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너희가 역사를 아느냐 |
역사는 합의나 청산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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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_ 서울대 교수 / 서양사 |
역사가 왜 시빗거리인가 근래처럼 우리 사회에서 역사가 핫 이슈로 등장한 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국외적으로는 연전(年前)에 있었던 일본의 교과서 왜곡 파동에 이어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우리 사회에 큰 파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일제 과거청산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논란과 정쟁을 초래하고 있으며, 또 가까이는 한국전쟁과 유신, 멀리는 동학혁명과 관련한 과거사 규명 문제도 연이어 시빗거리가 되고 있다. 단편적인 흔적만 남은 아득한 고대사의 귀속 문제가 심각한 외교 현안으로 대두하고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현대사의 진상 문제로 정치적·이념적 갈등이 심화되는 현상을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다음과 같이 물을 법하다. 도대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에 진실이 있으며, 객관적인 역사란 과연 가능한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서양의 경우 역사서술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했다. 페르시아 전쟁사를 서술한 헤로도토스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함으로써 역사서술의 시조가 되었다. 당대 그리스의 가장 큰 사건에 관한 그들 각각의 이야기는 그리스어로 ‘역사’라는 말이 의미하듯 ‘탐구’ 혹은 ‘조사’의 결과였다. 그들은 그리스의 운명을 결정한 이 역사적 사건들에 관련된 인간들의 행적에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의 체험과 관찰, 다른 사람의 목격담과 증언을 토대로 그 답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인들은 인간행위를 대상으로 탐구와 조사의 결과를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서양 역사서술의 전통을 세웠지만, 정작 그리스인들의 사고에서 역사가 차지하는 위상은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사물 가운데 변하지 않는 본질을 가진 것만이 ‘이해할 수 있고’, 그리하여 진정한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반면 자연이나 인간의 행위처럼 일시적이고 변화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인지할 수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그 점에서 그것에 관한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 ‘반(半) 지식(semi-knowledge)’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는 경험에 의존할 뿐 논리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그리스인들의 생각이 보여주듯 역사는 그 출발부터 인식론적 측면에서 본질적인 취약점이 지적되었다. 18세기말까지도 역사가 대학의 교수과목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역사서술이 전문 역사가가 아니라 주로 정치가·외교관·성직자·작가 등 ‘아마추어’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들 ‘아마추어’ 역사가들의 역사서술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정확한 역사서술을 위해 노력했지만 서술의 정확성보다는 우아하고 격조 있는 문체와 표현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울러 그들은 역사를 무엇보다도 정치활동이나 도덕과 예절 등 실생활에 유용한 것으로 보았다. 교양과 식견을 넓히거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거나, 혹은 종교적 신념을 옹호하려는 것이 역사에 관심을 갖고 역사를 서술하려던 그들의 의도였다. 실로 그들은 역사를 정치적, 도덕적 규범과 교훈의 원천이요 보고(寶庫)로 여겼다. 규범과 교훈 위한 의도적 접근 이처럼 역사의 가치는 학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서양 역사서술의 오랜 전통이었다. 그러나 이 전통은 18세기 후반 유럽의 구질서를 뒤흔든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을 겪으며 사라지게 되었다. 계몽과 혁명의 시대 동안 역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적 선전의 효과적인 도구였고, 이데올로기 전파의 유용한 수단이었다. 그리하여 역사를 둘러싸고 정치적, 종교적 입장이 대립하고, 역사에 대한 거대담론으로서 역사철학이 경쟁하며, 역사에 호소하는 유토피아적 비전과 이념이 각축을 벌이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우려와 비판은 19세기에 접어들어 역사를 전문적인 학문의 영역으로 정립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역사의 오용을 막고 그것을 학문의 영역으로 만들기 위해 지향해야 할 목표는 분명했다. 역사를 대학의 연구와 교육의 한 분과로 발전시킴으로써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 역사가 랑케(L. von Ranke)는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가”하는 물음을 통해 그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랑케에 따르면 이제 역사는 정치적 파당이나 종교적 종파의 입장에서 벗어나야 했다. 역사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역사철학과도 결별해야 했다. 역사에서 전체 역사과정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발견하고, 미래를 예언하며, 현재 무엇이 필요하고 최선인지 규정하는 것은 더 이상 역사의 영역이 아니었다. 역사는 이제 과거를 현재나 미래의 문제와 결부시키기보다는 무엇보다도 과거의 문제로 다루고자 했다. 그리하여 역사란 과거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를 대상으로 사실을 발견하고 그를 바탕으로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재구성하고 복원하는 것이 되었다. 과거의 복원이 역사의 목표가 되자 역사서술에서 과거 사건의 흔적, 특히 문헌 기록의 중요성을 더욱더 강조하게 되었다. 과거 사건의 기록은 역사서술의 토대가 되는 ‘역사적 사실’의 출처였다. 역사적 사실이란 사료에 담겨 있고, 사료를 통해서만 역사적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만큼 역사서술에서 사료를 다루는 작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랑케처럼 역사를 학문의 영역으로 만들고자 했던 이들은 사료 작업에는 일정한 규범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즉 사료를 대하는 태도는 항시 불편부당하고 객관적인 입장이어야 하고, 고증의 정확성을 위해서는 사료의 기록을 검토하고 진위를 가릴 줄 아는 문헌학적 지식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객관성과 진실성이 역사연구의 금과옥조가 되었고, 역사연구를 위한 별도의 전문적 훈련과 규율, 제도가 부과되었다. 이로써 이제 역사는 전문가의 영역이 되었다. 객관적 입장에서 사료비판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엄정하게, 즉 ‘실제 일어난 그대로’ 재구성하려 한 랑케의 역사학을 가리켜 흔히들 실증주의 역사학이라 부른다. 그러나 랑케는 역사를 과학과 같은 법칙 정립적인 학문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결코 아니었다는 점에서 실증주의라는 말은 적당한 표현이 아니다. 하지만 랑케의 역사학이 과학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랑케가 초석을 놓은 근대 역사학은 과학을 역사지식의 모델로 삼았다. 자료를 수집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증거를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한 지식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역사는 과학에 비견할 만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 있었던 것’을 복원하는 과학 20세기에 접어들어 랑케류의 실증주의 역사학은 많은 비판을 받았고 새로운 역사학이 등장했다. 흔히 ‘사회사’라고 부르는 새로운 역사학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새로운 문제의식, 새로운 접근방식을 의미했다. 즉 그것은 인간의 행위보다는 행위를 지배하는 거대 구조와 과정에 관심을 가졌고, 사건 위주의 정치사에서 탈피하여 사회·경제 등으로 역사의 영역을 확대했으며, 특히 정치·경제·사회의 관계를 총괄적이고 종합적으로 서술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경제적 구조의 분석을 위해 사회과학적 개념과 이론, 모델을 적극 수용하고, 특히 계량화할 수 있는 집단자료를 이용한 계량적 분석방법에 치중했다. 이처럼 사회사의 등장과 더불어 주제나 방법론에서 역사학은 크게 달라졌지만 역사의 본질을 과학으로 보는 자기인식과 정체성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사회사가들이 볼 때는 전통적인 실증주의 역사학은 과학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사회사를 지향하는 역사가들은 사실의 수집과 증거의 확보만으로 역사가 객관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는 추상적 사유에 의한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교감과 직관에 의존한 실증주의 역사학의 방법론은 비과학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편견과 선입관을 배제한 채 중립적인 입장에서 ‘사실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역사가의 규범에 회의를 표한다. 사회사가들은 역사서술에서 역사가의 존재를 배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역사는 역사가가 명시적인 문제제기와 가설로 접근할 때만 이해 가능한 것이고, 역사가의 개념과 이론에 의한 분석만이 역사의 과학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물론 사회사가들에게도 역사의 대상은 보편적인 법칙이나 이론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 대상의 개별성은 개별의 일반성, 즉 일반적인 규칙이나 패턴 등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고, 따라서 개별 사실을 발견하고 설명하는 수단으로서 이론은 필수적인 것이다. 이처럼 사회사가들은 역사가의 문제제기, 작업가설, 이론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역사란 더 이상 증거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역사가의 ‘개입’과 ‘중재’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역사가 역사가에 의해 구성된다고 생각하는 역사가들에게 역사의 객관성은 이제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들에게 역사의 진실과 객관성은 실증주의 역사학의 경우처럼 더 이상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와 증거에 의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사가들은 역사의 객관성 문제에 대한 실증주의 역사학의 낙관적 태도에 비판적이고 회의적이나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가능성 자체에 대한 믿음을 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회사가들은 사회사야말로 가장 과학적인 역사라고 생각한다. 역사학을 인간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 학문으로 인식한 프랑스 아날 학파의 경우에서 보듯이 역사의 과학적 성격에 대한 믿음은 사회사의 등장으로 한층 강화된 것이다. 사실 사회사의 등장과 함께 실증주의 역사학은 퇴조했지만 역사란 사실을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역사학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에는 큰 변화가 없다. 역사가가 역사연구를 통해 밝혀야 할 것은 과거가 ‘실제 어떠하였는가’ 하는 물음이고, 그런 물음에 대해 저마다 다소 의미는 다르더라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객관적’이고 신뢰할 만한 답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여전히 일반적인 통념인 것이다. 현재의 개념·이론으로 파악은 무리 그러나 이러한 통념은 지난 세기 마지막 4반세기를 거치면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역사학은 과학이라는 통념이 흔들리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로 ‘심성사’, ‘일상사’, ‘문화사’, ‘미시역사’ 등 대략 1970년대 이후 구미 역사학계에 등장한, 다양한 이름의 새로운 역사연구 경향을 들 수 있다. 이 새로운 경향들은 모두 그 동안 역사연구에 지배적 모델이었던 사회사에 대한 비판과 도전을 의미한다. 즉 그것들은 사회사의 특징적 요소들, 다시 말해 거대 구조와 과정에 초점을 맞춘 역사서술, 역사를 통일되고 일관된 체계로 파악하는 접근방식, 사회경제적 결정론의 관점에 입각한 분석과 설명방식 등을 비판하고 거부한다. 역사에서 인간의 역할을 무시하고 역사적 실재(實在)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인식하며, 역사적 인과 관계의 설명이 사회경제적 요인에 치중하고 단선적인 것 등이 사회사의 한계라는 것이다. 사회사를 비판하는 역사가들은 특히 역사적 실재의 성격에 주목한다. 그들은 역사가에게 역사적 실재란 근본적으로 낯설고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회사가들의 경우처럼 역사가가 자신에게 이미 잘 알려진 현재의 개념이나 이론으로써 역사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논리를 역사적 분석대상에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방법으로는 개별 역사적 현상의 독자성, 차별성, 이질성은 사상(捨象)된다. 역사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파악하기 위해 역사가에게 필요한 것은 대상을 객체화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파악하려는 ‘차가운’ 분석적 시각이 아니라, 대상과 조응(照應)하며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태도이다. 역사적 대상에 대해 교감과 이해를 추구하는 태도는 일반화된 개념과 이론에 의존해 낯선 경험과 행위를 성급하게 익숙한 것, 잘 알려진 것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사회사의 시대착오적 방법과는 달리 역사에서 새로운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을 그대로 현재화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이론과 모델에 잘 부합하지 않는 역사적 현상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보여준다. 사회사 이후의 새로운 역사연구 경향이 역사란 통일적이고 단선적인 발전과정을 거친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복수의 역사’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현상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측면을 지적한 것이다. 한편 지난 4반세기를 거치면서 역사가 과학이라는 통념이 깨진 데에는 그 동안 철학, 문학 분야를 중심으로 구미 학계와 지식인 사회를 풍미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은 이른바 ‘언어로의 전환’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언어로의 전환’이란 한 마디로 말해 분과 학문으로서 역사학의 자기인식과 정체성을 언어의 중요성에 입각해 새롭게 규정하려는 시도이다. ‘언어로의 전환’의 이론적 출발점 가운데 하나는 소쉬르(F. de Saussure)의 기호학적 언어이론에 바탕을 둔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소쉬르는 언어를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기호체계로 파악하는데, 이러한 견해를 따르면 언어는 실재(實在)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실재를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인식론의 측면에서는 언어 외 실재하는 것은 없으며, 실재는 언어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과거 그 자체 아닌 과거를 이해하는 열쇠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역사연구에 적용할 경우, 사료에서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재구성’하고 ‘복원’할 수 있다는 생각은 완전히 환상임이 드러난다. 역사가가 서술하는 역사는 언어의 기호적 속성상 독자적인 의미를 가질 뿐 역사적 실재를 ‘직접적’으로 ‘가리키거나’, 혹은 그것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연구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사가들은 역사적 사건으로서 실재가 기록이나 기억 이전에 실제로 존재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으나, 그것이 역사가의 사료인 기록 속에 ‘역사적 사실’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료가 언급하거나 역사가가 서술하는 ‘역사적 사실’이란 역사적 실재, 즉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하나의 ‘언명(言明)’일 뿐이다. 그리하여 역사가에게 역사적 사실이란 본질적으로 “오직 언어상의 존재”이고 역사가의 “기술(記述)”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역사가가 역사서술을 통해 과거를 ‘복원’ 혹은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언어로의 전환’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 셈이다. 이제 역사는 엄밀히 말해 ‘과거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다 오히려 ‘과거와 관련하여 역사가가 생각하는 것에 대한 진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역사란 역사가에 의한 과거의 ‘재구성’이 아니라 ‘구성’이라는 사실은 역사서술이 ‘서사(narrative)’, 즉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도 분명해진다. 미국의 역사가 화이트(H. White)에 따르면 역사가에 의해 서술되는 역사는 서술의 토대가 되는 개별 사실 각각에서 찾을 수 없는 별개의 독특한 의미를 갖는데, 이 의미는 바로 개별 사실을 엮어 전체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서사의 기능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역사서술은 단순히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만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며, 서술대상으로서 과거의 의미는 서사의 특징적 요소인 플롯, 즉 이야기를 꾸미는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화이트는, 역사서술의 서사형식에 필요한 플롯을 제공하는 것은 역사가라는 점에서 역사가와 소설가는 더 이상 구별이 안 되며, 역사는 본질적으로 픽션의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역사가 픽션의 성격을 지닌다는 화이트의 주장은 역사가 허구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야기와 플롯 구성이라는 점에서 서사와 픽션의 형식이 일치하며, 픽션의 형식을 빌지 않고 서사형식의 역사서술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픽션으로서 역사의 성격을 지적하면서 화이트가 강조하는 것은 서사에 내포된 상징과 알레고리의 성격이다. 화이트에 따르면 서사란 과거를 나타내는 ‘부호’나 ‘표식’이 아니다. 역사가는 지나간 과거를 더 이상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없고, 따라서 하나의 분명한 표상을 통해 그 실체를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화이트에게 서사란 오히려 직접 대상을 표상하지는 않지만 대상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이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서사란 역사가가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과거에 특정한 비유적 이미지를 부여하고, 그를 통해서 서사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그 과거가 어떤 것이고, 또 그 의미가 무엇인지 찾을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서사가 제공하는 것은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과거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인 셈이다. 달리 표현하면 화이트에게 역사란 퍼즐처럼 조각난 그림을 하나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직접 팔레트에서 색을 선택해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서사의 독자들이 서사를 이해하는 것은 역사가가 제공하는 열쇠 혹은 상징이 신화·민담·우화·소설 등 그 시대의 문화적 자산으로서 그들에게 잘 알려지고 익숙한 플롯과 이야기 형식을 빌리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서사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과 현재의 ‘이야기’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고, 그들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비유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결국 서사란 과거와 관련하여 역사가가 전달하는 하나의 메시지이며, 이 메시지는 알레고리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역사가의 메시지는 표면적으로는 과거에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이면적(裏面的)으로는 현재 혹은 미래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실은 하나 아닌 여럿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반영된 언어나 서사에 관한 연구는 19세기 이래 서양 역사학의 전통이 된 리얼리즘과 경험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역사가는 ‘과거의 수호자’로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왜곡에서 역사의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기대나, 역사학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검증 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추구한다는 생각은 모두 근거 없는 환상이 된 것이다. 이제 그 대신 역사는 역사가가 ‘발견’하는 만큼이나 ‘창안’하는 것이라는 점, 역사서술에서 이해관계를 초월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란 불가능하다는 점, 모든 역사해석은 불가피하게 이데올로기적이고 상대주의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이 역사적 실재의 객관적 인식 가능성과 역사학의 과학적 성격을 부인함으로써 역사학의 존립기반을 위협한다는 역사학계 내 비판과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럼에도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역사학에는 일고의 가치가 없는 ‘궤변’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적 상대주의를 의미하고 궁극적으로 허무주의(nihilism)에 빠져 지적, 도덕적 파멸을 초래할 뿐 역사학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는 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역사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가 허무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그것을 지향한다거나 필연적으로 허무주의로 귀결된다고 할 수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의적이고 무책임하고 몰가치적인 역사서술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의도하는 바는 역사적 지식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폭로하는 것일 뿐이다. 진실, 객관성 등 역사학에서 가장 보편적인 규범이라고 생각해 왔던 가치들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따라서 역사의 진실과 객관성을 내세워 역사를 한 가지 관점에서 파악하고 단 한 가지 해석의 절대적인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메시지이다. 헤로도토스에서 화이트에 이르기까지 근 2,500년에 달하는 서양 역사서술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선 역사적 지식은 인식론적 측면에서 매우 취약한 지위에 있다는 점이다. 역사에 대해 온당한 지식의 성격을 인정하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인은 물론이고 역사인식과 서술에서 언어와 서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지나간 과거는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만큼 역사란 본질적으로 잘 알 수 없는 것,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근대 역사학의 성립 이래 과학을 역사적 지식의 모델로 삼았던 역사가들의 경우처럼 역사를 잘 알 수 있고, 그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주의 혹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폈듯이 19세기 실증주의 역사학에서 20세기 사회사 연구에 이르기까지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전통적으로 역사는 과학이 아니라 문학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역사의 픽션적 요소나 알레고리적 성격을 지적하는 역사가들은 역사의 문학성에 다시 주목하고 있다. 두말 할 나위 없이 역사의 문학성을 주장한다고 해서 지식으로서 역사의 지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문학작품이 세상을 깨우치듯 픽션으로서의 역사 역시 얼마든지 현실의 삶에 가르침을 줄 수 있다. 과거청산 정당화하는 역사 진실은 없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서 주장하듯이 역사의 본질을 픽션이나 문학으로 본다면 도대체 역사의 진실이나 객관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역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면 결국 모든 역사해석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역사에서 진실과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다면 역사학은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결론은 역사의 ‘진실’ 혹은 ‘객관성’의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단 하나의 해석만이 절대적으로 정당하다는 의미에서 역사의 진실이란 없다. 역사에서 진실이란 진실의 가능성을 뜻할 뿐이며 만약 역사에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것이다. 역사의 진실이 여럿일 수 있다는 의미는 “제대로”된 역사해석은 저마다 나름대로 진실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무엇이 “제대로” 된 해석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의 관점과 입장을 명확히 하고 스스로의 오류와 대안적 해석의 가능성을 자각하고 염두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는 역사가들이 상대주의야말로 상대주의의 악폐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역사가가 상대주의를 일관되게 추구할 경우, 다시 말해 자신에게까지 일관된 상대주의의 태도를 취할 경우, 역사적 상대주의는 역사해석에서 관용과 책임을 가져오지 결코 무책임한 허무주의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가 허무주의가 아니라 회의주의(scepticism)를 의미한다면 역사가가 지향해야 할 규범이 무엇인지 명백하다. 역사가는 다른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관점과 해석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비판적이고 회의적이어야 한다. ‘과거가 과연 어떠하였는가’하는 랑케의 금언은 회의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도 유효하다. 역사의 지식이 지닌 가치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경고하고 환기시키는 것이 ‘과거의 파수꾼’으로서 역사가가 해야 할 일이다. 이제 역사를 둘러싸고 지금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다툼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조금은 답이 되었으리라 기대한다. 역사는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특히 권력이 개입하고 앞장서는 역사해석은 언제나 의혹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처럼 정치적 의도 외 아무 명분이 없는 경우는 물론이고 ‘민족정기’, ‘사회정의’의 거창한 명분을 걸고 나서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가권력이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나설 때, 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국가적 사업”을 추진하려 할 때 그것은 ‘역사의 진실’이나 ‘역사의 진상’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과거청산’을 정당화하는 역사의 진실은 없다. 역사는 항시 다시 쓰고 모든 역사해석은 언제나 수정된다. 누구나 자신의 정치적·도덕적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할 수는 있지만 역사가 그 해석을 절대적으로 정당화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논란과 시비의 대상이지 합의와 청산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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