植民史觀
비판 |
-南韓經營論과
黨派性論을 중심으로- Ⅰ 植民史觀이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학자의 일부가 일본에 의한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고 한국 민족 문화에 열등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만들어낸 일련의 역사의식을 말한다. 해방 이후 우리 손에 의한 역사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지면서 이 사관은 더 이상 생산되거나 전승되지 않았으나, 아직도 우리 민족의 머리 속에 남아 각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이 우리 민족 자체에 대한 열등의식을 심어준 것도 큰 해독이지만, 일부 사람들이 그에 극단적으로 반발하여 일본에 대한 무차별적인 적개심을 표출하는 현상도 그 반작용으로서의 문제점이다. 이러한 장애를 걷고 급변하는 국제 사회 환경에 당당한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임하기 위해서는, 민족 구성원 모두가 역사에 대한 無知를 깨우쳐야 한다. 식민사관은 지금의 老年 世代에게는 일제에 의한 학교 수업을 통하여 교육되어 한국 민족 문화 전반에 대한 열등의식을 주입시켰다. 中年 世代는 그에 대한 극복 논리의 개발 없이 방치된 상태에서 음성적으로 그 내용을 전수 받고 있었다. 또한 靑少年 世代는 식민사관이나 민족사관 자체에 대하여 배우지도 못하고 민족사에 대한 관심도 없이 무지한 상태에서 한국 민족에 대한 막연한 열등의식만을 遺傳처럼 계승받고 있다. 이러한 상태는 한국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모두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증적인 한국사 연구를 활성화할 뿐만 아니라, 그 연구 성과들을 여러 가지 방식을 동원하여 널리 홍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식민사관은 크게 보아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他律性論으로서, 한국사는 언제나 타율적으로 전개되어 왔으므로 당시의 강점 상황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停滯性論으로서, 한국사는 오랫동안 內的 發展이 없이 머물러 있었으므로 근대화를 하려면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타율성론에는 南韓經營論(任那日本府說), 半島的 性格論(地政學的 決定論), 黨派性論 등이 있으며,
정체성론에는 封建制 缺如論, 아시아的 生産樣式論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정체성론 계열의 논리들은 일부 지식인들에게만 영향을 끼쳤을 뿐이나,
타율성론 계열의 논리들은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정신적 타격을 주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남한경영론과
당파성론의 두 가지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비판하고자 한다. Ⅱ 남한경영론은 이른바 '南鮮經營論' 또는 '任那日本府說'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그 요지는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라는 出先機關 또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학설이다. 이는 末松保和가 에도 시대의 국학자들의 연구와 메이지 이후의 근대 국학 연구 전통을 이어받아 주장하다가, 일본의 패전 후에 <<任那興亡史>>라는 책으로 펴내면서 학문적 체계를 갖추었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 사료인 <<일본서기>>는 8세기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하여 편찬된 책으로서, 원사료 편찬 과정에 상당한 조작이 가하여졌다고 보이고,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우며, <광개토왕릉비문>이나 <<송서>> 왜국전의 문헌 기록은 과장되게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헌 사료상의 문제점을 생각지 않고 그 주장의 사실 관계만 검토하여 보아도 임나일본부설의 한계성은 곧 드러난다. 만일 왜가 임나를 200년 동안이나 군사적 지배를 하였다면 그 지역에 일본 문화 유물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가야지역 고분 발굴 자료들에 의하면 4세기 이전에 출토되던 이 지역의 독특한 유물 문화가 5-6세기까지도 연속적으로 계승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즉, 일본에 의하여 지배당하였다는 사실이 그 문화 유물에 반영된 바가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에서의 문헌 사료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이 반증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末松氏에 의하여 학문적으로 정립된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 정설로 인식되어왔다. 그 후 江上波夫의 騎馬民族征服王朝說이나 金錫亨의 日本列島內分國說 등에 의하여 1970년대 이후로 일본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그 결과 이루어진 일본 학자들의 임나관계 연구 경향은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에 비하여 상당한 차이가 나타났다. 새로운 경향은, <<일본서기>>의 5세기 이전 사료의 신빙성을 부인한다거나,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왜국의 임나 지배 기관이 아닌 좀 다른 것으로 본다던가 하는 진전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아직도 가능한 한 모든 대외관계의 주체를 大和 畿內의 왕가로 돌려서 보려는 고정 관념이 존재하고 있는데다가, 근본적으로 주된 관심을 일본부 자체에 두고 있어서, 여전히 실태 파악의 균형을 잃고 있다. 한편 일제 시기에는 물론 광복 이후에도 한 동안, 한국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을 금기시하여 체계적 반론을 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후반에 千寬宇가 임나일본부를 백제가 가야 지배를 위하여 설치한 파견군사령부로 본 이후, 필자를 비롯하여 金鉉球, 李根雨, 延敏洙, 李永植 등은 기존의 학설들을 비판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의 부정을 도모하였다. 그 중에서도 일부는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의 전 기간에 걸쳐 가야가 '백제'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고 추정한 견해도 있는데, 이는 앞에 서술한 가야문화의 前代 계승적인 경향과 어긋난다. 이러한 추단은 기본적으로 가야사 및 가야의 문화 능력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한·일 양국에서 1970년대 이후로 본격화된 임나 관계의 새로운 연구들은 서로 근접된 인식들을 보여주고 있다. 즉, 임나일본부의 문제를 6세기 전반에 한정하여 취급한다던가,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지배가 아닌 외교의 측면에서 이해한다던가, 임나 문제에 대하여 백제의 역할을 중시한다던가 하는 점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6세기 이전의 가야사 및 일본고대사 자체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진한 탓으로 인하여, 그들 사이의 대외관계사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임나문제 연구는 더 이상의 규명이 어려운 단계에 와 있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남한경영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역사인 가야사를 재정립하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 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우리 나라의 발굴 수준 및 규모는 크게 활성화되었다. 그를 통해 드러난 경남 일대의 고고학적 유물로 볼 때, 가야 지역은 기원전 1세기에 철기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한 이래 기원후 6세기 중엽의 멸망할 때까지, 묘제나 토기 등의 문화가 前시대의 것을 계승하면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및 왜국과 상당히 구분되는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문헌 사료만의 자의적 해석을 통해 왜국이나 백제가 가야를 200여 년간 통치하였다는 주장을 할 수는 없다. 문헌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는 가야 문화의 독자성을 배경으로 삼아 재해석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임나일본부 관계 사료를 가야사의 전개 과정과 관련해서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낙동강 유역을 비롯한 경남 해안 지대에는 기원전 1세기초부터 한반도 서북부의 철기 문화 및 토기 문화가 유이민과 함께 들어왔으며, 이들은 2, 3세기에 걸쳐 김해 加耶國을 중심으로 12개 소국들이 합친 변한소국연맹 즉 前期 가야연맹체를 이루고, 발전된 철기 생산 능력과 양호한 해운 입지 조건을 바탕으로 낙랑군, 마한, 예, 왜 등과 교역하고 특히 낙랑, 왜의 교역 중개 기지로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4세기초에 고구려가 낙랑, 대방군을 병합하자, 가야연맹은 선진 문물 교역 대상을 상실하면서 일시적인 혼란에 빠져 내분을 겪고 있었는데, 4세기 중엽에 백제가 중국 남조의 문물을 바탕으로 가야-왜를 잇는 교역권을 개척해 오자 창원의 任那國이 적극 협조하고 맹주국인 김해의 加耶國이 동조하였다. 이 任那加羅는 백제와 교역하는 대가로 일부 倭와 함께 동원되어 고구려의 동조 세력인 신라를 공격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 참전한 왜인들 또는 일본 거주 백제유민의 전승에 의해 사실과 달리 왜군이 신라 및 임나를 정복하였다는 전설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가야-왜 연합군은 4세기 말 5세기초에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남하한 고구려의 군대에 의해 참패하였고, 그로 인하여 전기 가야연맹은 소멸되었다. 5세기 후반에 들어 경상 내륙 산간지방에서부터 가야 문화는 다시 부흥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중에서 가장 앞선 고령의 伴跛國이 옛 가야지역을 아우르며 大加耶國으로 이름을 고치고 13개 소국을 포괄하는 연맹체 즉 後期 가야연맹체를 형성시켰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중국 南齊에 교역하여 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작호를 받기도 하고, 백제와 대립하기도 하면서 발전하였으나, 6세기 전반에는 김해 金官國을 비롯한 몇 나라가 신라에 투항하면서 약화되었다. 6세기 중엽에 후기 가야연맹은 고령 大加耶國과 함안 安羅國 중심의 南北 二元체제로 분열된 채로 백제, 신라 양측의 압력에 시달리다가, 결국 562년에 신라에게 병합되고 말았다. 任那日本府는 이 당시 함안 안라국에 있던 對倭 교역관계 倭臣들이 머무르던 곳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은 왜인이라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안라왕을 위하여 일하던 안라국의 신하였던 것이다. 가야제국은 장기간에 걸쳐 백제나 왜의 복속 상태에 빠진 적이 없이 600여 년간에 걸쳐
발전하였으며, 任那加羅 및 任那日本府 문제는 가야제국의 발전 과정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이들과 왜국과의 관계의 성격 및 왜국 내부의 상태는
앞으로 더욱 추구해 보아야 할 과제라고 하겠다. Ⅲ 당파성론이란, 조선시대의 문화가 수준이 낮고 고루하다는 전제하에, 조선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자기들끼리 서로 늘 싸웠기 때문이고, 그 단적인 예가 士禍와 黨爭이며, 이는 좋지 않은 民族性의 所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던 기간 중에 조선시대의 문화 전통은 近代化의 명목 아래 모두 부정되고 단절되었으며, 처참한 시대를 살던 당시인들의 自己 卑下 의식과 연결되어 이 주장은 우리 민족에게 쉽게 먹혀들었다. 조선왕조의 정치를 본격적으로 정리하면서 비판한 저술로는 1890년대에 小論系의 李建昌이 쓴 <<黨議通略>>이 있다. 거기서 그는 宣祖代의 東·西分黨으로부터 英祖代의 蕩平策 시행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였으며, 이는 19세기 말엽 당시 국내외 정세로 보아 양반 벌열 중심의 정치는 이제 극복되어야 한다는 반성 위에서 쓰여진 것이다. 조선 왕조의 정치에 대하여 '黨爭'이라는 용어를 써서 규정하고 이를 매도하기 시작한 것은 1907년에 간행된 幣原坦의 <<韓國政爭志>>였다. 3·1운동 이후 小田省吾, 瀨野馬熊, 麻生武龜 등은 당파성론의 적용 범위를 더욱 넓혀나갔다. 일인들의 이러한 공세 앞에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지식인들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우리의 近代史家들도 조선 문화를 대체로 부정적으로 보았다. 民族史家들은 조선이 왜 망했느냐는 것을 찾기에 급급하여, 그 직전 시대인 조선문화에 혐오감을 표시하였다. 계급투쟁적 사관을 받아들인 社會經濟史家들은 조선의 유교문화는 곧 兩班文化라고 하여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現代史硏究者들은 조선 말기의 모순에 찬 사회를 곧 조선문화라고 인식하고 그 전통적 장점은 외면하고 말았다. 士禍와 黨爭은 한 시대의 역사적 조건하에서 생겨난 역사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한국사 연구자들은 당파성론을 의식하여 조선시대의 사화, 당쟁을 연구하지 않고 외면해 왔다. 다만 당파성론을 비판하라고 하면 막연히 관직의 수는 적은데 사람은 많기 때문에 관직 다툼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답하고 더 이상의 말이 없다. 과연 이것이 옳은 답이며 '관직 다툼'이 그 본질인가? 당파성론을 진정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정치사의 올바른 체계화가 필요하며, 우리 전통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연구를 해야만 새로운 시각으로 조선 문화를 볼 수 있다. 16세기 전반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士林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 중에 戊午士禍(연산군 4년, 1498), 甲子士禍(연산군 10년, 1504), 己卯士禍(중중 14년, 1519), 乙巳士禍(명종 즉위년, 1545)를 4대 사화라고 한다. 과연 이는 추악한 黨爭의 前奏일 뿐인가? 그러나 이는 단순한 권력 싸움이 아니다. 조선 초기 중앙 관료층의 시초를 이룬 급진적 新進士大夫들은 서울로 이주 정착하여 科田의 1/10租와 祿俸으로 생활하였다. 그런데 그 중 일부 관리들은 중요 관직을 세습, 독점하는 경향을 보였고, 그들은 公商인 六矣廛, 官匠制 手工業者 등과 연결하여 각종 이권에 개입함으로써 특권적 이익을 취득하였다. 그리하여 초기 왕권에 봉사하던 官學派는 점차 特權 勳舊大臣으로 전환해나갔다. 한편 고려말에 대부분의 보수적 신진사대부들은 鄕村地主의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 중 상당수는 私田革罷를 반대하다가 被殺되거나 落鄕하였다. 이들은 신분적으로 兩班인 外方居住 品官層(고려의 前職品官)으로서, 지방 각지에 自治的 성향의 留鄕所를 설립하여 향촌 사회를 장악하고, 중앙에서 파견되어오는 지방수령들과 갈등을 겪었다. 그런 속에서 15-16세기에 걸쳐 농업 기술이 발전하여 전국적으로 連作常耕法이 실시되고 洑나 堤堰이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지방에 많은 잉여농산물이 생성되자 상업과 수공업이 발전되어, 전국 각지에 5日場과 같은 정기적 地方場市가 생기고 비단, 銀, 綿布 등의 거래가 일어났으며, 곳에 따라서는 倭와의 대량 貿穀이나 銀鑛 개발 등으로 커다란 이득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자 기성 관료들은 지방의 새로운 財源들을 권력으로 차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地方士族들은 鄕村에 중앙 權勢家의 권력이 미치는 것을 방어하고자 하여, 15세기 후반부터 중앙조정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士林派라는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였다. 사림파 관료들은 주로 言官으로 입사하여 正統性理學의 기치를 들고 척신계열의 非理를 공격하였으며, 鄕村 자치 질서의 수립을 더욱 강화해 나가기 위하여 鄕射禮, 鄕飮酒禮, 鄕約을 시행하고 科田法을 폐지하려고 하였다. 그들 양자간의 충돌로 인하여 몇 차례의 큰 사화가 일어났으나, 지방의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연이어 올라오는 사림들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16세기 중후반에는 특권적인 훈구대신들이 소멸되고 사림파의 승리로 귀결되어, 조정에는 정통 성리학에 기반을 둔 새로운 朋黨政治의 기풍이 진작되었다. 그리하여 朋黨은 宣祖代(1567-1608)에 발생하였으며, 그들은 學緣에 의거하여 나뉘어져 상호간에 서로 다른 정책 대립의 면모를 보였다. 西人은 李珥 학통으로서 時務에 능하였고, 南人은 李滉 학통으로서 향촌 자치의 보장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北人은 曺植·徐敬德 학통으로서 山林儒라 하여 재야 비판세력으로 존재하였다. 이들은 壬辰倭亂의 대처 방식에서도 서로 다른 면모를 드러냈다. 光海君代(1608-1623)에는 北人들이 임진왜란 중 의병 활동으로 정치적 우세를 획득하여 집권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주도한 광해군의 실리 외교는 우리 여건으로 보아 유익한 것이었으나, 당시의 여론에서는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학파적 순수성을 확보하는데 취약점을 드러내어, 왕권을 무리하게 강화하는데 주력하다가 결국 廢母殺弟라는 반인륜적 행위를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西人이 주동하고 南人이 동조하여 北人을 타도함으로써 仁祖(1623-1649) 反正이 일어났다. 그 후 서인과 남인은 상호 인정 下에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구축하여 朋黨政治를 운영해나갔다. 이 당시에 지방에는 書院과 鄕約이 발전하고, 학문의 領袖인 山林이 중심이 되어 與論을 主宰하는 독특한 정치 형태를 보여주었다. 그와 아울러 禮學이 발전하였으니, 이는 성리학적 사유 방식을 정치뿐만 아니라 실생활에까지 응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탄력적인 외교에 실패하여 병자호란이 발생케 하였으며, 淸朝 개국 이후에는 華夷論에 의거하여 쇄국정치를 하였다. 顯宗年間(1660-1674)에는 왕실의 服喪問題를 둘러싼 儀禮 절차를 놓고 爭訟하는 禮訟이 일어났다. 당시에 西人은 士庶禮와 王朝禮를 구별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으며, 반면에 南人은 王朝禮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런 것이 곧 이른바 '黨爭'의 전형적인 형태였다고 할 수 있으니, 이는 곧 性理學的 名分論이 정치 사회에 철저하게 반영됨으로써 나타난 것이었다. 이들은 당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상대 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없었으니, 이는 言路를 존중하는 정신이 극도로 발전된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肅宗代(1675-1720)에 이르러 왕이 黨爭을 이용하여 두 세력을 견제하면서, 王權의 입지를 강화해나갔다. 왕과의 親疎關係 여하에 따라 명분 없는 정권 교체가 잦아지자 붕당정치의 모순이 露呈되어, 각지에 書院·祠宇가 濫設되고 同族部落이 성행하였으며, 학문적 성취보다 벼슬 高下나 門中關係가 더욱 重視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사회가 상업자본이 발달하여, 名分爲主의 사회로부터 實利爲主의 사회로 전환되고 있던 것과도 관계가 있었다. 그에 따라 정치도 이익 집단을 배경으로 한 정당 구조로 변화해야 하였으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英祖(1725-1776) 초년에는 당파간의 이해관계에 따른 대립이 심각하게 되어 왕이 蕩平策을 실시하기에 이르렀으나, 학문 배경이나 정책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은다고 해서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탕평책의 실시란 곧 성리학적 정치 질서의 한계성을 自認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고, 오히려 그 부작용으로 인하여 19세기의 勢道政治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당쟁 또는 붕당정치 자체가 조선 왕조 패망의 원인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그것은 농업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이룰 수 있는 가장 발전된 정치 형태의 하나였으며, 조선 왕조의 청렴성은 그로 인하여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오래 지속된 폐쇄적인 쇄국정치, 명분 정당이 아닌 이익 정당 출현의 지연 등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것은 우리의 민족성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사회 변화가 원활하게
제도에 반영되지 못하였던 탓이라고 하겠다. 實學이나 그를 계승한 개화사상은 이런 점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 민족에 의하여 준비되고 있던
사상체계였으나, 외세의 침략은 우리에게 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참고 문헌> 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 李泰鎭, 1987 <黨派性論 批判> <<韓國史 市民講座>> 제1집, 일조각. 李泰鎭, 1990 <士禍와 朋黨政治> <<韓國史特講>>, 서울大學校出版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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