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릉, 신화와 역사 -남북한의
역사인식 송호정 |
들어가는 말 55돌 광복절을 맞아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이 이루어지고 시드니 올림픽에서 남과 북이 손을 맞잡고 입장하는 것을 보며 우리는 가슴 저 밑에서 우러나오는 벅찬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야 남과 북이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 같다. 통일이라는 민족 과제가 현실로 다가온 요즈음, 단군과 단군릉 문제를 논의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것이 민족 통일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민족 시조에 대한 공통의 역사인식이야말로 통일을 위한 궁극적인 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역사에서 단군과 고조선은 한국 최초의 국가로서 민족사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단군이 고조선의 시조인 동시에 민족의 시조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나아가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단군의 존재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확인해주는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 되어 왔다. 고려 후기에 몽골의 침입을 받았을 때나 한말 일제로부터 침략을 당했을 때도 단군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작금 남한 사회에서 이른바 재야사학자를 중심으로 민족정신을 회복하고 세계 속의 한민족의 기상을 드높이기 위한 운동으로 단군 정신을 들고 나온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북한의 경우도 1990년대 초의 경제적 위기 속에서 북한 사회주의 사회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작업에서 단군릉을 복원하였다. 단군릉은 실제 단군 무덤인지의 사실성 여부를 떠나 단군이 가지는 민족사적 의미 때문에 많은 상징성을 갖고 있다. 북한에서 단군릉을 발굴하고 복원한 것도 단군이 갖는 많은 상징적 의미를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단군릉' 발굴 이후 역사적으로 종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고조선사 체계를 제기하고 있다. 최근 남한 사회에서도 단군과 고조선사에 대한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의 전말 속에서 단군릉 복원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단군릉 자체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그 의미를 접근해 보도록 하겠다. 1. 단군릉 발굴 개요 1993년 10월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대박산(大朴山)에 소재한 '단군릉'의 발굴 사실이 발표되었다. 당시 사회과학원의 단군릉 발굴 「보고문」(93.10.2)의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고조선의 건국시조인 단군이 태어난 곳은 평양일대였다. 『삼국유사』와 『응제시주』의 저자들은 단군신화를 전하면서 환웅이 하늘에서 땅위에 처음 내렸다고 하는 곳인 태백산을 묘향산이라고 하였다. 『팔역지』에서는 묘향산의 박달나무 아래에 단군이 태어난 석굴이 있다고 하였으며, 『영변지』에서는 묘향산의 향로봉 남쪽에 단군이 태어난 굴이 있다고 하였다. 단군은 오늘의 평양에서 나라를 세운 후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여 점차 영토를 넓혀 나갔으며 이후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근 3천년 동안 전속하면서 멀리 중국의 만리장성 계선까지 영역을 확장하여 아시아의 강대한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단군이 죽어 묻힌 곳도 역시 평양 일대였다" 이 글은 1993년 10월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대박산(大朴山)에서 '단군릉'이 발굴되었다는 사회과학원의 단군릉 발굴 「보고문」의 내용(93.10.2)이다. 조선시대 역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숙종실록』·『영조실록』·『정조실록』 등에도 평양 강동지방에 '단군릉'이 있었다고 하고, 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관리가 행해졌음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993년의 「단군릉」발굴은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그러한 전승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단군릉은 돌로 무덤 칸을 만들고 흙으로 덮은 이른바 굴식돌방무덤(석실봉토분)이었다. 크기는 동서 273cm, 남북 276cm의 작은 무덤으로 네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고 하며 모줄임 천장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덤양식은 5세기 이후 고구려의 특징적인 무덤 양식이다. 여기서는 해방 전 일제에 의해 도굴되어 많은 유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금동관, 금동허리띠장식, 고구려토기편, 관못 6개, 남녀 두 사람의 인골(남자 170cm 이상)이 출토되어 고구려 귀족의 무덤인 것이 더욱 명확해졌다. 그런데 고구려 귀족의 무덤이 왜 단군의 무덤으로 판명되었을까. 그것은 무덤 내부에서 출토된 인골에 대한 연대측정에 결정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단군릉에서는 남녀 두 사람의 인골이 출토되었는데 두 인골을 두 개의 연구기관이 가지고 있는 현대적 측정기구로 24회, 30회씩 각각 연대측정(E.S.R측정법=전자상자성공명법)을 한 결과 1993으로부터 5011±267년(오차 5.4%)전의 연대치가 나왔다. 즉 기원전 3018±267년의 뼈임이 확인되었다. 이후 이 인골은 단군과 부인의 뼈로 추정되었다. 이처럼 단군의 유골이 오래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리한 지층(석회암)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 단군의 무덤이 고구려시기의 무덤양식을 따르고 있는가 하는 점과 기원전 3,000년경의 인골이 어떻게 단군의 뼈임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북한학계에서는 고구려시기에 단군 숭배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어 단군의 무덤을 당시의 무덤양식에 맞추어 새로 단장했기 때문이라 하고 있다. 그리고 기원전 3,000년 당시에 금동관을 쓸 정도의 인물이라면 단군 외에는 다른 인물이 없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단군의 무덤을 고구려 때 개축했다는 근거가 전혀 없는데 북한의 주장을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고구려 사람들이 당시로부터 3700여 년 이상 앞선 시기의 인골을 어떻게 단군의 뼈로 확인할 수 있었을까. 새로 복원하였다면 과연 그렇게 작은 무덤으로 만들었을까.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 2. 단군릉 발굴과 변화된 북한의 역사인식 1) 단군신화의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 무엇보다도 북한학계의 단군릉 복원과 단군과 고조선사에 대한 입장을 인정하려면 단군신화를 신화로서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해야만 가능하다. 북학한계는 단군릉 발굴과 동시에 종래의 연구성과를 완전히 뒤집고 전혀 새로운 역사인식을 선보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종래 북한학계에는 단군신화 속에 반영된 역사상을 고조선에서 정치권력이 성립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동시에, 정치 권력을 정당화하는 신화라는 입장에서 인식해 왔다. 단군신화는 환웅으로 상징되는 이주 집단이 곰으로 대변되는 토착집단을 정복하여 동화시키는 과정에서 성립된 국가이며, 초기 단계의 고조선 사회는 제정일치 사회였음을 말해 주는 신화로써 이해하였다. 그러나 단군릉의 발굴과 함께 신화는 역사적 사실로서 재해석되었고,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라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해석되었다. 2) 평양 중심 우리 민족의 단일민족 기원설 주장 나아가 단군릉의 복원과 함께 북한학계에서는 형질인류학적 연구를 통한 한민족의 기원문제 연구에서 한민족이 북한지역에서 기원했다는 단일기원설의 주장을 입증하고, 그것도 평양일대가 그 중심이었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종래 북한학계는 구석기시대 전기의 원인(猿人) -> 중기의 고인(古人) -> 후기의 신인(新人) -> 신석기와 청동기단계에 '조선옛유형사람'이 형성-> 청동기시기인 원시시대 말기 이후에 예족·맥족·한족의 고대민족이 형성-> 이들이 나중에 현대조선사람으로 형성된다는 논리를 폈다. 여기서 '단군릉'과 단군의 존재 확인은 '조선옛유형사람'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증거라는 것이다. 이것을 단군릉 보고문에서 확인해 보자. "단군릉이 발굴되어 거기에서 단군의 유골이 나온 것은 거대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종전의 신화적, 전설적 인물로 간주되어 온 단군이 실재한 인물이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으며,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실지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동방의 선진 문명국이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단군이 고조선을 창건하고 도읍한 평양이 산수수려한 곳으로서 검은모루유적의 주인공과 역포사람(고인), 만달사람(신인), 조선옛유형사람으로 이어지는 인류발상지의 하나이며 조선민족의 발상지이고 첫 국가의 발생지였다는 사실이 힘있게 증명되었으며 조선민족은 단군을 원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떳떳이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단군릉 보고문)." 3) 고조선 중심지에 대한 인식의 변경 단군릉의 발굴로 북한학계에서는 초기국가 형성기로만 이해하던 단군조선을 그대로 인정하고, 단군은 우리 민족 최초의 지배자로서 출생지, 건국지, 무덤이 모두 평양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종래의 고조선 중심지에 대한 관점 또한 수정되었다. 현재 북한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단군조선(전조선)=5000B.P.에 성립, 왕위가 1500년 이상 지속되었다고 본다. 이 당시는 평양지방을 중심으로 한반도 전역과 요하유역·송화강 상류지역이 영역이었다. 이후 등장하는 후조선은 기원전 15세기 초중엽(<-『규원사화』의 내용, "위영자유형"문화)에 등장하였으며, 요서지역∼철령 이남, 예성강·임진강이 남한계였다. 마지막으로 만조선은 기원전 2세기 초의 무덤으로 대릉하 이동∼한반도 서북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본다. 특히 위만의 등장은 봉건혁명이라 규정한다. 그러나 기자조선설은 여전히 부정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제 북한학계에서는 한국고대사 관련 유적·유물의 편년이 2천년 이상 상향조정되고, 근대에 쓰여진 『檀奇古史』·『太白逸史』·『揆園史話』 등이 고대사 연구의 사료로 이용되며, '신지문자'·'가림토글자' 등이 고조선 문화를 논하는 글에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학계에서 1960년대의 연구성과를 전면 부인한 이유는 무엇일까. 쉽게 답하기는 어렵지만 그 해답의 일단이 단군릉 보고문 가운데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장 전영률의 말에 보인다. "고대사는 민족사의 체계화에서 가장 중시되는 시대사의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기 우리들은 낡은 역사관의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탓으로 하여서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면 서도 과학적으로 정확히 해명하지 못하고 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을 신화적인 인물로 치부하면서 반만년 역사 의 시초자료를 요동에서 찾으려고 하였고, 요동에서 나온 유적·유물의 연대를 기원전 10세기까지 소급할 수 있게 한 데 대하여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조선반도보다 대륙지방이 문화적으로 먼저 발전 하였다는 사대주의적 관점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기서 보면 북한에서는 새로이 요청되는 민족주의의 시각에서 고조선사에 대한 그동안의 주장은 사대주의에 입각한 그릇된 인식으로 보고 평양 중심의 역사야말로 주체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역사인식임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평양의 단군릉 지역을 신성지역, 성역화사업을 통해 남한의 대종교 및 학술단체와 접촉하고 있다. 3. 단군릉은 과연 단군의 무덤인가 -「단군릉」에 대한 의문점 ㉮ 무덤양식 : 고구려 벽화무덤이다. 그리고 단군무덤을 고구려 때 개축했다는 근거가 전혀 없다. 또한 고구려 사람들이 당시로부터 3700여년 이상 앞선 시기의 인골을 어떻게 단군의 뼈로 확인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새로 복원하였다면 과연 그렇게 작은 무덤으로 만들었을까. ㉯ 북한학계의 주장처럼 인골이 단군의 뼈라면 고구려 당시 아무리 단군의 뼈라지만 인골 상태로 흩어져 있던 시체에다가 금동관과 허리띠를 채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또한 금동관과 금동허리띠가 단군의 것이라면 금이 단군시대에 사용되었다는 것으로 세계역사상 금의 사용이 우리 민족이 최초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인가? ㉰ E.S.R.연대측정법과 그 연대를 신뢰할 수 있는가? -이는 100만년 이전의 시료에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평소 절대연대 측정을 하지 않던 북한이 일부러 사용한 방법으로, 설령 뼈의 연대가 맞다 해도 그것이 단군뼈라는 사실은 입증할 근거가 없다. 그리고 북한학계의 연대측정에 관한 많은 논문은 실험방법에 관한 서술이 너무 간략하여 측정방법이나 자료의 정확도를 추정키 어렵다. 장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측정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판단할 수 없으며, '보정'하였다는 기술이 자주 나오나, 이 보정을 어떻게 하였느냐가 결론에 대한 신뢰성 부여에 주요 관건이 되는 요소인데도, 어떻게 보정을 하였는지에 대한 기술이 전혀 없다. ㉱ 조선시대부터 '단군묘'로 불러 왔다는 사실. -조선시대에 일반인들 사이에 '릉(陵)'이 아닌 '묘(墓)'로서 '언전(諺傳)'형태로, 즉 '세상사람들이 단군 무덤이라고 하더라'라는 반신반의 상태로 이야기로 전해졌다. 조선시대에 과거 왕조의 시조들에 대한 제사를 중시하면서 각 지역의 큰 무덤들이 시조의 무덤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이 강동군 대박산의 무덤이 단군릉으로 불린 이유의 하나였을 것이다. ㉲ 단군과 고조선사의 문제 -단군릉을 실제 단군의 무덤으로 인정하려면 단군의 존재에 대한 인정을 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북한학계에서 단군의 존재를 인정하는 문헌은 모두 위서(僞書)인 『규원사화』, 『태백일사』등을 인용하고 있다. 이는 후대의 단군숭배의 산물을 단군자체와 관련된 유적으로 혼동함에서 오는 결과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단군릉」은 실제 단군의 무덤일 수 없고, 고구려 귀족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4. 「단군릉」과 남북한 역사인식의 비교 1) 단군의 민족사적 의미 고조선은 한국 최초의 국가로서 민족사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에게는 단군은 고조선의 시조인 동시에 민족의 시조라는 인식, 나아가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란 인식이 성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단군의 존재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확인해주는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다. 고려 후기에 몽골의 침입을 받았을 때나 한말 일제로부터 침략을 당했을 때도 단군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단군이 가지는 민족사적 의미는 여전히 크다. 북한에서 단군릉, 이른바 단군의 무덤을 발굴하고 복원한 것도 단군이 갖는 많은 상징적 의미를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기존의 인식은 고조선이 시종일관 요령성 일대에 있었고 특히 요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제시기 민족주의사학자들의 견해를 바탕으로 그것을 문헌자료와 고고학 자료를 통해 보다 치밀하게 논증한 것이 그 동안의 북한학계의 연구 경향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長城의 위치, 江의 흐르는 방향, 고고학적으로 비파형동검문화의 분포지역=고조선의 영역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강상묘·루상묘를 殉葬으로 해석하여 고대 노예소유자사회라 보며, 遼西지역의 동호족=예맥족이라는 입장이다. 이러한 북한학계의 연구성과는 남한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기존의 평양중심설을 수정하고 고조선의 요령성 중심 설과 중심지 이동설이 나오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2) 북한 역사인식 변화의 배경 기존의 합리적이고 역동적인 고조선사 이해에서 갑자기 단군릉을 발굴하고 기존의 요동중심설을 180도 뒤엎은 배경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경제위기 등을 극복하기 위한 주체사상의 강조과정에서 나온 산물로 보인다. 구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앞으로의 개방 후유증을 극복하고 남북 간의 체제경쟁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에게 현정권이 유구한 역사 속에서 확고한 정통성을 갖고 있다는 인식을 끊임없이 심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즉 평양이 민족사의 시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민족의 심장부로서 기능하였음을 밝힘으로써 남북대립의 현 분단구도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그동안 주장해오던 고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계보를 확인하는 작업의 일환이며, 통일의 주체는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이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세계 인류의 기원지조차 북한이라는 식의 주장은 지나친 애국주의의 발로로 보인다. 다음으로는 주체적 민족주의 시각에서 중국·러시아 중심의 공산주의화에 맞서는 북한식의 사회주의화와 우리 민족의 독자성과 위대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90년대 이후 러시아와 중국이 자국 중심의 사회주의 건설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북한의 경우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고 NPT체결과 핵사찰 등의 국내외적인 어려움을 맞이함으로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북한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계기나 작업이 필요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단군릉의 복원이 그 계기의 일환으로 준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북한의 단군릉 복원 및 단군 민족주의 강조는 주체적 민족주의라는 측면으로 이해 가능하다. 경제적 위기 속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회복하고 세계 속의 우리 민족 공동체의 동질성을 찾고 러시아·중국의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북한의 단군릉 복원과 주체적 민족주의운동이 남한 재야사학자들의 상고사 찾기 운동과 연결되는 점이 주목된다. 남한의 재야사학자들은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단군신화로 표현된 시기를 사실로 인정하며 상고사의 복원을 시도한다. 그들의 주장은 단군릉 발견 이후 북한학계의 주장과 동일하다. 이러한 남한 재야그룹의 주장은 경제적 위기 속에서 세계 속의 한민족 공동체의 동질성을 찾고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그동안 고조선 연구가 너무 문헌 자료가 없고 일제 식민지 시대의 연구 성과를 참조하는 가운데 한사군이 강조되거나 대동강유역 중심의 후기 고조선만이 부각된 데 대한 반성과 비판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재야사학자들의 주장과 운동은 학문적 영역을 벗어나 일종의 정신운동을 통해 또 하나의 한민족 중심 제국주의를 희망하고, 잡히지 않는 허상 속에서 현실 모순 구조의 은폐와 허무주의를 낳는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특히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이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의 종교운동이나 사상운동 차원이 아닌 학문적 영역에까지 들어와 단군의 역사적 실재를 주장하고 역사서술의 개정을 주장하는 것 등은 역사 및 역사학의 발전에 역행하는 것이다. 근대역사학은 그 기본적인 학문적 토대를 객관적인 합리성의 추구에 두고 있으며, 엄정한 사료 비판과 실증은 그것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이것이 바탕이 되지 않는 그 어떠한 주장도 공허한 메아리이며, 과거에 대한 환상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단군릉은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4. 단군릉을 이해하는 두 시각 북한학계의 단군릉에 대한 주장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으며, 정치적 논리가 짙게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남한 사회의 단군 인식에도 똑 같이 많은 문제가 있다. 단군을 국수주의나 배타주의에 이용하거나 심지어 신앙대상으로 받드는 것 등이 그러하다. 반면 남한 사회에는 여전히 단군을 신화 속의 인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주된 시각이다. 따라서 단군은 오히려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단군 및 단군릉의 문제와 관련하여 사실로서의 단군 문제와 인식으로서의 단군 문제를 분리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역사적 사실로서 단군 문제의 경우는 앞으로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아직은 단군이 신화 속의 인물이며 초기 국가가 형성되던 시기의 상징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나 민족이 어려운 시기에 민족적 동질성 회복에 기여한 단군 신앙 및 민족 시조에 대한 관념은 계속 소중한 우리의 정신 자산이며 소중한 경험으로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단군'은 그 실재 여부를 떠나 여전히 주목되어야 할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단군릉의 발굴은 분단과 지역갈등으로 신음하고 있는 남북한 주민 모두에게 그 모순구도를 깨는 귀중한 자산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지상 과제인 통일은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며, 이러한 통일을 이루는 데는 남북한간에 기본적으로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같은 민족으로서 일체감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남북 간의 경제 교류나 남북 정상회담과 같은 정부의 노력, 이산가족 상봉 및 스포츠 교류나 예술단의 교환 방문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 시드니 올림픽에서 남북한이 동시에 입장하고 오는 10월 3일 개천절 행사를 동시에 개최하는 것도 그러한 노력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병행하여 그 노력의 결실을 얻기 위해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단군의 후예라는 공통의 혈연의식을 갖는 것이라 하겠다. 민족 시조에 대한 공통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일체감 조성이 통일을 위해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단군 및 단군릉의 사실성 여부를 떠나 북한학계의 역사인식을 긍정적 의미로 해석할 이유가 된다. 그리고 여전히 남한 사회에도 단군 및 고조선사에 대한 건전한 인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민족의 공존과 통일로 나아가는 길에 민족의 시조 단군이 긍정적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단군릉의 발굴과 단군의 유골 발견은 우리 고고학의 승리이며 나아가서 조선민족의 큰 승리로 된다. 단군이 실제한 인물로 밝혀지고 단군조선 이래 조선민족이 단일한 민족으로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꿋꿋이 살아온 사실이 확증됨으로써 단군의 후예로서 우리 민족의 자부심은 더욱더 높아지고 한핏줄을 이은 7천만 동포들이 조국통일의 성업을 이룩하는 길에서 더욱 굳게 뭉쳐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북과 남, 해외의 모든 동포들은 정견과 신앙, 재산유무의 차이를 초월하여 단군을 조상으로 하는 같은 민족이라는 물보다 진한 피의 동질성을 우선시 하면서 외세에 의해 이 지구상에서 우리 민족만이 겪고 있는 분단의 비극을 조선민족의 넋, 민족의 폭넓은 도량으로 끝장낸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전영률의 보고문) (송호정, 고대사분과) <참고문헌> 사회과학출판사, 1994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론문집 - 북한의 단군 및 고조선 제1차 학술토론회 논문집』 1994. 11, 『북한의 단군 및 고조선 제2차 학술토론회 논문』 윤이흠 외, 1994『檀君-그 이해와 자료-』서울대출판부 노태돈 외, 1996『고조선사와 단군』고려학술재단 이선복, 1997 「최근의 '단군릉' 문제」『한국사 시민강좌』제21집, 일조각 이형구 엮음, 1999『단군과 고조선』살림터 노태돈, 1999 「단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한겨레21』1999년 9월 16일자 사회과학출판사, 1999『고조선력사개관』조선·평양 노태돈, 2000 「북한 학계의 고조선사 연구동향」『단군과 고조선사』사계절 서영대, 2000 「단군신화 속의 역사 찾기」『한국 생활사박물관』2권 고조선생활관, 사계절 안병우·도진순 편, 1990『북한의 한국사인식』(Ⅰ)(Ⅱ) 한길사 배항섭 외, 1994「시대구분과 사회성격」『한국사』24 한국사의 이론과 방법2, 한길사 이기동 외, 1997『한국사 시민강좌』제21집 : 오늘의 북한 역사학, 일조각 노태돈 외, 2000「단군, 그는 누구인가」『한국사 시민강좌』제27집 박광용, 2000「북한학계의 단군 인식과 "단군릉" 발굴」『역사비평』2000년 가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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