라 위왕이 직하에 천하의 위대한 학자들을 모을 생각을 하게된 것은 바로 그 이전에 위나라 문후가 출신성분이나 사상경향을 불문하고 실력있는 인재들을 널리 천하에서 구하여 등용하여 국세를 크게 융성하게 만든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자가 하필왈리를 말한 양혜왕은 바로 이 위문후의 손자이다. 위문후가 당시의 인맥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그 핵심에는 바로 이 장의 주인공인 자하가 있었다.

자하의 성은 복, 이름은 상이다. 사기에 공자보다 44세 연하로 기록되어 있다. 진나라 온국인(지금의 하남성 온현 서남쪽)이라고도 하고, 위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온국이 원래 위나라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다른 이야기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가 노나라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이 복인 것으로 보아 그도 아마 점과 관련된 무속 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공자가 자하에게 특별히 지목하여 小人儒(소인유)가 되지 말고 군자유가 되라고 말씀하였을 수도 있다(옹야 11). 그래서 그는 문학적 상상력에 뛰어났고, 특히 시에 밝았다고 생각된다. 예술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그의 제자 중에 문학으로는 자유와 자하 두 사람을 꼽았다. 자하가 사과십철에 거명돌 뿐만 아니라 공자와의 직접 대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증자나 유자 류에비하면 훨씬 더 공자 생전의 교단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순자 비십이자 편에 보면 천유로서 자장, 자하, 자유 삼인이 함께 거론되고 있는데, 아마도 공자으 최만년 제자로서 교단내에서 헤게모니각축을 벌인 정예들이 바로 이 세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각기 학파를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노나라에 머물지를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세사람이 모두 노나라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자장은 진나라 사람이며, 자유는 오나라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증자와 유자는 둘다 노나라 토백이들로서 곡부에 남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자장, 자하, 자유가 한 그룹으로 떨어지고, 증자, 유자가 또 한 그룹으로 떨어지는데 후자그룹이 아마도 나이도 전자그룹에 비해 약간 더 어렸다고 생각된다.

열전의 복상(자하)에 대한 기술은 논어의 대화들을 가지고 각색한 것이다. 그러나 가어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실려있다. 항상 가어의 기술이 열전보다 더 오리지날한 느낌이 든다.

고향사람들인 위나라 사람들은 복상이 별볼일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하가 어느날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위나라 조정에서 사지(역사기록)를 읽는 사람이 문헌을 오독하고 있는 것을 당장 지적했다. 그는 진사벌진, 삼시도하(진나라의 군대가 진나라를 칠 때, 세마리의 돼지가 황하를 건넜다.)라고 읽고 있었던 것이다. 자하는 삼시은 기해의 오사임을 지적했다. 그래서 위나라의 사지를 읽는 사람이 그것의 감정을 진나라의 사관에게 의뢰했다. 진의 사관은 조회해본 후 기해가 맞다고 대답했다. 이후로는 위나라 사람들이 자하를 성인 모시듯 했다는 것이다. 이 짤막한 일화는 자하의 학문이 공문하에서 일취월장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자하는 영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활 자세는 매우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공자는 자장(사)이 과9지나치다)한데 비하여 자하(상)는 불급9모자란다)하다고 평하였던 것이다(선진 15)

공자가 죽은 후 자하는 서하에서 학단을 형성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서하는 위나라 땅으로 황하의 서쪽에 있다는 뜻에서 유래되 지명이다. 분주 지역이다. 그러자 위문후는 그의 문하생이 되어 경학과 육예를 배웠으며, 그에게 국정의 자문을 구하였다(위문후사사지, 이자국정언. 가어) 이런 인연으로 위문후의 주변에 모인 인재는 자하의 제자나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탁월한 경제 정책하였던 이극, 청렴한 고사로 이름 높았던 단간목, 희대으이 봉가 오기, 하백의 미신을 타파한 서문표, 이 모든 사람들이 자하의 문하생이거나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위문후는 위나라의 건립자이다. 그는 창업주 다웁게 위나라를 크게 번성시켰다. 이러한 자하의 지혜로움으로 위문후의 브레인 탱크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후대에 전국시대 정신을 리드한 직하학파를 탄생시킨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논어에 자하에 관한 기사가 자장 편에 집중적으로 실려 있다. 제 3장부터 제 13장까지가 모두 자하와 그의 제자에 관한 이야기다. 또 자하의 이야기는 팔일 8의 그 유명한 회사후소를 비롯하여 여러 군데 나오고 있다. 그런데 나의 느낌으로 자장 편의 자하의 이미지와 자장편 이외의 자하의 이미지는 매우 다르다. 자장편을 제외한 자하의 일반적 이미지는 매우 문학적이고 상황적이고 그리 예에 얽매여 있지 않다. 그러나 자장 편에 드러나는 자하와 그의 제자들의 이미지는 예교주의적 엄숙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아마도 자장편의 자하장들은 후대에 순자계열에서 꾸며진 것으로 사료된다. 순자는 자하를 천유로 비난하고는 있지만, 실상 자하와 순자는 역사적으로 어떤 같은 계보 속에 관계되어 있다. 증자 계열에서 맹자가 나왔고, 자하 계열에서 순자가 나왔다는 것은 중국 철학사의 통설이다. 자장편에는 자하의 이미지가 순자적으로 각색되어간 흔적이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현현역색은 그 문자가 너무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한 해석이 제출되었다. 특히 색이라는 글자의 의미와 관련하여 그것을 여자 혹은 섹쓰와 관련된 추상적 표현으로 보느냐의 가부를 둘러싸고 많은 도덕적 판단이 오갔다. 그러나 어느 전거도 내가 보기에 확고한 타당성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1. 현현을 현명한 자를 현명한 자로서 대접한다. 라고 새기고 역을 바꾼다로서 새기면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하는 마음을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과 바꿀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즉 역은 전후 문맥의 등가를 나타내게 된다. 이것이 2, 3 세기 한, 위 사람들의 고주의 해석이다. 다시 말해서 고주는 색에 대한 도덕적 가치판단이 없다. 인간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물로서 색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호색지심으로써 호현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언이호색지심호현, 즉선야.)

2. 그런데 그 다음의 육조 시대의 사람들은 역색을 안색을 바꾼다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다시 말해서 현인을 현인으로서 숭상하는 자세가 평소의 안색을 바꾸어 공경하는 장중한 모습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약속존중차현인, 즉당개역기평상지색, 갱기장엄지용야.) 역색에서 색의 의미를 여자에서 나의 얼굴의 분위기로 바꾸어 해석한  것이다.

3. 그런데 송유들은 아예 현현과 역색을 이원화시켜 해석을 내렸다. 현인을 숭상하고, 여색을 가벼이 여겨라는 식으로 새롭게 새겼다. 역에는 바꾼다라는 의미 외로 가볍게 여긴다(경이)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송유의 도덕주의적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송유의 해석은 구역질나는 오독이라고 생각한다.

4. 최근의 양백준 같은 이는 송유의 문장패턴에 따라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다음의 문장이 부모, 임금, 친구에 대한 것임으로, 이것은 자기의 부인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구문은 부인에 대하여 그 현명한 품덕(현)을 존중하고 외모(색)는 중요시하지 말 것이다 라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이택후는 부인에 대한 것으로 보지 않고, 그냥 추상적인 멧세지로서 해석하여 덕행을 중시하고 용모를 중시치 말라(중시덕행체대중시용모)는 뜻이라 하였다.

앞으로 또 어떤 해석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하의 원래의 문학적 상상력과 관련하여 제 1의 고주의 해석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구한말의 대유 동무 이제마(1837~1900)는 인간의 질병의 원인과 구조를 밝힌 희대의 의서 동의수세보원을 집필하면서 그 총결론에 해당되는 과제설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명구로 장식하고 있다!

천하지악모다어투현질능, 천하지선모대어호현락선.

천하의 악이 현인을 미워하고 능력있는 자를 질시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없고, 천하의 선이 현인을 좋아하고 선량한 자를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할 줄 모르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대병이라는 것이다. 동무의 이 말은 정말 뼈저리게 와 닿는 우리의 현실이다. 구한말 우리나라 조선의 풍토가 얼마나 현능한 자들을 투질하였을까, 그리곤 식민지 패망의 길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역사의 비극을 생각하면, 일개 의원에 지나지 않았던 이 동무의 외침은 조선동포들 모두에게 외치는 대각의 포효이자 20세기 조선의 미래를 향한 예언자의 분노였다.

현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자에게 있어서는 아주 단순한 의미였다. 현인이란 나보다 먼저 깨달은 자이요, 나보다 먼저 배운 자이다. 그러한 현인을 현인으로서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이 곧 호학의 출발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러한 단순한 시인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마는 인간의 질병이 모두 희노애락의 부중에서 나오는 것이요, 이 흐노애락의 부중은 궁극적으로투현질능에서 초래되는 것이라고 갈파한 것이다.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할 줄 알면 내 마음이 편할 것이요, 그리하면 병에 걸릴 일이 없을 것이다. 현대인의 질병의 대부분의 원인이 스트레스가 동무가 말하는 투현질능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이 하라! 그렇게 자연스러운 감정의 유출처럼 현인을 현인으로 대잡하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권고인가! 여기에 뭔 다른 구구한 해석이 필요할까?

4세기말, 동진의 환현이 은중감(은형주)을 방문했을때의 일이었다. 이때 은중감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애첩의 침실에서 좌우를 돌보지 않고 사랑에 폭 빠져 있었다. 결국 환현은 면회를 거절당하고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환현이 은증감을 만났을 때 은근히 비꼬면서 놀려대자, 은중감은 당황하는 기생으로 다음과 같이 둘러치는 것이다: 뭔 그런 일이 다시 있을 수 있겠나. 그대가 왔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현현역색했을 걸....

이것은 세설신어의 언어편(2-103)에 실려있는 이야기지만, 이들의 현현역색의 이해가 분명히 현인을 현인으로서 대접하는 마음이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고주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열거한 1~4까지의 해석을 비교하면 1에서 4까지 꾸준히 원의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학문의 정교함이나 창조력의 발동이 명백한 것의 부정이나 진실의 왜곡을 초래한다는 사례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논어를 애써 달리 해석하려 발버둥 칠 필요 없다. 있는 해석의 의미를 천착하여도 그 무궁한 새 맛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치기신의 치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 희생한다는 뜻으로 새긴다. 사군은 곧 국가사직으 안보에 관한 문제였음으로 그런 뜻이 자연스럽게 들어간 것이다.

수왈미학, 오필위지학의는 앞 장에서 행유여력, 즉이학문 이라 한 것과 똑같은 반주지주의적 강조의 맥락을 가지고 있으나,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학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어떤 전문적 학단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미학이라는 것은 구태여 어떤 학단에 들어와 공부하지 않았어도, 즉 어떤 학의 커리큐럼을 이수하지 않았어도 그를 배운 자라 말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예나 오늘이나 우리는 너무 제도권 내에서 익히는 학문만을 학문으로 생각하는데 너무 익숙해 있다. 학문의 근본적 소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깊게 통찰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배움의 궁극적 목적은 배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는 것이다. 배움은 삶이다. 삶이란 곧 현현, 사부모, 사군, 여붕우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관계속에서 있는 힘을 다할 수 있는 자야말로 곧 배운자 인 것이다. 학문과 삶이 점점 유리되어 가고 있는 요즈음의 세태에 대한 자하의 경종의 멧세지인 것이다.

집주              자하, 공자제자, 성복, 명상. 현인지현이역기호색지심, 호선유성야. 치, 유위야. 위치기신, 위불유기신야. 사자, 개인륜지대자, 이행지필개기성, 학구여시이이. 고자하언, 유능여시지인, 구비생질기미, 필기무학지지, 수혹이위미상위학, 아필위지이학야.             유씨왈: 삼대지학, 개소이명인륜야. 능시사자, 즉어인륜후의. 학지위도, 하이가차? 자하이문학명이기언여차, 즉고인지소위학자, 가지의. 고학이일편, 대저개재어무본. 오씨왈: 자하지언, 기의선의. 연사기지간, 억양대태과. 기류지폐, 장혹지어폐학. 필약상장부자지언, 연후위무폐야.

1-8. 자왈: 군자부중즉불위. 학즉불고. 주충신, 무우불여기자, 과즉물탄개

1-8.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무게있게 행동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학문을 해도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 우러나오는 마음과 믿음 있는 말을 주로 하며, 자기보다 못한 자를 벗삼지 아니하며,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거리지 않는다.

도주         주충신 이하의 문장은 자한 24에 그대로 나오고 있음으로 생각컨대, 군자부중즉불위, 학즉불고 와 그 이하의 문장은 본래 별도의 파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뜻에 맥락적 연관성이 있을 필요가 없다.

군자부중즉불위를 독립된 하나의 유니트로 보고 학즉불고를 그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학즉불고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불고를 부정적인 맥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맥락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하면 학즉불고는 사람이 배우면 완고하게 되지 않는다. 는 뜻이 된다. 그리고 소라이는 군자부중즉불위를 역시 제도사적 관점에서 독특하게 해석하였다: 군자는 중대한 사안이 아니면 위의를 설하지 않는다(범비중사, 불설위엄)

그러나 나는 이 구문에서는 그냥 평이한 주자의 해석을 따랐다. 학즉불고도 앞서 말한 주왈미학, 오필위지학의와 같은 학에 대한 본의를 묻는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혹자는 마지막의 과즉물탄개를 과실에 대한 일반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의 구문을 이어받은 맥락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자기보다 못한 친구를 사귀지 말 것이나, 그러한 서낵에 오류가 있을 경우는 주저없이 그 선택을 바꿔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다.(일운, 약결우과오, 부득선인, 즉개역지모난지야.) 그러나 이것은 매우 협애한 오석이다. 무우불여기자는 그 뜻이 이미 그 자체로서 완료되는 풍부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다시 풀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 장의 대의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액센트는 역시 과즉물탄개에 놓여있다. 인간은 허물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일,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신의 일)이라는 시인 알렉산더 포우프(Alexander Pope, 1688~1744)의 유명한 말대로 인간은 허물을 향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신의 사업이 아니다. 용서 그 자체가 나의 실존적 사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교는 인간을 신에 떠맡기지 않는다. 잘못은 결국 내가 아는 것이다. 내가 안다면 바로 고쳐야 하는 것이다. 그 고침(개)에 거리낌(탄)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허물을 고치기를 거리끼는 인간, 그것이 바로 소인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변의 군상이요, 나의 모습인 것이다. 나의 행위가 나의 존재에 허물됨을 자각하는 순간, 그 허물됨을 고치기를 꺼려한다면 그는 영원히 배움의 길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종언인 것이다. 허물이란 고치면 끝나버리는 것이어늘...........

집주           중, 후중; 위, 위엄; 고, 견고야. 경호외자, 필불능견호내. 고불후중, 즉무위엄, 이소학역불견고야.  인불충신, 즉사개무실. 위악즉역, 위선즉난. 고학자필이시위주언.             정자왈: 인도유재충신, 불성즉무물. 차출입무시, 모지기향자, 인심야. 약무충신, 기복유물호?      무, 무통, 금지사야. 우, 소이보인. 불여기, 즉무익이유손. 물, 역금기지사. 탄, 외난야. 자치불용, 즉악일장. 고유과즉당속개, 불가의난이구안야. 정자왈: 학문지도, 무타야. 지기불선, 즉속개이종선이이.              정자왈: 군자자수지도, 당여시야. 유씨왈: 군자지도, 이위중위질, 이학이성지. 학지도, 필이충신위주, 이이승기자보지. 연혹린어개과, 즉종무이입덕, 이현자미필 락고이선도. 고이과물탄개, 종언

1-9. 증자왈: 신종추원, 인덕귀후의

1-9. 증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삶의 마감을 신중히 하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 것이다.

도주         신종추원! 이것은 증자의 말로 기록되어 있지만, 아마도 논어 전체를 통해 가장 많이 인용되고 또 가장 심오한 의미를 함장하는 구절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신종추원이라는 한마디처럼 오늘날까지 우리의 삶의 모든 양식과 직결된, 그리고 유교의 문화적 가치(Confucian Paradigm)를 대변해주는 논어의 구문도 없을 것이다. 이것을 증자가 말했는지, 공자 자신의 생전의 발설이 증자의 문하생들에 의하여 증자의 말로서 전이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아. 증자 계열이 효의 전문가들이라 할때, 이 구절은 아마도 효의 제식적 가치에 대한 최고의 논평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신종추원 이 한마디가 증자 자신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증자는 이 한마디로써 충노로 지은 대죄를 속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나 도올은 말한다: 증자는 신종추원으로써 충노를 대속하였다.

신종의 종은 인간의 생명의 종언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 삶의 마감이다. 종은 곧 죽음이다. 신종이란 죽음을 신중하게 한다는 뜻이다. 일본말로 쯔쯔시무라고 하는 이 신의 글자는 우리말로 삼간다는 뜻이다. 신중하게 한다 삼간다. 는 동사의 주체는 죽는 당사자에게 물론 해당될 수도 있다. 내가 죽을  때 나의 죽음을 신중하게 선택한다. 값있는 죽음을 죽는다. 죽는 환경을 아름다웁게 조성한다는 뜻도 물론 내포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신의 주체는 주로 그 후손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종은 우리 삶의 대표적 사례, 즉 관, 혼, 상, 제 중의 흉례인 상례에 해당되는 것이다. 관, 혼은 삶의 제식이요, 상, 제는 죽음의 제식이다. 관, 혼은 가례요, 상, 제는 흉례요 길례다.(상은 흉례로, 제는 길례로 분류된다.) 신종이란 곧 상례를 말하는 것이요, 추원이란 곧 제례를 말하는 것이다. 공안국은 말한다.

신종자, 상진기애야; 추원자, 제진기경야.

신종이란 상례에 있어서 그 슬픔을 다하는 것이고, 추원이란 제례에 있어서 그 공경스러움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을 공씨의 애기처럼 도식적으로 단순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상이란 한 인간의 죽음과 함께 성립하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죽음의 잔재인 시체를 묻든지 어떠한 뒷마무리를 반드시 해야한다. 그것은 죽은 자의 없이 아니라 산 자의 없이다. 상에는 반드시 복상의 기간이 따른다. 삼이라는 도식적 숫자의 문제도 물론 그 오리지날리티와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지만, 공자 자신이 분명히 삼년상 이라는 학단의 룰을 고집한 것 같다. 본편의 11장에 나오는 삼년무개라든가, 양화 21에 나오는 그 유명한 재아와의 삼년지상 논쟁은 분명히 오리지날한 공자의 입장을 강력히 대변하는 초기파편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의 사후에도 공문 제자들은 3년상의 룰을 엄격히 실천하였다. 3년상이 동양문화권에서 하나의 준수의 정칙으로서 확고한 관습의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은 바로 공자 자신의 고집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3년상의 실제적 창립지였다.

추원에서 원은 나에게 멀리 있는 조상, 그러니까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혹은 그 이상의 선조를 의미할 수 도 있겠지만 일단 한 인간이 죽은 시접에서 3년까지의 복상기간을 상의 기간으로 본다면, 3년이 지나게 되면, 이미 그 인간은 나에게서 멀리 있게 된다. 이미 정감적으로 가까이 잇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모두 원의 개념으로 편입되게 되며, 그러면 그때는 신의 대상이 아니라 추, 즉 추모나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추원이란 죽은 지 3년이 지나면 그 인간은 상의 대상이 아니라 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제는 흉례가 아니라 길례다. 제는 상실의 슬픔을 넘어서서 이제는 삶의 기쁨으로 화하게 되는 것이다.

진종추원, 민덕귀후의.

과연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되씹고 또 되씹어 보아도 참으로 다시 없는 명언이요, 인류역사의 한 진보의 장을 수립한 명구요, 인문주의의 승리를 구가한 명론이다. 이 문제를 천착해 들어가기 전에 우선 조건절과 주절에 얽힌 편협한 한 문제를 언급해보자. 신종추원이라는 조건절에 대하여, 주절인 민덕귀후의 주어가 민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역대의 모든 주석가들이 조건절의 신종추원을 천자로부터 제후, 대부, 사에 이르는 상제로 해석하였다. 즉 지배자들이 상례와 제례를 후덕하게 하면, 민심이 후덕하게 돌아간다(귀후)라고 풀이한 것이다. 즉 민의 계급성을 인식한 것이다. 공안국은 인군능행차이자, 민화기덕, 이개귀어후야. (통치자가 신종과 추원을 잘 행하면, 백성들이 그 덕에 감화를 입어 모두 후덕한데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고 황간은 상지화하, 여풍미초.(지배자가 피지배자를 감화시키는 것은 바람이 풀위를 스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모두 상지화하의 맥락에서 조건절과 주절의 관계를 분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생각키에 분명한 오독이다. 논어의 민의 용법은 분명히 서인의 뜻으로 한정되어 쓸 때도 있지만, 막연하게 보편적 인간, 다시 말해서 제후나 대부, 사, 민의 구분을 초월하는 보편적 개념으로 쓸 때도 많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공자 사상의 계급성과 보편성의 양면을 전관해야만 하는 당위성이다. 공자는 분명 그 시대적 한계 속에 갇혀 있다. 그러나 그가 그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있다면 분명 이미 그 속에 우리가 말하는 보편적 인간이 들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가 유대인의 종족적 신앙과 제식을 타파하고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받고 굶주린 자 모두에게 복음의 멧세지를 전했다면, 분명 공자에게도 그러한 보편주의의 복음이 있는 것이다. 그가 생각한 주으 패러다임은 바로 이러한 인문주의적 보편성의 축이었다.

어떻게 상제가 천자, 제후, 대부, 사에게만 있고 민에게는 없단 말인가? 민은 죽지도 않고 제사도 안 올린단 말인가? 다산이 대부분의 주석에 있어서 편협한 고증에 구애되어 있고 논어를 바라보는 전체적인 새로운 프레임웍이 결여되어 있다고 나는 비판하지만, 이 부분에 관하여 기존의 주석을 타파해버린 것은 참으로 통쾌하다 아니 말할 수 없다.

민자, 인야. 민선능구, 민장불곡, 기필하천자위민호? 상제지례, 통어상하, 불필이관감언야.

여기서 말하는 민이란 보편적 인간이다. 민선능구니 민모불곡이니 하는 용례에 있어서, 어찌 단순히 하천한 사람들만을 민으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상례와 제례는 상하에 모두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보아 감화를 입는다는 식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죽는다. 예수는 죽었다 살아났는지 모르지만 결국 또 하늘로 올라갔다(승천). 예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은 이 땅에서 일정 기간 살다가 그 삶을 마감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요즈음 과학적 생각으로 이 종언을 해석한다면, 곧 죽으면 끝이다. 죽은 자는 죽음을 모른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신종이라는 것에 그렇게 신경을 써야 하는가? 삼년상은 뭐 말라빠진거냐?

옛사람들은 그러니까 동, 서를 막론하고, 남, 북을 막론하고, 죽음을 죽음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죽음은 새로운 삶, 다른 양식의 삶의 시작이었다. 죽은 자의 삶, 그것이야말로 모든 인류 고대문명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테마였다. 이집트의 피라밋이나 진시황의 거대한 지하궁전이 모두 이 죽은 자의 삶에 관한 문제였다. 이 죽은 자의 삶을 위하여 산 자의 삶이 희생되는 고대 문명에 비일비재하다. 이것은 단순히 지배자의 폭력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여기 신종추원이라는 문제는 바로 이러한 죽은 자의 삶에 관한 인식의 전환을 이룩한 위대한 인문주의적 비약을 상징하는 증자의 명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조상숭배(ancestor worship)라고 하는 인류사의 보편현상과 관련되는 주제인 것이다. 우리는 종교를 생각할 때 너무 신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또 신의 개념이 고등 종교라는 타이틀을 소유하는 한 반드시 유링신관, 즉 모노테이즘(monotheism)의 것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신은 알고보면 그 궁극적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모두 죽은 자의 삶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BC 300년 전후에 활약한 희랍의 신화작가(mythographer) 유에메로스(Euhemerus)는 모든 신화적 존재나 사건이 실제적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가설위에서 신화를 연구하는 전통을 확립하였다. 그는 기원전 301년부터 297년까지 마케도니아의 왕 카산다(Cassander)의 궁정에서 일하였으며, 민중의 신화를 해석하기 위하여 희랍의 방대한 지역을 구석구석 답사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의 계보가 역사적 영웅이나 지배자 혹은 종족의 추장이나 전사의 전화형태임을 밝히고 모든 고대 신화가 이러한 인간의 발명에 의한 우화의 축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신화의 해석방식을 우리는 유에메리즘(Euhemerism)이라고 부른다. 이 유에메리스틱한 종교해석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이 장에서 말하고 있는 신종추원 즉 상제라고 하는 조상숭배와 관련된 것이다. 제를 전제로 하지 않는 상은 단순한 장례(funeral)이며 그것은 조상숭배(ancestor worship)로 간주되지 않는다. 미국사람들의 장례식을 우리는 조상숭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19세기의 탁월한 인문주의자이며 사회과학자이며 철학자인 영국의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는 그의 주저 사회학원리(Principles of Sociology, 1877)에서 모든 종교의 뿌리는 조상숭배이다(Ancestor worship is the root of every religion)라는 보편가설을 정립하였다. 결국 모든 신은 귀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귀신은 조상신이다. 모든 신은 그 궁극적 분석에 있어서 한 특정한 역사적 개인의 귀신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Every god is, and must be, in ultimate analysis, the ghost of a particular human being) 유대인들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 곧 야훼도 알고 보면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다윗의 하나님이다. 결국 그 계보를 따져 올라가면 야훼도 궁극적으로 어떤 조상신의 전화형태일 것이다. 야훼는 결국 유대인들의 조상신일 뿐이다. 개별적 조상의 숭배(individual cult)이든, 민족전체의 조상의 숭배(national cult)이든 그것은 사실 조상숭배라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그것은 결코 일신이다 다신의 이원법에 의하여 갈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구약의 구서구석을 뒤져보면, 개별적 조상숭배의 제식이 무수히 찾아진다. 죽은 조상, 그리고 죽은 왕이나 영웅에 대한 제사가 곳곳에 그려져 있다. 테라핌(Teraphim, 가신상), 죽은 자에게 음식을 바치는 것, 조상의 무덤에 대한 존중, 곡(mourning)의 습관, 레비레이트율법(Levirate Law), 네크로만시(Necromancy,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말하게 함, 강령술에 의한 점) 등등의 무수한 사례들이 지적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조상 숭배의 습관들이 카발라(the Kabbalah)나 탈무드, 미드라쉬 문헌(Talmudic and Midrashic literature), 그리고 그들의 일상적 시나고그의 리터지(Litergy) 속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돼 신약성서의 첫구절이 바로 예수의 족보(the genealogy of Jesus Christ)로부터 시작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임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왜 그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이 증명되어야 하는가? 예수 또한 조상신의 확고한 대열에 끼어야만 그 신위의 권위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가 가장 처음에 부닥친 사건은 바로 이 땅의 조상숭배와으 마찰이었다. 조상숭배, 즉 제사의 불인이 기독교 신앙의 마크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이야기다. 제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들추어내는 우행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고(=기독교)는 결국 예수에 대한 제사요 예배이다. 우리 제례는 예수가 아닌 자기 조상에 대한 제사요 예배이다. 영어로 안세스터 워싶(ancestor worship)이라 할때 워싶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라. 조상의 제사는 곧 조상의 예배다. 기독교는 개별화되 조상들의 예배를 예수 한 사람의 예배로 대치시키라는 명령이다. 예수도 물론 역사적으로 갈릴리에 존재했던 한 사람의 죽은 영혼이다. 그는 죽어 승천했고 신화되었다. 기독교는 예수에 대한 신종추원인 것이다. 예수의 신종은 십자가이며, 그에 대한 추원은 하늘나라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신종추원과 조상에 대한 신종추원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첫째 조상에 대한 신종추원은 그 신종추원의 단위가 교회라는 단위로 확대된다. 둘째로, 조상에 대한 신종추원은 제사장(priest) 그룹이 분화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가족의 성원이 목사가 되고 신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식의 과정도 가정적 삶에서 자연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식의 과정도 가정적 삶에서 자연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다. 제사에 있어서는 가정적 삶과 종교적 삶이 유리되지 않는다. 가정이 곧 종교이다.

우리는 첫번째의 차이에서 기독교의 보편주의적 성향에 대한, 조상숭배의 가족주의적 편협성의 위험을 도출해낼 수 있다. 그리고 두번 째의 차이에서 우리는 기독교가 인간을 일상적 삶에서 유리시키고, 인간을 종교적 질곡속으로 빠뜨리게 되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지적을 할 수가 있다. 물론 제사에 있어서도 삶과 종교의 과도한 밀착이 인간을 목조르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득실의 문제를 떠나 모든 종교가 알고보면 조상숭배에 불과할 뿐이라는 대명제의 근본적 의미를 물을 필요가 있다.

인간의 죽음이란 인간의 유한성의 상징이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자신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시인하기를 두려워한다. 유한성을 무한성으로 바꾸려는 노력에서 모든 종교는 태어나기 마련이다. 고대인들은 인간이 죽으면 그 영혼은 어떤 모종의 아이덴티티 체계를 유지한다고 믿었다. 물론 그 아이덴티이 체계의 지속성의 영우너성이나 한시성의 설정은 문화적 양태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면 인도인들은 그 영혼의 동일성의 지속을 무한대에 가까운 기 시간으로 보았고(윤회사상), 중국인들은 그 영혼의 동일성의 지속을 한 백여년 밖에는 잡지 않았다(사대봉사)

그런데 고대 문명에 있어서 더 중요한 테마는 사후 영혼의 산자와의 관계였다. 그 영혼이 산 자에게 우호적인 관계에 놓이느냐, 대적적인 관계에 놓이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대적적인 관계의 영혼을 우리는 악귀라고 부르고, 우호적인 관계의 영혼을 선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기실 모든 조상숭배의 출발은 바로 이 악귀를 선귀로 전화시키거나, 악귀의 발생을 애초로부터 봉쇄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죽은 자가 산 자에 대해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재산권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내가 죽으면서 살아 생전에 이룩한 업(재산)을 후손에게 증계시켰을 때, 그 재산권은 죽은 내가 계속 보유하게 된다. 이것은 모든 고대인들의 사유였다. 따라서 그 재산을 승계한 자손은 당연히 그 죽은 자에게 제사를 지내야 하는 빚을 지게 된다. 그 빚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을 때 그 귀신은 질병과 재앙 등으로 그 자손을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의 저자이며 영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프레이저경(Sir James George Frazer, 1854~ 1941)의 종교의 정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명쾌하게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다.

By religion, then, I understand a propitiation or conciliation of powers superior to man which are believed to direcr and control the course of nature and of human life(Ch. IV. Magic and Religion, GB)

종교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그것은 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인간의 삶과 대자연의 진로를 지배하고 방향짓고 있다고 믿어지는 힘과의 화해며 달램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종교의 원초적 출발은 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인간에게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어떤 힘과의 화해인 것이다. 즉 한 인간이 신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으로부터 행위하게 되면 우리는 그를 종교적이라 부르고,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으로부터 행위하게 되면 우리는 그를 도덕적(moral).이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두려움의 관계는 수직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Transmigration)나 환생(Reincarnation), 그리고 고대사회의 토테미즘(Totemosm), 우상숭배(Idolatry), 배뱅이굿에서 보여지는 샤마니즘의 강령술 등이 모두 조상숭배라고 하고 인류의 보편적 종교현상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 이 증자의 신종추원은 바로 이러한 전통적 조상숭배의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대치시키는 발언인 것이다. 즉 상제의 궁극적 의미가 귀신의 달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성 속에 내재하는 하나의 축제(feast)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죽음은 나의 유한성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손)의 유한성과의 연속의 계기라는 것이다. 즉 나의 죽음이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손에 의하여 추모됨으로서 어떤 연결의 고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존재의 유한성의 단절이 다시 단절될 타의 유한성과 접합됨으로써 무한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한한 시간의 연접은 무한핟. 그 연접의 고리가 바로 상, 제의 제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귀신에 대한 수직적 공포가 아니라, 나의 존재의 유한성의 두려움에 대한 수평적 유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수평적 유대가 곧 인간의 역사이다. 모든 사람이 양명어후세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기억된다고 하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유한성의 공포를 느끼지 않고 편안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나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분간 그들과 더불어 살 것이다. 나는 죽는 순간 매정하게 단절되거나 내가 사랑했던 그들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나의 삶을 편하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제사의 궁극적 의미는 죽음에 잇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다. 죽는 자의 삶에 있고 살아남는 자의 삶에 있다. 그것이 바로 민덕귀후의 궁극적 의미다. 상제의 의미를 민덕의 귀후에 돌렸다는 것은 곧 인성(humanity)의 종교적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수직적 관계를 역사의 수평적 관계로 환치시킨 것이다. 종교적 공포로부터의 해방이 다신을 일신으로 초월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신을 역사로, 상식으로, 귀속시킴으로서 새로운 인문주의의 가능성을 연 것이다. 무술적 세계를 초월선의 매개 없이 직접 인문화 시킨 것이다. 양수명의 말대로 중국문명은 이런 방식으로 조숙하여 갔던 것이다.

집주      신종자, 상진기례; 추원자, 제진기성. 민덕귀후, 위하민하지, 기덕역귀어후. 개종자, 인지소역홀야, 이능근지; 원자, 인지소역망야, 이능추지. 후지도야. 고이차자위, 즉기지덕후. 하민화지, 즉기덕역귀어후야.

1-10. 자금문어자공왈: 부자지어시방야, 필문기정, 구지여? 억여지여? 자공왈: 부자온, 량, 공, 검, 양이득지. 부자지구지야, 기저이호인지구지여!

1-10. 자금이 자공에게 물어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한나라에 이르시면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를 들으시었다. 그것은 선생님 스스로 구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기회가 상대방으로부터 주어진 것인가? 자공이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따뜻하고 솔직하고 위엄있고 검소하고 사양하심으로써 그런 기회를 얻으셨다. 선생님께서 구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주      이 장에는 두명의 중요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있다. 그 하나는 자금이요, 그 하나는 자공이다. 자금은 열전에 공자의 제자로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추론은 오직 논어의 자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혹자는 자금이 자공의 제자였기 때문에 열전에 안 올랐다고 하지만, 자금이 자공에게 묻는 장면이 논어에 두 번 등장했다고 해서 자금을 곧 자공의 제자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자공과 같이 스마트한 사람이 자금과 같은 삐딱한 인물을 제자로 두었을리 만무하다. 자금은 분명 공자의 제자로서 매우 나이가 어린 그룹에 속해 있었다. 공자의 사후에도 공자 교단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자금은 성이 진이요 명이 강이다. 자금은 그의 자이다. 내가 생각키에 자금은 노나라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공자의 문하에 입문하였으면서도 센터에 들어오지 않고 주위를 맴맴 돌면서 공자를 삐딱하게 보는 매우 부정적 인간이었을 것이다. 본장에서도 자금이 공자를 보는 시각은 매우 씨니칼(cynical)하다: 공자는 치사하게 이나라 저나라 정가에 끼웃거린 사람이 아니겠구?

지금도 곡부의 공자고택에 가면 시례당이라는 널찍한 건물과 정원이 있다. 물론 옛모습은 아니겠지만, 그곳이 바로 공자가 그의 아들 백어에게 시와 례를 가르쳤다는 곳이다. 그런데 이 당에 얽힌 고사는 계씨 13에 나온다. 자금이 백어와 홀로 있을 때 슬그머니 묻는 말이 이런 것이었다.: 야, 자네 말야! 아버지한테 뭐 좀 특별하게 배우는 것이 없나? 이에 대한 백어의 대답은 특별하게 배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시와 례를 모르면 사람구실 못한다고 평소에 들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 고사에서 자금의 태도 또한 무엇인가를 염탐하는 낌새가 있다. 하여튼 좀 치사한 자식이다.

이 치사한 자금의 캐릭터는 공자 사후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자금은 자공을 부추기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자장 25에: 당신이 그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필요가 있겠소. 천하으 제후를 휘어잡는 당신이야말로 공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아니겠고? 하여튼 자금과 같은 기분나쁜 자식은 당분간 잊어버리는게 좋겠다. 자금과 재여는 모두 공자에게 있어서는 가롯유다 와 같은 역할을 맡은 인물들이었다. 물론 위대한 자의 인격은 이런 부정적 인물들 때문에 더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자공은 위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31세 연하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니까 열전의 기록으로 보면 안회보다 한 살 어리다. 사기열전의 나이기록이 정확하다고만 볼 수 없지만, 하여튼 자공과 안회는 같은 또래의 제자로 공자의 초기제자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공야장 8에는 공자가 자공 보고 너와 안회중에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있겠냐? 라고 물었던 것이다. 자공과 안회는 같이 생활하면서 같이 비견되었던 인물들이었음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대화의 초기 파편이다.

자공에 관하여 가어는 놀라웁게도 단목사, 자자공, 위인. 유구재저명. 이라는 짤막한 한 마디만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는 자공에 관한 기록이 72 재자 중에서 최장의 드라마로서 스릴있게 전개되고 있다. 가어와 열전을 비교하면서 느끼는 것은 사마천의 열전의 기술이야말로 곧 사마천의 이매지네이션을 옮겨놓은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그 유명한 와신상담의 주인공 월왕 구천이 기나긴 인고의 세월 끝에  오왕 부차를 깨뜨리고 그의 가슴에 자결의 비수를 꽂게 만드는 그 슬픈 이야기으 역사적 환경이 모두 제나라의 전상이 노나라를 칠려고 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자공의 외교적 수완으로 비롯되어 형성된 대하드라마로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오월동주의 영웅호걸들의 이야기의 배후에 자공이라는 탁월한 유세가의 활약이 그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그 진상을 과연 누가 밝힐 수 있을까?

  사마천이라는 탁월한 문장가의 기술을 잘 뜯어보면 그것은 공자가 자공과 재아 두 사람을 언어에 능한 제자로 꼽은 공자가 신의 언급(선진 2)의 테제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어떤 소설적 각색같다는 느낌을 배제하기 힘들다. 자공의 당대 제후들과의 언변은 모두 역사적 상황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리고 그 복잡하게 얽힌 국제 정세의 가닥을 교묘하게 풀어가면서 매우 유창한 구라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자공이라는 인물이 구재에 능하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가 단지 자공이라는 역사적 개인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공자교안 전체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마천은 누구보다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사실 사마천만큼 자공이라는 인물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자공은 탁월한 웅변가며 지략가며 외교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국제적 물류를 잘 파악하여 막대한 재부를 축적하는 호상이었다. 그는 진시황을 탄생시킨 여불위의 전신이었다. 요즈음의 감각으로 정확하게 국제적인 비지니스맨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항상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있었다.

자공은 논어의 실제적 주인공이다. 안회는 너무 완벽하게 이상화되어 있고, 자로는 최다출연자이기는 하지만 항상 조연의 역할에 머물고 있다. 자공은 자로를 제외하면 논어의 최다출연자이다. 그리고 그는 항상 스승 공자와 맞대결하면서 깨달음을 축적해가는 주인공적 캐릭터로서 등장한다. 자공이 없으면 논어는 무너진다.

  공자의 삶이 자로와의 만남과 더불어 시작했고 자로의 죽음과 더불어 죽었다면 공자의 자공과의 만남은 공자의 삶의 크나큰 행운이었다. 공자는 자로와 더불어 죽었지만, 자공과 더불어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대하다! 자공이여!

자공의 성이 단목이라는 사실은 아마도 그의 집안이 목재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라는 명과 공(정주간본에는 공으로 되어 있고, 한석경에는 공으로 되어있다.)이라는 자의 연관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원래 위나라의 조정에 물자를 납품하는 어용상인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자공을 가리켜 재화를 늘리는데 있어서는 도사! 억측을 해도 번번히 들어맞는다(선진 18)라고 매우정확하게 세속적인 기술을 하고 있다. 자공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증권가의 큰 손이었다. 다시 말해서 공자의 교단은 실제적으로 자공에 의해서 그 재정이 확보되었던 것이다. 자공이 없었더라면 공자교단의 형성은 어려웠을 것이다. 자공이라는 젊고 영민하며 항상 배움에 게으름이 없는 물주의 사심없는 헌신 때문에 공자교단이 유지된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자공에 대한 평가에 매우 인색하였다. 그러면서도 결코 자공을 천대하지는 않았다. 군자불기의 원칙에 비교하면 공자가 자공을 평가하여 너는 한 그릇에 불과하다.(여, 기야. 공야장 3)라고 한 것은 매우 인색한 평가다. 그러나 어떤 그릇이냐고 묻자, 호련이라는 찬란한 옥그릇에 비유한 것은 자공의 역할을 충분히 인정한 것이었다.

공자는 죽을 때도 자공의 품을 애타게 기다렸다. 공자의 죽음의 침상에는 이미 사랑하는 아들 백어도, 항상 그리워했던 제자 안회도, 뻥끗하면 나무랬던 친구 자로도 이미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공자는 죽어가는 희미한 의식속에서 오직 자공만을 기억했던 것이다. 공자는 자공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공의 눈물 속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공은 공자가 눈을 감는 순간 안회처럼, 자로처럼 항상 공자를 곁에서 못 모식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이 3년상을 치르고 떠났는데 자공만은 홀로 3년을 더 복상하고야 떠났다. 스스의 무덤 옆에서 6년을 산다는 것 자체가 결코 간단한 고행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가 당대의 거부였다는 생각을 해본다면.....

자공이 6년의 수묘(로묘)를 감내해냈다는 사실은 그의 개인적 심리의 보상기재(compensation), 즉 살았을 때 공자 곁은 충분히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대한 보상심리로서 일어난 행위라고만 분석할 수는 없다. 자공의 육년수묘는 그 나름대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공자말년의 제자들이 모두 공자의 유랑장정에 참여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공자의 장정세대는 자공 한 사람이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공의 나이는 비교적 어리다. 공자가 죽었을 때 그는 40세를 갓 넘었다. 그렇지만 그는 공자의 초기제자그룹의 주요멤버였다. 따라서 그는 공자학단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장정세대로서 특별한 본을 보여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만년제자들을 정신적으로 묶을 수 있는 어떤 구심점으로서의 행위 양식이어야만 했다. 공자는 생전부터 삼년상을 고집했다. 자공의 육년상은 스승 공자에 대한 충정의 본보기로서 더 이상없는 과시였다. 자공은 그런 방식으로 공자학단 내의 공자에 대한 절대적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초기교단이 세차게 뻗어나갈 수 있었던 밑거름이요 저력이었다.

논어 내의 자공과 공자의 대화는 대체적으로 오리지날한 파편으로 간주된다. 자공이 6년 수며기간 동안에 정리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말한 증자의 충노 운운도 사실 알고 보면 공자가 자공에게 나는 결코 박식한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하나로 꿰뚫는 사람이라고 말한 위령공 2의 일이관지 명제와 자공이 공자에게 종신토록 기억할만한 이야기 한마디만 해달라고 조르니까 노일 것이다. 자기가 원치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라고 한 위령공 23의 노의 명제를 합성하여 윤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공의 파편이 훨씬 더 생생한 그대로의 공자 모습을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오늘날의 공자가 된 것은 실상 자공 덕분이라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자공은 공자 사후에도 공자에 대한 철저한 로얄티를 지켰다. 공자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추호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차에 돈을 싸들고 제후를 찾아다니면서 공자의 위대함을 선양하였던 것이다. 사마천은 화식열전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공결사련기, 속백지폐이빙향제후, 소지, 국군무불분,, 정여지항례. 부사공자명시양어천하자, 자공선후지야. 차소위득예이익창자호?

자공은 사두마차를 타고 비단뭉치의 선물을 들고 제후들을 방문하였으므로 그가 가는 곳마다 뜰의 양쪽으로 내려서서 자공과 대등한 예를 행하지 않는 왕이 없었다. 무릇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골고루 알려지게 된 것은 자공이 그를 앞뒤로 모시고 도왔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이른바 세력을 얻으면 그 이름이 세상에 더욱 드러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정범진 외 역본 참고)

자공이 위나라 사람이라는 사실도 매우 논어를 읽는데 중요한 함수로 작용한다. 공자의 유랑이 기나긴 장정이기는 했지만 그 루트를 잘 뜯어보면 항상 위나라를 거점으로 해서 움직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장정의 비용을 댄 것이 바로 자공이었다. 자공의 위나라 재정기반이 없었더라면 공자의 장정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공자와 자공의 대화가 상당부분 위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공자의 고난의 시절에 위나라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자공은 부자의 문장은 들을 수 있지만, 성과 천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어볼 수가 없다(공야장 12)라고 말했다. 이 장을 들어 많은 학자들이 공자의 사상 자체가 성과 천도를 배제하고 있다고 구구한 논변을 펴지만, 그것은 자공과 공자와의 관계의 구체적 맥락을 떠나서는 무의미한 말임을 일차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즉 공자는 자공과 같은 현실적 인간에게는 성과 천도와 같은 심오한 이야기를 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얘기가 상호간에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공자는 아마도 성과 천도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야기는 안회와 실컷 나누었을 것이다. 안회의 내면성의 깊이를 자공은 가지고 있지를 못했다. 그러나 자공은 자신의 분수를 명확히 깨닫는 훌륭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인식의 한계내에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의 질문은 오히려 예리하고 우리로 하여금 공자의 사상을 이해하게 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준다. 그는 끊임없이 물음으로써 배워간 인간이었다. 그는 학문의 인간이 아니라 문학의 인간이었다. 학문이란 본시 문학인 것이다. 물음으로써 배우는 것이다. 자공의 사회과학적이고 정치학적인 접근에서 출발하여 공자의 인문과학적 인의 사상의 핵심으로 나아가는 진로야말로 논어라는 서물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배움의 과정이다. 자공은 우리와 같은 매우 상식적이고 어찌 보면 답답한 인간이기에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자공과 더불어 깨달음의 과정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먼저 자금의 질문을 살펴보자. 부자라는 표현은 고증가들이 말하기를 대부를 지낸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경칭이라고 하지만(양백준) 부자는 그런 구체적 맥락에서 쓰여진 말은 아니다. 제자들이 스승으로 존중하여 부르는 말이었을 것이며 그것은 공자 고단 내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닌 말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영어로 Confucius라고 쓰는 것은 공부자(콩후우쯔)라는 중국말을 서양선교사들이 라틴어화(Latinization)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에서는 공부자라는 식으로 쓰인 예는 별로 없고 Confucius는 서양선교사들의 발명이라는 것이 최근의 정설이다.

지어시방의 시는 어떤 하나의 뜻으로 비특정의 지시 대명사로서 구어적인 어기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필문기정의 문은 그냥 듣는다의 뜻이라기 보다는 정사에 관여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구지여? 억여기여? 에서 억은 영어의 if not(그렇지 않다면)의 뜻이다. 구지는 내가 자발적으로 구한다는 뜻이고, 여지는 정치를 하고 있는 저편에서(치자들이) 구한다는 뜻이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저절로 주어진다는 뜻이다. .........여? .............? 의 구문에서 여는 단순한 의문을 나타낸다.

이러한 자금의 야비한 비꼼에 대하여 자공은 강력하게 공자를 옹호한다. 그러나 자금의 비꼼의 내용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공자는 기회 닿는대로 여기저기의 나라에서 정치에 끼웃거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실을 자공은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케이! 좋다! 우리 선생은 정치 참여의 기회를 자기 자신이 스스로 구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은, 랑, 공, 검, 양의 다섯가지 덕성을 갖추어서 구한 것이다. 범인들이 정치에 끼웃거리는 것과는 본질이 다르다! 사실 자공의 변호는 좀 궁색했다. 그래서 다산은 이 구절을 좀 다르게 해석하였다. 부자온랑공검에서 일단 문장을 끊고 양을 아랫구에 붙여 읽는다. 그리하면 양이득지가 된다. 그러면 우리 선생은 온양공검하셔서 사양하셨는데도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따름이다라고 자금의 비판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새로운 의미맥락이 생겨난다. 그러나 명백하게 다음의 구전, 즉 부자지구지야, 기제이호인지구지여!의 시인과 약간 괴리가 생겨난다. 그래도 억지로 새길 수는 있겠지만 나는 그냥 평범한 해석을 따랐다.

여기 우리가 꼭 주목해야 할 것은 문체다. 부이지구지야, 기제이호인지구지여!에서 지가 네번이나 들어가 있고, ...........야, .........여와 같은 조사가 끝에 붙어 있는가 하면 별의미 없는 기자가 중간에 끼어있다. 이것은 얼마나 논어의 문체가 일상적 말(구어체) 그대로에 충실하려고 애썼는가를 나타내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논어의 문장은 이런데서 어떤 생동감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의 여는 앞의 단순한 의문을 나타내는 여와는 달리, 단정을 보류하면서 상대방의 강한 긍정을 유도해내는 어기를 담고 있다. 기제 그냥 리듬을 나타내는 조사일 수도 있고 양백준의 고증대로 노나라의방언이나 습벽일 수 도 있다. 그냥 부자구지, 이인구지 라 해도 될 말이 이렇게 깅어진 것이다.

집주            지여지여, 평성. .하동.             자금, 성진, 명항. 자공, 성단목, 명사. 개공자제자. 혹왈, 항, 자공제자, 미지숙시. 억, 반어사.   온, 화후야. 랑, 역직야. 공, 장경야. 검, 절제야. 양, 겸손야. 오자, 부자지성덕광휘점어인자야. 기제, 어사야. 인, 타인야. 언부자미당구지, 단지덕용지서. 고시군경신, 자이기정취이문지이, 비약타인필구지이후득야. 성인과화존신지묘, 미역규측. 연즉차이관, 즉기덕성례공어불원호의, 역가견의. 학자소당잠심이면학야.             사씨왈: 학자관어성인위의지간, 역가이진덕의. 약자공, 역가위선관성인의, 역가위선언덕행의. 금거성인, 천오백년. 이차오자, 상견기형용, 상능사인여기, 이황어친자지자호! 장경부왈: 부자지시방, 필문기정, 이미유능계국이수지이정자. 개견성인지의형이락고지자, 병이호덕지랑심야. 이사욕해지, 시이종불능용이.

1-11. 자왈: 부재, 관기지; 부몰, 관기행. 삼년무개어부지도, 가위효의

1-1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는 그 뜻을 살피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그 하신 일을 살핀다. 삼년동안 아버지의 도를 고침이 없으면 효라 이를만 한 것이다.

도주           삼년무개어부지도, 가위효의. 는 이인 20에 한 글자도 틀림이 없이 그대로 다시 나오고 있다. 아마도 삼년상의 문제와 더불어 공자의 오리지날한 입장을 대변하는 구절일 것이다.

우선 부재관기지, 부몰관기행. 의 해석은 역사적으로 고주나 신주나 기의 지시체를 아버지(부)로 보지 않고 모두 자식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모든 전통적 해석은 한 인간을 평가할 때 그 인간의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음으로 그의 행동을 보지 않고 그 심지를 살핀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때부터는 거리낌없이 마음대로 자기 행동을 할 수 있음으로 그 사람의 행동을 보아 그 인품의 됨됨이를 판단한다는 것이다(공안국왈: 부재, 자부득자전, 고관기지이이. 부몰, 내관기행야.)

그러나 매우 소박하게 이 구절을 읽을 때, 이 구절의 의미는 삼년무개와 연접되어 있음으로 기지, 기행이 부지도와 관련되는 어떤 사태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한 인간의 인격판단기준을 부재, 부몰에 따라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작위적인 냄새가 난다.

지는 요새말로 지향성(intentionality)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생동하는 마음의 지향성이다. 지는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역동적 의지의 세계다. 따라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그 아버지의 살아 움직이는 뜻을 즉각 즉각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러한 지는 포착될 수 없음으로,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그의 행업, 그러니까 이루어 놓은 업적 등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효심의 기본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삶의 길(도)을 최소한 삼년 동안은 고침이 없어야 한다. 삼년의 설정은 꼭 그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삼년상이라는 공자교단의 규율을 생각할 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아버지가 해오던 일들, 주변에 형성된 삶의 방식을 너무 매정하게 하루아침에 바꾸어 버린다면 앞서 신종추원에서 말한대로역사의 단절이 초래되는 것이다. 삼년무개란 요새말로 하면 스무쓰한 트랜지션(smooth transition)을 말하는 것이요, 심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거리감의 시간설정(the psychological distancing process)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위효의에서 가위는 강한 가치판단을 나타내고 있다. 그냥 가볍게 효라 이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래야 비로소 효라 할 만하다는 강한 어조가 숨어 있다.

전통적으로 삼년무개어부지도를 놓고 아버지의도가 악한 것일 경우는 어떠하냐? 그래도 3년은 무조건 고수해야 하느냐? 는 등등의 문제를 놓고 시시콜콜한 많은 예송이 오갔다. 그러나 이 말을 한 사람은 결코 그런 특수 맥락을 전제로 해서 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상황적으로 자연적으로 해결될 문제이지 어떤 절대적 규범으로 접근하면 아니된다. 대체적으로 아버지의 도를 말할 때는 대강 그 좋은 점을 말하는 것이요, 삼년을 설정해놓고 생각하면 그 나쁜 면은 점차 잊혀져 갈것이다. 뭘 그 따위 말을 놓고 시시콜콜한 논쟁을 일삼을까보냐?

북한의 김정일씨가 그 아버지 김일성주석이 돌아가신 후에 삼년동안 유훈통치를 하고 그 도를 고침이 없었다는 사례는 아마도 이 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아직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며, 우리사회에 얼마나 논어의 가치관이 뿌리 깊은가를 잘 나타내주는 일화일 것이다.

집주       행, 거성.              부재, 자부득자전, 이지즉가치. 부몰, 연후기행가견. 고관차, 족이지기인지선악. 연우필능삼년무개어부지도, 내견기효. 불연, 즉소행수선, 역부득위효의.             윤씨왈: 여기도, 수종신무개, 가야. 여기비도, 하대삼년? 연즉삼년무개자, 효자지심, 유소불인고야. 유씨왈: 삼년무개, 역위재소당개, 이가이미개자이.

1-12. 유자왈: 예지용, 화위귀. 선왕지도, 사위미; 소대유지. 유소불행, 자화이화, 불이예절지, 역불가행야.

1-12. 유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예의 쓰임은 조화로움을 귀하게 여긴다. 선왕의 도가 이 조화를 아름답게 여겼다. 작고 큰 일이 모두 이 조화로움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행하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오직 조화만을 알고 조화를 도모하고 예로써 절제하지 않는다면 또한 행하여 질 수 없는 것이다.

도주       이 장은 논어에서 예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구절인데 그 논의가 매우 이론적이고 개념적이다. 따라서 이것은 후대에 유자(약)에 의탁하여 지어낸 파편임이 분명하다. 브룩스는 이 파편을 자장편 뒤로 옮겨놓고 있는데 매우 타당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자장 편이 성립한 즈음에, 대강 BC 3세기 중반에나 형성된 파편일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후대의 개념적 인식에 의하여 료해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사실 이 편은 완벽한 해석이 불가능하다. 고전이란 그 문자가 불완전하여 온전한 해독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 문장과 문장의 틈새에 인과적 고리가 숭숭 빠져 있어 유기적 통일이 어렵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이 장을 완벽하게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대의 문헌 특히 예기 락기의 언어와 상조해보면 그 뜻이 대강 추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악기의 후반부에 위문후가 락에 관하여 자하에게 묻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도 아마 그러한 맥락에서 비슷한 시절에 유약을 가탁하여 지어낸 설화 중의 한 파편일 것이다.

우선 예지용, 화위귀. 라는 첫 말부터가 심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이다. 여기 용에 관하여 송유들은 제용론을 들먹이며 해설을 가하고 있으나, 본시 체와 용의 이원적 이해방식은 불교에서 유래된 것이다. 중국인의 원래적 사고방식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원효대사가 소한 대승기신론은 철저히 제용론에 의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나 이런 이해를 논어 이해에 적용할 수는 없다. 예의 체와 예의 용이 개념적으로 분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송유의 이해방식을 비판하는 자들이 쓸용을 단순한 써이로 보아, 예지이화위귀로 풀이하기도 하지만, 다산의 말대로 그냥 있는 그대로 놓고 풀이하여도 별 상관이 없다. 예지용이란 예의 쓰임의 뜻이다. 이것은 아마도 예가 지향하는 바, 즉 예라는 것의 사회적 기능이 의도하는 바는 화를 귀하게 여긴다. 화를 으뜸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장전체를 잘 씹어보면 예의 쓰임의 궁극적 소이연아화(Harmony)에 있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무엇인가 예는 화를 지향하고 있지만 예와 화 사이에는 어떤 텐션, 스트레인이 느껴지는 구조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황간소는 이 문장 전체의 대의가 인군이 행화할 때에 반드시 예악이 상수해야함을 밝힌 것이라 하고 악으로써는 민심을 조화롭게 하고, 예로써는 민적을 검속한다.(용악화민심, 이예검민적.)하였는데  황간은 여기서 암암리 화=악의 도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형병은 화, 위락야. 라고 명백하게 못박았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동양인들은 예를 예로서만 고립시켜 생각한 적이 없다. 예는 반드시 락과 상수되는 개념인 것이다. 예없는 악이 없고, 악 없는 예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자의 관계를 밝힌 천하의 명언이 악기에 실려있다.

악자돈화, 율신이종천; 예자별의, 거귀이종지.

악이란 조화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을 거느리고 하늘을 따른다. 예란 그 마땅함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것으느 귀와 더불어 살며 땅을 따른다.

악은 하늘의 세계요 신의 세계다. 예는 땅의 세계요 귀의 세계다. 그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인가? 예술이란 본시 하늘을 향한 인간의 동경이다. 예의란 본시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의 질서이다.

악자위동, 예자위이. 동즉상친, 이즉상경.

악이란 같아짐을 위한 것이요, 예란 달라짐을 위한 것이다. 같아지면 친해지고, 달라지면 공경하게 된다.

선생과 제자,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이 모든 관계에 존하는 예란 이들 사이의 마땅한 바를 분별키 위함이요, 이들의 다름을 확실케 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름과 공경으로만 살 수가 없다. 그러면 인간은 소원해지고 고독해지고 엄숙해지기만 하는 것이다. 바로 음악, 예술이란 이러한 이화의 방향을 동화의 방향으로 전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곧 화요 동이다. 악속에선, 우리가 같이 노래부르고 춤추는 가운데선 수지무지족지도지하는 광열 속에선, 우리는 하나가 됨을 체험한다. 악이란 위동(같아짐을 위함)인 것이다. 예자는 천지지별이요, 악자는 천지지화인 것이다. 악이란 정의 불가변자요, 예란 이의 불가역자인 것이다. 악이란 내에서 동하는 것이요, 예란 외에서 동하는 것이다.(고락야자, 동어내자야; 예야자, 동어외자야.)

여기 예지용, 화위귀. 라 한 말은 예는 분별을 위한 것이지만 예는 악과 이원적으로 분립되는 것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악이 지향하는 화를 성취하는데 그 쓰임(용)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선왕지도는 이 화를 아름다운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선왕지도는 곧 예의 총칭이다. 그것은 예의 다른 말인 것이다. 그래서 작고 큰 일들이 모두 이러한 화를 지향하면서 인간세의 문명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화 즉 악으로써만 아니되는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오직 조화를 위한 조화, 같아짐을 위한 같아짐만을 생각하는 것은 위태롭다는 것이다. 조화는 부조화의 계기를 아니 가질 수 없고, 화동은 별리의 계기를 아니 가질 수 없다. 즉 화(악)는 반드시 예로써 절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로써 절제된 때만이 락(화)은 악으로서의 기능(용)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예가 없는 악은 광란일 뿐이다. 악이 없는 예는 구속일 뿐이다. 바로 논어의 예에 대한 첫구절은 악기에서 말하는 악통동, 예변이 의 오묘한 진리르 예와 화의 친화와 텐션의 관계로써 설파한 것이다.

집주        예자, 천리지절문, 인사지의주야. 화자, 종용불후지의. 거예지위체수엄, 연개출어자연지리, 고기위용, 필종용이불추, 내위가귀. 선왕지도차기소이위미, 이소사대사무불유지야. 승상문이언, 여자이복유소불행자, 이기종지화지위귀, 이일어화, 불복이례절지, 즉역비복례지본연의. 소이류탕망반, 이역불가행야.               정자와: 예승줄리, 고례지용, 화위귀. 선왕지도, 이사위미, 이소대유지. 악승즉류, 고유소불행자. 지화이화, 불이예절지, 역불가행. 범씨왈: 범례지체, 주어경. 이기용, 즉이화위귀. 경자, 예지소이입야. 화자, 악지소유생야. 약유자, 거위달례악지본의. 우위, 엄이태, 화이절, 차리지자연, 예지절체야. 호리유차, 즉실기중정, 이각의어일텬. 기불가행, 군의.

1-13. 유자왈: 신근어의, 언가복야. 공근어예, 원치욕야. 인불실기친, 역가종야

1-13. 유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약속이 의로움에 가까워야 그 말이 실천될 수 있다. 공손함이 예에 가까워야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까운 사람들을 잃지 아니 하면 또한 섬길 만 하다.

도주         노자 17장에 신부족언, 유불신언. 이라는 말이 있다.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신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왔다. 현은 이러한 평범한 해석을 뒤집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다. 모두 신부족, 안유불신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뜻은 믿음이 부족하다. 어찌 불신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 된다. 도무지 그 뜻이 정반대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해석이 곤란해지게 되는 것이다.

선진문헌에서 신의 의미는 곧 인간의 말이다. 신은 곧 언인 것이다. 신은 인간의 말의 신험성(verifiability)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유불신의 불신은 불언이며, 그것은 곧 노자가 말하는 불언지교가 된다. 신부족, 안유불신? 은 이렇게 해석된다: 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믿음이 결여되어 있는데 어찌 불언지교가 가능하겠는가?(자세한 것은 나의 노자와 21세기 제 2권 220~225쪽을 보라)

이 장의 신근어의, 언가복야. 의 신과 언은 결국 같은 단어의 배리에이션일 뿐이다. 인간의 믿음은 모두 말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약속도 결국 말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해석은 이와 같아. 약속이라구 다 약속이냐? 그 약속이 의에 가까운 것이래야 즉 의로운 것이래야 지킬만 한 것이 아닌가? 약속을 그냥 말로 새겨도 상관없다. 인간의 말이란 의로운 것이래야 그 말이 되풀이 되어 실천될 수 있는 것이다.

송(공손함)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공손한 사람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공손한 자일 수록 위선자가 많고 향원(양화13)과 같은 또라이 새끼들이 많을 수도 있다. 공손함도 예에 가까워야만 비로소 치욕을 멀리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문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이 곧 의는 아니지만 그것은 의에 가까운 것이다. 어째서 신이 의에 가까운 것인가? 그 말이 반복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근어의, 언가복야. 를 신이 의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은 그 말이 반복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새기는 것이다. 공근어례, 원치욕야. 도 마찬가지다: 공손함이 예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치욕을 멀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두번째의 해석에서는 신과 공의 부정적 함의의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다.

그런데 해석이 어려운 것은 다음의 인불실기친, 역가 종야. 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인을 친인척(인)으로 보고, 친인척 사람들이 그 부모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즉 부모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 종주로 삼을 만 하다는 식으로 해석하였다. 부모에게 잘하는 친인척은 받들어 줄 만 하다는 뜻으로 새긴 것이다. 그리고 인을 자기 부인으로 보아 다음과 같은 편협한 해석을 내렸다.: 결혼한 여자가 시부모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 비로소 종씨로 간주할 만하다. 나는 이 모든 해석이 개똥같은 주석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추상적인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마누라에 시부모에 종갓집을 들먹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후대의 편견을 공자시대의 가족관계에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

인은 앞 문장의 내용을 받은 전치사에 불과하다. 인신공이 불실기친의 맥락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친도 꼭 부모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부모로 시작해서 친척, 그리고 가까운 친지, 친구들... 나에게서 가까운 연줄의 사람들에 대한 일반명사로 보면 될 것이다. 주자는 친을 가친지인으로 더욱 일반화시켰다. 혈연관계라기 보다는 그냥 교제상에서 친할 수 있는 사람 정도로 새겼다. 종은 동사로서 종주로 모신다. 섬긴다, 받든다의 뜻이다. 평범하게 말하면 존경하다의 뜻이다.

예수는 그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Aprophet is not without honor except in his own country and in his own house.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마태 13:57, 마가 6:4, 누가 4:24)

예수는 왜 자기 고향 나자렛에서, 그리고 친지의 사람들(친)에게서 존경을 받지 못했는가? 우리는 과연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이러한 예수의 말을 만고의 진리처럼 되씹어야만할 것인가?

예수가 고향에서 대접(환영)받지 못한 것은 그 이유가 너무도 간단하다. 너무도 엉뚱한 짓만 하고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를 보아왔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엉뚱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그의 언행은 일상적 존경(daily esteem)의 대상이 아니라 충격이요, 외경이요, 이단이요, 기적적 권능이었다.

예수가 그의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 것은 그 이유가 간단하다. 결국 예수는 小人儒(소인유)의 세계에서 벗어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결코 부정적 맥락에서만 기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자가 소인유의 세계를 벗어날려고 발버둥쳤다면, 예수는 小人儒(소인유)의 괴력란신의 권능의 세계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오히려 그러한 무속적 세계속에서, 그러한 판타지 속에서 진정하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예수는 소인유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은 사실 그가 살았던 중동문명권의 언어였고 삶의 양식(Forms of Life)이었고 가치였고, 힘이었다. 그가 아무리 공자와 같이 대인유의 인문주의적 호학의 스승으로 머물고 싶었다 해도, 그것은 그 문화적 맥락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진부한 범용(banality)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경우, 그가 추구한 대인유의 세계는 상식과의 괴리가 없다. 자연적 질서의 파괴를 초래하는 초자연적 계기가 없다. 그래서 그는 가까운 사람에게서부터 존경을 받는 인간이 될 것을 권유한다. 예수의 기적도 좋다. 예수의 소피아(지혜)도 예수의 뒤나미스(권능)도, 그 궁극적 의미는 가까운 사람을 잃지 않는데 있다(불실기친)고 권유한다.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 자는 진정한 선지자가 될 수 없다고 유교는 가르친다. 나만 해도 그렇다. 어려서부터 나와 같이 큰 또래 아이들은, 지금의 나의 학식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명구를 푸념처럼 뇌까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진정으로 나의 학식을 인정하는 마음이 우러 나오도록, 겸손하고 인내하며 더욱 더 큰 실력을 축적하여 그 가까운 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진리를, 아내로부터 자식으로부터 부모로부터 형제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이야말로 지난의 일이라고 하는 이 평범한 진리를 이 장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유교는 항상 이렇게 우리의 범용의 허를 치고 들어온다. 그리고 고향에서 대접받는 선지자는 없다는 식의 모든 가치명제를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통념을 하루속히 타파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그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속에서만 의미 있었던 맥락적 언어였던 것이다. 재검토될 수 없는 진리는 진리라 아니다.

집주   근, 원, 개거성,        신, 약신야. 의자, 사지의야. 복, 천언야. 공, 치경야. 례, 절문야. 인, 유의야. 종, 유주야. 언약신이합기의, 즉언필가천의. 치공이중기절, 즉능원치욕의, 소의자불실기가친지인, 즉역가이종이주지의. 차언, 인지언행교제, 개당근지어시이로기소종. 불연, 즉인잉구차지간, 장유불승기자실지회자의.

1-14. 자왈: 군자식무구포, 거무구안, 민어사이신어언, 취유도이정언, 가위호학아이.

1-1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하며,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삼가할 줄 알며 항상 도가 있는 자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르게 한다. 이만하면 배움을 좋아한다 이를만 하다.

도주   국민학교 아동시절부터 입술에 붙었던 이런 말들, 나는 어린시절부터 엄마에게서 성경구절을 배웠고 또 이런 고전의 향기를 배웠다. 이 장의 말은 내 또래의 사람들만이래도 교양있는 집안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실 논어는 논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명 속에 지속되어온 우리 삶의 가치의 전부였다. 식무구포하며 거무구안하며 민어사이신어언이요 취유도이정언이면 가위호학야이니라! 그 얼마나 정감있는 우리의 언어였던가?

자가라샤애 군자 식애포호말 구티말며 거호매 안호말 구티말며 사애 민하고 언애 신하고 유도애 취하야 졍하면 가히 혹을 호한다 니랄디니라(율곡언해)

이 장은 인간 공자의 매우 소박한 원래의 모습을 담고 있는 오리지날한 파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 언어가 질박하고 개념적 비꼬임이 없다. 예지용, 화위귀. 따위의 난해한 개념적 절구가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소박한 일상적 언어가 공자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군자는 공자의 이상이요, 공문 커리큐럼이 지향하는 인간상이었다. 천자라 할 지라도 군자의 모습을 위배할 수 없다.

식후구포하고 거무구안하라는 명령은 반드시 빈핍한 식사와 궁핍한 주거환경에 만족하라는 뜻은 아니다. 논자 80장에 감기식, 미기복, 안기거, 락기속. 이라 했듯이 먹는 것을 달콤하게 하고, 사는 것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우리 문명적 삶의 기본이다. 그러나 여기 공자는 어디까지나 전체의 문맥을 호학이라는 한 줄기에 잡고 있는 것이다. 호학의 조건으로서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배움을 좋아하는 자들은 먹되 배부른 것을 구할 시간이나 관심이 있을 수 없고, 살되 편안한 것을 구할 시간이나 관심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배부르게 먹기 위해 사는 인간, 편안하게 살기 위해 사는 인간, 이런 인간들처럼 굴욕적이고 자기기만적이며, 이기저이며 몰가치적인 인간이 없다. 일상생활에서 먹되 배부르지 않게 먹는다는 명제는 참으로 실천키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조금만 입맛이 당겨도 과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식은 단순히 나의 위장의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영혼의 타락을 초래하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바로 그러한 탐식의 마음이 공무원(사)의 독직과 연결되는 타락의 바탕인 것이다. 집도 편안하게 꾸밀려면 한이 없다. 돈을 쳐들이기 시작하면 무한정 들어가는 것이 집이다. 조촐한 방 한칸, 깨끗한 온돌장판에 창호지 발라 놓고 조그만 책상에 앉아 나의 세계를 꾸며놓아도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것이다. 빗자락 하나, 걸레 하나면 족할 것이지 뭔 인테리어 디자인이냐?

민어사이신어언 이라는 말은 교언영색부터 일관되어 내려오는 공자의 인의 사상의 주제이다. 똑같은 말이 조금 표현을 달리하여 이인 24에서 군자욕눌어언이민어행(말에는 어눌하고 행동에는 민첩하다)로 나오고 있다. 모두가 공자의 일관된 입장, 언어적 표현에 대한 거부감, 언어적 표현보다는 행동의 실천이 앞서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강력하게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는 말빠른 인간처럼 경멸스러운 인간은 없었다. 요즈음같이 말(verbalism)을 중시하는 가치관 속에서는 공자의 이런 태도는 시대착오적인 가치로 보일 수도 있으나, 진실을 추구하는 모든 현대인이 이러한 공자의 말에 심복하지 않을 자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공자가 증오하는 것은 웅변이나 달변 그 자체가 아니다. 실천이 앞서지 않는 공허한 웅변이나 달변이나 능변이 가증스러운 것이다.

취유도이정언은 많은 사람들이 애써 번역을 어렵게 하고 있는데, 그냥 액면 그대로 쉽게 해석하면 된다. 유도는 유도자이다. 고전한문에서는 추상적 속성만으로 그 속성을 구현한 사람이나 물건의 뜻이 된다. 취는 나아간다. 즉 그리로 간다. 그것에 달라붙는다. 는 뜻이다. 정언도 내가 내 자신을 바르게 한다이다. 정은 곧 광정의 정이다. 정을 유도자에 의하여 바르게 된다는 식으로 대부분 해석하는데 이것은 오석이다. 어떻게 유도자가 나를 바르게 할 수가 있겠는가? 바르게 함은 오직 나의 실존적 책임이다. ..............and so is corrected by them.(Brooks) .............and find improvements in their company(Ames) 등은 모두 에둘른, 좋지 않은 번역이다.

문장 전체를 복 적에 호학의 내용이 식, 거, 사, 도의 이런 일상적 사태에 그치는 것인가? 학문의 내용은 문자를 익히고 독서하는 일이 따로 있는데 앞서 자하의 말대로 미학, 오필위지학의 와 같은 식으로 이러한 일상적 덕목의 중요성만을 강조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이 이 장에 대하여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는데 나는 이런 질문은 퍽으나 가소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공자학단에 있어서 문자를 익히고 독서를 하며, 예악을 배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식무구포하고 거무구안 하는 것과 분리되어 이해된 적은 없다. 특히 마지막의 취유도이정언 이라는 말 속에는 스승을 만나 나의 무지를 끊임없이 깨우친다는 함의가 들어가 있다. 즉 정의 내용에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독서의 함의가 배제될래야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먹되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고, 살되 편안키를 구하지 않고, 일에 민첩하고 말을 삼가하며, 훌륭한 스승밑에 나아가 공부하는 것, 이 4가지 사태는 단 하나의 학(배움)의 사태인 것이다. 끊임 없는 삶의 과정인 것이다. 공자의 사상을 압축하면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단 두마디이다. 하나는 호학이요, 하나는 인디아. 그리고 그의 솔직 담백한 인품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간은 호학의 인간이다. 호모 스투덴스(homo studens)인 것이다.

가위호학야이는 텍스트에 따라 가위호학이의(한석경), 하위호학야이의(황간)의 변화가 있다. 그리고 취유도이정언의 언은 의가 확실한 단정을 나타나는 조사임에 비하면 단정은 단정이되 그 단정의 느낌을 부드럽게 하는 조사이다.

집주         호, 거성.             불구안포자, 지유재이불가급야. 민어사자, 면기소부족. 근어언자, 불감진기소유여야. 연유불감자시, 이필취유도지인, 이정기시비, 즉가위호학의. 범언도자, 개위사물당연지리, 인지소공유자야.           윤씨왈: 군자지학, 능시사자, 가위독지력행자의. 연불취정어유도, 이면유차, 여양묵학인의이차자야. 기류지어무부무군, 위지호학, 가호?

1-15. 자공왈: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자왈: 가야,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자공왈: 시운: 여절여차, 여탁여마, 기사지위여? 자왈: 사야, 시가여언시이의. 고저왕이지래자.

1-15. 자공이 말하였다.: 가난하면서도 아첨치 아니하고 부하면서도 교만치 아니하면 어떠하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괜찮지.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같지는 못해. 자공이 말하였다: 시경에 자른 듯, 다듬은 듯, 쪼은 듯, 간 듯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겠군요?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야! 이제 비로소 너와 시를 말할 수 있겠구나! 지난 것을 알려주니 올 것을 알아차리는구나.

도주          앞서 말했듯이 자공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여기 자공의 질문은 학문하는 자로서 이재에 밝은 자신의 파라독시칼한 상황에 대한 깊은 반성의 톤으로 시작하고 있다. 자공의 질문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신이 반성할 수 있는 맥시멈의 진리치를드러낸 것이다.

선생님! 빈궁하면서도 아첨하지 아니하고, 부유하면서도 교만치 아니한다면 그래도 훌륭한 삶의 자세라 할만 하지 않겠습니까?

이 한 질문은 자공에 있어서는 뼈저린 반성의 외침이었다. 내가 지금 비록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말자! 또 세상이 바뀌어 내가 돈을 다 잃어버리고 가난하게 되었을지라도 아첨하지 말자! 이렇게만 살면 우리 훌륭한 공자님의 제자라 할만하지 않겠는가? 자공은 공자님의 입에서 넘 참으로 훌륭하다 는 긍정의 말씀을 잔뜩 기대했을 것이다. 그 긴장의 순간! 공자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한 마디는 무엇이든가?

가야

이 순간 자공의 가슴이 저미어졌을 것이다. 철컹! 결코 긍정의 대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야는 부정의 온화한 표현일 뿐이다. 중국사람이 좋아하는 차불다료란 표현과 별 차이가 없는 표현이다. 그것은 호극료가 아닌 것이다. 그 다음엔 가시(but)로 연결되기 마련인 것이다. 공자가 자공의 질문에 대한 부정끝에 제시한 새로운 차원의 긍정적 진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이.

빈궁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호례하는 자만 같지 못하다.

빈에 대한 무첨이나, 부에 대한 무교는 모든 무라는 부정사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부정적 가치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부정적 가치에 의한 소극적 대처로서는 군자다운 삶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공자는 빈에 대한 락을, 부에 대한 호례를 새롭게 제시한 것이다. 많은 판본이 빈이락을 부이호례와 대구로 만들기 위해 빈이락도로 만들고 있는데, 요번에 나온 정주한간에 그냥 빈이락으로 되어 있어 현존하는 판본이 고판본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 입증되었다. 우리나라의 부자들은 세금내기가 무서워 재단을 만든다. 참으로 그 돈으로 진정하게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러한 문화사업에 조직적으로 투신하는 실례가 별로 없다. 빈궁해도 비굴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빈궁함 속에서도 무언가 진정한 삶의 기쁨(Joy of Life)을 발견할 줄 아는 자가 너무도 적은 것이다.

이 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공에게는 어떤 영감이 스쳤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모자랐다는 어떤 깨달음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 때 그 순간 그의 영감을 스치는 것은 그의 고국, 위나라의 먼 옛날 노래였다.

첨피기오
녹죽의의
유비군자
여절여차
여탁여마

저기 저 기수의 물구비를 보라! 푸른 대나무 숲이 하늘하늘 우거졌구나  아 문체나는 군자여! 자른 듯 다듬은 듯 쪼은 듯 간 듯.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이 싯귀는 위나라 무공의 덕성을 찬양한 노래라는 것이다. 그는 문장이 빛났으며 간언을 잘 들어 예로써 자신을 잘 방비한 명군이었다는 것이다. 여기 여절여차여탁여마 는 옥석을 자르고 갈아서 서서히 완벽한 예술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인간의 덕성의 함양의 과정에 비유한 말이라는 것이다. 절은 골에 대하여, 차는 상에 대하여, 탁은 옥에 대하여, 마는 석에 대하여 쓰는 가공기술의 언어라는 것이다.

자공이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자공의 의도는 곧 자신의 깨달음을 이 시에 은유하여 자신의 수덕의 결심을 나타낸 것이다. 삶에 대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시각을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꾸는 작업이 곧 못생긴 옥석을 갈고 닦아 세련된 작품을 만들듯이 자신의 인격을 다듬어 나가는 작업이 될 것이라는 결의를 구가했던 것이다.

이 때, 공자는 자공의 이름을 부른다: 사여! 사는 자공의 명이다. 즉 애명이다. 아이적부터의 이름이요, 사랑스러운 이름이다. 중국 고대 습관으로 명을 부른다는 것은 아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의 친근감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다. 명은 보통의 관계에서는 함부로 부를 수 없다. 후대에서는 제자에게조차 명으로 부르는 것은 실례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사랑하는 제자를 부를 때는 항상 명으로 불렀다.

이제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이 말은 공자의 극찬이다. 제자의 깨달음을 상찬하는 찬미의 말이다. 공자는 이와 똑같은 말을 다시 한 번 자하에게도 던지고 있다.(팔일 8)

고제왕이지래자 는 사실 문자 그대로는 해석이 어렵다. 지난 것을 말해주니까 올 것을 안다는 것의 단순히 과거-미래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여기서 과거는 직접적으로 미약빈이락, 무이호례자야라는 공자의 교훈을 가리킨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한 귀퉁이를 튕겨주니까 깨달음이 줄줄이 따라온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레게의 영역이 아름답다: I told him one point, and he knew its proper sequence. 주희가 왕자는 말로 표현한 것이요, 래자는 말로 표현하지 않은 것이라 주한 것도 매우 좋은 해설이다.

사야의 야는 사라는 실체를 한 번 거리를 두어 확인시키는 의미를 가지는 조사이다. 기사지위호는 기위사호(그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하는 말이겠군요)의 평상적 어순에서 사를 도치시켜 그사이에 갈지를 삽입시킨 용법이다. 사를 강조하는 어세가 들어가 있다. 고제왕의 제는 우리말로 저로 발음한다. 지호, 지어의 축약형이다. 부이무교는 헌문 11에 빈이무원난, 부이무교역 라는 구절에 한 번 더 나오고 있다. 좌전 정공 십삼년에 위나라의 사유의 말로서 부이불교자선(부유하면서 교만치 않은 자는 드물다)이라는 비슷한 표현이 또 나오고 있다.

20세기는 고대중국의 문화, 역사 각 방면에 있어서 놀라운 새로운 발견이 속출한 세기였다. 갑골문의 발견을 비롯하여 지하로부터 고대중국의 엄청난 일차자료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에 따라 중국 고대 문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들이 축적되어갔다. 그것은 단지 새롭다는 차원을 떠나 우리의 인식의 패러다임을 근원적으로 혁명시키는 그러한 발견이었다. 따라서 기존의 경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시각이 요구되었다. 가장 크게 난도질을 당해야만 했던 경전이 바로 시경이었다.

시경의 시는 written poem 이라기 보다는 그것은 일차적으로 노래였다. 즉 노래의 곡조가 사라지고 가사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시를 말했을 때는 그것은 반드시 노래(Songs)를 말하는 것이었다. 시경에서는 노래를 풍이라 부르는데 풍은 민요다. 국풍이란 각 나라(국)의 민요(풍)다. 즉 국풍은 민요집이다. 민요는 민중의 삶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정감의 발출이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어떠한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조작되 체계적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정감의 발출이다. 그래서 악기에서는 감어물이도, 고형어성. 이라 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심)이 사물에 촉발되어 저절로 움직인 것이 소리로 구체화 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을감이동 즉 감동이라 표현한 것이다. 시는 감동의 세계다. 그것은 이지적 조작이 아니다. 그래서 악이란 정의 불가변자요, 예란 이의 불가역자라 한 것이다.

기오의 노래 한 소절은 발랄한 민중의 감동을 표현한 것이다. 무공의 덕이라든가, 인간의 내면적 덕성의 수양과는 완전히 무고나한 그들의 일상적 풍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다.

기수의 얼음이 풀리고 화창한 봄날씨가 되면 강변에 푸른 대나무 숲이 무성하게 우거지기 시작하고 남녀의 가슴이 봄바람에 설레이기 시작할때, 청춘 남녀가 모두 강변으로 짝짔기를 하러 나온다. 그 때 멋있는 사내가 수레를 몰고 아름다운 새악씨들이 있는 곳을 지나간다. 소남의 표유매나 위풍의 목과라는 노래가 애기해 주듯이 아릿다운 새악씨는 마음에 끌리는 남자가 지나가면 과실을 따서 던진다. 그리하면 남자는 답례로서 패옥을 선사하여 서로의 사랑을 확약하는 증표로 삼는 풍습이 있었다.

훨씬 후대 서진때의 이야기지만, 세설신어 용지 편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고사가 실려있다. 당대의 시부에 능했던 특히 애뢰에 능했던 명인 반악(247~300)은 어려서부터 미모가 출중났고, 기동이라 불릴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그가 비파를 들고 낙양시가를 거닐면 그의 수레에는 사방에서 부녀들의 하느적거리는 손길에서 날라온 과일들이 가득 찼다. 그런데 당대의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고 한 그 유명한 삼도부의 저자 좌사(250~305)는 추남이었다. 그가 낙양의 거리를 거닐면, 그의 수레에는 개왓장(와석)이 가득찼다.(진서 권오십오, 번악전 에는 좌사가 강재로 되어있다.)

여기 위풍의 제 1수인 기오의 노래도 분명 이런 관습과 관련되어 있는 민요다. 유비군자는 아 저 아름다운 사내의 뜻이다. 논어가 말하는 도덕적 의미의 군자가 아니다.

첨피기오
녹죽의의
유비군자
여절여차
여탁여마
슬혜한혜
혁혜훤혜
유비군자
종불가훤혜

저기 저 기수의 물구비를 보라! 푸른 대나무 숲이 야들야들 우거지고, 아 저 아름다운 님. 자른 듯 다듬은 듯. 쪼은 듯. 간 듯. 무게있고 위엄이 넘치는 저 사내. 빛나고 훤출 아름다운 님이여. 종내 잊을 수 없어라!

이 노래에서 여절여차, 여탁여마는 한 사내의 쎅시한 외관을 형용하는 아주 최상급의 표현들이다. 포마드를 짝 바르고 족제비 양복을 샥 늘어뜨린 기생홀아비같은 청년을 형용할 때 깎은 듯이, 쏙 빠진 듯이, 쪼아낸 듯이, 빤질빤질 갈아낸 듯이 그렇게 단장한 모습을 형용하는 최상급의 표현이 여절여자, 여탁여마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절차탁마라 하면 옥을 갈아 빛나는 작품을 만들듯이 모나는 성격을 갈아 훌륭한 덕성을 함양한다고 하는 수덕의 의미로 풀이하고 사용하고 있다. 그것이 유행가의 그 때 그 사람의 쎅시한 외모를 형용하는 표현이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치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당대의 유행가 위풍민요의 일차적 의미는 공자-자공 사이에서 이해된 세만틱스는 아니었다.

공자는 시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이미 시를 도덕적 의미로 왜곡시켰다. 시경의 왜곡은 이미 공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처녀탄생을 70인역 이사야 7:14를 인용하여 정당화시키려 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마태 1:23)

그러나 여기의 처녀의 원어는 파르테노스인데 이것은 처녀가 아닌 그냥 젊은 여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용의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공자는 시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시류의 구역질나는 도덕적 왜곡의 전형이라고 보기는 어려워도 이미 자기사상의 시각에서 보는 어떤 해석의 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공자의 시의 해석은 생기발랄하고, 민요의 원뜻을 꿰뚫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공자를 뛰어넘어 시의 해석에 있어서 공자와 대결하고 공자의 해석을 광정하는 지혜의 눈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집주       락, 음낙. 호, 거성.                 철, 비굴야. 교, 긍사야. 상인, 익어빈부지중, 이부지소이자수, 고필유이자이병. 무첨무교, 즉지자수의, 이미능초호빈부지의야. 범왈가자, 근가이유소미진지사야. 락즉심광체반, 이망기빈; 호례즉안처선, 악순리, 역불자지기부의, 자공재식, 개선빈후부, 이당용력어자수자. 고이차위문, 이부자답지여차. 저허기소이능, 이면기소미지야.   차, 칠다반. 여, 평서.                      시, 위풍기오지편. 언치골각자, 기절지이복차지; 치옥석자, 기탁지이복마지, 치지이정이익구기정야. 자공자이무첨무교위지의, 문부자지언, 우지의리지무궁. 수유득언, 이미가거자족야, 고인시시이명지.   왕자, 기소이언자; 래자, 기소미언자.                        우안, 차장문답, 기천심고하, 고부대변설이명의. 연부절즉차무소시, 불탁즉마무소조. 고학자, 수불가안어소성이불구조도지극치, 역불가무어허원이불찰절기지실병야.

1-16. 자왈: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

1-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라.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할지니.

도주          이것은 학이편의 첫 장에서 이미 논파한 인부지이불온을 생각하면 그 문제의 맥락은 쉽게 풀린다. 공자의 일생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데 대한 한맺힌 생애였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한을 새로운 보편적 인의 간의 지평으로 확산시켰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한이 있다면 우리는 그 한을 역으로 내가 이 순간 남의 휼륭한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자각의 내성으로 회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이 타 텍스트에 보면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야. 로 되어 제일 끝의 인이 빠져버린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도 좋은 해석이 가능하다. 이때 부지는 단순히 내가 타인을 몰라본다는 협애한 의미를 떠나, 내가 진정으로 알려지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참으로 남에게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것에 대한 냉정한 자기 반성의 뜻이 되는 것이다. 남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내면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가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인 14에 불환모기지, 구위가지야. (남이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참으로 알려질 수 있기를 구하라)라고 한 뜻과 내면적으로 상통하게 된다. 나의 내면적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이 나를 모른다는 것을 탓하기에 앞서 내가 참으로 알려질 수 있는 내면적 실력을 함양하는데 더 주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구하지 말라! 나에게 알려질 만한 그 무엇이 참으로 내재하고 있는가를 반성하자!

헌문 32에 공자는 말한다: 불환인지불기지, 환기불능야.(남이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치 말라. 자신의 능하지 못함만을 걱정할지니). 위령공 18에 공자는 말한다: 군자병무능언, 불병인지불기지야.(군자는 자신의 무능함만을 병으로 여겨야 한다. 남이 자기를 알지 못함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

공자의 사상에 있어서 남과 나의 관계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일차적인 것은 아니다. 남이 단절된 나의 절대적 반성이 방편적으로 선행되어야만 남과의 관계가 항상 보편적 지평에 놓이게 된다. 남과 나가 어떤 공리주의적 수수의 관계에 놓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공이 공자에 끊임없이 미칠 수 없었던 바의 요체였던 것이다.

브룩스는 이 장을 양화편 뒤로 옮겼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치 않는다. 학이 편은 이 편 나름대로 일관된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부지이불온에서 시작하여 불환인지불기지로 끝나는 어떤 기승전결을 이 학이 편의 편자는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판단은 독자의 상상력에 맡긴다.

집주          윤씨왈: 군자, 구재아자, 고불환인지불기지. 부지인, 즉시비사정, 혹불능변, 고이위환야.

감사의 말

나는 논어를 도올서원 제이림, 제칠림, 제십일림, 제십사림에서 네 차례 강론하였다. 이 도올논어는 나의 네차례 강론의 총결판이다. 그런데 나의 도올서원 네차례 강론의 내용을 모두 구술하여 정리해준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한영목군이다. 한군은 나와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동문이며 도올서원의 재임이다. 그는 나의 강의를 녹취하여 있는 그대로 글로 옮겨 도올선생 논어강의라고 예쁘게 장정하여 나에게 보내 주었다. 본서를 저술하는데 나는 이 한군 원고의 도움을 크게 입었다. 강의대만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마는 무수한 단상들이 생생하게 적혀있었다. 의사로서 없는 시간을 쪼개 나의 강의를 모두 구술한 그의 형설의 공은 이 자리를 빌어 밖에 어찌 달리 감사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는 현재 봉천동에서 화성 한의원이라는 조그만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주희, 석희, 주연이가 무럭무럭 자라나 주기만을 빈다.
(출처: 이선우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