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으로 인사하는 白髮 소년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60) 일본 산케이
신문(産經新聞) 서울지국장 겸 논설위원은 韓·日 양국으로 범위를 넓힌다면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일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17년 간
살아온 서울주재 最長壽 일본인 특파원이고, 한국 관련 책을 무려 열여덟 권이나 쓴 知韓派의 거물 기자이다. 그 가운데 네 권이 한국에서 번역
출판됐으며 곧 다섯 번째 책 「韓國을 먹다」가 한국어판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일본으로 돌아갈 기약이 없다.
그는 산케이로부터 무제한의 임기를 보장받은 停年(정년) 없는 논객이다. 그는 일본인으로 서울주재 특파원(논설위원
겸직)이면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일본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때로는 충격을 주기까지 한다. 수천명의 한국 기자들과
孑孑單身(혈혈단신)으로 경쟁을 벌여 당당히 특종을 빼앗는가 하면, 핵심을 찌르는 논설과 강연으로 韓日 두 나라 지식인들을 사로잡는다. 아무래도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앞으로 또 다른 구로다 가쓰히로를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 나는 그를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다.
그런데도 그를 만나기로 한 날(9월10일)은 아침부터 다소 들떠 있었다. 나부터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 만날 때마다 늘 웃는 낯이었다. 그는 언제나 뱅글뱅글 도는 안경 속의 작은 눈을 파문 그리듯 깨뜨리며 웃었는데 그 모습이
꼭 白髮(백발) 소년 같았다. 하긴 그의 백발이 한국에서 사는 데 퍽 有用(유용)했다고 한다. 좀 어려운 일이 있어도 長幼有序(장유유서)를
따지는 한국인들이 웬만한 건 봐주거나 슬쩍 넘어가 줬다고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는 그날은 웃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경향신문 건물 13층 그의 사무실(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에서 만났는데, 그는 외출했다가 좀 늦게 들어와서, 긴장된 얼굴로
복사한 서류뭉치를 건네줬다. 최근 국내 미디어에 그가 썼거나 인터뷰한 기사들이었다. 『여기 다 있어요. 그거 보고 쓰세요.
시간이 없어요』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내가 놀라서 그를 쳐다봤더니 그 역시 「조금도 웃지 않고」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만 가줬으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순간 나는 그가, 모든 것이 다 드러나야 하는 장시간의 인터뷰에 부담감을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건드려서 덕볼 일이 없는 韓日 간의 갈등문제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을지 모른다. 얼마 전 산케이 신문과 그 자신에
대한 한국內 비판여론도 의식했을지 모른다. 『韓國岳 아래 가고시마가 내 고향』
우리는 점심시간이 됐으므로 우선 점심이나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합의하고, 지하층에 있는 경양식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의 同感과 異見이
진진하게 펼쳐졌다. 식당에서 그는 새우송이볶음밥을 골랐다. 나는 그것이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메뉴라는 걸 떠올리고 나도
그걸로 골랐다. 그러자 사진팀의 李五峰 팀장도 같은 것을 골랐다. 이 모습을 보고 내가 물었다. ―일본인들은 이런 경우
따로따로 시키지요? 『아니오, 한국 사람들이 주장이 강해서 따로따로 자기가 좋아하는 걸 시키지 않아요? 일본 사람들은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같은 것을 시켜 주는 경우가 많죠』 ―그게 아닌데. 일본 사람들은 어떤 모임에서든지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다 밝히던데. 우리는 오히려 하고 싶은 말도 참는 경우가 많고. 다른 사람 뜻에 휩쓸려 넘어가는 경우가 일본 사람보다 많지
싶어요. 구로다 선생 책을 보면 한국 사람들은 주장이 강하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요? 한국 사람들은
자기 생각, 자기 감정에 충실하죠. 일본 사람들은 서로 얘기하면서 자기 감정을 감추고 상대방이 말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주죠. 상대방과
맞추려고 하는 것이죠』 이렇게 시작된 대화가 장소를 찻집으로 바꿔가며 다섯 시간 가까이 돼서야 끝났다. 나중엔 졸리기도
하고 머리가 아프기도 했다. 그래서 못 다한 부분을 전화로 하기로 했다. 우리는 피차에 부담이 적은 시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는 태평양전쟁 초기인 1941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가고시마(鹿兒島·규슈 南端)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부모님은 가고시마의 가난한 산골 출신인데, 오사카에 돈벌이하러 올라 오셔서 살다가 나를 낳으셨지요. 제
고향이 미야자키하고 가까운 곳이죠. 화산도 많고, 어디를 파도 온천이 나오고. 우리 고향 근처에 화산이 몇 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韓國岳(가라구니다케)입니다. 이름이 왠지 한국이에요.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 ―일본의 古事記와 日本書紀에는
韓國이니 新羅니 하는 말이 많이 나오지요. 아주 옛날부터 일본에선 한국이란 말을 썼으니까요. 오히려 한국에선 대한제국 이후에 많이 썼는데.
『일본 건국 신화의 고장이 가고시마 옆에 있는 미야자키에 있잖아요. 미야자키에는 백제마을(南鄕村)도 있고. 규슈지역은
한반도와 가까우니까, 반도에서 사람들이 건너왔다는 거지요(韓半島渡來說). 그래서 그런 신화도 생기고 그런 이름도 생겼나봐요』
일본의 古事記와 日本書紀를 보면 기원전 660년 일본의 제1대 진무천황(神武天皇)이 하늘에서 미야자키의 휴가(日向)로 내려와서
다카치호노미야(高千穗宮)에서 살았다는 일본판 天孫降臨(천손강림)의 건국신화가 나온다. 그는 고대사 속에 한국과 일본이 함께
등장하는 역사적 고장에서 태어난 것이 오늘날의 그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전쟁이 심해져서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오사카에서 고향 가고시마에 疏開(소개:전란을 피해 흩어짐)돼서 거기서 살았지요. 유치원도 거기서 다녔고 소학교도
1학년까지 그곳에서 다녔어요. 그 후에도 여름방학엔 그곳에 가서 보냈고』 6·25 전쟁 덕분에 古鐵 주워 용돈
벌다 ―그러니까 가고시마의 피가 흐르네요.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주 평범한
분이었어요. 우체국의 하급 관리였어요. 거기서 정년퇴직을 했어요. 어머님은 아주 가고시마 여자였어요. 가고시마가 사무라이의 고장이고 봉건적인
고장이니까 男尊女卑(남존여비) 사상이 심한 곳이지요.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한테 순종해야 했지요. 여자들은 자기 주장을 숨기고 살아야 했어요.
어머니도 꼭 그런 분이었어요』 그는 그런 부모 밑에서 4형제 중 두 번째로 태어났다. 형님은 철도 전기직으로 종사하다
퇴직했고, 다른 동생들도 다 평범하다고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소학교 2학년 때부터 오사카 변두리로 다시 올라온 그는
그곳에서 소년시절을 지냈다. 『한국으로 말하면 영등포 같은 곳이었어요. 연기도 많이 나고, 매연이 아주 심했어요. 끄름이
많이 날아와서 빨래가 물들곤 했지요』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중학교까진 그저
그랬는데 고등학교는 오사카에서 최고 명문학교에 들어갔어요. 덴노지(天王寺) 고등학교라고 오사카에서는 아주 명문이지요. 스포츠도 잘했고,
명문대에도 많이 갔어요. 그때까지 나는 과외도 안 했고, 재수도 안 했어요. 그런 뜻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했다고 할 수
있죠. 학교도 다 국립만 다녀서 돈도 별로 안 들었어요. 대학도 1964년에 교토(京都)대학 경제학부에 바로 들어갔으니까요』
―경제학부를 택한 이유는? 『중·고등학교 때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문과계통으로 가면 재미있는 책을
많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무슨 책이 재미있던가요? 「三國志」도 봤어요? 『일본에선
「三國志」가 인기가 없어요. 중학교 때는 「로빈슨 크루소」, 「15소년 표류기」 같은 모험, 탐험, 이런 거 아주 좋아했죠. 논 픽션, 실록,
체험…』 ―그래서 한국 탐험을 하셨죠, 하하! 중·고등학교 때 무슨 과목을 잘하셨던가요? 『내가 항상
1등이었던 과목이 지리였어요. 지금도 세계지도를 그릴 수 있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외국에 대한 지식이 많아지게 됐어요』
―그때 한국에 관한 지식도 있었습니까? 『학교에서는 그럴 기회가 없었어요. 그런데 오사카에는 재일교포들이 많았어요. 학교
다닐 때 한 학급에 재일교포 학생이 5∼6명씩은 있었어요. 동네에도 재일교포들이 많아서 접촉할 기회가 많았어요. 우리
어렸을 때 기억에 남는 게 있어요.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잖아요. 그때 일본이 전쟁물자 보급기지가 됐지요. 그래서 금속, 타이어 이런 것
값이 많이 올랐어요. 그러니까 고철 값도 많이 올랐어요. 그때만 해도 패전한 지 얼마 안 지나서 廢家(폐가)도 많았는데 그런 데 가면 여기저기
고철이 나뒹굴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꼬마들이 고철을 주워 모아서 팔았어요. 그럼 그게 용돈이 됐어요. 학교 갔다와서 그런 일을 많이 해서
용돈이 궁하지 않았어요. 미안하지만 6·25 전쟁 덕분이에요, 하하하. 그런데 고물을 가져다 파는 데가 재일교포들이 하는
고물상이었어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하고는 늘 접촉하게 됐죠. 그러면서 한국 사람들의 분위기를 대강 알게 됐어요』
左派에 물들어 보낸 학생시절 ―무슨 분위기? 『하나는 마늘 냄새. 또 하나는 목 뒤가
빨갛다는 거』 ―그게 무슨 소리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술을 많이 먹어서 간 기능이 나빠지면
그렇대요. 하여튼 그러면서 한글을 자주 봤는데, 참 신기했어요. 영어도 아니고 한자도 아니고…. 참 호기심이 대단했죠』
―그 당시에 재일교포들이 차별을 많이 받았다는데…. 『그때 애들한테는 그런 감정이 없었죠. 고철을 가져가면 돈을 줬으니까.
또 같이 학교에 다니던 재일교포애들에 대한 이미지가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공부 잘하는 것, 또 하나는 운동 잘하는 것. 나중에 그 친구들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니까, 어떤 사람은 의사가 됐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야쿠자가 됐다고 하고. 하여튼 내가 어렸을 때 재일교포 친구들에
대해서는 나쁜 인상은 별로 없었어요』 ―우린 스스로 그걸 못 느끼는데 지금도 우리한테서 마늘 냄새가 납니까?
『그게 싫다는 건 아니고. 지금은 저도 똑같이 마늘을 먹으니까 잘 모르지요. 다만, 외국에 갔다가 공항에 들어오면 특이한 냄새가
나죠. 일본에 갔다 와도 느껴요. 그러나 내가 여기 오래 살았으니까 공항에서 마늘 냄새가 나면 「아, 돌아왔구나」 하고 안도감을 느끼지요』
―대학시절은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대학 때는 공부 안 했지요. 그 당시 1960년대는 일본의 대학이
좌파로 흘렀어요. 특히 경제학부가 그랬고. 그래서 마르크스, 엥겔스 이런 책을 많이 읽었지요. 또 그때 학생운동이 가장 고조돼 있을 때니까,
左右도 모르고 정의감에 휩쓸려 데모하고 그랬죠. 소위 안보투쟁에 정신이 없을 때였어요. 그러느라고 학교는 거의 안 나가고, 시험이나 가서 보고
그랬죠. 한번은 데모하다가 죽을 뻔했어요. 경찰에 밀려서 학생들이 겹겹이 넘어졌는데, 내가 맨 밑에 깔리게 됐어요. 너무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았어요. 살려달라고 막 소리쳤어요. 간신히 빠져 나왔어요. 아, 그때 죽어서 영웅될 뻔했어요』
―그때 영향받은 책은? 『그 당시 일본의 상황이 1980년대 한국 대학하고 같았어요. 우리가 보는 책도 거의가
左翼(좌익)적인 책이었지요. 左翼의 시각에서 씌어진 한국에 관한 책도 몇 권 읽었어요. 미국의 저널리스트 스톤이 쓴 「秘史 朝鮮戰爭」도
읽었어요. 6·25 전쟁 의 발발에 대해서도 저쪽 시각으로 되어 있었어요. 또 마쓰모토 세이초라는 작가도 左翼적 성향이었는데, 그 사람이
한반도에 관한 논픽션도 많이 썼어요. 그 가운데, 林和가 北에서 숙청당해 죽는 걸 그린 「北의 詩人」이란 책이 있었어요. 아주 두꺼운 책인데,
북한의 입장에서 쓴 거죠. 이번에 林和가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원이라는 자료가 미국에서 나왔죠. 그런데 그 책에서 林和가 美帝의 간첩이었다고 해서
처형되거든요. 그 책을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기본적으로 우리 학생 시대에는 左派였고, 한국식으로 말하면 주사파였죠.
전체적으로 사회 분위기가 그랬어요. 언론계도 그랬고. 나도 당연히 그랬죠』 『밝은 한국 보고 아주 놀랐다』
얘기는 여기서 좀더 발전한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戰後(전후) 역사 교육은 진보적 左派
교육이었어요. 그래서 일본에 대해서도 철저히 비판하는 역사교육이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한반도 지배 문제, 중국과의 문제, 이런 거 다
비판적으로 배웠어요. 그래서 閔妃(明成皇后) 弑害(시해) 사건도, 일본의 浪人(낭인)들이 일으킨 거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安重根
의사한테 저격당했다, 이런 거 학생 때부터 다 읽고 듣고 했어요. 위안부 문제만 해도 일본에서 먼저 책이 나왔잖아요. 당시 한반도 역사에 관한
책이란 게 거의 일본을 강하게 비판하는 그런 책이었어요』 그런 책을 읽으면서 그는 늘 한국에 대해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과 한국 사회를 어둡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도 역시 그랬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바꿀 기회가 왔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어요. 1971년 8월에, 서른 살 때였죠, 교토통신(共同通信) 기자
시절에 동료 기자하고 둘이서 한국에 관광을 왔었어요. 그냥 한번 보고 싶어서 였죠. 그런데 왔다 가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우리가 책에서 본
남조선 사회, 남조선 사람, 이런 거하고 아주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그전까지 우리는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잖아요.
가난하고, 불쌍하고, 동정할 만하고, 그래서 완전히 죽은 것 같은 한국 사회의 분위기…, 이런 걸 생각하고 한국에 왔어요. 한국 사람 하면,
어두운 이미지였으니까요.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까 완전히 달랐어요. 일주일 동안 부산에도 가고, 동해안도 가고, 다
다녔어요. 이상하게도 사람들도 다 밝고, 가난하지도 않고, 친절해서 참 놀랐어요. 재미있는 건, 우리가 서울에 도착해서
제일 처음 찾아간 곳이 수원 제암리 교회였어요. 제암리 사건의 현장을 보고 싶었지요. 그 정도로 우리는 한국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水原(수원) 한국일보 지국에 찾아가서 물었더니 친절하게도 까만 지프에 태워 데려다 줬어요』 ―그때 한국말을
했습니까? 『어릴 때 한글을 본 것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배워 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가 기자가 돼서
친구들하고 1주일에 한 번씩 한국말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단어 몇 개는 말할 수 있었지요. 처음 서울에 와서는
조마조마했어요. 한국 사람들한테 당할까 봐.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참 친절하구나」 하고 느꼈어요. 일본 사람들이 미울 텐데, 왜 그렇게
친절하게 해주나…. 그게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사람들도 열심히 살고, 활발하고, 웃음이 있고…, 아주 이미지가 달랐어요』
그래서 그는 점차로 한국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교토통신에는 바로 입사하셨나요.
『네, 바로. 1964년은 일본이 고도성장을 시작할 때여서 일자리가 많았어요. 교토대학을 졸업하면 일류상사, 은행, 보험회사 어디든 無시험으로
갈 수 있을 때였지요. 그런데 유독 언론계에만 시험이 있었어요. 우리 들어갈 때 경쟁률이 약 300對 1이었어요』 ―그런데
왜 교토통신에 들어갔습니까? 아사히(朝日) 신문도 있고 NHK도 있는데. 『그것도 우리 젊은이들의 左派적 분위기
때문이었어요. 그런 커다란 회사의 권위가 싫었어요. 교토통신은 주로 지방에 있는 작은 신문사에 뉴스를 많이 보내줘서 도와 주잖아요. 거기서
일하는 것이 큰 권위주의적인 거대회사에서 일하는 것보다 보람이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또 한 가지.
당시 교토통신사가 언론사 중에서는 가장 자유롭다는 평이 있었지요. 이건 어떻게 보면 분위기가 좌익적이라고 할 수 있었어요』
부인은 히로시마서 現地調達 ―한국처럼 경찰서 출입부터 하셨던가요? 『아닙니다.
일본에서는 기자로 입사하면 무조건 지방으로 가야 합니다. 그때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렸을 때인데, 1년 간 도쿄에서 견습을 마치고,
히로시마(廣島) 지국에 가게 됐지요. 거기서 1965년부터 4년 간 있었어요』 ―거기서 무슨 일을 하셨던가요?
『낮에는 경찰에 가서 사건 취재했고, 밤에는 야구장에 가서 야구 취재를 했어요. 야구 전문 기자였죠. 그곳의 홈 팀으로 히로시마
카프(Carp, 잉어)라는 팀이 있었어요. 지금도 야구 이야기를 하면 한없이 할 수 있어요. 퍼펙트 게임 알아요? 투수가
한 경기에서 타자 27명을 상대하여, 노 히트, 無失點(무실점)은 물론, 4사구도 없이 끝내는 겁니다. 이 퍼펙트 게임을 보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나는 히로시마에서 2년 간 두 번이나 봤어요. 기자로서는 아주 행운이에요』 ―한국 야구에 대해 한 말씀 코멘트
하신다면? 『일본에도 프로야구팀에 연고지가 있어요. 그런데 한국은 다른 스포츠도 그렇지만 거의가 재벌이 운영하잖아요.
LG, 현대, 삼성…, 그게 좀 재미없네! 일본은 신문사, 전철회사, 슈퍼마켓 하는 다이에…, 이렇게 다양하지요』 ―한국
선수로는 누굴 칩니까? 『그야 이승엽이지요』 ―박찬호는? 『박찬호는 한국에서
프로선수로 커서 미국에 간 게 아니고, 처음부터 미국에서 시작한 거니까 미국 선수라 할 수 있고. 시애틀에서 활약하는 이치로는 일본에서 7년
연속 수위 타자로 뽑혔다가 미국에 갔잖아요. 지금 아메리칸 리그에서 타격부문 1위지요. 이것이 일본의 프로야구 수준을 가늠하는 계기가 됐죠』
이러면서 그는 은근히 일본 야구를 자랑한다. 히로시마에서 그는 퍼펙트 게임을 열 번 보는 것보다도 더
큰 행운을 잡았다. ―그런데 결혼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히로시마 시절에 현지조달했어요』
―예? 『일본 기자들의 경우는 처음 지방으로 발령받아 가서 그 지역에서 부인을 현지조달하는 경우가 많지요』
―우리 어느 職(직) 공무원들 사이엔 초임지가 처갓집이다, 하는 말이 있는데 같은 경우로군요. 『네.
제 경우는 낮에 경찰 담당을 했고, 밤에 야구 담당을 했는데, 법정도 함께 담당을 했었죠. 히로시마 고등법원 총무과에 기자실 담당 여직원이
있었는데, 거기 가면 그 여직원이 나한테 잘해줬어요. 그 직원이 제 집사람이 됐어요』 ―야, 그때 법조기사 특종 많이
했겠군요. 우리 경찰기자 시절엔 경찰서 교환원이나 서장 여비서하고 연애 많이 했는데. 『일본에선 그런 私的인 게 없어요.
안 돼요!』 ―정말? 『정말 안 돼요. 못 했어요. 公私(공사) 혼동하면 안 되지요』
구로다씨는 그때 결혼한 부인 구로다 요코(黑田洋子·56)씨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는데, 큰딸(31)은 대만에 가서 일본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고, 둘째 딸(25)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를 하면서 도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17년 간 혼자서 외롭게 한국 생활 ―지금 부인과는 함께 사십니까? 『아니오,
單身赴任(단신부임). 17년 간 계속 혼자 살고 있어요. 말없이. 외롭게』 일본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 옛날
幕府(막부)시대에 上京 근무하던 사무라이들도, 그땐 다른 뜻이 있었겠지만, 단신부임을 했고, 지금도 일본 국회의원들도 지방에서 당선되면 홀로
올라와 이른바 단신부임을 한다. 일본의 상사원들도 국외는 물론 일본 국내에서도 단신부임하는 일이 흔하다.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하게 돼 있는데…. 『그래도 17년 간 그렇게 살았네요』 ―지금 어디 사세요?
『마포에 있는 14평짜리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고 있어요』 ―밥도 혼자 해먹고? 『대체로
사서 먹지만 일요일엔 생선 조림도 해먹고, 카레라이스 같은 것도 해먹고』 ―한국 음식은 뭐 좋아하세요?
『한정식 먹으면 다 나오잖아요』 뭐든 다 좋아한다는 말 같았다. 1969년, 히로시마
근무를 마치고 도쿄에 돌아와서도 그는 한국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돌아와서 사회부에 10년 가까이 있었어요. 절반
정도를 특별히 담당하는 부서가 없는 遊軍기자(한국에선 특집기자)로 일했고, 나머지는 경시청을 출입했지요. 또 외무성도 담당했구요』
―遊軍기자가 하는 일은? 『사회가 복잡하니까 어느 한 부서나 분야에 국한되지 않은 복잡한 문제가 많고, 또
복잡한 사건도 많고, 그래서 광범위하게 보고 취재하고, 대책을 찾아보는 취재를 하지요. 일본에는 그런 기자가 많아요. 그때 그때 태스크
포스(Task Force)를 구성해서 취재했지요. 이게 저한테는 맞았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구로다 기자는 1973년 8월 이른바 「金大中 납치사건」을 만난다. 『그때 팀을 구성해서 나도 한 멤버로 金大中
사건을 취재하게 됐어요. 매일 일본 미디어에 그 사건이 크게 보도되는데, 내가 보니까 다 한국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으로 쓰는 거예요. 나는
1971년도 한국에 가서 어느 정도 시각교정을 해 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때까지 그렇게 되지 않아서 한국을 어둡게 썼어요.
나도 할 수 없이 기사를 쓰면서 한국에 대한 기사 보도에 違和感(위화감)을 느꼈어요. 한국이란 사회, 나라에 대한 기사 속의 이미지가
너무 어둡고 부정적이었어요. 그걸 보니 내가 본 것 하고 다르잖아요. 물론 사건 자체는 비판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웃 나라, 이웃 사람,
이웃 사회니까 좀더 다양한 눈으로 봐야 되지 않느냐, 좀 다각적 시각을 가져야 되지 않느냐 생각하게 됐죠. 그때 그게
소수파였어요. 내가 회사에서 다른 각도로 한국을 보자고 얘기했지만 무시당했지요. 그래서 내가 좀 불만을 가지고 있었어요』
부산서 한 달 살며 보통사람 취재 그러면서 1970년대 후반까지 金大中 사건 관련 보도가 계속됐고,
한국에 대한 일본 언론의 부정적 시각은 여전했다. 구로다 기자는 그걸 보면서 1977년에 이르러 품고 있던 생각을 펼 기회를 잡았다.
『보통 한국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좀 자세히 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遊軍기자를 오래 했으니까 발언권도 생겼잖아요. 그래서 내가
기획안을 냈어요. 「아시아 시리즈」를 시작하자고 했어요. 그 제목이 「아시아, 살면서 취재하기」였지요. 그 나라에 가서 한
달 동안 살아가면서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취재하는 거였어요. 내가 그 기획물을 책임지기로 하고 첫 번째로 내가 한국을 취재하겠다고 써넣었지요.
그것도 서울이 아닌 부산을 택했어요. 다른 나라는 나한테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1977년 6월에 한 달 동안 부산에
와서 살면서 취재를 하게 됐지요. 그때까지 해외 취재라고 하면 기자가 취재 대상을 찾아다니며 만나보고 기사를 썼잖아요. 나는 그 취재방법을
바꾸자고 했어요. 기자는 가만히 있고 움직이는 상대를 워칭(Watching, 관찰)하자, 그것이 살면서 취재하기(수미코미)다, 그렇게 된 거죠.
그것도 그 지역의 가정집에 들어가서 같이 살면서 취재해야 된다 그거였죠. 그래서 나도 부산에 와서 같은 또래의 가정집에
살면서 그 가정을 취재했죠. 아이 둘이 있는 가정이었지요』 ―재미있었겠네요! 『그 집 식구들하고
생활하면서 식사도 같이 하고 TV도 같이 보고 그랬어요. 그때 집 주인(취재 대상)이 부산 세관에 근무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쉬고 있을
때인데, 애들 방을 비워 줘서 거기서 살았지요. 거기서 먹고 자고 했어요.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 어떤 화제가 오고 갔나,
TV를 보면서는 뭘 보고 웃고, 뭘 보고 우느냐. 매일 뭘 먹느냐. 뭐에 대해 화를 내느냐. 유치원에서 어떤 행사가 있었느냐. 아버지 친구는
어떤 사람이냐, 친구들과 만나서 뭘 하고, 무슨 얘기를 하느냐. 어떤 술을 마시느냐. 일요일엔 어느 산에 가느냐. 이런 걸 취재하면서 그 집
식구들하고 같이 다녔어요. 한 달 후에 일본에 돌아가서 25회로 나눠서 기사를 썼더니 참 반응이 좋았어요』
―말 때문에 고생은 안 하셨어요? 『도쿄에서 1주일에 한 번씩 계속해서 공부했기 때문에 쉬운 말은 할 수가
있었지요』 ―그때 많은 걸 느꼈겠군요. 『1971년에 처음 한국에 와서 느꼈던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됐지요. 집주인 친구들하고 등산도 하고 술도 마시고 하는 사이에, 거제도 출신 여자 친구도 사귀게 됐어요. 晋州 姜씨였죠. 그 여자
친구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아, 이게 한국 여자구나 하고 감동했어요』 ―실례지만 일본 여성보다 더 친절하던가요.
『격의가 없고, 감정과 생각의 표현이 솔직했어요. 일본 사람들은 자제하는 걸 미덕으로 생각하니까, 속을 알 수가 없잖아요.
그 여자 친구를 보고 희로애락의 표현이 뚜렷해서 아주 인상이 깊었죠. 이런 여성들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를 더욱 깊이 알고 싶어졌어요. 그
후에도 편지는 오고 갔는데 다시 못 만났어요. 지금도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기다려 보십시오. 이 「인간탐험」 나가면
연락올지 모릅니다. 마침내 한국으로 유학오다 그는 부산을 경험하고 나서 한국에
대한 더욱 강한 매력을 가지게 됐다. 『부산 취재를 하면서 첫째로 내 말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이듬해인
1978년에 한국으로 유학을 오게 된 것이죠』 ―회사에 그런 연수제도가 있었던가요? 『아니지요.
그것도 내가 또 간부들한테 건의를 했지요. 특수 외국어 연수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지금 우리는 국제화 시대에 살고 있다. 영어, 프랑스어도
좋지만 작은 나라가 쓰는 외국어도 배워야 한다. 첫째 한국말― 이건 내가 가서 배우겠다. 아랍어― 누가 가라…, 이렇게 건의했더니 그게
받아들여져서,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와서 한국말을 배우게 된 거지요. 그게 교토통신에서 처음이었어요』 그는 회사에 없는
제도를 만들어서까지 한국에 와서 말을 열심히 배웠다. 『회사에서 나를 보내면서 절대로 일하지 말고 철저하게 말만 배우라고
했어요. 한 달에 800달러를 줬어요. 돈도 있고 시간도 있으니 얼마나 좋겠어요. 낮에는 연세대학에 다니고 밤에는 신촌에 있는 야간대학에
다니고』 ―야간대학? 『술집이지요. 항상 아가씨가 옆에 있는 술집에 갔지요. 말을 배워야 했으니까요.
그때 참 좋았지요』 1년 뒤인 1979년 3월,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한국말에 대한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1979년 10·26이 터지고, 11월 3일 朴正熙 대통령 國葬(국장)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기시 노부스케씨가
조문특사로 오게 됐어요. 그때 내가 수행기자로 따라와서 한 달 동안 취재를 하게 됐는데, 마침 12·12도 여기서 경험했어요.
그때 전화로 취재할 일이 생겼어요. 전화취재를 몇 번 해보니까,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지요』 구로다씨와 인터뷰를
하는 사이에 약간의 일본인 특유의 억양을 빼곤, 외국인과 인터뷰하는 것 같지 않게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떠세요,
아직도 한국말이 어려우신가요? 『발음에 있어서 「츠」, 「크」, 같은 격음이 어려워요』 ―구로다
선생이 쓴 책을 보니까, 한국말을 할 때는 입에다 힘을 줘야 한다고 하셨던데. 『그래요. 잔뜩 인식을 하고 말을 해야
하니까요』 ―잠꼬대도 한국말로 하지 않으세요? 『꿈속에서도 한국말을 자주 하고 있어요』
―개고기 드세요? 『내가 원해서는 안 가지만 같이 먹자고 하면 가끔 갑니다. 맛은 있잖아요. 처음엔 심리적인
저항감이 좀 있었지만. 지금은 별 문제가 없어요』 격변기에 한국 특파원으로 부임
―그동안 10·26, 12·12,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혹시 「별 수 없군!」하고 한국관이 바뀌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朴正熙 대통령 때도 그랬고, 5共 때도 느꼈던 것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어요. 어느 나라든지 겪어야 할 역사가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어요. 일본도 그동안 근대화 100년의 역사를 보면, 큰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일을 겪고, 또 다른 나라에 피해도 많이 주고 그랬잖아요.
내부적으로도 그랬고요. 그런 걸 생각하며 서양이 아닌 아시아의 나라들이 겪어야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언제 경험하느냐, 마이너스
요소는 어떻게 줄여서 빨리 겪느냐, 하는 것이 문제죠. 언론 통폐합만 해도 일본도 1940년대 초에 그런 일이 있었죠.
여기에 연합통신이 생긴 것처럼 일본엔 동맹통신이 생겼죠. 이런 식으로 기자의 입장에서 워칭했죠.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그 후도 마찬가지였어요.
지금 DJ 정부도 그렇고. 나는 어느 사건에 일체감을 느껴서 몰입하는 일은 안 해요. 항상 거리를 두고 보는 입장이죠. 그것이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이에요』 ―서울 특파원은 어떻게 오시게 됐습니까? 『거기도 아주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1979년 3월에 도쿄에 돌아가서 사회부에 몇 개월 있다가 외신부에서 오라고 해서 옮겼어요. 1980년 3월에 외신부장이
나한테 이스라엘 특파원으로 가라고 제의해 왔어요. 그때 마침 이스라엘 특파원을 교체하는 시기였고, 또 내가 1973년 5월에 일본 적군파가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에서 이스라엘 항공기를 습격한 사건이 있었을 때, 거기 특파돼서 취재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나한테 그런 제의를 한
것이지요. 저는 한국말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아무래도 서울 특파원을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래서 난
「노(No)」 했어요. 「서울에 갔다 온 후라면 모르겠는데, 뭣 때문에 한국말까지 배우고 왔는데 이스라엘에 가느냐」 했더니, 다른 사람을
보냈어요. 그렇게 두 달쯤 있었는데 1980년 5월에 光州에서 시위가 일어났잖아요. 그렇게 되니까 일본 언론의 서울지국이
다 폐쇄됐어요. 기사에 문제가 있다고 계엄사령부에서 나가라고 한 거죠. 특히 교토통신이 먼저 쫓겨났어요. 이렇게 돼서
1980년 5월부터 서울에 기자가 없게 된 거예요. 교토측에서는 고민을 했죠. 그래서, 당신이 한국말도 알고, 한국 사정도 알고, 또
親韓的이니까, 한국정부하고 관계 개선 작업을 하라, 이렇게 됐어요. 제가 이스라엘에 안 갔기 때문에 저한테 기회가 온
거예요. 그때 제가 나름대로 노력을 좀 해서 1980년 9월에 지국이 폐쇄됐는데도 임시 특파원으로 한국 정부에서 비자를 내줬어요. 저하고
마이니치(每日)신문의 시게무라라는 기자하고 둘이 특별히 들어왔죠. 한 달 비자로 서울에 왔지요. 그 후 한 달씩 계속
비자를 갱신해 다음해인 1981년 3월에 지국이 재개돼서 자동적으로 정식 특파원이 됐지요. 이스라엘에 안 간 게
다행이었죠. 1980년 9월에 부임해서 1984년 10월까지 있었으니까 4년여를 여기에 있었지요』 ―光州 사태는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그때 내 머리에 떠오른 게 일본 메이지(明治)시대 초기에 있었던 西南戰爭이었지요. 우리 고향 가고시마가
혁명 주체 세력의 본고장이었는데, 내부분열이 있어서 중앙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어요. 그 과정과 결과에서 부자 간에 싸운 일도 있고,
친구 간에 싸운 일도 있고 그랬어요. 光州도 서울에서 볼 땐 西南 쪽이죠. 나는 그때 그걸 보면서 민주화든 근대화든 그 역사 과정에서 겪는 내부
갈등일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했죠』 지금은 한국의 右派가 어려운 상황 ―구로다
선생이 처음 특파원으로 부임해 와 있을 때가 참 격변기여서 우리로서는 언급하기 싫은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취재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후회도 있고 보람도 있었어요. 먼저 후회부터 말하자면, 그때 내가 40代 초반으로 나이도 어렸고, 말도
서툴고, 인맥도 없었고, 사정도 잘 몰라서 취재를 잘하지 못했어요. 좀더 열심히 했더라면 권력내막 같은 걸 자세히 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요. 그 대신에, 당시 한국 언론들한텐 통제가 많아서, 정보도 적고, 신뢰성도 적었는데, 우리는 그래도 한국
언론이 모르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어서 그런 대로 보람도 있었어요. 지금은 완전히 반대가 됐지요. 정보가 완전히 공개돼서
없는 얘기까지 나오는 세상이니까. 그래서 요즘 우리는 아주 편해졌지만 보람이 없어졌어요. 모든 정보가 다 한국 언론에 나오니까, 우리 같은
외신이 독자적으로 취재할 게 없어졌거든요』 ―당시 정보는 어디서 얻었습니까? 『말하면 안 돼요!』
우리는 하하 웃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때는 군인들 세상이었지요. 그래서 권력핵심이
군인들이었으니까, 군인의 동향, 군부의 인사, 어떤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육사 몇 기가 어느 자리에 있고, 이런 걸 열심히 찾아서 일람표를
만들었어요. 군부대 사단장, 군단장 같은 중요한 군인사에 대한 정보를 표로 만들어서 다음 인사도 예측해 보고 했죠. 항상 신경 쓰며 체크했죠』
―그런 정보는 어디서 구했습니까? 『아주 고생했어요. 軍 OB들이 예편하고 난 뒤에 기업에 많이
있었어요. 특히 방위산업체에 많이 있었지요. 거기선 軍의 동향을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그런 델 많이 다녔어요. 기업의 비서실 같은 곳도.
어떤 재벌 비서실에 갔더니 앞으로 실시할 개각의 명단도 다 나와 있었어요. 며칠 지났는데 그게 맞았어요』 이렇게 군인들이
판을 칠 때, 구로다 기자는 그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기사를 썼다가, 당시 문공부에 불려가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각서를 세 번이나 썼다고 한다. ―요즘은 주로 어디를 취재하십니까? 『요즘은 공개정보로 이 나라의
상황 전망 이런 걸 대략 알 수 있잖아요. 숨겨진 게 거의 없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거의 알 수 있고. 지금은 정보 과잉 상태니까 그걸
분석하고 전망하는 게 중요하죠. 요즘은 누구 만나서 좋은 정보를 듣고 와도 소용없어요. 바로 신문에 나버리니까! 그래서 요즘 외신기자는 별
보람이 없다니까요. 최근 내가 무슨 특종을 했다고 어떤 잡지에 났는데, 그건 이런 배경이 있어요. 지금 이 한국 사회에서
말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아니면 환영을 못 받는 사람들 아니면 그런 세력이 있잖아요. 보수 우파. 그 분들이 한국 언론들에서 대접을 못
받으니까 어쩔 수 없이 우리 같은 보수 右派(우파) 신문(산케이 신문)에 정보를 주는 겁니다. 옛날에는 한국의 左派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右派가 어려운 상황이니까, 그런 분들이 우리하고 친하지요. 또 귀순자들도 외신에 대해서 호의적이잖아요』 지난해
11월 그는 국내 언론과의 경쟁을 물리치고 黃長燁씨 논문을 손에 넣어 특파원으로서 특종 보도를 한 바 있다.
한국을 먹는다 1984년 11월에 그는 서울 특파원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도쿄 본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1986년 아시안게임이 있었고,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 있어서 그걸 취재하러, 또 책을 쓰기 위해 그는 한국에 자주 왕래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에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어요. 그래서 책도 많이 쓰고 강연도 많이 해야
했어요. 그래서 책을 쓰기 위해 또 한국에 몇 번 왔다 갔다 했지요』 구로다 기자가 그때부터 한국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열여덟 권이나 써 냈다. 도쿄의 종이값을 올린 책으로 「한국인의 발상」 「서울발, 이것이 한국이다」 「조선반도의 세기말」 「나의
서울 백서」 「판문점의 벽은 무너질까」 「한국 反日증후군」 「조선반도 21세기의 심층」 「조선반도 다섯 가지 수수께끼」 등이 있다.
한국어판으로는 「한국인 당신은 누구인가」 「한국인은 한국인이다」 「좋은 한국인 나쁜 한국인」 등이 있고, 곧 月刊朝鮮에서 한국 음식
문화 순례기인 「한국을 먹는다」가 나올 예정이다. 『1987, 1988년도 2년 간은 제가 우리 회사에서 받는 봉급보다
밖에서 일해서 받은 돈이 훨씬 더 많았어요. 강연, 잡지 기고, 책 출판, TV 출연, 이런 일로 참 바빴어요』 ―가장
많이 팔렸던 책은? 『「한국인의 발상」이었지요. 후에 문고판으로 나왔는데 합해서 10만 부쯤 나갔어요. 그 책이
1985년도엔가 나왔는데, 한국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거였죠. 머리말에 제가 이렇게 썼어요. 〈「한국 사람은 동양의
이탈리아 사람이다」라는 하나의 가설을 만들자. 가족을 중시하고, 음식이 맵고 짜고, 노래 잘하고, 지정학적으로 대륙에 붙어 있는 반도에 살고,
기후도 비슷하고 기타 등등…〉. 내가 왜 이런 가설을 세웠느냐 하면, 일본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한국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려고요. 한국인은
까다롭고, 화 잘 내고, 어둡고…, 이런 이미지를 바꾸려고 그랬지요』 ―그 가설이 맞습니까? 『그럼,
맞지요』 ―그러니까 구로다 선생은 일본에서의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긍정적 이미지로 바꾸는 데 큰 공헌을 했군요.
훈장이라도 드려야 되겠네. 『그랬지요. 그 당시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停年 없는 無期限 서울특파원』 그는 1989년에 그동안 그를 한국문제 전문기자로 키워준
교토통신을 떠나서 산케이 신문(産經新聞)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저는 서울올림픽 이후 다시 서울에
특파원으로 갈 수 있을까 기대를 했지요. 단수 특파원 시대에서 복수 특파원 시대가 됐으니까 숫자상 여유도 있고, 또 제가 40代 중반이니까, 또
한번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부장한테 물어 봤어요. 「제가 다시 서울에 갈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대답이
「없다!」예요. 「세대교체다. 현장에는 젊은 사람이 가야 한다」 그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그전부터 산케이에서 서울 특파원
시켜 줄 테니 오라고 했었어요. 그래서 기다리라고 했었는데, 교토통신에서 기회가 없다고 하니까, 기꺼이 산케이로 옮겼죠』
그는 1988년 12월에 회사를 옮기고 1989년 1월에 서울로 다시 부임했다. ―스카우트 될 때 봉급도 올랐어요?
『저한테 산케이에서 조건이 있느냐고 물어요. 저는, 봉급은 지금 수준으로도 괜찮다, 다만 이것만 하나 계약서에 넣어 달라고
했어요. 그게 뭐냐? 산케이로 옮기고 서울지국장으로 가면 「임기 없음」이란 말만 계약서에 넣어 달랬어요. 그랬더니 오케이(OK)했어요』
―어허, 그게 가능해요? 여든 살이 돼도 서울지국장 할 수 있어요? 『예, 할 수만 있다면. 올해가
예순 살 정년입니다. 그런데 저는 정년이 없는 기잡니다. 그런 사람이 산케이에 몇 명 있어요. 그래서 저는 정년도 없고 서울지국장의 임기도
없어요』 ―일상적으로 하시는 일은.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어서 한국 관계 논설을 쓰고 있고, 매주
토요일에 「서울에서 여보세요」라는 칼럼을 12년째 쓰고 있어요. 이것도 장수예요. 요새는 제 밑에 젊은 기자가 있으니까 웬만한 일은 그 기자가
다 하고 있죠. 부산 國際新聞(국제신문)에 시론도 쓰고 있고』 韓半島 - 한없이 재미 있는 곳
―한국에서 종신기자로까지 특파원으로 일하고 싶은 그런 매력 포인트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한테는
한반도가 자극적이에요. 한없이 재미가 있어요. 우리 같은 직업인에게는 항상 뉴스 거리가 있어야 하잖아요. 일본과 관련지어 볼 때도 고대사,
과거사, 교과서, 인종적 문제, 다 재미있는 뉴스 거리잖아요. 그래서 제가 지금 쓰고 싶은 책이 많이 남아 있어요』 ―무슨
책입니까? 『언제든 시간만 나면 금방 완성할 수 있는 책이 있어요. 「한국을 노래한다」 대중가요를 통해서 한국역사,
韓日관계, 한국문화, 한국의 심정 등등을 분석해서 쓸려고 합니다. 내가 그런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동기가 있어요. YS
때인 1995년도에 광복절 기념행사가 광화문에서 있었어요. 그때 중앙청을 철거했잖아요. 그때 악단이 「감격시대」란 노래를 연주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그 음악에 대해서 문제가 됐어요. 왜 광복절 기념행사에 그런 음악을 연주했느냐는 거죠. 일제시대 노래가 아니냐. 1932년 일본이 만주
침략을 할 때, 그 일본 정책을 고무하는 노래가 아니냐, 이런 비판적 기사가 나왔어요. 그러자 당국에선 「잘못했다,
미안하다」 했어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 거의가, 남인수의 그 「감격시대」가 광복 직후의 노래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가사, 곡, 이런
분위기가 광복 직후를 표현하는 것 같잖아요. 밝고 힘차게, 밝은 미래를 향해서 나가는 것 같잖아요. 그런 것이 바로 일제시대에 나왔다는 거죠.
그런 것이 일제시대의 한 단면이 아니냐 이거죠. 일제시대가 어떤 시대였느냐. 사람들이 다 억눌려서 어둡고 억울하게만 지냈던
시대였느냐, 그거예요. 그건 한 면만 본 게 아니냐, 일제시대에도 희로애락이 있었던 거 아니냐, 그렇게 과거를 봐야 하지 않느냐 이거예요』
여기까지를 묵묵히 듣고 있던 나는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기간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그때도 기생집에서는 춤을 추고 노래했고, 어디선가 밴드는 행진곡을 연주했고, 親日 부역자들이 배를 두드리며 노래했다고 해서, 그
시대에도 밝은 면이 있었다고, 양면을 다 봐야 한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일본이 우리나라에 와서 京釜線(경부선)도
놔줬다, 학교도 세웠다, 도로도 닦았다, 그러니 잘한 면도 있지 않느냐, 이렇게 말해도 되겠습니까? 물리적 계량적 관찰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건
그런 것으로 계량할 수 없는 정신과 감정의 문제가 훨씬 더 크지요. 여기까지 말하면서 그를 보니 대응을 하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에 대해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구로다 선생이 쓴 글을 보면, 한국 사람들은
임진왜란에서 자기들이 이겼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썼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대다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국보급 문화재도 陶工도 많아 빼았겼어요. 이렇게 자존심과 귀중한 것들을 다 빼앗겼는데 어떻게 이겼다는 생각을 하겠어요. 우리로서는 굴욕적이고
치욕적인데다, 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전쟁이었지요. 그때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거칠어졌느냐 하면, 구로다 선생이
지금 발음하기 어렵다고 하는 激音(격음)과 硬音(경음)이 그때 많아졌어요.「곶」이 「꽃」이 됐고, 「고」가 「코」가 됐고, 「갈」이 「칼」이
됐습니다. 궁궐도 다 탔고, 임금도 달아났고, 사람들은 죽어 나뒹굴고, 먹을 건 없고, 그런 가운데 이런 변화가 일어난 거죠. 그때의 심정이
세월이 흘러도 우리 몸 속에 유전인자로 남아 있는 겁니다. 『安中根 의사, 閔妃 시해 사건 꼭 넣어야』
구로다씨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일본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잘 들어주기만 했다. 그도 인터뷰가 논쟁으로
발전하는 걸 꺼려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이런 문제 때문에 그가 이 인터뷰를 시작할 모두에 머뭇머뭇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지난 3월26일, 그는 산케이에 「북한의 半잠수정이 한국의 남서해안을 침범했다」는 보도를 해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그것이 허위 보도라며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을 폐쇄해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왔던 것이다. 그는 결국 한 달 뒤인 4월25일 더 이상 확인해 줄 정보가 없어서 기사를
정정해야 했다. 이런저런 일로 그는 상당히 조심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할 말은 다 했다. 한참 후에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다만, 한국은 그렇게 약한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도 노력해서 이만큼 됐고, 여러 면에서 볼 때
선진국이라고 볼 수 있죠』 그리고 그는 화제를 옮겼다. 『역사 교과서 문제는, 여러 가지 의견의
차이가 있으니까, 그건 장기적인 안목에서 학자 아니면 교과서 만드는 사람들끼리 의논하고 토론하도록 하고, 거기서 합의되면 수정해야 하는 것이지,
나라 전체가 외교적으로 나서야 하는 건 아닙니다. 나라와 나라가 외교 문제로 대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 문제를 민간차원에서 해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건 또 한국 사람들은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 문젭니다. 지난번 한국 정부가
35개 항목의 교과서 수정요구를 했잖아요.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게, 종군위안부에 관한 기술이 없지 않느냐, 그걸 넣어야 한다, 그건 역사
은폐·축소다, 이겁니다. 일본측에선, 그건 역사의 본질도 아니고, 중학생들이 쓰는 교과서에 그런 것까지 쓸 필요는 없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내 생각은 그것보다, 한국이 후소샤 교과서에 대해서, 왜 安重根(안중근) 의사와 閔妃(민비)
시해사건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고 있느냐, 이 부분을 넣어라, 하고 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중요한 걸 요구하지 않는지 나는 이해가
안 가요. 후소샤 교과서에 민비 시해사건은 아예 안 나와 있고,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됐다고만 나와 있지 누구한테
암살당했는지는 안 나와 있어요. 이거야말로 韓日 근대사에 필수적인 항목인데, 이건 무시하고 위안부를 쓰라고 하니, 이건 오히려 한국 정부의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교과서 문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일본어
모르고 외교 문서 쓰다니』 『그 35개 항목에는 의아한 것도 꽤 있어요. 예를 들면 東學에 대해서 일본 교과서에
「東學의 亂」이라고 기술돼 있는데, 이것은 왜곡이다, 그러니 「동학농민항쟁」으로 기술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抗爭」이라는 말은
「야쿠자 항쟁」이라든지 「파벌항쟁」처럼 부정적인 의미에서만 사용돼요. 일본어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도 없이 외교문서를 작성한 거죠.
또 있어요. 金玉均을 「친일파」라고 기술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고 있는데 일본에서 친일파란 말엔 부정적인 의미가 없어요.
그런 반면에, 한국 정부의 요구에는 동학 진압을 위해 출병한 일본군을 「倭軍」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당시 청군은 있었지만 왜군은
없었어요. 19세기의 일본군을 왜군이라고 한다면 이거야말로 모멸적이고 차별적 용어라고 할 수 있죠. 일본이 한국에 대해 외교문서에서 이렇게
모멸적이고 차별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아마 한국에서는 대소동이 일어날 겁니다』 ―교과서 때문에 일본 관광객이 격감했다죠.
『실제로는 그렇게 격감하지 않았어요. 일부 단체교류가 한시적으로 중단됐지만 큰 문제가 아니었죠』
―독도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도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섬을
한국이 장악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한국 것이에요. 그걸 일본 것으로 만들려면 전쟁밖에 없어요.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던
것처럼 그런 방법밖에 없는 겁니다. 일본측에서는 국민도 그렇고 정부도 그렇고 그 섬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어요. 전쟁까지
해서 일본 것으로 만들 대상이 아니어서 방치하고 있는 겁니다. 최근 일본 사람들한테 다케시마(竹島, 독도의 일본식 이름)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80%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대답했어요. 그러니까 독도는 한국 것인데 한국에서 자꾸 만세 부르고 훈련하고
하니까, 일본이 자극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일본 지방정부나 정치인들이 자꾸 엉뚱한 망언을 해서 문제지요.
『그건 질문이 나오니까 그러는 것이죠. 「한국측에서 훈련도 하고 만세도 부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기자들이 질문을 하니까,
「아, 그건 일본 영토다」 그러는 것이죠』 글쎄, 그런가. ―취미는? 『원고
쓰는 것, 인사동 古서점 찾는 것. 광복 직후 나온 정치인들의 회고록을 많이 삽니다』 ―영화 좋아합니까?
『최근에 「엽기적인 그녀」를 봤고, 「공동경비구역」 「쉬리」 다 봤죠. 그것도 그 시대의 정보고 문화니까. 기사도 쓰고 비평도 쓰고』
北韓은 정권 강화 위해 韓國 이용 ―희망적인 얘기는 없을까요? 한국과 일본은
누가 뭐래도 인종적,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인데, 21세기에 서로 협력해서 좋은 일을 할 수 없을까요?
『야, 그런 기회가 없는 거 아녜요. 사실 이웃 나라가 서로 잘 지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아닙니까.
인도-중국, 인도-파키스탄, 베트남-캄보디아, 프랑스-독일, 다 그렇잖아요. 이웃 나라는 대개 서로 안 좋은데 그건 이해관계가 서로 교차돼
있으니까 그렇죠. 서로 가까이 있으니까, 서로 많이 알고, 서로 안 좋은 게 많이 보이니까, 대립하는 경우가 많죠. 반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사이가 좋아요』 ―그러나 미국-멕시코-캐나다, 유럽의 여러 나라, 아시아의 여러 나라, 이런 나라들이 공동체나 공동 시장을
만들어서 서로 협력하면서 잘 살지 않습니까? 韓中日도 그렇게 발전되지 않을까요. 『백년 단위로 생각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죠. 영국과 프랑스가 그렇죠. 전쟁하다 또 사이좋게 지내고. 노르망 사람들이 건너가서 만든 게 영국이니까, 바로 한국하고 일본과 비슷하죠.
그랬던 두 나라가 지금은 안정돼서 사이가 좋죠. 한국과 일본도 길게 백년 단위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한국이
경제적으로 더 성장하고 외교적으로 더 세련되면. 그러나 월드컵하면서 몇 번 왔다 갔다 했다고 당장 쉽게 그렇게 될 수는 없다고 봐요』
―일본의 고이즈미 정부가 右傾化돼서 잘 나가고 있고, 구로다 선생도 右傾化된 것 같은데. 『일본이
右傾化했다기보다 일본이란 국가가 정상화돼가는 프로세스다, 전 이렇게 봅니다. 일본이 전후에 핸디캡 네이션(Handicap Nation)이었는데,
뭔가 부족했던 나라가 보통 나라가 되려고 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저는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걸 右傾化다, 보수화다, 이렇게 볼 수도 있지요』
―요즘의 한국은 어떻게 보십니까. 『많이 左傾化됐지요. 그래서 일본의 정상화가 右傾化로 보이는 거죠.
일본이 그동안 너무 左傾化돼 있었고, 교육도 左傾化돼 있어서, 이번에 그걸 수정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교과서 문제로 나타난 거예요. 굽은 것을
펴려니까, 반대쪽으로 더 많이 구부릴 필요가 있었던 거죠』 ―햇볕정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서로 이용하려고 하는 의도가 일치한 거지요. 전 북한의 체제에 대해선 그렇게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남한의 정권은 임기가
5년밖에 안 되는 반면 북한의 정권은 임기가 없습니다. 영원하죠. 북한에서 볼 때는 지금의 남한 정권을 자기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정권으로 보고
철저히 이용하는 거지요. 오로지 이익을 얻기 위해서. 화합이라든가 협력이라든가 하는 것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북한은 오로지 정권의 유지, 정권의
강화를 위해서 남한을 철저히 이용하는 거지요』 ―한반도 전문기자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예, 지루하지 않으니까』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에 그는 결론처럼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일본에서 강의할 때 마지막에 하는 말이 이거예요. 金玉均 선생이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 된다면 우리는 동양의
프랑스가 되자」 100년 전에 이런 좋은 말씀을 하신 분이 계셨는데 우리는 지난 100년 간 그걸 실현 못 했어요.
지금부터 21세기 100년을 생각할 때, 한국과 일본이 그런 동양의 프랑스와 영국이 될지 모르겠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 시발이 월드컵이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