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 -
일제성격규정
2004-09-13 23:31:02
식민지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
1. 머리말
20세기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데올로기는 후진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억압구조로 작용하였다. 후진지역의 보통 사람들은 20세기 전반기에는 제국주의적 억압에 시달렸으며, 20세기 후반기에는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적 대립구조인 냉전체제가 만들어낸 억압구조 속에서 유형.무형의 시달림을 받아왔다.
20세기 억압구조의 한 축을 이루었던 식민지체제는 이제 지구상의 극소수의 지역에서 '여분의' 것으로만 남아있으며, 인류 최대의 체제 실험이라고 할 수 있었던 사회주의 역시 실질적으로 실패하였음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도 한반도는 냉전의 산물인 분단이라는 질곡을 짊어지고 있다. 그리고 정신대문제와 같은 제국주의 침략의 잔재가 여전히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한반도는 제국주의와 냉전이라는 20세기 이데올로기의 피해를 아직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자본주의적인 고도성장을 경험하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고속성장은 20세기 후반 동아시아 경제에서는 일반적인 추세였다. 한국자본주의의 성장, 나아가 동아시아 자본주의 성장과, 그것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역사 발전에 관한 기존의 역사인식 방법론의 전환을 요구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서구중심적 발전이론, 즉 서양의 산업화의 길을 답습할 경우(그리고 그 경우에만) 공업화에 성공할 수 있다는 '근대화론'은 그러한 공업화의 시도가 다른 지역에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유독 동아시아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설득력을 잃고 있다. 동아시아 경제의 성공은 서구식 공업화의 답습이라는 요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동아시아 고유의 역사적 특질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이는 서구 중심적 발전이론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화론'에 대항하여 자본주의적 체제로부터의 독립을 꿈꾸었던 '종속이론'은 그것이 전망으로 여겼던 사회주의체제가 역사적 실패임이 판명되면서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새로운 역사인식 방법론은 사회주의 몰락 이후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적 전망에 기초하여야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현재 우리 학계에서 한국근대사를 인식하는 주류 방법론은 '내재적 발전론'이다. 최근 이러한 인식에 대해 수정을 요구하는 논의가 제기되고 있는데, 흔히 이러한 입장은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부른다. 양자는 식민지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큰 차이가 나는데, 전자가 식민지시대를 '수탈과 저항'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면, 후자는 '수탈과 개발'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양자의 논쟁은 '식민지공업화'의 역사적 의의에 관한 관점의 차이에서 촉발되었지만,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실제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식민지시대의 거의 전 분야의 연구에서 나타나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서 주류 학계에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비판의 손길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수탈론'을 비판하고 '식민지근대화론'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논지를 편 필자의 '도발적인' 글(조석곤(1997))이 저널리즘에 오르내리면서 식민지시대의 역사적 성격을 둘러싼 논의는 보다 넓은 범위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조석곤의 문제의식은 식민지근대화론과 수탈론이라는 이항대립적인 틀을 넘어서자는 것이지만 실제 논의에서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균형을 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후의 논쟁이 소모적으로 진행되는데 기여한 꼴이 되었다. 정태헌(1997)은 필자의 이러한 불균형을 지적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그 역시 수탈론적인 편향을 바로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필자가 제기한 문제의식의 본령을 파악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식민지시대를 '수탈과 저항'이라는 관점만으로 파악하려는 것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지만, 과연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식민지시대의 역사상을 구축하여야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남게 된다. 필자의 '도발'적인 문제제기가 "균형을 잡지 못한" 것은 비판받을 수 있지만,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당위성마저 비판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의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2절에서는 본고에서 사용하고 있는 여러 개념들에 관해 정의하고 설명하고자 한다. 본고의 주제와 관련된 논의에서는 같은 개념이라도 논자마다 다른 함의를 가지고 사용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하는 경우가 많은 데, 2절의 논의는 그러한 문제를 최소화해 줄 것이다. 3절에서는 개항기와 식민지기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분야에서 식민지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 사이에 입장의 대립이 있는 몇 가지 쟁점들을 추출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사실 두 입장은 식민지시대의 어떤 특정한 측면만을 돌출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4절에서는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의 대표적 유형에 대해서 그것의 의의와 한계를 검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각 방법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잠정적으로나마 제시하여야 하겠지만, 본고에서는 그것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본고의 큰 한계이며, 후속 연구에 미룰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2. 한국근대사의 인식 방법론
최근 한국사 시대구분 논의가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이는 그 동안 축적된 많은 연구들을 반영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겠지만, 역사인식 방법론을 바꿔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 촉발된 것이기도 하다. 약간의 편차가 있지만 최근 한국사 시대구분 논의는 대개 개항을 근대의 기점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이윤상(1993)과 이영훈(1996)의 주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윤상은 한국자본주의의 발달은 이식된 자본주의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개항 당시에는 자주적 자본주의의 발전을 향한 전망이 열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개항은 자주적 근대화를 통해 근대 민족국가의 수립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식민지 종속국으로 전락하게 될 것인가 하는 한국근대사의 전개방향을 결정하는 출발점"(156)이라는 관점을 보이고 있다.
이영훈은 한국사에서 근대란 개항을 계기로 전근대가 상이했던 두 유형의 사회가 만나서 형성된 것이며, 강한 외세에 의해 주체적 이행의 가능성이 부정되어 갔다고 보고 있다. 1876년의 개항이란 "이를 계기로 '소농사회의 성숙'으로 그 발전방향이 집약되던 조선 농촌경제에 그와 전혀 상이한 유형의 서유럽적 근대가 접합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진정 한국적 근대의 출발을 알리는 기점"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의 근대는 외부에서 들어온 자본주의의 규정 하에서 전개되었음을 인정한다. 다만 이윤상은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보다 높게 보고 있으며, 이영훈은 상대적으로 그러한 기대가 적다.
개항을 근대의 기점으로 보는 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로의 편입을 자본주의화의 기점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두 사람의 강조점에 차이가 있는데, 이윤상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로의 편입을 의미하는 개항을 계기로(혹은 개항에도 불구하고) 자주적 발전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을 보다 강조하고 있고(이 경우는 세계체제의 규정력보다 내적 발전 요인을 더 강조한다), 이영훈은 세계체제에 포섭된 속에서 그것에 이끌리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조선과 같은 소농사회(그것의 발전의 길이 자본주의적인 것과는 사뭇 다를 가능성이 높았던)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었을 때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주변부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개항에 의해 주어진 근대로의 계기는 한국자본주의가 출발부터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주변적인 지위에 놓여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국에서 자주적 자본주의 발전의 전망이 자주적 근대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 논자들이 기대하는 것만큼은 발전하기에는 좋지 않은 조건하에서 출발하였음을 의미한다.
논자들에 따라 강조점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개항을 근대의 기점으로 파악하는 것은 결국 한국사에서 근대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분명하다. 통상 서구의 근대화는 자본주의화와 민주화라는 두 축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 파악하지만, 한국과 같이 세계체제의 하위 파트너로 편입되어 결국 식민지화되었던 국가의 경우 근대화가 서구 선진국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추진되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식민지는 정치주권이 탈취당한 상태이므로 식민지하에서의 민주화란 쟁취대상이지 진행형인 과제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하의 자본주의화는 흔히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자립적인 자본주의화와 다른 내용을 지닐 것이 분명하다. 특히 식민지가 세계체제에서 차지하는 주변부적 위치는 식민지에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런 의미에서 식민지적 근대, 혹은 식민지 근대화는 통상적 의미의 근대화와 다른 의미로 사용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화는 일부 선진자본주의국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강력한 외적 규정력하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자본주의화 과정을 분석할 때에는 세계체제적 관점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끌어들인다. 이 강력한 힘의 원천은 생산성 격차와 무한한 이윤추구동기에 있다. 이 힘을 기초로 자본주의는 위대한 물질적 진보를 이룩했지만, 그 과정은 동시에 인간에 의한 인간의 가혹한 착취를 온존시키고, 또 강화하기도 하였던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도 자본주의화가 필연적으로 민주화와 함께 이루어져야할 논리적 근거는 없다. 다만 서구에서는 시민사회의 성장이 초래한 민주화가 자본주의의 노골적인 착취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식민지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식민지란 자본주의가 자국의 범위를 넘어서 다른 곳에서보다 더 큰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착취분야를 창출한 것이다. 식민지에서 정치적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식민지 민중에 대하여 탐욕스러운 자본주의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식민지 근대화란 자본주의적 잉여수취가 노골적으로 보장되는 상태 하에서 식민지 모국의 이해를 반영하여 진행되는 근대화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제 전통적 한국사 인식 방법론인 내재적 발전론과 그것을 비판하면서 나타난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자. 일제시대에 조선사회 정체론을 근거로 하여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해방 후 역사 연구자들은 조선후기 사회가 내적으로 다양한 발전전망을 가진 사회였음을 논증하였고, 그것은 이제 내재적 발전론이란 이름으로 학계에 정착되었다.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한국근대사 인식을 간단히 요약하면, 조선 후기에 성장하였던 자본주의의 맹아는 타율적인 개항과 일제의 침략에 의해 왜곡되었으며, 한국사회의 보다 진보적인 발전은 억압되고 '지주적인 코스'의 발전을 따르게 되었고, 일제시대에도 이러한 코스의 발전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의 연구는 식민사관을 극복할 수 있게 하였으며,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세계사에 일반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조선 후기에 관한 광범한 연구가 집적된 것은 큰 성과라 할 것이었다.
내재적 발전론의 인식을 한국사의 각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첫째 조선후기 사회에서 봉건제의 해체적 양상이나 자본주의의 맹아를 검출해내고, 둘째 이러한 역량이 성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근대사회를 수립하지 못한 채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는 내적.외적 조건들에 대하여 논의하고, 셋째 그 과정에서 해체가 지연된 봉건적인 유제가 식민지사회에서도 그대로 온존하면서 파행적인 사회구조를 지니게 되었음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첫째 과제는 농업.수공업.상업 등 모든 생산 분야에 걸쳐서 생산력의 증대나, 자본주의적인 관계들의 맹아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났으며, 이른바 '자본주의맹아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 조선 후기의 부세제도의 문란이나 농민반란 등을 봉건제의 해체적 양상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맹아론이 '부조적' 역사인식이라는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조선 후기사회의 역동적인 변화 모습을 검출한 것은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둘째 과제, 즉 이러한 주체적 역량의 성숙에도 불구하고 자주적 자본주의화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외적으로는 그러한 자본주의적 요소가 충분히 성숙하기 전에 제국주의국가에 의해 지배당했기 때문이지만, 내적으로는 봉건세력이나 봉건왕조의 정책에 의해 발전이 저지되기도 하였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자주적인 자본주의화를 지향하려는 움직임과 이식된(혹은 강요된) 자본주의 사이의 대립이 보이지만, 결국 후자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셋째 과제는 민족경제권의 축소(박현채(1989))라거나, 혹은 기형성.파행성 등을 주장하는 논의 등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반도에서 경제성장은 확인되지만 그것은 일본경제의 외연적 성장 즉 일본자본주의의 성장에 불과한 것이며, 한국자본주의라 할만한 부분은 위축.후퇴되었다는 시각에서 파악한다. 뒤에 후술하는 바 梶村秀樹의 민족자본론은 이러한 경향을 전형적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박현채는 식민지종속형 자본주의적인 발전의 길을 걷는 지역에서는 국민경제와 민족경제의 괴리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는 지역적인 개념인 국민경제(자본주의적 재생산권) 안에 민족의 생존권을 밑받침하는 경제영역(민족경제)과 식민지.반식민지 상황 속에서 민족의 생존권을 제약하고 축소.소멸시키는 경제영역(외국자본 그리고 그것에 동조하는 매판자본의 활동영역)이 존재한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박현채(1989), 5) 그는 전자를 본래적 영역, 후자를 부차적 영역으로 구분하였는데, 부차적 영역에서 수탈당하는 노동자.농민이나, 부차적 영역의 확대에 의해 축소.쇠잔해가는 본래적 영역의 민족자본은 '민족적인 것'(박현채(1989), 94)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치게 된다고 함으로써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경제적 토대까지를 설명하고 있다. 식민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본래적 영역이 축소.쇠잔된다고 파악한다는 점에서 이 역시 한국사의 주류적 방법론과 식민지시대에 관한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히 해방 이후의 한국경제의 성장은 식민지하의 경제성장과는 무관하다는 관념으로 이어진다. 식민지에서 해방됨으로써, 억압되었던 한국자본주의의 발전 가능성도 해방되었다. 이홍락(1995, 1997)이 민족경제론적 관점에 서서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한 것은 이런 점에서 당연한 것이리라. 그러나 "식민지 지배권력으로부터 재생산 유지를 위한 아무런 보장도 받지 못하는 식민지 민중은 일상생활 및 재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 식민지 지배측이 주도하는 '식민지경제'권에서와는 구별되는 별도의 논리가 관철되는 일정한 활동범주(즉 '민족경제'권)를 형성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비로소 최소한의 생활과 재생산을 유지할 수 있었다"(이홍락(1997), 239)고 본 것은 식민지경제와 민족경제를 단절적으로 인식한 것으로 지나치게 논리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식민지시대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그 왜곡된 측면이나 수탈의 측면만이 부각되기 마련이며, 그 반대로 식민지 이전 시기인 조선후기나 특히 대한제국기는 상대적으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평가될 소지가 크다. 전자의 성향이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난 것이 '사업'을 '수탈론'적 관점에서 파악한 것이며, 후자의 성향은 특히 광무정권에 대한 재평가작업으로 나타나고 있다.
'수탈론'에 입각한 제국주의의 폭압성 강조는 식민지지배의 죄악이나, 그것에 대항한 투쟁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는 해방후 외향적 성장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맞물리면서 '민족' 개념을 저항이데올로기로 전화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그러나 수탈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는 해방 당시 한국의 잠재생산력에 대한 과소평가를 낳았으며, 이는 식민지 이전 조선사회의 내재적 발전에 관한 과대평가와 결합되어 "경제개발론에서 주장하는 '근대화'의 역사적 연원을 조선후기의 발전상에서 찾으면서 군사정부의 '근대화론'(경제개발론)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귀결했던 것 또한 현실이다.
이에 대해 식민지근대화론은 식민지기 한국경제의 성장을 확인한 후, 그 과정에서 한국인의 경제활동 역시 성장하였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이들은 현재의 한국자본주의의 발전을 염두에 두고 그것의 기원을 식민지기에서 찾으려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내재적 발전론의 역사인식이 현대로 확장되면서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파행적이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파행성은 여러 이유로 극복되지 않은 채 온존.확대되어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분위기였다. 반면 식민지근대화론은 최근 수십년간 지속되어온 한국자본주의의 고도성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 기초하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한국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식민지시대, 나아가 전근대사회에서 구하고 있는데, 특히 식민지시대의 자본주의의 발전을 현대 한국의 고도성장과 연결시킨 것은 학계에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식민지근대화론에서는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고도성장이 가능하고, '성장의 모터'가 제대로 기능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의 쇼윈도로서 적극 육성된 탓도 있겠지만, 한국사회 내에 자본주의를 발달시킬 수 있는 토양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은 한국근현대사를 포괄하는 역사인식 방법론을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시기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입장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현대의 한국자본주의는 '성장의 모터'가 제대로 가동하는 정상적인 것이며, '자본주의적 선진화'(안병직(1997), 56)가 당면 과제이다. 둘째 현재와 같은 한국자본주의의 고도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식민지 공업화에 의해 축적된 인적.물적 자산에 힘입은 바 크다. 셋째 식민지하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전근대 한국사회의 특질에서 기인하는 바, 그것은 잠정적으로 '소농사회의 발전'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첫째의 입장에 대해서는 본고의 주제와 직접 관련이 없으므로 필자가 논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성장의 모터'가 제대로 장착되고 가동되는 것이라고 해서 그 모터의 추진력이 장기지속적이 될 것이라 볼 근거는 없다. 또 '선진' 자본주의란 사실 독점과 더 큰 이윤의 수취에 골몰하는 자본에게 투명성과 공정성을 요구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는 사회체제 전체의 변화를 통해서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더 많은 이윤이 있는 사냥터를 쫓아다니는 속성을 가진 이상, 이를 통제하기 위한 사회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며, 그 제도의 문제는 지금 현시점에서는 어차피 '탈근대'의 문제와 관련될 수밖에 없다. 반면 식민지근대화론의 현대자본주의 인식은 이러한 과정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미래의 전망에 대해 보다 깊이 고민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둘째 과제에서는 우선 후진국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이란 수탈과 개발이라는 양면성을 가진다는 고전적인 명제에 기대어, 기존 방법론이 자본의 파괴적 측면만을 강조했지만, 이제 자본의 문명화작용에 대해서도 눈을 돌려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1930년대의 공업화는 일본자본의 이식에 의한 측면도 존재하지만, 1930년대의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도시화에 따른 조선 내 수요증대에 기인한 바 컸으며, 그 과정에 조선인자본이 능동적으로 참여하였고, 제한된 범위이기는 하지만 중간 정도의 기술을 가진 기술자.기능공이 육성되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실증하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이 실증적으로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 분야가 바로 이 시기라고 생각되는데, 이는 내재적 발전론이 주로 조선후기에 대한 실증적.이론적 성과를 축적한 것과 비교가 된다.
셋째 과제는 주로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상대적 고성장의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와 관련되어 있다. 일본.중국.한국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에서 20세기 후반 고도성장이 지속되었던 원인을 '일본주식회사', '개발독재' 등의 원천에서 찾는다거나, 보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교적 이데올로기나 소농사회의 전통에서 찾는 논의가 많았다. 이중 식민지근대화론에서 주목하는 것은 '소농사회론'이다.
소농사회론은 전근대 동아시아사회는 다른 지역에 비해 소농민경영의 자립도가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동아시아의 중세는 대경영의 해체와 균질적인 소경영이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특징인데, 조선에서는 조선후기의 농법이 보다 집약적인 방식으로 변화하였고, 상품작물이 보급됨으로써 농민경영의 안정성이 크게 증가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농민경영의 안정성.균질성이 이후 자본주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사회는 자본주의화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그 요인으로는 민중의 구성이 보다 균질적이고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열을 갖고 있으며, 이들의 경영자적 성격이 상대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와 친화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식민지기 조선사회에 존재했던 어떤 요인들이 이후 한국자본주의발전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러한 주장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거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 논의 자체를 식민지미화론이라고 논박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릴 소지가 있다. 본질적으로는 과연 식민지기 한국사회에서 검출된 요소들이 이후 한국자본주의의 발전에 어떻게 연결되었는가를 살펴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존립 여부는 바로 이 부분에서 실증적인 성패가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3. 한국근대사 연구에서 나타난 몇가지 쟁점들
이 절에서는 앞서 서술한 두 입장의 차이가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나는 주제를 몇 개 골라서, 쟁점별로 정리하고자 한다.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이를 통해서 우리는 논자들의 역사인식 방법론의 차이가 특정 주제에 대한 강조점의 차이와 연결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크게 개항기와 식민지기로 구분하여 각 시기의 특징을 개관하고, 쟁점을 정리하고자 한다.
1) 개항기의 역사인식
개항기는 한편으로는 일본의 침략에 의해 식민지화가 점차 진전되는 시기이면서도, 자본주의의 발전이나 자주적 근대화를 위한 노력이 진행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내재적 발전론에 있어서도 이 시기에 대해서는 침략과 대응의 측면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주장되고 있다. 식민지기의 연구가 주로 수탈을 강조하는 것에 비한다면, 개항기의 연구는 주체적 대응의 측면을 강조하는 연구경향이 두드러진다고 할 것이다. 하원호는 개항기 연구를 총괄하는 글에서 개항기에 관한 "90년대의 논문은 전체적으로 보아 제국주의의 '침탈'이란 측면보다 그로 인한 한국사회의 '내적 변화'라는 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한국사의 입장에서 이 시기 경제구조를 체계적으로 재인식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고 서술하고 있다.(하원호(1997), 55)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내재적 발전론에서는 개항기 이전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과 식민지로의 귀결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개항 이후의 한국사를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대응과정으로 설명하려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약간의 편차는 있겠지만 각 분야별로 대응의 노력은 있었으나 여러 한계로 이루어지지 못함을 지적하는 연구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선인의 상권수호와 관련된 논의를 살펴보면, 김경태(1994)는 외국상인의 국내 상권침투와 그에 대응하는 조선상인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대한제국의 정책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홍순권도 상권수호와 식산흥업을 위한 조선인의 주체적인 노력이 있었지만, "주도세력의 현실인식의 한계와 내외적으로 불리하게 조성된 정치.경제적 조건들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실패"(홍순권(1994), 124)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상권수호에 대한 대한제국정부의 부적절한 대응을 지적하고 있어, 광무정권의 개혁성을 강조하는 일부 논자들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개항기 농촌사회에 대해서는 일찍이 양극분해론적 입장에서 부농적 성격을 지닌 농민범주를 검출하려는 입장의 연구들이 있었다. 조선후기에 있어 김용섭의 경영형부농, 송찬식의 광작농 등과 같은 범주가 이에 해당하며, 개항기에 대해서 宮嶋博史(1983)는 자소작상농, 이윤갑(1991)은 기업형부농 등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그들은 이와 같은 근대 지향적인 생산력의 담지자들이 존재하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몰락의 길을 걷고 있음을 보였다. 반면 이영훈(1985)은 이러한 양극분해의 진전 혹은 정체라는 관점과는 달리 전층적인 하강분화를 주장하였다. 이하에서는 개항기의 논점 중에서 광무양전사업을 둘러싸고 최근에 진행된 논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광무양전사업
1970년대 중반 광무개혁의 성격을 둘러싼 논의가 있었지만, 최근에 광무양전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면서, 광무정권 혹은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에 관한 논쟁이 재개되었다. 먼저 광무양전사업과 관련된 논의를 살펴보자. 광무양전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하여 다수의 연구자들이 광무양안의 분석에 참여한 것은 토지와 관련된 장부라는 것이 그것을 만든 권력의 특성이나 그 시대의 토지소유관계를 반영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광무양안의 성격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 관점이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양안=토지대장설이며, 다른 하나는 양안=지세징수대장설이다. 전자는 전통적인 설로서 김용섭이 대표적이다. 그는 양안상의 起主가 실제의 토지소유자라고 간주하였고, 그것을 기초로 '經營型富農'이라는 범주를 검출하였다.(김용섭(1970), 259) 이영호는 이러한 전통설의 입장을 광무양안의 연구에도 적용하였으며, 토지대장반(1995)의 공동연구는 광무양안=實地調査簿, 官契發給=所有權査定過程이라는 등식을 설정하여 광무양전사업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반면 이영훈(1989, 1990, 1992)과 宮嶋博史(1990, 1991)는 양안은 한번 작성되면 거의 고쳐지지 않아 소유권 변동을 알 수 없고, 소유자도 분록.대록 등의 형태로 기재되어 실제 소유자를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양안을 토지소유권증빙자료로 간주하기는 곤란하다고 반박하였다. 다만 두 주장 모두 광무양안이 소유자를 제외한 필지별 토지파악에서는 상당히 정확함을 보이고 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다.
양안상에 기록된 인물이 실제 소유자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일은 매우 손이 많이 가는 작업임에도 많은 연구자들이 매달리는 이유는 사실 양안을 토지소유권증빙자료로 볼 수 있느냐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토지대장반(1995)의 해석처럼 양안을 실지조사부에 준하는 장부로 해석할 수 있다면 그것을 만든 광무양전사업은 토지조사사업에 준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근대적 토지제도 역시 사실상 광무양전사업에 의해 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용섭(1984)은 광무시기의 양전.지계사업을 "한말의 토지제도.농촌경제가 내포하는 모순과 폐단을 지배층의 입장에서 극복하려는 노력"이었으며, '舊本新參'의 원칙에 섰기 때문에 "근대적 소유권제도로서 구래의 소유자에게 그 소유권을 그대로 추인해 주는 데 그쳤다"고 보았다.(389) 이러한 주장에 이어서 토지대장반(1995)은 광무양전.지계사업을 통해 근대적 토지소유권이 확정되는 절차를 밟았으며, 이는 토지제도상에서 볼 때 한국 중세사회의 최종 귀결점이면서 근대사회로의 출발점이라는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35)
반면 양안을 지세징수대장으로 보는 경우는 해석이 매우 다르다. 필지별 토지파악에 상당한 정확함을 보이면서도 유독 소유권자의 파악에는 불철저했다는 것은 봉건국가가 소유권자의 파악에 무관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미 필지별 사적 소유권이 확정되어 있었던 광무시기에 소유권자의 파악이 불철저했던 것은 전제왕권의 의도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한다. 이 경우 광무양전사업은 결부제에 입각한 봉건적 수취체제 정비를 위한 사업에 지나지 않게 된다.
두 입장은 근대적 토지제도와 토지조사사업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전통설의 경우 근대적 토지소유권은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재확인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양안=지세징수대장설의 경우는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는 궁극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확립된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광무양전사업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이태진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광무개혁을 내재적 발전론의 연장선에 보다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고종에 대해서도 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서영희(1997)도 광무정권은 절대왕제적 권력구조로서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광무개혁이 황제권의 강화, 고종의 주권수호를 위한 것이지만 근대화개혁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고종이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는 '開明君主'로 인식되고, 광무개혁은 일정한 한계를 가지는 것이지만 자본주의 근대화 노선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어찌 보면 식민지시대 직전의 시기에서 한국사회의 내재적 발전의 결과를 총괄하는 어떤 성과를 검출해 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한제국기를 서구의 절대주의시대에 비견함으로써 식민지가 되기 직전에 한국사회가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의 자주적 발전단계에 도달하였다는 이 주장은 그 사실 여부는 그만두더라도, 서구 중심의 단선적 역사발전 경험을 한국사에 적용하려는 내재적 발전론의 한 특징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광무정권의 정책을 조선시대의 그것과 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여 그것을 '개혁'으로 보기를 주저하는 논의들도 있다. 김홍식(1990)은 "광무정권의 정치.경제의 제정책은 이른바 '舊本新參'의 원칙 하에서 진행되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두고 보면 광무양전은 구래의 양전사업의 본질을 충분히 계승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문자 그대로 충실한 '구본'이었다"(30)고 평가하고 있다.
두 주장은 모두 치밀한 실증연구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논거를 찾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상반된 평가를 내린 것은 무엇보다도 각 논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사실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광무양전에 대해 토지대장반(1995)은 지계의 발행이나 외국인의 토지소유금지 규정 등을 강조하는 반면, 김홍식 등(1990)은 광무양안의 소유권규정의 한계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강조점의 차이가 일정 부분 각 논자들의 사관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2) 식민지기의 역사인식
식민지기의 연구에서는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의 대립이 보다 더 첨예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두 방법론이 강조하는 수탈/개발의 입증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식민지근대화론은 식민지시대에 진행된 공업화가 조선사회 내의 사회적 분업의 심화나 수요 증대에 의해 촉진된 측면이 존재하며, 농촌부문도 이러한 공업화에 노동력 및 식량을 공급하는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식민지기 공업화가 진행된 동인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는 일제의 산업정책(예를들면 소위 '병참기지화정책')이나 일본인 자본 주도에 의해 공업화가 진전되었음을 강조하였다면, 최근에는 공산품 시장의 확대나 조선인의 능동적 대응의 측면을 강조하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제 식민지 공업화의 동인과 관련된 문제에 초점을 두되, 그것을 농업과 공업의 두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토지조사사업과 '수탈론'
'사업'은 일제가 1910-1918년 동안 조선의 전 경지를 대상으로 소유자와 지가를 확정하고, 지적도 및 지형도를 작성한 작업이다. 이 중 토지제도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유권조사였다. 소유권조사 결과 소유권자로 확정된 인물은 해당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원시취득'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업'의 결과인 '사정(査定)'은 현재에도 소유권을 둘러싼 다툼이 발생하였을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해방 이후 정책적으로 주입되고 강조된 반일의식과 민족의식의 영향 탓도 있었겠지만, '사업'에 대한 인식은 한마디로 '일제가 조선의 토지를 약탈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요약하면 '사업'의 목적은 근대적 소유권이 인정되는 토지제도의 확립이지만 그 본질은 전국적인 토지점탈이었다. 토지점탈이 가능했던 것은 '사업'에서 채택한 기한부 신고제가 복잡해서 신고를 못하거나 안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약탈한 토지는 전국 농촌의 약 40%에 달하였으며, 이들 토지는 헐값으로 일본인에게 불하되었다. 반면 한국 농민은 경작권을 탈취당해 생활에 큰 위협을 받았으며, 생활기반이 약한 일본 농민들은 해외로 이주할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업은 '수탈을 위한 측량'(김용섭 1996)이었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수단은 토지신고과정에서 자행된 불법적인 소유권이동이며, 그 결과 농민이 보유하고 있었던 관습상의 권리가 철폐되었고, 광대한 국유지가 창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80년을 전후하여 일부 외국인 연구자들에 의해 '수탈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宮嶋博史(1978)는 사업에 의한 민유지 인정의 측면이 더 강조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래거트는 '사업'을 통한 수탈은 없었으며, 양안과 토지대장의 분석으로부터 양자가 나타내는 토지소유 유형에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음을 주장하였다.(Gragert 1994, 원 논문은 1982)
국내에서 '사업'의 '수탈론'에 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는 '사업'의 원자료가 발굴된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이루어졌다. 가장 먼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신고제를 통한 토지약탈의 가능성이다. 趙錫坤(1986)과 裵英淳(1988)은 김해의 토지신고서를 분석한 후 토지신고과정에서 기존의 토지소유관계를 무시한 채 토지약탈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지적하였다. 사업결과 창출된 국유지도 전체 대상면적 490만여 정보의 2.8%(13만 7,225정보)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또 분쟁지의 처리과정도 국가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은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실증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수탈론'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최근 완간된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 1,2부의 주요한 소재는 '사업'인데, 조정래의 '사업'에 관한 인식 역시 '수탈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아니 그는 오히려 한 걸음 나아가 '사업'을 방해한 자는 재판도 없이 사형이라는 즉결처분을 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사업'이 완료된 결과 "조선총둑부는 조선땅의 45%를 차지한 최대 지주가 되어 있었다"(조정래, 아리랑 6, 69면)고 그리고 있다.
45%라는 정체불명의 수치가 등장한 배경은 그만두고라도, 면단위의 주재소장이 지주총대가 폭행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재판없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다는 상상력이 놀랍지만, 그 상상력의 이면에는 "한 손에 피스톨을 들고 다른 한 손에 測量器를 들고"(신용하 1982, 109면) 들고 사업을 진행했다고 묘사한 愼鏞廈로 대표되는 수탈론자의 주장이 각인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수탈론이 입각하고 있는 전제를 3가지로 정리하고 그 각각이 사실인식에서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수탈론'을 구성하고 있는 논리를 살펴보면, 첫째, 토지신고과정에서 불법적인 토지신고와 무신고지에 대한 토지약탈이 이루어졌고, 둘째, 불법적 소유권변동에 대하여 농민은 분쟁을 제기하였지만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셋째, 지가조사를 통하여 농민의 지세부담이 가중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주장의 허구성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1) 토지신고서의 조작을 통한 소유권 변동은 가능했는가?
'사업'의 소유권조사는 개별 지주로부터 토지에 관한 신고를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토지신고의 정확성은 사업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사항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현지에서 '사업'의 손발이 된 지주총대로 하여금 토지신고서의 배포 및 수집하도록 하였다. 토지신고서는 원칙적으로 토지소유자가 작성하여 지주총대에게 제출하면 지주총대는 토지신고서에 확인도장을 찍었는데, 접수한 토지신고서의 정확성에 의심이 가면 날인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조선총독부 1920, 67면) 특정 필지에 대하여 두장 이상의 토지신고서가 있거나 신고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토지신고자를 토지소유자로 기록하였다.
수탈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추론을 통하여 이 신고주의를 이용하여 대규모적인 토지약탈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조선인 토지소유자 중에서 토지신고를 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토지신고 절차를 몰랐거나, 알았다 하더라도 한자나 일어를 기재할 능력이 없었거나, 아니면 일제에 대한 반감 때문에 신고자체를 일부러 거부하였다. 이러한 무신고 토지는 모두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둘째 토지신고서가 제출되지 않은 것을 안 지주총대가 자신의 소유지를 늘릴 목적으로 자신이나 자신의 이해관계인 명의로 거짓 신고하였다. 이는 지주총대가 지주의 대표로서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추론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역사적 사실은 전혀 달랐다. 첫째 무신고지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자. 정해진 신고기간이 지난 이후에 토지신고서를 제출하였을 경우에도 그 신고가 타당하다고 인정하면 토지신고서를 접수하였다. 무신고지는 별도의 조사를 거쳐 지주 혹은 그 토지와 관련된 사람이 밝혀지면 신고를 권유하고, 신고할 의사가 없다면 그 토지는 무신고지로 처리하였다. '사업'에서 조사한 총필지수는 1,910만 1,989필이었는데, 이중 무신고지는 9,355필로 전체의 0.05%에 불과하였다.({보고서}, 414면) 이 중에서 민간인이 소유자임이 드러난 무신고지는 411필에 지나지 않았다. 소유자가 드러났음에도 신고를 받지 않은 이유는 소유자가 그 토지에 대한 장래 과세가 두려워 소유권을 포기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사대상토지에 대해서는 거의 완벽하게 토지신고서가 제출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9천여 필지에 달하는 무신고지가 대부분 국유로 귀속된 것은 틀림없다. 아무리 미미하지만, 이것은 토지약탈의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한 사례연구에 의하면 무신고지는 분묘지와 잡종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 성격상 실제로 주인이 없었을 가능성이 많은 토지였다.(조석곤 1986, 20면) 요컨대 신고되지 않은 토지는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었을 뿐 아니라, 그 토지의 성격 역시 신고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성질을 지닌 것이었다. 무신고지의 존재는 결코 토지약탈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둘째의 추론, 즉 토지신고서를 부정하게 작성하여 토지소유권을 뺏는 일이 가능했는지 살펴보자. 우선 토지신고서를 해당 토지소유자가 직접 작성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확인한 바 있는 토지신고서들(김해군, 옥구군)을 살펴보면, 토지에 관한 정보가 한자로 또박또박 적혀있고 동리별로 대개 필체가 동일하였기 때문이다. 또 신고서에 기재해야할 내용 중에서 자번호나 四標 등은 관청에서 보유하고 장부를 열람하지 않고서는 적기가 곤란한 내용들이었다. 때문에 한 부락의 토지신고서는 지주총대나 한자를 해독할 수 있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대필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리작성과정에서 지주총대가 자의적으로 토지소유자를 바꿔치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토지신고의 방법을 규정한 [토지신고심득](1913년 1월 17일)에 따르면 토지신고서의 1필지는 결수연명부의 1필지와 대응하도록 하였다.(조석곤 1995) 결수연명부는 일제가 지세징수를 위하여 개별 납세자별로 납세대상 필지를 기입하고 총납세액을 계산해 놓은 장부로, 1910년도 납세분부터 전국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토지신고서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신고누락을 방지하기 위하여 결수연명부와 토지신고서를 대조하였다. 대조방법이나 대조업무 종사자는 시기에 따라 달랐지만, 토지신고서의 기재내용이 결수연명부와 다를 경우는 그 내용을 두 장부 모두에 기재하였다. 토지신고서가 기초로 하고 있는 결수연명부는 1910년도부터 실제 과세에 사용되었던 장부였으므로 그것이 실제 토지소유관계를 반영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토지신고서가 실제의 토지소유상황을 벗어나서 작성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지주총대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도 현실의 소유관계를 바꿀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니었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일제는 '명망있는' 지주총대를 구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한 사례연구는 당시 지주총대의 경제적 지위가 보잘 것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사 대상지역(경남 김해군)의 지주총대 26명 중에서 해당 면에 경지를 한평도 소유하고 있지 못한 자가 무려 10명(38.5%)에 달하였으며, 5정보 이상의 경지를 보유한 자는 3명에 불과하였다.(조석곤 1986, 22면) 지주총대는 그 개념이 주는 어감과는 달리 지주계급의 대표가 아니었으며, 지역사회의 유력자는 더욱 아니었다.
사실 토지신고서를 조작함으로써 조선총독부 혹은 특정 계층이 토지를 약탈하였다는 '수탈론'의 논리는, 조선후기에 사적 토지소유제도가 근대적 토지소유권에 비견할 만할 정도로 발전하였다는 학계의 통설과 논리적으로도 충돌할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그처럼 확고한 토지소유권이라면 한낱 서류장난에 의해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설령 누군가가 그러한 시도를 하였다면 당연히 토지소유자의 저항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저항의 사례를 후술하는 분쟁지 혹은 불복신청지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분쟁지 혹은 불복신청지 이외에도 불법적으로 약탈된 토지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러한 약탈에 대하여 저항하지 못하는 토지소유자가 있었다는 말과 같다. "자기공동체를 상실한 노예"(이영훈 1993, 334면)에게나 해당될 것 같은 이러한 상황설정을 식민지 조선의 농민에게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2) 분쟁지
신고과정에서 토지소유권에 관한 다툼이 있을 경우 일단 화해를 유도하고,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에는 분쟁지로 처리하여 분쟁지심사위원회에서 그 소유권을 결정하였다. 분쟁지의 총수는 33,937건 99,445필이었으며, 이중 국유지와 관련된 분쟁은 64,570필(64.9%)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물론 이 10만여 필지 이외의 모든 토지에 대하여 분쟁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실지조사과정에서 많은 다툼이 존재하였을 것이지만, 이들 대부분은 당사자간의 합의에 의해 해결되었기 때문에 분쟁지로 접수되지 않았던 필지들도 다수 있었다.
사정이 공시된 후 그 내용에 불만이 있는 경우는 고등토지조사위원회에 불복을 신청할 수 있게 하였다. 고등토지조사위원회에 불복을 신청한 건수는 1920년 8월말 현재 20,148건이었다. 사실 분쟁지라 하면 우리가 통상 분쟁지라 부르는 필지에다가 불복신청지까지 포함하여야 할 것이므로 용어상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분쟁지심사위원회에서 처리되었던 분쟁지를 특히 元紛爭地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분쟁지라 하면 원분쟁지와 불복신청지를 모두 합한 개념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사업'과정에서 분쟁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원분쟁지만 고려에 넣더라도 200필지당 1필 꼴이므로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불복신청지까지 포함하면 분쟁지의 비율은 더 늘어날 것이다. 더구나 분쟁은 모든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기 보다는 특정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분쟁지의 소유권이 어떤 식으로 결정되느냐는 분쟁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생사가 걸린 문제일 수도 있었다. 또 국가와 관련된 분쟁이 분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사업'과정에서 일제가 농민의 토지를 약탈하려 시도하였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충분히 가능하고, '사업'의 분쟁지문제는 '수탈론'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즉 일제는 사실상의 민유지를 강제로 국유지로 신고하였으며, 이러한 '약탈'에 반대하는 조선 농민들의 주장을 분쟁지심사위원회에서 일방적으로 묵살하여 국유지화하였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추론에 대해 기존 '수탈론'의 저자들은 구체적 실증을 거치지 않고 논리적 추론을 통하여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인 추론 역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첫째 국유지를 둘러싼 분쟁이 다수 발생한 이유는 갑오개혁 이래의 궁장토 및 아문둔토의 정리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갑오개혁이후 왕실 및 정부기관과 관련된 토지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는데, 특히 대한제국 수립후 내장원에서는 왕실재정 강화를 위해 일종의 국유지조사인 광무사검(光武査檢)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민유지가 이른바 '공토(公土)'에 편입되어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 분쟁은 내장원의 강압적 자세 때문에 해결을 보지 못하다가 1908년 일제의 조치에 의해 모두 국유 역둔토에 편입되었다. 이 토지를 대상으로 역둔토실지조사가 실시되었으며, 그 결과 작성된 {탁지부소관국유지대장}이 '사업'에서 국유지통지서 작성의 기준장부가 되었다. 즉 광무사검 당시 국유.민유분쟁이 '사업'에 와서 분쟁지문제로 나타난 것이었다.
국유지와 관련된 분쟁이 많았던 것은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국유지에서 분쟁이 집중한 원인을 일제가 '사업'을 통해 민유지를 약탈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이라고 본 '수탈론'의 주장은 매우 일방적인 것이다. 오히려 '사업'에서 국유지분쟁이 다발한 원인은 근본적으로는 광무사검의 공토 확보방식, 나아가 수조권적 토지점유방식의 잔존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둘째 '사업'에서의 분쟁지처리에 있어서 조선총독부가 일방적으로 유리했던 것도 아니었다. 원분쟁지에 관한 종합적인 정보는 {보고서} 이외에서는 찾을 수 없으며, 개별 지역단위의 분쟁지에 관한 미시적인 연구도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전모를 알 수는 없다. 위 표는 기존 사례연구에서 밝혀진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다. 경성부의 원분쟁지는 255건 296필이었으며, 국유지분쟁은 205건 230필이었다. 이중 60% 정도가 국유로 사정되었다.
파주군의 원분쟁지는 총 28건 269필지였다. 파주군의 경우는 자료상의 한계로 분쟁의 두 당사자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분쟁 필지수가 많은 2건의 분쟁은 그 연원을 알 수 있다. 그중 199필은 臨津屯土의 분쟁으로 총면적이 76.4정보에 달하는 대규모 분쟁이었지만 민유로 사정되었다. 또 22필은 洛河屯土의 분쟁으로서 면적이 138.5정보에 달하였는데 국유로 사정되었다. 파주의 원분쟁지 269필지 중에서 국유로 사정된 것은 이 22필지를 포함하여 24필(8.9%)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국유사정비율이 낮은 것은 199필지에 달하는 임진둔토의 분쟁이 민유로 사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김해의 경우는 국유로 사정된 비율이 전체분쟁지의 44%였다. 그런데 분쟁당사자를 알 수 있는 국유지분쟁의 경우 파주와는 반대로 국유로 사정된 비율이 92%로 압도적이다. 이것은 가락면 죽림.식만리의 109필, 죽동리의 168필, 녹산면 37필 등의 대규모 분쟁지가 파주와는 달리 국유로 사정되었기 때문이다. 분쟁당사자가 밝혀지지 않은 358필 중에서도 국유지분쟁이 포함되어 있어 전체적인 국유사정비율은 92%보다 낮을 것이지만, 김해의 국유사정비율이 타지역에 비해 높은 것은 사실이다.
사정에 승복하지 않을 경우는 고등토지조사위원회에 불복신청을 할 수 있었다. 접수된 불복신청지는 절반 이상이 취하 및 반부되었고, 9,388건(46.6%)만이 심사대상에 포함되었다. 이는 분쟁지심사위원회의 심사대상비율인 70%에 비하면 매우 낮은 것이었다. 그러나 심사 대상이 된 사건은 그 대부분이라할 수 있는 8,650건(92.1%)이 분복을 신청한 사람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이 불복신청지는 대부분 원분쟁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불복신청지 중에서 원분쟁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14.3%(2,872건)에 불과하였다. 이는 원분쟁건수 33,937건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으며, 기존 통념과는 달리 원분쟁지는 대부분 사정결과에 승복하였음을 의미한다. 분쟁지조사에 불복한 농민들이 대거 불복신청을 했을 것이라는 수탈론의 추론은 이런 기초적 통계조차 확인하지 않은 것이었다. 원분쟁지의 경우 고등토지조사위원회에서 사정 결과가 바뀐 것은 1,610건(56.1%)으로 절반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다.
일제는 고등토지지사위원회의 재결결과를 관보에 공시하였다. 이로부터 계산한 불복신청지는 모두 67,508필지인데 이중 국가기관(조선총독부, 도장관, 철도국장관 등)이 불복신청한 필지는 18,170필지(26.9%)에 달하고 있다. 국가의 불복신청의 경우 재결율이 낮았으리라고 볼 특별한 이유는 없으므로 이들의 불복신청은 대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는 민유지로 사정된 필지에 대하여 국가가 불복신청하여 자신의 소유로 되찾은 필지가 상당수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 역시 '수탈론'의 관점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
사실 분쟁지심사위원회의 결정과 고등토지조사위원회의 결정이 상반되게 나왔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임시토지조사국과 고등토지조사위원회는 같은 청사를 사용하며 업무상에서 긴밀하게 협조하였다. 분쟁지심사위원회의 위원장인 和田一郞은 고등토지조사위원회의 간사로 활동하였다. 또 분쟁지심사가 완료된 시점인 1917년에는 불복신청에 대한 재결도 이미 80%이상이 진전되고 있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사업'의 분쟁지조사가 일제의 토지약탈을 통한 국유지창출정책을 위한 것이었다는 수탈론의 주장은 애초부터 잘못된 사실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제가 분쟁의 소지가 끊이지 않았던 광무사검의 성과를 이용하여 국유지통지를 수행한 것은 매우 행정편의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불복신청을 통하여 소유권을 회복한 민유지의 소유자들은 많게는 10여년간 자신의 소유지에 대한 소유권을 제한받았을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측면에서 '사업'이 지니고 있는 식민지적 특성의 일단을 바라볼 수 있다.
(3) 지가조사는 지세수탈을 위해 수행되었나?
'사업'에 의한 지세제도의 변화를 고찰한 초기의 연구들은 지세부담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수탈론의 입장에선 연구들은 '사업'으로 지세부담이 무거워졌음을 강조하는데, 일본의 지조개정에 비해 '사업'에 의한 지세부담의 변화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일본과 비해 상대적으로 부담이 가벼웠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 주장 모두는 조세제도의 변화를 단지 조세수취액의 크기 변화라는 협소한 시각에서 파악하고 있을 뿐 그러한 제도 변화가 한국의 지세제도 혹은 나아가 조세제도상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천착하지 않았다. 이는 수탈론적 역사인식이 가져온 폐해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업'에 의해 지세부담이 무거워졌다고 할 때 그 논거는 우선 지세가 증가하였으며, 다음은 지세부과의 기준이되는 법정지가가 시가보다 높게 책정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 역시 역사적 실상과는 거리가 먼 추론이었다. 첫째 '사업'이 완료되고 새로운 방식으로 지세가 부과되었던 1918년의 지세는 1917년에 비해 13% 증가하였는데, 이는 1918년의 미가가 1917년에 비해 60% 이상 증가한 것을 고려하면 큰 폭의 상승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둘째 결정된 법정지가가 시가를 상회하는 높은 수준으로 책정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일제가 지가를 산정하는 방식은 토지로부터의 매년 기대되는 순수익을 이자율로 환원한 현재가치의 합계를 구하는 것이었다. 순수익은 조수익에서 경작비 및 수선유지비 명목으로 55%를 공제한 금액에서 조세공과금을 제외하여 수하였고, 조수익은 수확량에 곡가를 곱하여 구하였다. 수확량을 계산할 때는 여러가지 참작율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실수확량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곡가는 도단위로 결정하였는데, 1911-1913년의 수확후 4개월간의 중등품 도매가격을 평균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하였다. 추수 후 곡가가 가장 낮은 때임을 감안하면 조수익액은 실제보다 낮은 수준으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표본조사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법정지가는 시가보다 낮게 평가되고 있었다.
지세는 이렇게 결정된 지가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1.3%를 부과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와 같은 지세액의 결정은 일본과 비교할 때 토지소유자에게 대단히 유리한 것이었다. 지가산정용 공식으로부터 역산하면 지세는 조수익의 5%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이 수치는 지조개정 후의 일본의 수준과 비교하면 17%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또 토지소유규모에 따른 누진세율이 적용되지 않고, 일률적으로 부과되었기 때문에 소유규모가 넓을수록 지세에 대해서 느끼는 부담의 정도는 가벼웠을 것이었다.
지세제도와 관련하여 볼 때 '사업'의 의의는 지세부과방식이 수익지가에 의한 방식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결부제의 운영과정에서 발생한 필지별 부담의 불평등성이 현저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는 토지수익에 기초한 조세부과가 실시된 이후 필지별 조세부담액에 극심한 변화가 나타났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업'의 결과 부과된 필지별 세액은 종래의 것과 비교할 때 매우 큰 차이를 나타냈다. 일제는 급격한 조세액의 변화가 영세한 토지소유자에게 줄 충격을 완하하여 조세저항을 피할 목적으로, 지세령 개정으로 종래보다 지세액이 2배 이상으로 늘어난 필지에 대해서는 그 초과분을 감면한다는 경과조치를 시행하였는데, 그 감면대상인원은 총납세자의 26.5%에 달할 정도였다.(조석곤 1995, 301-302면)
농업 - 식민지농정의 성격과 농민
식민지지주제는 식민지시기에 영세소농 뿐만 아니라 조선인 중소지주의 몰락을 바탕으로 토지를 집적해간 일본인.조선인 대지주에 의해 이루어진 토지소유제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장시원(1989)은 일제하 대지주에 대해 1910년을 전후하여 급속히 성장하였으며, 농업 내부적으로는 소작농에 대한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수입의 극대화를 추구하고, 농외투자에도 눈을 돌리고 있었던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
식민지하의 지주에 대해서 흔히 정태적 지주와 동태적 지주를 구분하는 바, 여기서 동태적 지주란 "시장 경제의 발달에 적응하여, 생산과 유통의 모든 과정에 걸쳐서 경영을 합리적으로 개선해 간 지주"(박섭(1997), 6)이며, 그들의 가장 특징적인 성격은 소작농의 노동과정을 지휘, 감독한다는 점이었다.
총독부의 농정은 조선을 식민지로 유지하기 위해 이와 같은 식민지 지주를 식민통치의 지렛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이 통설적인 주장이다 조선 농민의 기본적인 존재형태는 소작농혹은 자소작농이고, 소작농의 이해관계는 지주의 그것과 반대되므로, 결과적으로 총독부 농정은 반농민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주중심적 농정은 소작농의 경제적 지위를 하락시켜 통치비용의 증대라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1930년대가 되면 지주 중심의 일방적인 농정은 폐지지만 그 본질적 속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반면 농민 중 일부는 이러한 정책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대응하였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구체적으로는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논의들을 검토해보자.
정연태(1994)는 1930년대 초까지 지주중심적 농정을 견지하던 일제가 세계대공황과 농민운동의 고양이라는 상황에 직면하여 '사회개량적 농지정책'을 실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 농지정책의 중심은 소작관계에 대한 행정적 개입과 통제를 강화하여 소농경영의 기반을 안정시키고 농촌사회의 계급대립을 완화"(217)할 목적을 가진 것이며, 이를 통해 "체제순응적인 일부 '중견인물'을 육성"(291)하였다.
농촌진흥운동의 효과에 대해서는 "이 시기 일제의 농촌지배의 안정화란 것은 자주적으로 농업.농민문제를 해결하려는 농민대중의 노력과 역량을 억압하고 해체한 기반 위에서 행정적 개입과 조정의 강화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농민.농촌에 대한 금융자본.비료독점자본의 지배와 수탈은 그 이전 시기보다 더욱 강화"(232)되어 그 안정화 구조는 매우 취약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박섭(1997)은 이러한 지주중심적 농정의 기조와, 1930년대에 있어서의 개량적 변화라는 인식에는 공감하면서도, 그러한 일제의 정책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자신의 위치를 상승시켜가는 농민들이 있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박섭은 서유럽에서의 제2차 산업혁명과 일본의 근대 농업기술이 조선에 도입되면서 농업생산력이 증대하였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도입된 기술이 조선후기 이래의 한국농업의 발전방향과 일치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특히 지주뿐만 아니라 농민도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상승시키려는 의도 하에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보여준 농민이 지니고 있는 경영자로서의 특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집약적 기술의 확산, 토지생산성의 균등화, 농가 경영 규모의 균질화는 경영체로서의 농가가 성장해 간 사실의 표현"(151)으로 간주하였다. 도시화에 따른 수요의 증가로 농민의 상품생산자적 성격이 심화되었으며, 이를 기초로 "적극적으로 농업경영을 합리화하고, 스스로 농업경영을 확대해 갈 수 있었던 농민 중의 일부는 총독부와 협조관계를 맺고, 농촌부락의 중심인물이 되었다".(220)
이러한 농촌의 성장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공업화의 동인을 농촌과 연결시켜 찾으려는 시도와 연결되고 있다. 박섭(1997)은 식민지 후기의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통하여 "농업부문이 공업부문에 노동자와 그 노동자가 소비해야 하는 농산물이란 두 가지 모두를 제공"(85)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여, 농업이 식민지공업화의 동인의 하나였음을 주장하였다. 이와 약간 뉘앙스를 달리하지만 김낙년(1994)은 미곡이출대금의 증대를 기초로 공산품에 대한 소비가 증가하였고, 이것이 조선내의 공업생산을 유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식민지 공업화
식민지 공업화에 관한 논의는 크게 자본가계급과 관련된 부분과 노동자계급과 관련된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통적인 이해에 따르면 공업화에는 일본인 자본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노동자계급은 계급적 및 민족적 착취라는 이중의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식민지공업화에 있어서 조선인자본도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성장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노동자계급도 공업화의 과정에서 자신에 체현된 능력을 증대시켜 나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를 민족자본론과 노동자계급의 숙련도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梶村秀樹(1983)는 민족자본론을 가장 체계적으로 전개한 학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인 토착자본을 그 자본의 일제에 대한 의존정도에 따라 민족자본과 예속자본으로 구분하였다. 그는 평양메리야스공업을 사례로 하여 일제 시대에 민족자본 부문이 거의 순수하게 조선인 자본가층의 능동성 아래에서 형성.발전되었음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왜곡되고 지연될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식민지 권력의 직접적인 규제와 그것이 만들어낸 경제체제 속에서는 축적기반이 협소하고 불안정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식민지 경제체제와 강하게 결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발전의 길이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존속과 성장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민족자본의 예속자본화가 진행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조선인 기업가의 근대적 성격을 강조하는 논의들이 80년대 중반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에커트(C.J. Eckert, 1991)는 경성방직에 관한 사례연구를 통하여 식민지하에서도 조선인에 의해 근대적 대기업이 성공적으로 성장하였으며, 이것은 곧 한국에서 자본가계급이 출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대기업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에서도 자본주의적 기업가군이 출현하였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주익종(1994)은 梶村秀樹와는 달리 자본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성격이라는 측면이 아니라 자본가로서의 능력과 성공 여부에 초점을 두고 중소사업체가 다수를 차지하는 평양메리아스공업을 분석하였다. 그는 평양의 메리야스공업 경영자들이 일본 당국이나 일본인자본으로부터 특별한 지원을 받지 않고서도 조선인자본이 근대적인 산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비록 자체 기술이 아니라 외부에서 이식된 기술이지만, "평양메리야스공업자들은 변화하는 경영환경에 적절하고도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그 공업을 불과 2,30년 사이에 급속히 성장"시켰으며, 스스로를 "근대적 기업가로 성장"(236)시켜갔음을 보여주었다.
다음 노동자들의 상태에 관해서 살펴보자. 전통적 이론에서 노동자계급의 숙련도의 문제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광범한 농민의 빈궁, 탈농과 해외이주 등으로 인상지어지는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그들의 개인적인 성장이나 축적을 논의할 처지가 아니었다. 광범한 농촌과잉인구의 존재와 민족적 차별이 겹쳐서 노동자들은 기아선상의 저임금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덧붙여 화전민 토막민과 같은 특수빈민층이 존재하였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안병직(1989)은 조선인의 임노동자화는 기본적으로는 자발적인 것이었으며, 기술과 숙련의 흡수라는 점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발전은 "비록 식민지적 민족차별정책에 의하여 왜곡되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관철"(427)된다고 주장하였다. 정재정(1989)은 철도국 고용구조의 분석을 통하여 일본인-숙련공, 조선인-비숙련공의 기본구조하에서 민족적 차별이 존재하지만, 식민지 말기 노동자의 수급관계가 변함에 따라서 조선인이 중.상급 기술자로 진출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보았다.
4.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이 지닌 방법론상의 문제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이 각각 수탈론(수탈만을 강조하는)과 식민지미화론(개발만을 강조하는)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은 2절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러면 각 패러다임이 구체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추론 방식에는 어떤 문제가 없을까? 이것이 본절의 과제이다.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내재적 발전론이 근거하고 있는 '두가지 길' 논리와 식민지근대화론이 전개하고 있는 추론 방식에 대해서만 논의를 한정하고자 한다.
'두가지 길' 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개항전 농업문제의 해결방향은 크게 두 계통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불합리한 賦稅制度를 釐正함으로서 농민경영을 안정시키면 혼란이 수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였으며, 다른 하나는 농민경제를 근원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토지제도까지도 개혁해야 한다는 견해였다. 이 양자의 대립은 농업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지주적 상품생산과 농민적 상품생산의 대립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개항 이후의 개혁운동에서도 양반·지주적 입장에 선 개혁론과 농민적 입장에 선 개혁론이 대립하였는데, 그 대립의 결과는 조선사회 근대화의 성격을 규정할만한 것이었다. 농민층이 토지개혁을 정면으로 내세우게 되는 것은 1894년의 농민전쟁에서 였다. 甲午年의 개화파정권과 농민군은 그들의 정책대결을 정책차원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전면 충돌로까지 몰고 갔으며, 그 결과는 일본의 지원을 받은 정부측에 유리하였다. 이후 농민적 입장의 근대화의 방향은 좌절되고 지주적 입장의 근대화방략이 정착되었다. 일제의 농업정책도 이를 계승하여, 그곳을 일본자본주의체제에 편입시킴으로서 수탈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려 하였다.
즉 개항기에는 지주적인 개혁론과 농민적인 개혁론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대립은 개항 이전의 상품생산의 발전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중 농민적 개혁론은 갑오농민전쟁을 계기로 좌절되고, 이후 한국의 근대화의 성격은 지주적인 길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두가지 길' 이론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스톨리핀의 개혁에 대하여 레닌이 혁명적 노농동맹을 위해 대안을 제시할 때 만들어진 이론이다. 레닌은 농업자본주의의 발전에는 프러시아형과 아메리카형의 두가지가 있는데, 이 양자는 각각 지주적인 길과 농민적인 길에 대응한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농민적인 길을 경험한 나라가 있었느냐는 점이다. 레닌이 생각한 아메리카형이란 그 내용에 있어서는 "토지국유화를 통한 농민적 토지분할방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라면 어느 나라도 '농민적인 길'을 통해 자본주의화를 달성하지 못했다. 설령 산업화 초기의 미국이 그 예라 한다고 해도, 미국은 대단히 인구가 희소한 지역이었고, 더구나 혁명적으로 해결해야할 봉건적인 토지소유관계가 없었다는 점에서 매우 예외적인 국가였다.
두가지 길 중에 한쪽 길은 적어도 근대화 초기에는 비현실적인 길이었다. 지주적 길과 농민적 길의 대립으로 근대사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수탈과 저항이라는 대립적 이미지와 조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농민적 길'은 당시 조선의 경제상황에 비추어볼 때 거의 실현이 불가능한 방안이었다.
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농업자본주의의 발전과 산업화가 어떤 고리를 통해서 연결되느냐는 문제가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다. 레닌의 논리는 이미 존재하는 노동자계급이 농민들과 동맹할 수 있는 고리를 찾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개항기의 조선과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특히 이식된 자본주의의 규정력이 강한 한국의 경우에, 두가지 길 이론을 적용하는 것은 비유적인 의미 이상을 갖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 살펴보자. 식민지근대화론이 한국근대사를 바라보는 거시적 관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한국자본주의 성장의 장기추세를 살펴보면 고도성장의 지속과 산업구조의 급격한 변화라는 특징을 도출할 수 있다. 이러한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역사적인 조건들을 살펴보면 첫째 개방체제(무역과 외자도입) 하에서 후발성의 이익을 흡수할 수 있었다. 둘째 소농사회의 성숙도는 이러한 후발성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농민.노동자.자본가 계급을 성장시킬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켰다. 셋째 정부는 경제발전을 위한 제도개혁과 경제개발정책을 통하여 이른바 압축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내재적 발전론, 특히 그것의 한 편향인 '수탈과 저항론'은 식민지시대에 매몰되어, 현대사에 관한 문제의식이 상대적으로 취약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식민지시대의 공업발전을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식민지시대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시대와 해방 이후의 공업발전을 연속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내재적 발전론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식민지근대화론이 이러한 문제점 극복에 완전히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80여 년 이상의 자본주의의 장기추세로부터 이끌어낸 고도성장 경향이 논의의 전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이 방법론에 문제가 없으려면 해방 이전 식민지하 자본주의의 물적.인적 기반이 해방 이후의 자본주의와 연결되고 있음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장기추세분석에서는 전제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두 시기를 곧바로 연결하기에는 분단과 전쟁이라는 단절적 요인이 매우 커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정진성(1995)은 식민지 유산이 해방 후에 어느 정도 전달되었는가에 대하여 "1948년 가동중인 것만을 대상으로 할 때 생산액에서 차지하는 귀속사업체의 비중이 35%정도"(339)이고, 또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막심할 것이어서 오히려 단절되는 측면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다만 인적자원의 측면에서는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그 역시 '학습'이 가능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는 한정을 달고 있다.
식민지시대의 공업화를 파악할 경우 일본제국주의와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고, 그것은 해방과 동시에 단절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수탈론이 공업화의 모든 성과가 '수탈'을 통해 무화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면, 식민지근대화론은 일본제국주의경제권과의 단절 이후에도 그 공업화의 성과는 그대로 전달되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전달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해명된 바 없다.
둘째로는 일본제국주의의 역외분업권이었던 식민지시대의 한반도와 해방 이후 반쪽으로 나뉘어졌으면서도 독자적인 국민경제를 구축했던 남한을 연속적으로 파악할 때 발생하는 분석대상이나 범위의 불일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난점이 존재한다. 국민경제 단위인 남한을 분석할 때는 자본주의의 내재적 발전이라는 개념이 성립 가능하지만, 분석단위를 한반도로 확대한다면 이러한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북쪽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반면 일제시대를 분석할 때 분석단위는 한반도지만 일본자본주의와의 관련이라는 세계체제적(혹은 국제분업적) 시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제시대에 남한지역만을 대상으로 한 독자적인 경제구조에 관한 연구가 의미가 없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마지막으로 보다 이론적인 문제이지만 자본주의의 '기원'을 추적할 경우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근대 비판은 관심 밖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제와 현재의 연속성 파악에 주력할 경우 현재의 한국자본주의에 관한 비판적 관점이 없으면 그것은 과거의 미화와 연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려없이 현재의 한국자본주의의 성장과 일제하 식민지공업화를 무매개적으로 연결시킬 경우 그것은 자칫 '식민지미화론'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을 여지 또한 충분히 있는 것이다.
5. 맺음말 - 새로운 방법론을 위하여
이상 한국근대사를 인식하는 대표적인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의 내용과 문제점, 그것에 입각한 분야별 쟁점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글을 쓰면서 갖게된 잠정적인 결론은 수탈/개발, 내인/외인의 이분법적 파악은 평행선을 달릴 뿐이며, 그러한 입장에 선 어떤 비판도 상대를 설득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소 과감하게 단순화하면 식민지시대를 파악하는 관점에 있어서 내재적 발전론은 수탈의 측면을, 식민지근대화론은 개발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시대에 이루어진 변화를 수탈의 측면에서도 또한 개발의 측면에서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식민지시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당시의 역사적 과제인 민족해방의 관점에서만 국한해서도 안되지만, 현재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그대로 역투사(逆投射)하는 것 또한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식민지하에 출현한 각종의 '근대적' 양상들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수탈론'이 무력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현대의 자본주의 발전 전망을 고정시킨 채 그러한 양상들을 평가하려할 경우에도 '근대'가 강요한 수탈의 측면 역시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수탈이냐 개발이냐는 이분법적 발상 못지 않게 유해한 것은 한국근현대사의 발전동력이 내부에 있었느냐, 외부에 있었느냐를 구분하는 발상이다. 완벽하게 내부 요인만에 의해 근현대사가 이루어진 국가는 없으며, 또 어떤 외부 요인도 내부 요인들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내인/외인에 대한 기계적인 구분은 자칫 일국 내에서의 자생적인 발전만을 절대시하여 외부적 요인에 의한 변용 및 발전가능성을 과소평가할 수도 있다.
한국자본주의의 역사를 인식하는 기존 방법론이 분절적 혹은 단절적 역사인식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내재적 발전론이나 식민지근대화론 모두 자본주의를 향한 단선적인 발전전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근현대사를 일관성있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문제가 나타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내재적 발전론이 조선후기에 검출된 역사상을 식민지시대에까지 그대로 적용하려 하고 있으며, 식민지근대화론은 현재의 자본주의의 고성장이라는 관점을 식민지시대에 투영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던 해방은 사실 주어진 것이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이라는 냉전체제가 우리에게 강요한 분단이라는 굴레는 사회주의체제가 실질적으로 붕괴한 이 시점에도 여전히 족쇄로 남아있다. 이 굴레를 벗는 계기 역시 외부에서 주어질까? 만일 분단상황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면, 주어진 해방이 분단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또 다른 멍에가 씌워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국주의와 냉전체제로 이어지는 한국근현대사를 일관되게 파악할 수 있는 역사의식을 구축하는 일은 어쩌면 이러한 또 다른 멍에를 피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필자의 문제의식은 수탈과 개발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역사인식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그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고민하는 중이다. 필자의 문제제기가 이러한 대안 형성에 일조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다만 기존의 여러 이론
중 다음 세 가지 정도는 우리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세계체제론. 세계체제론의 강점은 개발과 수탈을 동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에 관한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 자본주의화란 어떤 의미에서는 수탈의 외연의 확대이며,
내적인 심화과정인 셈이다. 둘째 민족경제론. 세계체제론적 시각에 설 경우 자본주의세계체제의 압도적 규정성이 강조되어 민족 주체적 역량의 역할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경향은 없을까? 이런 점에서 민족경제론은 강점을 보인다. 셋째 분단체제론. 해방 이후의 분석에서 반쪽은
자본주의세계체체로 분석할 수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근대사이후를 연속적으로 파악하려 할 경우 이를 포괄할 수 있는 분석틀이 도입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러한 여러 이론들이 어떠한 상호관련 속에서 구조화될 수 있을 것인지는 여전히 필자의 능력이 닿지 않는 세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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