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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다민족 혼혈 사회" - 한말 조선여행기를 쓴 서양인의 진단

이강기 2015. 9. 25. 14:36
   
 
 
 

"한반도는 다민족 혼혈 사회"

문화일류학의 붓으로 그린 한민족... '고요한 나라' 이미지 안맞아 .

새비지 랜도어(Arnold H. Savage Landor),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1895).

 

구한말에 한국을 거쳐간 외국인들이 한국을 표현하는 말로 가장 흔 히 썼던 용어는 아마도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닌가 싶다. 조선을 글자그대로 표현한 이 용어는 그 후 외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을 지칭하 는 붙박이 이름이 되었고 한국인들도 그러한 명칭에 대해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 새비지 랜도어 作 '북청물장수'. 물지게를 지고 있는 차림새가 왠지 애조를 띠고 있다.
이 용어를 처음 쓴 것은 미국의 천체물리학자였던 로웰(Percival Lowell)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un: the Land of Morning Calm, 1888)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후 바로 새비지 랜도어의 이 책이 출간됨 으로써 이 명칭은 더욱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 책의 필자인 랜도어는 매우 기이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멀쩡한 이름 앞에 새비지(Savage: 야만인)라는 이름을 덧붙인 것도 그러려니 와,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구라파를 전전한 그의 할아버지를 닮아 역마살이 낀 사람처럼 그림 도구만을 들고 평생 오대양 육대주의 곳곳을 찾아다녔다는 것도 특이하다. 그의 직업이 화가였기 때문에 이 글에 담긴 내용과 38장의 손수 그린 그림은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 내용도 여느 선교사나 외교관 또는 탐험가들이 종교나 풍습, 제도 그리고 한국에의 투자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의 글은 삶의 리얼한 모습들을 담고 있다 는 점에서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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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비지 랜도어가 본 조선의 첫 인상은 이 땅이 다민족으로 혼혈된 사회라는 점이다. 단일 민족, 단군의 자손 등의 어휘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이러한 주장은 다소 충격적일 수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민족은 북방의 몽골리안족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밖에도 중앙 아시아의 혈통이 많이 혼혈되어 있으며, 그 특징은 각 기 다른 피부 색깔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주로 기호 지방의 사대부 들이 이 혈통에 속한다는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남방계의 피 도 많이 섞여 있는데 이는 왜소한 체형을 가진 남부 지방에서 잘 나타 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와 같은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그의 그림 솜씨를 발휘하여 각기 특징적인 두상과 체형을 삽화로 묘사한 것이 흥 미롭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필자의 이와 같은 기록은 매우 주목할 만 하다. 한민족이 단일 민족이라는 것은 비학술적 신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민족은 적어도 30여 인종의 혼혈로 이 뤄지고 있다는 것은 생태학적으로 이미 정설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는 남방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쌍꺼풀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다. 2만년 전의 민족 이동 당시에 영하 50도의 추위를 견뎌야 했던 북방계로서는 안구의 보 호를 위해 눈꺼풀이 두터울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쌍꺼풀이 나타나지 않는다. 말총 머리는 북방계이며 고수머리는 남방계이다. 얼굴이 희멀 건 사람은 서방계이며, 검은 사람은 남방계이다. 높은 광대뼈는 북방 의 혈통이다.

 

● "한민족은 놀라운 심미안 가져" 체형도 많이 다르다. 북방계는 다리가 긴 대신에 손이 짧고, 남방 계는 팔이 긴 대신에 다리가 짧다. 그렇기 때문에 앉아 있을 때는 북 방계가 커 보이며, 서 있을 때는 남방계가 커 보인다. 생활 습속 중에 는, 서양 사람들이 고양이 세수를 하는 반면에, 몽골리안들은 투레질 을 하면서 목 뒤까지 씻는다. 들판에 나가서 고수레를 하는 것도 북방 계 몽골리안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단일 민족이라는 신화 속에 오랫 동안 살아온 우리에게는 이런 것 들이 예사롭게 보였지만, 세상의 온갖 인종을 만나 본 화가인 새비지 랜도어의 눈에는 이러한 현상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 는 한민족이 다민족 혼혈 사회라고 하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화가로서 그의 눈은 당연히 조선의 미학으로 쏠리고 있다. 세계를 돌아본 그의 눈에는 우리가 흔히 자찬하듯이 이 땅이 금수강산으로 비 치고 있지는 않다. 기온의 연교차가 60도에 이르는 이 땅의 풍토가 그 에게는 아름다울지는 몰라도 그리 살기 좋은 곳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 고관의 행차. 바퀴를 이용한 '개량 가마'가 이채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을 얘기하면서 한국의 여인들의 모습 에 많은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가 본 한국의 아름다움의 극치는 여성 의 복식에 나타난 곡선미였다고 한다. 혼혈을 통해 한국의 여인이 특 유한 미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 더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한국인 들의 심미안이었다. 플로렌스에서 태어나서 자란 그는 고대 로마의 조 각에 나타난 아름다움을 볼만큼 보았지만 한국 여성의 복식이 보여주 고 있는 것에 비하면 그 아름다움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비너 스의 곡선미도 한국 여성의 의상이 보여주고 있는 아름다움을 따라가 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평가이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의 여성미를 더욱 인상 깊게 하는 것은 그들의 얼굴에 나타나고 있는 깊은 우수라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장옷을 덮 어쓰지 않고서는 대낮에 외출할 수도 없으며, 밖에 볼 일이 있으면 해 가 진 후에야 몸종을 데리고 외출해야 하는 풍습 등이 그의 눈에는 희 한하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는 길에서 마주친 여성들이 한결같이 갑자기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왜 자신이 만난 여 인들은 늘 '자기 집 앞에 이미 도착'해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 나 알고 보니 그곳은 그 여인의 집이 아니었으며, 한국의 여성들은 외 간 남자를 만나면 아무 집이나 자기 집처럼 일단 몸을 피한다는 것을 알고서야 영문을 깨달았다고 한다.

중동 회교권의 여성에 결코 뒤지지 않는 이와 같은 은둔성과 남편 의 방종한 생활은 여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는 특히 상류층에 올라 갈수록 사대부의 아내들은 정신 질환으로 고 생하고 있는 사람이 많으며, 이런 점에서 그들은 하층민보다 결코 행 복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차라리 하층민의 여성들은 거리를 활보하고 악다구니를 하며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양반 댁의 마님 은 소실에 대한 질투를 안으로 삭여야 하고, 그 엄정한 법도 아래에서 참고 살아야 하고, 자식에 대해 부모로서의 권위를 포기해야 하는 과 정에서 마음의 병이 깊어진다는 것이 랜도어의 관찰이었다.

연전에 세계정신의학회에서 한국의 여인에게만 독특하게 존재하는 그와 같은 마음의 병을 'Hwat-byung'(홧병)이라는 고유 학명으로 기록 한 일이 있는데 이는 이미 백년 전에 파란 눈의 외국인들에게는 선연 하게 보이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가 화가였다는 사실이 당시의 모습을 그리는 데 하나의 이점이 될 수 있었음을 그는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사 진이 있었으나 사진을 찍으면 혼이 빠져나간다고 한국인들은 믿었기 때문에 풍경사진은 많아도 초상화의 사진은 드물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민비였다. 그의 사진이 없었던 탓에 을미사변 당 시 일본의 낭인들이 그를 찾아 시해하기 위해 무작위 살인을 했기 때 문에 더 많은 궁녀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오 늘날 민비의 초상을 둘러싸고 진위의 논쟁이 끝없이 벌어지고 있는 이 면에는 그와 같은 사진 기피 심리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대부 사회에서 초상을 그리는 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성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가로 소문난 그가 서울에 왔다는 소문을 들은 당시의 실력자들은 앞다투어 그의 앞에 섰다. 김가진, 민영환, 민영휘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 소문은 드디어 고종에게까지 들어갔고, 그 래서 랜도어는 고종의 어진을 그린 최초의 서양 화가가 되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동양 사람들이 원근법을 전혀 무시하고 초상 화를 그려 줄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겪어야 했던 고충을 피력하고 있 다. 그는 그림 솜씨 덕분에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에 상당한 호사를 누 리면서 양반 사회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가 양반이나 세력가의 호사를 누리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과식을 강요하는 관습이었다. 그는 어느 세도가의 초상화를 그려 주고 다섯시간에 걸친 점심 식사를 먹어야 했던 악몽을 털어놓고 있다. 너 무 배가 불러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음식이 넘어 오려고 해 고개도 돌 리지못했던 기억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놀란 것은 이러한 폭식이 부유층에게만 만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이었다. 왜 한국인 들은 폭식하는가? 그의 설명에 따르면, 상류 사회의 폭식은 허례에 원 인이있었다. 그런 반면에 가난한 사람의 폭식은 다가올 굶주림에 대한 공포 때문에 기회가있을 때 영양분을 비축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 기에 그 당시에 이미 한국인들의 상당수는 만성적인 소화불량으로 고 생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관찰이었다.

랜도어의 본래 직업이 화가였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 한국을 찾아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그는 모험심도 많은 사람이었다.그 는 특히 한국의 형사 제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를 두 장에 걸쳐서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형제 중에서도 그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당시 풍문으로만 들리던 한국인의 처형 장면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역 죄인의 처형 장소인 시구문 밖에서 며칠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 그는 먼발치에 숨어서 그 끔찍한 장면 을 스케치하여 이 책에 수록하고 있다.

당시에 처형된 대역 죄인들은 이근응, 윤태선, 임하석, 그리고 승 려인 가허 등인데 그가 거명한 이름과 날짜가 고종실록(1890년 12월 28 일자)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 기록과 그림은 그가 들은 얘기가 아니라 그가 육안으로 목격한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의 필자 새비지 랜도어가 이 책의 행간 을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조선이 결코 '조용한 나라' 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국제적으로 보면 물밀 듯이 몰려오는 서세 동 점과 그에 대한 무방비, 국내적으로 보면 관리들의 끝없는 수탈과 이 에 대한 만성적 불만, 그리고 인성으로 볼 때 싸우는 듯한 말투, 민속 의 대표적인 현상인 정월 대보름 부락간의 돌싸움(석전) 등, 어느 모 로 보나 이 나라는 고요한 나라라는 이름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오히려 바깥 세상의 격변하는 모습과, 이와는 대조적인 조정의 무 사 안일한 평온이 이 나라의 앞날을 어디로 끌고 갈는지에 대한 불안 을 유발했고, 그는 이러한 걱정을 은유로써 표현하고 있다. 그는 한국 의 앞날에 슬픔과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그는 이미 한반도를 둘러싼 청국과 일본의 갈등을 감지하고 있었 고, 그가 한국을 떠난 지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남으로 써 조선에 대한 그의 근심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복룡 건국대 정외과 교수 ---------------------.

 

 

 

새비지 랜도어(1865∼1924)

 

 영국의 화가이자 여행가.

1865년, 영국의 저명한 시인이자 작가인 할아버지 월터 랜도어(Walter S. Landor)가 가족을 데리고 이탈리아를 유랑하는 동안 플로렌스에서 태 어남. 청소년기에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

1890년대에 중국과 조선을 장기간 여행. 미국, 대서양의 아조레스군 도(Azores), 호주, 아프리카를 여행한뒤 민다나오를 탐험.

1902년, 러시아, 인도를 여행.

1906년, 아프리카 횡단.

1910∼1912년, 남미를 횡단. 네팔의 룸파산(Mount Lumpa) 등반.


주간조선1999.06.03 /15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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