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식민지근대화론의 커밍아웃

이강기 2015. 9. 27. 10:50

식민지근대화론의 커밍아웃

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2005-03-08 .서울신문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가 일본 우익성향의 잡지에 “일제의 식민지배는 축복”이라는 논지의 글을 기고해 큰 파문이 일고 있다. 대부분의 네티즌, 언론, 시민단체가 그의 주장을 맹공하는 논평을 내놓고 있다. 그의 ‘식민지 미화론’은 소위 일본발 ‘망언’보다 훨씬 수위가 높고 표현과 논리도 거칠다.

각계의 대응도 거칠고 폭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논란에 끼는 것은 유쾌하지 않지만, 파문이 일어난 뒤 오히려 “공론화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반응에서 보아 사회와 학계에 끼칠 영향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돼 한마디 거들기로 한다.

식민지배 문제에 초점을 맞춘 여론의 질타와는 달리 한 교수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이다. 국회에 계류돼 있는 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의 의미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정치적 발판을 붕괴시키고 기득권층인 보수세력을 무력화해 좌파세력의 장기집권을 꾀하려는 것이라고 본다. 정치학자다운 판단이지만 동시에 그가 어떠한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지도 명확하게 보여준다.

영구집권을 꾀한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헌법을 ‘한국적 민주주의론’으로 분식(粉飾)한 그에게, 노무현 정권의 탄생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이었을 것이다. 극단적 수구냉전 사상에 젖어 있는 그는 노정권이 추진하는 정책을 좌파적·친북적인 것으로 보고, 일련의 민주개혁 입법을 좌파세력의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공격한다.

이처럼 그의 주장은 노무현 정권과 정책에 대한 증오감에서 기인한다. 노정권을 공격하고 박정희 독재권력을 옹호하는 연장선상에서, 일제 식민지배에 의한 근대화 찬양, 러시아가 아닌 일본에 의한 병합의 불가피성을 강변하고 있다. 이러한 전도된 역사의식은 일본 극우 인사들에게서 자주 나오고,‘수탈을 위한 개발론’이라는 학술적 주장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처럼 “한국사회의 이른바 기득권층인 보수세력이 일제치하에서 항일 독립운동보다도 크거나 작게 일본에 협력한 자들”이라는 점을 당당하게 인정하고, 친일행위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옹호, 자랑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이것이 그의 경험적 인식은 아니겠지만 그가 옹호하는 집단을 대변한 효과는 충분하다. 민족을 억압하고 일본에 협력한 자들이 대한민국에서도 버젓이 기득권층으로서 권력과 부를 독점했다면 부끄러워하고 반성해야 할 일이 아닌가. 기득권층의 경제력 독점에 의해 심각해진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고, 독점했던 권력을 국민에게 되돌려야 최소한 박정희 개발독재의 경제적 효과만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역사와 사회를 보는 관점이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관점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옳은지 그른지는 개인의 주체적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한 교수의 역사관과 세계관은 인권과 평화를 추구하는 관점은 분명 아니다. 반공과 반북만이 모든 현상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오늘의 상황을 자신이 자주 언급하는 국제정세의 측면에서 보지 않고 오직 냉전시대의 맹목적 반공주의에 매달리고 있다. 반공을 위해서는 민족의 희생도 감수한다.

나는 이번 파문을 보면서 그가 객관성·학문성을 들먹이면서도 주장 전체가 들뜬 적대적 감정에 충만해 있는 점이나, 그의 주장이 소위 망언의 종합판 같은 성격을 지닌 점보다도, 한국의 명망 있는 전문지식인이 친일행위 옹호의 금기를 과감하게 깼다는 점에 걱정이 앞선다. 사실 최근 학계에서는 탈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이 신학설인 양 주목받아 왔다. 식민지 경험 내지 파시즘을 근대화의 길로 인정하는 근대화론의 해묵은 이론을 가지고 일제 식민지의 경제적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렇지만 식민지 민중에 대한 억압과 수탈이 없었다고 하지는 않았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식민지 미화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극구 발뺌해 왔다. 그러나 이번 한 교수의 식민지 미화론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커밍아웃’이 어떠한 모습일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학술적 형식을 띤 보다 충격적인 식민지 미화론의 출현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조선데스크] 한승조 교수가 놓친 것

이선민 · 문화부 차장대우 smlee@chosun.com
입력 : 2005.03.14 18:25 03'


 


▲ 이선민 / 문화부 차장대우
일본의 한국 지배가 “오히려 축복이었다”는 한승조 교수의 일본 잡지 기고는 일제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한국근현대사의 큰 물음을 다시 한번 제기했다. 한 교수의 ‘망언’(妄言)을 규탄하는 국민적 분노의 함성이 높고, 급기야는 한 교수 본인은 물론 그가 봉직했던 고려대까지 사과에 나서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회 일각에서는 한 교수의 입장에 동조하는 의견도 피력되는 등 사태는 쉽게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이번 문제는 한국 내부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또 다른 당사자인 일본도 ‘한승조 파동’에 관심을 가질 것이고, 한·일 간의 논란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각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이제는 ‘민족 감정’에 따른 흥분을 누그러뜨리고 도대체 일제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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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를 바라보는 한국의 고전적 입장은 ‘수탈론’이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여 근대화를 가로막고 식량과 자원 등을 약탈하였다는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 한국인의 경험에 바탕을 둔 이런 인식은 학계로 그대로 이어져 오랫동안 별다른 의문 없이 통용됐다.

이런 통념에 도전을 던진 것은 일제시대에 한국의 근대화가 본격화됐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이었다. 일부 일본 학자들이 일제 통치의 ‘시혜(施惠)’를 주장한 것은 일찍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사학자들이 실증적 연구를 바탕으로 일제시대의 ‘경제적 발전상’을 주장하면서부터였다. 이 주장은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수탈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의 논쟁은 평행선을 달리며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한국도 소장·중견 학자 중에서 고전적인 수탈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한 최근에는 학계 일부에서 1930년대 서울 등 대도시에서 나타난 근대적인 사회상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그러면 이런 사실이 한승조 교수 등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가 이룩한 ‘근대화’의 성과가 식민 당국에 의해서만 이룩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시 국내에서 활동했던 민족운동가들은 식민지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근대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적어도 1930년대 중반까지는 언론·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한글 보급과 교육 확대, 산업 건설 등에 힘쓰는 한편 식민 당국에도 근대화 시책의 시행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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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의미 있는 근대화의 지표들은 이런 한민족의 적극적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19세기 후반부터 활발하게 계속돼 온 자주적 근대화 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다. 물론 식민지 상태에서 이룩된 근대화는 일그러진 모습이지만 이는 우리만의 상황이 아니며, 이미 국제학계에서 ‘식민지적 근대성(Colonial Modernity)’이라는 개념으로 정립돼 있다.

결국 ‘식민지 미화론’의 잘못은 우리 조상들이 피땀 흘려 이룩해 놓은 근대화의 성과를 몽땅 일제(日帝)의 공으로 돌려버리는 데 있다. 이번과 같은 발언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한민족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인 20세기 전반기에 민족운동가들이 어떻게 고난을 헤치며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지를 보다 깊이 이해해야 한다.  

 

 

中. 한·일 식민지 근대화론의 차이

 2005년 3월14일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

문제가 된 후소샤(扶桑社)출판사의 개정판 역사교과서 검정신청본은 2001년 나온 현행판과 비교할 때 '조선의 근대화'를 유달리 강조하고 있다. 크게 보면 두 군데다.

하나는 개항 이후 "조선의 근대화를 돕기 위해 군대의 제도개혁을 원조하였다"(164쪽)는 대목. 이 내용의 앞뒤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관한 설명을 붙여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방위 차원에서 불가피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한국 병합'이후 조선을 개발했다는 대목. 조선총독부가 "철도.관개 시설을 정비하는 등 개발을 하고, 토지조사를 개시하며 근대화에 노력했다"(170~171쪽)는 것이다. 이 대목에는 '대만의 개발에 힘을 기울인 하타 요이치'라는 칼럼을 이번에 함께 새로 넣어 식민지 개발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조선총독부가 3.1운동 이후 무력으로 억누르던 지배방식을 바꾸었다고만 서술하고 있지 한국인의 저항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후소샤의 검정신청본은 조선에서의 근대화를 부각하면서 한국인이 당한 정치적 억압과 고통을 무시하고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왜곡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기보다 '식민지 미화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지 않고 특정 부분, 특히 경제적 측면에 주목해 일제 강점기를 보려는 태도는 한국의 '식민지 근대화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한국의 '식민지 근대화론'에도 여러 주장이 있어 하나로 뭉뚱그려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이 주장은 1960년대 고도성장의 역사적 배경으로 식민지 시기를 주목한다. 그리고 경제 통계를 가지고 설명한다. 후소샤의 검정신청본도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오늘의 일본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 나라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는 일본인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만들었다. 이들의 '식민지 미화론'은 단지 조선을 지배한 사실을 숨기려는 생각에서만 제기한 주장이 아닌 것이다.

두 주장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식민지 미화론'은 '평화헌법'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전후(戰後) 민주주의를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한국의 일부 '식민지 근대화론' 역시 4.19 혁명에서부터 6.10 민주화운동까지의 민주화 과정과 인권의식의 발전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학계의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적 민족주의를 긍정하지 않는다. 이 점이 '식민지 미화론'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최근 일본의 지배가 '불행 중 다행'이며 우리에게 '축복'이었다는 어떤 지식인의 발언과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입장은 한국과 일본의 오늘을 이해하는 접근법에서 일치하기 때문에 현재의 정치와 과거 인식에서 근접할 수 있는 여지가 아주 많다.

아무리 일제 강점기라 해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기에 일상은 있었다. 일상은 그 시기의 삶을 총체적으로 반영한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는 한국인의 삶을 정치나 경제, 개발과 수탈(침략) 내지는 근대적 체험 가운데 어느 한 요소만으로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요소를 규정하는 기본은 일본 제국주의가 지배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