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근래 단군에 관한 논쟁이
뜨겁다. 우리가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지적 호기심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지적 호기심이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하지 못할 때, 그러한 지적 호기심은 이데올로기 혹은 관념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필자는 우리 한민족의 기원에 관해 과학적으로
접근할 때, 우리 민족의 기원을 단군으로부터 찾는 것은 매우 잘못된 역사 해석이라고 본다.
단군은 고려시대 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8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의 기원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에 단군은 우리 민족에게 정서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의미가 있는 실체임에
틀림없다. 특히 우리 민족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단군이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단군의
자손', '반만년 단일 민족의 역사', '홍익인간의 이념' 등을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수용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역사 인식일 뿐이라고
단정한다. 국수주의적 역사 인식은 역사학의 일차적 목적이 민족 정신을 함양하는 데 있다고 보는 데서 비롯된다.
이 글에서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과학적으로 볼 때, 단군이 우리 민족 최초의 조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군 혹은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체를 논하는 것은 매우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필자가 집필한 「우리는 단군의 자손인가(한울, 1999)」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고 재정리하여 논하고자
한다.
1. 청동기시대의 한반도 주민들은 단일 민족이었는가?
오늘날
한국인들은 단일 민족이고, 단일 국민이며, 단일 인종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단일 민족이라고 해서 태초부터 단일
민족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다. 단일 민족은 태초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일 민족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 먼저 민족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한민족 혹은 한인이라고 부를 때, 그
말은 대한민국의 국민을 의미하기도 하고 한국인 혈통의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민족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민족이고, 한국은
한민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나라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국가들은 다수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은 극히 드문 예외적인 사례에 속한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다수 민족으로 구성된 국민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다민족 국가에서는 민족과 국민이 아주 다른 의미를 갖는 용어일 수밖에
없고, 또한 민족과 국민의 개념이 서로 다른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 무수히 많은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고
전제한다면, 우리의 고대사를 논할 때도 민족과 국민 개념을 구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영어권에서는 'ethnic group'과 'nation'이
명확하게 서로 다른 개념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서로 혼동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편의상 필자는 우리말의 민족은 영어의 'ethnic
group', 그리고 우리말의 국민은 영어의 'nation'과 동일한 개념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민족을 구분하는 데는 생활양식의
공유, 생활지역의 공유, 집단 소속감, 즉 민족의식 등이 주요한 지표가 된다. 이런 입장에서 민족은 '특정한 생활지역에서 동일한 생활양식을
공유하면서 그 구성원들이 서로 동질적 유대감을 갖고 있는 인간집단'으로 규정할 수 있다. 동일한 민족에 속한다고 인식하는 민족의식의 강약 정도는
민족을 구분하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민족의식이란 한 민족의 성원들이 다른 민족과는 구별되는 독자적 정체성을 집단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어떤 집단 구성원이 서로 같은 민족이라고 인식하고 그들의 언어·종교·관습 등이 동질적이면, 그 집단은 하나의 민족이다. 언어·종교·관습 등의
동질성이 민족 구분의 객관적 요소라면 민족의식은 민족 구분의 주관적 요소이다.
국민은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주민'의 개념으로서
영어의 'nation'과 동일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영어의 'nation economy', 'nationalism',
'nation-state'를 국민경제·국민주의·국민국가로 번역하기도 하고 민족경제·민족주의·민족국가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국민과
민족을 혼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민은 정치경제공동체라는 점에서 문화공동체인 민족과 상이한 개념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영어의
'nation'에 해당하는 개념으로는 '국민'만을 사용하여야 하고, 영어의 'ethnic group'에 해당하는 개념으로는 '민족'만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한민족이 태초에 단일 민족으로 출발하였다'고 인식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우리 민족은 반만년 동안 단일 민족으로서 빛나는 역사적 삶을 살아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의 개념은 매우
애매한 것이다. 필자는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 수 천년 전에 무수히 많은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한 각각의 민족들은 고유한
생활지역을 갖고 있었고, 특정한 생활양식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그들 각각 배타적 동질집단 소속감을 갖고 있었다.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 수
천년 전부터 단일 민족이 살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는 어리석은 사고임에 틀림없다.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소국(小國)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빈부의 차이와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나타났는데, 이 시대에 부와 권력을
가진 정치적 지배자를 군장(君長)이라 하였다. 군장은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여 인접 지역을 예속시킴으로써 정치적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변태섭은
"「삼국지(三國志)」1)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서 이러한 지배자를 '군장(君長)'이라 하고 그들이 지배하는 소국을 '국(國)'으로
칭하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에 등장한 소국을 '군장국가'로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2)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의 소국 영역은 오늘날의
시·군(市·郡) 영역에 해당하는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이러한 소국들을 건설한 주인공들은 나지막한 언덕 위에 토성(土城)을 쌓고 그 안에 살면서
성밖에 사는 농민들을 통치하였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의 소국들을 성읍국가(城邑國家)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동기인들은 송화강(松花江)과
요하(遼河)유역으로부터 한반도에 걸치는 지역에 수많은 군장국가들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각 군장국가 주민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고,
서로 다른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서로 다른 가족제도 및 친족제도를 갖고 있었다고 본다. 또한 서로 다른 군장국가 주민들 사이에 서로
동일집단 소속감을 공유하지 않았다고 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필자는 청동기시대의 한반도 상황에는 문화권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어도 단일 민족의
개념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본다. 한반도 주민들이 처음부터 단일 민족이면서도 서로 다른 군장국가를 이루고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일반적으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형성되기 이전에는 그리 넓지 않은 면적에도 다수의 민족들이 존재한다.
필자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언급되는 부여·고구려·동옥저·읍루·예·삼한·왜 등을 구성하는 주민들을 서로 다른 민족 단위로 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청동기시대 이후의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지만 청동기시대의 한반도 상황을 추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A.D. 3세기 경에 한반도에 다수의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면, 그보다 훨씬 이전의 한반도에는 더 많은 수의 민족들이 산재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사고이다. 선사시대부터
고대까지 전개되는 한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은 당시의 한반도에 수십 혹은 수백의 민족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삼국시대
이전의 한반도에 다수의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서는 한국사를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청동기시대에
한반도에 흩어져 군장국가를 이루던 주민들이 서로 동일한 민족이냐 아니면 서로 다른 민족이냐의 문제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비록 다른 군장국가에 살고 있더라도 그 주민들이 단일 민족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면, 우리 민족은 청동기시대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의 각 군장국가 주민들이 서로 독자적인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고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
민족은 청동기시대 이후에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청동기시대의 작은 군장국가들은 나중에 강력한 지배자(주로 외부에서 들어온
철기사용인)를 중심으로 뭉쳐서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되었다. 그 후에 이 삼국이 하나의 국가로 합쳐지고 그 주민들이 오랫동안 서로 동화되어
동질적 문화를 공유하게 됨으로써 이들이 하나의 민족, 즉 한민족으로 발전한 것이다.
2. 단군조선은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가?
단군신화(檀君神話)는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알려져 있다. 단군신화는 고려
충렬왕대(1274년∼1308년)에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권람(權擥)의
「응제시주(應製詩註)」,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등에서도 단군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보다 130년이나 앞서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단군에 대한 내용이 없다. 또한 「삼국유사」보다 1,000년이나 앞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도 물론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일연은 「위서」, 「고기」, [비구전] 등의 문헌에서 고조선에 관한 내용을 인용하였는데, 「위서」와 「고기」는 현존하지
않고 [비구전]은 「수서(隋書)」나 「신·구당서(新·舊唐書)」에 나오고 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따르면,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곰으로부터 변신한 여자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고, 단군은 B.C. 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단군의 즉위년이 중국
전설시대의 요(堯)와 같은 때라고 한 것은 중국인과 대등한 한국인이라는 민족 자주성의 입장에서 주장된 것이다.3) 환인이라는 말은 원래
범어(산스크리트어)의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 東方護法神)에 어원을 둔 것이므로 환인은 불교가 들어온 뒤에 표현상의 수정을 통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단군신화는 역사적 과정에서 각색된 흔적을 갖고 있다.
단군이 민족 전체의 공동시조로 인식된 것과
단군조선이 민족 최초의 왕조로 인식된 것은 고려 후기에 들어서였다. 고려 후기에 단군이 강조된 것은 몽고 침략을 겪으면서 그리고 원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을 고양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 후기의 지배층은 고려 주민들을 단합시키고 통합시키기 위해서 상징적 실체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한반도 통일 이후에 500년 내지 600년 동안이나 하나의 국가 단위에 속해 있었던 고려 말의 한반도 주민들은 상징적
실체인 단군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집필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는 민족 역사의 첫머리를 단군조선에서
찾았다.
필자는 단군조선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보지 않는다. 단순히 상징적인 실체로서만 단군조선의 실체를 인정할 수
있으나, 역사학의 입장에서는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당혹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 진리는 정확히 밝히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에 단군조선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단군조선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볼 수 없는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단군조선은 고려시대 말의
시대적 필요성에서 등장한 것이다. 고려시대 말 이전의 어떠한 사료에서도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중국측의 사료에도 단군조선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또한 고고학적으로도 단군조선을 입증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단군조선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과 랴오둥
반도를 중심으로 기원전에 고대 문화권이 존재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기원전에 랴오둥 반도를 중심으로 선진문화가 발달하였던
사실은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4) 그러나 그것을 단군조선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단군신화가 아무런 근거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는 신화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보아서는 안 된다. 국사학계도 단군조선이 B.C. 2333년에 형성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이 B.C. 10세기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음을 단정하고 있다.
둘째, 단군조선이라는 실체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할 때에는 한반도와 그 주변에 무수히 많은 민족들이 산재하였다. 그러한
민족들은 각각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고, 서로 다른 종교적 관행을 갖고 있었으며, 서로 다른 관습을 갖고 있었다. 또한 각각의 민족들이
주변의 민족들을 서로 이질적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반도와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문화집단들이 단일 민족의식을 공유하였을 가능성은
없다. 우리 한민족은 그러한 다수의 민족들이 오랫동안 문화동화과정을 거쳐서 후대에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은 우리 민족이
형성되기 이전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할 수 없다. 한민족이 형성되기 이전에 어떻게 한민족 최초의 국가가 형성될 수
있겠는가?
셋째, 신라가 통일한 영역은 과거의 마한·진한·변한의 영역에 해당하고, 이 영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한어군(韓語群)
계통의 민족들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삼한일통의식(三韓一統意識)이 있었음은 문헌에 의하여 밝혀져 있다. 우리 한민족의 형성에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사람들은 바로 한어군 계통의 민족들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고조선이 위치하였던 영역에는 원래부터 부여어군(夫餘語群)
계통의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부여어군 계통의 민족들은 우리 민족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였다. 부여어군 계통의 민족들은 후대의
말갈족·여진족·만주족 등과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는 사람들로서 우리 한민족의 형성에 부분적으로만 기여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기원을 고조선과
연결하는 사고는 애초부터 잘못된 발상이었다.
3. 고조선을 한국사에 반드시 편입시켜야 하는가?
고조선에 관한 중국 문헌으로는 「관자(管子)」, 「전국책(戰國策)」, 「산해경(山海經)」 등
선진시대(先秦時代)의 문헌과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략(魏略)」 등 한대 이후의 문헌이 있다. 선진시대의 문헌에는 조선의 위치가
너무나 모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조선의 위치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한대 이후의 문헌에는 조선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나지만, 이를 해석하는 관점이 서로 달라 사학자들 사이에는 고조선 영역에 관한 논란이 매우 활발하다.5)
일부
사학자들은 "고조선 전성기의 서쪽 경계는 난하(?河)였고 고조선 말기의 서쪽 경계는 대릉하(大陵河)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고조선의 남쪽
경계는 압록강이나 청천강 혹은 예성강이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일부 재야 사학자들은 고조선이 시종 발해만 북안에서 북한의 서부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강역으로 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이 만주에 있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최근 북한 학계에서는 종래의
주장을 번복하고, 고조선의 중심이 단군시대부터 평양이었다고 한다. 이는 평양을 우리 문화의 중심지로 부각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6)
현재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나타내는 지도를 싣고 있다. 이 지도를 살펴보면, 고조선이 만주 남부와 한반도
북부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여기에 고조선은 중앙정치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여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교과서 내용은 매우 허망한 것이다. 만약 고조선의 영역에 관한 문헌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고고학적 자료를
가지고 고조선의 영역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많은 위험성이 있다. 왜냐하면 정치권은 항상 문화권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역 안에는 고조선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현재로서는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여타 정치 집단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7)
만약 이성계가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연(燕)이라 하였다면, 우리는 연나라를 우리 한국사에 편입시켜야 할 것인가?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은 후대에 형성된 실체이기 때문에 연의 주민은 한국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다. 비록 이성계가 국호를
연이라고 하였다 하더라도 우리는 연을 한국사에 편입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연의 강역이 한반도에 위치하지 않아서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민족들)에게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일부 사학자들의 주장대로 고조선의 중심이 만주에 있었다면, 우리는
'고조선을 한국사에 편입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부터 논의해야 한다. 고조선이 한민족이 형성되기 이전에 있었고 한민족 형성과정에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미쳤다면, '고조선을 한국사에 편입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부터 심각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주에 산재하던 민족들이 우리 민족의
형성과정에 기여한 것은 어디까지나 파편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부 재야사학자들의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고조선의 남변이 압록강
혹은 그 이북이었다면, 우리의 국사 교재 내용에서 고조선 부분을 삭제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본다.
4.
삼국시대의 민족적 동화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은 각각 오랜
시간에 걸쳐 주변의 소국(小國)을 정복·병합하여 영역을 확대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이것은 삼국시대 이전의 다수 민족들이
고구려·백제·신라를 중심으로 정복되고 동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주변의 약소민족을 정복하고 통합하였다. 다수의 주변
민족들은 결국 독자적인 문화를 상실하고 주류 민족으로 동화되었는데, 주변의 민족들이 주류 민족과 동화되는 과정은 매우 다양하였다. 어떤 민족은
세력 있는 민족과 적극적으로 타협하고 협조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서로 통합되었을 것이고, 어떤 민족은 주류 민족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거나 주류 민족의 하층계급으로 전락하였을 것이며, 어떤 민족은 주류 민족과 충돌을 피하면서 산악지역이나 외딴 지역으로 도피하여 생존해
나갔을 것이다.
고구려는 본래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라는 5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로 출발하였다.8) 여기서 5개의 민족은 국가 형성과정에서 주력을 이룬 민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구려는 다수 민족의 연맹체로
시작한 것이었다. 고구려는 대략 1세기경에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5개의 민족이 느슨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다가 외부의 침입 등 특정한 필요성에 따라 하나의 연맹체로 발전하였고, 이러한 연맹체가 장기간 지속됨으로써 민족적 동화과정을 겪게
되었다. 고구려의 계루부가 왕위 계승권을 독점하고 난 뒤에도 소노부가 독자적인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까지 단일 민족으로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가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각 민족의 대표자들은 서열화되어 중앙정부의 관료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귀족관료들의 세력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수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우리는 발해가 우리 민족사의 일부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역사 인식인가를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장군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발해를 건국하였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발해를 고구려인들이 건국하였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발해를 우리 민족이 건국하였다'는 것이 사실이 될 수는 없다. 발해는 우리 민족이
건국한 것이 아니고 고구려의 말갈족들이 주도적 세력이 되어서 건국한 것이다. 발해의 말갈족들은 후대에 여진족(女眞族)으로 불렸고, 여진족은
나중에 청(淸)을 주도적으로 건설하였다. 그리고 금세기에 우리가 만주족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은 바로 그들의 후예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발해를 우리 민족이 건국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만주족이 한민족(韓民族)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백제의
중앙정치기구는 한제국(漢帝國) 기구의 명칭을 갖고 있었다. 백제의 중앙통치구역은 왕경을 5부(部)로 나누고 각 부는 5항(巷)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지방통치조직은 한성시대와 웅진시대의 담로(擔魯)체제가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담로체제는 지방의 중요한 성에 왕의 자제나 왕족을 파견하여
그 주위의 10여 개의 성과 촌을 다스리게 한 것이다.9) 이것은 백제의 경우에 지배 민족과 피지배 민족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백제의 원주민을 구성하던 다수의 민족들은 외부에서 진입한 지배 민족에게 군사적으로 점령되어 있었다. 그래서 백제의 통치체제는
관료행정체제라기보다는 점령군체제 혹은 주둔군체제에 가까운 것이었다.
신라는 경주평야 일대의 6촌(후에 6부로 발전) 세력과
이곳으로 이주해온 박·석·김(朴·昔·金) 세력에 의해 구성된 사로국(斯盧國)으로부터 형성되었다. 이것은 신라로 진입한 3개의 세력이 6개의 주요
토착 민족들과 타협하면서 고대국가를 형성하였음을 의미한다. 신라는 내물왕(A.D. 356년∼402년) 시대에 사로국 주위의 여러 민족을
정복·병합하여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고, 지증왕(A.D. 500년∼514년) 시대에 주군제(州郡制)를 마련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체제를 정비하였다. 신라는 사로국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민족을 정복·병합하고 그 민족의 지배층을 경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는 동안에 각 민족의 지배층들은 중앙관료로 편입되었는데, 그들의 위계질서는 소속된 민족의 세력에 따라서 부여되었다. 신라의 관등 명칭에는 각
민족의 지배자를 의미하는 찬(瑗)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이는 신라의 관등체제가 여러 민족들을 편입시키는 가운데 성립한 것임을 의미한다.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에는 다수의 토착 민족들이 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 민족들은 연맹체로
통합되었고, 각 민족의 지도자들은 중앙의 관료로 흡수되었다. 백제는 고대국가 형성과정에서 외래 민족의 역할이 고구려의 경우나 신라의 경우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컸다. 백제의 외래 민족은 탁월한 군사력을 보유하여 토착 민족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하여 지배하였던 것이다. 결국 백제는
부족연맹체적인 단계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고대국가로 성립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고대국가 발전과정과는 사뭇 다르다고 하겠다.
특정 지역에 단일 정치체제가 출현한다고 해서 곧바로 그 지역의 주민들이 단일 민족으로 동화되는 것은 아니다. 삼국의 출현과 동시에
한반도에 세 민족이 출현한 것은 아니다. 삼국시대의 초기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계급적 차이를 보일 뿐만 아니라 민족적 차이도 나타냈다. 이는
삼국시대의 초기에 전사(戰士)가 되는 것이 의무로서의 성격보다는 특권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는 데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삼국시대 말기에는 삼국
내부에서 각각 민족들의 동화과정이 상당히 진행되었기에 기존의 지배 민족은 지배 계급으로, 그리고 기존의 피지배 민족은 피지배 계급으로 상당히
변화해 나갔다. 이러한 구성원 성격의 변화에 따라서 삼국시대 말기에는 일반인들도 전쟁에 동원되었다.
5.
통일신라의 삼한일통의식(三韓一統意識) 의미는 무엇인가?
신라는 대동강 하구에서 원산만을 잇는 선의 남쪽을
통일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점유하였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지는 못했다.10) 왜냐하면 신라는
고구려 영역의 일부만을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통일신라는 고구려의 핵심지역인 평양도 점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라가 고구려를 통일하였다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라가 과거의 삼한영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신라가 통일한 영역은
마한·변한·진한의 삼한 영역이었고, 이 지역에서 주로 사용하던 언어들은 한어군 계통의 언어들이었다. 한어군(韓語群) 계통의 언어들이 북쪽
지방에서 사용되던 부여어군(夫餘語群) 계통의 언어들과 매우 상이하였다고 비교언어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예·한·왜(濊·韓·倭)가 동이족에 속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넓은 의미로 말하는 예(濊)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방에 흩어져
살던 민족들을 총칭하는 말이고, 한(韓)은 마한·진한·변한을 비롯하여 한반도 남부와 중부에 흩어져 살던 민족들을 총칭하는 말이며, 왜(倭)는
일본열도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예·한·왜는 문화권의 개념으로 볼 때 비교적 유사한 민족들을 집합적으로 호칭하는 것이다.
필자는 예가 부여어군 계통의 민족들을, 그리고 한은 한어군 계통의 민족들을 지칭한다고 본다.
우리 민족의 주축이 된 민족이 한어군
계통의 주민인가 아니면 부여어군 계통의 주민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또한 한어군 계통의 주민과 부여어군
계통의 주민이 얼마나 다른 부류인가 하는 문제도 명확히 분석되어야 할 중요한 주제라고 본다. 신라가 통일한 영역에는 주로 한에 속하는 민족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한어군 계통의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통일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시기 동안에 단일 민족으로 발전하여 온
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한어군 계통의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발전한 민족이다'라는 필자의 주장은 역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학설이 아닌 듯
싶다. 왜냐하면 역사학계에서 흔히 발견되는 사고는 '우리 민족의 주축이 된 민족은 예맥족(濊貊族)이다'라는 사고이기 때문이다.11)
일부 사학자들은 신라의 삼국 통일을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부정적 시각은 신라가 당(唐)과 제휴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국토가 좁아졌고 민족의 활동무대가 좁아졌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즉,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우리 민족의 영역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약소 민족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신채호는 김춘추(金春秋)를 죄만 짓고 사대주의
병균을 전파시킨 자로 묘사하였고, 김유신(金庾信)을 음모만 일삼는 자로 혹평하였다.12) 손진태도 신라가 당의 힘을 빌어 삼국 통일을 한 행위를
반민족적 행위로 간주하였다.13)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신라의 통일이 우리 민족을 2국체제로 만들어 남북국 시대에 접어들게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중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신라의 한반도 통일을 우리 민족의 부분적 통일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 통일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시각은 민족 개념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우리 민족이 단일 민족화되지도 않았는데, 우리 민족이 남북국으로 분열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필자는 신라의 삼국 통일은 한반도의 다수 민족들이 단일 민족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신라·백제·고구려의 삼국은 독자적인 건국신화를 갖고 있었지만, 어느 국가도 국가의 연원을 고조선과 연관시키지 않았다. 삼국시대의
한반도 주민들은 고조선에 대하여 결코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았고, 한반도 주민들이 하나의 민족이라고도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부터 삼한일통의식(三韓一統意識)이 있었음은 문헌에 의하여 밝혀져 있다. 신라가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대당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문무왕 13년(673년)에 김유신은 '삼한위일가(三韓爲一家)'라고 말하였다.14) 신문왕 6년(686년)에 건립된 청주 운천동의 신라
사적비(寺蹟碑)15) 비문에는 '민합삼한이광지(民合三韓而廣地)'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신문왕 12년(692년)에 당의 사신이 신라에 와서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의 묘호(廟號)가 당 태종과 같은 것을 힐책하고 묘호를 바꾸도록 요구하였는데, 이에 대한 신라 측의 대답에는
'일통삼한(一統三韓)'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16)
맺으며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우리 민족이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존재하였다고 인식한다. 한국사 관련 서적에서
우리 민족이 수천년 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흔하게 발견된다. 이러한 오해는 아마도 한국사 교육의 문제에 기인한다고
본다. 사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동아시아에서는 선사시대에 여러 민족이 문화의 꽃을 피웠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민족은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고, 또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를 거치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기틀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한민족은 단일 민족이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단일 민족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고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다수의 민족들이 서로 동화되어 단일 민족화 과정을 본격적으로 겪게 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에게
특히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삼한일통의식은 통일신라시대의 주민이 모두 한(韓)이라는 민족에 속한다는 의식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소외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쉽게 단일 민족의식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하나의 국가가 되었지만 그 계통을 따져 올라가면
각각 신라·백제·고구려로 연결된다는 분립적 역사계승의식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후삼국의 등장이라는 것은 바로 분립적 역사계승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도 동일 민족의식이 강화된 한편 분립적 역사계승의식도 지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왕조 질서 내에서는 삼국
중에 어느 나라가 정통이냐는 시비가 나타났고, 고려 중기 혼란기에는 지방의 반란군들이 신라부흥·백제부흥·고구려부흥 등을 내세우는 형태로 분립적
역사계승의식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분립적 역사계승의식에 쐐기를 박는 사건은 몽고의 침입이었다. 30여 년의 대몽항쟁 속에서 한반도 주민들의 동일
민족의식은 크게 고양되었다. 13세기에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집필되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는 우리 민족의 기원을 단군조선에서 찾았다. 특히 「제왕운기」에서는 삼한의 70여 국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대몽항쟁을 거치면서 고조선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등장하였고, 고조선→삼한→삼국→통일신라→후삼국→고려로
이어지는 일원적인 역사인식체계가 확산되었다. 고려말기에 신흥사대부와 신흥군벌의 연합에 의해 새로운 왕조가 개창되었을 때 국호를 조선이라고 정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인식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17)
우리는 사실상의 역사와 인식상의 역사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인식상의 역사는 사실상의 역사와 다를 수 있다. 고조선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인식된 것은 고조선이 몰락한 이후에 약
1,300여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 인식은 고려말의 시대적 배경 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 인식을
사실상의 역사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1) 邊太燮, 1998(4판 6쇄), 「韓國史通論」, 三英社,
pp.45-53
2)) 한국역사연구회, 1990(재판3쇄), 「한국사강의」, 한울아카데미, p.66.
3))
이항재·이병두 역(유 엠 부찐 씀), 1990, 「고조선: 역사고고학적 개요」, 소나무. 이 책에서는 랴오둥 반도와 압록강 유역의 선사 문화가
당연하게도 고조선의 문화일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4) 徐榮洙, 1989,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재검토," 「韓國上古史: 연구현황과 과제」(韓國上古史學會 編), 民音社(대우학술총서), pp.352-353
5) 한국역사연구회, 1990(재판3쇄), 「한국사강의」, 한울아카데미, pp.85-86
6) 盧重國, 1990,
"韓國 古代의 國家形成의 諸問題에 관련하여,"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民音社(대우학술총서), pp.20-26
7)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本有五族, 有消奴部, 絶奴部, 順奴部, 官奴部, 桂婁部. 本消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태조대왕본기]에 의하면, 大武神王 중반이후 太祖大王 초년에 기존의 那國들을 점차 압도하여 桂婁部, 消奴部, ?那部, 貫那部,
桓那部로 이루어진 5부제를 구축하였다고 한다.
8) 한국역사연구회, 1990(재판3쇄), 「한국사강의」, 한울아카데미, p.95
9) 통일신라는 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지 못하였다. 그렇더라도 '신라는 우리 민족을 완전하게 통일하지 못하였다'라는 표현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이 아직 형성되기도 이전에 우리 민족을 통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0) 이항재·이병두 역(유
엠 부찐 씀), 1990, 「고조선: 역사고고학적 개요」, 소나무, p.4
11) 申采浩, 1979, "讀史新論,"
「丹齋申采浩全集 上」, 螢雪出版社, pp.325-329, pp.508-509
12) 孫晋泰, 1950, 「國史講話」, 乙酉文化史,
p.61
李昊榮, 1997, 「新羅三國統合과 麗濟敗亡原因硏究」, 書景文化史, pp.19-21
13) 대왕의 밝으신
덕에 매달려 척촌(尺寸)의 공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삼한이 한집안이 되고 백성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태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크게 편안해졌다고 하겠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14) 1982년 3월 충북 청주시 雲泉洞에서 신라의
寺蹟碑가 발견되었다. 이 碑는 신문왕 6년(686년)에 건립된 重修碑로 밝혀졌다.(李昊榮, 1997, 「新羅三國統合과 麗濟敗亡原因硏究」,
書景文化史, p.167.)
15)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12년조]에는 "선왕 춘추도 자못 현덕이 있었고 더구나
김유신이라는 양신(良臣)을 얻어 정치에 한마음으로 힘써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의 공덕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라는 기록이 있다.
16) 盧泰敦, 1990, "한국인의 기원과 국가의 형성," 「한국사특강(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pp.44-50
17) 「삼국지」는 晋의 역사가 陳壽가 편찬한 魏·蜀·吳 삼국에 관한 역사서이다. 「삼국지」의 편찬연대 상한은
적어도 晋이 吳를 평정한 280년 이후가 될 것이다. 대체로 진수가 著作郞職에 있던 太康年間(A.D. 280-289년)에 편찬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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