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전쟁론을 펼만한 준비는 안되어 있기 때문에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아보았다.
전쟁론이라면 클라우제비츠(Clausewitz, Karl Von, 1780-1831)를 떠올릴 사람이 많다. 그는 ‘전쟁이란 정치와는 다른
수단으로 수행하는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정의를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이 정의가 특별한 의의를 가지게 된 것은, 당시만
해도 전쟁은 고립된 돌발적인 현상이거나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신비주의적인 생각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후 맑스주의적 관점에서의
전쟁론이 나왔는데, 맑스는 전쟁에 관해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계급투쟁설에 입각하여 전쟁을 재해석하였고, 레닌은 1차대전을
제국주의간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규정하고 끝까지 이를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레닌은 자국의 전쟁은 무조건 정당하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전쟁에 관한 상식이 시대변화에 무관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면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시금 검토해야 할 주제일
것이다. 특히 「시대정신」에 대해 ‘대북전쟁불사(不辭)론’ 노선을 취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는 만큼 전쟁문제를 둘러싸고 주로 나타나는
‘끔찍하다’, ‘두렵다’, ‘참혹하다’는 등의 즉자적인 반응을 넘어서서 인간의 삶의 복잡한 현실을 직시하며 다각적으로 생각해볼 기회를 가져보자는
것이다.
1. 정의의 전쟁은 존재하는가?
정의의 전쟁의 사례를 들어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아주
자신 있게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낸 예, 조선이 임진왜란 때 일본을 물리친 예, 2차대전 때 연합국이 승리한 예 등을 거론할
것이다.
전쟁의 쌍방 중에 어느 쪽이 정의의 편인지를 구분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무엇일까? 예외 없이 각자 스스로를 정의의 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당사자들의 주장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된다. 통용되는 기준 중의 하나는 침략자와 방어자의 관계로 구분하는 것이다.
‘영토 불가침’의 기준에 입각해서 보는 것인데 이 원칙은 근대 국민국가 체제의 성립과 더불어 형성된 것이며, 그 이전에는 이 관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몽고의 칭기즈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등이 전쟁을 통해 대제국을 건설한 것을 놓고서 이들이 침략자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거의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류사의 대부분은 힘만 있다면 영토를 확장할 수 있다는
논리가 통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대에는 전쟁에 있어서 정의와 부정의를 나누는 것이 의미도 없었을 뿐 아니라 거의 불가능했으리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다만 굳이 구분을 하자면 역시 승리하는 쪽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입장에 서게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의의 편이 되는 것이다.
근대 이전에 벌어졌던 영토확장, 식량확보, 노예충원, 무역로 확보 등을 둘러싼 전쟁들은 가해자와 피해자, 침략자와 방어자에 관계없이 어느 한편을
정의의 편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민주주의, 식민주의 반대, 인종차별 반대 등의 가치가
공유되면서 이를 기준으로 정의와 부정의를 나누는 것이 비로소 가능해졌다. 1차대전은 영국이 애초에 정의의 편이 아니라 독일을 이겼기 때문에
영국중심으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반면, 2차대전은 제국주의간의 패권다툼이라는 성격이 있었지만 독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한 반대라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연합국측을 정의의 편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에 대한 공감이
강화되면서 이번 유고사태에서 보듯이 내정 불간섭 같이 개별 국민국가의 주권을 절대시하는 원칙을 유보하고 적극적인 무력 개입을 통해서라도 보편적
가치를 지켜내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추세로 가고 있다. 이때 일부 지식층들은 일체의 전쟁 또는 무력개입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는데
나토의 유고개입이 성공적인 결과를 얻고, 유고 내에서도 밀로세비치의 퇴진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그 입지가 약화되었다.
한 통계에
의한 2차대전후 주요 무력분쟁 66건을 분석해보면, 식민지독립 17%, 독립후의 내전 52%, 국가간 분쟁 29%라고 한다. 그 만큼 과거에
비해 국가간에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보다는 권력의 정당성을 놓고 벌어지는 전쟁의 비중이 더 높아진 것이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별다른 명분
없이 영토확장만을 동기로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2. 전쟁에서의 비인도적 행위
전쟁에서는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생화학무기, 핵무기, 지뢰 등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에게도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무기가 나타나면서 이의 사용을 규제하는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 이처럼 근대이후 전쟁에서의
규칙이라면 포로, 부상군인에 대한 보호와 더불어 민간인 보호가 핵심이다. 사실 일단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군인이 죽거나 다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문제 삼는다면 애초에 전쟁의 발발을 막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나 민간인의 피해라면 이를 절대적으로 피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한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무기의 발달로 인해 민간인의 피해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1차대전에서
민간인의 사망률(군인대비)은 5%이었는데, 2차대전에서는 48%, 한국전쟁에서는 84%로 급속한 증가세에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이 강화되지 않는다면 전쟁의 파괴력, 참혹성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비례하여 커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기의
발달과는 무관한 의도적인 민간인 학살문제가 있다. 최근에 문제가 된 한국전쟁시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도 이런 종류에 속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전쟁에서는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약탈과 납치, 학살이 일반적이었다. 예를 들어 십자군 전쟁사를
보면 성을 함락시킨 십자군이 이슬람인들을 말로 옮기기 어려운 여러 가지 잔혹한 방법으로 모조리 학살하는 장면을 보게된다. 당시의 전쟁들은
그럴듯한 명분을 내 걸더라도 약탈적 성격이 주를 이루었으며 인권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의 전쟁사들에서도 유태인학살,
남경학살 등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인 학살 사례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권 개념의 등장과 군인들의 지적수준의 성장에 따라 이런
문제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민간인 학살문제는 서로 상대방의 그것만을 일방적이고 때로는 과장되게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문제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미군, 한국군, 인민군 모두 상대편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민간인에 대해 학살을
자행하였으며, 미군의 경우 동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작용하여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 내에서 우파는
인민군의 민간인 학살을 강조하고, 좌파는 미군과 한국군의 그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 풍토는 먼저 어느 한편이
정당하다는 선택을 미리 해 놓고 문제에 접근하는 이른바 목적론적 경향이 우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꾸로 된 접근은 많은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데 별 도움을 주지 못하였으며, 자신들의 입장에 유리한 증거만을 모으는 데 치중하게 만들었다.
여하튼 과거문제라
하더라도 민간인 학살문제는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 그러나 어느 한편의 사례만을 근거로 도덕성을 평가하려는 시도는
성공하기 어려워 보인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피장파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민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많이 밝혀지고 부각되었지만 미군이나 한국군에
의한 그것은 반공분위기 때문에 오랫동안 묻혀졌다가 터져 나온다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물론 북한에서는 그 반대일 것이다.
3. 선제공격을 둘러싼 논란
전쟁의 성격 즉 어느 쪽이 정당하냐를 판정하는 기준의 하나로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느냐는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한다. 이에 대해 맑스주의에서는 전쟁의 성격과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느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펴왔다. 지금까지의 전쟁사들을 보면 이 주장이 대체로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이번 유고사태의 경우 나토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밀로세비치 정권에게 정당성이 부여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소규모 충돌들이 단계적으로 확산되어 전면전으로 가는 경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논란처럼 전쟁을 시작한 쪽을 밝혀내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그러나 누가 전쟁을 일으켰느냐는 문제가 전쟁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다. 굳이 전쟁을 통해 얻은 보편적 이익이 별로 없는 반면 그 전쟁시도
때문에 큰 희생이 초래된 경우는 선제공격을 가한 쪽의 책임이 매우 크다. 독일이 2차 대전을 일으킨 경우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같은 사례는
이에 해당된다.
한국전쟁을 둘러싸고도 전쟁 발발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논란이 계속되어 왔다. 북한정권이 전면전을 계획하고
선제공격을 가하였다는 사실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도 이를 부인하고 역으로 북침설을 주장하고 있다. 사회주의 전쟁 이론에서는
선제공격자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지만 현실적으로 특히 대중 정서상으로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북한정권도 인정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발발 책임문제를 포함하여 그 성격을 둘러싼 논란들을 살펴보려면 브루스 커밍스(Bruce G. Cumings)로 대표되는
수정주의론(미국학계에서 기존의 전통주의(traditional)적 입장에서 좌파적 견해들을 수정주의(revisionism)라고 명한 것이다)을
실마리로 삼는 것이 좋겠다. 커밍스의 1981년 작품인 「한국전쟁의 기원1」(The Origins of the Korean War1)이
1982년부터 한국에 소개되고 1986년 완역 출판되면서 당시의 사회분위기와 맞물려 진보세력들 내에서는 이 견해가 폭발적인 인기를 끈바 있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시작과 관련하여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유도론’을 제시한다. 미국이 1949년 6월 남한에서 철군하고,
1950년 1월 12일 애치슨(Dean Acheson)국무장관의 연설을 통해 남한을 자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시켜 손을 떼는 인상을 주었으며,
1950년 6월 24일과 25일 새벽사이 남한측이 옹진반도를 먼저 침략하여 북한군의 반격을 유도하였다는 것이다. 커밍스는 ‘애치슨 선언’에 대해
“공격하는 측이 큰 실수를 범하도록 만드는 방어정책”이라고 표현한다. 전쟁초기 남한측이 결정적으로 밀려 미군의 개입이후에도 상당기간 열세에
놓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유도론은 설득력을 잃는다. 더구나 중국의 개방과 소련의 붕괴 이후 중·소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스탈린, 모택동과 사전 협의하고 계획하여 일으켰다는 사실이 입증되어 더 이상의 논란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이에 관해서는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2」, 나남출판, 1996 등을 참조)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살펴보자.
이에 대한 커밍스 견해의 요지는 첫째, 남한에서 좌익계열이 상황을 주도할 가능성이 확실시되었는데 미군정의 탄압으로 저지되었으며 둘째, 전쟁
전까지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이 이루어졌으나 남한에서는 추진되지 않는 등 봉건청산이 지체되고 있었으며 셋째, 남한 내에 좌익세력과 그 지지층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진보적인 세력 대 미국의 비호라는 불공정한 상태에서 남한의 정권을 잡은 수구세력과의 내전으로 출발되었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에 있어서 북한측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선, 조선이 일제로부터 독립한 상태에서 어떠한
외부(미국뿐 아니라 소련과 중국까지 포함해서)의 개입도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커밍스류의 시각은 마치 중국이 내전을 통해 공산당이 집권한
것처럼 조선도 아주 자연스럽게 좌익이 주도하였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김구, 조만식, 이승만 등 우익계의 대중기반도 무시할 수 없었으며,
좌익계가 중국처럼 뛰어난 지도자를 중심으로 잘 조직되어 있는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처럼 쉽게 단정할 수 없다. 대체로 좌우익세력이 팽팽하게
대립하며 커다란 혼란 속에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다면 아마도 외부의 개입 없이도 내전을 겪었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
다음으로 전쟁 전 남한내의 공산당 지지세력이 어느 정도였는가? 이에 대해 커밍스 등은 토지개혁 부진, 이승만정권의
지지 약화 등을 근거로 기층민중(당시 대다수가 농민)을 중심으로 좌익지지세력이 상당수 있었으며 특히 전쟁초기 인민군의 우세는 이를 입증하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런데 토지개혁의 경우 여러 실증적인 연구성과에 따라 남한에서 전쟁 전에 완료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는 북한측
자료(남한 점령 후 토지개혁 실태를 조사하여 작성한)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어서 토지문제를 계기로 한 농민층의 좌익 지지 가설은 성립되기
어려워졌다. 당시의 민심도 생존차원에서 이기는 쪽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적극적으로 인민군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남북한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의 영향으로 인해 서로 다른 체제를 선택한 점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만약 소련이
남한으로, 미국이 북한으로 진주했다면 남한이 사회주의를 북한이 자본주의를 선택했을 것이다), 해방 후 전쟁 전까지 어느 정도 자신의 의사에 따라
남북한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1950년 당시 남북한은 급격하게 다른 선택이 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즉 북한의 남침이 ‘썩은 문을
박찬다’는 식으로 남한의 사회주의 체제로의 선택이 성숙한 상황에서 이른바 ‘한줌밖에 안 되는’ 방해세력을 제거하는 시도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록 구호로만 등장했지만 ‘북진통일론’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좌우익간의
세력관계가 우열을 가리기 매우 힘들었고, 우연히도 국제적 지원세력들도 양진영의 세력이 팽팽하여 전쟁은 지루한 공방 끝에 엄청난 희생을 치른 채
원점으로 돌아가는 결과를 맺었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의 경우와 비교된다. 미국의 절대적인 지원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남베트남은 1973년
미군이 철수하자 무너져 내렸고 75년 4월 월맹군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사이공에 입성할 수 있었다.
결국 김일성의 남침은
남북한이 일단 자신이 택한 길로 가보면서 평화적으로 통일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없애버리고 엄청난 희생과 상처를 남겼다는 점에서 정당화의
여지가 없다. 커밍스 등은 어차피 남북한은 남한내의 좌익빨치산투쟁과 38선 주변의 잦은 군사충돌 등 내전과 다름없는 상황에서 누가 먼저
시작하든지 전면전으로의 확산이 불가피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1950년에 이르면 남북한 모두 체제가 점차 안정화되는 추세로 가고 있었고
남한에서 빨치산을 포함한 노동당 세력도 거의 무력화되었기 때문에 전쟁필연론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4. 민주주의와 전쟁
민주주의가 전쟁에 미친 영향은 결정적이라고 보여진다.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사회에서 전쟁의 결정은 소수의 권력층 또는
일인의 최고권력자에 의해 가능하였다. 이때도 군인은 물론 민간인들의 전쟁에 대한 열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명분을 만들고 적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선전은 중요시되었다. 그런데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 국민들의 동의와 지지가 없이는 전쟁의 시작은 물론 그 지속이 거의
불가능하다. 다음 선거에서 정권을 내놓는 것을 감수하면서 반전 여론을 무시해 버릴 정권을 찾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초강대국인 미국이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국내의 반전여론이었다.
민주주의의 발달로 인해 적어도 서구에서는 히틀러와 같은
전쟁광이 마음대로 불장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한편으로
정당하지 않은 전쟁이나 무리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줄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 예방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게 하였다. 민주적 권리와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는 선진국일수록 전쟁을 더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나무를 때서 밥을 짓는 사람이 전쟁을 겪는
것에 비해 고층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폭격으로 인해 전기, 수도, 전화가 끊기게 되었을 때 얼마나 더 불편해질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미국인들이 민주주의가 미성숙한 나라에서 핵무기를 갖는 것에 대해 히스테릭할 정도의 민감함을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동안
누려온 풍요만큼이나 전쟁에서 잃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이판사판이라는 말처럼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쪽에서는 전쟁에 대해
무뎌진다. 북한에서 식량난이 심화되면서 주민들 내에서 전쟁이라도 나면 좋겠다는 분위기가 나온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이후 미국은 사회주의 봉쇄라는 명분보다는 독재정권 반대, 테러 반대, 소수민족 차별 반대, 지역분쟁 방지 등의 공감대가 확보될 때 무력개입을
시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자국민에 대한 테러, 미국 본토의 공격 가능성 등에 대해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 가능성에 대해 상당한 양보를 감수하면서 이를 막아보려는 클린턴 행정부의 시도는 좋은 사례이다.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풍요한 나라일수록 전쟁에 대한 기피심리가 강하다고 해서 이들 나라가 후진국들에 비해 전투력에 있어서 더 취약하다고 볼 수는
없다. 군사무기상의 우위나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경제력의 우위는 물론이고 그 정당성이 분명할 때는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자발적 열의가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역으로 정당성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이거나 강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는 체제는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처럼 아주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5. 절대 반전(絶對反戰)이 진보적일 수 없는 이유
반전을
위한 최초의 국제적인 노력은 1928년 국제연합 부전(不戰)조약체결이다. 비록 히틀러에 의해 휴지통에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지만 인류사에 있어서
큰 진전으로 기록된다. 요즈음에 와서는 많은 사람들이 반전은 항상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상에 절대란 없듯이 현실의
세계에서 절대 반전이 평화실현(또는 유지)의 수단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분명 있다. 인종학살을 막기 위한 코소보 전쟁과 같은 경우에 그것이
전쟁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거부된다면 결과적으로 사회진보의 발목을 잡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극약을 아무 때나 써서는
안되듯이, 정의의 전쟁이라고 해서 전쟁시도가 쉽사리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란 인명의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만큼 평화적인 선택이
가능하다면 배제되는 것이 맞으며 단지 마지막 수단으로서만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은 대체로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영향을
받게된다. 유고의 밀로세비치나 이라크의 후세인처럼 보통의 압력을 우습게 알고 타협을 모르는 특별한 대상에게는 군사적 타격 외에 다른 선택이
효과를 갖기 어렵게 된다.
한반도문제를 볼 때도 무조건 반전이라는 입장에서 김정일 정권의 선의에만 의거해 평화를 실현해보려는
입장이 타당한지는 깊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우선 김정일정권이 먼저 남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정일정권이 질
것이 뻔한 전쟁을 벌일 만큼 어리석지 않다는 반론이 있다. 물론 김정일정권이 전쟁을 시작하여 남한을 완전히 점령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알려진 시나리오대로 북한이 기습적으로 남한의 군사, 경제적 요소에 생화학무기를 발사하고, 일본에 대해 대규모 미사일 공격(세계
경제를 마비시키겠다는) 위협을 가하여 미군의 추가투입을 저지한다면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 남한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준 후 협상도 가능할 것이다.
남북한의 엄청난 격차를 가장 큰 체제 위협으로 보고 있는 김정일정권은 이러한 시도에
대해 밑져야 본전이라는 계산서를 뽑을 수도 있다. 김정일정권의 전쟁도발 가능성에 대해 제기하면 그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까지 인류의 경험은 적대적인 상대방이 전쟁을 일으킬지 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김일성의 남침이 그렇고, 1967년 이스라엘은 아랍측의 의표를 찌르는 선제공격을 통해 시나이 반도, 골란고원 등을 확보하여 지난 30여년
간 대 아랍국들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누려왔다. 한편 북한사회는 철저한 김정일 개인독재체제이며 인명을 매우 경시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전쟁시도의
결정이 매우 간단하고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한다. 기술적인 면에는 정보화시대라고 불리는 지금도 상대의 감시망을 피하면서
기습적인 공격이 가능한 무기들은 계속 개발되고 있다. 한편 2,000만이 넘는 북한민중들의 정치적 무권리와 생존의 위협이 지속되는 것을 막는다는
면도 생각해야한다. 극도의 비인간적인 억압상태에 있는 북한민중들의 입장에서는 남북한의 현 상황을 안정적으로 지속시키는 것을 평화라고 보는 견해에
결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사회의 변화 없이 평화의 실현이 어렵고, 김정일 정권의 선제도발 가능성 때문에 전쟁을 반드시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사정임을 감안하면, 전쟁 발발의 경우도 미리 대비해두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전쟁을 100% 회피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전쟁상황에 대한 대비를 우리의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의 대규모 도발 가능성이
확실해 보인다거나 북한 내부의 비상사태(내전 등)로 인해 엄청난 인명희생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해 보이는 경우, 이에 대응할 여러 전술 중에서
전쟁을 배제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북 선제공격이 더 큰 희생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북선제공격의 경우 반드시 몇 가지 엄격한 전제하에서만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선제공격에 대한 북한측의 반격이 가능하여
오히려 전면전으로 비화되어서는 곤란하다. 어디까지나 일거에 김정일 정권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예상되는 중국의 반대,
이를 의식한 미국의 반대에 대한 해결책이 준비되어야 한다. 나아가 결정적으로는 남한이 민주주의 국가인 만큼 국민여론의 뒷받침이 없다면 정권의
대북 무력개입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한의 대북 무력개입이라는 수단이 동원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북 선제공격은 이러한 엄격한 조건하에서 북한 민주화 실현과 관련한 미래의 여러 시나리오 중 한 경우로 검토될 수도 있다는
차원이었는데 마치 북한 민주화를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식으로 왜곡되어 버렸다. ‘전쟁불사론’이 아니라 ‘전쟁절대불가(絶對不可)의
비현실성’을 지적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북한정권의 본질을 이해하고 북한민중의 처지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다면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검토해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동의를 유보할 수는 있어도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반응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북한 내에서
내전이 벌어져 엄청난 인명의 살상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남한군이 이에 개입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예 검토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르완다, 소말리아, 최근의 동티모르 등 악성적인 내전이나 인권유린에 대해 UN이 주도한 다양한 수준의 국제적 개입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특별히 북한에 대해서만 절대적으로 이러한 가능성을 닫아놓아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전쟁도 반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닌 것은 현실이 꼭 의도한대로 전개된다는 보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태도가 현재 진행 중인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에 대해 외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무고한 희생을 줄이자는 것일 텐데 눈앞의 민중들의 고통에 등을 돌리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6. 전쟁을 없애는 길
전쟁을 없애는 것은 인류의 오랜 염원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1998년 통계로 98건의 분쟁이 진행중이며 이중 37건은 무력분쟁이라고 한다. 여전히 우리는 전쟁과 아주 가까이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쟁의 소멸 가능성에 대해 비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류사의 진보에 따라 전쟁을 제한하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는 소수의 탐욕, 명예욕, 정치적 입지 강화, 심지어는 취미에 의해서도 엄청난 참극이 닥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앴다는 점에서 전쟁의 제한에 있어서 큰 진전을 이루었다.
전쟁을 줄이려는 이후의 노력 또한 민주주의의 견제를 벗어나 있는 소수의
전쟁광들과 이들의 선동에 쉽게 넘어가는 어리석은 대중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될 것 같다. 민주주의가 취약한 어떤 나라 또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개입을 통해 우선 희생을 줄이려는 시도 또한 계속 유효할 것이다(얼마 전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도 이런
내용의 연설을 했다). 우리 인간은 전쟁문제 해결에 있어서 그 동안 많은 진전을 이루어 냈으며 이후에도 더 큰 진전을 이룰 수 있다는 적극적인
사고가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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