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40년 만에 털어놓은 군사쿠데타의 숨겨진 진상 5] 장면은 장도영의 이중플레이에 속았다 |
여러 경로를 통해 군부 쿠데타설을 보고받은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 총리에게 이를 알려준다. 하지만 장총리는 “내가 있는 한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말만 믿고 대통령의
경고를 무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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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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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군의 통수권을 도마 위에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집권당인 민주당 내 ‘신파’는 노장파와 소장파로 갈라져 ‘낮은 단계’의 정치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었다. 3·15 부정선거를 겪는 과정에서 군이 보여준 작태는 참으로 암담했다. 당시 신문철을 들춰보더라도 군 내부의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상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던 공개투표라고 표현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대통령후보에 이승만, 부통령후보에 이기붕이 적힌 투표용지가 사병에게 수교되면 상사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기표를 하고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집어넣는 기계적인 부정투표가 감행됐다. 도저히 말을 안 듣는 사병은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 군에 근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던 일이다. 일부 영관급 정치장교들의 ‘정군운동’에 대해 사병들 사이에서는 지지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첫 내각이 구성될 때 싹트기 시작한 민주당 신파 내 ‘노장파’와 ‘소장파’의 싸움은 그들의 모체였던 민주당 신·구파의 싸움을 능가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신파 내의 노장파는 주로 부총리 격인 오이영 국무원 사무처장관을 비롯해 김영성 재무장관, 현석호 국방장관 등을 지휘그룹으로 삼았던 주로 관료출신의 그룹을 지칭한 것이고 소장파는 이철승 국방위원장을 앞세운 비교적 젊은층의 초·재선 의원그룹을 가리켜 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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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싹은 처음부터 잘라야 | ||
이들이 처음 충돌한 것은 제1차 내각을 구성할 때였다. 4자회담을 장총리가 깨버린 것도 이들
노·소장파 사이의 분쟁이 기폭제가 됐다. 그후 구성된 1차 내각은 노장파의 완전무결한 승리였다. 소장파가 추천한 인물이 철저하게 노장파에 의해
배제됐다. 그들 노장·소장파는 육군참모총장의 임명을 둘러싸고 일전을 벌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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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의 박정희 옹호 | ||
이철승 의원은 내가 존경하는 선배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해진 것은 뒷날 쿠데타 주모자가 된 박정희
소장이, 이철승 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던 국회국방위원회가 보증하겠다고 장총리를 설득함으로써 추방을 피할 수 있게 된 사실이다. 노장파의 주장을
꺾고 소장파가 승리한 것만은 분명하지만 후일 박정희 소장이 5·16 쿠데타의 주모자로 변신한 데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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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는 장면정권 | ||
집권당인 민주당 신파의 노장파와 소장파가 마치 경쟁이나 하듯이 쿠데타 첫날부터 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한 장도영 중장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 것이나 장면정권 초기부터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던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에게 면죄부를 안긴 처사는
비극적 운명을 자초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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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포섭공작 | ||
그들은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임철호, 장경근 등 강경파에게 상처를 안겨주기 위해서 세칭
‘양담배사건’을 폭로했다. ‘양담배사건’은 자유당 중앙당이 일선 장병 위문용으로 전매청으로부터 공급받은 양담배를 시장에 팔아 착복한 사건이다.
더욱이 전매청이 보관하던 양담배는 길거리에서 어려운 서민들이 생계를 위해 팔던 양담배를 압수했던 것이어서 강경파 체면에 먹칠을 한 사건이기도
했다. 장면내각에서 벌어지는 소장파와 노장파의 싸움을 바라보면서 청와대는 불안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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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계획, 장도영에 통보 | ||
장면내각의 노장·소장파가 5·16 쿠데타 드라마의 조연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야당인 신민당으로
분가해 나온 민주당 구파 역시 쿠데타를 초래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야당인 신민당도 처음부터 김도연계와 유진산계 두 파벌로 나뉘어 분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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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사회 혼란 | ||
5·16이 발생하기 약 3개월 전인 1961년 2월22일 민주당의 구파 동지회는 신민당을 결성했다.
위원장(당수)에 김도연 의원 그리고 간사장에 유진산 의원을 선출했다. 그리고 그들은 장면내각에 파견했던 5부 장관을 즉각 철수시켰다. 장면정권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사실상 장내각이 단독으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끔 최악의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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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확은 안 돼요” | ||
콜론보고서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을 분석한 다음 ‘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하더라도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고 결론짓고 있다. 콜론보고서는 장면내각이 출현하기 직전 이미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미국 상원에 알리고
있었다. 세상에 잘 알려진 콜론보고서는 미국 상원외교위원회가 앞으로 미국 외교정책을 어떻게 펴나가야 하는지 그 지침을 마련하기 위해 전문가
집단에게 자문을 구해 만든 보고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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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 검토 | ||
나는 그 날로 장총리를 만나 대통령의 뜻을 전하면서 “총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다.
장총리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됩니다. 안돼요. 그 사람 자유당정부에서 일한 사람이 아닙니까? 앞으로 말썽이 나면 대통령이 책임지라고
하슈”라고 대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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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용사의 국회의장석 점거 | ||
국민이 장정권에 큰 기대를 걸었던 만큼 실망도 비례해서 컸을 뿐 아니라 어려운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후일 대통령이 장면 총리에게 용퇴를 요구하는 강한 발언을 하게 된 것도 자문위원들의 의견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청와대는 장내각에 낙제점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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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뒷처리의 어려움 | ||
나는 청와대로 돌아와 목격한 그대로를 대통령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즉각 국회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공한을 보낼 것을 결정했다. 장면정권에 대한 경고의 뜻이 담겨 있었다. 당시 헌법 제60조에는 ‘대통령은 국회에 출석하여
발언하거나 또는 서한으로 의견을 표시한다’고 규정돼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국회에 공한을 보내는 행위는 헌법이 보장한 정상적인 행위에 속했다.
대통령은 국회에 보낸 공한에서 ‘헌법을 개정해서 혁명재판을 새로이 출발시킬 수 있는 특별법의 제정’을 국회에 요구했다. 대통령은 솔직하게 발포
명령자에 대한 재판 결과를 “상식적으로 수긍할 수 없다”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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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법 제정 | ||
다시 말해 과거의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그 죄를 처벌할 수 있도록 사후에 법을 만들어도 안되고
한 번 처벌한 동일 죄목에 대해 다시 재판을 해서 두 번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헌법 제23조의 정신이다. 따라서 헌법 제23조를 개정하자는
것은 과거에는 죄가 안됐던 행위라도 새로 법을 만들어 처벌이 가능하도록 하자는 것이고 일단 언도가 내려진 동일 사건에 대해서도 다시 기소할 수
있게 하자는 것과 다름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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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만세!” | ||
결국 자동 대상은 666명, 그리고 심사 대상은 1만4000명에 이르는 엄청난 사람들이 공권력 제한
대상으로 묶이게 된 것이다. 나라 전체가 큰 충격 속으로 휘말려 들었다. 소급법이 범죄에 대한 철저한 단죄라는 측면도 있었으나 정치적 보복이라는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약체 내각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역풍을 맞게 됐다. 공민권을 제한하는 헌법의 개정 파동은 혼란상태에 빠진 사회를 더 한층
혼란스럽게 몰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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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부단한 지도자들 | ||
대통령은 나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무언가 굳은 결심을 한 것 같았다. 횃불 데모가
있고 다음날인 23일 밤, 청와대에서는 윤대통령과 장면 총리, 곽상훈 민의원의장, 백낙준 참의원의장, 현석호 국방부장관, 야당인 신민당에서
김도연 위원장, 유진산 간사장, 양일동 총무, 조한백 총무부장 등 명실공히 ‘국가최고지도자회의’가 개최됐다. 조재천 법무부 장관만이 긴급 용무
때문에 불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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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나은 사람 있나?” | ||
데모를 방지하는 법이라든가 김일성을 찬양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바에야,
또 막아야 할 확고한 소신만 있다면 긴급조치발동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긴급조치와 거국내각 구성에
대해서 장총리는 크게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긴급조치가 장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것으로 내심 오해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장총리는 “좀더 시간을 달라”고 그 자리를 모면하려 했고, 나중에는 “내가 만일 그만두면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당장 어디에 있는가?”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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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 보고된 쿠데타설 | ||
청와대도 5·16 쿠데타와 관련해 드라마에 비교될 수 있을 만큼 적지않은 비화(秘話)를 간직하고
있다. 처음으로 청와대에 군대의 거사설을 전한 사람은 윤대통령과 같은 민주당 구파 소속의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의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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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총장이 있으니…” | ||
첫째, 거사자금을 마련해 줄 것. 둘째, 대통령을 쿠데타에 협조할 수 있도록 설득해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참으로 대담한 육군대령이기도 했다. 어쨌든 유대령의 부탁을 받은 심씨는 “대통령 문제는 나한테 맡기시오”라고까지 호언장담을
했다고 한다. 후일 심씨는 유대령과 약속한 대로 군대 내에서 거사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과 유대령이 대통령을 한번 만날 것을 희망한다는 말까지
대통령에게 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역적행위와 같은 쿠데타를 하겠다는 사람이 쿠데타의 대상자이기도 한 대통령에게
거사계획을 말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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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의 눈물 | ||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 계획을 정확하게 장면 총리에 전할 때마다 장총리는 “장도영 총장에게 물어보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한다”는 답변만을 되풀이하지 않았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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