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탐험] 소설가 박완서 "대체 이데올로기가 뭐간데..."
6·25는 그 세대의 시작이자 끝... '비통한 가족사'가 작품 원천 .'마담 뚜'란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프랑스어 '마담' 에 특수층 내지 부유층 상대의 전문 중매쟁이를 뜻하는 순 우리말 '뚜쟁이'를 합친 용어다. 국어사전에도 올라있는 이 단어는 1977년 이전에는 없던 말이다. 왜냐. 소설가 박완서가 그 해 펴낸 '휘청거 리는 오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낸 표현이기 때문이다. 언어도 생로병사가 있어, 태어나고 사랑받고 소멸한다. 무릇 언 어 구사의 최고 수준을 보여야 할 작가들의 책무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괴테가 아니었던들 유럽의 '촌사람들 말'이었던 독일어가 과 연 지금의 대접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러시아어의 입장에서, 푸 시킨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또 어떠한가. 현재 '저자'라는 이름을 달고 함부로 글을 써제끼는,주로 젊은 층에게 질문을 던져본다고 가정하자.
-다음 단어의 뜻은? 암상, 허방, 야비다리, 더리쩍다.... 모두 사전에 있는 말이고, 박완서씨의 근작 단편 '너무도 쓸쓸 한 당신'에 나오는 단어다. 소설을 읽다 보면 대부분 짐작이 가는 표현들이지만, 막상 언어를 요리해야 하는 작가 입장에서는 다를것 이다. 소명의식이든 개인적 취향이든, '작가적 고민'이 없다면 떠 오를 리도 없는 아름다운 우리 말들이다. 알아먹지 못할 단어에는 알레르기 반응부터 보이는 체질이라면 이런 건 또 어떤가. <줄창 내복에 달라붙은 가시처럼><짖어대듯 정 열없는 고성> <데친 토마토처럼 농익은 신열>. 같은 단편에 실린, 생생한 구어의 조합들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그런 작가다. 오죽하면 지난 80년대초 '엄마의 말뚝 2'로 이상문학상을 받았 을 때,심사위원들이 <특히 이 작가의 유려한 문체와 빈틈없는 언어 구사는 가히 천의무봉이라 할 만>이라며 극찬을 했을까. "이 부분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없을까, 다른 표현은 없나 하고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떤 땐 너무 괴로워요.". -메모를 많이 하세요? "시대적 배경 지식이라든지 정보가 필요한 때 하지요. 표현이나 작품 진행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그때 그때 적어둡니다.". -잘 안써지면 어떻게 하십니까 "마음먹은 대로 안 될 때가 더 많아요. 딴 짓을 하지요. 자리 에서 일어나 하던 작업에서 그냥 떠나버립니다.". 박씨는 마치 말이 끝날 때마다 조그만 종소리가 울리듯 또각또 각 답변을 했다. 생각이 채 정리되지 않은 사항에 대해 대답을 할 때에도 문장들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똑똑 떨어졌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 작품 세계와 닮아 있다. 개성 사람 기질일까. 작가가 어디선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자 없이 깔끔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마음이 배어 있다>고 쓴 기억이 떠 올랐다. 분위기부터 풀어야지. -헤어스타일도 그렇고,너무 젊어 보이십니다. 흰머리도 많지 않 고요. 내명년이면 만으로 칠순이신데. "많이 듣지만 안 속아요.(웃음) 요즘 젊은이들이 그게 노인에게 하는 최상의 소리라는 것을 아니까 많이 써먹데요. 가끔 만날 때마 다 10년은 젊어 보인다는 사람이 있길래,'그거 계산하면 어머니 배 속에 들어갔겠네' 하며 웃었죠. 하긴 안 믿으면서도 듣기에 나쁘지 않아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나이보다 훨씬 젊게 느껴졌다. 비가 내려 제법 쌀쌀한 날씨였는데 엷은 쑥색 반팔에 바지 차림인 박씨는, 육 체도 감각도 '노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지난해 옮겨온 박씨의 집은 경기 구리 시 마천동 아치울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서 보기 힘든, 주 황색 기운이 도는 짙은 노란색 외벽은 건축가 고집이었단다. "튼튼 하고 소박하게 지어달라고 했죠. 팥죽색에 가까운 분홍색 벽이었으 면 했는데 정이 드니까 좋데요. 지중해 풍이라 합디다. '스패니시 옐로우(Spanish yellow)'라던가." 거실 통유리 밖으로는 야트막한 동네 산이 막힘없이 지척으로 보였다. -5월초에 금강산에 다녀오셨는데요, 감회가 남다르지 않았습니 까? "날짜로는 3박 4일이었는데 북한 땅에는 만 하루 있었지요. 잠 은 배에서만 자고. 이것도 말라,저것도 말라, 온통 그 모양이라 무 슨 '하지마 관광' 같습디다."(웃음). 고향 개풍은 개성 인근이라 강화도나 통일전망대에서 맑은 날은 동네 뒷산까지 보인다고 했다. 북한 안내원도 드물고, 얘기는 해도 사진은 찍지 말라, 계곡 물은 먹는 건 좋으나 손을 씻으면 안된다 는둥 걸리는 게 많아, 철조망만 없는 어떤 통로를 통과한 기분이란 다. 기대를 걸었던 점심도 남쪽에서 제공한 도시락이었다. "근데 전혀 예기치 못한 거지만, 동해시를 떠나 아침에 깨니 장 전항이었는데 갑판에 나와 북녘 땅을 보자 갑자기 마음이 야릇하더 라구요. 애써 감췄지만 눈시울도 뜨거워지고.". 사실 박씨는 우상이던 오빠를 비롯해 6·25 때 가족을 잃었고, 본인의 말마따나 잇따른 작품을통해 <비통한 가족사를 줄기차게 반 복>해왔다. 4녀 1남을 키우는데 젊은 날을 모두 바친 후, 나이 마 흔에 쓴 데뷔작 '나목'은 6·25 와중에 작가가 미 8군 PX 점원으로 근무할 때 만난 박수근 화백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박씨는 교육 열 높은 모친 덕에 국민학교부터 서울에서 다니며 일제시대를 보냈 고, 대학입학하던 해에 6·25를 맞아 9·28수복,1·4 후퇴 때도 계 속 서울에 있었다. -4·19, 5·16, 5·18 등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특히 6·25가 작가 박완서에게 갖는 의미는 각별한 듯 합니다. "6·25는 우리들 세대로서는 모든 것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끝이 지요. 6·25가 이러쿵저러쿵 그런 말이 하고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러면서 내 상처도 치유하고 싶 었고.". 박씨는 "그런데 지금은 6·25를 들먹거리면 너무들 싫어하지 않 느냐"며 반문했다. IMF가 닥쳤을 때, "우리는 6·25도 겪었는데 이 건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하는 것도 6·25를 살아내야 했던 세대가 아니면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단다. 박씨는 "하긴 부모가 돈 없다고 하면 '그게 무슨 자랑이냐'며 대드는 자식이 있는 시대니…"라면서도,"우리로선 질리도록 반복해 도 모자란 게 6·25고, 다음 세대에게 자꾸 말해줘야 한다고 오히 려 절감한다"고 말했다. 군사정권을 비롯해 '옳지 못한' 정권이 등장했던 것도, 민주주 의를 표방하는 나라라면 세계 어느곳에나 있는 좌파가 정치 세력화 하지 못하는 까닭도 6·25와 그로 인한 분단체제 상황과 맞물려 있 지 않겠냐고 했다. 박씨는 '미처 참아내지 못한 통곡'이란 글에서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다. <통일이 직업인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구호를 만들어내 어 분단을 치장하면 되겠지만 진실로 통일이 꿈인 사람은 끊임없이 분단된 상처를 쥐어뜯어 괴롭게 피흘리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토막난 채 아물어버리면 다시는 이을 수 없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 기 때문입니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지요? "치떨리는 기억들은 마치 어제의 일들인양 남아있지요. 동족 상 잔이 가장 무서운 거예요. 대체 이데올로기라는 게 무어간데….". 인터뷰 도중 유일하게 한마디 던진 개성 사투리가 바로 이 때였 다. 사실 소설가 박완서는 곡절이 많은 개인사를 지닌 작가의 하나 다. 온 나라가 올림픽에 들떠 있던 88년에는 남편과 서울대 의대를 다니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연이어 잃었다. 참척의 고통을 당한 어머니가 통곡 대신 쓴 일기인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작가는 <나는 미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내 강철같은 신경이 싫고 창피스럽다>고까지 했었다. 다른 글에서 <우리 식구가 순서껏 죽게 해달라>고 소원하기도 했다. 10년이 넘은 일이지만 말을 꺼내기는 조심스러웠다. "제가 달라진 것을 느껴요. 남이 보기에는 못느끼지만 나는 확 달라졌어요. 과거에 가치를 뒀던 대상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고, 지난 날엔 하찮았던 것들이 지금은 소중하게 다가오고.". -예를 들어 뭐 어떤 겁니까? "지금 그쪽이 집착하는게 더 많을 거 아니예요. 돈이든 명예든…". -그럼요, 저도 돈 많이 벌어서 좋은 집에 한번 살아봐야죠.(웃음).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나 연배로나 문단의 '어른' 인 박씨는 다분히 어긋난 기자의 배때벗은 소리에도 맞미소를 아끼지 않았다. 최근 발행된 소설집 서문에서 작가는 <내가 아직도 사는 것을 맛 있어 하면서 살고(…) 쓰고 불편한 것의 맛을 아는 게 연륜이고, 나 는 감추려야 감출 길 없는 내 연륜을 당당하게 긍정하고 싶다>고 했 는데, 그 연륜이 바로 저 미소에도 담겨있을 듯 했다.
(기자 : qq@chosun.com) | ||
주간조선1999.06.10 /155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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