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9세기에 근대사회로 향한 자본주의맹아가 성장했으며 개항기에 이르러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개혁이 수행된 결과로 대한제국이 성립했다는 30년이 다 돼 가는 국사학계의 주장을 대표 주자로 계승하고 있는 이태진 교수에게서 이전에 들을 수
없었던 특이한 주장이 있다면, 고종황제가 18세기 영·정조의 근대지향적인 民國 정치이념을 계승한 개명군주라는 것이다. 이 교수의 소개에 의하면
영·정조의 민국 이념은 왕과 백성이 상호 의지해 일체가 되는 것, 왕이 본체라면 백성은 그 분신이 되는 것, 그 만큼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왕정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나는 왜 그러한 정치이념이 근대지향적인지, 왜 그 이념을 계승한 왕이 개명군주가 되는 지를 잘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과 사회에 대한 성리학의 질서감각은 마치 동심원과 같은 것이다. 지극한 이치, 곧 仁이
있어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으로 화하였으니, 삼라만상은 결국 하나요, 각기 부여받은 품성에 따라 각기 다른 위치에 놓여 있을 뿐이다. 부자와
군신 두 관계는 동질적이다. 효와 충은 인의 상이한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 성리학의 기본 교의가 조선에 들어와 나름의 모습으로 정착하는 것은
16세기다. 이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사회·경제의 발전에 힘입어, 특히 아무래도 그 존재근거를 잘 설명할 수 없었던 노비라는 인간들이 사라짐에
따라, 조선성리학은 그 본래의 교의에 충실한 형태로, 곧 자연과 사회를 단일한 궁극의 이치로 설명하는 고도의 추상적인 형이상학으로 발전해 갔다.
그 결과 앞과 같은 민국 이념이, 곧 아들이 아버지의 분신이듯이 백성은 왕의 분신이라는 정치이념이 위정자들 사이에서 보다 빈번하게 회자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교수가 민국 용어의 그러한 시대성을 발견한 것은 확실히 하나의 볼만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근대지향적이라는
평가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이 교수는 어떤 근대를 그리고 있는가?
인간 사유의 역사에서 근대란 무엇인가. 이 어려운 질문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사회과학과 역사학의
오랜 전통에 따라 자연과 사회의 분리, 정치와 경제의 분리 또는 공과 사의 분리 등과 같은 명제로 평범히 만족하고 있다. 이러한 상식으로서의
근대에 비추어 볼 때 앞과 같은 근본주의적인 성리학의 교의체계는 근대가 아니다. 지난 50년간 한국의 사회과학과 역사학이 이른바 實學이란 장을
펼쳐 놓고 18∼19세기의 선각자들로부터 성리학을 넘어서는 사유방식이나 적어도 그 조짐을 발견하고자 그렇게 애써 왔던 것도 다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 교수는 따지고 보면 성리학의 교의에 더 없이 충실한 민국 이념을 근대지향이라고 함으로써 우리들의 오랜 상식과 전통을
간단히 일축하고 있다. 상식과 전통은 결국 어느 위대한 지성에 의해 무너지기 마련이다. 나는 이 교수가 그러한 위대한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중일까 매우 조심스럽다.
그래서 나는 이 교수의 논문을 그 행간까지 몇 차례 뒤졌지만 그가 우리가 공유하는
상식으로서의 근대를 대체할 새로운 근대를 제시하거나 모색하고 있음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는 서유럽에서 민주주의 이념이 성숙한 과정과 동질이라
할만한 사상사의 진보가 조선에도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영·정조의 민국 이념을 거론했을 뿐이다. 그것은 오래 전 그의 선배 교수 김용섭이
조선에도 영국에서의 요맨과 같은 자본가적 차지농이 성장했다고 주장한 것과 그 에토스에서 전혀 다르지 않다. 얼마 전 이 교수신문의 논단에서 이
교수와 논쟁하고 있는 김재호 교수가 국사학자들이 그가 소속하고 있는 경제사학자들을 근대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있음이 얼마나 잘못 설정된 과녁인가를
잘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 지적을 지금 반복하고 싶다. 18세기까지 조선왕조가 나름의 자연·인문 환경에서 개성적으로 성취한 문명의 통합원리로서
성리학과 그 정치이념을 서유럽 근대의 민주주의와 동질로 평가하는 것만큼 서유럽 중심주의나 근대주의의 뛰어난 사례를 어디 다른 데서 찾을 수
있을까.
고종황제가 민국 이념을 계승한 개명군주라는 이 교수의 주장과 관련해서 느끼는 의문도
허다하다. 고종을 개명군주로 승격시키기 위해서는 고종이 남다른 지성과 강인한 의지의 소지자였음과 더불어 몇 가지 세상을 울릴만한 개혁이 그에
의해 직접 기획되고 집행됐음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몇 가지 사례는 아마도 고종이 그렇게 작용을 가하지
않았겠느냐는 이 교수 자신의 추론을 유일한 증거로 할뿐이다. 그것도 세상을 울릴 만큼 개혁적인 것들이 아니다. 1886년 사노비의 세습을 철폐한
것은 민간에서 사노비의 세습이 중단된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에 하등의 울림도 얻지 못한 명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영조의 太極八卦圖를 수정해
국기를 제정했음이 또 다른 근거로 제시되고 있으나, 당시 열국쟁패의 국제사회에서 그것으로 과연 민국을 계승하고 보존할 수 있었을까. 다른
무엇보다 시급했던 것은 민국 이념의 진정한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벌족들의 기득권을 폐지하고 그 재원으로 왕궁 하나라도 사수할 수 있는 대포를
제작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정약용과 고종의 결정적 차이 주목해야
나는 혹 미발이나마 고종에게서 그러한 의지조차 없었겠는가 싶어 고종의 문집인 '珠淵集'을 펼쳐
들었다. 시만큼 한 인간의 깊은 소회를 절절히 대변하는 것이 없을 터다. 1893년 고종은 大報壇을 찾아 그 자신을 臣으로 칭하면서 온 나라를
들어 尊周 대의에 충실할 뜻을 시로 노래했다. 황제로 등극한 이듬해인 1898년에는 중국 三代 이래의 成憲을 담고 있다 해 '皇明實錄'을
수보하고 그 서문을 짓고 있다. 1902년 나이 오십 줄에 기로소에 들어 기뻐하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백성을 교화하는 길로서 노인을
공경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노인을 편안케 하면 백성이 편안해지고 백성이 편안하면 나라가 편안해진다. 천하를 다스려 마음을 얻는 것은 이
도에 의해서다." 그렇게 고종은 왕조의 패망이 코앞에 닥친 그 순간까지 (소)중화론의 국제감각과 성리학의 사회윤리에 충실한 도학군주 이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사상사를 잘 들여다보면 병들어 망해가는 나라를 구원할 개명군주의 출현을
고대해 마지않았던 한 위대한 사상가를 찾을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이 바로 그 이이다. 다산은 上帝의 명을 받은 한 영명하고 강건한 군왕이 두 세
명의 현명한 대신의 보좌를 받는 가운데 전국을 왕토로 장악한 다음 강력한 중앙군을 편성해 귀족들을 억누르면서 도로와 수로를 닦고 경지를
합리적으로 구획해 농업생산을 증진시킴과 더불어 해외무역을 일으켜 국부를 축적하는 이른바 부국강병의 정책을 펼치기를 간절히 꿈꿨다. 그가 꿈 꾼
개명군주는 군왕이 제대로 덕을 닦기만 하면 온 세상이 저절로 평안하게 된다는 性理圖說 속의 도학군주가 결코 아니었다. 그의 개명군주는 스스로
흥작하고 분발하여 그의 국토를 경영하는 作爲의 주체이다. 여러 연구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다산의 개명군주는 비교정치사에서 서유럽 근세의
절대군주들과 비슷하다.
다산이 그 같은 政治神學을 구상할 수 있었던 것은 사서육경을 재해석한 그의 經學이 전통
성리학과는 상이한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질서감각을 특징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의 경학은 초보적이나마 그 속에서 자연과 사회가, 정치와 경제가,
공과 사가 분리되는 근대적 사유형태에 입각해 있다. 다산에게서 그러한 사상사적 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그를 18년간이나 궁벽한 농촌으로 내몰았던
정치적 박해가 상징하듯이 그의 내면에서 전통 성리학과 서유럽의 천주학이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 사유의 발달은 예외 없이 그렇게 상이한
유형의 두 문명이 충돌하고 접합하는 과정에서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다산의 학문은 마땅한 제자를 만나 학파로 나아가 정파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렇게 19세기 조선의 지성은 학문의 자유가 압살된 가운데 서서히 그 생명력을 잃어 갔다. 그렇게 듣기에 편치 않은 이야기를
굳이 하는 이유를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재확인하면, 고종을 개명군주로 만들 정치신학적 토양이 그의 치세기를 전후한 조선의 지성사에서 존재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태진 교수처럼 성리학의 토양에서도 개명군주가 성립할 수 있다는 논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아무래도
성리학과 개명군주는 不相容의 관계가 아닌가.
필자는 서울대에서 '조선후기 토지소유의 기본구조와 농민경영'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東大門市場의 經濟史的 메시지', '민족사에서 문명사로의 전환을 위하여' 등의 논문이, '맛질의 농민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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