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1904~1967년)는 미국 뉴욕시에서 직물류 수입으로 부를 쌓은 독일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에서 물리학과 화학에서 탁월함을 보였고, 시집을 발간했으며,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1925년 하버드를 졸업한 후 영국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러더퍼드의 지도를 받았으며, 원자 구조에 관한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때 그는 영국 과학자 단체와 함께 원자 연구의 대의명분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할 기회를 가졌다.
1927년에는 괴팅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그 곳에서 닐스 보어와 폴 디랙과 같은 저명한 물리학자들과 교류하게 됐다. 그 후에는 미국으로 돌아와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오펜하이머의 초기 연구는 주로 전자·양성자·우주선(宇宙線)과 같은 원자 구성 입자들의 에너지 과정에 관한 연구에 집중돼 있었다.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미국 정부에 대해, 나치가 먼저 핵폭탄을 제조한다면 이는 전 인류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때부터 오펜하이머는 천연 우라늄에서 우라늄-235(235U)를 분리시키는 공정과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의 임계 질량을 결정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1942년 8월 미국 육군은 핵에너지를 군사적 목적에 도입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영국과 미국 물리학자들의 공동연구를 추진하였다. 오펜하이머는 이 연구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이는 훗날 '맨해튼 계획'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20세기 후반기 원자폭탄의 개발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많은 과학자들이 실생활과 직접 관련되는 연구를 하고 있을 때,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과 문학과 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오펜하이머, 예술적 소양을 지녔던 텔러 등 많은 물리학자들은 그 당시 과학자들이 저질스러운 과학을 한다고 비판하며, 우주의 원리와 사물의 이치가 숨어 있다는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은 인류 역사상 가장 무서운 무기인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기본적인 이론이 됐다.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 개발을 주장했고, 오펜하이머는 개발 책임자가 됐으며 텔러는 수소폭탄을 만들었다.
미국이 핵폭탄 완성이 눈앞에 왔을 때, 독일은 항복했다. 그러나 미국은 핵폭탄을 사용하겠다는 야심을 버리지 않았다. 아직 희생양으로 삼을 일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운명의 날 1945년 8월 6일 최초의 핵폭탄인 '홀쭉이'를 일본의 산업도시인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우라늄으로 만든 4.5t의 홀쭉이(원자폭탄 이름)는 반경 3㎞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14만 명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지금까지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한 사람은 2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는 당시 히로시마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수치다. 플루토늄으로 만든 5t의 '뚱뚱이'는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져 7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인류의 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참혹한 대학살이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했고, 이로써 2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 맨해튼 계획은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오펜하이머는 핵폭탄 개발로 유명인사가 됐지만, 핵폭탄의 엄청난 피해를 보고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는 "내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고 말해,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그 얼간이를 다시는 이곳에 부르지 말라"는 책망을 듣기도 했다. 2차대전이 핵폭탄으로 종식되자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아예 전공을 바꿔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