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십자군 전쟁(十字軍, crusades) (과연 문명의 충돌인가?)

이강기 2015. 9. 19. 10:58
십자군 전쟁(十字軍, crusades)  (과연 문명의 충돌인가?)

                                - 이선우 -
  
서 론 - 유럽과 중동의 대립은
          십자군 전쟁에서 시작되었다.

본론
1-십자군 전쟁의 배경 우르비아누스
   2세의    네 가지 목적
2-십자군 전쟁의 전개
   1)전쟁의 시작
   2)십자군의 만행
   3)이슬람 세계의 반격
3. 십자군 전쟁의 긍정적 부정적 배경 -
    긍정적 배 경 -부정적 배 경
4.십자군 전쟁의 의의

결론 -십자군 전쟁은 우연인가?
        역사적 흐름의 산물인가?

<참고문헌>



서론

유럽과 중동의 대립은 십자군 전쟁에서 시작되었다.


1)서유럽에서 십자군 시대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진정한 혁명의 도화선이었다면 동방에서 이 성전은 쇠퇴와 혼돈의 기나긴 세기로 이어진다‥‥서유럽의 상징인 이 근대화를 거부하면서까지 문화적 종교적 동일성을 확립해야만 했을까? 아니면 동일성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근대화의 도상에 참여해야 했을까 ?

이란도 터키도 아랍세계도 이 난제를 푸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외국인을 대단히 혐오하는 극단적인 교권 통합주의 국면과 강요된 서구화 국면 양측을 폭력으로 자꾸만 번갈아 교체하고 있다. 아랍세계가 야만인으로 여겼으며 싸워서 물리친 프랑크족이지만 그 이후 아랍영토를 지배하는 데 성공한 그들에게 이끌린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 아람세계는 십자군을 다 지나간 과거의 한 사건으로 간주하자고 결론지을 수 없다. 사람들은 종종 7세기 전에 끝난 사건들 때문에 아람인들 대게는 회교도 일들이 서양인들에 비해 어느 정도로 영향을 받은 채로 있는지를 알게 되고는 놀라게 된다. 그런데 3세기가 경과하기 전에 아랍세계의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예루살렘의 몰락과 점령에 관한 살라딘의 경우를 참조한다. 이스라엘은 일부 공식적인 입장으로나 대중적인 의미로나 새로운 십자군의 국가에 동화되어 간다. 팔레스타인 해방군의 세 갈래 분파가운데 하나는 여전히 히틴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1956년 수에즈 군대파견에 대해서는1191년의 원정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와 영국군으로 구성된 십자군으로 인식되었다.

 끊임없이 침략 당해온 회교도 세계에서 일부 광신자에게 위험천만한 강박관념의 형태를 띤 피해망상증이 나타나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1982년 5월 13일에 터키인 메메트 알리 아그사가 '십자군의 최고 지휘관인 요한 바오로 2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고 편지에 이유를 밝힌 뒤 교황에게 총구를 겨눈 것을 보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 같은 개인행위 이전에 아랍인은 항상 서유럽을 운명적인 적으로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정치적인 것이건 군사적인 것이건 혹은 석유에 관한 것이건 간에 서양에 대한 모든 적대행위는 적에 대한 합법적인 보복에 불과하다. 그리고 두 세계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오늘날까지도 아랍인들이 신선모독으로 여기는 십자군 전쟁이었다.

지난 9월 12일 오후 8시 40분 경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리스트에 의해 미국의 무역센터 건물이 붕괴되었다. 이로 인해 세계무역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던 사람들과 펜타곤 근무자들, 충돌에 이용된 여객기의 탑승객을 포함하여 세계 62개국 오천여명의 사람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슬람과 서양세계의 반목과 증오는 그 뿌리가 깊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갈등의 시작이 십자군원정이었음을 알 수 있게된다. 그러므로 세계사에서 유럽과 아랍 , 서양과 중동의 최초의 충돌인 십자군 전쟁이 어떤 원인으로 일어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도출되었는지 알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전쟁직후 한때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이 이 전쟁의 원인으로 부각되었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시각보다도 서양사의 경제 사회적 흐름과 아람세계의 분열에 초점을 맞추어 십자군 전쟁과 아프가니스탄의 전쟁 원인을 분석하고자 한다.



본론

I. 십자군 전쟁의 배경


2)마호메트가 죽은 후 이슬람의 모든 지역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최고지도자인 칼리프의 체제아래 재편된다. 그러나 옴미아드 왕조와 전기 아바스 왕조 때에 최고 전성기를 누린 칼리프 체제는 기나긴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 결과 칼리프의 정통성을 문제 삼는 세력들이 늘어나고 세력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는 이탈을 하게된다. 한편 서유럽은 오리엔트 지방 에 비해 미개한 듯 보이지만 대변혁을 준비하고 있었다. 9세기 초 서유럽의 인구는 적고 농민은 가난하였다. 문화는 궁정과 수도원에서만 향유되었다. 하지만 그 후 한 세기가 지나자 외적으로 인한 침략이 줄어들고서 유럽의 농업 생산량도 증가하게 된다. 또 외적의 침입으로 왕권이 약해지자 지방의 소영주들이 발호하게 된다. 그들은 왕을 대신하여 지방의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직업군인들을 채용했다. 그들이 '기사'다. 기사들은 용기 충성심 명예 등을 소중히 여겼다. 이를 기사도라 하였다.

이 시기에 교회에서는 기사도에 종교적인 성격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 이유는 영주들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기사계급을 자신의 세력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기사는 영웅으로 여겨지며 교회와 가난한자 과부 고아들을 신의 이름으로 보호하는 의무를 부여받게 된다. 물론 기사가 해야할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이교도에 대한 투쟁에 관한 것이었다.

3) 당시 중세 서유럽의 정치적 향방을 놓고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황제와 교황이 주도권 싸움을 벌이게 된다. 11세기말이 되자 교황 우르비아누스 2세는 성지에 기독교도의 주권을 수립하기 위해 성지 대원정을 계획하게 된다. 교부들은 기독교국가를 침입자들로부터 지켜내야 할 조국으로 설정해 정의로운 전쟁에 대한 명분을 치밀하게 다듬어간다. 그리스도의 삶의 장소로서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은 그들의 정신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성지순례는 죄를 사던 받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생각은 천국과 예루살렘을 동일 시 하는 효과를 가져 왔다. 11세기 이전까지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꾸준히 성지 순례를 해왔다. 그러나 11세기 초반 파티마조 칼리프인 알 하킴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면서부터 순례가 어렵게되었다. 이 때 교황은 대원정의 첫 번째 목표를 성지 탈환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1095년에 교황 우르비아누스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결성을 역설했을 때 그는 종교적인 의도 뿐 아니라 정치적인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교황은 성지 정복이라는 거대한 작전이 기독교국가의 골치 아픈 존재들, 즉 기사들을 교황의 지휘아래 결집시키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우르비아누스2세의 네 가지 목적>

그레고리우스7세의 정책을 답습한 우르비아누스 2세의 성지 십자군 운동에는 적어도 네 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 하나는 그리스 정교회를 로마 교회로 통합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막강한 지원군을 동방에 파견함으로써 우르바누스는 비잔틴으로 하여금 서유럽의 위력에 압도당하도록 하고,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로마 교회의 우위를 다시금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만일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는 그레고리우스가 추구한 교황 군주국가 정책에 커다란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두 번째 동기는 교황 최대의 적인 독일 황제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1095년에 이르러 하인리히4세는 군사적으로 지극히 강대해져서 우르바누스는 그에게 쫓겨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도망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므로 교황은 독일인을 제외한 모든 서유럽인에게 십자군을 호소함으로써 황제가 편협하고도 비기독교적인 박해자임을 알리고, 아울러 서유럽의 영적 지도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십자군의 지휘관은 모두 프랑스 귀족들이었다)

셋째로 우르바누스는 대규모 병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유럽의 대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미 10세기말부터 프랑스 교회는 봉건기사들의 전투를 줄이기 위해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즉 '신의 평화'라 하여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을 금지했고, '신의 휴전'이라 하여 특정한 축일에 전투행위를 금지했던 것이다.

우르바누스는 제1차 십자군 소집 직전에 이 평화운동을 교황령에 의해 승인한다고 처음으로 발표했고 이를 확대시킬 것을 공표했다. 분명히 십자군은 평화운동과 연관되어 있었다. 사실 우르바누스는 거칠기 짝이 없는 전사들에게, 정말로 싸우기를 원한다면 해외로 나가 기독교의 대의를 위해 십자군으로서 정당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예루살렘 성지의 회복이라는 목표 그 자체가 우르바누스에게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예루살렘은 지구의 중심이자 기독교의 가장 거룩한 성지였다. 예루살렘 순례는 결코 방해받아서는 아니 되었고, 예루살렘에 대한 지배권은 기독교인이 직접 가져야만 했다. '세상의 올바른 질서'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십자군 전쟁의 전개

1)전쟁의 시작


동시대인들에게는 오로지 종교적 동기만이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순례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가장 널리 행해지던 고해방식이었다. 특히 예루살렘 순례는 순례 가운데서도 가장 성스럽고 효과 있는 것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하물며 기독교 최고의 성지를 이교도의 수중에서 되찾기 위한 예루살렘 무장 순례는 단연 최대의 영적 보상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클레르몽에서 우르바누스2세는 십자군 참가자 전원에게 교회에서 부과하는 다른 모든 고해를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교황의 약속이 있은 후로 십자군 설교자들은 우르바누스의 재가도 받지 알은 채 더욱 큰 약속을 하고 말았다. 大赦를 약속했던 것이다. 이것은 십자군 참가자 전원에게는 내세에서 연옥의 형벌이 완전히 면제되며, 십자군 참가 도중 사망한 자의 영혼은 곧장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대사는 실로 파격적인 은사였으며 그것을 얻고자 군중이 쇄도했다.

일단 군중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자, 그들은 설교자의 언변에 고무되어 종교적 열광에 빠진 채 집단적 히스테리 증상까지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불신자들의 세상을 일소하기 위해 선택받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은 가공할 결과로서 그들은 동방으로 원정을 떠나기도 전에 유럽의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서유럽 反유대주의의 효시였다. 교황은 부름에 화답하려는 자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제기된 소송을 취하해 줄 것을 약속한다. 십자군들은 성지 탈환의 사면을 완수하면 죄를 사면 받게 되는 것이다. 교황의 부름에 서유럽 각지에서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4)다음은 우르비아누스2세가 1095년 클레르몽 종교회의에서 행한 연설로서, 공식적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 자리에 참석했던 4사람이 기록하고 있다. 그 중 두 사람의 글이다.

1. Fulcher: 십자군에 참여하는 사람은 십자군에 참여해서 죽으면 즉각적으로 모든 죄가 사하여지고 바로 천국에 갈 수 있다. 귀신을 믿는 천박한 민족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민족을 점령한 것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인가 기독교인들의 자긍심에 호소했다.

'같은 신앙인들끼리 부당하게 싸우는 자들은 불신자들과 싸우는 편이 낫고, 나아가 봉건 영주들도 자기들끼리좌 잦은 싸움을 끝내고 이슬람교도와 싸우는 것이 낫다. 오랫동안 도적질을 했던 사람은 이번 기회에 기사가 되어라. 적은돈을 보상으로 받고 용병으로 팔동하는 자들은 이번 기회에 영원한 보상을 받기 위하여 이 전쟁에 참여하라. 십자군에 직접 참여하는 자들은 땅을 팔아서 경비를 조달하라.'

2. Robert: 이슬람교도들은 기독교도들을 붙잡아서 노예로 팔거나, 살해하고, 교회당을 파괴하고, 제단을 헐었다. 그리스도인 들을 붙잡아서 화살 과녁으로 삼았다. 잔인한 이슬람교도들의 박해상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다.

'이 땅에는 인구가 많다. 땅은 넉넉지 않다. 성묘가 있는 곳에, 좌정하고 있는 악한자들을 쫓아 내고 그땅을 차지하자.그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

이 설교에 나타난 것처럼 이교도들에 대한 적개심, 경제적인 동기, 새로운 땅을 찾아 개척하는 등의 동기에서 십자군은 비롯됐다.

3. 십자군에 참여해서 죽으면 죄가 사하여 진다는 이러한 생각은 단순히 우르반2세의 생각만은 아니었다. 고대 오리겐의 '순교로의 권면' 이라는 책에서 세례를 받고 짓는 죄에 대해서는 순교의 피로써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을 받았듯이 순교자의 피는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이다.

4. 레오4세(847 - 855): 프랑스군에게 이교도와의 전쟁에서 순교하면 지난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설교하였다.  또 1096년 수확기가 끝난 8월 중순부터는 많은 평민들이 십자군에 가담하게 된다. 그 해 가을 평민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게 된다. 기나긴 행군동안 그들은 유대인을 죽이고 헝가리와 비잔틴제국을 약탈한다. 평민 십자군들은 비잔틴 제국을 통과하던 중 투르크족에게 두 번 패하면서 위기를 겪는다.  이때 제후들의 기사단이 당도하게된다. 제후들의 도움으로 평민 십자군은 위기를 넘기게 된다. 비잔틴은 십자군들을 투르족을 막을 용병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비잔틴의 요청에 따라 제후들은 투르크족을 물리쳤다. 그리고 비잔틴에게 그들이 오리엔트 지방에서 점령하게 될 땅에 대해서 종주권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다. 이 때부터 제후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원정을 임하게 된다. 어떤 이는 오리엔트에 세울 공국에 욕심을 내게되고 다른 이는 종교적 구원을 욕심내게 된다.

1097년 10월20일 십자군은 안티오크에 도착한다. 안티오크는 도시위로 성채가 450미터나 솟아있는 요새였다 그러나 내부의 한 반역자의 내통으로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다.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제후들은 안티오크가 자신의 소유임을 주장하며 싸우게 된다. 그들은 주변지역을 점령해 가면서 회교도들을 살해하고 인육을 먹는 등 야만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평민 십자군은 제후들이 영토싸움을 벌이자 도시를 불지르고 주민들을 죽이며 행군을 종용했다. 이런 식으로 1년여를 허비하다가 마침내 1099년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기적을 일으켜줄 것이라고 믿고 공격을 위한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식량이 떨어지게 되고 오히려 포위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마침 자파에 정박해 있던 여섯 척의 제노바 함대와 네 척의 영국함대의 도움으로 보급을 받게 된다. 7월 10일 마침내 공격을 감행한다. 5일 뒤 십자군은 성벽을 돌파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된다.


2) 십자군의 만행

회교도인들과 유대인들은 살해되거나 불태워졌다. 2주일 동안 살육과 약탈이 계속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슬람세계는 분노하게된다

5)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군하며 수많은 회교도들의 도시를 점령하는 중에가장 잔인무도 하게 행동한 전투지 두 곳만을 살펴보자.

첫째 제1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격하는 도중에 시리아 지방의 안티옥(a n t i o c h) 을 점령하고 그 남쪽에 위치한 마랏 안뉴맨성을 점령했을 때 일어난 일이다. 십자군은 성벽을 넘어 성내로 들어서서 값있는 물건이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무엇이든 약탈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죽이는 전멸작전을 폈다. 성내는 어디를 가나 회교도들의 시체가 산적했으며 그 시체를 밟지 않고는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십자군의 악명을 알고있던 주민들은 안전지대로 인정되었던 궁전으로 피했으나 십자군은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한 뒤 살해하였다. 그리고 노예로 팔 수 있는 주민들을 납치하여 안티옥 노예시장에서 매각하였다. 이때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십자군들은 그 지방 사람들이 보물을 자기배 속에 감춘다는 소문을 듣고 회교도들의 복부를 톱으로 가르기까지 했다. 사실 소문은 적중하기도 했고 또 식량이 떨어진 십자군 중에는 인육을 구워 먹는 이도 있었다.

둘째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의 일이다. 예루살렘은 세 종교의 성도, 즉 유대교와이슬람교의 발상지이며 또 회교의 교조 마호메트가 승천 한 곳이기도 했다. 십자군이 최고 최후의 목적지였던 예루살렘 성에 도착한 것은 제 1회 원정 때인 1099년6월 7일이었다. (중략..) 십자군은 솔로몬 성전에 집결해 있던 회교도군과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했다. 도망간 소수의 적을 제외하고는 회교도 군을 거의 전멸시키고 주민들을 체포하여 노예로 부리거나 팔아 버렸다. 이 때 회교도군과 함께 성을 수비하던 유대인들도 모두 학살되었는데 예루살렘성전에 사람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 탈환 작전은 마랏 안 뉴맨 성의 학살과 비교 할 수 없는, 역사에 유례가 없는 잔인한 작전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학살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방화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간하였는데, 이는 이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극악무도했던 십자군의 만행은 중동지역 일대에 심각한 충동을 주었고 중동지역 회교도들의 가슴속에 릴은 상처를 남겼다.

십자군의 십자군이 예루살렘 탈환 작전 때 종군하였던 프랑스의 한 성직자가 쓴 수기의 일부가 그 잔인한 학살 후의 아수라장이 된 장면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큰 거리나 광장 등에는 사람의 머리나 팔 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십자군 병사나 기사들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성전이나 회랑은 물론이요, 이제까지 오랫동안 모독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졌던 이 장소가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한 것일 뿐 아니라 찬양할 만하다' (ibid p. l95)

이것이 사랑과 자비와 희생정신으로 충만한 복음을 전파한다는 성직자의 수기다.

6)크나큰 역경에도 불구하고 제1차 십자군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1098년에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함락했고, 그와 더불어 시리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1099년에 그들은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무슬림 세력이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모슬렘들이 기괴하고 야만적인 서유럽인의 모습을 처음 대하고는 크게 놀랐기 때문이다. 성지에서 십자군은 처음부터 제국주의자처럼 행동했다.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자마자 그들은 이를 자기네의 소유로 삼고 4개의 공국으로 분할했다. 그들은 또한 난폭한 행동을 자행했다. 안티오크를 점령했을 때 그들은 사로잡은 투르크인들을 포로로 삼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평화주의적인 가르침을 묵살하고, 이 도시에 거주하던 모든 모슬렘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몇몇 십자군들은 그들의 고향에 보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자랑을 늘어놓았다.

'솔로몬 궁의 회랑과 성전에서 우리 군대는 말을 타고 달렸는데, 말의 무릎까지 사라센인의 피로 젖었다'

성지에 머무른 십자군들은 점차 유순해지고 관대해졌다. 그러나 서유럽으로부터 새롭게 밀어닥치는 무장 순례단은 계속해서 야만스런 행동을 자행했다. 더욱이 정착한 십자군들은 지방 주민들과 완전히 융합하지 못한 채 이슬람 세계의 한 복판에서 별개의 착취적인 외국인으로 남아 있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십자군은 이 곳을 다스릴 새로운 권력을 어떤 형태로 만들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 결과 빈민층과 교회측의견은 무시되고 제후들 사이에서 지도자를 뽑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지도자로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선임된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임종하였고 후계자로 보두엥이 추천되게 된다.

보두엥 1세는 이탈리아의 함대와 해마다 바다를 건너가는 군대에 복무하는 순례자들의 힘을 빌어 제국을 성장시킨다. 30년 사이에 예루살렘왕국을 비롯하여 주변에 다른 제후들의 공국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프랑크족의 세력확장을 염려한 회교도 국가들은 지속적으로 십자군들을 공격하며 기회를 엿본다.1102년 프랑크족은 분쇄 당하고 보두엥 1세는 달아난다. 그러나 회교도들은 정치적으로 서로 반목하면서 단합하지 못했다 특히 회교도 국가인 시리아는 프랑크족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시리아인들은 자신 재산과 지위만 보존된다면 지배자가 회교도이건 프랑크족이건 상관하지 않았다.


3)이슬람 세계의 반격

1130년대에 이르자 이슬람세계에는 정신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프랑크족의 야만적인 행동에 반발한 사람들이 그 들과의 전쟁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하드'의 이념이 등장하게 된다.

1128년 등장한 장기는 열세였던 회교도의 위치를 역전시킨다. 그는 지하드를 이념으로 삼아 프랑크족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오론테스강의 동쪽에 있는 이슬람도시들과 성채들을 모두 점령한다. 또한 ll44년에는 에데사를 점령한다. 장기는1146년 암살 당하게 된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누레딘이 아버지를 대신하게 된다. 장기의 출현으로 2차 십자군이 조직된다. 그러나 전쟁터에 오기도 전에 이들은 적의 공격을 받아 많은 군사를 잃게 된다. 레몽 드 푸아티는 프랑스의 루이7세에게 누레딘을 격파하게 알레포를 공격하라고 충고 하지만 거절당하게 된다.

결국 루이7세의 군사는 몇 번의 실패를 되풀이 한 끝에 십자군원정을 포기하게된다. 1151에서1157년 사이에 누레던은 선친의 유업을 완수한다. 시리아조차 통합된 권력인 누레딘에게 복종하게 된다. 누레던은 투르크족과는 달리 각 지역사회와 조직의 기능을 존중할 줄 알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회교도였다. 이를 바탕으로 투르크족은 시리아를 하나로 통합해 나갔다.

7)지하드의 이념은 프랑크족과 회교도 사이를 갈라놓은 릴은 골, 이런 사실 앞에서도 무관심한 당대인들에 대한 항의, 성전에 대한 호소라는 세 가지 주안점을 두고있다. 이러한 사상은 에데사 점령을 코앞에 두고 프랑크군을 완전히 격퇴할 때까지 끝까지 철저하게 싸우는 격전을 펼칠 절대적 필요성을 역설한 질기의 노력으로 명확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하드를 명확한 정치 노선으로 정비한 최초의 인물은 누레딘이다. 그는 기존 개념에 두 가지를 추가했다. 하나의 예루살렘과 성지의 신성불가침이며 또 하나는 프랑크족과 치를 성전의 예비 단계로서 근동 이슬람권의 정치적 통일을 재수립해야 할 필요성이다. 그러므로 지하드는 한 세기 전부터 태동이 시작된 강력한 정신적 운동에 토대를 두게 되는 데 이는 정통의 복원을 뜻하게 된다.

지하드는 이렇게 해서 중요한 대중운동의 주춧돌이 된다. I2세기 초반부터 이집트는 계속 약화되어 갔다. 1164년 이집트의 재상 샤와르가 시리아로 피신해온다. 누레딘은 샤와르를 도와 그가 다시 재상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재상직에 오른 샤와르는 프랑크족을 끌어들인다. 이런 혼란 속에 시르쿠와 그의 조카 살라딘이 등장하게 된다. 살라딘은 샤와르를 암살하고 재상의 자리에 오른 다음 자신의 투르크족 근위대의 지지를 얻어 정부를 장악한다.

살라딘은 누레딘의 대리자가 아닌 하나의 권력자로써 그와 동등한 위치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자 누레딘은 살라딘은 쫓아내기 위해 이집트를 침략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만 병이 들어서 1174년 5월 15일 숨을 거둔다. 그가 사라짐으로써 살라딘은 이슬람의 실세로 부상한다. 살라딘은 1174년부터 프랑크족과 전쟁을 시작한다. 계속되는 전쟁에서 살라딘은 승승장구한다.

1187년 하틴에서 벌어진 전투의 대 참패로 프랑크족은 예루살렘을 살라딘에게 넘겨주게 된다. 예루살렘을 빼앗겼다는 소식에 놀란 서유럽에서는 3차 십자군 원정을 일으킨다. 3차 십자군은 살라딘의 세력권에서 라틴국가들을 보호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했다. 이후 계속되어진 4차 원정대와 5차 원정대도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8차 원정대마저 이슬람에 참패를 당하게된다. 1251년 마침내 시리아와 이집트에 잔존해 있던 모든 프랑크족의 세력들이 떠나게 된다. 이로서 200년간 지속된 대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된다.

십자군 운동이 유럽사에 미친 궁극적인 결과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분명한 것은 십자군이 그들의 정복 활동의 가시적인 유물인 城들이 위치한 동방 지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별로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문화 사이에 교류와 충돌이 일어남으로써 양측 사람들의 시야가 좀 더 확대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이슬람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이 서로에 대해 보다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친 곳은 성지라기보다는 스페인과 시칠리아에서였다. 하지만 십자군 운동으로 인하여 유럽 내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말썽 많은 기사들의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십자군은 전쟁을 벌이려는 그들의 취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출구를 제공해주었다. 또한 유럽의 군주들은 전사 계급이 수적으로 감소되었기 때문에 보다 용이하게 그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십자군은 또한 제노아, 피사, 베니스 같은 이탈리아 항구도시들의 경제적인 성장에 기여하였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11세기에 유럽의 부가 축적되었고 인구가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 운동이 가능하였다. 십자군은 교역을 활성화시켰을 것이지만, 교역 부흥의 원인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십자군 운동의 발생여부와는 상관없이 동쪽 지역과 교역을 추진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1차 십자군 운동의 믿기 어려운 성공으로 인하여 중세 서방의 자신감이 증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수세기 동안 유럽은 이슬람 세력에 대하여 수세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제 서방 군대는 이슬람 세력의 중심으로 행군해 들어갈 수 있었고, 그들이 탐내던 전리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12세기는 낙관의 시대이자 부흥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서방 기독교인들에게는 마치 신이 자기들 편에 있고 자기들이 무언가를 이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십자군 운동의 대차대조표에는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있었다. 십자군이 서방 내에서 유대인들을, 해외에서 이슬람교도들을 야만적으로 살해한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십자군은 확실히 비잔틴 제국과 서방의 관계를 더욱 빠른 속도로 악화시켰고, 비잔틴 지역의 파괴에 기여함으로써 나중에 파국적 결말이 초래 되도록 하였다.

십자군이 건설한 기독교 국가들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해안선에 위치한 인구가 희박하고 좁다란 지역이었으므로 그 지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탈환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1144년에 이르러 최북단에 위치한 공국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프랑스 왕과 독일 황제의 지휘하에 동방으로 온 제2차 십자군의 기독교 전사들은 실지를 회복하고자 했으나, 그들은 내부적으로 너무나 분열되어 있어서 도저히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지역의 이슬람 영토는 술탄 살라딘에 의해 통합되었으며, 그는 1187년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다시 한번 서유럽은 손실을 복구하고자 했으니 제3차 십자군이 그것이다. 제3차 십자군은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프랑스의 존엄왕 필립,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차드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군을 거느리고도 승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경쟁관계에 있던 국왕들 사이에 다시 내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노켄티우스가 교황이 되었을 때 그의 야심은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제4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그러나 그 십자군은 통합된 기독교 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증유의 재난이었다. 교황은 십자군의 진로를 통제할 수 없었고, 십자군은 1204년 성지로 진군하는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재촉했으며, 오스만 투르크족에게 동유럽으로의 진입로를 열어주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이로켄티우스가 1215년 제4차 라테란 종교회의를 소집한 것은 부분적으로 교황이 직접 지휘할 또 한 차례의 십자군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제5차 십자군은 무슬림 세력의 본거지를 무찌르기 위해 이집트를 향해 바다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위풍당당한 출전에도 불구하고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오직 I228년에서1229년까지 황제 프리드리히2세에 의해 지휘된 제6차 십자군만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성공은 군사적 원정에 힘입은 것이 아니었다. 아랍어를 구사할 줄 알아 이집트의 술탄과 쉽사리 교신할 수 있었던 프리드리히는 무력으로 싸우는 대신 교묘한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 및 예루살렘으로 가는 좁은 접근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으로 실패한 것을 외교로써 이루어낸 셈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획득한 것을 지켜내지 못했고, 결국 예루살렘은 1244년 다시 함락되어 1917년에 이르도록 유럽인에 의해 탈환되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 에커시 부근의 작은 영토만이 기독교 국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십자군의 이상은 한편으로는 교황 군주 국가의 건설에 기여한 바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파멸에도 기여했다. 그러면 그때에 십자군의 실질적인 의의는 무엇이었는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제1차 십자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성공은 중세 서유럽인의 자신감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수백 년 동안 서유럽은 이슬람 세력에 밀려 수세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서유럽 군대가 이슬람 세력의 핵심 지역으로 진군해 들어가 마음대로 약탈 ·유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승리로 말미암아 I2세기의 유럽인 사이에는 낙관주의가 팽배해졌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신이 그들의 편이라 믿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십자군은 또한 서유럽인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성지의 유럽인들 가운데 아랍어를 배우거나 이슬람 사상, 또는 제도로부터 무언가 얻어내기 위해 힘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문화교류가 가장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은 에스파니아와 시칠리아였다. 그러나 이슬람왕국을 통과하여 먼 지역을 여행한 십자군들은 어딘가 좀더 세련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십자군 운동은 특히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치품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으며, 문학과 우화의 풍부한 소재를 제공했던 것이다.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일반 신도들은 더 이상 신이나 성직자들을 절대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으며 차츰 신앙도 식어갔다. 더욱이 원정도중에 나타난 교황 권위의 하락으로 인해 교회의 위신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십자군에 참가한 제후들과 기사들은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영지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제후와 기사들의 수입원은 줄어들고 더욱이 전쟁참가 비용을 조달하느라고 가산을 탕진한 자가 많았다. 그와 반대로 눈에 띠게 세력이 강해진 것은 도시의 시민과 국왕이었다. 그 중에서도 영국과 프랑스의 왕권은 몰라보게 강해졌다.


십자군 전쟁의 긍정적 부정적 결과

<긍정 적 결과>


무역과 세금,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서유럽인에게 지중해를 새로운 무역 활동의 무대로 제공했다. 특히 베네치아 및 제노바 등 이탈리아 도시들이 이 해역의 상권을 제패하기 시작했고, 그로써 서유럽 경제의 번영에도 기여했다. 원격지로 대금을 송금할 필요성으로 인해 초보적 금융기법의 발달 또한 자극했다. 정치적으로 서유럽 군주 국가들은 십자군에 필요한 자금 조달 명목으로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한 선례로 말미암아 직접적인 혜택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한 세금징수를 다양한 형태로 발달시켰다. 더욱이 자금과 식량 조달에 의해 국왕의 십자군을 돕고자 국가를 조직화하다보니, 신흥 국민 국가들의 효율적 행정제도 발달에도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부정 적 결과>

그러나 십자군에는 부정적 측면 또한 있었다. 유럽 내에서 유대인을, 그리고 유럽 밖에서 무슬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십자군의 만행 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십자군은 서유럽과 비잔틴의 관계 단절을 더욱 가속화했고,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잇따른 재난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성지에서의 서유럽인들의 식민주의는 그후 근대에까지 이어지게 된 서유럽 식민주의의 기나긴 역사의 출발에 불과했다.


3. 십자군 전쟁의 의의

십자군의 긍정적 결과는 무엇민가? 십자군의 이상은 한편으로는 교황 군주 국가의 건설에 기여한 바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파멸에도 기여했다. 그러면 그때에 십자군의 실질적인 의의는 무엇이었는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제1차 십자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성공은 중세 서유럽인의 자신감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 여 했다. 수백 년 동안 서유럽은 이슬람 세력에 밀려 수세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서유럽 군대가 이슬람 세력의 핵심 지역으로 진군해 들어가 마음대로 약탈·유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승리로 말미암아 12세기의 유럽인 사이에는 낙관주의가 팽배해졌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신이 그들의 편이라 믿고, 그들이 원하는것은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십자군은 또한 서유럽인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성지의 유럽인들 가운데 아랍어를 배우거나 이슬람 사상, 또는 제도로부터 무언가 얻어내기 위해 힘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문화교류가 가장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은 에스파니아와 시칠리아였다. 그러나 이슬람국을 통과하여 먼 지역을 여행한 십자군들은 어딘가 좀더 세련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십자군 운동은 특히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치품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으며, 문학과 우화의 풍부한 소재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군에는 부정적 측면 또한 있었다. 유럽 내에서 유대인을, 그리고 유럽 밖에서 무슬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십자군의 만행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십자군은 서유럽과 비잔틴의 관계 단절을 더욱 가속화했고,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잇따른 재난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성지에서의 서유럽인들의 식민주의는 그후 근대에까지 이어지게 된 서유럽 식민주의의 기나긴 역사의 출발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은 테러와 보복전쟁 이라는 모습으로 끊임 없은 악순환을 하고 있다.


역사는 몇 가지의 우연이 겹쳐지면서 이들 우연적 요소가 만든 다양한 필연적 결과들이 나열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21세기 최초의 전쟁으로 기륵될 아프카니스탄과 미국의 전쟁도 그 원인의 뿌리는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수세기에 걸친 증오와 반목에 있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두 종교는 대립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지를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 쪽에서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를 용인해 주었다. 두 종교 사이에 틈이 벌어진 것은 서로에 대한 더 정확히, 서로의 종교에 대한 무리와 오해 때문이었다.

1차 십자군을 일으킨 사람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였다. 그가 십자군을 일으키려한 이유는 보편적으로는 셀주크 투르크 족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 비잔틴 제국을 구원하고자 함이었다. 그는 이런 정치적인 이유로는 제후들과 평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교황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원정의 종교적 필요성을 만들어내게 된다 바로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을 내건 것이었다. 이때 한참유럽전역에 양산되기 시작한 '기사'라는 무장세력이 교화의 부름에 응했다. 이들도 겉보기에는 기사도 정신에 따라 이교도에 손에서 기독교인을 보호하기 참전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들이 참전한 목적은 기사도를 실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리엔트 지방에서 얻게 될 새로운 영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사들만으로 원정을 갈 수는 없었다. 전쟁에 필요한 돈과 물자를 공급해줄 황제와 제후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당시 그들은 지방영주의 가지고 있는 힘을 하나로 집중하여 자신들이 .가지길 원했다. 지방영주들을 중앙의 황제에게 집중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전쟁 때에는 지방의 모든 병력이 하나로 모이게된다. 그리고 병력의 통제는 황제가 일임하게되는 것이다. 황제들은 이런 생각에 십자군원정을 지지하게 된다. 그들은 지방영주의 세금을 밑받침했던 기사계급들이 전쟁에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명령한다. 그 결과 많은 기사들이 십자군 원정으로 희생됐다. 이에 따라 전쟁이 끝난 뒤 영주들의 세력도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다. 교황과 기사들, 황제들은 모두 신앙적 이유를 내세워 자신들의 이득을 얻고자 했다.

십자군들을 서로 묶어줄 수 있는 동기는 강한 종교적 믿음뿐이었다. 이들은 이런 종교적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이슬람에 대한 증오의 강정을 증가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십자군들이 점령지에서 보여주었던 필요이상의 살육과 약탈들은 이유 없는 증오가 어느 정도였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1차 십자군으로 인해 커다란 피해를 얻은 이슬람세계는 장기와 누레딘의 출현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게 된다.

장기와 누레딘은 기독교인의 땅을 점령할 때 과거 기독교인들이 했던 무참한 살육과 약탈을 저지르지 않았다. 이것은 장기와 누레던의 통치술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내세운 지하드의 이념이 기독교인들이 내세운성전의 이념과 다르기 때문이다. 요즘 아프카니스탄의 데사가 자주 방송에 나온다. 그는 미국이 아프카니스탄에 보복공격을 한다면 우리는 지하드를 전개해 나갈 것이라는 말을 했다. 우리 나라 방송의 자막에서는 지하드를 단지 성전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그렇다면 지하드는 성전과 같은 말인가? 분명히 아니다. 이슬람의 성전인 지하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전과는 개념이 다른 말이다.

이슬람의 지하드는 이슬람영토의 방어와 확장에 그 의미를 둔다. 이는 회교도의계율중하나이며 결코 다른 종교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전은 보다 공격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성전에 앞서 전쟁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약속하며 회교도인들에게 개종과 죽음을 선택하기를 강요한다.

9)사실 십자군은 이슬람의 성전과 부합되지 않는다. 11세기말에 '지하드'의 이상은 영향력을 잃었고 투르크족의 소아시아와 동쪽 국경지대에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라틴족의 서유럽세계는 시칠리아섬과 에스파냐에서 이슬람을 제거함으로써 확장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론을 비교하자면 상황은 반대이다. 십자군의 경우성전은 단지 억압받는 기독교인들과 성지를 해방하고 방어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다. 설령 그런 동기가 정복활동을 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 해도 그렇다. 반면에 이슬람교도들은 지하드는 이교도들이 이슬람의 계율은 인정할 때까지 계속해서 억압하는 공격적인 전투이다. 그렇지만 중세의 회교도 사회는 서유럽 기독교 사회보다 덜 폐쇄적이었다. 회교도 사회는 그 사회 내부에 비 회교도 공동체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성서의 백성들'즉 유대교도들과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해 주는데 그들이 신분을 구별짓는 인두세인 '지즈야'를 내고 이슬람국가를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을 인정하고 보호해 주었다.

'지하드'는 그러므로 1차 십자군 원정 때 회교도에게 개종 아니면 죽음의 선택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흐른다거나 회교도에 대한 기독교국가들의 냉혹한 법 적용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교도를 학살했으며 오리엔트에 4개의 라틴국가를 건설한다. 기독교 측에서 본다면 신앙에 의한 영웅적인 전과라 하겠지만 회교도들에겐 야만적인 침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 었다.

10) 야만적인 전쟁 행위에 흔히 神聖을 부여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다. 원시 부족들이 사냥이나 전투에 앞서 주술 의식을 베푼 데서 그 뿌리를 짐작할 수 있다. 피 흘리며 죽이고 죽는 것을 무릅쓰도록 부추기고 인간의 선한 본성에서 나오는 죄의식을 씻어주는 집단 최면 효과를 얻는 셈이다. 그 수단이 반드시 무속이나 종교는 아니다. 근대이후 민족 국가들이 국기와 국가 등 애국심의 상징을 이용하는 것도 근본은 비슷하다.

■ 전쟁을 신성화한 대표적 사례는 십자군 전쟁이다.

11세기말부터 2백년 가까이 서유럽 기독교도를 집단 최면 시킨 십자군 원정은 이슬람에 빼앗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종교적 이념을 통해 성전이 됐다. 그러나 그 실체는 봉건 영주와 기사들의 영토 지배욕과 상인들의 경제적 야심, 농민의 압제 탈피 욕구가 어울린 중세적 식민 전쟁이었다. 특히 이런 정치적 동인의 이면에는 모험심과 약탈욕 등 잡다한 동기가 작용했다는 후세 사가들의 평가다.


■ 이를 모를 리 없는 로마 교황청은 신성한 목적을 강조하기 위해 1045년 짐짓 인도적 전쟁 수행을 명한 나르봉 칙령을 선포했다.

성직자와 여성, 순례자, 상인, 농민, 교회, 묘지, 가축, 올리브 나무 등 비전투 요원과 민간시설은 공격하지 말라는 교시였다. 그러나 1099년 예루살렘에 입성한 십자군은 무슬림과 유대인까지 남김없이 살육하고 모든 것을 불태웠다. 십자군 기사들은 살육의 환희에 겨워 울부짖고, 인육을 요리해 먹었다는 기록까지 있다.


■이 광기 어린 잔혹성을 농업화에 따른 기사 계층의 욕구불만 해소로 본 인류학자도 있다.

과거 사냥 원정을 통해 신분과 힘을 과시하던 기사들이 십자군 전쟁에서 억눌린 욕구를 분출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위선에 가린 잔혹성이 이슬람의관용 정신마저 허물었고, 오늘날 서구를 향한 성전을 외치는 근본이 됐다는 지적이다.



*결론

십자군 전쟁은 우연인가? 역사적 흐름의 산물인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역사의 우연적 요소는 여러 가지다. 양귀비의 미모와 클레오파트라의 코, 같은 것들이 과연 역사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큰 의미를 가진 것들인가? 물론 이러한 요소들이 역사에 흐름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만드는 역사란 서로 긴밀한 연결고리를 가지는 사건들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나타나는 우연적 요소에 필요이상의 의미를 두는 것은 옳지 못한 역사보기 방법이다.

십자군의 발단에는 분명 교활 우르바누스의 개인적 정치적 야망과 제후들의 야심 등 성전의 원인이라고 볼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이런 우연적인 요소가 맞물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전쟁이란 결과로 표출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원인을 단지 이러한 요소들의 집합이라고만 생각할 수 는 없다. 9세기부터 시작된 서유럽의 변화와 기사계급의 등장 교황과 황제의 권력관계가역사의 방향을 십자군 원정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필연적 역사의 흐름이 어쩔 수 없는 예정된 결과였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서로의 종교에 대해 좀더 이해하고 잦은 교류로 서로를 알았다면 무참한 살육과 그로 인한 끝없는 보복은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시대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그 흐름은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십자군 전쟁이 후로 시작된 이슬람과 서유럽의 갈등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거침없이 이번 전쟁이 선과 악의 대결이라고 말한다.

이슬람이 악이란 말인가? 테러는 분명 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미국이 서유럽이 그 동안 아람세계에 보여온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던 태도들은 왜 집고 넘어가지 않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 이스라엘을 맹목적 지지함으로써 자연 거대한 이슬람국가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금융과 경제, 신문과 언론 그리고 문화와 예술로 미국을 실제로 지배하고 있는 유태인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이스라엘 일변도의 강경 지지정책은 오히려 이슬람 국가들을 결속시키는 한편 자신들의 고통과 불만을 테러라는 야만행위로까지 표출하려는 성전주의자들을 양성시키게 한 것 또한 사실인 것이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두 종교간의 반목과 증오는 필연을 넘어선 각자의 신이 정해준 목표가 될 것이다. 서로가 싸우기 앞서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생긴다면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