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한국 현대사의 進步와 보수

이강기 2015. 9. 19. 11:51
한국 현대사의 進步와 보수
 
金基哲 朝鮮日報 문화부 기자
 「전향한 좌파」의 불순한 이론?
 
 
  경제사학자 安秉直(안병직·66) 서울대 명예교수는 기자가 최근 몇년 간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인상적인 인터뷰이(Interviewee)다. 그는 모든 질문에 분명하고, 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安교수의 최대 특징은 지식인에게 흔히 따르게 마련인 정치적 고려나 외교적 수사 없이 진솔한 답변으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인터뷰가 몰고 올 파장을 예측할 법한데, 에둘러 가지 않았다.
 
  安교수는 1970년대 말까지 학생운동권의 단골 연사로 불려다녔고, 몇 차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고초를 치르기도 한 「진보인사」였다. 低개발국의 성장 가능성을 부정하는 「植民地半封建社會論」(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 기울어 있었고, 1970년대 말 한국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도쿄大에 교수로 가 있으면서 한국 자본주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사상의 대전환을 경험한다. 스스로 『煉獄(연옥)을 통과하는 고통을 겪었다』고 말할 정도로 代價를 치른 변화였다.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진로를 놓고 비판적 소장학자들이 모두 가세한 「社會構成體論爭」(사회구성체논쟁)의 와중에서 安교수는 저개발국의 발전 가능성을 주장하는 「中進資本主義論」(중진자본주의론)을 내놓았다.
 
  식민지를 경험한 제3세계나 저개발국들은 현재에도 중심부 제국주의 국가들의 착취 탓에 결코 선진국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從屬理論」(종속이론)의 영향력이 거셌던 사회과학계에서 安교수의 주장은 「전향한 좌파」의 불순한 이론으로 매도당했다.
 
  그후 安교수는 1987년 서울대 후문 근처 낙성대에 세운 개인연구소 「낙성대 연구실」을 터전삼아, 「중진자본주의론」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나갔다. 「근대 조선의 경제구조」, 「근대 조선공업화의 연구」, 「한국경제성장사」 등의 저서와 수많은 논문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 발전을 실증적으로 분석해 갔다.
 
  작년 8월 서울대 경제학과를 정년퇴직한 安교수는 4월1일부터 일본 후쿠이(福井) 현립대로 자리를 옮겨 대학원 특임교수로 제2의 연구인생을 시작했다. 일본行을 앞둔 安교수와 지난 3월6일과 3월22일 두 차례에 걸쳐 여섯 시간 동안 인터뷰를 가졌다.
 
  安교수와의 인터뷰는 1980년대 이후 학계와 사회에서 급부상한 「보수-진보」 논쟁부터 시작됐다.
 
  『종래에는 말이나 이데올로기의 급진적 진보성을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를 나눴다. 난 요즘 생각이 다르다. 어떤 사회 단체나 조직이 진보적이냐, 아니냐는 그 조직이 한국 현대사회에서 본래 수행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어떤 조직이 말만으로 진보를 표방하는 것은 실체를 감추는 선전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보수·반동이고 사회주의는 진보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현실에선 어떻게 됐는가. 보수·반동인 자본주의는 질적으로 승화돼 가고 사회주의는 퇴화되면서 전망이 없다. 무엇이 진보고, 무엇이 보수인가. 이젠 기준을 바꿔야 한다』
 
 
  『북한은 소수가 집권연장을 위해 다수 人民을 인질로』
 
 
  ―대개 이념에 따라 진보와 보수를 나누지 않는가.
 
  『한국은 아직 中進國(중진국)이다. 선진국은 자본주의적 선진국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진자본주의국에 주어진 과제는 어떻게 선진자본주의를 빨리 캐치 업(catch up)하느냐 하는 문제다. 중진자본주의에 주어진 과제를 어떻게 성취하느냐에 따라, 진보·보수를 나눠야 한다. 예컨대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은 국민 복지를 위해 의료보험제도를 개혁, 평등한 의료서비스를 보장하려 했다. 하지만 국민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의료 서비스의 질은 낮아지는 등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평등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진보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결과를 놓고 볼 때 오히려 반동적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북한에 대한 입장을 놓고 확연히 갈린다. 진보 진영에선 북한을 지원하고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보수 진영에선 북한의 독재체제와 인권 문제를 비판하고, 무조건적 지원은 반대한다.
 
  『북한은 현재 소수의 지배자들이 다수의 인민을 기아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극소수의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지배를 장기화시키기 위해 다수의 인민을 인질로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햇볕정책을 지지하거나, 북한을 지원한다는 것은 누구를 돕는 것인가. 소수의 독재자를 도와주자는 것인가, 아니면 기아 상태의 인민을 돕자는 것인가. 진보 진영 사람들은 명확히 얘기하지 않는다. 지금의 통일운동은 매우 무책임하다. 당장 통일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 지금 통일하면 혼란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통일이 돼야 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막연히 북한을 지원하라고 얘기한다. 독재자를 지원하라는 것인가. 현재의 햇볕정책 지지는 진보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식, 무의식적으로 죄악을 저지르는 행위다.
 
  굶어죽는 인민들을 지원하려면 분배과정이 투명해야 한다. 그런데 북한 당국은 원조 물자의 배분을 감시하겠다는 국제 사회의 요청을 거부하는 상황이다. 그 물자가 누구에게 가는지 모른다. 북한이 붕괴되면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기 때문에, 현재 지배체제를 붕괴시키는 게 옳다고 얘기하기도 어렵다. 그 사람들이 개혁·개방 정책만 채택한다면, 현재 북한 체제가 나쁘다고 해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원조해 줄 필요가 없다. 조금도 개선될 전망이 없다. 이런 지배체제에 대해 원조하는 것은 죄악이다』
 
  ―남측의 소위 진보 진영은 북한의 독재체제나 인권문제 등을 좀처럼 비판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예전에 사상 운동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많다. 지금도 자주 만난다. 사상적 유대가 아니라 인간적 차원의 만남이다.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인간 관계까지 등을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옛 친구들을 인간적으로 비난하거나 홀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친구들 중 대부분은 남북한 현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사상적 전환을 하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예전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사상을 선택하지도 못한다.
 
  그간 맺어 온 인간 관계 때문에 그대로 가는 것 같다. 몇몇은 금강산에 다녀와서, 「나도 이젠 생각을 바꾸고 싶다. 安교수 얘기가 반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실이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사회적으로 행동할 때는 남북교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선다』
 
 
  『사상 전환은 연옥을 통과하는 고통 겪어야』
 
 
  ―생각을 바꾸는 것을 변절이나 전향으로 여기기 때문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측면이 있다. 과거 진보적 경향에 있던 사람들 중 진보 측의 문제를 인정하면서도 사상적 전환을 못하는 것은 나와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 교수로서 많은 제자들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에 대한 책임의식 때문에라도 사상적 전환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장을 바꾸지 못하거나 안 하는 사람은 사회적 관계가 고립돼 있어서 기존의 생각을 구태여 바꿀 필요가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긴급하게 사상전환을 할 필요나 고통을 감수할 뜻이 없기 때문이다.
 
  1985년 일본 도쿄大에 교수로 갔을 때, 북한 사회를 알기 위해 북한 에이전트나 북한을 지지하는 재일동포를 많이 만났다. 대부분이 지식인들이었다. 그 사람들의 知的 수준으로 봐서 북한 현실을 모를 사람들이 아니다. 북한 실정에 대해 물었을 때 양심에 가책이 돼 얼굴이 창백하게 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를 포섭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조총련 혹은 북한과의 기존 관계 때문에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는, 인간이 갖는 관성이 있을 것이다. 사상 전환은 연옥을 통과하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고통에 대한 공포 때문에 안이하게 과거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또 과거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게 위험하지도 않고, 치러야 할 비용이 낮다면 그런 사람이 다수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까지는 소위 진보진영을 「빨갱이」로 몰았고, 1990년대 이후에는 보수 세력을 「守舊·反動」(수구·반동)이라고 몰아붙이는 등 국내 이념적 지형도는 극한 대립이 지배적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보수·진보를 말할 단계가 아닌가.
 
  『진보와 보수를 얘기하려면 상당히 성숙된 사회가 돼야 가능하다. 일단 진보는 보수를, 보수는 진보를 서로 인정해야 한다. 진보가 보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반동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다양한 가치가 병존하고 그 가치가 서로 경쟁해야 한다. 민주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진보적이란 사람이 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도, 실제는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그 계급 내의 민주주의를 얘기하지, 그밖의 계급에게는 관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는 반동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知的 詐欺(지적 사기)란 뜻인가.
 
  『그렇다. 知的인 사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론 자체가 그렇게 돼 있다. 공산주의 사회는 레닌에 의해 실제로 성립했는데, 레닌의 「前衛黨」(전위당) 이론은 기본적으로 엘리트주의다. 공장 노동자는 그들의 세계가 공장 안에 국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보수적이다. 임금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 등 경제주의로 흘러가기 때문에 혁명적이 아니라 개량적일 수밖에 없다.
 
  전위당이 근로 대중을 이끌어 주지 않으면, 혁명적으로 되지 않는다. 이것이 레닌의 전위당 이론인데,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본래 바보스런 다수의 지배다. 바보들이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면서 투표하고, 이끌어나가는 것이 민주주의다. 하지만 바보들을 다수 모아놓으면, 상당히 올바른 결정이 내려지기 때문에 소수의 독재자가 하는 것보다 낫다는 사상이다. 엘리트주의는 본래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역사상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지구상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이외에는 있어본 적이 없다. 그것이 20세기 후반에 성숙해서 대중민주주의로 발전했다』
 
 
  『동포가 굶어죽는데 뭘 보러 거기 가는가』
 
 
  ―요컨대, 한국 사회가 보수·진보를 논할 만한 단계에 와 있지 않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다. 1987년 이후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정치질서가 발전하고 있다. 다양한 가치관이 병존하고, 경쟁하는 게 한국 사회의 일반적 흐름이다. 하지만 과거에 국민을 계급적으로 나눠 적대적으로 思考(사고)하는 극소수 지식인이 남아 있다. 이들은 현재 체제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을 반동이라고 한다. 그 양자 사이에는 민주주의적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한국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이젠 보수·진보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진보 진영」 일각에선 조선일보는 수구·반동 언론이기 때문에 인터뷰와 기고를 해서는 안 된다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 사람들은 아직도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이 20세기 전반기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발전에 따라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몰락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으로 보면서, 자본주의는 반동이고 사회주의는 진보로 생각한다. 그런 사상을 머리 속에 간직한 사람 입장에서 보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발전의 길은 없다. 어떻게 「인간적 자본주의」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을 뿐이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인간적 자본주의 형태를 띠고 있다. 중진 자본주의에선 그 시대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진보와 보수를 구분해야 한다.
 
  현재 조선일보를 매도하는 안티운동 세력은 조선일보가 한국 사회를 받들고 있는 언론의 중추기관으로 보기 때문에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재벌 문제도 마찬가지다. 재벌도 해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난 입장이 다르다. 왜냐하면 재벌은 나쁜 측면이 굉장히 많지만 근대화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功·過(공·과) 양 측면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재벌은 무조건 나쁘다, 특정 언론은 무조건 나쁘다고 얘기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니냐. 조선일보는 순기능뿐 아니라 역기능도 있다. 조선일보를 순기능 쪽으로 가도록 하면 된다. 그 사람들이 올바른 사고를 한다면 조선일보는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라 조선일보의 이런 점이 나쁘다고 얘기해야지, 조선일보는 무조건 나쁘기 때문에 거래를 끊자고 하는 것은 스스로 독선을 인정하는 것밖에 안 된다.
 
  나는 신문의 보수·진보를 나누는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론기관의 본질적 기능은 충실한 사실 보도다. 어느 신문이 사실보도가 가장 충실한지, 기사 質이 높은지가 중요하다. 사실 보도가 충실하고, 기사 質이 높고, 논의의 수준이 높으면 그것이 진보적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진보적인 주장을 해도 결코 진보적이지 못하다. 주어진 과제를 해결할 수있는 능력이 있으면 진보적이 되고,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말로 진보라고 해도 진보가 될 수 없다』
 
  ―진보진영에선 조선일보가 북한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이고, 勞使(노사) 문제에서 反노동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보수반동이라고 비판한다.
 
  『그건 두 가지 다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난 북한 동포가 餓死(아사)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후부터 심적으로 부담이 되기 때문에 북한 국경 근처에 갈 수가 없다. 동포가 굶어죽는다는데 뭘 보러 거기 가는가. 그 사람들 도우러 가면 모르지만. 지금 북한을 이해하고 돕는다는 것은 북한 지배자를 돕자는 얘기밖에 안 된다.
 
  노동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노동자들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고, 노동 3권은 보장돼야 한다. 하지만 현재 노동문제에 대해 찬성할 수 없는 부분도 많다.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서 법의 규정을 어기는 것이다. 국민 전체가 악법이라고 규정하면 국회를 통해서 고치면 된다. 특정 계급이 자기 이해관계와 대립된다고 해서 법을 무시하면 법치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분배보다는 성장에 관심 쏟는 것이 유리』
 
 
  ―노동계에선 여전히 노동자에게 불리한 법규들이 많다고 느끼는 것 아닌가. 노동자 입장에선 국회의원들이 자기들의 利害(이해)를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 것 같다.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가 정착된 역사가 짧기 때문에 노동자에게 불리한 법규가 있을 수 있다. 현재 노동자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이해는 되지만, 찬성할 수는 없다. 법치주의의 정착은 민주주의 사회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노동운동 중에는 노동운동이 해서는 안 될 일이 많다. 기업의 경영권과 소유권에 간섭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사유재산권이다. 신성하다고까지 얘기하지는 않더라도 사유 재산권은 지켜져야 한다. 公기업 민영화 문제도 그렇다. 「민영화는 안 된다」는 식은 곤란하다. 그건 公기업 노동자들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나 정부가 결정하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 과거 노동운동은 경영권을 제약하는 요구가 많았다. 노동 성과의 분배권을 주장해야지, 경영권에 간여하는 것은 사유재산제를 제약하는 것이다』
 
  ―우리 노동운동은 1987년 이후에 본격화됐기 때문에 십수년밖에 안 됐다. 초창기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있지 않은가.
 
  『선진국에선 노조가 회사 내에 사무실을 두면 회사에 포섭됐다고 보기 때문에 반드시 회사 밖에 사무실을 둔다. 독립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회사에 요구해서 전임 노조원을 둔다는 것은 회사에 매수된 것으로 본다』
 
  ―安교수께선 「영국의 자본주의는 400여 년 간 숱한 희생과 고통을 겪으면서 현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한 자본주의로 발전해 왔는데, 우리는 그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성장의 열매만 따먹으려고 한다」는 지적을 한 적 있다. 노동운동도 1987년 이후 노력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권리를 누리게 됐다는 얘기인가.
 
  『대단히 중요한 지적이다. 노동운동의 방향은 정확하게 이야기해 줘야 한다.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눈감아 준다든가, 그냥 그대로 이해를 해준다는 것은 옳지 않다. 고도성장을 거듭해 온 한국에선 노사가 협조해서 성장을 지속시켜야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분배 몫이 훨씬 더 커진다.
 
  低성장 속에서는 분배를 평등하게 한다고 해서 노동자들의 생활이 개선될 여지는 별로 없다. 고도성장에서는 파이를 계속 키움으로써 노동자들에게 들어가는 몫이 커진다. 분배보다는 성장에 관심을 쏟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는 뜻이다. 연평균 6%씩 성장한다면 분배율의 개선이 없어도 노동자의 생활은 훨씬 더 빨리 나아질 수 있다』
 
  ―분배보다는 파이를 키워서 노동자들의 몫을 늘리자는 얘기는 더이상 대중들에게 설득력이 없다. 1960년대부터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마하고, 구슬리는 핑계로 너무나 많이 써먹었다. 경제성장 속도에 비해 분배율의 개선이 못따라 온 것 아닌가. 이 때문에 과거보다 소득이 올랐음에도 내 몫을 공정하게 받고 있다는 인식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1960년대 이후 파이를 키우는 것이 분배를 개선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얘기했지만, 노동자들에 대한 합리적 설득은 부족했다. 실제로 분배를 개선하는 것보다 파이를 키우는 데 치중해 왔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나. 1960년대 노동자 월급은 쌀 두 가마니 정도 가치였다. 식구들 밥 먹고, 연탄 피우고, 초등학교 보내는 정도였다. 그래도 이들은 행복한 편이고 실업자들이 우글거렸다. 1980년대에는 분배율이 그렇게 개선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아파트에 살면서 자동차를 굴리고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18세기와 19세기 영국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연 1% 정도였다. 低성장이 특징인 18~19세기 자본주의에선 분배가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진자본주의국에선 분배 조건을 개선하는 것보다 고도 성장을 하는 게 노동자에게 더 유리하다. 분배율이 개선되지 않았음에도, 고도성장을 하면 그렇게 된다. 앞으로 연평균 5~6% 고도성장이 이뤄지면 분배율에 신경 쓸 필요 없다. 선진국이 되는 것 자체가 노동자의 생활을 더욱 유복하게 만든다. 그 속에서 자연적으로 분배문제가 해결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1980년대의 분배문제가 고도성장을 통해 해결된 것처럼. 운동을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경제적 논리가 작용해서 해결된다. 1970년대 중반까지는 농촌 과잉인구 때문에 노동력이 항상 초과 공급이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임금 수준이 그대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후반 들어 노동력 부족국가로 바뀐다. 노동운동과 관계없이, 노동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서 임금이 올라갔다. 앞으로 고도성장하면 임금이 급속도로 상승할 수 있다. 점점 노동력 공급 부족상태로 빠지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복지정책은 방향이 틀렸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평등주의가 실제 생활이 개선됐음에도 심리적 박탈감을 부채질한다고 보는가.
 
  『한국 사회의 평등주의는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중국의 大同思想(대동사상)이나 民本主義(민본주의)는 평균주의를 지향한다. 동양의 전통사상은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뿌리 깊게 남아 있으면서 서로 대결하고 있다. 그게 私有재산제와 경쟁 원리, 민주주의 원칙과 모순을 일으킨다. 私有재산과 경쟁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즉 실질적 평등이 아니라 형식적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진정한 진보사상은 종래의 대동사상이나 국가적 토지소유 같은 실질적 평등사상과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다』
 
  ―동양의 대동사상이나 민본주의 사상은 우리 시대에 다시 부각시켜야 할 긍정적 가치로 주목받고 있다.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理想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사상에 입각해 만들어진 사회제도는 사회발전의 족쇄가 됐다. 그런 사상이 중국에서 실현된 것이 洪秀全(홍수전)의 太平天國(태평천국)이다. 대동사상과 기독교의 원시민주주의가 혼합됐고, 중국 고대의 井田法(정전법)에 따른 토지제도인 天朝田畝制(천조전무제)를 실시했다. 하지만 태평천국 혁명이 일어나서 인민들에게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과 정치적 평등이 보장됐는가. 홍수전만 황제로 만들었다. 추상적으로 좋은 사상이지만, 현실에선 인민을 배반해 왔다. 일부 권력층에 전제적 권력을 제공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역시 극복돼야 할 사상이라고 본다』
 
  ―서구에선 극단적 경쟁을 조장하는 자본주의나 개인주의 代案으로 동양의 대동사상에 기대하지 않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동양적 전통을 이어받은 일본의 근대사상 연구가들은 이러한 사상을 극단적으로 비판한다. 모택동이 실패한 것도 서구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동양적 대동사상에 뿌리를 뒀기 때문이 아닌가. 평등주의는 인민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가』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수준에서 현재 노동계와 사회단체에서 요구하는 복지, 평등의 요구가 적절한 수준이라고 보는가.
 
  『나는 현 정부의 복지정책이 과도한 수준까지 나갔고 방향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과도하게 나갔다는 것은 성장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복지를 앞세운다는 인상 때문이다. 방향이 틀렸다는 것은, 복지정책은 노약자와 장애자를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데, 노약자와 장애자에겐 눈을 감고, 멀쩡한 사람에게 복지혜택을 주면서 「생산적 복지」라고 말장난을 한다. 자기 몸으로 노동할 수 있는 사람에겐 노동의 대가로 생계를 꾸려나가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게 좋다』
 
  ―安교수가 해방 공간에 20~30대였다면, 어떤 사상을 택했을 것 같은가.
 
  『아마도 사회주의자가 됐을 것이다. 아마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전율스러운 일이다. 해방 직후 지식인은 민족독립운동 연장선상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수용했다.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적인 물적 기반이 없어 약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북쪽으로 갔다. 1960년대까지는 학계도 남쪽보다 북쪽이 훨씬 앞섰다. 역사학이나 언어학, 문학 등이 그랬다. 대부분은 식민지 시대에 근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식민지 체제하에서도 근대적 지식인이 형성됐다. 이런 분들이 거의 북한에 가서 학계를 주도했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북한이 사상적으로 경직되면서, 새로운 연구가 거의 나오지 않고 그 이전에 발행되던 학술지들도 끊겼다.
 
  북한 지성의 몰락은 학문적 자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이 확립되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강요에 의해 주체사상과 맞지 않는 것은 탄압받았다. 또 이건 대단히 비극적인 이야기인데, 사회주의는 그 체제의 속성상 정치·경제·학술 등 모든 분야에서 후계자를 길러내지 못한다. 새끼를 못 친다는 얘기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사상적 자유가 억압되고, 경제적으로 넉넉치 못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10여 년 전 남북한 학자들이 「국제 고려학회」 초청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일본과 만주에서 모임을 가졌다. 남한에서 성장한 젊은이들과 북한에서 성장한 젊은이들이 토론해 보니, 그 유명한 국어학자 洪起文(홍기문) 선생 제자가 학문적으로 수준 미달이었다고 한다. 그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왜 북한은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할까. 남한에는 훌륭한 선배 연구자가 드문데도 미국 유학이니, 獨學(독학)이니 자기 나름대로 해서 후계자가 확대 재생산되는 체제로 되지 않았나』
 
 
  부산공고 졸업 후 再修해 서울대 입학
 
 
  ―해방 직후 많은 지식인들은 친일파 청산도 제대로 못 하고, 미국 눈치를 보던 남쪽 대신, 민족 자주노선을 표방하면서 친일파 청산을 마무리한 북한行을 택했다. 그런데, 그후 역사는 반대로 흘렀다. 역사가 지식인들을 배반한 것인가.
 
  『현실이 지식인들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지식인들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다. 여기에는 객관적 조건과 지식인들의 인식 수준이 영향을 미쳤다. 먼저 객관적 조건을 설명하면, 해방 공간에선 前近代 사회의 요소가 압도적이었고, 자본주의 발전이 지체돼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근대가 확립된 것은 1960년대 이후다. 또 하나는 사상 동향의 문제다. 당시 서구에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팽팽했으나 前近代 한국 사회에선 자유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없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상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다. 식민지나 美 군정상황에서도 건전한 상식을 견지하면서 사회문제에 대처하는 사람이 있었다. 해방 직후 고향에선 좌익과 우익이 서로 따로 모임을 가졌는데, 좌익이 수적으로 훨씬 많았다. 아버지는 中農(중농)에 불과했는데 항상 우익 쪽에 섰고, 외가는 5000석 지주였는데 좌익이었다. 외삼촌들은 모두 와세다大나 게이오大 같은 일본 유학생 출신이다.
 
  아버지는 자기가 노동해서, 자기가 먹고 살아야지 왜 갈라먹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고 했다. 건전한 인간은 추상적 사상이나 이데올로기, 학문에 판단의 기준을 두는 게 아니라 자기 일상에서 판단의 기준을 찾는다. 사상에 휩쓸리는 사람은 자기 이웃을 생각하기보다 자기 나름대로 관념을 설정하고, 그 관념을 달성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사상적 선택은 자기 주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연구자 安秉直 교수를 만들어 낸 삶에 대해 묻겠다. 부산工高를 나와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를 못 보낸다고 했다. 8남매였기 때문에 中農(중농) 집안이라도 어려웠다.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 직전에 부산 영도에 있었던 「해군소년단」이란 사립단체에 들어갔다. 어린아이들을 해군사관학교와 해군 하사관 학교에 보내는 준비를 시키는 곳이었다. 6·25가 나는 바람에 고향인 함안에 돌아와 함안 중학교에 편입했다.
 
  고등학교는 마침 형이 부산에 있어서 그쪽으로 가게 됐다. 부산공고 원서가 하나 남은 게 있어서 그걸 가지고 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에선 기계공학 전공이었다. 선반·밀링 같은 기계를 배웠다. 원래는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를 진학하려고 했다. 집에선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 사치스러운 생각 말고 상과대를 가라고 해서 응시했다가 한 번 실패하고, 再修(재수)해서 대학에 들어갔다. 부산공고 동기생으로 서울대에 진학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 세 명이다』
 
  ―대학 생활은 어땠나.
 
  『늑막염을 앓아서 대학 2학년 때 척추 수술하고, 1년 놀았다. 3학년인 1960년에 4·19가 났다. 그때까지는 회사에 취직하거나 고등고시 보려고 공부하고 있는데, 후배들이 와서 사회가 이렇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데, 비겁하게 공부만 한다고 해서 따라나간 게 광화문까지 갔다. 그 데모를 한 번 하고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 내가 단순히 밥 먹고 사는 데 만족해선 안 되겠다. 이 사회가 어떤지 알아봐야겠다. 그래서 대학원에 갔다.
 
  한국사회를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한국 근대 경제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시 동양경제사나 한국경제사는 수강하지 못했다. 석사학위는 폴 스위지의 「과소소비론」을 썼다. 청명 임창순, 우인 조규철, 벽사 이우성 선생 등에게 한문을 배웠다. 1964년에 대학원을 졸업했는데, 1962년부터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조교를 하면서 서울대 상대 無給(무급) 조교를 동시에 했다. 1965년에 상과대 전임강사가 됐다. 그런 점에서 행운아다』
 
 
  『우리 몸을 다 도려내기 전엔 親日·親美的 요소 없앨 수 없다』
 
 
  ―대학 교수로서의 현실 참여활동은 어땠나.
 
  『4·19 이후에 학생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선배로서 학생운동에 대한 조언을 해 주는 위치가 됐다. 교수가 된 후에는 강연회에 불려 다녔다. 학생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이 대부분 내 제자였기 때문이다. 제1차 人革黨(인혁당) 사건 때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하부 조직에 포섭됐는지 여부를 조사받았다. 그후에도 학생운동이 심하면 불려다녔다. 1970년대에 특히 많이 조사받았다. 간첩사건이 나면 잡혀가서 며칠씩 얻어맞고 그랬다』
 
  ―당초 한국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다가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는 뭔가.
 
  『원래 1970년대 말이면 한국 자본주의가 붕괴한다고 믿었다. 경제성장이 이뤄질수록 모순이 더 축적돼 폭발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朴正熙(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한국 사회의 발전전망에 대해 자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朴正熙가 죽고 난 다음, 그 무도한 全斗煥(전두환)이 권력을 잡았는데, 자본주의가 다시 살아났다.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을 고쳐야 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중진자본주의론을 제창한 나카무라 사토루(中村 哲)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파탄 나면서 세계사를 다시 봐야 한다는 욕구가 먼저 있었다. 일본에 가기 전인 1984년 「역사평론」에 실린 나카무라 사토루의 「근대 세계사상의 재검토」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아시아 신흥공업국이 중진자본주의로 발전한다는 내용이었다. 1985년에 일본 도쿄대에 교수로 갔을 때 소련, 중국과 북한의 지식인을 만나 보면서 사회주의는 전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1986년에 한국의 국제수지가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다. 나도 종속이론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이 외채 누적 때문에 붕괴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너무 단순했다는 것을 반성하고, 역사를 새로 봐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다시 보니까, 우리는 선진자본주의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고도성장과 급속한 자본주의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중진 자본주의의 특징은 고도성장인가.
 
  『중진 자본주의는 자생적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이 아니라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여 급속하게 자본주의화하는 것이다. 가장 고통이 적은 자본주의 발달 과정이다. 선진자본주의는 본원적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경험했다. 후발 자본주의국은 본원적 자본 축적의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다』
 
  ―경제사학자로서 한국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우리의 근대는 자생적으로 발전해 온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다.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선 일차적으로 외국 문물에 심취해야 했다. 그래서 근대화 세력은 최소한 조금이라도 親日的이거나 親美的이었다. 우리 몸을 다 도려내기 전에는 親日·親美的 요소를 없앨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가 해체될 것이다』
 
 
  『朴正熙 군사 독재 아니었으면 근대화는 불가능했다』
 
 
  ―나치 점령하 협력자를 청산한 프랑스 사례를 들어 단호한 친일파 처리를 주장하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나치즘 청산 문제는 기본적으로 전쟁 책임문제이기 때문에 식민지 잔재 청산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와 사정이 다르다. 식민지 잔재 청산 문제는 민족 반역자의 단죄에 한정해야 한다. 이것을 親日 문제로 확대하고 그 문제를 현재 문제로 끌어내 한국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규정하려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위는 현재 한국 사회를 만드는데 어떤 역할을 했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를 건설하는 데 적극적으로 역할을 못 한 사람은 아무리 그들이 좋은 명분을 가졌어도 분배 몫이 없다고 생각한다』
 
  ―해방 직후 金九(김구), 金奎植(김규식) 등 민족 진영의 국가 수립이 무산되면서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젊은 층에서 특히 강하다.
 
  『해방공간에선 순수 민족적인 세력과 親日·親美적인 세력이 싸워서 결국 민족세력이 패배했다. 미국의 원조체제 속에서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했다. 金九의 뜻은 순수했으나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親日·親美적인 남한은 현재 이만큼의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뤘으나, 민족 주체를 강조한 북한은 수백만의 국민을 굶겨죽이는, 대단히 非인간적이고 살육적인 사회를 만들지 않았는가.
 
  한국의 지식인들은 조선 후기 이래 명분에 치우쳐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폐단이 있다. 국가와 사회가 지식인을 배반한 게 아니라, 지식인이 명분에 빠지는 오류를 범했다. 근대적인 사회를 만들어 간 이들은 타협적이었고, 때묻을 수밖에 없었다. 현실과 거리를 둔 사람들은 명분을 축적했을 뿐이다』
 
  ―노동자의 희생을 담보로 하거나, 수출에만 의존하는 대외종속적 경제발전 등 한국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만만찮다.
 
  『개발이 윤리적으로 깨끗한 상태에서 이뤄진 적 있는가. 영국은 400년 간의 고난을 겪은 끝에 겨우 인간의 모습을 한 자본주의를 선보였다. 여성·아동에 대한 착취가 엄청났다. 일제시대 북한에 흥남 질소비료공장을 세운 대기업인 일본질소 자료를 봤더니, 신기술의 도입·정착을 위해 일본 유수의 공대 출신 엘리트들이 매년 수십 명씩 죽어나간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선진국의 기술을 그대로 들여왔기 때문에 이런 희생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선 근대국가의 최대공신은 朴正熙다. 기술과 자본 없는 국가가 발전하려면 외부에서 끌어다 쓸 수밖에 없었다. 朴正熙는 산업화로 재정 독립을 이뤘고, 국민군을 갖췄다. 朴正熙가 주도한 군사독재 체제가 아니면 근대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양한 계층·계급의 이해를 독재가 아니고는 통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군사독재 체제는 엄청나게 가혹했으나, 그런 체제가 없었으면 근대화는 불가능했다. 가치 평가를 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얘기하는 것이다』
 
 
  『민주화 세력 등장 후 15년 간 혼란』
 
 
  ―朴正熙 정권이 뿌린 군사문화가 오늘날 한국 사회를 망치고 있는 주범이란 비판이 있다.
 
  『경제적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민주주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를 크게 보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선 다양한 사회적 욕구를 한 방향으로 억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張勉(장면) 정권은 다양한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붕괴했다. 1987년 이후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은 그 이전의 경제적 성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朴正熙의 군사독재 체제가 아닌,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있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런 길은 없다고 답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 문제의 책임은 과거에 물을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책임이다』
 
  ―이매뉴얼 왈러스타인(「정치학 해제」 등을 쓴 뉴욕 주립대 빙햄턴 분교 교수이자 정치학자:注)은 자본주의가 수십 년 안에 붕괴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공상에 불과하다. 자본주의가 붕괴해가고 있다는 구체적 증거가 있으면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논쟁을 할 수 있을까, 점쟁이도 아닌데 근거도 없이 예측할 수 있나』
 
  ―한국 경제의 앞날을 어떻게 전망하는가.
 
  『한국은 20년 이내에 선진자본주의 대열에 진입할 것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축적한 知的(지적)·物的(물적) 축적이 그 근거다. 유일한 변수는 북한이다. 북한 체제가 폭발하면 우리도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서서히 개혁 개방으로 이끌어내면서 연착륙을 유도해야지, 갑자기 통합하면 엄청난 난민이 쏟아질 것이다. 가령 북한 정권이 무너지더라도 북한을 그 테두리 안에 묶어 놓고 자립할 때까지 원조해야 한다. 그래야만 북한 주민들의 기본권이 지켜질 수 있다』
 
  ―한국 경제성장사란 관점에서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
 
  『李承晩 대통령은 국가의 기초를 닦았고, 張勉 정권은 단막극이라 평가할 수 있다. 朴正熙와 全斗煥 정권은 근대화를 성취했다. 全斗煥 대통령은 광주에서 인명살상을 저질렀기 때문에 무지막지한 인간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지만, 경제성장이란 측면에선 功을 인정해야 한다. 1987년 민주화가 되면서 한국 사회는 발전방향을 상실했다. 근대화 세력이 밀려나고,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국가 발전 방향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해 15년 간 혼란을 겪었다. 민주주의는 그럭저럭 진전하고 있으나 경제성장은 혼란에 빠졌다. 물론 거쳐야 할 과정이기는 하다. 15년 간의 민주주의 정착기가 있었기 때문에, 차기 정권에서 올바른 성장의 방향을 잡으면 20년 내에 한국이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근대화 세력의 功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주류 혹은 보수 진영의 功過(공과)를 따져 본다면, 어떻게 되나.
 
  『한국은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을 통해 세계 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했다. 아직도 한국이 약소민족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한국은 세계 11위의 무역국이고, 소득수준도 이미 중진국을 넘어섰다. 한국이 약소민족이기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은 망상이다.
 
  이런 근대국가를 만든 근대화 세력은 전체적으로 볼 때는 대단히 훌륭한 세력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모순과 비리와 부정이 많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대화의 부작용에 불과한 것이다. 법률에 의해 단죄될 사람은 단죄하면 된다. 근대화 세력에 부족한 것이 있다면 어떻게 비판적으로 계승발전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근대국가가 만들어졌다는 엄청난 현실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없이, 이건 옳고 저건 나쁘고 하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근대화 세력이 부족한 것은 민주화인데, 민주화 세력은 억압을 받으면서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이 끝까지 근대화 세력을 부정하고, 자기들만 한국 현대사의 운명을 짊어지겠다고 나서는 것은 무책임하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 힘만으로 근대국가가 건설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에게 국가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
 
  ―우리 사회의 주류가 근대화 과정에서 자기 희생이나 이웃에 대한 배려 등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상실한 것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그것은 캐치 업을 통해 근대화된 사회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이해 부족이다. 자생적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했던 국가는 자본주의 정신이 형성되고, 윤리가 형성된 후에 사회가 발전했다. 하지만 캐치 업 사회에선 본래 그러한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로터 근대화의 동력이 들어온다.
 
  과거 식민지 사회에서 갈갈이 흩어졌던 근대화 세력이 모여 低임금 체제를 기반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이런 사회에선 종래의 도덕을 바탕으로 근대 사회로 발전해가는 게 아니라, 근대사회로 발전돼 오면서 새로운 도덕이나 법률이 발전해 간다. 약 30년 간의 혼란기에서 무엇이 축적되고, 무엇이 부족한지 명백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실을 그대로 놓고 봐야지, 미리 기준을 선진자본주의에서 가져와서 현실을 잴 수 없다. 조급증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부정적 측면이 너무 많지만, 이에 못지않게 긍정적 측면도 많다. 긍정적 측면을 살리고 부정적 측면을 극복해야 한다』
 
  ―근대화 과정의 부정적 측면을 주목하다 보니 근대화 자체를 폄하하거나, 근대화세력을 부정하는 경향이 젊은 층에게 강하다.
 
  『우리가 너무 과거 지향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 내 집안이 귀족 출신이면 프라이드가 있고, 중산층이면 참을 만하지만, 하층농민이거나 노비, 심지어 庶子(서자)였다면 못 견뎌 한다. 현재 경제적으로 유복하고, 윤리적으로 건전한 인간이면 조상이 양반이든 노비든 무슨 상관이 있는가. 현재의 내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진단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과거를 붙들고 징징 우는 심리적 상태는 극복돼야 한다. 우리 국사 교과서는 너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국사 교과서가 미화돼 있을수록, 오늘날 현실의 성립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 근대사는 외세에 의해 짓밟힌 식민지의 역사다. 그 고난을 어떻게 딛고선 민족인지를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것을 성취했고, 앞으로 성취할 것인지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훌륭한 수준에 와 있으니까 과거를 오늘날 수준에 맞춰야겠다며 과거를 억지로 바꾸려고 한다. 나라가 망할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망했는데, 근대사 연구에서 그 점은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반성할 것이 뭐 있나. 침략에 대하여 분노만 하지. 과거를 반성 안하는 민족이 장래가 있겠는가. 이 점에서 국사 교육은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지식인은 자기 선택에 책임 느껴야…』
 
 
  ―우리끼리 반성하면 모를까,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빌미로 삼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게 바로 나를 공격하는 핑계이다. 남이 나를 이용할 것을 겁내, 할 일을 안 한다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나도 내 발언을 일본의 보수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이용하는 것을 알고 있다. 난 그 사람들을 가련하게 생각한다. 그보다는 나를 이해해 주는 일본 사람들이 진짜 두렵다. 내 변명이 될지 모르지만, 친한 일본인 한국사 연구자가 나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安선생, 우리는 일본을 위해 식민지배를 비판하고, 일본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조선의 독립운동도 연구한다.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가. 일본을 위해서 하는가. 한국을 위해서 하는가」 번지수를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그 사람은 격렬한 일본 제국주의 비판자이고, 한국 옹호론자다. 그는 나에게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민족주의자」라고 했다』
 
  ―민주화 세력의 功過를 평가해 달라.
 
  『해방 직후의 선택에 대해 지식인들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했다. 객관적 상황에 의해 강요됐고, 자신은 희생자라고 주장하면 책임이란 게 있을 수 없다. 난 지식인은 자기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화 세력은 민주주의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이념을 가지고 싸운 것은 순수하고 도덕적으로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보상을 받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사의 기본 흐름을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근대화는 캐치 업 형식으로 발전하는 사회였다. 아직도 한국 근대 경제에 대하여 고전적인 자생적 역사발전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인식이 잘못된 것이다. 북한 사회가 자유롭고 평등한, 이상적인 사회로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이미 잘못임이 판명되었다. 남한은 6·29 선언 이후 민주주의 체제로 넘어갔고, 민주화 세력은 국회에도 많이 들어갔다. 이건 바람직한 현상이다. 아직도 운동권의 끼를 못 벗어난 국회의원이 있는 것은 안타깝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