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담 : 민중운동사에서
대한민국사로
(시대정신, 재창간호) | ||||||||||||||||||||||||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한국근∙현대사』가 교과목으로서 가지는 중요성은 매우 큽니다. 그것은 이 과목이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한국이 국가로서 장래에 나아갈 방향을 직접적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생님들께서도 이미 이 문제에 관하여 오랫동안 眞摯(진지)하게 생각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번에 이에 대한 高見을 들려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우선 이 교과서를 검토해 보고 받은 첫 인상으로부터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유영익 선생님의 견해부터 들어 보겠습니다. ●유 : 갑자기 첫 말문을 열게 되니 當惑(당혹)스럽습니다. 사실 저는 6종의 교과서를 골고루 검토하지는 못했습니다. 대략 3종을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펼치려는 토론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6종의 교과서 전부가 토론 및 批判의 대상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6종 중 어떤 것은 그래도 이만한 수준이면 괜찮다고 용납할 수 있는 것인지를 짚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두산출판사의 교과서는 그래도 과거의 교과서 編纂傳統(편찬전통)을 이어받아 무난하게 만들어진 교과서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점에 동의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강 : 현직 校監 선생님으로 계신 전용우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현직 교사로서 현행 근․현대사교과서를 어떻게 보시는지, 그리고 현재 학교에서 쓰고 있는 교과서는 어떤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 : 우선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여기 계신 元老 교수님들은 제가 80년대 대학원 다닐 때부터 尊銜(존함)을 들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安秉直 교수님의 토론항목을 읽으면서 새삼 근․현대사교과서 문제의 深刻性을 재인식했습니다. 근․현대사교과서의 문제점에 관해선 현장에서도 논란이 있지만 안 교수님의 지적처럼 논리적이고 深層的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선 현장과 정서적으로 乖離(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시교육청 전문직으로 있을 때 30~40대의 역사 교사들을 자주 만났는데, 요즘 젊은 교사들은 민족의식이랄까 그런 쪽에 민감합니다. 아마도 민족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역사의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고 일선 역사 교사들이 모두 이른바 의식화에 同調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의 6․25 관련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선생님들이 너무 심하다며 憂慮(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현재 6종의 근․현대교과서가 나와 있지만 大田에서도 웬만한 학교들은 금성출판사의 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정확한 통계는 내보지 못했습니다만, 여기 오기 전에 몇몇 학교에 확인해 보니 모두 금성출판사의 것을 쓰고 있더군요. 아마도 과반수가 훨씬 넘는 학교에서 채택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다만 현장 교사들은 금성사교과서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편은 아닙니다. 일부 문제는 있지만 근․현대사에서 민족운동사가 뼈대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분위기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 다음에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강 : 현행 교과서, 특히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교과서가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성사교과서가 과반이 넘는 採擇率(채택률)을 보이고 있거든요. 대전도 그렇다는 말씀이네요. 현행 교과서들, 특히 금성사교과서를 볼 때 어떤 기준에서 미흡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좀 말씀을 나누고 싶은데요. 먼저 이상적인 역사 교과서는 어떤 것인가, 그 기준으로 보았을 때, 우리 교과서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여기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안병직 교수님께서는 이런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근․현대사라고 하면 어느 나라 역사건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등의 학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불행히도 韓國史學界는 아직 그러한 지원을 받는 단계에 이르질 못했다.”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근․현대사를 저술할 수 있는 학문적 수준을 갖추지 않은 한국사 전공자들만으로 저술되는 데에는 확실히 문제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문제를 조금 깊이 말씀드리자면 학과 설정의 문제도 있는데,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가 전공으로 갈려져 있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와 日本 정도인 것 같습니다.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나누어 서로 간에 벽을 쳐 놓고 같은 역사학이라도 交流와 對話가 부족한 것이 사정을 보다 악화시킨 것 같습니다. 즉, 한국사 전공하시는 분들이 一國史 위주로 가다 보니까 폭넓지 못한 연구가 나오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싶고, 또 다른 학문과의 교류가 부족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 民俗學, 경제학 등 여러 분야들 말이지요.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는 정치학을 전공하고 계시는 申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原初的으로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역사학의 학파에 관계없이 역사학이란 ‘그 시절에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었는가?(What really happened?)’를 알아보는 학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금성출판사의 고등학교 근·현대사교과서를 보면서 역사란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는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어야 하는가?(What really ought to happen?)’를 고민하는 학문인 것처럼 보이고 느껴집니다. 역사학이 當爲論(Sollen)인지 아니면 存在論(Sein)의 문제인지에 따라서 사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에서도 지향해야 하고 소망하는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학은 본질적으로 있었던 사실로부터의 교훈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사학은 존재론의 문제가 먼저이고 당위론의 문제는 그 다음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재 읽혀지고 있는 좌파적 고등학교 근·현대사는 價値中立的이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역사학이 가치중립적이지 않을 경우에 나타나는 가장 큰 폐단은 아마도 지식의 偏食(편식)일 것입니다. 인생살이가 다 그렇듯이 편식처럼 위험한 것은 없으며, 특히 세상을 폭넓게 보아야 하는 청소년에게 균형 잃은 지식을 傳授(전수)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일찍이 베이컨(Francis Bacon)이 ‘동굴의 우상(idola specus)’이라는 말로 표현한 바가 있습니다. 동굴 속에 사는 사람은 동굴의 입구가 늘 동쪽인 줄로 알고 삽니다. 그러나 동굴의 입구는 동쪽이 아니라 남쪽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동양에서는 管見(관견) 또는 ‘대롱’ 視角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대체로 150도의 視野를 가지고 있지만, 대롱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은 그 대롱의 구멍만큼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독일의 역사학자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는 이들을 가리켜 ‘terribles simplicarteurs’, 즉 ‘세상을 자기만의 잣대로 보려는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저는 우선 일반적으로 한국의 좌파적 교과서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지나치게 편중된 이런 시각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다음 문제를 풀어 가고자 합니다. ●강 : 최문형 선생님께 묻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서양사를 전공하시다가 나중에 한국과 동양 근대사를 공부하시는, 즉 서양사와 한국사, 동양사를 넘나드는 학문적 세계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 문제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최 : 우선 申 선생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리고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한국사 교과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근․현대사 교과서가 따로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 선생님 말씀대로 편중된 역사인식을 심어 주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밖에 안 됩니다. 근․현대사 교과서를 읽어 보면 이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民衆抗爭史 같은 생각이 듭니다. 민중항쟁사면 어떠냐고 교사들이 이야기한다는데, 민중항쟁사를 썼다는 것이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중항쟁사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반드시 써야 할 다른 중요한 부분을 쓰지 않았다는 데 바로 문제가 있다는 이야깁니다. 예를 들면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운명을 결정한 ‘결정적 사건’이 바로 淸日戰爭과 露日戰爭입니다. 그런데 이 두 전쟁에 대해서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이라는 단어 하나 집어넣은 것이 전부입니다. 마치 이 전쟁이 우리와는 관계가 없었다는 식입니다. 이건 말이 안 돼요. 이런 폐쇄적 시각을 가지고 역사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우리나라 대학에서 사학과를 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갈라놓은 것 자체가 문제라고 봅니다. 이런 사례는 일본의 도쿄대학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더구나 서울대 국사학과의 커리큘럼만 보더라도 對外關係史는 한 과목밖에 없어요. 물론 다른 과의 역사학 강의를 수강케 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하기가 사실상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 대학의 현실 아닙니까? 따라서 지난 역사학 대회에서 나는 이제라도 이런 세분화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폐쇄적이고 고립된 학문을 가지고는 일본과의 懸案인 독도 문제도 閔 皇后(민황후)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물론 중국과의 間島 문제에도 대처하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요즘은 한자도 안 가르치니, 길은 더욱 막막합니다. 이런 중대 문제는 度外視하고, 덮어 놓고 민중항쟁사에만 치중하게 되면 결국 국익을 돌보지 못하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민중항쟁사가 전부일 수 없습니다. 금성사는 근대사 전부를 65쪽에 걸쳐 다루었는데, 東學革命에만 무려 9쪽 이상을 할당했습니다. 따라서 러일전쟁에 대한 기술은 “대한제국의 개혁은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를 거두며 좌절되었다”는 것뿐입니다. 러일전쟁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개혁을 설명하며 ‘러일전쟁’이라는 단어 하나를 집어넣은 것이지요. 청일전쟁도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했습니다. 심지어 安重根 의사의 의거에 대한 설명이 3줄, 헤이그 密使 事件(밀사사건), 閔 皇后 弑害(시해)에 대한 설명은 1줄도 안 됩니다. 獨島 문제도 소홀하기는 마찬가집니다. 역사 기술의 이 같은 혹심한 불균형이 바로 문제라는 이야깁니다. 이 불균형의 是正을 위해서라도 근․현대사 교과서는 한국사 교과서에 統合, 다시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 : 제가 알아보니까, 각종 운동사가 교과서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고, 기술의 중심도 그 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특히 금성출판사의 것은 한국근․현대통일운동사라고 이름을 바꿔도 될 정도입니다. 안병직 선생님은 우리의 근․현대사 교과서가 북한의 『朝鮮近代革命運動史』와 기본적으로 같은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하십니다. 그 문제는 다시 논의하도록 하고, 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국제관계에 대한 완전한 무시의 문제도 국제관계를 다룰 때 다시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행 교과서 특히 금성사교과서에서 나타난 구체적인 誤謬(오류)와 歪曲(왜곡)의 사례를 말씀해 주십시오. 먼저 柳 선생님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동학농민운동 서술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덧붙일 얘기가 있습니다. 2002년판 근․현대사 교과서 거의 모두가 동학농민운동을 ‘반봉건반외세’ 운동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운동이 ‘반외세’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학군의 제2차 蜂起(봉기)는 한국을 침략한 일본군을 驅逐(구축)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금성사교과서에서처럼 동학농민운동을 ‘농민전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그렇게 하면 동학농민운동 전체가 일종의 계급전쟁이었다는 오해를 자아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를 의병운동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全琫準 자신이 자기가 거느린 농민군을 ‘義旅(의려)’, 즉 의병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에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학농민운동을 ‘갑오농민전쟁’이라고 불러 왔는데 그것은 K. 마르크스의 친구인 F. 엥겔스가 1524년에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 1490~1525)가 일으킨 독일의 農民亂을 계급전쟁이라는 의미에서 ‘농민전쟁(Bauernkrieg: peasant war)’이라고 부른 데 緣由합니다. 그런데 동학농민운동의 경우 앞에서 지적한 대로 「12개조 폐정개혁안」이 虛構이기 때문에 계급전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농민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저는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기본 목적은 조선의 봉건체제를 革罷(혁파)하는 것이 아니라 興宣大院君(흥성대원군)을 받들어 閔氏戚族政權(민씨척족정권)을 타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말하자면 동학농민운동은 진보적인 운동이 아니라 보수적인 운동이라는 얘기입니다. 저의 주장은 국내외 역사학자들 간에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제 학설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하더라고 그러한 이설이 있다는 점을 주를 통해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李承晩과 대한민국 건국에 관련된 서술의 오류를 지적하겠습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며 초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가장 크게 부각시켜야 할 인물입니다. 모름지기 근․현대사 교과서의 목적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데 두어야 하며, 따라서 대한민국의 樹立經緯(수립경위)와 그 발전을 서술하는 데 치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금성사교과서의 경우 대한민국 건국에 관한 서술의 분량은 1쪽도 안 됩니다. 3분의 1쪽 정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정면사진 하나도 싣지 않고 있습니다. 이승만이 펼친 독립운동에 관해서는 一言半句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이승만(1875~1965) 이라는 이름을 배제학당 졸업생 중 한사람으로 처음 거명하면서 그의 이름을 周時經(1876~1914)과 池靑天(1888~1959) 다음에 소개했습니다. 이러한 서열 매김은 역사적 중요도로 보나 연령으로 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라면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를 설명해야만 학생들이 그가 초대 대통령이 된 이유를 이해할 터인데, 그의 경력에 대한 서술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의 활동에 관한 서술은 전부 否定的인 것입니다. 예컨대, 그가 단독정부론을 선창했다는 것, 친일파를 제대로 숙청하지 않았다는 것, 부정선거를 했다는 것 등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反역사적인 독재자로 낙인찍고 있는 것입니다. 금성사교과서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이룩한 업적 가운데 하나인 農地改革을 교과서 후반부의 경제사 부분에서 다루고 있는데, 거기서 이 대통령이 농지개혁을 실현했다는 얘기는 빼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한의 농지개혁은 북한의 土地改革에 비해 잘못된 것으로 서술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사실과 어긋나는 서술입니다. 남한의 소작농은 농지개혁을 통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얻은 반면 북한 농민들은 耕作權만 얻었기 때문에 남한의 농지개혁이 소작농들에게 훨씬 더 유리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통령은 失政을 많이 했지만 농지개혁 이외에도 이룩한 업적이 많습니다. 예컨대 6․25전쟁 종결 시에 미국과 相互防衛條約을 체결한 것, ‘70만’ 대군을 양성한 것, ‘敎育奇蹟(기적)’을 일군 것, 남녀평등을 실현한 것, 기독교를 보급한 것 등은 역사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업적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은 완전히 捨象(사상)하고 그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浮刻(부각)시킴으로써 이승만대통령像을 왜곡시켰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과서 집필자들이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올바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장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건국 후 최고 집권자들의 업적을 평가함에 있어 반드시 그들의 功과 過를 아울러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과서를 읽는 학생들은 남한의 지도자들은 거의 다 腐敗․無能했고 북한의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그릇된 역사인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강 : 저희 세대는 『解放前後史의 認識』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학창시절 저 자신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惡의 化身이고, 그 이후 우리 역사가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갔다는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복룡 선생님께서 “나는 스스로 좌파적 성향의 학자라고 본다. 하지만 문제는 좌냐 우냐의 문제가 아니다. 팩트(fact)가 제대로 기술되어 있느냐, 그리고 수준이 높으냐 낮으냐에 있는 것이다. 현재의 교과서는 수준이 낮고 팩트 기술에도 큰 문제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오류는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신 : 역사를 기술하면서 팩트의 정확성을 기하려는 노력은 아마도 카(E. H. Carr)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역사가가 사실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칭찬 받을 美德이 아니라 신성한 의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사실은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가는 정직하고 냉정해야 합니다. 금성사교과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 번째로 한국 현대사의 사실 문제 중에서 가장 엄중한 것은 북한정권이 더 정의로웠는가, 더 정당했는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오래고 암울했던 우익시대에 대한 反射行爲로서 한국의 사학계가 한때 좌파로 기울게 된 소위 수정주의에 대해 일말의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분의 기술에서는 참으로 냉정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法統의 논쟁으로 과연 남북의 법통을 따져야 하는 문제인지도 불분명하고, 또 따졌을 경우 북한정권이 남한정권에 비해서 더 정의롭고 정당하다고 판정하는 데는 상당히 조심스러웠어야 하고 신중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해방정국에서의 법통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呂運亨을 법통으로 본다는 데에는 상당히 위험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 번을 양보해서 ‘重京臨時政府(중경임시정부)도 여러 임시정부의 하나일 뿐’이라고 이야기했던 여운영의 논리를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북한정권이 정통일 수도 없고, 여운형이 정통일 수도 있으나 그도 결국 여러 세력이나 정치인사 가운데 하나(one of them)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정통논쟁이 결국 한국전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로 飛火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아주 정확하게 한국전쟁은 통일과업의 開始였다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 문제가 백 번을 양보해서 內戰이었을 수는 있어도, 이것을 통일과업으로 선전할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한국 역사학자들이 좀 더 신중하고 正直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 금성출판사의 책을 보면서 한 가지 당황했던 부분은 韓國史라고 하면서 북한사를 하나의 장으로 넣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다’, 따라서 북한도 우리의 역사라고 한다면 좌우를 공히 역사에 포함을 시키든가 그것이 아니었다면 남한만의 역사를 대한민국사로 쓰던가, 둘 중 하나였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라는 명분 아래 달랑 하니 한 장으로 북한사를 기술하려고 했던 것은 상당히 생뚱맞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남북한을 초월하는 統合史로서의 민족사를 쓰는 문제는 통일 이후의 시대에나 가능한 것이지 지금 이 시점에서 남한의 한국사, 남한을 정통으로 보는 한국사에서 북한사를 한 장으로 집어넣는 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지적할 문제는 명성황후의 乙未事變에 대한 기술문제입니다. 금성출판사에서 金科玉條처럼 내세우고 있는 역사적 논거는 당시 德壽宮을 짓기 위해서 왔던 러시아 기사 ‘사바친’의 手記입니다. 그런데 사바친의 수기가 이 책에서는 歪曲되어 있습니다. 사바친은 분명하게 그날 새벽 6시에 자기는 목숨이 위태로워 현장을 이탈한 것으로 원본 수기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성황후 사건은 새벽 6시 자기가 궁을 떠난 이후에 전개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인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금성출판사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는 사바친이 직접 목격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로서 무책임한 捏造(날조)입니다. 사료 인용에서 엄청난 瑕疵(하자)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학문적 양식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밖에도 교과서에서 우선 시정해야 할 문제가 생각납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문제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壬午軍亂, 甲申政變을 오로지 일본과의 관계만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임오군란의 결과로 濟物浦條約(제물포조약)이, 갑신정변의 결과로 漢城條約(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교과서가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영국은 그 혼란을 틈타 이미 한국과 체결한 한영수호조약의 認准(인준)을 거부하고 韓英新條約을 강압했습니다. 이는 관세율을 거의 절반 수준으로 깎은 것입니다. 여기에 독일이 동참했고 이것은 이후 ‘最惠國待遇條款(최혜국대우조관)’에 따라 우리 나라와 수교를 이미 맺었거나 맺게 될 모든 나라에 적용됨으로써 우리의 재정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결정적 게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갑신정변 이후 청국의 속박이 더 심해지자 ‘韓露密約說(한러밀약설)’이 나돌 정도로 우리는 러시아에 더 접근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이른바 ‘朝鮮策略的 外交路線’의 전면 수정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은 일본과의 관계만으로 끝난 사건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은 이미 영러 대결시대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서 한일관계도 청일관계도 형성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일본과의 관계만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일본의 침략 과정도 제대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는 것도 눈에 띕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현재 선진국진입단계에 있으며, 우리 역사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왔는데, 과거를 否定 一邊倒로 매도해 버리면, 우리의 正體性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발전적 측면에서 서술되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해방 이후의 서술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구분해서 평가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이 책이 북한에 대한 온정적인 서술이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에 대해 총 10쪽을 할당하고 있는데, 그중 269쪽에는 분단과 통일에 대한 남북한의 입장을 소개한 부분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金日成의 新年辭와 이승만의 기자회견이 나와 있는데, 김일성은 ‘자주독립국가를 이루자’, 이승만은 ‘남북분열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고 서술함으로써 남한이 보다 호전적이고 6․25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뒤 273쪽에 보면 6․25의 폐해가 도표로 나와 있는데, 남한은 가늘게, 북한은 길고 굵게 표시하여 북한의 피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6․25 배경 설명에서도 당시 남북한의 혼란과 충돌을 강조하여 북한과 남한 쌍방 책임이 있는 것처럼 되어 있고, 6․25가 분명히 남침인데도 침략이 아닌 북한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북한의 정치․경제․문화에 대한 온정적 서술로 북한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으며, 심지어는 북한의 弘報資料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왜곡이 심합니다. ●강 : 해방 이후의 서술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서술이 否定的이고 비체계적이다. 건국과 그 이후의 발전 과정도 부정적인 면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서술에 많은 誤謬가 나타나고 있다. 또 하나가 자료의 문제인데, 금성사교과서에서 자료가 차지하는 분량이 무려 3분의 1인데 자료가 많은 것은 좋지만, 자료 중에는 특정 개인의 역사적 견해를 그대로 인용한 특히 왜곡된 견해를 인용한 것이 많다. 대략 이렇게 논의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구체적인 오류를 짚어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현행 교과서에서 집필자들의 고의 또는 무지로 인해 다뤄지지 않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국제관계에 대한 서술이 너무나 짧고 부정확합니다. 또 하나 지적하면 대한민국사에서 건국을 빼고는 60년대 이후의 경제발전이 상당히 중요한 사항입니다. 성균관대 金一榮 교수는 최근 『건국과 부국』이라는 책에서 나라를 세우고 富强하게 하는 두 중요한 과정에 대한 논의를 深化시켰습니다. 그런데 교과서에는 이런 중요한 사항도 부정적으로 기술되어 있거나, 아주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관계 문제로 다시 돌아와서 말씀드리자면, 한국 근․현대사가 운동사 중심으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물론 운동사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모든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植民地라 할지라도 현지주민의 생활은 그 시대의 정치경제에 의하여 규정되기 마련입니다. 그 주민들 중에는 운동을 專業으로 하는 자도 있고 때로는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겠습니다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소수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수인의 활동이 다수 민중의 생활을 기본적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운동사를 가지고 一般史를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운동사를 강조하다 보니까 생기는 것이 바로 아주 중요한 조건인 국제관계를 경시하는 경향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의 근대는 좋건 싫건 간에 국제관계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었는데도, 이런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를 缺如한 것이 運動史萬能主義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최문형 선생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최 :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서울대학 국사학과 커리큘럼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습니다. 우리 역사를 너무나 폐쇄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근․현대사 교과서도 일부러 안 쓴 것도 있지만, 몰라서 못 쓴 것도 많을 것입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교과서 집필자들이 반론을 제기하겠지만, 對話의 場을 넓혀 서로 폭넓게 대화해야 합니다. 기가 찬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한국사교재의 年代를 보세요, 연대는 있지만 날짜는 없습니다. 어떤 책이든 보세요, 연대는 있습니다. 그러나 月日까지 정확하게 쓴 국사 책은 찾아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교과서의 경우 한영수호조약과 한영신조약도 구분 못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혼동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한영신조약을 한영수호조약으로 표현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집필자도 사실 관계조차 모르고 썼다는 것이 文脈에서 읽혀집니다. 한영신조약과 한영조약, 한독수호조약과 한독신조약은 그 연대가 다를 뿐만 아니라 내용도 天壤之差입니다. 신조약의 폐해가 얼마나 컸는가를 언급한 교과서가 전혀 없다는 이야깁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기막힌 예가 또 하나 있습니다. 개국도 마치 우리의 自由意志로 결정한 것처럼 기술한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개국은 분명히 일본의 강압에 屈伏한 결과였습니다. ‘雲揚號(운양호)’라는 군함을 끌고 와서 威壓(위압)을 가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일본은 과연 어떤 세계전략을 구사했던 것일까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아무 준비 없이 운양호 사건을 도발한 것이 아닙니다. 도발하기에 앞서 먼저 치밀한 전략을 구사했던 것입니다. 伊犁(이리)紛爭을 계기로 청국이 한국 문제에 관여할 여유가 없는 틈을 이용했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영국의 세계전략에 편승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러시아와는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楊)라는 러시아통 외교관을 내세워 1875년 이른바 ‘사하린·쿠릴열도 교환조약’을 맺음으로써 러시아로부터도 자기들의 한국 침략을 따로 승인받았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묵인 하에 한국 침략에 나섰던 것입니다. 있을 수 있는 모든 경우에 대한 대비책을 갖춘 뒤에 비로소 침략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일본이 1875년 9월 19일 사하린의 楠溪(남계)에서 사하린 섬의 讓與式(양여식)을 거행하고 바로 이튿날인 9월 20일 운양호 사건을 도발했던 사실이 이를 말해 줍니다. 이런 일본을 당시의 한국 정부가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실을 공부해야 할 오늘날의 우리가 아직 이것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국주의의 邪惡(사악)함을 말하면서도 그 침략 행태에 대해서는 올바로 이해하려 들지 않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이런 역사 교육으로는 안 됩니다. 한 가지 더 부가하겠습니다. 1905년 乙巳條約으로 우리의 외교권이 빼앗긴 사실은 주지하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 병합에 5년이나 걸린 것은 우리의 민중운동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일본 학자들은 1905년 이후 한국 병합은 ‘시간문제’, ‘기정사실’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민중운동이 정녕 병합을 5년이나 늦추게 했을까요? 물론 다소 기여는 했겠지만, 이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청국과 러시아를 차례로 무찌른 일본이 우리의 소수 민중운동 때문에 병합에 5년이 걸렸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여기에는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의 對日復讐心(대일복수심)이 작용했고, 일본의 滿洲門戶開放約束違約(만주문호개방약속위약)으로 미국의 대일 압력이 작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 : 당시에는 우리 역사라고 해도 우리 맘대로 이루어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째로 무시하고 마치 우리 의지대로 모든 것이 결정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희망사항이지요.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기를 잡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駐韓公使로 와서 朴泳孝를 內務大臣으로 임명하고 우리나라 각료들을 맘대로 떼었다 붙였다 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신 선생님 말씀대로 정말 냉철하게 봐야 되는데···. ●유 : 국제관계에 관한 서술이 빈약한 것은 고의와 무지, 이 두 가지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고 봅니다. 19세기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 하나 빠져 있는데, 그것은 임오군란(1882)부터 동학농민운동(1894)까지의 淸의 對朝鮮政策입니다. 그 당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얼마나 고압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폈는지에 대해서 일언반구의 서술도 없습니다. 12년간의 중요한 역사를 공백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이것은 6종의 교과서 모두에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교과서 집필자들이 그 시기의 역사에 관해 무지 내지 무관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과서 집필자들은 근․현대 대외관계를 다룸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일관계와 한미관계에 치중하면서 반일 및 반미감정을 조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반일 테마는 해방 후 모든 역사 교과서에 나타난 요소니까 별로 신기하지 않지만 반미 테마는 2002년판 교과서들에서 처음으로 강조되고 있는 새로운 요소입니다. 금성사교과서는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71년 辛未洋擾(신미양요), 그리고 1905년의 카츠라-태프트 密約 등을 조명하면서 미국이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 가운데 가장 악독한 국가였다는 이미지를 심고 있습니다. 심지어 독일인 E. 오페르트(Oppert)의 南延君墓盜掘未遂事件(남연국묘도굴미수사건)을 미국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오류입니다. 우리는 역사 교과서에서 미국에 대해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본 이외에 열강 중 미국만이 유독 한국에 대해 침략적이었던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다음 세대 우리나라 주인공들에게 역사를 잘못 가르치는 것이 됩니다. 저는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19세기에 우리나라에 접근했던 제국주의 열강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제국주의 정책을 추구했다고 봅니다. 국력과 입장의 차이에 따라 우리나라에 끼친 임팩트가 조금씩 달랐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에게 외세의 침략 근성을 공정하고 정확하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교과서에서 1882년부터 1894년까지 청의 대조선정책을 반드시 다루었어야 합니다. 그 당시 청은 조선에 대해 일본이나 미국보다 더 노골적으로 침략정책을 폈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중국이 북한을 중국의 一介 省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소문이 떠돌지만 사실 1880년대에 청은 조선을 청국의 일개 성으로 만들 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北洋大臣 리훙장(李鴻章)의 후원으로 ‘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직함으로 서울에 와서 9년 동안(1885~1894) ‘君臨’할 때 조선은 중국의 보호국 내지 반식민지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차세대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꼭 알아야 되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에 덧붙여 俄館播遷(아관파천)(1896) 이후 제정러시아 정부가 A. 스페에르(de Speyer) 공사를 앞세워 추진했던 대한침략정책도 교과서에서 반드시 다루어져야 합니다. 해방 이후 남한의 역사, 즉 현대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한미관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2002년판 근․현대사 교과서들에는 이에 대한 기술이 극히 적습니다. 예컨대 금성사교과서를 살펴보면 해방 후 3년간의 미군정에 대해서는 거의 한 마디도 논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6․25전쟁 기간과 그 이후에 한미관계가 어떻게 진전되었는지, 특히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계기로 한미간의 군사․경제협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 조약이 대한민국의 경제 및 문화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등에 대해 아무런 서술이 없습니다. 이 점은 북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방 후 김일성 정권이 탄생되는 과정에서 소련이 북한에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서술해야만 합니다. 이 같은 중요한 대목들이 현행 교과서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집필자들의 무지 내지 고의적 태만 때문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주제에 대한 기초적 연구가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 북한사학의 민중주의적 및 혁명투쟁사적 논조가 한국의 좌파에 흘러들어온 개황과 그렇게 해서 빚어진 결과가 어떠한 것인가, 그런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아픔이 너무 절절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현대사의 기술에 나타나고 있는 혁명운동사적 성격이나 민중주의적 비분강개를 전면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맥락으로 본다면, 그와 같은 비분강개의 역사는 韋庵 張志淵의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白巖 朴殷植의 『韓國痛史』, 『韓國獨立運動之血史』, 그리고 丹齋 申采浩의 『乙支文德傳』, 『이순신전』, 『東國巨傑(동국거걸) 崔都統傳(최도통전)』 등의 영웅주의 傳記文學(전기문학) 등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게 말해서는 민족주의 사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글은 國難期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끼리 읽을 때는 그런 대로 양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글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망국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기보다는 남을 규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둘째, 마르크스주의적 투쟁의 논리에 접한 사실이 없으면서도 역사를 我와 非我의 鬪爭으로 보고 있습니다. 셋째, 이와 같은 현상의 연속선상에서 역사를 英雄 中心主義에 입각해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망국의 원인과 책임을 묻지 않는 일제시대사는 결과적으로 두 가지의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 한국의 일제시대사 연구는 일본의 殘虐狀(잔학상)을 강조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당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서 현행 고교국사교과서(『국사(下)』, 교육부 1997)의 132-133쪽을 읽어 보면 어디에도 자신의 과오에 대한 悔悟(회오)가 보이지 않으며, ‘일방적으로’, ‘무자비하게’, ‘강제적으로’, ‘동의 없이’, ‘무력으로’ 등의 어휘만이 보입니다. 이 지구상의 어느 식민지병합이 ‘합의에 의해서, 자비롭고 인도주의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식민지주의를 비난하는 논지는 ‘탓의 역사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탓의 역사학으로부터의 해방이 곧 우리의 역사를 성숙하게 만드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망국의 책임을 묻지 않는 역사학에서 나타나는 두 번째 현상은 光復이 자신의 역량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미화하고 誇張(과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예로서 『국사(下)』130쪽을 보면, “국내에서는 강력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민족 문화를 보존·수호하는 한편, 민족의 역량을 배양하기 위해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했다. 이와 같은 항일 독립 운동은 1945년까지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일제로부터 광복을 쟁취할 수 있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 의하면, 한국의 독립은 자력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허구이며 사실이 아닙니다. 한 민족이 멸망하면서 한국처럼 무기력했고, 침묵했던 민족이 흔치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일제시대라고 하는 국치의 시절에 우리의 역사가 울분을 토로하는 식의 역사였던 점에서 본다면, 당시의 역사가 영웅중심주의로 흐른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런 식의 역사는 청산되어야 한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재고되어야 할 숙제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것은 역사의 한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뿐이지 더 이상 이 시대의 삶의 규범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 : 아이들을 지도하다 보면 선생님들이 아쉬움을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교과서가 운동사 중심으로 서술이 되다 보니 그럴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배경 기술이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당시의 정치상황과 국제관계 등이 될 것입니다. 주로 투쟁사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런 점이 부족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근대사에서 꼭 필요한 사건 내용에 대해 지나치게 짤막하게 한두 줄 서술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경우, 요즘 아이들은 거의 그 의미를 모릅니다. 아이들이 질문해도 젊은 선생님들도 잘 모릅니다.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많은 편인데 ‘우리 왕비가 도대체 왜 죽었습니까?’ 하고 묻는 아이들이 많은데, 그 구체적인 정황과 과정은 아직도 분명하지 않거든요. 뮤지컬, 책, 드라마 마다 모두 내용이 다릅니다. ‘우리의 왕비가 죽었는데 그때 우리나라 군대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하고 궁금해 하는데, 그런 것에 대해 교과서도 전혀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궁금해 하는데, 연구가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間島慘變(간도참변)이나 關東大震災(관동대진재)에 대해서도 두세 줄 언급되어 있을 뿐 그렇게 수천 명씩 죽었는데 그런 역사에 대해서 안 다루어 줍니다. 한두 단어만 나오고……. 독도나 간도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선생님들도 잘 모릅니다. 언론에 나오는 정도나 좀 듣고 그럽니다. 아이들은 ‘대마도는 예전에 우리 땅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등을 묻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현대사 전공자들이 객관적으로 연구해 서술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강 : 일선의 생생한 소리를 저희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머리에 떠오른 생각인데,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가 굉장히 얇습니다. 얇은 이유 중 하나가 參考書市場과의 관계가 아닐까요? 책이 얇으니 대신에 참고서시장이 굉장히 활성화돼 있다 합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역사 교과서가 굉장히 자세하고 두껍더라구요. 교과서가 굉장히 두꺼워서 참고서 없이도 역사 공부가 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앞으로 역사 교과서도 참고서가 필요 없는 상세한 교과서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최 : 근․현대사 교과서는 없애고 역사 교과서로 통합해 크게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서는 그 다음 이야기입니다. 교과서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데, 참고서가 무엇을 위해 필요합니까? 아직 학문적으로 精製도 되지 않은 사실을 아이들에게 달달 외우게 하자는 것밖에 안 됩니다. 교과서가 제대로 된 이후 아이들에게 읽을거리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다음으로 內在的 發展論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 될 것 같아요. 제국주의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가 근대국가로 아주 훌륭하게 성장발전할 수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신 : 기술상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면, 지금의 교과서는 아주 테크니컬한 문제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입시 위주로 암기하기 좋도록 要點中心(요점중심), 單答形中心(단답형중심)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문장을 이끌어 가는 둔중한 힘이 없습니다. 어떻게 요약해서 기억하기 좋게 할까? 입시 준비하기에 좋을까? 그런 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교과서의 일반적인 陷穽(함정)이자 어려움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논리가 없습니다. 문장을 이끌어 가는 힘이 없습니다. ●강 : 가장 중요한 문제를 체크해야 될 것 같습니다. 현행 교과서가 그렇게 된 근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해방 후 국내 역사학계 또는 정부가 근․현대사 연구를 등한시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역사학을 공부하던 때에는 한일합방이나 일제시대 이후의 주제를 택하는 것이 금기시되었습니다. 서양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1945년 이후를 연구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역사의 영역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근․현대사 연구가 축적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저차원의 민족주의와 修正主義의 결합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신복룡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가 민족주의 사관을 갖는 것은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민족주의가 강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상당히 민족주의적인 교육을 강화시킨 일이 있습니다. 제가 민족주의 교육을 제대로 맛보고 자란 세대인데, 우린 아주 위대한 민족이라는 自矜心(자긍심)을 갖게 하는 교육이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지금 와서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수정주의의 영향이라고 생각됩니다. 너무 관변론리와 반공주의가 강하다 보니까 거기에 대한 반발로 수정주의가 나와서 어느 정도 우리 역사학 발전에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너무 심하게 나가다 보니까 반대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민주화 시대에 저차원의 민족주의와 저차원의 수정주의가 奇妙(기묘)한 결합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안병직 교수님은 비슷한 취지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문제를 내재적 발전론과 分斷史學論으로 규정합니다. 잠깐 그것을 간략하게 말씀드리려 합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주류는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侵略과 抵抗’을 그 기본 체계로 하고 있습니다. 이 체계는, 제국주의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자생적 근대화의 기반을 토대로 스스로 자본주의화할 수 있다는 가설 위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가설 하위에서는 발전의 기동력은 내부로부터 나오므로, 국제관계는 기본적으로 침략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따라서 일차적인 민족적 과제는 침략에 대한 저항, 즉 독립운동으로밖에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조선후기에 자생적인 근대화의 계기가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로 될 수 있는 것이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와 일제시대의 民族資本論 등일 것입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뿐만 아니고 19세기의 후발 자본주의국이었던 독일, 이탈리아 및 일본에서조차 경제발전은 내재적 발전에 한정되지 않고 해외로부터 들어온 근대적 발전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더구나 20세기의 60년대부터 경제발전을 본격적으로 경험하는 한국과 같은 NICs에서는, 근대화가 기본적으로는 선진국에의 캐치∙업 과정이므로 내재적 발전은 지극히 미약하고 근대적 발전이 압도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침략과 저항’의 체계만으로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고 ‘開發과 協力’의 측면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대한민국사는 대한민국의 성립이나 60년대 이후의 경제발전이 외부와의 협력 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민족사로서 정통성이 확보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사는 청산되어야 할 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불완전하다. 따라서 한국 근․현대사는 統一革命을 통해 친미․친일적 성격을 청산하고 통일을 이루어야 비로소 자기완결을 이룬다’는 통일지상주의적 분단사학론이 근․현대사 교과서가 운동사로 기술되는 이론적 근거라는 것입니다. 현행 교과서가 문제가 많은 근본원인에 대한 선생님들의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유 : 저는 근․현대사 교과서가 세상에 나온 것이 時期尙早라고 생각합니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학계는 여러 면에서 刮目할 만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지만 근․현대사 분야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학계에서 근․현대사에 관한 연구가 너무나 부진했기 때문에 아직은 차세대 지도자들의 知的 好奇心을 충족시킬 만한 이상적 교과서가 나올 단계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조금 전에 최문형 교수께서 지적하신 대로 현재 우리나라 대학에는 근․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고 배울 커리큘럼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근․현대사를 가르칠 敎授人力, 연구시설 및 역사자료 등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뜻 있는 학생들이 근․현대사를 전공하고 싶어도 대학 4년 동안에 근․현대사 연구에 필요한 학문적 트레이닝―특히 어학 트레이닝―을 제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학의 역사학과를 졸업해도 한중관계, 한미관계, 한러관계 등 고도의 어학 능력과 전문 지식이 요구되는 분야의 논문을 쓸 수 없습니다. 사정이 그러니까 독립운동사, 민중운동사 등 이미 연구가 많이 진척된 분야에 관한 논문은 계속 늘고 있는 반면 외교사, 경제사, 군사사, 법제사, 교육사, 과학․기술사 등 새로 개척해야 될 분야의 논문은 별로 산출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해방 이후의 현대사 연구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남한의 현대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려면 연구자가 방대한 분량의 미국 측 자료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국내에는 그러한 능력을 啓發시켜 주는 사학과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현대사를 전공하려는 학생들은 미국이나 일본으로 유학을 합니다. 한국 역사를 외국에서 배우는 奇現象이 벌어진 것이지요. 지난날 우리 스스로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소홀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지성인들은 한국 현대사에 관하여 외국인 학자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대주의적’ 경향이 있습니다. 그 두드러진 예가 미국 시카고 대학의 역사학 교수 B. 커밍스(Cumings)의 한국 현대사론―특히 해방전후사론―에 대한 受容態度입니다. 미국 외교사학계 일각에서 개발된 修正主義(revisionism) 사관에 입각하여 쓰여진 커밍스의 名著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은 1981년에 출판되자 곧 우리말로 번역되어 한국 현대사에 관심있는 역사학도들에게 旋風的인 인기를 모았습니다. 저는 외국인 학자의 한국사 관련 저술 가운데 한국 지식인들에게 이 책만큼 심대한 영향을 끼친 책은 보기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요사이 구설수에 오른 『해방전후사의 인식』도 커밍스의 영향을 받은 소장 학자들의 논문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성사근․현대사 교과서도 커밍스의 친북반미적 視角에 따라 집필된 교과서라고 생각합니다. 안병직 교수님께서는 금성사교과서가 북한의 『조선근대혁명운동사』를 벤치 마킹한 것이라고 판단하셨지만, 저는 그것이 커밍스의 학설을 따른 교과서라고 봅니다. 문제는 커밍스의 저서가 한국 현대사 교과서 집필의 표준이 될 만큼 믿을 만한, 흠이 없는 역사서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1989년 동서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이 붕괴한 다음 소련 측의 냉전 및 6․25전쟁 관련 사료들이 공개되면서 냉전의 책임이 미국 측에 있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이 무색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전쟁’에 관련된 커밍스의 주장들이 흔들렸습니다. 말하자면 커밍스의 저술에 허점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커밍스의 저술을 우리나라 현대사 교과서의 집필 표준 내지 주요 참고자료로 삼는 것은 학문적으로 지극히 위험하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이상적인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우리나라 학자들이 한국적 시각에서 한국 현대사를 개척․연구하여 체계를 수립한 다음 제작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최근 국내의 일부 역사학자와 정치․경제․사회학 분야 학자들 간에 탈수정주의(post-revisionism) 입장에서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우리나라 현대사가 대한민국의 주체적 입장에서 재정립되어 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저는 이러한 추세가 지속․심화되면 머지않아 이상적인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의 제작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왜곡된 사관과 불실한 연구에 바탕하여 쓰여진 역사 교과서를 가지고 후세를 교육한다는 것은 일종의 犯罪行爲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학계에서 근․현대사 관련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히 교과서를 만드는 것은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 : 저는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 한 번쯤 누군가 이야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서는 저도 사실은 조심스럽습니다. 이 자리에 오신 분들과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또 이런 식의 입장이 한국사학계에서 보편적인 논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기왕에 안병직 선생님이 資本主義 萌芽論이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오셨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어느 나라인들 스스로의 역량에 의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없을까 만은, 개화기나 일제시대사를 설명하면서, 설령 일제가 아니었더라도 自生的 近代化가 이뤄졌으리라는 논리는 羞恥(수치)를 모르는 역사이며, 이들의 글은 망국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침략자들을 비난하는 동안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기보다는 일본을 규탄하고 탓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온당치 않았습니다. 이런 식의 역사학은 사실의 정확한 이해보다는 침략자에 대한 비난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허물을 省察하는 데 냉정하지 못했습니다. 植民地 近代化論을 부정하는 논자들은 다음과 같은 반론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야 합니다. 즉, ‘한국이 일제로부터 받은 긍정적 유산이 없다면 해방과 더불어 한국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자본주의적 유산을 모두 버렸는가?’ 그것은 수탈이 목적이었는가 愛他的 施惠(애타적 시혜)였는가와는 별개 문제입니다. 일본의 産業과 技術이 한국에 도움을 준 바가 없다면 ‘해방정국에서 일본일기술자의 撤收가 왜 그토록 한국 경제에 타격을 주었는가’를 대답해야 합니다. 일본이 만주를 침탈하는 과정에서 한국을 산업화(또는 공업화)했다는 兵站基地論(병참기지론)은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병참화 과정에서 남긴 과실들이 결과적으로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한 부분은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도로·교통과 우편·통신, 중화학, 그리고 産米增殖計劃과 같이 식량 증산을 위한 영농의 개선이 아무리 수탈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후대에 아무런 긍정적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본에 의한 산업화를 인정하는 것이 괴롭게 느껴진 논자들은 한 걸음 물러서서 일본에 의해 병합되지 않았더라도 그 정도의 자본주의의 발전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으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담은 논거가 약한 가설일 뿐입니다. 설령 합병이 되지 않았고 그 기간 동안에 자생적 발전이 있었으리라는 논리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식민지기의 근대화를 부인하는 논거로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또 일제 치하에서의 산업화가 우리 스스로의 역량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주장도 의미 없습니다. 국가도 없는 식민지 지배 체제 하의 민족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역사를 추진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가요? 罪狀이 功績을 묻을 수 없습니다. 罪惡과 美德은 공존할 수도 있고 양립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 : 제가 이 자리에 참석하면서 가장 困惑(곤혹)스럽게 느끼고 있는 것은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교수님들의 관점입니다. 교수님들의 비판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선 그동안 교과서에 실린 대로 내재적 발전론을 가르쳐 왔습니다. 역사학계에서도 내재적 발전론은 최근 수년간 관련 연구자들에 의해 우리 근대화를 설명하는 주요 변수로 강조되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역사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우리 민족의 잠재력을 강조하는 내재적 발전론을 중요하게 다루어 왔습니다. 사실 내재적 발전론은 민족주체성이라는 측면에서 굉장한 설득력을 갖고 있으며, 많은 역사 교사들이 거기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 20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10위권의 국력을 유지하는 것도 근대화에서 시련을 딛고 일어선 민족의 저력 때문이었다는 신념이지요. 저도 조선 후기를 전공하면서 다른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내재적 발전론을 首肯하여 왔습니다. 오늘 선생님들의 말씀을 듣고, 다시 한 번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내재적 발전의 옳고 그름보다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했을 때의 波及影響입니다. 신중한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역작용이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80년대 재야사가와 정통사가들이 대립했을 때도 여론은 정통사가들을 크게 비판했습니다. 지금 느닷없이 ‘내재적 발전론은 사실이 아니며, 국제사회의 힘과 영향에 의해 우리가 독립을 성취한 것’ 이라고 한다면 참으로 難堪(난감)한 상황이 예상됩니다. 물론 우리 민족의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을 얻었다는 생각은 是正되어야겠지만, 우리의 근대화를 내재적 발전과 국제관계의 병행이 아닌 국제사회의 受惠的 측면으로 본다면, 공감을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학문적 논란과 상관없이 내재적 발전론은 이미 현장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유 : 저 역시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 신복룡 교수님과 같은 고민을 해 왔습니다. 저는 19세기 후반의 역사를 깊이 다루면서 資本主義萌芽를 찾아보았지만 그 시기의 역사에서 그러한 맹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내재적 발전론은 아직 학계에서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학설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 학설을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소개하고 강조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17~19세기에 자본주의 맹아가 있었다는 얘기는 일단 접어 두고 19세기 후반 이후의 근․현대사를 서술해도 무방하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일제시대사를 서술할 때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도 저는 신 교수님이 제시한 라인에 따라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일제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산업화에 필요한 인프라가 어느 정도 구축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최 : 우선 근․현대사 교과서를 이런 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에 全的으로 동감합니다. 그런데 이에 앞서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학생 시절에 東濱(동빈) 金庠基(김상기)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해방 직후에 ‘東學亂’에 관한 논문을 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방 당시 동학혁명은 50년 정도밖에 안 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역사 논문에 해당되느냐는 문제로 말이 많았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엊그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것까지 논문으로 나오고 있는 판국입니다. 학문적으로 입증되지도 않았고, 정제되지도 않은 것을 막 쓰고들 있다는 말입니다. 하기는 지난 일이면 모두 역사가 아니냐고 반론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해방 이후사에 관한 한 부르스 커밍스의 이야기가 根幹이 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 이전에는 오오츠카 히사오(大塚久雄)의 ‘歐洲經濟史序說’이 우리 학계를 사로잡았습니다. 여기서 ‘兩極分解’라는 말이 나옵니다. ‘엔클로우저 운동(Enclosure Movement)’이 일어나 농업의 자본주의적 경영이 이루어지고 여기서 자본주의맹아가 나왔다는 이야깁니다. 나도 학생 시절에 이에 심취됐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 역사에 그대로 代入한 것입니다. 내재적 발전론의 源泉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의 이야기고, 서유럽의 이야깁니다. 독일의 엘베강 以東만 하더라도 경우가 달랐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것이 똑같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이론을 그대로 갖다가 우리 역사에 대입시켜 비빔밥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내재적 발전론을 전제해 놓고 역사를 여기에 꿰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입증도 되지 않은 사실을 사실인 양 써 가지고 교과서를 만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참고서까지 만들어 학생들에게 외우게 할 수는 더욱 없는 일입니다. 전 선생님 말씀처럼 학생들이 이런 것을 우리가 왜 알 필요가 있느냐고 한다는데, 나는 이해가 갑니다. 근․현대사는 사실 입증과 학문적인 精製가 선행되어야 하고 이에 앞서 한국사 교과서는 우선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유 : 全선생님께서는 교과서에서 내재적 발전론을 빼 버리면 국사 교육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하셨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그 문제를 정직하게 처리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역사를 좀 더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 근․현대사 교과서를 만드는 취지에 符合(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일제 치하에서는 물론 조선왕조 치하에서도 우리나라에는 민중의 성장잠재력을 적극 개발할 제도와 리더쉽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발전 잠재력이 억제되어 있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저는 1948년에 대한민국이 수립된 다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원칙 및 평등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도입․정착되고, 교육수준이 획기적으로 향상되며, 미국 등 선진국과의 문물 교류가 확대되면서, 남한에서 前代未聞의 경제발전, 정치 민주화 및 사회 평등화 등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 驚異(경이)로운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근․현대사 교과서의 초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입장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는 학계에서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내재적 발전론을 거론하지 않고서도 근․현대사 교육의 취지는 충분히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강: 마지막으로 교과서의 개혁방향, 체제문제 등에 대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근․현대사를 국사 교과서로 통합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하나 있었고요. 또 하나의 문제는 編纂體制(편찬체제)의 문제인데, 검인정 교과서라 하더라도 검인정 교과서들이 똑같은 체제를 갖고 있습니다. 장절설정이나 記述 指針이 있어서 그 지침에 따르다 보니까 大同小異한 교과서가 나오지 않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 문제가 해결돼야 하지 않을까요? 며칠 전 교과서 포럼에서 건국대의 이주영 교수님께서 “檢認定委員의 實名制를 좀 해야겠다. 누가 검정했는지 숨길 이유가 없다. 실명제로 좀 더 책임 있는 체제로 가야 한다”는 의견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개정이 되고, 개혁이 되었으면 좋을지 말씀해 주십시오. ●유 : 안병직 교수님의 발제를 읽어 보니 역사 교과서는 한국이 국가로서 장래 나아갈 방향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책이라고 규정하고 계십니다. 교과서는 국가의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 약간의 異意가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는 다음 세대 한국의 주인공들이 갖추어야 할 역사학적 교양을 함양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교과서를 사용할 젊은이들이 그들의 입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행복한 미래를 개척하는 데 필요하고 교훈이 되는 역사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역사 교과서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집필자들이 나름대로 국가의 발전 방향을 내다보고 그것에 맞추어 교과서를 만든다는 것은 통일지향의 민족사관에 맞추어 교과서를 만든다는 일부 인사들의 주장과 큰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차세대 한국의 주인공들에게 어떤 역사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그들의 幸福 追求와 그들이 속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교과서를 만든다고 가정할 때, 우선 고려해야 할 문제는 한국 근․현대 역사상 누구를 그들이 존경할 만한 인물, 즉 롤 모델(role model)로 제시해 주느냐입니다. 2002년판 근․현대사 교과서를 훑어보면 이들 교과서에서 가장 크게 부각시킨 인물, 즉 ‘英雄’은 柳寬順, 全琫準, 安重根, 申采浩 등입니다. 말하자면 이 인물들이 교과서가 제시하는 ‘모범적’ 한국인들인 셈입니다. 저는 이분들의 희생적인 정신과 애국활동을 貶下(폄하)할 생각은 秋毫(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차세대에 한국을 이끌 주인공들에게 롤 모델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바야흐로 21세기는 세계화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배우는 고등학교 학생들은 장차 정치, 외교, 군사, 기업. 교육. 학문, 언론, 과학․기술, 문화․예술,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여 활동하게 될 미래 한국의 棟梁(동량)입니다. 따라서 저는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유관순, 전봉준, 안중근, 신채호 등 애국자들을 논급하는 것 이외에 정치, 외교, 군사, 기업, 교육, 학문, 언론, 과학․기술, 문화․예술,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 크게 돋보이는 업적을 달성한 한국인들을 골라 그들의 경력과 공적을 부각시켜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신 : 제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역사기술의 방법론일지 아니면 역사에서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일지, 이런 문제를 原初的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의 성공 여부는 결국 누가 더 정확하고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많은 자료를 읽고 그 자료에서 도출된 결론에 따라서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좌파사학자들은 이러한 방법론에 역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료로부터 결론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그에 적합한 자료를 찾아 결론을 뒷받침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미 정해진 결론을 충족시킬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으면 자료를 왜곡하거나 잘못 논증된 2次資料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제너럴 셔만호 사건의 기술을 보면, 그 사건에서 미 제국주의를 惡의 化身인 것처럼 그리다 보니까 사실 기술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부르스 커밍스(B. Cumings)의 책을 인용하는 것으로 셔먼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나는 이것은 역사학자들이 자기의 책무를를 방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한국사학의 문제는 단순히 좌우익의 문제를 넘어서는 미묘하고도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방법론과 필자의 良識 문제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한국 현대사 논쟁은 진실성(truthfulness)과 비진설성의 문제이지 이념의 문제가 본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대사를 보는 문제는 설익은 이념논쟁보다는 학자나 교육자로서의 양식을 찾는 일이 더 시급한 일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이 자리는 좌우익의 葛藤(갈등)의 장소가 아니라 한 시대의 아픔을 고민하는 지식인의 양식을 찾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 : 우리 역사 교과서가 단편적 사실의 羅列(나열)에 그칠 뿐, 도도한 역사적 흐름에 관한 서술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한 민족의 장엄한 역사를 한 줄기로 꿰려면 통사적 관점이 필요한데, 지금 국사 교과서는 分類史 위주로 되어 있습니다. 요점만 간추려 암기하기 좋게 배열해 놓아 공부하기는 편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申 선생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여기 오기 전 역사 교사들을 상대로 이런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근․현대사 교과서가 운동사 위주로 되어 있어 학자들의 비판이 있다. 학문적 진실은 차치하고 역사 교사의 입장에서 의견을 개진해 달라.’ 이에 대한 교사들의 반응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 근․현대사는 시련의 역사 아닌가? 시련에 대한 抵抗, 이것이 운동이라면 ‘저항운동’이 역사의 주류일 수밖에 없는데 이를 ‘운동사’라 격하하지 말고 ‘민족운동’으로 표현해 달라. 그리고 근․현대사에서 민족운동을 빼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강대국의 영향을 받은 것밖에 남는 것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그런 요지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부언하자면 현장의 역사 교사들은 내재적 발전론에 상당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재적 발전론이 정말로 잘못된 것이라면 그를 대체할 수 있는 代案, 즉 우리 민족의 역사적 발전을 설명할 만한 다른 학문적 성과물이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국제관계만을 주목해야한다, 이것만으론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상당수의 교사들이 한국 근현대의 지향점을 ‘운동사’보다 폭을 넓혀 ‘대한민국의 형성․발전사’로 보는 것, 민족사적 과업도 ‘통일 지향’보다는 ‘선진화 지향’으로 보는 것에는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대한민국 형성․발전사의 주체는 우리 민족이지 강대국이 될 수 없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끝으로 역사 교육 현장의 숙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7차 교육 과정에서 국사는 필수이고, 근․현대사는 선택으로 되어 있는데 역사 교사뿐만 아니라 일반 선생님들도 이해를 못합니다. 어떻게 자기 나라 역사가 선택과목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19세기 중반까지는 1학년 때 배우지만 개항 이후는 2, 3학년 때 선택으로 배웁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2, 3학년 중 理科生은 아예 선택의 기회가 없고, 文科生에게도 근․현대사는 사회계열 여덟 개의 선택과목 중 하나인지라 실제로 근․현대사를 배우는 학생은 전체 고등학생의 4분의 1도 안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국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동량들이 자기 나라 역사를 근세까지만 배우고 정작 중요한 일제 치하와 해방 이후를 안 배운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제라도 근․현대사를 국사에 포함시키고 국사 시간을 늘려 모든 학생들이 국사를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역사학계는 물론 정부 차원에서 노력해 주었으면 합니다. 또 하나, 학생들이 국사 교과를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역사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아픈 일입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우리 역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기피합니다. 국사는 내 나라 역사라는 인식보다 시험과목, 暗記科目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아까 사회자께서 국사 교과서의 분량이 너무 적다고 말씀하셨는데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분량이 너무 많습니다. 가르칠 시간에 비해 분량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복잡한 조세제도, 토지제도, 경제제도……. 너무 어렵고 골치 아프며 역사 전공자들이나 알아야 할 난해한 내용이 많습니다. 학생들은 ‘왜 이런 것을 저희들이 배워야 되는지’ 끊임없이 의문을 갖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학생들이 알고 싶은 부분은 대단히 소략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을미사변이나 관동대진재, 간도참변, 731마루타부대, 정신대등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들이고 학생들이 알고 싶어하는 데, 이에 대해선 기술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매우 소략합니다. 역사를 가르치는 목적이 한국인을 만드는 것이라면, 국사 교과서가 보다 얇아져야 되고 불필요한 내용, 난해한 내용은 제외시키며 정말로 학생들이 좋아하고 필요한 내용으로 가득찬 교과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 : 45년이 넘은 이야기지만 나도 대학원 학생 시절에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약 2년간 한 일이 있습니다. 그 당시는 대학 입학시험에 국사도 100점이고 세계사도 100점이 배정되었어요. 따라서 역사 과목만 공부 잘하면 대학에 쉽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아까 전 선생님이 국사 교과서의 분량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학생들의 요구라는 말씀하셨는데, 이는 대입 시험에서 역사 과목이 상대적으로 배점 비율이 적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사의 경우만은 좀 다르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역대 정부가 자꾸 민족을 내세우니까, 대학원에서는 실제로 수학 능력이 없는 학생에게까지 獎學金을 준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이 분야로 몰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그들의 전공 분야도 한 곳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사실 우리 나이 또래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대개 독립운동사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시 대학원 학생급의 젊은 연구자들은 연구 방향을 동학혁명 같은 民衆抗爭史 내지 義兵 쪽으로 돌리게 되었어요. 더욱이 이 분야는 특별히 어학도 크게 필요치 않아 접근하기도 비교적 쉬웠을 겁니다. 이것이 이 분야 연구자들이 많아진 배경입니다. 더욱이 政府硏究費의 支援도 받기 쉬웠습니다. 그리고 이 분야는 나중에는 운동권 학생들의 교재로도 이용되어 학생들의 뜨거운 관심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공부한 사람들이 이제 어느덧 교수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분야 연구자들의 성향이 이렇게 됐을진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누가 쓰고 누가 집필 기준을 세우더라도 모두 같아질 수밖에 없다”고 한 어느 원로 국사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전 선생님 말씀이 좀 거슬려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하면 교사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데, 그렇다고 옳은 이야기를 못하고 옳게 가르치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이건 참으로 곤란한 일입니다. 이제는 옳은 것을 찾아가야 할 때입니다. 계속 딴 소리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오오츠카와 커밍스가 뒤섞인 역사 이론은 하루 빨리 지양되어야 합니다. 사실로 입증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체계도 갖추지 못한 이야기는 없어져야 합니다. 근․현대사 교과서는 마땅히 한국사 교과서에 통합되어야 합니다. ‘세계화’를 부르짖는 오늘의 상황에서 역사의 閉鎖性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동·서양 사학과와 국사학과를 다시 사학과로 통합해야 하고, 사학과의 교과부터 고쳐야 할 것입니다. ●유 : 저도 사실 현행 교과서가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제한된 학습시간 내에 소화하기에는 교과서에 내포된 정보량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교육 현장의 실정을 감안해 볼 때 근․현대사 교과서의 부피를 늘이는 것은 어려우며 대신 내용을 精製하여 요령 있는 교과서를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교육인적자원부에서 檢定하는 근․현대사 교과서를 제작․사용하기로 결정한 이상 근․현대사 교과서를 없앨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금성사교과서를 凌駕(능가)하는 대안 교과서를 만들던가 그렇지 않으면 이미 출판된 6종의 교과서 가운데 제일 낫다고 판단되는 것을 골라 그 내용을 수정보완하는 것이 현재의 여건 하에서 최선의 해결책일 것입니다. 앞으로 누군가에 의해 진짜 만족스러운 새로운 근․현대사 교과서가 제작․출판되려면 적어도 몇 년을 기다려야 할 터인데, 그 사이에 ‘교과서 포럼’ 같은 단체에서 6종의 교과서 가운데 하나를 골라 그것을 일선 교사들에게 勸獎할 것을 고려했으면 합니다. ●최 : 6종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전부 검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서로 공정한 경쟁을 못하도록 어느 교과서가 많이 팔리든 수익을 다 균등분배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방법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국사 교과서를 다시 만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 : 물론 앞으로 자랑할 만한 양질의 교과서를 새로 만드는 일에 학계가 智慧를 모아야 되겠지요. 그러나 그 작업은 그리 용이하지 않으리라 예상합니다. 근․현대사 교과서를 새로 만드는 경우, 그 執筆陣의 核心은 국사 전문가들로서 구성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학계에 그런 전문가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회과학 분야의 교수들이 대거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들은 역사학자들의 집필을 돕는 역할을 맡아야 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역사 교과서는 아무래도 역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집필해야 권위가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 : 한국사 전체로 볼 때 19세기 이전까지의 역사는 고칠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근․현대사 부분만 고치면 됩니다. 그 부분만 고치면 큰 문제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19세기 말 이전 전공의 국사학자들은 우리 이야기를 사실상 다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이런 식의 한국 근․현대사 기술 내용을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 : 한국의 근․현대사 교과서를 大韓民國의 形成․發展史에 중점을 두고 구상하고 집필하면, 그 내용이 放漫하지 않고 요령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컨데 갑신정변, 갑오경장, 독립협회,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 등을 근․현대사의 줄거리로 삼고 여타의 사건들을 이 줄거리에 연계시켜 서술하면 요령 있는 교과서가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테마가 분명한 책이 오늘날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명쾌한 역사관을 심어 주는 斬新한 역사 교과서가 아닐까요? ●최 : 교과서에 쓸데없는 자료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이런 것부터 빼야 합니다. 그리고 이에 앞서 한국 근․현대사를 한국사로 통합해야 합니다. 근․현대사는 사실로 입증도 되지 않았고 학문적으로 정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강 : 한국 근·현대사는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 및 사회경제적 요인과 정치적 요인 등의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전개되어 왔습니다. 지금의 교과서처럼 한국 근·현대사가 각종의 운동의 자기전개라고 보는 것은 시각이 너무 狹小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는 굴곡도 많고 어두운 면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세계사에서 한국처럼 독립국가로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가 드뭅니다. 또한 한국은 지금 선진화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등학생들에게 좋은 지침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는 좀 더 객관적으로 서술돼야 하고 지금보다는 좀 더 수준이 높아져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오늘 대담을 마치고자 합니다. 오랜 시간 토론에 참여해 주신 여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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