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民族史 千年의 반성 - 世祖의 쿠데타

이강기 2015. 9. 26. 15:20
民族史 千年의 반성 - 世祖의 쿠데타
 
명분과 정통성 잃은 권력자의 末路
 
韓姬淑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世祖의 왕위 찬탈
 1452년 개인적인 불행과 병약한 몸으로 2년간 왕위에 재위했던 文宗(문종)이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어린 端宗(단종)을 남겨두고 죽었다. 단종의 生母인 顯德王后(현덕왕후) 權씨가 세상을 떠난 12년 뒤였다.
 
  열두 살 어린 나이의 단종이 왕위에 오른 후의 삶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그를 보호해줄 세력은 종친과 옛 대신들이었으나 그들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世宗(세종)은 昭憲王后(소헌왕후) 沈씨와 후궁 사이에서 18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는데 이 가운데 大君(대군)만도 8명이었다. 당시는 議政府(의정부) 서사제의 실시로 의정부 권한이 강력해져 있었다.
 
  단종이 즉위한 이후 政局은 문종의 고명을 받은 대신들과 종친 사이의 대결이 격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이를 중재할 만한 지위와 권위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대신들은 首陽大君(수양대군)에게 周 文王(문왕)의 아들로 왕실을 도와 안정시키고 여러 제도를 마련한 인물들 같은 聖人이 되어 줄 것을 원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이러한 요구를 부정하고 찬탈의 길을 걸었다.
 
  수양대군은 당시의 관습이나 제도로는 왕이 될 수 없는 처지였다. 長子相續(장자상속)을 내세운 그의 아버지 世宗의 원칙에 의하면 그는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할아버지 太宗이 이미 「王子의 亂」이라는 쿠데타를 통해 실력으로 왕위에 오른 것을 알고 있었고 아버지 世宗의 즉위과정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결국 수양대군은 36세이던 1453년(단종 1) 10월10일에 이른바 癸酉靖難(계유정난)을 감행하여 대립관계에 있던 金宗瑞(김종서), 皇甫仁(황보인) 등 의정부 대신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수양대군은 「領議政 府事(영의정 부사) 吏曹兵曹判書(이조병조판서) 겸 內外兵馬都統使(내외병마도통사)」라는 직함을 가졌다. 조선조 관료조직의 최고 요직을 모두 장악한 것이다.
 
  정적이었던 동생 安平大君(안평대군)도 사약을 내려 죽이고, 자신의 즉위에 도움을 준 사람들을 靖難功臣(정난공신)이라 하여 43명을 책봉하였는데 모두 수양대군파였다.
 
  계유정난은 중앙정치세력 및 국정운영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은 살해하거나 유배에 처하는 등 철저히 숙청하였다.
 
  단종은 이후 2년 동안 형식상으로 왕위를 지키다가 1455년(단종 3) 윤 6월에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世祖는 9월에 왕위에 올랐다. 世祖는 형식적으로 조카인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지만 이는 형식적이었을 뿐 실제는 힘으로 빼앗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를 기해서 또 世祖의 핵심세력인 佐翼功臣(좌익공신)을 46명 책봉하였다.
 
  특히 世祖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權擥(권람) 韓明澮(한명회) 申叔舟(신숙주) 鄭麟趾(정인지) 韓確(한확) 등 공신세력들은 중앙정계를 주도하면서 강력한 훈신세력을 형성하였다. 또한 국정운영도 의정부의 재상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방식에서 국왕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말년에는 佛敎에 귀의
 
 
  世祖는 여러 가지 면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政敵(정적)들을 죽임으로써 많은 피를 보았다. 따라서 世祖는 왕위찬탈자라는 명분상의 약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 명분상의 약점은 언제든지 단종의 復位(복위)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死六臣(사육신) 사건이 그렇다. 成三問(성삼문) 등이 죽음을 당하고 이외에도 70여명이 治罪(치죄)되었다. 이후 世祖는 端宗을 魯山君(노산군)으로 강등하여 영월로 귀양보내고 西人(서인)으로 폐한 후 결국은 살해하였다.
 
  世祖는 자신의 능력과 기회를 이용해 왕위를 빼앗은 사람이다. 世祖는 왕위에 오른 후 14년간을 군림하다가 52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만년에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인간적 고뇌에 싸여 부처님에게 더욱 깊이 귀의하였다. 현대사에서도 이러한 과거의 경험을 그대로 답습한 대통령이 있었다.
 
  그러나 世祖가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마음의 짐을 씻고자 하였다 하여 결코 부도덕성까지 씻을 수는 없었다. 또한 世祖는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자신의 형수 顯德王后(현덕왕후) 權씨를 무덤에서 파낸 일로 마음병을 앓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필귀정이라도 되듯이 두 아들이 일찍 죽고 며느리가 요절하였다.
 
  세조의 왕위 찬탈은 이후에도 모델이 되어 仁祖의 反正(반정)을 낳기도 하였으나 그 명분의 취약함으로 인해 파행적인 정권을 낳았다. 또 가까이는 현대사에서 비정상적인 정권찬탈인 군부 쿠데타를 낳았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은 다 역사에 오점으로 남아 있다. 명분과 정통성을 잃은 정권은 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부정을 낳게 되며 결국은 망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역사란 승리자의 기록이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역사가는 죽은 역사를 되살려 내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역사를 심판한다. 부정하게 들어선 정권의 부도덕성은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정당화될 수 없음을 역사의 교훈을 통해 다시 한 번 새겨야 할 것이다.●월간조선 199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