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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우는 사회는 행복이 없다" - 와그너 지음, '한국의 아동 생활'

이강기 2015. 9. 25. 14:38

[벽안에 비친 격동의 한말]

"어린이가 우는 사회는 행복이 없다"

뿌리깊은 남아선호와 아동학대…페미니스트 눈에 비친 구한말 비애

와그너 지음, '한국의 아동 생활', Oliphants Ltd., London, 1911.

 

'한국의 아동 생활'은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책이다. 워싱턴 근교의 고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우선 한국에 관련된 고서적 이어서 샀을 뿐 그 내용을 살펴 볼 겨를도 없었다.

다만 한국의 고서로서는 드물게 컬러판으로 실려 있는 민화풍의 그 림들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또 이 책에서 특이한 것은 발행 연도가 없 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당시 내가 공부하던 조지타운대학교 로윈저도서 관의 귀중본 사서(curator)를 찾아가 발행 연도를 물었더니 1911년이라 고 감정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필자 와그너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었 다. 다시 미국의회 도서관을 하루 종일 헤멘 끝에 '세계감리교백과사전' (Nashville, 1974)에서 그가 개성에 있었던 호수돈여고의 설립자 겸교 장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귀국하여 번역을 끝마치고 호수돈여고 출신 할머니들을 통하여 그 학 교가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으로 이주하여 대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그의 정확한 이력과 사진을 구하고 싶었다.

  • 호수돈여고측에 연락하였더니 그곳에서는 마침 교지 100년사를 준비 하고 있던 차에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무척 반가와 했다.

    나는 그들을 통하여 와그너 여사의 사진을 구할 수 있었고 그 보답으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책의 일부를 복사해 보내 주었다.

    한국의 개화사 또는 근대화의 역사를 거론할 때면 등장하는 두 개의 키 워드가 있는데 하나는 미국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이다. 미국이 이 땅에 남긴 흔적들이 모두 긍정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진실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 땅에 복음과 의 료, 교육을 폄으로써 한국 개화사를 한 걸음 발전시킨 착한 사마리아인 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이것도 일종의 백색 우월주 의라고 이해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그 바탕에 깔고 있었던 것은 사 실이다.

    '한국의 아동 생활'도 바로 그러한 기록 중의 대표적인 한 편이다.이 책이 한국 개화사를 다룬 글이면서도 다른 글들과 다른 점은 특히 어린 이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이날을 보내면서 이 책의 의미를 새삼 되씹어 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이 글을 읽노라면 우리는 '울고 있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는 안톤 슈나크(Anton S. Schnack)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첫 구절을 생각하게 된다. 왜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는 울어야 할 일들이 그토록 많았을까? 필자인 와그너가 이 책을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메시 지는 '어린이들이 내게 오도록 내버려두며, 그것을 금지하지도 말라.하 나님의 나라는 그들의 것과 같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0:14-15)라는 복 음주의이다.

    비단 와그너 뿐만 아니라 당시의 한국에서 활약한 많은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가장 놀라운 현상은 끔찍한 아동 학대였다. 와그너의 관찰에 의하면 한국의 아동 학대는 다른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모의 주 벽이나 후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위생적 양육에서 오는 것이 아니 라 가장 비과학적인 사회적 편견에서 온다는 것이다. 예컨대 서구인으 로서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들 선호에 따른 여아의 학대였다. 한 국에서 태어난 딸은 시집갈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같은 밥상에서 식사 를 하며 인간적인 대화를 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와그너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차별은 특히 양가집에서 심했기 때문에 가난 때 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은 방,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던 하층 계급의 삶이 오히려 인간적이었다는것이다. 잘 사는 양반댁에서는 딸이 아버지의 밥상 머리에 앉지는 못하지만 내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는 점에서 그나마 덜 비참했지만, 생활은 어렵고 양반의 지체는 있어서 겸상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독상을 받을 형편도 못되는 중류층에서 남자가 물린 상을 여자들이 받아 먹어야 하는 소위전의 풍습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비열한 성차별이었을 것이다.

    여아에 대한 차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여아의 이름은 대체로 천하게 지으며, 노골적으로 그가 아들이 아님을 의미하기 위해 '섭섭이' 라고 부름으로써 평생토록 그의 가슴에 멍울을 남긴다. 그들에게 교육 의 기회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했으며, 8촌 이내의 남자가 아 니면 함께 말도 나눌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격리된 삶을 살았다. 초경 도 치르기 전에 딸을 시집보내는 나라는 아마도 이 세상에서 한국 밖에 는 없을 것이라고 와그너는 한탄하고 있다.

    복음주의적이었던 와그너로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또다른 아동 학대는 불구 자녀에 대한 구박이었다. 불구 자녀에 대한 비인간적인 학 대는 그것이 하늘의 저주였다고 믿는 미신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 와그너 여사의 판단이었다. 부모로부터 구타당하고 학대 받는 한 여아 척추장애자의 모습은 와그너로서는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받아들 여지고 있다. 이는딸을 낳았다는 것 자체가 박복이라는 인식과 상승 효 과를 일으켜 여아가 불구일 경우에는 가장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은 끊임없이 구타당했고 유기 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근원적으로 올라가서 한국의 아동이 학대받는 이유는 어 디에 있을까? 와그너의 분석에 따르면 그것은 한 가정에서 인격신으로 서의 아버지라고 하는 절대 군주에 가려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머니란 아이를 낳는 생산 도구와 일정량의 노동을 제공하는 가사노동자에 불과할 뿐, 한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이 망실되었 을 때부터 그의 소생또한 아버지의 위엄 앞에 어머니로부터 아무런 보 호를 받지 못하는 피학대자로밖에는 전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 의 사랑은 가슴에만 있는 것이었을 뿐 물리적이지도 않았고 가시적이지 도 않았다.

    이런 얘기는 우리가 회고조로 말할 수 있는 전근대적 전설만은 아니 라는 데에 우리의 아픔이 있다. 역사에서의 백년은 본질적으로 그리 많 은 변화를 가져 오지 않는다. 한때 소득 1만달러까지 올랐던 이 대명천 지에도 여아 사망률이 남아 사망률보다 높고 여아 기아율이 남아 기아 율보다 높으며 해외입양률에서도 같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기아가 단순히 가난 때문만은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역사가 흐를 만큼 흐른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의 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에서 벗 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볼 때 와그너의 분석과 안쓰러움은 결코 지나 간 얘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아동 생활 중에서 와그너가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는 또 다른 사실은 아이들의 나이를 헤아리는 방법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하게 되어 있어 실감하지 못하지만 섣달 그믐날 태어난 아기가 하룻밤 자고 나서 해가 바뀌면두 살 박이가 된다는 것을 와그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는 한국인들의 이와 같은 비과학적 수리 개념이 합리성과 실질에 근거 를 두고 있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하나의 장애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와그너의 주장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될 수 있 는 것은 아니며 생명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즉 한국인들이 아기가 태어나자 마자 한 살로 계산하 는 것은 태중의 10개월을 이미 일생의 1년으로 계산하고 있기 때문이지 결코 수리 개념의 미발달에 원인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태어난 것 자체를 한 살로 보는, 바꿔 말해서 태아에게 인격성을 부여 하려는 우리의 사고에 더 인륜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요컨대, 와그너의 눈에 비친 한국의 아동의 모습은 연민의 덩어리였 으며,그러한 시각은 '어린이가 우는 사회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인 식을 그바탕에 깔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한국 사회에 대한 초기의 페미니스트였다. 그래서 그는 결국 '기도'에 머무르지 않고 호수돈여학 교를 창설하여 여성 교육을 실천하려고 했으며 그것이 죄(?)가 되어 조 선총독부에 의해 추방되었던 것이다.

     

    (신복룡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주간조선1999.05.20 /15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