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단군은 누구인가?
전국 초등학교에서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단군상 훼손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오고 있다. 단군은
역사적 실체인가, 아니면 조작된 신화일 뿐인가. 우리 민족사에서 단군이 지니는 가치를 재조명하고 새 밀레니엄 시대에 걸맞는 단군의 의미를
짚어본다
목잘린 단군상, 역사논쟁 비화
잇따른 수난…민족 구심점의 대상이 갈등·분열의 씨앗으로
10월 16일 오후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교정 한편에는 푸른 비닐을 뒤집어쓴 동상 하나가 흉물스럽게 자리잡고 있었다. 지난 5월 이 학교 운동장에 설치됐던 국조 단군상은 목이 잘리고 좌대가 붉은 페인트로 더렵혀져 보다 못한 학교측이 "학생들 교육상 좋지 않다"며 비닐을 덮어씌운 것이다.
▲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목이 잘린 교정의 단군상을 호기심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훼손 단군상을 철거하기 위해 천막을 치는 모습. |
이 학교 교장은 "지난 11일 단군상이 훼손된 이후 등하교 길에 목잘린 단군상을 보게 될 학생들 생각에 잠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며 "흉한 모습을 보다 못해 조만간 철거키로 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에서 단군상의 목이 잘리거나 훼손된 것은 이 학교가 8번째. 7월 5일 경기도 여주시의 초등학교 3곳을 시작으로 마산 의성 삼천포 서울 안성 등 전국에서 단군상들이 톱으로 목이나 코가 잘리는 등 잇따라 수난을 당했다.
단군상을 설치한 사설단체 한문화운동연합(한문연)은 지난해 몇 곳에 단군상을 세운 데 이어 올해 들어 전국의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369개의 단군상을 건립했다.
연초만 해도 무리없이 설치되던 단군상은 그러나 지난 5월 첫 단군상 훼손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단군상 훼손 사실이 알려지자 곧바로 기독교계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 것. 아직 범인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계가 평소 단군상 건립을 반대해왔다는 점에서 의혹의 눈길이 쏠린 것이다.
기독교계는 이에 대해 "단군상이 아니라도 남의 물건을 훼손하는 것은 범죄"라면서도 "단군상은 철거되어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교계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목회자단체, 교단들로 '단군상 건립 반대를 위한 기독교 대책위원회'를 결성, 단군상 철거운동을 벌이고 있다. 위원회 류재하 사무총장은 "단군은 특정 종교의 숭배대상이므로 한문연 아니라 어떤 단체에 의해서도 공공장소에 설치되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단군상을 건립하려면 대종교나 한얼교 예배당에 설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한문연측은 "단군은 특정 종교의 신앙대상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의 뿌리이기도 하다"며 "단군상 건립은 신앙과는 무관한 한민족 뿌리 찾기 운동의 구체적 형태"라고 반박하고 있다.
양쪽이 제기하는 이런 식의 주장은 서로 논점 자체가 다르다는 점에서 문제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 단군을 우리 민족의 국조로 받아들이는 일반 정서를 거부하고 신앙대상으로만 파악하는 기독교계나, 현실적으로 반발이 예상되는 데도 "신앙운동이 아니다"는 단순논리만으로 단군상 건립을 밀어부친 한문연이나 문제를 복잡하게만 만들 뿐이란 지적이다.
단군상 훼손을 목격한 한 초등학교 교장은 "국사 교과서에서 단군을 국조로 배우는 아이들에게 단군상 건립 문제로 험한 꼴을 보이고 있는 어른들이 어떻게 비쳐질 지 걱정"이라며 "민족 구심점의 대상이 오히려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되는 현실이 서글프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단군을 둘러싼 논란은 이번 뿐이 아니다. 지난 85년 서울시가 그해 역점사업으로 단군성전 건립계획을 발표했으나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이에 크게 반발, 무산된 바 있다. 당시 서울시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라며 지금처럼 학교가 아닌 서울 사직공원을 성역화하고 기존에 있던 공원 안의 단군성전을 확장하려 했었다.
단군 논란은 종교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학계의 역사·사상 논쟁으로까지 확대되고 있기도 하다. 최근 한문연과 결별한 김지하 시인이 벌이고 있는 상고사 바로세우기 운동에 대해서도 '민족정신의 회복'과 '극단적 쇼비니즘 (국수주의)'이란 전혀 상반된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김씨는 지난 8월 1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올바른 상고사 복원을 위한 민족 대 심포지엄'을 연데 이어 같은달 27일에는 서울 교육문화회관에서 '홍익인간도 죽었는가'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이같은 강연의 중심 주제는 물론 단군이다.
이에 대해 서양사학자인 한양대 임지현 교수는 '당대비평'에 기고한 '일상적 파시즘의 코드읽기'라는 글을 통해, 비록 직접 김씨를 지칭하지 않았지만 김씨가 주도하는 상고사 바로세우기 운동을 극단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강하게 비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단군 논란을 불러오는 것일까.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는 "단군을 볼 때 '역사적 실체'와 '역사인식'을 혼돈하는 데서 단군 논란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학계에서는 단군을 고유명사가 아닌 고조선 군장의 칭호 즉, 왕이란 뜻의 일반명사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라며 "고조선이 역사의 실체인 이상, 그 나라의 군장으로서 단군이 존재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단군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일부의 시각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 고양시 기독교연합회 신도들이 개천절인 지난 10월 3일 각 학교에서 설치된 단군상 철거를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
다만 역사적 사실로서의 단군과 단군에 대한 역사적 인식은 다르다는 것이 그의 설명. 노 교수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원전 2333년의 고조선 건국설은 아직 학문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으며, 고조선이 청동기 시대에 국가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대체로 기원전 10세기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며 "이는 현재까지의 사료연구와 고고학 발굴성과에 토대한 역사적 사실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족의 흥망이나 변화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시기에 이를 때마다 단군과 고조선은 재해석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며 새롭게 창조됐다. 즉 역사적 사실이 어떠했든 간에 역사 속의 단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역사적 인식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단군에 대한 역사적 인식의 핵심은 '한민족 공동체의 공통분모로서의 단군'이다.
단국대 윤내현 교수도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것은 단순히 한 나라가 만들어졌다는 의미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고 말했다. 그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흩어져 살던 다양한 씨족집단이 혈연을 초월해 문화적·지역적 공동체 (즉 국가)를 이루게 된 계기를 단군의 고조선 건국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즉 단군은 우리에게 최초의 공동체 의식을 심어준 존재라는 것.
이러한 단군 중심의 공동체 의식이 처음으로 크게 확산된 것은 몽고와의 항쟁을 벌인 고려왕조때부터다. 고대부터 민간신앙 차원에서 머물던 단군은 이때 몽고에 대항하는 민족적 상징으로 크게 부상했다.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시대의 영향으로 인해 분립된 역사계승 의식을 가졌던 우리 민족이 몽고군에게 너나 없이 핍박 받으며 단군과 고조선을 중심으로 뭉치게 된 것이다. 일연의 삼국유사도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민족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해석된다.
단군은 일제시대에 와서 다시 한 번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는 구심점이 된다. 정신문화연구원 정영훈 교수는 "일제는 고조선 형성의 토대가 되는 청동기 시대가 우리 역사에는 없다는 식민사관을 전파했다"며 "여기에는 청동기 문명을 토대로 만들어진 고조선과 단군을 근본부터 부정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일본에게 '우리는 당신들과 조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단군의 존재는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각각 1905년 4월1일자와 8월11일자부터 '조선건국', '단군건국' 등의 단기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단군역사를 연구하는 국학이 태동하고, 민족고유 종교인 단군교와 대종교가 생기는 등 이른바 '단군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서울대 신용하 교수와 한영우 교수가 처음 사용한 단군민족주의란 용어는 '단군을 민족 공동의 조상으로 간주하고 그같은 인식에 토대해 민족적인 정체성을 확인하고 결속과 발전을 도모하는 일련의 사상이나 의식 또는 정치적-문화적 운동'으로 정의된다.
대종교 총본사 김문겸 선도사는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등 일제시대 수많은 재야 국사학자, 국문학자,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 신도였으며, 만주에서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돕던 민간 부락들도 대종교 마을이었다"며 "대종교는 단군을 통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종교이기 전에 국권 회복을 위한 단군운동이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19세기 말 단군은 대몽항쟁때와는 다른 의미의 근대적 민족의식을 전파하는 구실을 했다. 정영훈 교수는 "한말 신분제 계급사회가 타파되는 과정에도 '모두가 단군의 자손'이라는 의식의 확산이 크게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민족의식의 상징인 단군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단국대 윤 교수는 "민족의 가치관을 지키는 것보다 선진국을 모방하며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이 편하던 것은 우리가 후진국이었을 때의 얘기"라며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에 우리가 선진국이 되면 그때는 누구를 모방할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는 "'민족의식을 버린 나라 가운데 선진국이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20세기 초 단군의 역할이 일제 강점기에 자주독립을 위한 민족의 구심점이며 탈신분사회의 표상이었다면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이 시대 단군이 갖는 의미 또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단군과 고조선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지적이다.
노 교수는 "단군의 새로운 임무는 민주적 공동체 형성에 기여하고 남북 통일을 위한 구심점이 되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기자 : scoop87@chosun.com)
고조선, 베일에 싸인 신비왕국학계 건국시기-도읍위치 등 주장엇갈려…'요동 중심살' 지지 얻어고조선은 민족사의 원류로 인식되었던 까닭에 역사학자나 일반인 모두의 높은 관심 속에 지속적으로 조명되어 왔다. 고조선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얼마나 큰 나라였는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관심을 가져보았을 문제다. 그러나 학자들마다 백가쟁명하여 일반인의 궁금증만 부풀려놓았을 뿐,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고조선에 관한 사료가 적고 고조선의 무대가 오늘의 우리나라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학문적 이유 외에, '민족의 영광'이라는 학문 외적인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 고조선 연구가 갖는 특수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단군 조선의 건국 시기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개국시기는 중국의 요 임금과 같다'고 한 이래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민족의 자존심과 관련되는 문제로 인식돼 왔다. 오늘의 학계에서도 기원 전 4∼5세기 경에 건국되었으리라는 신중론에서부터 기원 전 3000년 경에 이미 건국되었다고 보는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단군 왕검이 다스리던 아사달 사회는 신석기문화의 전통을 강하게 지닌 초기 청동기사회이며, 부족연맹 형태를 띤 일종의 신정국가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초기 국가의 성립연대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과거에는 고조선의 초기 중심을 대동강 유역에 둔 결과,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상한선인 기원 전 10세기를 넘지 못하였던 까닭에 단군신화에 반영된 고조선의 건국 기년을 입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를 만주의 요하 유역으로 보면서부터 어느 정도 그 시기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대체로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요동지역의 청동기 문화 발전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커지고 있다. 북한 학계는 요동반도의 강상, 누상 유적을 통해 노예제 국가로서의 고조선 건국시기를 기원 전 1000년대 전반기로 보았으며, 우리 학계는 요녕 지역의 비파형 동검문화에 주목하여 ▲은·주 왕국 유민의 동래 시기인 기원 전 1100년쯤이나 ▲요동지역에서 청동기 문화가 개화한 기원 전 1500년 ▲요서의 하가점하층 문화가 개시된 기원 전 2000년 등으로 보는 견해를 제기했다. 한편, 최근의 북한 학계는 단군릉 조성을 계기로 고조선 개국시기를 기원 전 3000년쯤으로 주장하고 있는데, 오차범위가 커서 역사 이전 지질시대를 측정하는 데 쓰이는 '전자 스핀 공명법'을 이용한 단군릉 측정방법의 정확성 문제 등 의문점이 허다해 받아들이기 힘든 실정이다.
▶고조선의 중심위치는 어디
대동강 중심설은 종래 학계의 통설인데 이러한 설에 동조하는 경우 마치 식민주의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오해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주된 이유는 일본 학자들이 고조선의 중심을 대동강 유역으로 고정함으로써, 그들에 의해 한국사의 무대가 반도 내부로 축소·왜곡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의 중심을 대동강 유역으로 보는 견해는 일본의 창작성 연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고조선의 중심을 대동강 유역으로 본 견해는 고려시대부터이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 보다 체계화되어 오늘날 학계에 이어진 것이다. 최근 북한 학계도 단군릉 조성을 계기로 그간 끈질기게 주장해오던 요동 중심설을 포기하고 대동강 중심설로 급선회하고, 나아가 대동강 유역이 민족문화의 발상지라는 대동강 문화론으로 확대하고 있다. 우리 학계에서도 요동 중심설을 주장하던 일부 학자들이 종래의 견해를 수정, 북한의 주장에 동조함으로써 고조선 연구는 새로운 국면에 돌입하게 됐다. 요동 중심설은 1920년대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어 오늘날 고조선의 중심을 만주 지역으로 주장하는 것이 마치 이를 계승한 것처럼 오해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고조선의 요동 중심설은 이미 조선 시대부터 논의되어 오던 것으로,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이를 계승하였으며 60년대 이후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북한 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요동지역의 고고학적 성과와 북한 학계의 요동 중심설에 자극을 받아 우리 학계도 비파형 동검, 미송리형 토기 등 고고학적 유물의 분포와 문헌사료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를 요동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기원 전 3∼4세기 쯤에 대동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는 이른바 이동설이 제시되어 80년대 이후 우리학계의 대표적인 견해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얼마나 큰 나라였을까.
고조선의 중심위치 못지않게 고조선의 강역 또한 관심의 대상이다. 고조선은 아테네와 같은 도시국가였는지, 아니면 로마와 같은 대제국이었는지 밝히고 싶은 것이다. 일부에서는 고조선은 출발부터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 걸친 대제국이었다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활동무대이지 고조선의 국가영역은 아니다. 이런 견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성격에 대한 설명이 전제되어야 한다. 영역의 크기는 그 사회가 가지는 문화수준과 사회구성 능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조선이 환상의 국가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라고 한다면, 고조선은 형성부터 멸망까지 동일한 성격을 지닌 국가일수는 없다. 세계 유수의 고대문명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아사달로 불리운 성읍국가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통일제국과 정면으로 맞섰던 대 고조선 왕국 시대로 발전한 생동하는 구체적인 실체다. 우리 최초의 국가인 '아사달'은 단군 왕검이 다스렸던 도시국가로,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던 까닭에 그 영역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현재 대략적인 강역추정은 이렇다. '단군조선은 하가점하층 문화(중국 동북지역 최초의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요하 유역의 어느 지역, 즉 후대에 조선으로 불리게 된 아사달을 중심으로 기원 전 2000년대 전반부터 신정국가적 성격을 지닌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기원 전 1100년을 전후하여 기자를 비롯한 은과 주 세력이 대릉하 유역에 등장함에 따라 이들과 대립하고 항쟁하면서 도읍을 옮기기도 하였으나, 은과 주의 동진을 요하 부근에서 저지하고 기자국이 소멸한 뒤로는 다시 고토인 아사달을 회복하고 중원세력과 대립하였다.' 기원 전 1000년을 전후하여 고조선은 신성국가에서 벗어나 칸(한) 칭호를 사용하는 대군장이 지배하는 연맹국가로 발전하고, 빠르면 기원 전 8세기쯤, 늦어도 기원 전 4∼5세기쯤에는 조선이란 국가명칭을 사용하는 중앙집권적 왕국으로 성장해 중원의 왕조와 각축하게 된다. 이 시대 고조선의 문화중에서도 요녕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비파형 동검 문화가 크게 주목받았다. 그러나 비파형 동검은 분포 범위가 넓고 유형이나 성격이 다양해 그것이 문화권인지 고조선의 정치적 세력권을 나타내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재의 학계는 이를 요서의 하가점상층 문화, 요동의 비파형 동검 문화, 길림의 서단산 문화, 한반도의 세형동검 문화권 등으로 대체적인 정리를 하고 있으나, 그 뿌리에 관하여는 동호라든가 예맥, 조선, 숙신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혼선 양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요하와 대동강 일대에 밀집분포하는 고조선의 미송리형 토기가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토기는 주재료인 점토가 장시간이 지나도 소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화 담당자의 성격을 시대적, 지역적으로 비교적 민감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문헌사료와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성과를 토대로 고조선 왕국과 교섭하였던 주변 제 민족의 위치를 고려하여 살펴보면, 전성기 고조선의 강역은 대체로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대릉하 유역에서 동호와 만나고, 남쪽으로 대동강 유역을 경계로 진번, 진국과 이웃하며, 북쪽과 동쪽으로는 부여 숙신 임둔과 접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서영수/ 단국대 한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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