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일본 혐한(嫌韓) 광풍의 속살] |
“한국은 反日 망상 빠져 날조로 자아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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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출판계 장악한 ‘혐한’ 마케팅
신동아 2014.1월호 |
김경주 │일본 도카이대 국제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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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서는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가 인기라고 한다. 1994년은 한일관계에서도 추억을 되새겨볼 만한 해다. 다만 한국 드라마 속 이야기처럼 서로 공유할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양국 간 역사인식 문제를 둘러싼 갈등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싹트던 시절이라는 것이 다르다. 더구나 그 씨앗은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더욱 굵고 질긴 넝쿨로 자라나 양국관계의 팔다리를 옭아매고 있다. 현재 일본 출판계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혐한류(嫌韓流) 현상’은 한일 역사인식 갈등이라는 넝쿨의 줄기가 얼마나 단단하게 자라고 있는지 보여준다. 일본 사회에서 혐한류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행이 돌고 돌아 다시 시대의 평가를 받는 날이 오듯, 오늘날 일본 출판계의 혐한류는 의젓한 공적 언설로서 일반 대중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오타쿠적 흥행’과는 구분된다. 출판, 방송 등 대중매체의 상품성은 수용자로서 대중의 취향과 욕구를 얼마나 충족하는지에 달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관련 서적이 일본 출판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일본 대중이 그만큼 한국에 대해 알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욕구’가 우려되는 이유는, 그 충족의 양상이 한국에 대해 지나치게 편파적인 정보만을 매개로 이뤄진다는 데 있다. 충분한 근거와 논리를 결여했고, 특정 사례가 과잉 일반화했으며, 한국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정보는 비판이 아닌 비난이며, 그 장르 역시 반한(反韓)이 아니라 혐한이다.
상위 20권 중 4권이 ‘혐한’
일본 최대의 인터넷 서점 사이트 아마존(Amazon.co.jp)을 살펴보면, 2013년 12월 8일 사회·정치 분야 베스트셀러 1위는 ‘보한론’이라는 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한’이란 ‘바보 같은 한국’이란 뜻이다. 실제로 목차에는 ‘창피한 줄 모르는 국제적 비상식 국가’ ‘세계가 경멸하는 불쌍한 나라’ ‘매춘 수출대국의 철면피’ 등 매우 공격적이며 선정적인 문구가 나열돼 있다. 저자인 무로타니 가쓰미는 지지통신사의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서울특파원을 지낸 경력이 있으며, 2013년 4월에는 ‘악한론(惡韓論)’을 출간해 이미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오른 유명인사다. 이 책은 현재 아마존의 전체 서적판매 순위에서도 7위에 올라 있다. 또한 사회·정치 분야 4위에 오른 책 ‘거짓말투성이의 일한 근현대사’는 “한국은 반일(反日)이란 망상과 집착에 사로잡혀 날조로 자아를 유지하는 나라로, 한국의 역사인식은 모두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저자의 주장을 담고 있다. 이 밖에도 16위에 ‘왜 반일 한국에 미래는 없는가’, 20위에는 ‘일본이 싸워줘서 감사합니다’ 등이 올라 있다. 일본 사회·정치 분야 베스트셀러 20위 중 4권이 혐한류 서적이다. 2008년을 정점으로 사양길을 걷고 있는 일본 출판업계에서, 혐한류 서적은 꾸준한 고객층을 확보하는 몇 안 되는 효자상품이다. 문제는 최근 2~3년 동안 혐한류 서적이 큰 인기를 끌면서 보도매체의 역할을 해야 할 일부 신문, 잡지 등 언론매체로까지 혐한류 현상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대표적 우파 언론사인 후지산케이 그룹이 발행하는 잡지나 신문은 원래가 그렇다손치더라도, 보수 월간지로서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문예춘추’는 2013년 10월호에 ‘일중한 100년 전쟁에 대비하라’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실었고, ‘News Week 일본판’은 최근 연이어 ‘반일 한국의 망상’(2013년 10월 1일 발간), ‘미국도 곤혹스러운 한국의 세계관’(2013년 12월 3일 발간) 등을 커버스토리로 실었다. ‘도쿄신문’은 2013년 10월 5일자 기사에서 혐한 보도가 증가하는 이유에 대해 “한일관계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상업성을 추구하는 일본 대중매체와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일본 사회의 우경화 분위기가 맞물린 결과”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소개했다. 하지만 혐한류가 그토록 한시적이고 국한된 현상일까. 만화 ‘혐한류’가 경이적인 판매부수를 올린 2005년만 하더라도 혐한류는 일본 극우세력의 과격한 이데올로기로 치부됐다. 하지만 이제는 더 많은 일본 대중이 혐한류에 몰입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94년,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한일 간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갈등의 공론화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대중화·이론화하는 혐한류 1994년 전후,‘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경기침체의 조짐이 보이면서 자민당 중심의 정치구도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어서 역사인식의 진보성을 표방한 좌파정당이 새로운 연립정권에 참여하게 되면서 침략전쟁과 식민 지배를 사과하는 일련의 ‘과거사 반성 발언’이 일본 정치 수반의 입을 통해 대외적으로 표명됐다. 1993년 발표된 고노 담화에서부터 호소카와 발언, 무라야마 담화 등이 그것이다. 정치 수반들의 진보적이고도 획기적인 역사인식 표명은 보수우익들의 강한 반발을 샀고 일본 국민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갈등을 표면화했다. 진보적 역사인식에 대한 반동으로 정치계와 학계, 언론계를 포함한 보수우익 세력은 결집했고 소위 ‘올바른 역사인식’을 세우기 위한 범사회적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보수적 역사인식이 ‘자유주의사관’ 혹은 ‘수정주의사관’ 등으로 이론화했고, 이것이 언론 매체를 통해 퍼져나갔다. |
이들은 과거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반성한 진보적 역사관을 ‘자학주의사관’으로 규정하고, ‘올바른 애국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 일본의 전쟁은 정당했고 연합국은 부당했다고 재평가하려 했다. 또한 한일합병은 아시아의 해방과 공영의 길을 모색한 것으로 한국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측면에서 재조명돼야 한다는 주장을 공론화했다.
1993년 자민당에 설치된 ‘역사검토위원회’에는 나중에 총리를 지낸 하시모토 류타로와 모리 요시로, 그리고 젊은 시절의 아베 신조 현 총리 등이 참여했는데, 이 위원회에서 1995년 발간한 ‘대동아전쟁의 총괄’은 지금도 수정주의 역사관의 교본으로 꼽힌다. 또한 1990년대 중후반에 결성된 ‘자유주의사관 연구회’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같은 민간단체에도 일본 정계와 연계된 저명한 학자와 언론인, 문화인, 경제인 등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이들은 출판과 방송 등의 대중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새로운 역사관 심기의 유격대 노릇을 했다.
이들이 일본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로서 영향력을 발휘한 시점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국내적으로는 장기화한 불황으로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의 지지를 얻었고, 대외적으로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둘러싼 한·중과의 외교적 갈등 등으로 지지요인이 더욱 강경해졌다.
“우리의 불행은 모두 너희 탓”
일본에 과거사 문제는 역사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해석을 둘러싼 국내 정치적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문제다. 우리가 ‘극우세력’으로 부르는 그들 중 일부의 주장도 늘 갈등과 대립을 전제로 한 편 가르기 구도 속에서 상대의 논리를 공격,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정치적 논법에 의거하고 있다. 따라서 1994년부터 20년이 지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화법은 놀랄 만큼 유사하고 일사불란하다.
문제는 그들이 공격하던 진보 세력이 일본 정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대중매체 차원에서 흥미를 수반한 사회적 설득력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혐한류 1차 파동’ 시점이라 할 수 있는 2005년과 지금 일본 사회의 결정적인 차이다.
2009년 출범한 민주당 정권이 완전히 실패하면서 ‘양대 정당제’로서의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대립에 대한 기대도 사라진 지 오래다. 집권 여당인 자민당 내의 ‘비둘기파’와 ‘매파’의 대립도 파벌정치의 쇠퇴와 더불어 견제와 균형의 구심점이 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일본은 더 이상 아시아의 종주국이 아니다. 중국과 북한의 안보 위협이 높아지고, 종군위안부 문제와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보수세력을 견제할 만한 정치세력이 없다는 것은 결국 ‘대외강경론’이 득세할 상황을 만들어냈다. 2011년 발생한 동북대지진 또한 다양한 의견의 수렴보다는 사회가 하나로 뭉치는 대동단결의 방향으로 일본의 여론을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강경론자들의 ‘공공의 적’은 국내에서 국외로, 일본인에게서 재일외국인으로, ‘자학주의사관’에서 ‘반일국가(反日國家)’로 표적의 방향을 틀고 있다. 일본은 곧 하나이며, 하나가 된 일본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발언과 태도는 그 자체가 반일이자 비판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중요한 것은 나의 정당성이 아니라 너의 부당성”이라는 주장은 언뜻 듣기에는 유치하지만 이들에게는 낯익은 전술이다. 일본 대중매체에 불고 있는 혐한류의 언설은 제목도 내용도 다양하지만 “모두가 네 탓”이란 점에서는 분명 하나다.
사람은 원래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믿고 싶은 것만 취한다. 일본 사회의 혐한류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서도 이 관점이 유효하다. 가끔 일본 대중에게 혐한류에 대해 물으면 대부분이 “그건 일부의 생각일 뿐”이라고 자르면서도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일본을 정말 그렇게 끔찍하게 싫어하나요?”라고 되묻는다. 그간 일본에 전달된 ‘한국이 일본을 보는 시선’이 어땠는지를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다.
요즘 한일관계의 난타전을 보고 있으면 ‘막장 드라마’가 떠오른다. 막장 드라마는 인간의 애증이라는 심오한 문제를 다루면서 황당한 설정과 비상식적인 등장인물을 동원한다. 시청자의 욕구를 손쉽게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막장 드라마는 사회의 지탄을 받지만 선정적이고 막장으로 치달을수록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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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출판계는 혐한류에 동조하는 일본 대중에게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는 혐한류 서적을 출판한다. 여기에 대중매체까지 가세하면서 상황은 더욱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은 혐한류 현상을 일본의 ‘병적 문화’로 치부하면서 문제시하는 데 그치고 저만의 논리를 주장한다. 한일 양국의 진정한 화합과 발전을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채 공격을 퍼붓는 지금의 프레임에서 탈피해야 한다.
(끝)
[특집 | 일본 혐한(嫌韓) 광풍의 속살] |
日 정부 차원 ‘한국경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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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에서 사라지는 ‘한국 흔적’ |
백경선 │자유기고가 sudaqueen@hanmail.net |
‘대마도는 한국 땅’ 이라는 말을 부쩍 자주 듣게 된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일본 정부의 반응이 흥미롭다. 일본 정부는 요즘 대마도에 남아 있는 한국의 흔적을 지우기에 바쁘다. 그 현장을 찾았다. |
독도 외에 한국과 일본 간 또 다른 영토 다툼의 대상으로 대마도(對馬島·쓰시마)가 주목받고 있다. 우리 국민에게 독도는 지켜야 할 자존심이다. 반면 대마도는 쓰시마란 이름의 일본 땅이라는 걸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은커녕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상황을 노골적으로 경계하고 있다. 2009년 일본의 극우단체와 언론이 대마도에서 “조센징은 돌아가라”며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지난 11월 16일 대마도를 방문한 오노데라 이쓰노리 일본 방위상은 “한국 기업의 쓰시마 토지 구입을 감시할 필요가 있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대마도 곳곳에 남아 있는 한국 관련 흔적들을 지우고 있다. 지난 11월 22일 그 현장을 찾았다. 부산에서 배를 탄 지 2시간 남짓 만에 대마도 이즈하라 항에 도착했다. 남쪽에 있는 이즈하라 항은 대마도를 끼고 돌아가기 때문에 부산에서 2시간 정도 걸리고, 북쪽 히타카쓰 항은 1시간이면 충분하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직선거리는 49.5km로 부산에서 제주도까지보다 가깝다. 맑은 날에는 대마도 최북단 후나고시 근처에 있는 한국전망대에서 부산이 보일 정도다. 대마도에서 후쿠오카까지가 138km라고 하니, 대마도는 일본 본토보다 한국과 더 가까운 셈이다. 하지만 거리가 아무리 가깝다 해도 대마도는 한국 땅이 아니라 일본 땅이다. 현재 대마도는 행정구역상 일본 나가사키 현(縣) 쓰시마 시(市)에 속해 있다.
문화재 한국 관련 문구 삭제 이즈하라 항에 도착했을 때 처음 눈길을 끈 것은 “쓰시마 도민은 일한 친선을 소중히 하는 한국인을 환영합니다. 일본 고유의 영토 쓰시마는 역사와 관광의 섬입니다”라고 쓰인 표지판이었다. 단순한 환영인사라고 하기엔 무언가 가시가 돋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난해까지 환영 표지판에는 “대마도를 방문한 한국인을 환영합니다”라는 짧은 문구만 쓰여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샌가 ‘대마도를 방문한’이 ‘일한 친선을 소중히 하는’으로 바뀌었고, 무엇보다 대마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임을 강조하는 문구가 추가됐다는 것이 이번 여행길을 함께한 임영주 창원시 대마도의날추진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겸 마산문화원장의 설명이다. 임 위원장은 최근 일본 정부가 한국을 경계하고 있으며 나아가 “대마도를 재정비하면서 한국과 관련한 역사적 흔적들을 없애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재 안내판을 바꾸면서 한국과 관련 있는 내용을 삭제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한다. 히타카쓰 항 근처 가미쓰시마 읍(邑)에 있는 1500년 된 은행나무를 한 예로 들었다. “가미쓰시마의 1500년 된 은행나무 옆에는 원래 ‘백제로부터 유래했다’는 설명이 적힌 안내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안내판으로 교체되면서 ‘백제로부터 유래했다’는 문구가 쏙 빠졌어요. 대마도가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꼼수인 거죠.” 이뿐만이 아니다. 예전에는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 한국 관련 자료가 많았는데 최근 들어 상당량이 사라졌다. 조선통신사가 일본 본토 방문을 위해 대마도를 경유할 때마다 숙소로 사용하던 서산사(西山寺)는 최근 유스호스텔로 사용되면서 유적지 관광 목록에서 삭제됐다. 대마도는 섬 전체 중 농경지가 3%에 불과한 척박한 땅이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주로 관광수입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한국 관광객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대마도를 찾는 한국 관광객은 연간 15만 명에 달한다. 워낙 가까워 당일치기로 대마도를 찾는 관광객도 적지 않고, 등산과 낚시를 즐기러 대마도를 수시로 찾는 한국 관광객도 많다. 이렇다보니 마트나 음식점 등의 안내판이나 메뉴판에서 한국어를 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한국어 간판들이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다. 이에 대해 임 위원장은 “대마도 주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일본 정부에서 대마도 주민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한국 관광객이 줄면 지역경제에 타격을 입는 대마도 주민에겐 일본 정부의 한국 흔적 지우기가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 |
대마도 곳곳의 한국 DNA
일본 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대마도에는 아직 한국 관련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우리 역사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대마도 도주의 아들과 정략결혼한 고종 황제의 딸 덕혜옹주의 결혼봉축비, 옛 이즈하라 성문으로 조선통신사 행렬을 맞기 위해 만든 고려문, 조선통신사 행렬을 기념하기 위한 조선통신사비, 백제 승려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수선사(修善寺), 항일운동을 하다 붙잡혀 대마도로 압송되면서 “왜놈들이 주는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다”며 버티다 목숨을 잃은 면암 최익현 순국비, 조선 숙종 때 조난당해 목숨을 잃은 역관사 108명을 기리는 역관사비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대마도 사찰에서는 신라 불상, 고려 불상, 조선시대 범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미즈시마 흑뢰성산(黑瀨城山) 꼭대기의 금전성(金田城)은 일본의 전통적인 성이 아닌 한국식 산성이다. 일본의 전통적인 성 안에는 하나같이 우물이 없는데 금전성 안에는 우물과 인공 개울이 있다. 이는 한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토성들과 유사하다. 연구자들은 금전성이 백제가 망한 뒤 백제 부흥군과 한반도에서 퇴각한 백제 유민들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해 쌓은 것으로 밝혀냈다. 이를 통해 백제계 유민들이 대거 대마도로 이주해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
대마도 주민 가운데 상당수가 ‘부옥(釜屋·부산댁)’‘부산(釜山)’‘아비류(阿比留)’를 성씨로 한다. ‘부산 씨’는 일본에서도 대마도에만 있는 성씨이고, 아비류는 아사달·아직기·아사녀·비류백제 등과 어원이 같은 백제 계통 성씨다. 대마도 주민의 혈통이 한국, 특히 백제에서 유래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언어에서도 한국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대마도에서도 지게를 가리켜 ‘지게’라고 한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쓰지 않는 대마도만의 말이다. 임영주 위원장은 “‘지게’를 비롯해 일본 본토와 달리 대마도에서만 통용되는 한국어(한국산 단어)가 300개가 넘는다”며 “대마도 주민들은 한국과 일본의 문화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소설가 이원호 씨는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대마도의 유전자(DNA)는 곧 한국이라는 걸 현지에 가보면 바로 알게 된다”고 한 적이 있다. 2박3일 동안 대마도 구석구석을 돌면서 그 말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씨는 최근 출간한 소설 ‘천년恨 대마도’(맥스미디어)에서 역사적 근거 자료를 바탕으로 대마도는 엄연한 조선 땅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마도는 1867년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쓸모없는 땅으로 사실상 버려져 있었다. 그러다 일본이 어수선한 국제 정세를 틈타 1871년 이즈하라현으로, 1876년엔 다시 나가사키현으로 편입시켰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후 일본은 끊임없이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고 우리와 그들 자신을 세뇌했다”며 “우리가 그렇게 조작된 일제 식민사관을 여전히 지닌 채 대마도를 일본 땅이라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라고 한탄했다.
임 위원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대마도가 우리 땅이냐’고 묻는다면 ‘대마도는 우리의 옛 땅’이라고 답할 수 있다”면서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역사적 자료는 무수히 많다”고 했다. 먼저 조선 세종실록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계림(신라의 별칭으로 지금의 경상도)에 속한 우리나라 땅이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네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들의 소굴이 됐다.”
‘양국의 영토’
조선 영조 때인 1750년대에 제작된 ‘해동지도’ 설명문에는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라고 쓰여 있다. 심지어 일본의 여러 고지도에도 대마도가 조선 땅으로 표기돼 있다. 1592년 일본인이 제작한 ‘조선팔도총도’와 1830년 일본에서 만든 ‘조선국도’ 등이 그렇다. 특히 최근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발견된, 1785년 일본 지리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만든 ‘삼국접양지도’의 원본에는 독도와 대마도가 우리나라와 같은 색깔로 표기되어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 이 지도를 흑백으로 위조해 쓰고 있었고, 이에 대해 묻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부터 6·25전쟁 전까지 60여 회에 걸쳐 일본 정부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을 통해 물자를 공급받아야 했던 한국은 더 이상 대마도 반환을 거론할 수 없었다.
임 위원장은 대마도가 우리의 옛 땅이었음은 분명하되, 우리‘만’의 땅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 양국의 영토였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대마도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 예속돼 있었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계지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대마도에 한국과 일본의 행정기관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근거는 속속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대마도를 우리에게 반환하라고 주장하는 것도 속지주의 원칙상 무리다. 우리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고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 자료가 풍부함에도 일본은 독도를 그들의 땅이라고 계속 우기고 있긴 하지만. 임 위원장은 “현재로선 우리 국민이 대마도가 우리의 고토(古土)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독도에 비하면 대마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미미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마산시 의회는 대마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고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한 데 대응하기 위해 2005년 대마도의 날 조례를 제정했고, 2010년 창원시(마산·창원·진해 통합)는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정했다.
‘한국 관광객 출입금지’
이즈하라 시내에 위치한 한 음식점 문 앞에는 ‘NO KOREAN TOURIST ALLOWED’(한국 관광객은 입장할 수 없습니다)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한국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적대적 움직임에 동조한 것인지, 단지 ‘소란스러운’ 한국 관광객을 거부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불쾌하기는 마찬가지다.
한국 관광객 때문에 먹고살기는 하지만 소란스러운 한국 관광객은 거부한다는 표지판은, 이즈하라 시내를 거니는 동안 여러 번 발견한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한국어 표지판을 생각나게 했다. 설령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영토 다툼과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이를 본 한국인의 감정은 그렇지가 못하다. 감정싸움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일본 정부가 대마도에서 한국의 흔적을 없애는 것은 일종의 선전포고다. 한국 정부는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이 싸움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다. 한국 관광객들을 향해 해맑게 웃으며 손 흔들어주던 이즈하라 초등학생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정치적이지도 계산적이지도 않은 그 아이들의 모습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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