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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를 시찰하는 김정일. 김정일의 유고는 예상치 못한 북한 급변사태를 몰고올 수 있다.
미국 육군에서는 ‘핏불(사냥개의 일종)’이라는 별명을 가진 기갑전의 대가 패튼이 탄생했다. 패튼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시칠리아 전투에서 몽고메리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괄괄한 성미 때문에 진급에서는 손해를 봐 동기생인 브래들리를
상급자로 모시는 처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초고속 진공을 거듭해 독일의 항복을 유도하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
덩커크 패전과 파리 함락으로 프랑스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프랑스
육군에서도 기갑부대를 육성해 속도전을 펼치자고 주장한 장교가 있었다. 드골 대령이 그 주인공인데, 중령 시절 그는 ‘미래의 군대’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마지노선을 설치하는 데 국력을 낭비하지 말고 10만 병력의 기계화된 기갑부대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프랑스 육군 수뇌부는 드골의
주장을 무시했지만 독일의 구데리안과 영국의 전략가 리델 하트는 드골의 책을 정독했다고 한다.
드골은 벨기에-네덜란드 축선 전투에 4기갑사단장으로 참전해 국지적인 승리를 이끌어냈으나 역부족으로
후퇴했다. 그후 영국으로 건너가 대령 계급장을 떼어내고 스스로 별 둘을 붙이며 ‘자유 프랑스’라는 이름의 망명정부를 만들었다.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프랑스를 관통해 독일을 공격하는 대공세에
나섰다. 이때 드골은 자유 프랑스군을 이끌고 참전해 영국과 미국군을 제치고 제일 먼저 파리에 입성했다. 최근 한국에서 개발된 XK-2 흑표
전차와 비교되는 세계 최고의 전차가 프랑스의 ‘르클레르 전차’인데, 르클레르는 가장 먼저 파리에 입성한 자유 프랑스군 제1기갑사단장의 이름이다.
르클레르(1902~1947)는 ‘필립 마리 드 오트클로크’가 본명이다. 그는 부인과 4남2녀가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에 남아 있어 르클레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르클레르는 북부 아프리카에서 영국의 몽고메리군과 함께 싸웠고, 파리를 수복한
다음에는 독일의 바이에른 주까지 쳐들어감으로써, 드골 다음 가는 프랑스의 영웅이 되었다. 르클레르를 전차 이름으로 사용한 프랑스는 훗날 클레망소
급을 대체하는 최신 핵 항공모함을 드골함으로 명명했다.
새로운 전격전 ‘효과중심작전’
구데리안과 로멜, 드골과 르클레르, 패튼과 몽고메리가 선보인 전격전의 핵심은 기갑부대다. 적
방어선을 뚫은 기갑부대가 패퇴하는 적군을 추월해 돌격하면 적군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상대 전차부대가 깊숙이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상대를 구경하지도 못한 부대들까지 동요해 후퇴함으로써 전선은 일거에 무너진다. 참호전은 수많은 병사를 희생시키고도 전황을 타개하지 못하나,
전격전은 희생자를 적게 내고도 일거에 전황을 바꿔버리는 효과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투는 전차를 앞세운 기동전, 전격전으로 승패가 갈렸으므로 이후 보다 빠른
기동전을 펼치기 위한 연구가 거듭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패권을 장악한 미군은 독일식 전격전을 토대로 고속기동전, 입체고속기동전을
개발하고 최근에는 ‘효과중심작전(EBO·Effects-Based Operations)’과 ‘신속결정작전(RDO·Rapid Decisive
Operations)’이라는 새로운 전격전 전술을 개발했다.
미국은 2003년 이라크전에서 효과중심작전을 적용해 큰 성과를 보았으므로 한국군도 이를 도입하게
되었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는 평시에는 합참이, 전시에는 연합사가 행사하므로, 합참과 연합사는 한국군을 지휘하는 양대 조직이다. 이러한 두
조직이 작전참모부에 ‘효과중심작전처’를 만들어놓았다. 한국군도 전격전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게 된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독일의 전격전은 소련군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소련은 폴란드를 분할할 때까지는 독일과 한 배를
탈 수 있으나 영원히 같이 갈 수는 없는 처지였다. 첫째 이유로는 소련은 스탈린이 이끄는 공산국가이고 히틀러의 독일은 선명하게 반공(反共)을
내건 국가다. 나치 독일은 독일 내부의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했을 뿐만 아니라 국외의 공산주의자도 제압했다.
히틀러가 독일을 이끌고 있을 때 스페인은 사회주의자들인 인민전선 정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에 대해 프랑코 장군을 중심으로 한 스페인 군부가 반기를 들자(스페인 내전, 1936~1939), 히틀러는 적극적으로
프랑코군을 지원해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하도록 했다.
해양화와 산업화가 늦었던 만큼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자원이 많은 해외 식민지를 확보하지
못했다. 독일은 프랑스가 막고 있는 서유럽보다는 이렇다 할 강국이 없는 동유럽 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유럽, 특히 남동유럽인 몰도바와
우크라이나, 코카서스 지역은 곡창 지대일 뿐만 아니라 석유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그런데 그곳은 소련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어 독일은
이곳을 놓고 소련과 한판을 벌일 필요가 있었다.
히틀러의 과욕, 소련 침공
하지만 프랑스와 소련을 상대로 동시에 싸울 수는 없으므로, 폴란드 공격을 시도하기 전 소련과 전쟁을
하지 말자는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폴란드에 이어 프랑스를 점령해 여유가 생기자 이 조약을 파기할 준비에 들어갔다. 기동부대를 동원한
전격전으로 소련을 공격하는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공격하기 위해 니멘(Niemen) 강을 건넌 것은 1812년 6월22일이다.
그로부터 129년 뒤인 1941년 6월22일 새벽 3시,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하기 외해 리투아니아 등 발틱 3국으로 쳐들어갔다(이날은 독일이
프랑스로부터 정식으로 항복을 받은 지 꼭 1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때는 소련도 독일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었으므로 바로 대항에 나섰다.
북유럽은 광활한 구릉이 이어져 전차전을 펼칠 수 있는 최적지다. 개전 초기 소련은 독일의 전격전에
휘말려 패퇴를 거듭했으니 프랑스보다 훨씬 더 깊은 ‘국토 종심(縱深)’과 ‘동장군(冬將軍)’이라고 하는 혹독한 겨울, 그리고 해빙기와 우기에
정체를 드러내는 ‘진흙 장군(General Mud)’ 덕분에 독일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 이 3대 장벽은 나폴레옹도 돌파하지 못했는데,
히틀러의 독일군 역시 뚫지 못한 것이다.
독일군이 3대 장벽에 막혀 ‘버벅’거리는 사이 소련은 대조국(大祖國)전쟁(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이렇게 부른다)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과 무기를 내놓았다. 이 시기 투하체프스키(1893~1937)가 내놓은 전략사상이 ‘대량군(大量軍)주의적
기계화’ 이론이다. 이 이론은 기동부대를 대량으로 투입해 빠른 시간 안에 승기를 잡는다는 것인데, 이 전술을 구사하려면 성능 좋은 전차를
대량으로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전략을 세운 소련은 T-34라는 당대 최고의 전차를 설계해 월 1000여 대를 생산했다.
그리고 이 전차를 모아 1943년 7월5일 시골 마을인 쿠르스크에서 ‘타이거’와 ‘판터’ 전차로 무장한 독일군과 역사적인 결전을 벌였다.
7월13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독일은 700여 대, 소련군은 850여 대의 전차를 투입했다. 독소 양국은 단일 지상전투로는 가장 많은 물량이
투입된 기동전을 펼치게 된 것이다.
독일의 타이거 전차는 화력이 강하고 소련의 T-34는 기동력이 좋았다. 그러나 화력이 강한 타이거는
발이 빠른 T-34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반면 T-34는 재빠르게 이동하며 ‘주먹만 큰’ 타이거를 효과적으로 요리했다. 격렬한 기갑전이
거듭되는 사이 양측은 각각 300대 이상의 전차가 파괴되는 피해를 보았다.
소련의 大量軍주의적 기계화 전략
시간이 흘러 소련군의 우세가 나타나자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반대를 꺾고 후퇴를 명령했다. 가장
격렬했던 전투에서 독일군이 후퇴하자, 지쳐 있던 소련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반대로 독일군은 결전에서 패했다는 압박 때문에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그 후 소련 육군이 거듭해서 독일 육군을 밀어붙이자, 미영불군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해 앞뒤에서 독일을 압박해 패망시키게 되었다.
쿠르스크 전투는 기갑부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기갑부대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기갑부대는 단숨에 전황을 결정짓는 전격전을 펼치는 무서운 부대인데, 이 부대를 제압하려면 똑 같은 기갑부대를 동원해야 한다. 기갑은 전황을
돌파하는 결전부대이자, 전격전을 펼치는 상대를 막아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결전부대다.
이와 함께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 약소국의 운명이다. 영국은 네덜란드에 영국을 적대시하지 않는 약한
정부가 있기를 원한다. 이곳에 영국을 적대시하는 강한 정부가 들어서면 영국은 바로 참전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강대국에서는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다.
과욕 때문에 실패로 끝났지만 프랑스와 소련이라는 강국에 둘러싸인 히틀러의 독일이 강국으로 일어선
과정도 주목해야 한다. 히틀러의 독일은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해 부르주아가 이끄는 독일의 산업을 부흥시키고,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격적인 통일을
이뤄내면서 일거에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히틀러는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폴란드의 실패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프랑스와 소련에 포위된 독일은 단숨에 두 나라와 견줄 수 있는
강국이 되었지만, 독일과 소련에 둘러싸인 폴란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두 나라의 ‘밥’으로 전락했다. 폴란드는 내부 경제력이 약하고 인구도
적었기 때문에 추락한 것이다. 한국은 절대로 폴란드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 [제2부] 북한 급변사태와 한국군의 전격전 구사 능력
소련식 전격전인 대량군주의적 기계화 이론은 북한군으로 전파되었다. 1950년 북한군은 한반도를
무대로 이 전술을 적용해 한국과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1950년 북한 육군은 열 개 사단, 한국 육군은 여덟 개 사단이었다. 방어망을
뚫으려면 공자(攻者)는 방자(防者)보다 세 배 이상 전력이 강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열 개 사단의 북한군 전력으로는 한국군 방어선을
뚫기 어려운데, 북한군은 단숨에 서울을 점령했다.
북한군은 북한식 ‘대량군주의적 기계화 전략’을 ‘선제타격전략’으로 불렀다. 6·25전쟁 발발 전
한국군은 네 개 사단은 38선에 배치했으나 네 개 사단은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한강 이남에 배치했다. 북한도 전방에 다섯 개 사단, 후방에
다섯 개 사단을 배치했다. 그러나 개전 한 달 전쯤 후방에 있던 다섯 개 사단을 은밀히 38선으로 집결시켜 대량군을 편성하고, 6월25일 새벽
전차부대를 앞세워 진격했다.
선제타격전략의 선봉에 선 북한군의 기갑부대가 105전차여단이다. 105전차여단은 38선에서 패퇴하는
한국군보다 먼저 서울에 당도하는 속도를 자랑했다.
북한은 조기에 서울을 점령했으나 이후 중대한 판단 착오를 범했다. 당시 한국의 대통령 임기는
4년이고, 국회의원의 임기는 2년인데, 대통령은 국회의원들만 참여하는 간접선거로 선출됐다. 6·25전쟁은 마침 한국 국민이 2대 국회의원을 뽑고
난 직후에 일어났다.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것과 유사한 정치 이벤트를
준비했다. 새로 뽑은 2대 국회의원들을 모아 국회를 열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대한민국을 북한에 합병한다는 결의를 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한국은 국민투표를 통해 독일과의 합병에 동의한 오스트리아와 같은 처지가 된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2대 의원들을 찾아 나섰으나 이들이 몸을 숨기는 바람에 국회 개원에 필요한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 2대 국회의원을 찾느라 북한군은 3일을 허비했다. 그리고 정족수 미달로 개원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자 한강 이남
지역으로 진격을 재개했다.
그 사이 가장 강력한 주변국인 미국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24사단을 한반도로 파병했다. 미
24사단은 대전 북쪽에 있는 금강을 이용해 제2방어선을 만들었으나 사기가 충천한 북한군은 105여단과 5열(첩자부대)을 앞세워 이를 가볍게
돌파했다. 이후 미군은 1기병사단으로 하여금 소백산맥에 방어선을 쳤으나 역시 돌파당하고 낙동강에서 비로소 북한군의 진격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미군 방어선까지 연이어 돌파한 북한의 105전차여단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명성을 날린 T-34전차로
무장하고 있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국은 육본 직할의 기갑연대를 갖고 있었으나, 말만 기갑연대이지 실제로는 기갑대대에 불과했다. 이
연대에서 M-8 전차 등으로 무장한 ‘진짜’ 기갑대대는 한 개뿐이고, 나머지는 기병(騎兵)대대와 도보(徒步)수색대대였다.
제 기능 못한 남로당과 ‘부산 赤旗論’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왜 2대 국회 소집에 실패했을까. 그 이유는 남로당의 몰락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1945년 분단 직후 한국에서는 조선공산당이 결성되고 북한에서는 북조선공산당이 생겨났다. 그 후 두 정당은 통합해 조선노동당이 됐는데,
남쪽에 있는 노동당은 ‘남로당’, 북쪽에 있는 노동당은 ‘북로당’으로 불렸다.
남로당은 결성 직후부터 한국을 소비에트화하기 위한 민중봉기를 주도해 미 군정으로부터 지속적인 단속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도 남로당은 그치지 않고 4·3제주폭동과 여순반란사건 등을 일으켰으므로, 한국 국민은 남로당에 대해 각을 세우게 되었다. 이
때문에 1948년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도 의지를 갖고 남로당을 척결할 수 있었다.
1945년부터 1950년 사이 남로당이 한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1950년 북한은 서울을
점령하는 순간 남로당의 도움으로 2대 국회를 소집해 남북한을 합병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남로당의 실패를
간과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북한이 범한 가장 큰 실수다.
두 번째로 북한은 주변국인 미국의 참전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했다. 독일은 프랑스를 치기
위해 네덜란드를 건드리면 영국이 자동 참전한다는 것을 간과한 채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패망했는데, 북한은 그와 유사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영국이 네덜란드를 점령하는 국가와 일전을 벌이듯, 개항 이후의 일본에서는 부산을 점령한 세력에
대해서는 ‘예방적 방위’ 차원에서 싸우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개항 이후 일본은 일관되게 반공(反共) 노선을 유지했다. 따라서 일본은 그들이
적으로 보는 보는 공산세력이 한반도 남부에 붉은 기를 날리는 상황을 매우 두려워한다.
한반도 남부에 붉은 기가 날리는 것을 일본 식자층은 ‘부산 적기론(赤旗論)’이란 말로 압축
표현한다. 1950년의 미군 참전은 부산 적기론과 궤를 같이한다. 부신 적기론은 1980년대 초반 되살아난 적이 있다. 1979년과 1980년
사이 한국은 박정희 정부가 붕괴되는 10·26사건과 ‘5월의 봄’ 그리고 광주사태를 연속해서 겪었다. ‘5월의 봄’과 광주사태는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받았지만 당시는 큰 위기로 인식되었다.
이 위기를 진압하고 등장한 것이 전두환 정부다. 박정희 정부 시절 한국은 중화학공업에 과도한 투자를
해 자금이 달리는 경제 위기를 맞았다.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는 나카소네(中曾根) 총리가 이끄는 일본을 두들겨 60억달러의 차관을 받아냄으로써
이 위기를 넘겼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 경제가 무너지면 좌경화돼, 부산에 붉은 깃발이 휘날린다”는 부산 적기론이 횡횡했기에 강력한 반공
세력인 전두환 정부를 지원하게 된 것이다.
민중항쟁 불러오는 주변국 개입
6·25 당시 미군의 거듭된 증파로 낙동강에 견고한 방어선이 구축돼 북한군이 무력으로 한국을
합병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로 인해 북한군의 전격전에 놀라 나타났던 복속세력인 ‘부역자(附逆者)’는 현저히 줄어들고, 북한군에 맞서
싸우겠다는 저항세력이 급증했다. 북한은 미국과 유엔이라는 외세와 더불어 전 한국인의 저항에 직면한 것이다.
6·25전쟁에 대해 많은 사람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 가운데 하나는 이 전쟁이 참호전으로 전개되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관념은 한반도는 산악이 많아 전차를 앞세운 기동전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인식에서 나왔다. 그러나 6·25전쟁은 1951년
6월21일 유엔 주재 소련대표인 말리크가 휴전을 암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이 호응할 때까지, 매우 빠른 기동전 형태로 전개됐다.
6·25 개전 초기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한미연합군을 몰아붙인 것이 첫 번째 기동전이다. 이에 대해
미군은 해군과 해병대를 이용해 인천으로 상륙했는데, 이는 “바다로는 지상군(해병대)이 기동하지 못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새로운 개념의
‘해륙(海陸) 기동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낙동강 방어선에 몰려 있던 한미연합군이 반격을 시도하는데 이들의 진격속도는
패퇴하는 북한군보다 훨씬 빨랐다. 이때의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끊겼다는 소문 때문에 제2방어선을 형성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일부는 후퇴를 포기하고 지리산 등으로 들어가 빨치산부대가 되었다.
38선 이남을 회복한 1950년 10월1일(공식적으로는 10월7일)부터 한미연합군은 38선 이북으로
북진하는데 이것도 대단한 기동전이었다. 이때까지도 북한군은 낙동강에 몰렸던 전력을 제대로 빼내지 못해 순식간에 압록-두만강으로 쫓겨갔다. 북한군
수뇌부는 압록강 중류에 있는 자강도 만포군 별오리(지금은 장강군 향하리)에서 험준한 산악을 이용해 간신히 방어선을 형성했다.
낙동강 전선이 한국에 가장 위태로운 상황이었다면 별오리 방어선은 북한군에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다.
때문에 북한에서는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별오리 정신’으로 극복하자는 구호가 터져 나오게 되었다. 남로당의 실패로 한국군을 낙동강 방어선까지
몰아붙인 북한이 동조세력을 얻지 못했듯, 별오리까지 북한군을 몰아붙인 한미연합군도 북한 주민의 동조를 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낙동강 전선과 별오리 위기
낙동강에 몰렸던 한국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를 불렀듯이 별오리에 몰린 북한군
수뇌부도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1950년 12월21일 북한 노동당은 별오리에서 중앙위 제2기 3차 정기회의를 열고 패전 원인을 분석하는데, 그
후 북한에서 퍼진 용어가 ‘전국토의 요새화’와 ‘전인민의 무장화’다.
‘전인민의 무장화’는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한미연합군에 맞서 싸우라는 지시다. 임진왜란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을 때 조선의 선비들은 도처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전국에 의병 봉기를
촉구했었다. 북한군 수뇌부는 이와 유사한 지시를 내린 것이다.
나폴레옹군이 스페인을 점령하자 이에 항거하는 스페인 국민이 일으킨 민병대가 ‘게릴라’였다.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후퇴에 실패한 프랑스 군인들과 국민들은 ‘레지스탕스’를 만들어 싸웠다. 공산국가에서 게릴라나 레지스탕스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 단어가 ‘파르티잔(partizan)’이다.
파르티잔은 당원이나 동지를 뜻하는 프랑스어 ‘파르티(parti)’에서 나왔다.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군은 1941년 유고를 침공하는데 이때 유고의 공산주의자들이 파르티잔이라는 민병대를 만들어 대항하면서, ‘파르티잔’은 전 공산국가에
퍼져나갔다. 파르티잔이 북한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별오리 경험 이후 북한은 도처에 지하갱도를 파 전국토를 요새화했다. 이러한 경험의 연장선에서 지난해
10월 북한은 지하갱도를 파 정체가 불분명한 핵실험을 했다. 지하갱도를 파 유생역량을 보존하는 북한군 전술은 베트남에 전파돼, 베트콩들은
사이공(지금의 호치민시) 인근에 유명한 ‘구치땅굴’을 축조했다.
부산에 적기가 나부낄 것 같으면 일본으로 대표되는 해양세력이 개입하듯이 압록-두만강이 해양세력의
영향권에 들어가면 중국으로 대표되는 대륙세력이 개입한다. 6·25전쟁 1년 전인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은 국민당군을 쫓아내고 중국대륙을
통일했다. 어느 나라든 통일 직후의 기세는 대단하다. 그러한 나라의 지도자는 자국의 통일을 위협하는 세력이 등장하면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6·25전쟁 직후의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중국은 한반도 전쟁 추이에 기민하게 대응했다. 한국군이
3사단(백골)과 수도사단(맹호)을 필두로 38선 이북으로 진격하기 시작한 1950년 10월3일,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외교부장은 “미국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하면 중국이 참전할 것”이라는 경고를 보냈다.
맥아더의 방심
북진을 시작한 지 채 한 달이 안 된 10월26일 최선봉을 달리던 한국군 6사단(청성)이 압록강이
있는 초산에 도달했는데, 이것은 6·25개전 직후 북한군이 낙동강에 도달한 것보다 빠른 속도전이었다. 11월21일에는 미 7사단도 압록강에 면해
있는 혜산진에 도착했다.
그러는 사이 중국은 느리지만 꾸준히 병력을 한-중 국경선으로 보내 6·25전쟁에 개입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야음을 이용해 산악으로 보병부대를 투입했다. 독일군이 벨기에로 몰려오는 영불연합국을 포위하려고 아르덴 숲으로 기동부대를
보냈다면, 이렇다 할 기동부대가 없는 중국군은 보병부대를 한미연합군의 후방으로 침투시킨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중국이 참전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이런 판단하에
맥아더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명 ‘크리스마스 대공세’라는 마지막 진격 명령을 내렸다. 이때 팽더화이(彭德懷)가 이끄는 중국의 인민지원군이
나타나 한미연합군을 공격했다. 당황한 한미연합군이 후퇴를 시도하자 후방에서도 매복해 있던 중국군이 나타나 이들을 포위했다.
이로써 한미연합군은 덩커크 철수 위기에 몰린 영불연합군처럼 무조건 퇴각해야 하는 처지로 몰렸다.
미군은 미 해병대 1사단과 한국군 수도사단, 3사단처럼 함경도 지역으로 진출한 한미연합군은 흥남으로 모이게 한 후 배로 철수시키고, 평안도로
올라가던 연합군은 도보로 후퇴시켰다. 이 후퇴는 6·25 개전 초기만큼 다급했기에 한미연합군은 다시 서울을 내주고, 장호원 선(線)에 겨우
제2방어선을 구축했다(1·4후퇴).
별오리로 내몰렸던 북한군이 패전 원인을 심각히 분석했듯, 1·4후퇴 직후의 미국도 철저하게 그
원인을 따졌다. 그 결과 맥아더가 중국군의 참전 가능성을 무시했다는 것, 진격할 때는 상대의 대포위 전술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승리감에 들떠서 이를 무시했다는 것, 상대의 침투를 막으려면 진격하는 부대들이 선을 유지해야 하는데 맥아더는 이를 무시하고 먼저 북진하도록
부대를 경쟁시켰다는 것 등이 거론되었다.
미국은 유엔군사령관을 맥아더에서 리지웨이로 교체했다. 리지웨이 대장은 주변을 살펴보지 않고 무조건
깊이 들어가는 기동전을 자제하고, 전후좌우를 살피면서 조금씩 전진하는 기동전을 구사했다. 리지웨이의 조심스러운 기동전은 장호원까지 내려와 있던
전선을 지금의 휴전선부근까지 걷어 올렸다. 이로써 1·4후퇴를 겪긴 했지만, 한미연합군의 전력이 조중연합군(북한과 중국연합군)보다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951년 6월21일 소련은 은밀하게 휴전을 제의했다. 그러자 ‘동양의 작은 전쟁’으로 알고
개입했다가 중국군의 개입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혼이 난 미국이 호응했다. 화끈한 기동전 형태이던 6·25전쟁이 길고 지루한 참호전·고지전으로
변모한 것은 이때부터다. 참호전으로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이 많은 병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듯 이때부터의 6·25전쟁은 전황 타개 없이 인명의
희생을 요구했다.
한반도 전쟁, 기동전으로 승부가 갈려
돌이켜보면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거개가 속도전·기동전이다. 왜국이 도발한 임진왜란은 비록 조선이
패하는 형태이긴 했지만 속도전으로 이어졌다. 임진왜란은 명나라가 참전해 왜국과 정전을 논의하면서부터 속도가 느려졌다.
조선의 패배로 끝난 병자호란도 엄청난 속도전이었다. 조선을 치기 위해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넌
것은 1636년 12월2일인데 청나라군 선봉은 보름 만인 12월16일 한양에 당도했고 1월30일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한반도의 명운을 가른 전쟁은 전부 기동전이다. 이 기동전은 그때그때의 동북아 정치상황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뉜다. 6·25전쟁과 임진왜란처럼 주변국이 참전한 전쟁과 병자호란처럼 주변국이 참전하지 않은 전쟁으로.
주변국이 참전한 전쟁은 지루한 정전협정이 이어지다 무승부로 끝나거나, 침략한 쪽이 침략을 포기하는
형태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주변국이 참전하지 않은 전쟁은 침략한 쪽이 목표를 달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반도는 화끈한 기동전을 펼칠 수 있는 곳이고 또 주변국이 쉽게 개입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주변국이 개입하지 못하면 전격전을 감행한 세력은 쉽게 한반도를 접수하는 특징이 발견된다. 한반도의 재통일을 준비하려면 이러한 현실을 돌파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프로이센의 전략가인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일부’라고 정의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적국이
쳐들어왔을 때 맞서 싸우는 것만이 전쟁이 아니라, 국익을 이루겠다는 정치적인 판단으로 무력을 투사하는 것도 전쟁으로 본다. 한반도 주변에 있는
4강은 국익을 이루거나 지키기 위한 정치적인 결단으로 전쟁을 일으켜본 나라들이다.
전쟁을 일으켜본 나라는 ‘막연한 평화’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국을 위협하는 세력이 없어야
평화가 유지된다며, 자국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으면 예방적 방위 차원에서 사전에 제거하는 전쟁을 도모한다. 이러한 나라는 공통적으로 지역 패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나라에서는 대개 ‘우리 국민이 누리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다.
지금 한반도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휴전선 이남에 포진한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고려보다
작지만, 고구려 이후 가장 강력한 나라를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GDP 순위뿐만 아니라 국방비 순위에서도 세계 11위권에 올라 있다. 반면 북한은
정체가 불분명한 핵무기를 개발했지만, 국력 순위는 형편없다. 따라서 한반도가 재통일된다면 그 주체는 대한민국이어야 한다.
한국군 전차는 우수 그러나…
통일 문제와 관련해 대한민국은 두 가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첫째는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고, 둘째는 한반도 재통일 문제에 주변국의 개입을 허용할 것인가란 문제다. 먼저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어떻게
억제할 것인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한반도의 명운(命運)을 가른 전쟁이 기동전 형태로 펼쳐졌다면 한국은 기동전에 대비한 전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현대 기동전의 주력은 전차인데 전차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도 전차다. 최근에는 공군의 A-10 공격기와 육군의 AH-64
공격헬기 등 전차를 공격할 수 있는 공중전력이 급성장했다. 하지만 이 무기는 전차의 또 다른 장점인 진격 효과는 발휘할 수 없다.
전차 전력의 향상은 첫째 개개 전차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것, 둘째 전차 대수를 늘리는 것, 셋째
전차 운용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먼저 전차 성능의 향상 문제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이 독일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소련제 T-34 전차의
성능이 독일제 타이거 전차보다 우수했기 때문이므로 한국은 우수한 전차 확보에 노력해야 한다.
현재 북한 육군의 주력 전차는 T-72와 T-62 계열로 추정되는데, T-72의 주포는
125mm이고, T-62의 주포는 115mm라고 한다(북한은 T-62 계열을 국산화한 ‘천마’ 전차를 만들고 있다). 반면 한국 육군의 주력
전차는 105mm 주포를 탑재한 K-1과 120mm 주포를 올린 K-1A1 전차이다.
전차는 주포의 직경이 클수록 관통력이 센 포탄을 발사할 수 있으므로 멀리서 목표물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주포 직경을 키우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직경을 키우면 길이도 함께 길어지는데 이러한 포를 탑재하려면 전차의 전체 크기와 무게가
증가한다. 덩치 큰 전차는 상대의 목표가 되기 쉽다.
따라서 주포 크기 경쟁은 적절한 선에서 멈추고, 전차 포탄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전차의
전면은 대개 30㎝ 이상의 두꺼운 장갑으로 돼 있는데 이것을 찢어버릴 수 있는 전차포탄을 만든다면 기계적, 전술적으로 부담이 큰 거포(巨砲)
경쟁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전차의 성능은 포탑의 회전 능력에 따라 결정되기도 한다. 적진에 들어간 전차는 사방에서 적을
만나므로 포탑의 회전 속도가 빨라야 적 전차를 공격하는 데 유리하다. 전차의 능력을 높이려면 분당 사격 횟수도 높여야 한다.
개개 전차를 놓고 비교할 경우 한국의 K 시리즈 전차는 북한의 T 계열 전차보다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더구나 한국은 K-1 시리즈보다 월등히 우세한 세계 최고의 XK-2 ‘흑표’ 전차를 개발하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북한을 크게 앞지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질적 우세는 다종다양한 환경이 주어지는 실제 전장(戰場)에서는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전차는 주로 평지에서 기동하는데, 한반도에서 전차전을 벌일 수 있는 평원은 대부분 논이다. 논은
수심 10㎝ 정도의 물속에 뻘이 있는데 뻘은 1t당 1㎝씩 침강한다. 40t 무게의 전차가 무논에 들어서면 40㎝ 정도 가라앉는다. 반면
논두렁은 물 위로 20~30㎝ 솟아 있다. 따라서 논을 달리는 전차는 표고 차 60㎝의 ‘작지만 매우 가파른’ 언덕을 자주 타 넘어야
한다.
질적 우세 무너뜨리는 양적 열세
논두렁을 오르는 순간 전차 포신은 하늘을 향한다. 전차의 포신은 지면과 나란한 수평각 이하로는
내려오지 못하므로, 이러한 전차는 전방에 있는 상대 전차를 쏠 수가 없다. 반면 상대 전차는 장갑이 약한 아군 전차의 바닥을 향해 결정타를 날릴
수 있다. 전차 포신이 하늘을 향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무논에서 맴돌 수도 있다. 그러나 맴돌기는 상대에게 목표물이 돼주는 행위가 된다.
한반도는 도처에 전차가 은신하기 좋은 산과 언덕이 있다. 성능이 떨어지는 전차일지라도 산과 언덕에
숨어 있다가 근거리 사격을 하면 성능 좋은 적 전차도 한순간에 깨질 수 있다. 한반도의 자연조건은 성능 좋은 전차라고 하여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2006년 ‘국방백서’는 북한군이 보유한 전차는 3700여 대이고 한국군이 보유한 전차는 2300여
대로, 북한이 한국보다 1400여 대 많다고 밝히고 있다. 전차 대수에서는 한국이 38대 62의 비율로 열세다. 한국군 전차의 성능이 아무리
우수해도 38대 62라는 양적 열세를 가볍게 돌파할 정도로 우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은 6·25전쟁의 경험 때문에 전차 전력 육성에 노력해왔다. 북한 경제력이 무너졌다고 해도 북한
전차는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서 전략가들은 한국은 전차 대수의 증강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99대 98로 끝난 농구시합에서는 패자(敗者)도
최선을 다했다는 박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은 이종 격투기와 같아서 약간의 우세가 섬멸을, 약간의 열세가 전멸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부족한 전차 전력을 메워준 것이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이었다. 주한미 8군은 상대 전차를 잡는
공격헬기로 무장한 항공여단을, 주한미 2사단은 기갑여단과 항공여단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유사시 미국은 수많은 전차를 한국에 보낸다는 작전계획
5027을 갖고 있었기에, 한국은 부족한 전차 전력을 상쇄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이 전차의 운용술이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내가 죽으면 상대를
공격할 수 없으므로 전투는 그야말로 ‘아생연후(我生然後)에 살타(殺他)’의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장기 시합은 아무리 많은 말이 살아남아도,
‘한(漢)’이나 ‘초(楚)’ 같은 장이 떨어지면 패배한다. 따라서 본격적인 공격을 하기 전, 장을 보호하는 ‘궁’을 짜는 경우가 많다.
오방진(五方陣)과 오각편제
포(咆)를 뒤로 빼내고 사(士)의 위치를 바꿔 장을 보호할 궁을 짜는 것이 전투에서는 진(陣)을
짜는 것에 해당한다. 장기는 ‘장기판’이라고 하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싸우나, 전투에는 이러한 제한이 없다. 장기판의 장과 사는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나, 전투사령부는 제한 없이 이동할 수 있다. 전장에 나간 지휘관은 언제 어느 곳에서 상대가 기습해 오더라도 유생역량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전투는 아생연후, 즉 방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반적인 방어는, 기동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산이나
강 같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실시한다. 지형지물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진법은 지형지물이 없는 완전 평지를 상정해 방어에 가장 유리한
형태가 무엇인지 찾는 것에서부터 발전했다.
완전 평지에서 방어하기 좋은 형태의 진을 개발한 후, 이 원형을 그때그때 주변상황에 맞춰 변형하는
것으로 진법은 발전해온 것이다. 동서양의 병법가들은 오래 전부터 완전 평지에서 방어하기 가장 좋은 진으로 ‘오방진(五方陣)’을 꼽아왔다. 여기서
방(方)은 사각형을 뜻하므로 오방진이란 말은 나올 수 없다. 오방진이란 용어가 생긴 것엔 까닭이 있다.
오방진은 사각형의 꼭짓점에 해당하는 곳에 부대를 배치하고(四方陣), 사각형의 가운데에 또 하나의
부대를 배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사방 어느 곳에서 적이 쳐들어와도 2~4개 부대로 대응할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적이 꼭짓점으로 쳐들어오면 꼭짓점에 있던 부대로 일차 대응하고, 좌우 꼭짓점에 있던 부대가
지원한다. 그래도 전력이 달리면 가운데 있던 부대가 출동해 지원한다. 적이 양 꼭짓점 사이로 쳐들어오면 양 꼭짓점에 있던 부대가 막아서고, 이어
중앙에 있던 부대가 출동해 지원한다. 적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쳐들어오면 네 꼭짓점에 있던 부대가 모두 대응하고, 중앙에 있던 부대는 그중 약한
곳을 돌아다니며 지원하는 기동방어를 한다.
오방진을 택하지 않고 6각진, 7각진 혹은 원진(圓陣)을 채택하면 보다 넓게 방어망을 구축해,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벨기에 축선을 선택해 집중 공격한 독일군처럼 어느 한쪽으로만
쳐들어오면, 오방진보다는 적은 병력으로 방어에 나서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삼각형으로 진을 짜고 중앙에 기동 방어부대를 두는 3각진은, 아군의 활동 공간이 협소해진다는 약점이
있다. 일자진(一字陣)은 정면에서 오는 적을 막는 데는 매우 유리하나 후방이나 측면에서 오는 적은 막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5개 여단으로 구성된 기갑군단
오방진은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에도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군이 공격하면 적군은 아군이 접근해올
것으로 예상되는 통로에 일부 부대를 매복시킨 후 아군을 통과시킬 수 있다. 그리고 아군을 정면에서 막아서 앞뒤에서 포위 공격한다. 이러한
포위전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구조가 오방진이다.
전차는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두꺼운 장갑을 쓰고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화력과 기동력을 갖췄으므로,
공격과 방어를 일원화한 무기로 꼽힌다. 공격과 방어를 일원화한 전차와 공격과 방어를 일원화한 오방진이 만나 탄생한 것이 현대 육군의 5각체제다.
5각체제, 또는 5각편제는 한 사령관이 5개 부대를 지휘하는 구조다. 지금의 한국 사단은 3개
연대로 구성되고, 연대는 3개 대대, 대대는 3개 중대, 중대는 3개(또는 4개) 소대로 구성되는 전형적인 3각편제를 택하고 있다. 3각편제는
2개 부대를 앞으로 보내 싸우게 하고 1개 부대는 약한 쪽을 지원하는 예비대 임무를 맡기는 구조다. 이러한 편제는 전방 작전에만 진력하는
‘두터운 일자진(一字陣)’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부대는 후방과 측면 공격에 취약하므로 공격할 때는 일자진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즉
상대가 일자진을 뚫고 후방으로 침투해 포위 공격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동부대는 이러한 선을 만들지 않는다. 기동부대는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구데리안 부대, 파리로
진격한 로멜의 기갑사단처럼 고립을 자초하며 적진으로 뛰어들어간다. 따라서 산지사방으로부터의 공격에 대처할 수 있도록 5방진 체제, 즉 5각체제를
갖추는 것이 좋다.
5각체제의 사단은 5각연대-5각대대-5각중대-5각소대로 구성되니 5×5×5×5=625개 소대를
갖는다. 반면 3각 체제의 사단은 3×3×3×3=81개의 소대를 보유하니, 5각체제의 사단은 3각편제의 사단보다 일곱 배 이상 크다. 때문에
5각편제의 사단은 ‘군단’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5각편제의 연대는 3각편제 사단보다 많은 5×5×5=125개의 소대를 가지므로 ‘여단’으로
부른다.
5각편제 군단라고 해서 모든 것을 5각으로 할 수는 없다. 대대 이하는 3각으로 편제해서 일반
사단보다 약간 큰 3×3×3×5=135개의 소대를 갖는 경우가 많다. 기갑부대는 군단으로 편제하는 것이 좋다. 북한은 5개 여단으로 편성된
820전차 군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기갑군단을 갖고 있지 않다. 한국 육군은 전차부대를 보병부대 지원용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한국군은 7군단 등 5개 기계화보병사단을 갖고 있으나 이 부대는 기갑군단 대용이 되지 못한다.
기계화보병사단의 주력은 장갑차다. 장갑차는 보병 수송이 주목적이라 전차만큼 장갑이 두껍지 않다.
주포도 전차에 비해 현저히 작은 편이다. 장갑차는 상대 전차의 공격을 받으면 한순간에 찢어지지만, 장갑차의 화력은 적 전차를 파괴할 수 없다.
한국군의 전차 대수가 북한군에 비해 38대 62의 비율로 열세인 것은 바로 5각 편제의 기갑군단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시급한 기갑군단 창설
물론 한국은 전차 생산업체인 (주)로템으로 하여금 생산 설비를 확충해 전차 생산량을 늘리라고 하면,
단시간 내에 1400여 대를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엔, 수명이 다해 도태하는 전차를 대체하는 물량이 들어올 때까지 로템은 일감을 잡지
못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 육군은 기갑군단은 차치하고 기갑사단이라도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주)로템이 적정한
수준으로 XK-2 등 우수한 전차를 생산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갑사단을 만들려면 보병사단 해체를 결심해야 한다. 장비가 많은 기갑사단은
보병사단보다 자산 규모가 훨씬 크므로 기갑사단을 만들려면 육군은 두 개 이상의 보병사단을 해체해야 할 것이다.
한국군이 효과중심작전에 눈을 돌렸다는 것은 육해공군의 기동부대를 육성할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뜻이다.
육군의 기갑군단, 해군의 기동함대, 해병대의 공지(空地)기동부대, 공군의 원정군(遠征軍)은 각군을 대표하는 기동부대다. 이러한 부대를 갖추면
한국은 유사시에는 한국을 방어할 수 있고, 평화시에는 상대를 억제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사람들은 평화시에 왜 군비를 증강하느냐고 묻는데 평화를 보장하는 억제는, 군비 증강을 통해
형성된다. 억제를 통한 평화유지는 군비 증강뿐만 아니라 동맹을 통해서도 강화될 수 있다. 가장 강력한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한국에는
평화를 유지하는 지름길이다.
한국이 기갑사단이나 군단을 갖는다면 북한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해군력과 공군력에 이어
육군 전력에서도 균형이 무너지면, 북한 실세들 사이에서는 한국과의 대결을 회피하려는 조짐이 나타나고 일부는 심리적인 투항을 하는 모순이
일어난다. 이러한 모순이 커지는 순간이 바로 ‘북한 급변(急變)’ 사태다. 어설픈 핵과 미사일을 갖고 있지만 무너진 경제력을 재건하지 못하면,
북한의 모순은 더욱 커지게 된다. 이러한 모순이 구식이긴 하지만 엄청난 전쟁 물자를 비축한 북한에서 폭동으로 확대된다면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는
심각한 안보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내란에 참여한 세력은 각자 입맛에 따라 주변국에 도움을 청할 것이므로, 주변국들은 북한 추이는
물론이고 다른 주변국들이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지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다. 이 위기는 누군가가 북한에 들어가 치안을 잡아야 풀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은 침략으로 이해돼 북한 주민들로부터 거센 항전을 받을 수 있다. 좋은 사례가 아프간과 이라크다. 아프간은 소련군이 들어왔을
때는 물론이고 미군이 들어온 지금도 결사 항전을 거듭하고 있다.
미군은 군사적으로는 50여 일 만에 이라크를 접수했지만 이라크를 안정화하는 민정작전에 실패해 고전을
하고 있다. 북한의 치안을 회복하려면 북한 주민들이 항전 의식을 갖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 내전을 종식시킬 군사력과 북한 주민의
항전의식을 불식시킬 매력을 동시에 갖춘 나라는 어디일까.
한반도는 어느 한 외세가 개입하면 다른 외세도 개입하는 곳이다. 만에 하나 한국이 ‘동맹을
활용’하는 차원에서 미국과 함께 북한 급변사태에 대처하겠다고 하면,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이 개입했으니 자국도 해야 한다며 바로 개입할 수 있다.
때문에 한반도 통일 문제에 천착해온 전략가들은 한국은 단독으로 북한 문제에 개입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이 미국을 이끌고 북한 급변사태에 개입하는 것은 전시에만 가동하는 한미연합사를 앞세우는 것이니
주변국에게 ‘전시’라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평시작전권을 가진 합참 주도로 단독 개입하면 ‘평시’로 이해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이 단독으로 북한 문제에 개입할 때 가장 염려해야 하는 것은 중국의 대응이다. 전략가들은 이
문제는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과 중국은 1992년 8월24일,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하는 것으로 과거사 문제는 덮고 바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수교 공동성명은 한중 관계를 규율하는 기본이다. 이 성명에는 ‘양국은 상대의 주권을 존중하고 상대의
영토를 인정하며, 상호 불가침을 하고 상호간 내정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유일한 중국
정부이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과 더불어 ‘중화인민공화국은 한반도가 조기에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과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있다.
중국, 한반도 평화적 통일 지지
여기서 주목할 것이 ‘중국은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고 한
부분이다. 이 문구대로라면 한국이 외세를 동원하지 않고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평시 상태에서 북한과 통일한다면 중국은 지지해야만 한다.
2003년 한국에서는 북한 급변사태 때 한미연합군이 개입하는 작전계획 5029가 밝혀져 논란에
휩싸였다. 이 작전계획은 김영상 대통령-김동진 합참의장 시절 처음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계획은 작성 단계에서부터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첫째 이유는 한미연합사는 북한군이 공격을 한 전시에만 합법적으로 가동할 수 있다는 분석에서 나왔다.
한미연합사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근거로 탄생했는데,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이 공격을 받았을 때에만 한미 양국이 군사적으로 대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 급변사태는 북한이 전쟁을 도발한 것이 아니므로 한미 연합사가 이를 상정해 작전계획을 세우는
것은 법적 타당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연합사가 북한 급변사태에 개입하면 중국은 한미 양국이 전시를 만들었다고 보고,
북한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들은 북한 급변사태는 합참 주도로 한국군이 단독으로 개입하고
미국은 방패막이가 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동북아에서 한반도를 경영하는 정부의 비중은, 유럽 대륙에서 독일을 경영하는 정부의 비중만큼 무겁지
못하다. 한국의 비중은 차라리 네덜란드에 가까운 편이다. 독일과 영국과 프랑스에 둘러싸인 네덜란드가 인접한 소국인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통일을
이루려 한다면 세 강국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세 강국은 네덜란드가 자력으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세 강국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다짐을 하며 아주 빠른 시간에 통일을 해야 마지못해 그 통일을 인정할 것이다.
1990년 독일은 외세 개입 없이 통일을 이루었다. 당시의 콜 정부는 미-독 공조를 중요시했지만
통일 과정에는 미국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미국을 끌여들었다면 다 쓰러져가는 소련은 어떤 형식으로든 독일 통일에 반기를 들었을 것이다. 서독은
미국을 서독을 지원하는 중요한 후원세력으로 둠으로써, 영국과 프랑스도 독일 통일에 개입하지 못하게 했다.
독일 통일은 서독군이 아주 빠르게 동독에 진주해 단기간 내에 동독군의 무장을 해제시켰기에 가능했다.
민주적인 절차로 이뤄지는 통일일지라도 무장한 세력이 반기를 들면 복잡해지는데, 독일은 그러한 과정을 겪지 않았다.
북핵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한 6자회담이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쪽으로 범위를 넓히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남북한을 뺀 4개국이 한반도 재통일을 논의하는 상태에서, 북한 급변상태가 발생하면 4개국이 모두 개입해 한국 주도의 통일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은 6자회담은 북핵 문제 해결에 국한시키고 전체 한반도 문제는 남북한이 주도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북핵 문제를 놓고 6개국이 치열한 신경전을 펼치는 와중에 북한에서 한국과 합병을 바라는 외침과 이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충돌하고, 이 충돌이 점점 커져 희생자가 속출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한국군은 평화유지 활동을 위한 북한 진주를 결정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사전에 주변국들에 북한 치안 문제는 민족 내부의 일이니 한국이 단독으로 대처하겠다는 통보를 해 양해를 얻고 행동을 개시한다.
그리고 막 창설된 한국군 기갑군단에 지뢰가 제거된 경의축선을 따라 10시간 내에 200km 떨어진
평양을 접수해 치안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동시에 공지(空地) 기동부대인 해병대는 원산으로 상륙해 같은 임무를 수행하라는 지시가 내려간다.
평양을 접수한 기갑군단은 곧 북한 수뇌부를 통해 무장해제를 하는 한국군에 협조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 순간 한국군 보병사단이 DMZ를 넘어가 북한군을 무장해제시킨다. 이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쯤
한국은 대규모 대북 원조를 단행해 북한의 기아(飢餓)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고 북한 주민을 상대로 한국과의 합병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통일을 이룬다. 꿈같은 가정이지만 이러한 일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미래는 준비하는 자들의 것이다. 한국은 자기 방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기갑군단을 가져야 한다. 과연
한국은 10시간 내에 평양을 점령할 기갑군단을 단기간 내에 창설할 수 있을 것인가.
(끝)
신동아 2007.08.01 통권 575 호 (p258 ~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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