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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의 대한제국 멸망사

이강기 2015. 9. 25. 14:31

헐버트의 대한제국 멸망사

조선 '인정'이 산업화 막는다

지도층 부패와 미국의 '배신'이 망국 불러

♧헐버트(Homer B Hulbert)의 대한제국 멸망사(1906) 한 민족이 멸망해 가는 이면에는 많은 애련(pathos)과 곡절이 따른다.

조선을 병합하려는 일본의 야욕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1905년 10월, 사태 의 심각성을 인지한 고종은 근신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하지만, 경륜과 용기의 면에서 앞장서 주는 사람이 없었다. 망연자실하던 중에 그의 머 리에는평소 믿고 자문을 구하던 헐버트 목사가 떠오른다. 왕은 헐버트를 불러 밀지를 내리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 에게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호소해 줄 것을 부탁한다.

▲ 장죽을 물고 장기를 두는 마을 노인들을 젊은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흥미있는 체스 문제'라는 제목을 단 헐버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사진을 썼을까.

헐버트는 즉시 워싱턴으로 출발하여 당대 최고의 논객이며 정치적 영 향력이 막강하던 케넌(George Kennan)을 만나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호 소해 보기도 하고 지인을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 했지만 미국의 태도는 매정하리만큼 냉담했다. 당시 미국의 지도자들은 한국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에 익숙해 있었고 국익 관계도 미미한 조선을 도움으로써 일본과의 밀월이 깨어지는 것을 원치 않음을 분명히 했다.안 쓰러운 노력도 보람없이 헐버트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의 운명은 일본의 속방으로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제 헐버트는 글을 통해서 조선에 대한 온갖 그릇된 비방을 변호하고 조선의 독립을 세계의 여론에 호소해 보리라고 결심하고 그 동안 미뤄왔 던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서둘러 탈고하여 1906년에 출판하게 되었는데 그책이 바로 여기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대한제국 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 1906)이다. 역사로 보면 서양의 구약시대에 이미 개국했으며, 비 록 중국처럼 장사에 능숙하지도 못하고 일본처럼 전쟁을 잘하지도 못하 지만 선량하고문화적 유산이 그 어느 나라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동방 의 이 아일랜드가 왜 역사로부터 사라져야(passing) 하는가가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화두이다.

20년 가까이 한국에 살아온 헐버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은 서구 인들이 흔히 갖고 있던 백색우월주의나 비기독교도에 대한 비난이나 야 만시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 선악을 떠나서 자신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심성을 그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우선 한국인은 인정스럽고 친근감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 한 예로서 그는 한국의 여러 곳을 여행해 보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쓸 만한 여관이나 호텔이 없는 불편함을 적고 있다. 이것은 당시에 한국을 여행한 서구인들의 공통된 불평이었다. 왜 한국에는 여관이 없을까? 그 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한국인의 인정 때문이라고 한다. 길 을 가다가 날이 저물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 밥과 잠자리를 요구할 때 이 를 거절하는 법이 없는데 숙박업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 다.

그러나 이러한 인정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산업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고 헐버트는 지적한다. 즉 이 인정이 결국은 금 전적 낭비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때로는 허세일 수도 있 고 낭비일 수도 있으며 노동의 신성함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 외출할 때의 여인 모습. 헐버트는 주자학적 가치관이 가정에서 여인의 존재를 매몰시켰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국 식객의 파렴치함과 그 수효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양 반이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 의 기생적 속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용서하는 심정적 요소 때문이며 이러한 사조는 멀리 볼 때 결코 인정만으로 합리화될 수 없다고 그는 지 적하고 있다.

헐버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또다른 특징은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가족 또는 씨족 중심의 소집단 이기주의였다. 가족이 살갑게 사는 모습 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한국에는 집(house)은 있어도 가정(home)은 없다 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600∼700년에 걸친 주자학적 가치관이 가 정에서 여인의 존재를 매몰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 헐버트의 지적이다.

그는 한국 사회에 살면서 한국의 여인들은 고유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커다란 놀라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인은 어렸을 적에 는 아무렇게나 속된 아명으로 부르다가 남동생이 태어나면 아무개 누이 로 불리고, 시집을 가면 고향을 따서 파주댁이니 광주댁으로 불리고, 자 식을 낳으면 아무개 엄마로 불리면서 일생을 사는 동안에 여성의 존엄성 이나 정체성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여인이 울며 살아야 하는 사회가 얼마나 처절한가를 그는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끝으로 그는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보수적인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문명의 이입이 오직 중국을 통해서만 일방통행적으로 들어왔 기 때문인데, 그것이 중화사상으로 결정화되면서 창의성이 억압되었음을 개탄하고 있다. 이러한 소중화 사상이 가장 절실하게 나타난 것이 한자 중심의 문화였다. 과거를 한자로 보아야 하고 비실용적 고전이 관리등용 의 첩경이 됨으로써 문명의 진보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을 하는 가운데 그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한글이 지식인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언문이라는 이 름으로 하천한 계급이나 정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여인들의 문자로 전락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민족성을 가진 한국이 왜 끝내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언젠가는 합병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빠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비극을 극 복하기위한 방안은 무엇일까? 그는 대한제국 멸망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점은 지배 계급의 부패였다. 헐버트는 한국의 멸 망이 일차적으로는 내재적 모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관찰사가 5만달러에 매관되고 현감이 5백달러에 거래되는 현장을 바라보면서 이 나라의 장래는 결국 패망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 나 정작 민생을 괴롭히는 것은 이러한 매관의 연쇄 현상으로 나타나는 아전의 횡포였다. 이것은 결국 민심의 이반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그의 전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왕실과 그 주변의 지배 계급이 문명 진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명치유신 이후 미 완성된 자본주의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정한론으로 무장한 일본대륙론 자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착검과 특권이 박 탈된 사무라이들이 그들의 살길을 찾아 서구의 문물과 관료 제도를 받아 들이고 있을 때 조선의 지배 계급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주 자학적 중화사상에 안주하면서 세계의 대세를 읽지 못했다. 대원군의 쇄 국이 당시로서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좀더 유 연하게 서세동점에 대처하면서 자신의 정책을 변용했어야 함에도 불구하 고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물론 당시에 이러한 보수파에 대항한 개화파가 있었지만 그들은 일을 너무 조급하게 서둘렀다. 그들은 지금이 아니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now or nothing)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있는 분별없는 젊은이들(ill- advised youngmen)이었다. 그들의 진심이 아무리 순수한 것이었고 우국 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김홍집과 어윤중이 저자거리에서 돌멩이에 맞아 죽 는 것을 바라보면서 헐버트는 그들이 난세에 살아남는 지혜를 갖추지 못 했음을 안타까워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본심과는 달리 그들이 친일적 성향을 보인 것은 그들의 경륜이 익지 못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민중적 정서는 일차적으로 그들이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헐버트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내재적 모순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대한제국 이 멸망한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외재적 요인 즉 미국의 무신을 결코 간 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헐버트의 입장이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미 국은 한국과 국교를 맺은 최초의 서방 국가이며 그 조약에서 미국은 한 국의 안전과 이익을 존중하겠노라고 약속했다. 한국은 자신의 독립이 유 린될 때에는 이를 막아 줄 수 있는 국가로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에 게 구원을 요청할 권리를 갖는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그러나 한 국민에게 환난이 닥쳐오고 그토록 되풀이하던 공언이 순수한 것이었음을 입증했어야 할 무렵에 미국은 그토록 약삭빠르게, 그토록 차갑게, 그토 록 심한 멸시의 눈초리로 한국민의 가슴을 할퀴어 놓음으로써 한국에 살 고 있는 점잖은 미국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기울어 가는 조국을 건질 길이 없게 되자 충성심이 강하고 지적이며 애국적인 한국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동안에 한국 주재 미국 공사 몰간(E VMorgan)은 일본공사관에서 이 흉행의 장본인들에게 샴페인을 따 르면서 축배를 들고 있었다. 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망국의 낙조가 비치는 대한제국의 지도자와 국민은 어 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자신의 민족이 자신을 정복한 민족과 대등하게 될때까지 자기 민족의 교육에 전념해야 하며 순수한 인간성을 무기로 하 여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하여 느끼고 있는 멸시를 상쇄할 수 있는 능력 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충고로 글을 끝맺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 나 교육이 국가흥망의 열쇠이며 민족의 자존을 회복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무라는 것은 변함없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주간조선1999.05.13 /15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