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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원자폭탄] 이론 제공했지만 제작 참여하진 않아

이강기 2015. 9. 20. 17:32

[아인슈타인과 원자폭탄] 이론 제공했지만 제작 참여하진 않아

처음엔 원자무기 제조 가능성에 회의적
루스벨트에 원폭 개발 촉구한 뒤 후회하기도

현대과학의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아인슈타인이 인류에 가져다 준 혜택은 적지 않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혜택에 대한 소박한 낙관론에 결정적 흠집을 내면서 현대과학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형성에 큰 기여(?)를 한 것이 원자폭탄이다.

아인슈타인과 원자폭탄의 인연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에너지는 질량에 빛의 속도의 제곱을 곱한 것(E=mc²)이다. 그런데 빛의 속도가 워낙 빠르므로(즉 수치적으로 크므로) 빵 덩어리 정도의 질량에 해당되는 에너지의 양도 어마어마하게 커진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은 즉각 물질 속에 숨어있는 이와 같은 엄청난 에너지를 끄집어내어 무시무시한 원자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인슈타인은 독일이 원자폭탄으로 전쟁에 이기게 될 것을 염려하여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천재과학자의 권위있는 경고에 놀란 미 행정부는 즉시 원자폭탄 연구에 돌입하여 결국 1945년 이미 전쟁에 패한 독일 대신 일본에 이 가공할 무기를 사용했다.

 

핵붕괴 확인은 ‘오토 한’

 

대부분의 상식이 그렇듯이 이 설명에는 맞는 면도 있고 틀린 면도 있다. 우선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관계가 유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공식이 곧바로 질량에서 현실적으로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과학에서 수학적 등식은 1차적으로는 단순히 등호의 좌변과 우변이 수치적으로 같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베네치아의 해수면 높이가 국제유가 변동비율의 세 제곱에 비교적 정확하게 비례한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베네치아 해수면이 어떤 방식으로든 석유가격과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2차 대전 중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Little Boy' /조선일보DB사진
물론 이와 달리 수학적 등식이 단순한 수치적 일치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지만, 아인슈타인이 처음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 공식을 제안했을 때 이 공식이 단순히 수치적 일치만을 말하는지 아니면 질량이 곧 에너지라는 점까지 말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사 ‘질량이 곧 에너지’라고 해도 그 에너지가 현실적으로 뽑아내어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과학자가 부정적이었다. 물질을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점은 오토 한 등에 의해 핵붕괴가 확인되자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조차 정말로 이 에너지를 이용하여 원자무기를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회의적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물론 최고 수준의 과학적 창조성을 보여준 과학자였고 그가 이룩한 과학적 업적의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격식과 까다로운 예의범절에 개의하지 않았고 그런 형식이 전제하는 사회적 권위나 계층적 차이에 대한 편견을 적극적으로 무시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적이었으며, 특별히 사회주의적이거나 무정부주의적 이념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아인슈타인은 평화주의자였다.

 

신념 꺾고 무기개발 촉구

▲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일으킨 버섯구름./조선일보DB사진
아인슈타인의 정치적 신념은 추상적 생각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지만 어느 정도 유명해져서 자신이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고 인식한 이후에는 그 영향력을 이용해 매우 적극적으로 인권과 정치적 탄압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다.

 

전반적으로 전쟁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아인슈타인이 유일하게 전쟁을 ‘필요악’으로 보는 관점을 취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그의 논리는 ‘큰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작은 악’은 감수해야 한다는, 고전적인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에게 쓴 편지를 이해해볼 수 있다. 그는 앞서 설명한 대로 자신의 상대성 이론이 원자무기로 이어질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그렇기에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질라드와 위그너가 1939년 아인슈타인이 휴가를 즐기고 있던 롱아일랜드로 찾아와 “독일이 원폭을 개발 중이니 미국도 원폭개발을 서둘러야 한다”고 설득했을 때 현실적으로 원폭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그 다음에는 현실적 이유에서 자신의 평소 신념을 꺾고 루스벨트에게 무기개발을 촉구한 것이다. 전후 독일이 원폭개발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 분명해지자 아인슈타인은 여러 차례에 걸쳐 “그 사실을 그때 알았다면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리라”고 말했다. 이는 적극적으로 수소폭탄 개발을 지지했던 또 다른 물리학자 폴 텔러의 태도와는 분명히 대조된다.

 

진주만 습격으로 태도 바뀌어

이제 루스벨트 대통령으로 넘어가자. 아인슈타인처럼 유명한 과학자의 경고편지를 무시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즉시 원자무기의 가능성을 조사할 위원회를 설립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기존 재래식 무기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던 위원회의 군 관계자들이 “공상과학에나 등장할 무기”라며 원자무기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독일을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는 낙관론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이 분위기는 독일이 유럽 각지에서 승승장구하고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고나자 바뀌었고 원자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1942년 출범하게 된다.

 

원자폭탄은 현대과학의 뚜렷한 특징인 ‘거대과학’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과학자란 홀로 연구실에서 수많은 기기들에 둘러싸인 채 자연의 신비와 씨름하는 고독한 탐구자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과학연구는 수많은 연구자의 협동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상당수는 어마어마한 예산이 소요된다. 또한 거대과학에는 단순히 과학자와 엄청난 연구비만 투입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아이디어를 실제 인공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공학자와 기술자의 도움이 필요하고, 이들 모두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체계가 필요하다. 원자폭탄은 이런 거대과학의 특징이 처음으로 분명히 드러난 사례였고, 원자폭탄의 제조과정에서 과학자들은 현대과학 연구가 본질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처럼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나 오펜하이머처럼 직접 참여한 사람 모두 원자폭탄을 통해 깨달은 점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핵심적인 과학지식을 제공하는 과학자이기는 하지만 정작 원자폭탄의 사용에 대해서는 어떤 통제권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 이후 과학자들은 자신들은 객관적 지식과 도구만 제공해줄 뿐이고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정치가가 결정할 문제라는 식으로 방어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를 계기로 적극적으로 과학의 평화적 사용에 뛰어드는 과학자도 나타나게 되는데, 아인슈타인은 물론 이 경우였고 죽기 바로 직전까지도 매우 적극적으로 평화활동을 펼쳤다.

이상욱 한양대 철학과 교수

  (주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