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일제 '식민지 근대화론' 문제 검토

이강기 2015. 9. 19. 16:01

일제 '식민지 근대화론' 문제 검토

이 만열(숙명여대 교수)

1. 문제의 소재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넓게는 최근의 동남아 신흥공업국가에서 보여지듯이 세계사적으로 과거 피식민국가들이 식민지하에서 근대화되었다는 것을 통칭하는 것이지만, 좁게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나라가 식민지하에서 근대화되어갔다는 것을 이른다. 이 용어는 '식민지 수탈론'에 대칭되는 말로서, 종래 일제 하에서 일방적으로 수탈당하기만 했다는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오게 된 '식민지 자본주의화론' '식민지 개발론' '식민지 공업화론' '식민지 산업화론' '식민지 미화론' 등을 쭷칭해서 역사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최근 우리 학계에서 부쩍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과제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연구가 부문별 혹은 개별적인 연구에서 적은 편은 아니지만, 그 시기를 총체적으로 이해하여 우리 역사에 자리매김하는 일에는 소홀하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한국현대사의 원죄처럼 남아' 있는 이 시기는 종래 우리의 기억과 역사에서 제거하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때문에 일제 강점기를 우리 역사에서 외민족에게 주권을 강탈당했던 한 특정한 시기로 이해하기는 해왔지만 그것을 우리 역사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를 두고 차분히 고민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것이 우리 역사에서 제거했으면 하는 정서 때문이었다면 역사학계는 자신의 학문과 민족 앞에 정직하지 못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역사학계가 일제 강점기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래지 않다. 해방 후 일제의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제시대사 자체에 대한 연구가 금기시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해방 후에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는 민족적 여망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친일세력이 온존하고 있었다는 것과 좌우가 대립하는 이데올로기적 상황에서 친일세력이 반공세력과 제휴하여 우리 사회의 가치를 혼란하게 만들었던 것은 어쩔 수 없이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연구를 회피하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시대사에 대한 연구는 자칫 친일반공 세력과 충돌을 맞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학계가 금기시된 일제시대사에 연구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극우적인 군부파쇼정권이 지배하던 1980년대에 이르러서다. 종래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학계가 시련을 겪으면서, 극우적인 군부정권에 맞설 수 있는 대항력을 이 때에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역사인식은 그 전후의 시기와 형식상으로는 연결되어 있었지만, 민족운동사를 제외하고는 단절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일제 강점기가 한국사에서 제대로 자리매김되지 않은 데에는 이같은 역사인식상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와 관련하여, 강점 행위를 부각하여 민족의식 내지는 적대의식을 고양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에는 역사인식보다는 역사의식이, 그것도 깊고 광범한 역사인식을 수반하지 않은 채 즉흥적으로, 먼저 발동되곤 하였다. 민족사에서 통한과 철저한 반성 더 나아가 청산의 대상으로 단죄해야 할 이 시대는 냉정한 이성에 입각한 역사인식으로 정리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항일적 민족정서에 기초한 대(對)일본 '역사의식'을 앞세움으로, 광범한 자료와 정확한 논리를 바탕으로 분석적이면서 종합적인 해석을 구사하는 역사인식을 혼란스럽게 하였고 결국에는 그러한 역사의식 자체마저 공허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되씹어 본다. 강한 운동력과 호소력을 갖는 역사의식일수록 냉엄하고 논리적인 역사인식에 기초(제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역사의식은 적대의식을 고양할 필요가 있을 때 감초처럼 동원되긴 하였으나, 때로는 우리 자신의 무능력과 낙후성의 책임을 전가하는 도피처 혹은 분노로 치환되었음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일제 강점기와 관련하여 운동성을 수반한 역사의식은 때때로 역사인식을 선행하면서 역사인식의 방향을 규정하곤 하였다. 그 결과 연구의 관심영역이 우선 독립운동사 혹은 민족해방투쟁에 무게를 두도록 하였다. 이것은 해방을 맞은 우리 역사학계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음에 틀림없다. 일제 강점기를 거친 우리 민족이 이만큼이라도 민족적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떳떳한 민족독립운동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민족독립운동기로 보고 거기에 열중하는 동안 우리를 강점했던 일본은 그들의 한국 강점기를 합리화하는 수많은 '망언'들을 되풀이해 왔고, 종군위안부 같은 반인륜적적인 범죄들을 정당화 내지는 책임회피해 왔다. 이것은 우리의 일제 강점기 연구에서 일제의 침략과정 정책 사회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거나 불철저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동안 일본측이 여러 차례에 걸쳐 '망언'들을 늘어놓았지만 원론적인 차원을 넘어선, 실증적인 논거를 제시하는 데 미흡했던 것이나, 종군위안부 문제가 자주 대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의 항의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정부와 역사학계가 마땅한 대응자세를 취하지 못했던 것은 결국 일제 강점기 연구에서 틈을 보였던 문제와도 관련된다고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 강점기 침략과정과 정책사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는 한민족사에서 유일하게 주권을 상실당한 피압박시기였고, 강점당한 그 시기가 세계사상 문명화의 속도가 가장 빠른 시기였을 뿐만아니라 우리 민족에게는 주 객관적으로 근대화를 가장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었던 시기였던 만큼, 결국 일제시기는 한국인에 의한 자율적 문명화와 근대화를 가로막은 시기였다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었다. 일제는 국가의 주권을 강탈하고 국토를 강점하고 백성을 노예화하였으며, 자원과 금융, 공공사업을 독점 지배하는 한편 민족산업을 억제하였으며, 사회 문화면에서는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와 민족문화를 파괴하고 민족말살 정책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일제강점기를 인식하는 대체적인 내용이었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가 한국에 대한 수탈과 민족말살 정책으로 한민족의 발전이 저지되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한 것으로 뒷날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서 '식민지 수탈론'으로 불려졌다.

한국이 1960년대 이래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신흥산업국(NICs, NIEs)에 이르게 되자, 이러한 한강변의 기적을 가져온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작업들이 국내외에서 진행되었다. 이 문제에 관해 그 동안 식민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망언'을 되풀이해 오던 일본 학계가 먼저 나서게 되었다. 그들은 과거 일본에 지배하에 있던 한국과 대만이 전후에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것에 착안, 두 나라가 아시아에서 신흥산업국에 도달하게 된 것은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곧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국에 은혜를 베풀었다는, 말하자면 일제의 식민통치가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주장이었다. 이를 앞서의 '식민지 수탈론'과 구별하여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개발론'이라 한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관련, 강점 후 일제는 그들의 식민통치를 '개혁 reformation' 이라는 말로 포장하여 외국에 선전물을 뿌렸다. 한말 한국에 와서 활동하던 외국인들 중에도, 한국 정부의 부패 때문에 차라리 '개혁적'인 일본의 진출이 한국민에게는 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뒷날 3 1운동에서 일제의 만행을 보고 자기의 옛생각을 고치긴 하였지만, 만약 일제가 더 이상 만행을 자행하지 않았다면 그 외국인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였을지 궁금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딜렘마를 상정할 수 있다. 민족간의 문제에서 그러한 유토피아적인 세계가 실현될 리가 없겠지만, 생존권을 포함한 인간의 제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외래적인 지배권력이 있다면, 그 외국인의 생각처럼, 그런 지배체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사회변화를 '개혁'이니 '근대화'니 하는 말로서 미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더구나 일제의 한국 강점은, 순조로운 '협약'으로 이루어졌다는 기만적인 선전과는 달리 무력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졌고, 한국인의 조직적인 저항에 부딪쳐 그들 또한 많은 생령들이 희생되었다. 수십만의 한국인을 희생시킨 후 일제는 수탈적인 의도를 감추고 한국의 산업성장과 총체적인 근대화를 위해 '합병'하였다고 聲言하였다. 이런 경로를 밟아 이루어진 강점과 강점 후에 추진했다는 '개혁'과 '근대화'가 과연 한국인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제 강점하에서 결과적으로 '개혁'과 '근대화' 혹은 '성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수탈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 한국민을 위한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한국사의 정체성론을 처음 창안한 福田德三은 밀 J.S.Mill의 말을 인용하여 한국인을 '만족하지 않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만족한 도야지'의 경지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독림하여 만족하게 살지 못하는 인간보다는 식민지 하에서 배불리먹는 도야지처럼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는 말인 듯하다. 식민지하에서는 아무리 잘 산다 하더라도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소나 돼지처럼 생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肥肉牛 肥肉豚의 경우, 이 때 소나 돼지를 살찌우는 것은 그 짐승들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살을 찌운 후 적당한 때에 잡아먹기 위함이다. 肥肉牛를 만들기 위해서는 먹을 것도 많이 주고 환경도 깨끗하게 하며 병들지 않게 보호한다. 소 돼지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일제 하의 '경제성장'이나 '근대화'를 의미한다는 식민지 근대화론도 결국 더 살찌워서 잡아먹겠다는 논리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식민지 하에서 '근대화'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지도 묻고 싶다.

1980년대에 일본인 학자들이 먼저 제기한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 뒤 미국과 한국의 학자들이 가세하여 하나의 '학문적인'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주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경제사학자들은 그들의 주장의 영역을 일제 강점기의 정책 전반에 대한 검토로 확대하면서 종래 '수탈론'적 관점에서 논의된 명제들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재검토와 비판을 가하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의 역사학계가 소장 학자들을 중심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제는 논쟁의 단계로 들어섰고 최근에는 '변증법적 지양'을 모색하는 주장도 보이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일제 강점기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기본으로 하고, 일제하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과제로하여, 그 성립배경과 진행과정 및 그 주장의 내용을 검토하고 여기에 대한 역사학계의 대응논리를 검토하고자 한다.

2. 일제 식민지배 미화론의 근거 - 정체성(停滯性) 이론

'식민지 근대화론'을 떠올리면서 함께 연상되는 것은 일제 관학자들이 한국을 강점할 무렵에 내세웠고 그 뒤 강점 후에도 줄곧 주장했던 정체성이 론이다. 정체성 이론은 일제가 한국을 침략 강점하고 그것을 정당화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웠던 주장으로 '식민주의 사관'의 골간을 이루고 있다. 이 이론은 처음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주장하면서 한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한 그들의 침략을 합리화하다가 일제 강점하에서는 한국의 자본주의화가 일본 자본의 영양과 혈맥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일제 강점의 '시혜론'을 주장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이 이론은 일본의 정치인과 사회지도자들에 의해서는 일제의 한국 지배 미화론으로 각색되어 오랜 동안 우리의 둔화된 역사의식을 경책해 왔다.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처음 주장한 것은 福田德三(1874∼1930)이다. 그는 서구의 경제학을 일본에 도입 소개시킨 경제학자로서, 독일(Leipzig와 Muenchen 대학)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 이듬해(1902)에 한국을 방문하고 1903-04년에 걸쳐 발표한 논문〈韓國의 經濟組織과 經濟單位〉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주장하였다. 아마도 이 논문은 근대적인 경제사학의 방법론으로 한국의 경제사에 관해 쓴 최초의 학술논문이다. 福田은 자신의 경제학 연구의 목적을 경제생활의 일정한 발전법칙을 천명함에 두고, 재화의 교환 유통에 입각하여 경제가 발전해 가는 제단계를 '自足經濟(村落經濟)', '都府經濟(領域經濟)' 및 '國民經濟'로 나누었다. 각 경제의 발전단계와 정치형태를 대비하여, 자족경제를 봉건제도가 출현하기 이전의 시기로, 도부경제는 봉건제도에 대응하는 시기로 그리고 국민경제는 근대국가에 대응하는 시기로 보았다.

福田이 이 논문에서 주장한 결론은 20세기 초의 한국의 사회경제 상태가 자족경제의 단계에 속한다는 것으로, 말하자면 아직 봉건제도가 형성되기 이전의 自足經濟의 여떤 변태적인 양태(이를 '借金的 自足經濟'라고 하였다.)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이 단계는 일본에서는 鎌倉幕府 발생 이전의 藤原시대(9세기말∼12세기 초)에 해당하고 유럽에서는 Salica왕조(814∼1125)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의 20세기 초의 사회경제 상태는 일본과 유럽에 비해 천년 이상 뒤떨어졌다는 것이며,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필수조건인 봉건제도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근대국가 혹은 국민경제가 형성될 수 있는 불가결의 선행 필수조건이 바로 봉건제도인데 한국은 20세기초에도 여기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 의해 제창된 한국의 정체성은 '봉건제 결여론(缺如論)'으로 불려진다.

이렇게 정체된 한국의 경제단위가 발전하려면 스스로는 불가능하고 전래적(외래적)인 힘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한국에 이웃하고 있는 외래적(전래적)인 존재는 곧 러시아와 일본인데, 러시아(슬라브)의 경우 한국과 같이 경제가 저급하여 그 협력으로 발전의 전기를 얻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움으로 결국 일본의 힘에 의해 한국의 사회 경제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사실은 이 논문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러일전쟁(1904-05)의 전야에 이같은 논문이 발표되었다는 것은 한국에 대한 그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대변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 논문의 말미에서 그는,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는 한국이 취할 수 있는 길은 일본에 동화되어 일본의 힘으로 경제적인 발전을 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일본은 한국을 근대화시켜야 할 의무와 사명을 갖고 있다고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다음과 같이 미화하였다.

"한국에 있어서의 경제단위의 발전은 마침내 자발적인 것일 수는 없고, 전래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전래적이란 어떤 다른 경제단위의 발전된 경제조직을 갖는 문화에 동화됨에 있다.……한국의 토지를 개척 경작하여 서서히 이를 자본화할 수 있게끔 그 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아는 자가 아니면 아니된다. 그렇다면 한국에 있어서 많은 경제적 설비를 베풀고 수천년간 교통을 해온 결과 얻어낸 양해와 동정으로써 한인을 사역함에 익숙하고 또 한인의 토지를 사실상 사유로 삼아 서서히 농사경영을 시도하였으며, 더구나 그 생산품인 米 大豆에 대하여 최대의 고객인 우리들 일본인은 즉 이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자가 아닌가! 하물며 그 봉건적교육은 세계사상에서 가장 完美한 것 중의 하나에 속하며, 토지에 대해서는 가장 집중적인 농업자요, 인간에 대해서는 한인에게 가장 결핍된 용감한 무사적 정신의 대표자인 우리들 일본민족은,… 아무런 봉건적 교육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단위의 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하여, 그 부패쇠망의 극치에 달한 민족적 특성을 근저에서 소멸시켜,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에 동화시킬 자연적 命運과 의무를 갖는 有力優秀한 문화의 중대한 사명에 임하는 자가 아닐까!"

福田의 정체성 이론은 그 뒤 京都帝國大學 교수로 있던 黑正巖(1895∼1949)과 京城帝國大學 교수였던 森谷克己(1904∼1964)와 四方博(1900∼1973) 등의 경제(사)학자들에 계승되면서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식민주의 사관으로 요지부동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黑正이 한국의 지방경제가 2천년간 진보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그 정체적인 성격을 설명하고 福田과 같이 '봉건제 결여설'을 주장한 데 비하여, 森谷克己와 四方博은, 주장의 차이와 强度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동양 제국 혹은 한국이 일본의 힘에 의해 '정체성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일치하였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사 연구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四方博은 해방 후의 일본의 식자층에서 거론하는 '식민지 미화론'과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식민지 지배에 극히 소극적인 태도를 지닌 '양심적 교수'로서 평가받기도 하였지만, 한국사의 정체성론을 주장하는 면에서나 그 정체성을 벗어나 자본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역할을 강조하는 측면에서는 다른 정체성론자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는 정체성이론과 관련하여〈朝鮮에 있어서의 近代資本主義의 成立過程〉(《朝鮮社會經濟史硏究》1933)과〈舊來의 朝鮮社會의 歷史的 性格에 就하여〉(《朝鮮學報》1 2 3집, 1946∼1947) 등을 썼는데, 이들 논문에서 舊來의 한국사회는 발전이라고는 볼 수 없는 정체된 사회라고 규정하고, 한국이 근대화(자본주의화)하는 것은 일본 자본의 영양과 혈맥에 의해서라고 갈파하였다. 특히 한국의 자본주의의 성립과 관련하여 그는 세계사상 자본주의가 성립과정을 다음 두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하나는 자기 사회의 진통을 통해서 이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연히 외래 자본주의의 자극에 강요되어 부득이하게 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인데, 전자는 서구의 경우이고 한국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四方博의 견해에 따르면, "한국의 자본주의화는 외국(일본)의 자본과 외국인(일본인)의 기술능력에 의하여 순수히 타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이유는 개항 당시 한국내에서는 자생적인 자본의 축적도 없고, 기업적 정신도 없었으며, 자본주의의 형성을 희망하는 사정과 그것을 필연케 하는 조건이 모두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의 자본주의화 혹은 근대화를 위한 일본의 역할이 강조되는 반면 그들의 침략과 수탈은 은폐되는 것이다. 결국 일본이 한국에 '진출'한 것은 한국을 근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미화되고,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서 근대적인 산업과 인프라스트럭쳐, 학교와 각종 시설을 설비하여 한국의 문명화를 도왔다는 겻으로 결론나데 되었다.

일본 관학자들의 한국사의 정체성론은 해방 후 남북한 학자들에 의하여 논파되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여기서 상론하지 않겠다. '自生的 近代化論' 혹은 '資本主義 萌芽論' 은 한국의 역사학계가 실학시대를 연구하면서 거둔 학적인 결실로서 정체성론을 극복하는 이론의 하나다. 이 이론에 의하면, 17∼18세기에 이르러 농업 수공업 상업 신분제의 측면에서 큰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를 자생적인 근대화의 싹(萌芽)이라는 것이다. 외세(일본)의 침략은 먼저 이 '자생적인 근대화(자본주의화)'를 철저히 잘라버리고 산업 교육 사회 전반에 걸쳐 식민지적 근대화를 이 땅에 심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일본은 1953년 제3차 한일회담 때의 소위 久保田貫一郞이 일본의 조선통치는 조선인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면이 있다는 요지로 발언한 이래 기회있을 때마다 '妄言'을 되풀이해 왔다. 망언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되겠기에 여기서 그 역사와 내용을 소개하지 않겠다. 다만 여기서는 그 대체적인 내용이, 첫째 일본이 한국을 무력이나 불법에 의해 강점한 것이 아니고 합법적으로 병합했다는 '한국강점 합법론'과 둘째 강점 후 일제는 한국을 수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베풀었다는 '식민통치 미화론' 또는 '식민지 시혜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점만 지적하겠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바로 둘째번에서 언급되는 '식민통치 미화론' 혹은 '식민지 시혜론'이 바로 '식민지 근대화론'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그들이 조선을 무력으로 불법 강점한 사실과 민족말살을 감행한 사실을 부정하는 한편 그들의 식민통치가 조선의 낙후성을 극복하고 근대화에 기여한 것처럼 주장하는, 전형적인 식민주의사관에 입각한 '조선침략정당화론'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최근에 와서는 '종전' 50주년을 맞아 '아세아 해방론'도 점차 열을 올리고 있다. 이 또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기만적인 슬로건 아래 일으킨 만주침략,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아시아인을 구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구하기 위한 해방전쟁이었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망언'의 사례에서도 보이듯이, 일본 식자들의 '식민통치 미화론'이나 '식민지 시혜론'은 다음에서 언급할 '식민지 근대화론'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식민통치 미화론'이 '정체성 이론'이라는 '식민주의 역사관'에 기초해 있다면, '식민지 근대화론' 또한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식민주의 역사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데올로기성을 앞세워 주장하기에 급급했던 '식민통치 미화론'과는 달리, 통계학적인 근거를 精緻하게 제시하여 그 實證性이 비교가 안될 정도로 뛰어나다 할지라도, '정체성 이론'에 근거하여 설정된 '식민지 시혜론'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를 제시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고 할 것이다.

3. '식민지 근대화론'의 전개과정

'식민통치 미화론' 혹은 '식민지 시혜론'에 입각한 일본인의 '망언'이 거듭되는 동안에, 한국의 대응이 민족적 감정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성적인 치밀성과 보편적인 가치관에 입각한 수준을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경제가 성장할수록 그 경제성장의 원인이 일제 식민통치의 시혜의 결과라는 류의 '망언'은 빈도도 높아졌고 다양성을 띠면서 체계화되어 갔다. 그런 추세 속에서 198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의 경제성장이 식민지하의 경제성장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학문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망언'의 기본발상이 식민지 미화론에 있었던만큼 그 아류라 할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전회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앞서 세계학계에서는 제국주의적인 시각에서 과거 식민정책이 피식민지의 경제를 성장시켰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주장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인식은 머지 않아 한국에도 '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이것은 제국주의적 시각의 학문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留學이라는 환경과,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주장하던 유신통치의 이데올로기적 분위기가 맞물려진 상황에서 수용되었는데, 서상철의 논문에서 이 점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가 대학에서 官界로 진출할 즈음에는 한국의 정부 내에서도 일제 강점기의 경제성장이 한국의 경제성장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는 인식을 광범위하게 공유하게 되었다. 식민주의에 대한 이같은 견해들의 漸出과 함께 일제 강점기를 수탈론적 시각에서 이해하던 인식이 '성장론'적 시각으로 변화하는 조짐들이 일본의 경제사학계를 비롯하여 미국과 한국의 학계에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章에서는 그런 움직임의 과정을 일본의 학계로부터 검토하고자 한다.

3-1. 中村哲: '식민지 근대화론'이 학계의 차원으로 전화되는 것은 京都大學 교수 中村哲의 활략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는 1975년 4월부터 경도대학 경제학부의 대학원세미나에서 <日本帝國主義의 植民地支配>라는 테마로 연구회를 시작하면서 한국경제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는 종래의 설과 어긋나는 사실이 많고 이론적으로도 문제가 많은 것을 알게 되어 그런 것들을 검토하면서 '李朝말'로부터 식민지에 관한 역사적 이미지 혹은 역사과정을 이해하는 틀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는 1983년 마르크스 歿後 100년을 맞아 일련의 학술회의를 통해, 당시 겨우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한국자본주의에 대해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는 일이 현대의 세계사 인식에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시점의 필요를 느꼈고, 또 일본의 明治維新과도 공통점을 발견하면서 '중진자본주의라고 하는 일반적이며 역사적인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1984년 7월 金泳鎬 교수와의, 1986년 여름에는 安秉直 교수와의 만남을 계기로 한국의 경제사학자와 교류를 시작하였고, 1986년 12월에는 安, 金 교수와 일본연구자 8명으로 경도에서 조선근대경제사의 심포지엄을 행하게 되었으며 이어서 그 성과를 공간하였고, 1989년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일련의 공동연구와 학회를 계속하였다.

中村은, 1987년 8월 4일 '落星臺硏究室'에서 보고한 바 있고 그 뒤에 문장화한 자신의 논문을 통해, 동아시아 NICs 4개국(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이 급속한 자본주의화를 달성한 요인을 그들이 갖는 공통점에서부터 전반적으로 검토하였다. 말하자면 그들 4나라가 다 같이 식민지였으면서도 다른 독립국가였던 나라들보다 먼저 '근대화'를 달성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공통점은 4개국이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 외에 첫째 식민지화에 의하여 구사회=전근대적 사회 경제구조가 꽤 철저하게 파괴되고 해체되었다는 것, 둘째 그 위에 본국에 종속하는 경제구조가 다른 식민지에 비하여 보다 깊이 만들어졌다는 것, 셋째 그 과정에서 본국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경제가 급속하게 발달했다는 것-식민지자본주의의 형성-인데, 한국과 대만이 특히 이 세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며, 바로 이러한 점들이 '동아시아 NICs의 중요한 역사적 조건의 하나'였다고 주장하였다. 즉 식민지가 되어 구사회가 철저히 파괴되고 식민지 본국에 더 철저히 종속화되어 본국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러한 정지작업을 기초로하여 본국자본이 활동할 공간이 커졌기 때문에 '식민지자본주의의 형성'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발상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NICs 4개국이 과거 식민지였기 때문에 해방 후에 급격한 자본주의화가 가능하였다는 발상이다. 이 발상에는 이러한 '근대화'를 가능케 한 식민주의를 꼭 '수탈론'으로만 몰아야 할 것인가 하는 反論的인 의혹을 제기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식민지 시혜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갖게 된다.

中村은 이같은 발상을 근거로하여 위의 세가지 공통점과 관련시킬 사건을 일제 강점기의 한국사에서 제시하였다. 시대별로 토지조사사업(1910년대)과 산미증식계획(1920년대∼30년대 전반), 일본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급속한 공업화(1930년대 후반∼1940년대 전반)을 들어 '간단하게' 검토하였다. 그 세가지가 뒷날 사실상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자신들의 입론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고 있다는 것은, 이 이론의 성립과정에서 활동한 中村과의 관계에서 볼 때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中村은 일제 식민지지배의 커다란 특징의 하나로서 '토지소유관계의 철저한 개혁'을 들었는데, 이는 농촌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식민지경제 내로 편입해 들이기 위한 기반조성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지 자본주의화를 위해서는 전근대적 토지소유관계를 폐지하고 자본주의에 적합한 토지소유관계 즉 근대적 토지소유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되는데, 식민지치고 이렇게 철저한 토지개혁을 단행한 제국주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 '토지개혁'과 함께 地租를 개정했는데 그 목적은 자본주의화정책과 식민지 지배를 위한 재원의 확보와 일제에 종속하는 경제구조의 편성 및 식민지 지배의 지주로서 식민지지주제를 육성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종래의 연구가 일인지주의 토지수탈과 식민지권력의 국유지수탈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전근대적 토지소유관계를 폐지하고 근대적 토지소유관계를 만들어내고 농촌에 대한 상품경제의 급격한 침투, 농민층 분해, 지주제의 발달, 과잉인구 저임금노동력 창출의 기반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였다.

中村이 '산미증식계획'을 식민지 자본주의와 관련하여 언급한 것은 1차대전후의 본국의 잉여자본을 식민지 금융기관에 대부하는 자본의 문제와, 수리조합과 거기에 따른 토지개량 농업기술의 문제 및 일본경제와 결합된 지주제의 발전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계획의 결과, 농업의 상품생산화와 외래기술, 농산물의 본국수출과 모노컬처의 진행, 식민지 지주제의 고도한 발달과 농민의 대량 몰락, 과잉인구 형성과 농촌인구의 다량유출 등이 2차대전 전에 그 규모와 속도에서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되었다. 이렇게 되자 한국에서는 兩大戰期에 전근대적 경제구조의 파괴 해체와 제국주의 본국경제에 종속된 경제구조가 대규모로 형성되었으며 이는 곧 植民地型의 本源的 축적이 꽤 철저하게 행하여졌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1930∼1940년대의 공업화와 관련하여 中村은 이렇게 주장한다. 앞에서 거론한 토지정책과 산미증식계획의 효과 위에서 1930년대부터 日窒을 비롯한 일본의 독점자본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독점자본에 의한 공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조선경제는 20년대까지의 종속경제가 한층 강력하게 일본경제에 종속되어 갔고 식민지자본주의가 공업부문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일본으로부터 진출한 독점자본으로 在朝日本人資本과 朝鮮人資本이 공업 상업 금융 등에서 급격하게 형성되어 갔다. 그러나 종래의 연구에서는 이 점이 간과되고 일본독점자본의 수탈과 전시체제로 조선인자본의 몰락이 강조되어 왔으며 일본 독점자본은 일본본국경제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내에서는 그 관련산업은 발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의 공업화는 확실히 일본 본국으로부터 진출하여 온 일본독점자본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나, 그 진출에는 조선경제가 그것을 가능케 하였던 조건-앞에서 언급한 식민지적 源蓄의 진행에 더하여, 인프라스트럭처, 유통조직의 발달 및 관련된 부문의 최소한의 설립 등-이 필요함과 동시에, 진출 자체가 그러한 관련부문을 발달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공업화는, 물론 일본본국까지도 포함하는 조선경제전체를 끌어들이면서 진전된 것이다" 여기서 그는 1930년대의 공업화에서 조선경제의 역할을 강조함으로 식민지 자본주의가 성립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여기까지가 그가 낙성대연구실에서 발표한 '식민지 자본주의 형성'과 관련된 논문의 요지다. 이는 종래의 식민지 수탈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온 것으로,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그 이전부터 수면하에서만 움직이던 주장을 수면위에 떠올린 셈이며, 이를 전후하여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미국과 한국의 학계에서도 뒷날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불려지는 학문적인 소용돌이가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3-2. 에커트와 미국의 '식민지 조선' 연구: 종래 미국인들의 한국에 관한 연구는, 1882년 그리피스Wm E.Griffis의 Corea, The Hermit Nation에서 본격화된다고 하겠지만, 19세기 말부터는 주로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해방후 미국에서의 한국사연구는 국내에서 섭렵하지 못하는, 예를 들면 북한관계나 공산주의운동, 미국정부문서, 선교사문서 등의 자료를 통해 연구분야를 확대하고, 북한과 공산권의 한국사 연구를 국내학계에 소개하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연구도 차차 제고되었는데, 연구분야는 일제의 한국침략에 관한 것이거나 공산주의운동을 포함한 항일민족운동에 관한 테마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연구자들 중 한국인 혹은 한국계가 이런 분야의 연구를 이끌었던 것도 하나의 추세였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서서 미국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의 연구가 특히 식민지시대 연구에서 '한국 역사학의 주류와 접목'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때로는 한국 역사학의 기존의 입장에 맞서고 있었다. 그것은 창의성을 중시하는 학문적인 풍토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이들이 국내학자들에 비해 한국사 연구에 따른 정서적인 의무감이 적은 데다가 상반되는 가치와 이해관계로부터 중립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내의 학자들이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고수해야 할 때에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팔레 James B. Palais 교수가 "식민지사관에 기초한 정체론을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전개된 내재적 발전론 역시 수용하기 어렵다"고 '내재적 발전론'에 동의하지 않은 것이나, 커밍스 Bruce Cumings 교수가 '수정주의이론'을 내세워 한국사학계에 충격을 주었던 것도 미국 학자들의 이러한 창의성 및 가치중립성에 대한 독특한 위치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거주 한국학 연구자들은 일제식민지시대 연구에서, 한국인 일본인 학자들이 때때로 상반되게 주장할 수도 있었던 목적지향적인 연구경향을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1960년부터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신흥산업국들 NICs 의 경제발전은 미국 학계의 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NICs 중 한국 대만 등 일본의 식민지를 거친 나라들이 경제성장에 성공함에 따라 이들의 성장과 식민지시대와의 관계를 분석하게 되었다. 계량경제학이 발전하던 그 무렵 한국의 자본주의발전의 역사적 요인을 찾으려는 학자들은 과거 식민지시대의 성장지표를 제시해주는 식민정권의 각종 통계를 통해 그 관계를 분석, 종합해 갔던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미국 학계에서는, 1980년대부터 일본과 한국에서 일고 있는 일제강점기 연구동향에 영향을 입은 듯,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기원'을 주장하는 연구서들이 간행되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기원'과 관련해서는 1990년대에 앞서 이미 커밍스 교수에 의해서도 이미 언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시기 연구에서 종래의 보수적이고도 민족주의적인 기존의 해석에 정면으로 맞선 사람은 하버드 대학의 에커트 Carter J. Eckert 교수였다. 그는 그의 저서《帝國의 後裔》Offspring of Empire 는, 副題 '高廠 金氏 일가와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起源'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일제 강점기에 金性洙 金秊洙가 설립한 경성방직의 성장과정을 분석한 것으로서 이를 통해 한국의 재벌과 자본주의 형태가 식민지시기에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밝힌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조사에 의하여 조사당시 한국의 50대 재벌기업의 설립자 중 60퍼센트가, 김씨 일가와 마찬가지로 식민지에서의 사업경험을 어느 정도씩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식민주의는 좋건 나쁘건 한국의 산업발달의 촉매이자 발상지이며 이 식민주의를 연구해 나가다 보면 근대한국의 기원 그 자체와 얼굴을 맞대게 된다"고 갈파하였다. 그는 또 "식민주의는 戰後시기의 미래의 발전을 위한 사회적 바탕만 남겨 준 것이 아니라 역사에 바탕한 성공적인 자본주의 성장의 방식을 남겨주었다. 여기서 성공적이란 적어도 급속한 산업화를 촉진한다는 좁은 의미에서 성공적이란 의미이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이 에커트는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이해를 위해서는 식민지시기 이해가 필수적이며 일제가 남긴 경제적 물질적 유산 못지않게 경험적 제도적 유산(산업화의 경험)도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에커트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한국의 산업발전의 근대적 기초를 다졌음을 주장하는 한편 일제의 강점으로 '자본주의의 싹'이 잘려나갔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자생적 근대화론'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출간된 맥나마라의 《한국기업의 식민지적 기원, 1910∼1945》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enterprise, 1910-1945 역시, 한국의 강력한 경제성장이 학자와 정책입안자 및 기업가들의 주목을 끌고 있음을 인식하고, 閔大植 圭植 朴興植 및 金秊洙 등의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사업가들의 기업이념과 조직 등을 검토하면서 에커트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에 접근하였다. 그는 "閔氏家와 박흥식 김연수 등이 한국기업의 식민지적 기원에 광명을 비춘다면, 우리는 해방 후의 발전과 함께 근대 조선왕조에서의 起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미국 학계의 이같은 연구는 주로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기원'을 다룬 것이었지만, 그 표현의 적절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국내 학계로부터는 '식민지 근대화론' 혹은 '식민지 미화론'으로 분류되고 있다. 문제는, 신기욱의 지적에서 보이듯이, 국내의 학계가 그런 주장들을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치부하고 '비판적 소리'는 높이고 있는데 그 비판을 체계적으로 검토한 연구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식민지 시절, 한국민이 겪은 말할 수 없는 고초와 민족말살통치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없는 외국인이,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문서들과 그 친일성이 검증되어야 할 가문의 내력을 근거로하여 연구실 안에서 작성한 이 논문들은 큰 파문을 일으키며 식민지시대사 연구자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뒤에서 다시 언급되겠지만, 한국의 역사학계는 객관적인 입장을 강조하면서 '실증적'인 사례들을 통해 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들 제 3국인들의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기원' 논의에 적절히 답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3-3. 安秉直과 그의 문하의 한국 근대경제사학자들: '식민지 근대화론'은 安秉直 교수가 京都大學 교수 中村哲의 <中進資本主義理論>을 수용함으로 한국의 경제사학계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안병직은 1980년대 전반까지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주창해 왔던 진보적인 경제(사)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1986년에 그가 연구차 東京大學에 가서,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梶村秀樹 中村哲 堀和生 등 사회경제학자들과 학문적으로 교류하는 동안 특히 中村의 주장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같다. 귀국하여 安 교수는 中村의 '中進資本主義 理論'에 입각한 한국경제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학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그는 '식민지 개발론'에 입각한 역사해석을 추구하고 동학 제자들 및 일본 학자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넓히며 그들과 함께 몇 권의 책을 도요다(豊田)재단의 연구비 지원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학계의 비판에 직면한 安 교수는〈한국경제 발전의 제조건〉(《창작과 비평》1993년 겨울)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1995년에는 자신의 견해를 전국역사학대회에서〈韓國에 있어서의 經濟發展과 近代史硏究〉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바 있다. 두 번째 발표에서 그는 먼저 한국 경제발전의 특징으로 20세기 후반기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것은 한국의 경제발전이 自生的인 것이라기보다는 선진제국으로부터의 후발성의 이익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한국사에서 '資本主義 萌芽論' 등으로 불려지는 '自生的 近代化論'을 일단 부정한 것이다. 그는 종래 대다수의 한국인이 경제발전이 제국주의와의 대결과정에서 달성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예상과는 달리 세계자본주의제국과의 협력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과거의 식민지 시대에 '자생적 근대화'가 아니라 일제와의 '협력과정'을 통하여 개발이 이루어졌음을 대담하게 주장한 것이었다. 安 교수는 이를 근거로 과거 '侵略과 抵抗', '收奪과 低開發化'를 중심으로 했던 근대역사관을 '침략과 개발', '수탈과 개발'로 고쳐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민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그들의 세계관을 크게 바꾸도록 강요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세계관의 전환 속에는 당연히 역사관의 전환도 포함된다. 종래의 한국근대사의 기본구도는, 정치사에 있어서는 「侵略과 抵抗」이었고, 경제사에 있어서는 「收奪과 低開發化」이었으나, 이제 그러한 구도가 일방적으로 통용되는 시대는 끝난 것이다.……한국근대사의 연구가 여전히 「침략과 저항」이라는 구도 속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시대착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략과 저항」이 아니라, 근래 국제학계에서 제시되고 있는 「侵略과 開發」이라는 한국근대사의 구도에 대해서도 눈을 돌려야 한다. 「침략과 개발」을 경제학적 개념으로 일원화시키면, 「收奪과 開發」이 될 것이다."

그는, 현재 한국이 근대화(중진화)를 끝내고 현대화(선진화)를 바라보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근대화는 모방활동에 의해 가능하나 선진화는 '창조활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이 창조활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한국근대사 연구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민족운동에 대한 賞讚'을 강조하는, 독립운동만을 특권화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식민지적 개발은 물론 한국민의 근대민족으로서의 自己變身活動全體가 일괄적으로 무시되거나 반민족적인 것이라고 罵倒되기 일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독립운동사의 강조가 일제 강점기를 부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韓國에 있어서의 經濟發展과 近代史硏究〉에서 근대경제사학계의 연구성과를 '개발'의 측면, 즉 '식민지개발'과 '조선인의 자기개발'로 나누고 다음과 같이 검토, 정리하였다.

종래 학계에서는 일제시대를 정체적 빈곤한 시기로 보았으나, 그는 빈곤하지만 동태적인 시대로 파악한다. 일제시대의 국내총생산(GDP)은 1912-37년간에 4.15%씩 성장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세계자본주의제국의 성장율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이와같은 높은 성장율의 원인은 식민지화과정을 통한 새제도의 수립(화폐개혁 재정개혁 및 토지조사사업) 때문이다. 일제시대에는 인프라스트럭처의 건설이 충실하여 화물수송량이 급격히 증가하고(1930년 594만톤에서 1944년 3,102만톤으로),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45%의 곡물생산량을 증가시켰는데 이는 토지개량사업과 근대적 농법을 체득하였기 때문이다. 종래 군수공업만 발달하였다고 비판하던 '공업화'도 사실은 '생산력확충부문'이 주내용이었고, 일본과의 관계에서 분업체제와 자본 및 기술 공급을 통해 일본 경제권에 깊숙히 포섭되었으며, 그 결과 무역 및 공업생산지수가 급격히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개발로, 비록 식민자본주의이긴 하지만, 조선의 경제구조를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변화시켰다.

안 교수의 논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인의 자기개발' 부문이다. 종래에는 '식민지개발'이 수탈일변도였기 때문에 조선인은 일방적으로 몰락하였다고 보았으나,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조선인도 자유로운 활동공간을 가질 수가 있었으며, 그들은 농민 자본가 노동자의 제계급으로서 그 나름대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인이 농업, 자본, 공업, 노동 등에서 자기개발에 '자발적'으로 노력하였다고 강조하였다.

안 교수는 1960년대 이후의 경제발전이 자생적인 것이 아니고, 독립운동세력이 그 주체가 되었던 것은 더욱 아니며, 오히려 만주군의 육군중위 출신 박정희가 그 중심인물임을 들어, 한국자본주의화에 대한 일제 식민지시대의 공헌을 강조하였다. 한편 한국근대사에서 일제의 일방적인 수탈을 강조하는 독립운동사 연구가 특권화되고 있다고 반복적으로 비판하면서 "그러한 근대사연구는 현대사연구와 전혀 무관하게 되어 그 불모성이 점점 명백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한국의 경제발전이 자생적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독립운동사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그리고 1960년대 이후의 한국의 경제발전이 세계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이루어졌고 그 배경이 되는 일제 강점기의 '공업화'도 일본 경제권에 깊숙히 포섭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그의 주장에는 거의 민족을 배제하고 있는데도, "선진화를 위한 한국 나름의 독자적인 문화의 건설"을 주장하는 것은 역사의식의 허점과 논리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생성과 독립성을 강조하지 않을 뿐만아니라 '자생적'인 것과 외세에 대한 '저항'을 부정하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韓國文化라는 자기문화를 定立하기 위한 創造活動"이 과연 가능할 것이며, 민족이 배제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성장'이 과연 누구를 위한 성장이 될 것인가.

안 교수의 주장은 앞서의 中村哲의 논지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식민지개발'론에서 주장하는 내용도 中村이 제기한 문제의식과 차이가 없다. 中村에게서 보이지 않는 점으로는 '조선인의 자기개발'이 보완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 점은 맥나마라와 에커트의 주장과 상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 교수의 '식민지근대화론'은 일본과 미국 학자들의 주장을 종합하는 성격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 교수가 연구실과 대학 그리고 일본 학계와의 연계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확대, 심화시켜 나간 결과, 그의 영향력 하에 있는 한국 경제사학계에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상당한 수준으로 저변화되었다. 그들은 일제시대와 총독부가 남긴 자료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계량화하여 종래의 '식민지 수탈론'에 대한 공세를 펴고 있다. 그들은 '통계적 연구'와 '실증연구'를 통해 '객관적 근거'를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연구분야는 한말 일제하의 토지문제(光武量田事業과 土地調査事業)를 비롯하여 産米增殖計劃과 거기에 따른 水利組合 토지개량사업 농사개량사업과, 일제 강점기의 '공업화'와 '조선인자본'의 문제 등 경제사학이 접근할 수 있는 분야를 거의 망라하고 있다.

4. '식민지 근대화론'의 검토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이해의 주류는 종래 한마디로 '식민지 수탈론'이었다. 일제는 식민지수탈을 목적으로 한국을 침략, 강점하였고, 강점하자 '수탈'의 정도를 넘어서서 세계 식민정책사상 그 유례를 쉽게 찾을 수 없는 '민족말살' 정책을 감행하였다. 해방 후 일제의 수탈 및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연구서가 일본에서는 더러 나왔으나 국내의 역사학계에서는 뚜렷한 것이 없었다. 아마도 이 분야에 대하여 가장 먼저 눈뜬 인사 중의 한분이 文定昌이 아니었는가 싶다. 그는 "36년사에 관한 집필은 깨끗하고 허물없는 인사들이 할 일이요 필자 그사람 아님을 自認 自肅하였던 것인바, 일제가 패주한 후, 이미 20년이 지난 이 나라에, 그 잔악무도하였던 虐奪의 36년사는 나타나지 아니하고 輓近 再現視되는 日本帝國主義者들이 得勢하여 도리어 '36년간의 統治가 有益했다'고 橫逆의 소리들을 連發하는 등의 現實에 심히 刺戟"되어 "朝鮮總督府… 등에 관한 그 모든 수법을, 실무면을 통하여 잘 아는" 자신이 붓을 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뒤 많은 저술들이 나와 일제강점기에 대한 '수탈론'적 시각은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신용하에 의하면, 일제의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으로는 한국을 일본 경제발전을 위한 식량 공급지, 일본의 공업발전에 소요되는 원료 공급지, 일본 공업제품 판매를 위한 독점적 상품 판매시장, 일본 자본수출에 의한 식민지 초과이윤의 수탈지, 일본을 위한 노동력의 공급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여 착취 수탈하는 것이었고,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민족형성 요소들을 말살하기 위하여 언어, 문자(한글), 민족사, 성명(創氏改名), 민족의식, 민족교육을 말살하고 일본어 사용 강제정책, 일본숭배사상 주입정책, 일본역사 주입정책, 일제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위한 서약정책 동방요배정책 일본신 봉숭정책 등을 강제하였다는 것이다.

수탈론적 시각은 '자본주의 맹아론' 혹은 '내재적 발전론'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수탈론에서는 실학시대 이래 내재적으로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을 일제가 강점하여 그 자생적인 자본주의 맹아를 잘라버리고 수탈을 목적으로 한 '식민지적 자본주의'를 이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강만길은 일제 식민지배정책의 기본이 민족 부르즈와지의 성장을 막고 민족자본의 축적을 저지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민족 부르즈와지는 독립운동의 핵심세력이 되고 민족자본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관점에 서서 그는 일제의 경제정책을 비판하였다. 가령 토지정책의 경우, 문호개방 이후 성장해 오고 있던 자작농 상층부를 제거하고 농민의 대부분을 영세소작인화하는 한편 친일적인 지주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토지조사업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20세기 전반기 한국에서는 농업사적으로 자본주의적 영농이 발달해야 할 시기였지만 일본의 식민통치로 그것이 저지되고 오히려 지주제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 미국 한국에서 일본강점기를 '개발과 성장'의 시각에서 보려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이 제기되어 학계를 뜨겁게 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한국도 포함되어 있는 NICs를 세계사의 보편적인 틀 속에서 위치지워야 한다는 것과 한국근대사를 조선후기로부터 현재까지의 근현대사의 총체 속에서 파악하는 관점과 방법론을 확립해야 하며, 거기에서 식민지 시기를 그 이전이나 이후의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명확하게 위치지워야한다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신흥공업국으로서의 성장요소를 보편적인 시각에서 규명하고 또 한국사를 단절이 아닌 일관성의 틀 속에서 보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지만, 이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한국강점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교묘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본격화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 주장하는 내용들이 학자에 따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그 최대공약수적인 내용을 일별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역사학계의 입장을 살펴볼까 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은 주로 안병직을 정점으로 하는 경제사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으며 그들의 주장 또한 경제사가 미칠 수 있는 일제강점기의 거의 전 분야를 파고들고 있다. 토지문제, 산미증식과 거기에 따르는 농지 수리조합 농사 금융조합, 그리고 '공업화'를 비롯한 전 산업과 거기에 종사하는 농민 노동자의 문제 등에 걸쳐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 몇가지 문제에만 접근하겠다.

4-1. '내재적 발전론'의 거부: 해방 후 한국역사학계가 이룩해 놓은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내재적 발전론'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자들은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하여 거부하는 입장이다. '내재적 발전론'은 '자본주의 맹아론' 혹은 '자생적 근대화론'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것은 일제 관학자들의 '한국사의 정체성이론'을 극복하는 이론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것은 조선후기에 한국은 농업, 상업과 화폐, 수공업과 광업 및 신분의 변동면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데에 필요한 여건들이 싹트고 있었다는, 다시 말하면 서구적인 이론으로 보더라도 사회경제적인 각 분야에서 자본주의의 싹(萌芽)이 보였고 이것이 자라 한국의 근대화를 가능케 했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은 몇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정체성이론은 타파하는 것이다. 즉 福田德三 등이 제기한,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도 한국은 봉건제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고 일본의 藤原時代에 해당하여 일본보다 거의 1천년이나 뒤떨어졌다는 한국사의 정체성이론을 타파한 것이다. 둘째는 18-19세기에 한국에서는 이미 자생적인 근대화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가 한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해서 진출했고 또 일제가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주장이 근거가 없어진다. 이것은 아울러 한국이 외세(일본)에 의해서 근대화되었다고 하는 일종의 '한국사의 他律性理論'을 거부하는 셈이 된다. 셋째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주장하는, 한국이 식민지 시대에 자본주의화(근대화)되었다는 주장이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생적 근대화론은 정체성론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정체성론에 근거하여 성립된 일제의 한국침략의 정당성이 없어지며, 일본이 그 동안 기회있을 때마다 '妄言'해온 '식민지 시혜론' 등의 주장과 그와 같은 선상에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식민지 근대화론' 또한 비빌 언덕이 없어진다.

'내재적 근대화론'은 '식민지 근대화론' 혹은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기원'을 주장하는 자들 거의 대부분에 의해서 거부되고 있다. 최근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에게는 거의 영향력을 잃고 있다고 한다. 특히 '內在的 發展論' 극복에 吉野誠과 宮嶋博史를 주시하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미국의 팔레는 물론이고 에커트 Carter J.Eckert 와 맥나마라 Dennis McNamara 또한 '내재적 근대화론'을 거부한다. 한국의 경제사학자들에게서도 역시 그같은 현상이 보인다. 안병직은 조선의 공업화의 특질에는 "자생적인 것이 아닐 뿐더러 기동력도 밖으로부터 들어왔던 데"에 있었다고 한다. 이영훈 또한 "한국사의 근대는 서유럽적 근대가 개항 이후에 이식되었음을 주요 계기로 한다"고하여 '내재적 근대화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렇게 '식민지 근대화론'이 '내재적 발전론'을 거부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렇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은 '내재적 발전론'을 거부했던 저 식민주의사관의 '정체성론'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이론적 체계도 '식민지 통치의 긍정적 해석을 뒷받침'한다는 오해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4-2. 토지조사사업의 문제: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토론은 일제강점기에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박문규 인정식 박문병 이청원 등이 주로 식민지 조선사회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토대가 되는 토지소유관계를 파악하려는 데서 시작하였다. 그 뒤 권영욱은 역둔토사업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이 사업의 식민지적 칢력성 내지는 약탈성을 부각시켰다. 이재무 김용섭에 이어서 신용하는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연구를 본격화시켰다. 그는 조선 봉건사회말기부터 발전되어 온 토지사유제를 일제가 그들의 침략에 적합하도록 재확인(재법인)한 과정이 토지조사사업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업은 토지소유관계의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졌지만 이것이 조선의 농업발전의 필요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일제의 식민지수탈 정책의 하나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사업의 본질은 토지를 약탈하고 지세를 수탈하는 데에 있었던만큼 조사사업의 실시과정에서 농민의 권리를 박탈하는 폭력성이 나타났을 뿐만아니라 토지의 측량과 신고 사정 과정에서 '민족적 계급적 자의성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또 실시과정에서 조선 후기 이래 내재적으로 발전해 오던 경작권 개간권 賭地權 入會權 등 농민의 각종 권리는 부정되고 지주의 사유권만이 보장되었다는 것이다.

토지조사사업 연구를 통해 얻은 통설은 이 사업으로 적지 않은 토지가 지주의 소유지로 둔갑되거나 국유지로 강제 편입되어 광대한 국유지가 무상으로 창출되었고 그 일부가 국유지 불하 방식으로 일본인 이민 상인 회사로 넘어갔다는 것이며, 이로써 식민지 지주제가 발전되고 농민이 급속히 몰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신용하의 연구에서 주목되는 것은 식민지권력이 갖는 폭력성을 밝혔다는 것과 조사사업이 '내재적 발전을 이어받은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고 '외래적 성격의 것'을 밝혔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에 대해 1990년대 초에, 조선후기 이래의 '내재적 발전론 본래의 주장을 계승하는 연구'로서 宮嶋博史의 연구가 나타났다. 그는 '일제의 방침이 조선 토지제도의 발전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어' 갔고 이 사업을 통하여 근대적 토지소유가 성립하였으며 토지의 상품화와 자본전환이 현저하게 촉진되었고 이 사업을 통하여 근대적 토지소유제도 지적제도 토지등기제도 근대적 지세제도를 포괄하는 '근대적 토지변혁'을 이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宮嶋의 이같은 주장에 전후하여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각을 갖는 연구자들이 나왔다. 이들의 주장은 "이 사업에 의하여 국유지와 민유지의 구분이 비로소 명확해지고 수조권적 토지지배=국가적 토지지배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는 것"이며, 이것은 또 "한국사회내부에서 성장해 오던 사적 토지소유권확립의 지향을 반영"한 것일뿐만아니라 기존의 연구에서 주장된, 토지조사사업이 도지권을 부정하고 지세수탈적 성격이 강하다는 내용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한국에서 근대적인 토지소유관계를 이루었다고 하는 등 일련의 주장은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들은 "토지조사사업이 기본적으로 제국주의 권력이 추진한 식민지 농정의 일환이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간과한 채 근대성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비판되는가 하면, 이 사업의 성격이 "기실 교묘하게 사업의 식민지적 수탈성을 은폐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내재적 발전론'을 가장한 식민주의 역사인식"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토지조사사업과 광무년간의 量田事業과의 관련문제다. 이 점에 대하여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광무년간의 양전사업에 대하여 '내재적 발전론'이나 그 근대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최근 이 분야의 연구로 돋보이는 최원규는 1898년-1904년까지 추진된 光武量田地契事業을, "한말의 토지제도 경제제도가 내포한 폐단과 모순을 지배층 입장에서 극복하려 한 노력의 소산"이며, "舊來의 소유권을 근대의 소유권으로 추인하여 국가 관리하에 두고 이를 기반으로 근대적 지세제도를 확립하여 국가재정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양전지계사업과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구래의 소유권을 근대의 소유권으로 확정한 점이나 이에 근거하여 근대적 지세제도를 꾀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질성을 갖고 있으나, 전자가 조선의 근대화개혁의 기반이었던 것에 비해 후자가 제국주의 자본축적의 공간으로 삼았다는 점, 전자가 농민의 경작권을 보호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갖고 있었음에 비해 후자는 토지소유권 이외의 모든 권리를 부정하였다는 점, 그리고 전자가 한국의 근대국가 형성이라는 전제하에 추진된 사업이기 때문에 기존의 향촌자치제의 경제사회적 질서를 보호하려는 것이었음에 비하여 후자는 일제가 자본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추진하였기 때문에 구래의 향촌질서를 파괴하고 개편해 버렸다는 것 등의 차이를 규명하였다. 이 연구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일제 토지조사사업 연고에 대한 제반주장에 비판을 가하는 것이며, 대한제국의 이같은 일련의 사업을 왜 일제가 방해하였는가도 더욱 뚜렷이 부각시켜 주었다고 생각된다.

4-3 '식민지 공업화'의 문제 : '식민지 근대화론'이 가장 역점을 두고 주장하는 것이 이 분야이다. 1960년대의 한국의 경제성장을 분석하면서 자연히 1930년대 이후의 식민지시기의 경제성장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식민지시기 조선의 국내총생산량(GDP)은 연평균 1912-27년간에는 5.32%, 1927-37년간에는 2.39%, 1912-37년간에는 4.15%씩 성장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세계자본주의 제국의 성장률보다도 훨씬 높을 뿐만아니라 세계적 고도성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본토의 그것을 상회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또 1912-37년간의 년펑균 산업부문 성장율은 농업 1.63%, 광업 9.84%, 제조업 10.83%였는데, 여기서 농업도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었지만 광공업은 이보다 더 높았다. 조선은 같은 시기의 대만과 비교해 보더라도 광공업의 성장률이 높았다.

이 시기의 성장은 다른 통계에서도 보인다. 1920년대 내내 2-3억원대의 공업생산액이 1939년에는 20억원을 넘어섰고, 1920년대 초 1천개를 넘기 시작한 회사수는 1929년 2,449개, 1939년 5,628개로 늘었으며, 불입자본금도 1920년대의 2억원에서 1939년에는 120억원을 넘어섰고, 1920년에 1억원을 넘어선 시장거래액은 1930년에 1억7천만원에 불과하던 것이 1940년에는 5억 9천만원에 이르렀다. 전산업생산에서 공업생산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1921년에 15%이던 것이 1938년에는 40%로 높아졌다. 인력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도 1933년의 노동자수가 21만4천명이던 것이 1943년에는 175만으로 증가했고 그 93%는 한국인이었으며, 1940년부터 1944년까지 한국인 3급기술자는 9천명에서 2만8천명으로 증가했는데 이는 당시 한국에 있던 일본인 기술자의 2배에 달한다는 것이다.

'식민지 공업화론자'들은 이 밖에도 인프라스트럭쳐 등의 설비증가도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 가운데 주목해야 할 점은 식민통치 하에서 한국인이 자기개발에 힘썼다는 대목이다. 즉 식민지개발과정에서, 상대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한국인도 자유로운 활동공간을 가져 농민 자본가 노동자의 제계급으로서 그 나름대로 발전했으며, 한국인들의 이러한 자발적인 노력이 성장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점은 종래의 연구에서 별로 주목하지 않았거나, 때로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일제에 협력하거나 동화된 자로 혹은 '민족정기'를 흐리게 하거나 민족해방을 저해한 장본인으로 치부하는가 하면, 조선인자본가의 전시경제 참가 등의 이같은 "'조선인자본의 능동성'은 결국 일본본토의 침략전쟁과 운명을 같이하려는 '반역사적 반민족적인 의미의 능동성'이며, 자본축적과정은 곧 조선인자본가가 자신의 민족성을 점차적으로 脫却하는 과정이었다"고 비판받았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식민지공업화론자들은 이들의 친일적 행적에 대한 가치평가를 유보한 채 식민지라는 역경속에서도 역동적으로 살아갔던 한국인의 한 표상으로 설명한다.

종래 이같은 경제지표나 성장요인에 대해 '수탈론'적인 인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1930년대 이후의 식민지 공업의 급격한 성장을 시인하면서도 그것은 일제가 한반도를 대륙병참기지로서 이용하였기 때문이며 그 공업화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군수공업의 단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였다. 1940년대 조선의 공업은 일본본토의 재생산과정에 예속된 형태이면서 광범한 조선인 중소기업의 몰락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민족경제와 국민경제간의 괴리를 심화하여 민족경제의 기반을 파탄시키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러한 성장의 이면에는 민족자본이 몰락하고 조선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혹사가 있었다는 점이 더 부각되었다.

그러나 식민지공업화론자들은 수탈론적인 주장에 대해 비판적이다. 공업화의 역사적 배경이 단순히 군사적인 것만은 아니었으며, 공업화의 주내용도 군수공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공업화의 배경은 1930년 전후의 일본 조선간의 농공분업의 파탄에서 오는 조선공업화의 필연성에 있으며 공업화의 주내용은 생산력확충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이 당시는 조선 공업의 발전단계가 낮기 때문에 일제의 정책목표와는 달리 군수공업이 발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1940년대의 中小企業整備令이 조선인공업의 성장에 일대타격을 가했다고 지적하면서도 그것은 '전쟁경제속에서 식민지당국이 조선인자본의 성장을 탄압한 사례'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관용적이다. 하여튼 한국은 이 무렵 명백하게 자본주의 사회로 전화하였고 그 수준은 러일전쟁과 제1차세계대전 사이의 일본자본주의 발전단계였고, 그러한 성장의 이면에는 일제가 조선에 상당한 자금이 투여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같은 식민지시기의 공업화를 한국 자본주의 발전사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가 한국근대경제사 연구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위에 말한 식민지공업화론자들의 統計와 數値를 곁들인 주장에 정당성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의 數値的 의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할지 궁금하다. 자금 유출입과 관련, 일제가 패전때까지 조선에 투여한 자금이 60억-70억엔인데 비하여 유출된 자금은 가시적으로 드러난 통계에 의해서만 보더라도 302억엔이고 물자유출분 140억엔을 합하면 440억엔이 넘어 유입자금의 6.3∼7.4배에 이르렀으며, 이렇게 식민지 전 기간의 추정 GDP 550억엔의 80%이상이 유출 또는 파괴됨으로 당시의 조선인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고 한다. 또 1910년 1인당 쌀 소비량이 약 0.71석이었는데 1919년 0.62석, 29년 0.44석, 38년 0.77석, 44년 0.56석으로 줄어든 것을 두고, "이같은 상황에서 일제치하에서 경제가 성장하여 한국인의 복지가 크게 개선된 양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식민지공업화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역사학계는 그같은 연구가 단순히 수치를 통계화한 것에 불과하며 민족모순을 그들의 연구 속에 무르익히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한다. 가령 그러한 수치상의 성장은, 일제의 그러한 통계가 진실하다 하더라도, 일본자본주의의 확대에 불과할 뿐이고 한국 민족경제의 발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개발론적 인식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조선인자본도 대개 '제2의 日本人化'했다는 것으로 이같은 조선인자본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여 자본축적을 꾀하는 한편 민족해방은 고사하고 침략전쟁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으며 이에 주변 점령지, 식민지에 대한 일본의 수탈을 보조하고 협력하는 존재이상은 될 수 없었으며 이들 조선인자본가계급의 '반민족성'은 증산정책 물자통제 조선인자본의 親日化에서 뚜렷이 나타났다고 평가한다. 오히려 그 전시체제의 기간이야말로 한국인들이 끝없이 수탈과 파괴를 당한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공업화'는 그 결과를 가지고 따질 것이 아니라 그 목적과 의도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情緖라고 본다. 결과적으로 성장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식민지적 수탈이 목적인 한에서는 그 성장이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한 성장과 개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제강점기의 '공업화'는 肥肉牛 肥肉豚의 논리를 크게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근대화론'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역사학계가 진지하게 토론의 장으로 이끌어가야 할 과제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제기한 문제들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토론의 광장이 활발해질 때 한국근대사는 더욱 풍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남은 말 - 제언을 곁들여

최근 일부 정치인들 사이에서 대통령후보 경선과정에서 '박정희 신드롬'이 대선예비주자들 사이에서 전개되어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마비시킨다는 여론이 없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지성의 산실이라고 하는 대학의 여론조사에서 먼저 나타났으니, 市井의 여론에 민감한 정치인들에게서 그 이상의 역사의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緣木求魚일지 모른다. 경제가 파국을 치닫고 정치가 실종된 상황에서 그같은 불안과 기대를 박대통령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심리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가 간지 20년도 되지 않아 유신정권의 그 포학상을 망각해버린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아직도 단련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망각은 일제시대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일본 지도자들이 '망언'을 터뜨릴 때마다 그것이 우리의 망각되어가는 역사의식을 일깨워준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감사'한 적이 없지 않다. 그 '망언'들은 때로는 시의적절하게 터져나와 우리의 마비된 역사의식을 깨우고 잠재워진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상대방의 실수나 '망언'을 물고 늘어지며 자신의 결기를 돋군다는 것은 분명 소인배에게서나 보이는 노릇과 다를 것이 없다.

박대통령과 일본의 '망언'을 이렇게 내세우는 것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발상이 자칫 이러한 문제들과 混淆될 우려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의 진실을 밝힌다고 하면서 내세운 말이, "한국의 경제발전은 자생적인 것이 아님은 물론 독립운동을 담지하였던 민족세력이 그 주체가 되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 특히 만주군의 육군중위출신 박정희가 그 중심적 인물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라고 했는데, 이는 한국의 경제발전이 독립운동가와는 관계가 없고 오히려 '친일세력'이었던 만주군의 육군중위출신이 가능케 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것은 해방 후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그리하여 독립운동 세력이 해방된 조국에서 자기공간을 거의 갖지 못하도록 했던 저간의 역사적인 과정을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려는 것일 뿐 아니라 '독립운동을 담지하였던 민족세력'을 '한국 경제발전의 중심인물'인 '만주군의 육군중위출신 박정희'에 대비시킴으로써 해방 후의 한국의 경제발전에 장애적인 요소가 되는 것처럼 오해토록 유도하는 인상마저 지울 수가 없다. 그 논리대로라면 한국이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면 더 발전하였을 수도 있었겠다는 느낌이고, 만주군 출신이 아니라 일본군 출신이라면 더 경제가 성장했을 것같다는 상상도 가능하다고 본다. 만주군을 일본군이라고 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할까. '만주군출신'과 '망언'을 같이 생각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 내용이 多岐하여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어렵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정하게 경제가 성장하여 자본주의화하였다는 것과 그것이 1960년대 이후의 한국의 자본주의 경제성장에 어떤 형태로든지 연결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과 문제제기에는 비판해야 할 점과 고려해야 할 점들이 동시에 섞여 있다고 본다.

첫째, 식민지의 경제를 성장시키려고 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식민지 경제를 운용하려는 의도나 또 혹시 결과될지도 모르는 경제성장의 과실을 누가 과연 획득하였는가를 따져본다면 그것은 바로 '肥肉牛 肥肉豚'의 논리에 귀결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식민본국(인)이 그 과실을 챙겼다면 '객관적'이니 '실증적'이니 하는 말로 마치 그 성장이나 개발이 식민지를 위한 것처럼 정당화할 수 없다는 뜻이다.

둘째, 백보를 양보해서 식민지 하에서 숫자적인 성장을 이루었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그 '성장'이란 것이 한국민족사 전체의 연관 선상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은 일제 강점하의 식민지 정책을 논할 때, 경제 하나만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식민통치의 반문화 반인륜 반민족성을 고려하지 않고 통계상에 나타난 '경제성장'의 숫자만을 가지고 논한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이며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령 식민지의 경제개발의 과실이 피식민지의 민족말살을 위해 투여되었다면 그런 경우에도 성장이란 말로 호도할 수 있을 것인가.

셋째, 그러면 경제사가들이 주장하는, 일제시대의 숫자상에 잡히는 그런 '성장'이란 것을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 점은 우리가 앞으로 세워가야 할 성장의 방향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식민지하에서 개발과 성장이 숫자적으로 잡힌다면, 그것은 <수탈을 목적으로 한 개발(성장)> 혹은 <식민지적 개발(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개발은 해방 후의 한국 민족사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기보다는 왜곡된 질서로 작용했을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수탈을 목적으로한 개발 혹은 성장은 숫자상의 증가에 관계없이 역사발전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 <강도의 논리> 혹은 <사창굴 포주 방식의 논리>를 거론한다는 것은 지나친 주장일까.

'식민지 근대화론'은 '실증적 연구'와 '객관적 근거'를 강조하고 精緻하게 논리를 전개하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그들의 무기는 수치와 통계다. 한마디로 그들은 수치와 통계의 마력에 심취되어 있다. 실증과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는 데는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지만, 수치와 통계의 마력은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지 않을 때는 세계사에서 그렇게도 매도되었던 제국주의와 식민통치를 미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근대의 한국사를 이해하는 틀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세계사에는 수치화하거나 통계화할 수 없는 사물이 많다. 더구나 억압적인 식민지 구조 하에서 민족적인 정서를 정직하게 수치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식민지 근대화를 주장하는 경제사가들이 식민지 시대를 경제의 틀안에서만 보지 말고 역사의 전체 구조 속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만 객관성을 보증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민족사를 왜곡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독립운동사의 특권을 비판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독립운동 담당자들이 경제발전에 주체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주군 육군중위 뒤에 가려져야 한다면 그것은 민족사를 크게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 '식민지 근대화론'이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하는 것은 식민주의 사관의 부활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왜냐하면 '내재적 발전론'이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론'을 부정하는 이론으로 나타난 만큼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하는 것은 '정체성론'으로 회귀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한국근대사 연구자가운데 일부가 식민사관의 일종인 식민지 근대화론을 새롭게 포장하여 이의 부활을 기도하고 있다"는 지적은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이러한 평가와 함께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식민지 근대화론'이 우리 학계에 일제 침략사와 정책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일제시대사 연구는 거의 제국주의 수탈론에 입각하였다고 할 것이다. 이 같은 연구분위기는 정연태의 지적과 같이, 일제의 수탈성과 한국인의 투쟁성을 일면적으로 강조하게 되어, 그 결과 근대화의 방향을 둘러싼 민족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무시했고 또 일제의 수탈 속에서도 진행된 변화의 측면을 간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일제의 수탈 속에서도 한국(인)의 변화를 추구하려는 문제의식을 거론했다는 점과 일제의 질곡하에서도 생존투쟁을 벌인 한국인을 부각하려고 한 것은 괄목할 만하다. 또한 일제 강점기를 우리 민족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도 환기시켜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역사학계가 더욱 심화시켜 역사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 할 것이다. 학계 일각에서 '수탈론'과 '근대화론'의 일방적인 역사 이해를 지양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학문연구의 '변증법적'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