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 미국 대사관저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 앞서 박근혜 대통령(오른쪽)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와 악수하고 있다. 이 모습을 오바마 대통령이 지켜보고 있다. photo 뉴스1 |
기자회견장에서 이에 관한 질문이 없었던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No’라고 대답하거나 유보적인 답변을 할 경우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 기자들은 왜 ‘Yes’라는 대답을 확신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독도 문제를 야기한 것이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대한제국의 영토는 한민족에게 환원되어졌다. 이것이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연합군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입장에 따라 독도를 한민족의 영토로 인정하며 이에 필요한 각종 후속 조치를 취하였다. 1946년 1월 29일 연합군최고사령부 훈령 제677호가 발령된다. 이 훈령은 일본의 통치 대상에서 제외되는 섬으로 리앙쿠르락을 명시하고 있다. 리앙쿠르락이 바로 독도이다.
훈령 제677호
‘일본으로부터 특정외곽지역의 통치권적 행정적 분리’
제3조 본 훈령의 목적을 위하여 일본은 일본의 4개 본도와 약 1000개의 작은 인접 섬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되며, 포함되는 것은 대마도 및 북위 30도 이북의 류큐제도이고, 제외되는 것은 (a)울릉도, 리앙쿠르락, 제주도 (b)북위 30도 이남의 류큐제도, 이즈, 남포, 보닌 및 화산군도와 다이토군도, 파레세 베라, 마르쿠스, 갠지스를 포함한 태평양 바깥쪽의 모든 섬들 (c)쿠릴열도, 하보마이군도, 시코탄섬이다.
훈령 제677호에는 연합군최고사령부 관할지도가 첨부되어 있었다. 당시 한국은 미 군정 직접통치 방식에 의하여 하지 중장의 관할하에, 일본은 미 군정 간접통치 방식에 의하여 맥아더 장군의 관할하에 있었다.
관할지도는 간접통치 대상이 되는 일본의 영토와 직접통치 대상이 되는 한국의 영토를 구분해 놓고 있었는데,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하지 중장의 관할에 속해 있었다. 관할지도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입장은 1946년 6월 22일자 연합군최고사령부 훈령 제1033호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훈령 제1033호
‘일본 어업 및 포경업 승인지역’
제3조 (b)일본 선박이나 선원들은 다케시마(북위 37도 15분, 동경 131도 53분)에 12마일 이내로 접근하거나 동 도서에 접촉해서는 아니된다.
다케시마가 바로 독도이다. 당시 미국은 리앙쿠르락의 한국 명칭이 독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훈령 제1033호는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전제하에 일본 선박과 선원들이 독도 12마일 이내로의 진입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 중장이 관할하던 지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된다. 1948년 8월 11일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 미군 총사령관인 하지 중장 사이에 각서가 교환된다. ‘대한민국 정부와 아메리카합중국 정부 사이의 대한민국 정부에의 통치권 이양 및 미국 점령군대의 철수에 관한 협정’이다.
이 교환각서에 의하여 독도를 포함한 대한제국의 모든 영토가 대한민국에 이양되었고, 대한민국은 독도에 대해 국제법적으로도 완전한 실효 지배를 하게 된다.
당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독도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는 1948년 6월 8일 오전 11시30분경에 있었던 미 공군의 독도폭격사건 때문이었다.
‘8일 오전 11시30분경 울릉도 동방 39해리에 국적 불명 비행기 수기가 출현하여 폭탄을 투하한 후 기관총 소사까지 행하고 사라졌는데, 그곳에 고기잡이와 미역을 따러 갔던 울릉도와 강원도의 20여척 어선이 파괴되고 어부 16명이 즉사하고 10명이 중상을 입었다. 급보를 받은 울릉도 당국에서는 구조선 2척을 9일 저녁 현장에 급파하였다.’
당시 미 공군은 독도를 사격훈련 연습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사고 당일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를 출발한 미 공군 제93 폭격대대 소속 B-29기 편대 21기가 독도 인근에 1000파운드짜리 AN-M-65 범용폭탄 76발을 떨어뜨리고 기관총을 소사했던 것이다.
아직 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상황이라 사건 조사와 수습은 모두 미군의 몫이었다. 그 결과 폭격을 한 B-29 편대의 승무원들이 어선들을 보지 못해 저지른 실수로 일단락되고 만다. 1950년 6월 8일 조재천 경북지사가 독도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건립한다.
‘단기 4281년 6월 8일 59명의 한국 어민이 18척의 배에 분승 출어하여 이 섬에서 조업하던 중 섬이 미군 폭격의 과녁이 되어 14명이 폭사하고 행방불명되었다. 우리는 해양 용사들의 영을 위로하기 위해 이 비를 건립한다.’
이 일을 계기로 독도는 전 국민적 관심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독도는 새로운 위기를 맞는다.
대한민국이 공산화될 경우 독도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이 된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당시 독도를 활용하여 러시아 발틱함대를 궤멸시키고 승리를 일궈냈다. 미국은 대한민국이 공산화될 경우에 대비하여 독도가 일본 영토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두기로 한다.
마침 일본이 독도와 관련하여 강력한 로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던 미 국무장관 주일 정치고문 윌리엄 J. 시볼드가 1949년 11월 14일 미 국무장관에게 전문을 보낸다.
‘리앙쿠르락(다케시마)에 대한 재고를 건의함.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되고 타당한 것으로 보임. 이 섬에 기상관측소와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는 안보적 고려가 바람직함.’
5일 뒤에는 정식으로 의견서를 보낸다. 의견서는 일본 외무성이 1947년 6월 발간한 ‘일본 본토에 근접한 작은 섬들’ 제4권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었다.
‘한국 방향에서 이전에 일본이 속했던 섬들의 처리와 관련하여 리앙쿠르락(다케시마)은 초안 제3조에 일본에 속하는 것으로 처리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되고 타당한 것으로 보이며, 이 섬을 한국 근해의 섬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다케시마의 두 섬은 일본해에서 일본과 한국 사이에 거의 등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1905년 일본이 자신의 영토로 편입할 때 한국으로부터 아무런 항의도 받지 않고 시마네현 오키군청 관할하에 두었습니다. 이 섬은 강치의 서식지로 오랫동안 일본 어부들이 특정 계절에 그곳에 건너가 활동했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서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울릉도와 달리 다케시마에는 한국 이름도 없고 한국 영토로 주장된 적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섬은 점령기간 중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되어 왔고 기상 또는 레이더 기지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시볼드의 제안은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1949년 12월 8일 강화조약 6차 초안에 다케시마가 일본 영토로 명시되었다.
‘일본 영토는 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의 4대 섬과 대마도, 다케시마…를 포함하는 모든 인접 군소 섬들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동안 쭉 한국 영토로 명시되고 있던 다케시마가 일본 영토에 포함된 것이었다. 하지만 6차 초안은 영국을 비롯한 다른 연합군 소속 국가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하였고 7차 초안에는 다케시마가 다시 한국령으로 들어가게 된다.
시볼드가 다시 전문을 보냈고, 1949년 12월 29일 8차 초안, 1950년 1월 3일 9차 초안에는 다케시마가 다시 일본 영토로 명시된다.
논란은 계속되었고 1950년 8월 7일 10차 초안에는 아예 섬들의 명칭을 명시하지 않는 방법이 강구되기도 한다. 1950년 9월 11일 11차 초안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다케시마의 소속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이후 영국과 미국 사이에 7차에 걸친 협상이 이루어진다. 협상의 결론은 강화조약에 독도를 명시하지 않는 것이었다. 강화조약에 독도를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유사시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더 이상 악화되지 않았고 대한민국은 건재하게 살아남았다.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항에 독도가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독도가 일본 영토로 유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미국이 독도분쟁을 야기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연유이다.
당시 미국의 입장은 상당히 일본에 기울어 있었다. 1954년 밴 플리트 미국 대사의 귀국보고서의 내용이다.
‘독도는 일본해에 위치해 있고 대략 한국과 혼슈 중간에 있다. 이 섬은 사실 불모의 무인도로 바위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일본과의 평화조약 초안이 작성되었을 때 대한민국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미국은 이 섬이 일본의 주권하에 남는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 섬은 일본이 평화조약상 포기한 섬들 중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섬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대한민국에 비밀리에 통보되었지만 우리의 입장은 아직까지 공표되지 않았다. 미국은 이 섬을 일본 영토로 생각하지만 양국 간의 논쟁을 방해할 우려가 있다. 이 논쟁을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우리의 입장은 비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 전달된 바 있다.’
미국의 입장이 대한민국에 비밀리에 통보되고 아직 공표되지 않았다는 것은 1951년 8월 10일 대한민국에 극비리에 전달된 러스크서한을 가리키는 것이다.
‘귀하가 보내신 일본과의 평화조약의 초안에 관하여 미국 정부의 재고를 요청하는 1951년 7월 19일 및 8월 2일자 문서를 확실히 수령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유감스럽지만 미국 정부는 그 제안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독도 또는 다케시마 내지 리앙쿠르락으로 알려진 섬에 관해서는, 통상 무인인 이 바위섬은 우리들의 정보에 의하면 조선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결코 없으며, 1905년경부터 일본의 시마네현 오키섬 관할하에 있었습니다. 이 섬은 일찍이 조선에 의해 영유권 주장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은 일본이 제공한 왜곡된 정보에 기초한 것이었다. 당시 대한민국과 일본에 상주하고 있던 미국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은 오히려 독도를 한국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고 러스크의 의견이 반대 증거에 의하여 변경될 수도 있다는 내부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미국은 독도와 관련하여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대한민국과 일본 어느 나라도 맹방으로서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인데, 일본과 대한민국이 독도에 관하여 서로 자기 편을 들어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난처해진 미국은 독도문제 자체는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문제로서 제3자에 불과한 미국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며 발을 빼 버린다.
이러한 입장은 지금까지도 철저하게 유지되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1977년 미국 지명위원회는 독도를 리앙쿠르락으로 고쳐 표기하였고, 2008년에는 독도의 소속국을 대한민국에서 미지정으로 개정하였다가 대한민국 정부의 항의로 원상 복귀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이 독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다.
최근 버지니아주에서 일본해와 동해를 병기하기로 하는 법안이 통과된 일이 있었다.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일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지난 한·미 정상 공동 기자회견장에서 우리 기자들이 독도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적용 대상이 되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우리 손을 들어 주는 대답을 할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미국이 독도에 대해 중립적 입장이라는 것은 독도 수호가 온전히 우리의 몫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미국조차도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라는 점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하고 홍보하여야 한다.
나아가 일본이 독도에 대해 어떠한 도발을 하더라도 지킬 수 있는, 아니 도발 자체를 꿈꿀 수도 없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어야 한다.
변호사·‘독도반환청구소송’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