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40년 만에 털어놓은 군사쿠데타의 숨겨진 진상<6·마지막회>] 박정희 좌익시비로 사상논쟁 불붙다 |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숙명의 대결을
펼친 윤보선과 박정희. 박정희의 좌익경력 시비에서 촉발된 사상논쟁은 선거기간 내내 박정희를 압박한다. 그러나 반역의 수레바퀴를 돌려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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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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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3월 윤보선 대통령의 하야 이후
정국은 우여곡절 끝에 다음해인 1963년 10월15일 제5대 대통령선거를 맞이하게 됐다. 그동안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였던 인사들이 해금돼
정치활동이 허용됐으나, 군정연장과 민정회복을 둘러싼 힘겨루기로 정치권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또 야당통합의 명분을 내건 ‘국민의 당’
창당이 결국 파탄으로 끝나면서 윤보선 허정 양씨의 대립만 격화시켰고, 반면 박정희 의장은 군복을 벗고 공화당총재이자 후보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맞게 된 대통령선거는 야당에 절대적으로 불리할 것으로 예상됐다. 선거일을 한달 앞둔 9월15일 후보자 등록을 마감한 결과, 기호 순으로 장이석(신흥당), 송요찬(자민당), 박정희(공화당), 오재영(추풍회), 윤보선(민정당), 허정(국민의당), 변영태(정민회) 등 7명이 대통령후보로 공고됐다. 대통령후보는 7명이지만 선거의 양상은 처음부터 박정희, 윤보선, 허정 3파전으로 압축됐다. 강력한 여당 후보에 야당 후보 2명이 맞서는 건 누가 봐도 야당에 불리한 싸움이었다. 나는 그 무렵 급성맹장 수술을 받고 입원중이었다. 박정희 후보를 이길 방법은 무엇일까? 막강한 조직력과 풍부한 자금으로 무소불위의 군대식 선거를 강행할 게 뻔한 박정희 후보의 공화당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분열된 야당을 하나로 묶어야 된다는 것이 초미의 조건으로 생각됐다. 윤보선 후보와 허정 후보를 하나로 묶는 방법은 없을까? 내 처지에서는 허정 후보를 선거 도중에 포기시키는 방법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지리멸렬된 민정당의 사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없이 어둡기만 했다. 야당통합 협상과정에 김도연씨와 유진산씨가 이탈한 민정당의 분위기는 썰렁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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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언론의 한국 대선 비판 | ||
그러나 싸움은 시작된 것이다. 맹장수술로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안국동에 설치된 윤보선씨 선거캠프에
합류했다. ‘국민의 당’ 파동과 ‘진산 파동’으로 정신없이 시간을 낭비한 민정당은 윤보선씨를 중심으로 겨우 중앙당의 조직을 끝낼 수 있었다.
그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선전부장에 이충환씨(후에 국회의원)가 임명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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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역 상공에 나타난 헬리콥터 | ||
마침내 윤보선 후보는 첫 유세지를 대구에서 목포로 변경했다. 그 무렵 나는 두 가지 가슴 아픈
소식에 접하게 됐다. 그중 하나는 윤보선 후보의 숙부이기도 한 윤치영(초대 내무부 장관)씨가 공화당의장으로 취임하고 박정희 후보의 당선을 위해
전국적인 유세를 이미 개시했다는 소식이었다. ‘적을 이용해서 적을 물리치는’ 제갈공명의 전술이라고나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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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고산아 말하라, 너는 알고 있다” | ||
연단에 오른 윤후보는 감격에 못 이겨 눈가에 이슬이 맺힌 듯했다. 그는 첫 연설부터 2년에 걸친
군사정권의 독재와 부패를 매섭게 비난하고 나섰다. 군사정권을 기아, 부패, 실업, 불법, 분열 등 ‘5악’으로 단정했다. 연설의 열기가 높아가고
있을 때 목포역 광장은 청중으로 가득히 채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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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관련자가 정부에 있다” | ||
윤보선 후보의 기자회견은 박정희 후보는 물론이고, 공화당과 군사정권에 대해 사실상의 폭탄
선언이었다. 중요한 것은 첫째 여·순반란사건 관련자가 군사정부 내에 있다는 발언이고, 둘째는 박정희 의장이 전력에 비춰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
시사한 점이다. 윤보선씨는 분명히 ‘박정희 의장은 여·순사건에 관련되었을지도 모르며 그의 전력이 공산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역사적인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의 ‘사상논쟁’은 이렇게 해서 불이 붙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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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무기징역 언도의 증거 | ||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돼 박정희 소령에게 무기 언도가 내려진 확실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친김에 서울신문(현 대한매일)에 들러 신문철을 샅샅이 뒤졌다. 서울신문에서도 1949년 2월17일자 지면에서 ‘군법회의 숙군 공판 최남근
일파에 총살 언도’ 제하의 2단짜리 기사를 발견했다. 기사내용은 이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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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몰고온 간첩 황태성 사건 | ||
사상논쟁의 모체는 여·순반란사건이 분명하다. 야당이 확실한 증거도 확보하지 못하고 문제 제기에
급급했던 것은 경솔한 처사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당사자인 박의장이나 공화당측의 대응조치는 더욱 졸렬한 감이 없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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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무하는 유언비어 | ||
1961년 12월27일자 육군 중앙군법회의 판결문은 황태성의 행적을 더욱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황태성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 4년시 항일운동에 가담한 관계로 퇴교 처분을 받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다가 재정난으로
2년을 중퇴한 자로서 일정시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표지하고 항일운동에 가담하던 중 8·15해방을 맞이하자 조선공산당에 입당함과 동시에 경북도당
조직부장, 10·1 폭동사건의 주동역을 하고 월북한 후 북괴 치하에서 해주인쇄소 총무국장과 산업성 지방산업관리국장을 경유, 무역부상 겸 서리 등
요직에 재임한 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황태성 간첩사건’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국내에 잠입한 황태성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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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 후보의 사퇴 | ||
중반을 향한 10·15 대통령선거의 전망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대구 유세를 계기로 야당
진영에 뜻하지 않은 변화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허정 후보의 ‘국민의 당’ 안에서 심상치 않은 징조가 나타났다.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박정희
후보와 대결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라는 여론이 ‘국민의 당’ 안에서 퍼져나갔다. 유세 청중 수에서 윤보선과 허정 후보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일례를 들면 충북 제천에서 윤후보 유세시에는 2만 청중이 모였으나 허씨 유세 때는 불과 500명의 청중이 모였을 뿐이다. 그리고 선거는 항상
‘양극의 대결’로 결판이 나는 속성이 있다는 통설 때문인지 박정희·윤보선의 양극 현상이 대세를 이룬 마당에 허정씨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그리 많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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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해볼 만한 싸움” | ||
박정희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광주에서 사상논쟁에 대해 본격적으로 반격전을 개시했다. 대통령 후보로서
대중연설을 처음 갖게 된 박정희씨는 ‘역사는 역행시킬 수 없다’는 제목으로 선거연설을 했다. 그는 야당후보가 집중적으로 공세를 취하고 있는
사상논쟁에 대해 ‘낡은 매카시즘의 찌꺼기’라고 단호히 일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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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금 20만 달러의 행방 | ||
한쪽에서 ‘너는 공산당 당원이었다’고 공격하면, 다른 쪽에서는 ‘나는 공산당 당원이 아니었다’고
되받아치는 진흙탕 싸움의 양상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 소령이 군법회의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은 것은 선거일로부터 14년
전인 1949년 2월13일이 아니었던가? 14년이라는 세월이 그다지 긴 세월도 아니었건만 생존하고 있을 서울고등군법회의의 7명의 심판관과 2명의
검찰관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박소령에게 무기형을 선고한 심판관들은 왜 떳떳하게 증언을 못하는가? 군법회의 설치 장관을 비롯해서
박정희 소령의 구명 운동을 벌였던 당시의 고위 장성들은 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까? 야당 진영에서는 넋두리 같은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마침내 투표일을 일주일 앞둔 10월9일 안동과 부산에서 절정을 이뤘다. 안동 중앙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유세에서 윤보선 후보가 먼저 폭탄 선언을 했다. “공화당은 민주정당도 아니며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정당도 아니다. 공화당은 완전히
불법, 위법으로 사전 조직된 정당이다. 그뿐 아니라 공산당의 돈을 가지고 공산당의 간첩이 와서 공산당식으로 만든 정당이므로 민주정당이 될 수
없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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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수된 동아일보 호외 | ||
야당으로서는 엄청난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간첩 황태성과 관련해 제기해왔던 의문점에 대해
박정희 후보가 스스로 해답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여·순반란사건’을 위시해 대구 10·1 폭동사건, 그리고 간첩 황태성 사건에 이르는 사상논쟁의
뿌리가 서서히 드러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선거 초반 전주에서 테이프를 끊었던 사상논쟁은 투표일을 3일 앞둔 10월13일에 이르러 마지막
결판을 낼 계획이 수립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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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의 도피작전 | ||
대문 안에 들어서자 김영삼 대변인이 기자들에 둘러싸여 긴급회견을 진행하고 있었다. 김대변인은
“윤보선씨 자택은 13일 밤(선거 이틀 전)부터 10여 명의 기관원에 의해 포위됐으며 실질적으로 연금 상태에 있다. 신변 보호를 위해 5명의
경찰관이 지키고 있는데도 별도의 감시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김대변인은 “이것은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태일 뿐 아니라 이러한
사태는 공포 분위기에서 부정선거를 치르겠다는 저의로밖에 볼 수 없는 만큼 3000만의 눈으로 감시하며 부정을 적발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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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논쟁, 누구한테 유리했나 | ||
유권자의 최종 판정이 내려진 것이다. 박정희·윤보선의 숙명적인 대결은 박정희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됐다. 10월17일 경주 관광호텔에서 개표결과를 지켜보던 박정희씨는 서울 안국동 윤보선씨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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