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대마도의 역사적 진실

이강기 2015. 9. 19. 16:45
대마도의 역사적 진실
 
[동아일보]
《“통한다!”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 해안의 한국전망대에 오르면 부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해질녘이면 부산의 야경이 빛나고, 카메라 줌을 당기면 광안대교의 불빛까지 선명하게 찍힌다. 여기 저기 휴대폰을 꺼내들고 문자메시지를 받거나 통화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모습이 보인다. 취재팀도 휴대폰을 켜보니 액정화면에 안테나 5개가 기운차게 뻗어 올랐다. “휴대폰이 터지는 곳은 우리의 영토입니다”라는 모 통신사의 광고카피가 떠올랐다.》

●서울에서 열차와 배로 6시간 거리

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 49.5km인 반면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나 떨어져 있다. 대마도 주민들은 1950년대 초반까지 저녁 때 배를 타고 부산에 가서 술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놀다가 이튿날 아침에 돌아왔던 것을 기억한다. 이후 오랫동안 부산∼대마도 간 뱃길이 끊겼으나, 1999년 정기여객선이 운행되면서 대한해협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올해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KTX)가 개통되면서 대마도는 서울에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섬이 됐다. 취재팀도 서울에서 오전 6시에 KTX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오전 10시반에 여객선으로 갈아탄 뒤 정오쯤 대마도 최북단 히다카스 항에 닿을 수 있었다.●한국의 자연과 역사가 숨쉬는 섬 대마도에는 산고양이, 말, 고려꿩 등 일본열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이 섬의 웬만한 사찰에는 신라불이나 고려불이나 조선의 범종이 모셔져 있다. 쓰라린 민족사의 현장도 도처에 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처형당한 박제상의 순국비, 조선 숙종 때 조난당해 목숨을 잃은 조선역관사(譯官使) 108명을 기리는 역관사비,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고 버틴 면암 최익현의 순국비, 정략결혼으로 대마도주(島主) 가문으로 출가한 덕혜옹주(고종황제의 딸)의 결혼기념비 등등.●본디 경상도 계림에 속한 우리 땅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서에도 기록돼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또 16세기에 조선 조정이 펴낸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시켰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우리 영토는)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했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조선의 고을로 인정해 달라는 상소

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勾當官)과 만호(萬戶)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 이뤄졌다. 1419년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

1436년 대마도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코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그래서 18세기 초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은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



●일본의 대마도 편입은 19세기 후반

19세기 후반 일본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를 일본에 편입시켰다. 1868년 대마번(藩)이 메이지 정부에 올린 봉답서를 보면 대마번이 조선의 번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어 수 백 년 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지금의 서계부터 조선이 주조해 준 도서 대신에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도장을 사용하여…”

이와 관련, 전북대 하우봉(河宇鳳) 교수(사학)는 “일본과 청(淸) 양쪽에 조공을 바친 오키나와의 류큐(琉球)왕국처럼 조선후기의 대마도도 조선과 일본 양쪽에 예속된 ‘양속(兩屬)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의 “대마도는 우리 땅” 선언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1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해 현해탄에 거센 파도를 불러일으킨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에게 이 대통령의 요구를 막아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이후 공식 문서나 외교채널을 통해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각국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와 함께 이 대통령은 바다에도 ‘이승만 라인’이라는 어업구역을 설정해 이를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붙잡도록 했다.

재일조선인 거류민단 대마도본부 이신연(李新演) 단장은 “이 대통령의 선언이 나왔을 때 대마도에 살던 일본 주민들은 ‘한국이 독립을 해서 미국의 힘을 업고 대마도를 차지하려고 한다, 이제 곧 일본사람들은 쫓겨나게 생겼다’며 크게 불안해했다”고 회고했다.



●독도문제보다도 입증할 자료 많다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증거보다는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훨씬 풍부하다. 또한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역사적 인식보다도 대마도에 대한 한국인의 역사적 인식이 훨씬 깊다.

하 교수는 “섬을 비워놓는 ‘공도(空島)정책’ 탓에 조선이 대마도를 영토적으로 복속시킬 기회를 놓쳤다”며 “그러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근거보다 한국의 대마도영유권 주장근거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는 차원에서 이 대통령의 선언이 나왔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대마도=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