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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회고(4) 청와대 입성 군인들의 일성 “돗자리 깔고 위스키 가져와!”

이강기 2015. 9. 25. 19:00
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40년 만에 털어놓은 군사쿠데타의 숨겨진 진상<4>
청와대 입성 군인들의 일성 “돗자리 깔고 위스키 가져와!”

 

윤보선은 끝내 쿠데타군에 굴복, 정치활동정화법을 인준한 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앞세워 청와대에 몰려든 '혁명주체'들과 그 경호원들. 누군가 청와대 비서들을 향해 외쳤다. "이봐, 위스키 있어?"

 
김준하  

 

 

 

 

 

정치활동정화법은 이 나라 정치인뿐 아니라 구정권에 관여한 공직자를 합해 4369명을 일단 법으로 묶어 놓고 ‘최고회의 정치정화위원회’가 한 사람씩 심의해 정치를 할 수 있는 사람과 정치는 물론 선거 때 입후보도 할 수 없는 사람을 가려낸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 나라 역사상 인권을 말살하는 전무후무한 악법이었다.

청와대는 이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의 용납할 수 없는 폭거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은 그들로부터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것조차 혐오하는 듯했다. 대통령은 하야를 굳게 결심했다.

그런데 최고회의는 ‘정정법’을 의결 공포한 후 박일경 법제처 차장을 청와대로 보내 대통령에게 정정법 인준을 요구했다. 박차장은 법의 개요를 설명한 다음 “정정법이 시행되더라도 대통령께서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고 말했다. ‘본법 시행 당시의 대통령은 본법의 적용을 받지 아니한다’는 정정법 부칙 조항을 지적하는 말인 듯했다.

박차장은 자타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공법학자다. 그의 입에서 “대통령은 해당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떨어지자 대통령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평생을 정치활동으로 보낸 대통령만 유일하게 정정법에서 제외한다면, 4000여 명의 정정법 해당자들은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것은 분명 대통령과 국민을 이간하려는 고도의 술책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나는 당시 대통령은 정정법을 인준하는 서류에 형식일지라도 절대 사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건의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대통령은 박차장에게 자신이 정정법 제정에 반대해온 사실을 일러주고 “만일 대통령이 인준 결재를 안 했을 때 법의 효력은 어떻게 되는가”고 하문했다. 박차장은 최고회의에 관한 법률에 따라 최고회의가 결의하고 공포하면 그 순간부터 법의 효력이 발생하며 대통령의 인준절차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박차장은 대통령의 인준행위는 헌법에 규정돼 있기 때문에 ‘인준의 거부행위’는 헌법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대통령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진퇴유곡에 빠졌다. 대통령은 그날 정정법 서류에 결재하지 않고 박차장을 돌려보냈다. 박차장이 청와대를 떠난 이후 청와대 전화에는 불이 붙었다. “대통령은 결재를 했는가?” “대통령은 이 판국에 무엇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오늘 즉각 그만두고 청와대를 떠나라.”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들이 줄줄이 청와대에 찾아왔다. “혁명군인들이 그 정체를 드러낸 마당에 대통령은 하루빨리 하야하라”고 건의했다. 대통령은 이미 하야를 결심한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1962년 3월21일 오전 대통령은 박정희 의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하야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박의장은 혼자 청와대로 왔다.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되는 날이다. 박의장은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깍듯이 거수경례를 하고 대통령의 말을 기다렸다. 대통령은 “더 이상 대통령자리에 머물러 있기가 싫어,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박의장은 “지금 그만두실 때가 아니다. 내년 여름 민정 이양 때까지 유임하시기를 바란다”고 의례적인 하야 만류의사를 전했다.

 


 

 

“박의장, 앉으세요”

   인사말이 끝난 후 두 사람은 정정법을 사이에 놓고 마지막 담판을 벌였다. 대통령은 “정정법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정치에 참여했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제재를 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정정법이 결과적으로 국민총화를 해치고 국가 이익에도 배치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하야하려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박의장은 지지 않았다. 그는 “구정치인들이 잘못을 반성하는 기미가 없을 뿐 아니라 벌써부터 선거운동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고, 국민들은 건망증이 심하기 때문에 앞으로 선거를 하게 되면 구정치인이 당선될 것이 틀림없으므로 정정법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의장의 말을 요약하자면, 구정치인들이 정계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예 구정치인이 출마하지 못하게 하는 것말고는 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정치인은 국민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대통령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침내 언쟁으로 발전했다. 윤대통령은 “폭력과 권력을 이용한 정치가 인류 역사상 길게 유지된 일이 없다”며 “군사 정부가 자유당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고 박의장을 면박했다.

박의장은 대통령 말에 격분한 듯싶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하면서 “나는 목숨을 걸고라도 이 일을 하겠다”고 막가는 말을 했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하자 대통령이 말렸다. “박의장, 앉으세요. 박의장, 앉으세요” 하고 박의장을 달래는 대통령의 모습은 비서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박의장은 대통령의 권유에 못 이긴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통령은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를 꺼냈다. 무엇인가 작심한 듯했다.

“조선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 당파 싸움으로 날을 새우고 노론 소론으로 갈라져 사색당파 싸움을 하다가 결딴나 마침내 일본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았느냐? 군사정부는 구정치인 신정치인으로 파당을 만들지 말고 국민이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달라.”

박의장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작별 인사를 했다. 대통령은 의례적으로 현관까지 박의장을 배웅하면서 “박의장!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바란다”고 사정하듯이 말했다. 대통령과 나란히 복도를 걸어 나온 박의장은 마지막으로 거수경례를 하면서 “나는 목숨을 걸고 하겠습니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고 청와대를 떠났다. 박의장은 이날 두 번이나 ‘목숨을 걸고’라는 말을 했다. 나는 대통령으로부터 하야성명을 기초하라는 명을 세 번째 받았다.

박의장에게 하야의 뜻을 밝힌 다음날 아침, 대통령은 나를 불렀다. “정정법에 대해 인준 결재를 할 것인가, 안 하고 하야할 것인가?”라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기 때문에 분명하게 내 생각을 건의했다.

“정정법은 최고회의가 이미 공포를 했기 때문에 법률적 효력이 발생했을 뿐 아니라 대통령이 인준결재를 했을 경우 권력을 상실한 수천 명의 정치인과 지도급 인사들이 대통령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한 사람만 유일하게 정정법 대상에서 제외시킨 혁명정권의 처사는 책략적인 색채가 농후할 뿐 아니라 그 일로 해서 대통령은 본의 아닌 오해까지 사게 되고 정치적 동지들로부터 엄청난 원성을 듣게 될 것이다.”

대통령은 “그래, 당신 말이 옳아. 결재를 안 하기로 하세”라고 말했다. 나는 대통령의 말을 듣고 안도하면서 한편 기쁘기도 했다. 대통령을 만난 후 비서실장 방에 들렀더니 실장과 대통령 법률고문인 윤세창 고려대 교수가 역시 정정법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서실장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장의 말에 따르면 “최고회의측에서 만일 대통령이 정정법을 인준하지 않고 하야를 하려 든다면 하야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고 모종의 어려운 사태까지 발생할는지 모른다”는 경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윤교수의 말을 듣고 나는 두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통령이 최고회의에서 이송된 법률안에 대해 인준 결재를 하는 것은 법률의 효력 발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정당한 이유 없이 인준 날인을 거부할 경우 위헌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머리가 혼돈스러웠다. 나의 건의가 정치 면에 치중한 것이었다면, 비서실장이나 윤교수의 생각은 현실적이고 법률적인 면을 신중히 고려한 것이었다.

 


 

 

끝내 박정희에게 굴복한 윤보선

   마침내 대통령은 비서실장과 윤교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기자회견 전에 문제의 ‘정정법’을 인준하는 서류에 사인했다. 그뿐 아니라 윤교수의 건의에 따라 최고회의 앞으로 ‘대통령 사임서’까지 제출했다. 대통령은 하야를 결행하면서 어떤 장애물도 제거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직 가시방석과도 같은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은 일념뿐이었던 것 같다.

정정법은 곧 위력을 발휘해 4369명을 심사대상자로 발표했고, 나중에 그중 1336명에 대해서는 ‘정치를 해도 좋다’고 적격 판정을 내렸다. 나도 정정법에 묶여 버렸다. 신문기자를 하다가 7·29선거에 출마했고 신민당 지구당위원장을 했으며 청와대에서 일한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 후 1, 2차 해금에서도 풀려나지 않았다. 다시는 이 나라에 정정법 같은 악법이 생겨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3월22일 오후 3시. 윤보선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행사였던 하야 기자회견을 청와대 대회견실에서 가졌다. 나는 회견에 앞서 하야성명서를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대통령이 하고 싶었던 얘기가 성명서에 포함돼 있었으므로 기자회견은 간단히 끝날 수 있었다. 대통령은 “이 자리를 그만두게 되니까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어깨가 가뿐하다”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야성명에 다 들어 있다”는 말로 기자들의 질문을 피했다.

대통령의 심중을 충분히 이해한 기자들은 특별히 질문을 하지 않아 기자회견은 간단히 끝났다. 최고회의측에서는 단 한 사람도 배석하지 않았다. 비운의 대통령이라고나 할까, 윤보선씨의 대통령 생활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는 하야성명에서 “덕이 없는 사람이 국가 원수직에 있었던 19개월 동안 이 나라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나는 책임을 느낀다”고 말함으로써 5·16 쿠데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1960년 4월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1961년 5월 군사혁명이 발생해 두 차례 혁명을 연거푸 겪지 않으면 안 된 이 나라의 불행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나의 재임중 그런 사태가 생긴 것을 더욱 유감스럽게 여긴다”고 말해 5·16에 대한 유감 표명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물러날 결심을 앞당긴 동기는 “구정치인에 대한 정정법이었다”고 분명히 밝힌 다음 “이러한 입법에 반대해온 것은 일부 인사를 두둔하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이러한 취지의 입법으로 국민의 인화와 단결에 금이 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앞날의 불행을 예고하기도 했다. 끝으로 “대통령을 사임하면서 이 나라의 번영과 국민생활의 평화를 기원한다”고 말을 맺었다. 회견을 마친 대통령은 곧바로 가족들과 함께 청와대를 떠나 안국동 자택으로 향했다. 다사다난했으며 한 많았던 윤대통령의 ‘청와대 생활’은 이렇게 끝이 났다.

 


 

 

술시중 드는 청와대 비서관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자 초상집 같은 공허감과 적막이 청와대에 흘렀다. 나는 책상을 정리하고 사표를 썼다. 한시도 이 근처에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난 지 세 시간이 지났을까. 바깥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느닷없이 지프 행렬이 청와대 정문으로 밀어닥쳤다. 나는 비서실장과 몇몇 비서와 함께 나란히 현관에 서서 그들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의장을 선두로 해서 ‘혁명 주체’들이 경호원들과 함께 현관으로 몰려들어왔다. 5·16 아침이 연상됐다. 현관에 들어서자 그중 한 사람이 “이봐. 위스키 있어?” 하고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청와대 입성 제 일성이었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는 외제 위스키가 흔하지 않았지만 빈번이 외국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청와대에는 귀한 위스키가 항상 준비돼 있었다. 위스키를 찾은 그 장교는 청와대 사정에 밝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5·16 아침 박의장이 대통령과 처음으로 면담했던 소회의실로 우르르 들어갔다. 빈 방에서 잡담을 하다가 그중 한 사람이 총무비서를 불렀다.

“이봐 비서관. 돗자리를 몇 장 구해 오라구.” “바깥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고 술상을 준비하라구.” 명령조로 말하는 장교를 바라보면서 나는 기가 찼다. 적지를 점령한 승전장교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돗자리를 구하려고 수선을 떤 끝에 외제 위스키가 곁들인 돗자리 술상이 준비됐다. 술상이 차려진 그 자리는 오늘 아침까지 윤대통령이 산책을 하고 건강 관리를 하기 위해 줄넘기를 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술 마시고 희희낙락하는 꼴을 보고 있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어 청와대 안에 있던 관사로 귀가해 버렸다.

다음날 아침 술자리 시중을 든 비서들에게 물어보니 박정희 의장을 비롯한 혁명 주체들이 자정 가까이 술잔을 기울이며 청와대 점령을 자축했다는 것이다. 바로 전날 대통령이 하야의 뜻을 밝히자 “지금은 그만둘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년 여름 민정이양 때까지만이라도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하던 박정희 의장의 모습이 새삼 머리에 떠올랐다. 박의장이 최고회의에서 정식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추대되어 국민에게 선서를 하고 나서 당당하게 청와대에 입성했더라면 얼마나 보기가 좋았을까? 국가원수로서 체통도 서지 않았을까?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돗자리 파티가 격에 맞는 일이었을까? 차라리 하루를 기다렸다가 외국 사신들도 불러놓고 ‘대통령 권한대행 축하파티를 벌였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봤다.

 


 

 

여성 타이피스트의 피아노

   박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결정되자 청와대 비서들은 모두 사표를 냈다. 그러나 추상 같은 최고회의의 지시가 떨어졌다. “비서실 직원 전원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정시 출퇴근해야 하며 만일 이를 어겼을 때에는 공무원법에 따라 엄벌할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윤대통령의 대변인이었던 만큼 박의장의 대변인 노릇은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신문사들은 청와대 사정을 알고 싶어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가 됐다.

청와대 비서실은 무려 6개 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게 됐다. 검찰, 경찰, 정보부는 물론 군 수사기관까지 합세해 19개월에 걸친 윤보선씨의 ‘대통령 생활’을 쥐 잡듯이 들추기 시작했다. 나에게 내려진 첫 지시는 “청와대에 대한 조사는 절대로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된다. 만일 기관조사가 언론기관에 알려질 경우 엄한 문책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였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19개월 동안 윤대통령의 정치적 발언, 헌법에 저촉되는 정치적 행동, 법에 어긋나는 대외적인 발표, 기자회견의 진의 등을 구체적으로 보고하라”는 것이다.

나에게 대통령의 행동이나 말을 조사해 보고하라니.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런 지시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며칠을 두고 고민한 끝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썼다. “대한민국 헌법 66조 규정에 따르면, 대통령의 국무에 대한 행위는 문서로 해야 하며… 로 돼 있기 때문에 국무에 대한 대통령의 행위는 총무처에 보관돼 있고 대외적인 발표나 기자회견 내용은 신문 스크랩에 보관돼 있음”이라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보고서를 받아본 관계책임자는 나를 매우 못된 사람으로 비난했다는 것이다.

비서실에 대한 조사는 장기간 치밀하게 진행됐으나 한 건의 비리도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경찰이 털어낸 먼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비서관 한 사람이 ‘공적 기물을 불법 취득했다’는 혐의였다. 사연을 설명하자면 이승만 전대통령은 재임중 경무대(청와대 전신) 비서실에 미국 여성 한 명을 타이피스트로 채용한 적이 있다.

이대통령이 국문보다는 영문으로 된 책이나 신문을 애독했고 외국의 많은 지인들과 서신 교류가 잦았던 관계로 미국인 타이피스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이대통령은 특별히 배려해 청와대 안에 있던 집 한 채를 그 타이피스트에게 대여했다. 그 여성은 부임할 때 피아노를 들여왔는데, 4·19혁명 후 피아노를 남겨 두고 귀국했다. 그 피아노를 윤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에 들어온 한 비서가 사용했다는 것이다.

결국 검찰이 나서서 피아노가 개인 소유일 뿐 아니라 개인이 버리고 간 물건이기 때문에 문제 삼을 수 없다고 판단해 무혐의로 끝났다. 무엇인가 먼지를 털려는 군사정부의 기도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잡듯이 조사했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한 군사정부는 먼저 비서실장을 비롯한 비서관 네 명의 사표를 수리했다.

나에게는 사흘 안에 관사를 비우라는 특별명령이 떨어졌다. 명령을 전달하러 온 경호실장에게 “사흘 안에는 힘들지만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비우겠다”는 뜻을 새로 부임해온 현역 군인 총무비서관에게 전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내 말을 전해들은 총무비서관은 “대통령 대변인까지 지낸 사람이 집 한 채도 없단 말야. 그러니 쫓겨나지…”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의 총무비서관은 후일 구 황실 관리 책임자로 임명됐으나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돼 형무소 신세를 졌다.

 


 

 

“경찰 야식비 배상하라”

   하야는 했으나 윤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계속됐다. 장기간에 걸친 비서실 조사가 무위에 그치자 직접 대통령을 걸고 넘어갔다. 5·16 이후 청와대는 100여 명의 경찰이 경비했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그들의 일부는 이승만 정권 당시 악명 높은 ‘경무대 경찰서’에 근무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근무태도는 성실하고 충실했다. 경비 경찰에게는 1일3식 기준의 식비가 지급됐지만 야간근무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그들에게는 ‘야식’ 지급이 불가피했다. 윤대통령은 이러한 사정을 보고받고 야식을 관급으로 지급할 것을 지시한 일이 있었다.

대통령이 하야한 후 청와대 경리장부를 조사하던 군사정부 관계자들은 예산에 포함되지 않은 야식비를 대통령이 관급으로 지급할 것을 명령했으므로 ‘야식대’를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나라에 배상해야 한다고 통고했다. 전직 대통령이 경찰의 야식비를 개인 재산으로 변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의장이 시킨 일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런 발상 자체가 얼마나 유치하고 졸렬한가?

식대가 당시 화폐로 500만환이었으므로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억대에 가까운 금액이다. 나는 공무를 집행하는 경비원 식대를 은퇴한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부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최고회의에 항의하려 하자 윤대통령은 나를 극구 만류했다. 결국 하야한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군사정부에 대해 일절 대항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윤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대통령의 하야 계획이 극비에 부쳐진 탓에 청와대 일반 직원들은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도 갑작스레 하야하느라 사유물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윤보선씨는 미처 챙기지 못했던 물건들을 집에 가져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침구, 식기, 액자, 화원에 있는 꽃나무 등이었다. 군사정부 관리들은 냉담했다. 청와대에 일단 들어온 물건은 개인 것이건 아니건 간에 반환할 수 없다는 회답이었다. 외국의 예와 같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기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군사정부의 처사는 후일을 위해서도 용서받기 힘든 처사임에 틀림없었다.

군사정부의 끈질긴 조사는 끝나지 않았다. 대통령이 하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김남(金楠) 비서관을 연행해 갔다. 4·19 혁명 직후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화장(梨花莊)으로 운반해 갔던 관용물 가운데 정부대장에 기록된 물건은 다시 청와대로 환수한 일이 있었는데 그 업무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김남 비서관이었다.

혐의 내용은 윤대통령이 관용물 가운데 고가품을 사유화했을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김비서관도 일부 관용물을 사유화했으리라는 것이다. 김비서관은 인촌 김성수 전부통령의 7남으로 명문 출신일 뿐 아니라 정직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박정희 장군이 사단장 시절 김비서관은 헌병 장교로서 박장군 밑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었다. 그는 고려대학교 뒷산에서 좋은 나무를 골라 박의장의 신당동 집에 정원수로 심어주기도 했다. 언젠가 박의장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현관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김비서관을 보고 ‘남의 장군’이라고 불렀던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대통령이 하야한 후 공화당측에서 김남의 영입을 집요하게 추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윤보선씨와의 의리를 끝까지 지켜 10여 년 동안 윤보선씨를 모시고 고난의 야인생활을 택했던 사람이다. 윤보선씨가, 그리고 김남 비서관이 무엇이 아쉬워서 이승만 대통령의 사유물이나 그가 사용하던 공유물에 욕심을 낸단 말인가.

결국 군사정부측의 끈질긴 조사는 아무런 사실도 발견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애당초 그들의 목적은 청와대측에 도덕적인 흠집을 내서 정정법을 비롯해 그들이 노리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부수적인 성과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졸렬하고 용서받기 어려운 것이었다.

군사정부는 보통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기막힌 일을 계속 저질렀다. 내가 안국동 윤보선씨 댁을 자주 출입한 것을 트집잡아 정정법을 이용해 체포령을 내리기도 했다. 얼마 후에는 협박과 회유를 해가며 공화당 비밀조직에 참가하도록 회유도 했다. 윤보선씨를 반대하는 일만 맡아주면 무조건 국회의원을 시켜주겠다고도 했다.

 


 

 

정치장교들의 쿠데타 계획

   40년이 지난 2001년에 “박정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야당 당수에게 질문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만일 그 사람이 내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분명히 대답할 수 있다.

“박정희와 같은 사람 수백 명이 다시 이 땅에 태어나도 나는 개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는 박정희와 같은 사람이 또다시 5·16과 같은 쿠데타를 꿈꾸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절대로 이 땅에 다시 태어나서는 안 된다.”

19개월 동안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장면 정권의 탄생과 몰락 과정을 지켜본 내게는 5·16은 어떠한 연기자도 쉽게 연기해낼 수 있는 한 편의 ‘쿠데타 드라마’로 생각된다. 각본대로 쿠데타 계획은 진행됐으며 허약한 장면 정권과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사회상은 쿠데타 드라마의 조연 역을 훌륭하게 해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면 정권의 불행은 출발점에서부터 싹트고 있었다. 내각책임제 헌법에 따른 총선거를 통해 구성된 민의원이 장면씨를 국무총리로 인준한 것은 1960년 8월18일이다. 한편 정치 장교들이 충무장(忠武莊)에 모여서 정군 계획을 쿠데타로 방향을 돌린 것은 1960년 9월10일이었다. 정확히 말해 장면 정권이 출범한 지 한 달도 못 돼 새 정권을 타도하려는 쿠데타 계획이 진행됐다는 이야기다.

장면 정권과 쿠데타 드라마는 잘 짜인 각본과 같은 운명의 산물이었다고나 할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비극이기도 했다. 5·16 쿠데타로 빚어진 윤보선 대통령과 박정희 장군의 숙명적 대결도, 따지고 보면 5·16이 직접적인 기점(起點)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 원인은 4·19를 기점으로 탄생한 민주당 정권 초창기부터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장면 내각의 허약한 체질, 집권당인 민주당의 신·구파 분열, 자유당 독재정권 하에서 굳어진 공직사회의 복지부동과 극도의 사회혼란, 허약한 경제 체질 등 쿠데타를 유혹하고 쿠데타를 정당화(?)할 만한 소지를 민주당 정권은 처음부터 드러내고 있었던 셈이다. 따지고 보면 집권 9개월은 장면 정권으로서는 이미 지적한 산적한 난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비운의 민주당 정권이 정치군인들에 의해서는 몰락하는 과정을 내각책임제하에서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던 청와대 대변인의 처지에서 바라보면서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돌이켜보면 3·15 부정선거는 4·19 혁명의 직접 동기가 됐고, 4·19 혁명은 8·12 장면 내각의 출범을 가능케 했다. 모두가 1960년 한 해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사건 상호간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다. 3·15 정·부통령 선거는 지금 생각하면 대담하고 무모한 부정선거였다. 내가 겪은 부정선거 경험만 보더라도 부정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15 부정선거 지령문 입수

   나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서 3·15 선거를 겪었다. 투표를 며칠 앞두고 중요한 정보가 입수됐다. 민주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출마한 장면 후보(당시 이승만 정권 밑에서 부통령직에 있었다)가 내무부가 비밀리에 지시한 ‘부정선거 지령문’을 입수해 보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밤늦게 부통령 공관 근처에 살고 있던 조재천 의원(당시 민주당 대변인)댁을 불시에 찾아갔다.

“정부의 부정선거 지령문을 야당에서 입수했다는데 사실입니까?”
“나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거짓말 마세요. 장면 부통령이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신문사는 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조재천 의원님, 만일 조의원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우리도 민주당에 절대로 협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마지막 협박이 먹혀들었다. 조의원은 그 길로 장부통령 공관에 가서 문제의 부정선거 지령문을 가지고 왔다. 하룻 밤만 빌려 달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에 반환하기로 약속하고 집에서 처와 함께 밤새도록 지령문을 복사했다. 2할 사전투표를 포함한 부정선거 계획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선거를 며칠 앞두고 3·15 부정선거 지령문을 전문 보도했다.

정부는 공보처를 통해서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지령문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지령문을 보도한 나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 나는 몸을 피하라는 신문사의 지시에 따라 밤기차로 전북 이리로 숨어들었다. 그 탓에 선거에 참가하지 못했다. 선거 후 지령문 사건은 사실로 밝혀졌고 곧이어 4·19가 폭발함으로써 나는 무사히 귀가할 수 있게 됐다. 문제의 지령문은 최인규 내무부장관이 각 시·도 경찰국장에게 발송한 것으로 당시 전남 경찰국장이 김의택(金義澤) 민주당 원내총무에게 전달했고 김총무는 장면 부통령에게 지령문을 맡겼던 것이다.

3·15 부정선거가 정부 차원에서 공공연히 감행된 사실이 지령문을 통해 입증된 것이다. 그러면 군대 내의 선거는 어떠했던가? 이미 밝혀진 대로 상급 장교가 하급 장교에게, 하급 장교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심지어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으로 기표하는 것을 지휘관이 확인한 다음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게 했다는 것이다. 해군에서는 한 사람이 몇 번씩 투표하는 방법으로 거의 완벽한 부정선거가 이뤄졌다.

3·15 부정선거를 잠시 회고한 이유는, 정치장교들이 장면 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정선거를 지시한 합참의장이나 참모총장들에게 사퇴를 강요했던 정군(整軍)운동이나 하극상의 명분을 3·15 부정선거에 두었던 만큼 새로 출범한 장면 내각으로서는 정치장교들을 처리하는 것이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3·15 부정선거는 4·19를 촉발하고 4·19는 장면 내각을 출현시켰기 때문에 장면 내각은 더욱 난처한 입장에 처했고 그 틈을 타 쿠데타의 싹은 소리 없이 자라났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명분이 정당했다 하더라도 헌법을 유린하는 반역행위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만큼, 결과적으로 쿠데타를 허용한 장면 정권의 모체인 민주당의 정체가 새로운 관심사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대립

   나는 민주당의 탄생 과정을 신문기자의 처지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장면 정권의 산모격인 7·29선거에서는 입후보자로서 직접 참가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에 비교적 소상하게 그 내막을 알고 있었다. 장면 정권을 탄생시킨 민주당은 1954년 11월 이승만 정권의 3선 금지 개헌 파동, 일명 ‘4사 5입’ 개헌파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당시 국회의원 수가 203명이었으므로 개헌 정족수는 재적 3분의 2 이상인 156명이었다. 개헌안을 표결에 부친 결과 찬성이 155표였다. 의장은 당연히 개헌안을 부결로 선포했다. 그러나 다음날 자유당이 “203의 3분의 2는 정확히 155.333…이므로 4사5입하면 155가 되니 개헌안은 부결이 아니라 가결되었다”고 투표 결과를 뒤집은 사건이다. 지금 생각하면 동화 같은 이야기로 들리겠으나 47년 전 당시는 온 나라를 뒤흔들어 놓을 만한 일대 정치적 사건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끝까지 개헌안이 통과된 것으로 밀어붙여 이승만이 세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개헌 직후 민주주의의 장송곡을 울부짖었던 재야 세력이 똘똘 뭉쳐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기 위해 신당운동을 전개했다. 마침내 1955년 9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출현한 정당이 바로 민주당이었다.

기자로서 매일같이 신당운동의 진전 상황을 보도하던 나로서는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의 싹을 키워야 할 민주정당이 이 나라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체나 나라를 막론하고 사람이 모인 곳에, 특히 정치 권력을 추구하는 집단에서는 어김없이 파벌과 분열이 존재했다.

재야세력을 규합하다 보니 민주당은 처음부터 신익희(申翼熙), 조병옥(趙炳玉), 윤보선(尹潽善), 김준연(金俊淵), 김도연(金度演)씨 등을 중심으로 한 ‘구파’와 장면(張勉), 곽상훈(郭尙勳), 박순천(朴順天), 한근조(韓根祖)씨 등을 중심으로 한 ‘신파’의 파벌이 형성됐다.

오늘날의 정당들도 보수계니 혁신계니, 상도동계니 동교동계니 하면서 이념이나 출신지에 따라 혹은 친·불친에 따라 계파가 형성돼 있지만 민주당의 신·구파는 태생적 산물이었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분열과 투쟁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체질적으로 보더라도 신익희, 조병옥씨를 정점으로 하는 구파가 ‘당료파’로 분류된다면 장면씨를 정점으로 한 신파는 ‘관료파’로 요약될 수 있다. 그들의 세력 싸움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한 예로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 대비한 후보 지명전만 보더라도 조병옥씨와 장면씨는 각각 484표 대 481표의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 후보가 결정되는 백중지세를 형성했던 것이다.

 


 

 

불신의 장벽은 높아지고

   4·19혁명 후 내각책임제 개헌을 관철시킨 민주당의 당내 투쟁은 1960년 7·29총선에서 절정에 이른다. 한 사람이라도 더 공천후보를 확보하기 위해 무자비한 포섭 공세와 금전 공세를 서슴지 않았다. 내 경우만 보더라도 대표최고위원 장면씨 명의로 공천장을 받았지만, 장면씨는 신파의 내부 공천을 받은 한아무개씨에게 막대한 선거자금을 공공연하게 우송했다. 그뿐 아니라 엄연히 당 공천자가 입후보한 지역이라 하더라도 무소속 후보가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공천후보를 제치고 무소속 후보를 경쟁적으로 후원하기까지 했다.

어찌됐든 치열했던 7·29 총선은 끝이 나고 민주당은 선거결과 230명 재적 가운데 175명을 당선시켜 개헌선을 훨씬 넘는 거대한 정당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1960년 8월8일 제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이 개회했다. 참의원 의장에 백낙준 의원이, 그리고 민의원 의장에는 신파의 곽상훈 의원이 당선됐다. 그러나 부의장 선거는 달랐다. 참의원에서 소선규 의원이, 민의원에서 이영준, 서민호 두 의원이 당선됐는데, 이것은 신파의 참패였다.

신·구파의 세력 대결은 마침내 대통령과 국무총리 지명을 놓고 격돌했다. 3분의 2가 넘는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 내에서 벌어진 경쟁은 겉보기엔 집안 잔치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분당과 결별을 각오한 처절한 싸움이었다. 민주당 구파는 민·참 양원의 부의장직을 독점한 여세를 몰아 대통령과 국무총리 자리마저 차지하려 했고, 영리한 신파측은 대통령을 재빨리 양보하고 실권을 장악할 수 있는 국무총리직을 쟁취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어쨌든 대통령과 국무총리 후보지명을 둘러싼 민주당 신·구파의 혈투는 양 파벌을 돌이킬 수 없는 파경으로 몰아갔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대통령 윤보선과 국무총리 장면 사이에 불신의 골을 파놓았다. 장정권이 몰락하는 과정에 윤보선과 장면 사이를 가로막은 불신의 장벽은 5·16 쿠데타의 진행과 맞물려 이 나라 역사를 불행하게 만든 한 요인이 됐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지명을 두고 신파측의 작전은 재빨리 결정됐다. 그들은 대통령에 윤보선 의원을 추대할 것을 구파에 앞서 발표한 것이다. 신파에 비해 구파의 작전은 혼란스러웠다. 구파를 지휘하던 유진산(柳珍山) 의원은 대통령에 장면, 국무총리에 윤보선 안을 제시했다. 두 직을 독점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한민당 계열의 구파 진영에서는 ‘유진산 안’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민·참 양원에서 부의장을 독점한 여세를 몰아 대통령에 윤보선, 국무총리에 김도연을 내정하고, 양직을 구파에서 독점할 생각이었다. 유진산 의원은 자신의 뜻을 꺾고 마침내 독점 안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여론은 합리적인 신파측 안에 지지를 보냈다.

신·구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대통령 후보로는 윤보선 의원이 별다른 잡음 없이 결정됐다. 1960년 8월12일에 소집된 민·참 양원 합동회의에서 윤보선 의원은 재적 259명 중 208표를 얻어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제 대통령으로 선출된 윤보선씨가 누구를 1차로 국무총리로 지명하느냐는 문제가 국회뿐 아니라 온 국민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윤보선에 대한 장면의 배신감

   당시 내각책임제하의 헌법 제69조는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해 민의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단, 대통령이 민의원에서 동의를 얻지 못한 날로부터 5일 이내에 다시 지명하지 아니하거나 2차에 걸쳐 민의원이 대통령의 지명에 동의를 하지 아니한 때에는 국무총리는 민의원에서 선거로 뽑는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윤보선 대통령이 장면, 김도연 두 의원 가운데 누구를 먼저 국무총리로 지명할 것인가? 신파측에서는 구파 소속인 윤보선 의원을 대통령으로 임명하는 데 적극 협력했으니 당연히 장면 의원을 먼저 지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구파측은 “동일계파에서 대통령과 총리가 선출돼야 국정운영이 원활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김도연 의원을 1차로 지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신·구파 양측은 총리선출 때 절대적 ‘캐스팅 보트’를 장악하고 있던 49명의 무소속 의원을 포섭하는 데 문자 그대로 혈전을 벌였다. 나는 7·29선거에서 낙선했지만 대통령의 총리지명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도연 의원은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첫 재무부장관을 지냈다. 당시 재정 분야에서는 제1인자로 누구나 인정하던 경제학 박사다. 그리고 신파의 장면 의원은 2차에 걸쳐 부통령으로 출마해 이승만 독재정권과 당당히 대결했던 민주투사로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있었다.

내 생각엔 윤대통령이 구파에 속해 있지만 집권당이 된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인 장면 의원을 1차로 총리후보에 지명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내각책임제를 실시하는 나라에서 다수당 당수를 총리로 지명하는 것은 정도요, 상식에 속할 뿐 아니라 분열 위기로 줄달음치는 민주당의 화합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윤대통령은 8월16일 김도연 의원을 초대 국무총리 후보로 1차 지명했다. 내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김도연 의원이 1차 총리후보로 지명되는 순간 이를 반대했던 민주당 신파 진영은 물론 장면 의원도 대통령에게 철저한 배신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이 일로 ‘윤보선과 장면’은 치유될 수 없는 불신과 경계의 관계가 됐고, 그 관계가 5·16쿠데타로 인해 장면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지속됐을지 모른다.

군사정권이 작성한 혁명사에 따르면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던 정치군인들은 자유당 말기부터 쿠데타를 모의해왔고 특히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구체적인 쿠데타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4·19혁명이 일어나자 그들은 쿠데타 계획을 일단 접어두고 사태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정부 구성과 기회를 노리는 쿠데타 계획이 동시에 공존했던 것이다. 경계와 불신에 가득 찬 대통령과 총리 관계가 쿠데타 세력에게는 다시 없는 호재로 작용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윤보선의 판단 착오

   앞으로 기술하겠지만 1963년 10월15일 실시된 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와 박정희 후보가 ‘민정이냐? 군정의 연장이냐?’를 놓고 숙명의 대결을 벌였을 때, 실각한 장면 총리와 그를 추종하던 민주당 신파는 분명히 윤보선 후보에게 등을 돌렸고 윤후보는 15만표 차이로 대선에서 패배했다. 군정을 종식하려는 국민의 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어쨌든 1차로 지명된 김도연 의원은 8월17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총투표수 224명 중 가 111표, 부 112표, 무효 1표로 3표가 모자라 총리로 인준 받는 데 실패했다. 윤대통령은 다음날 장면 의원을 2차로 총리에 지명했고 그는 민의원 본회의에서 투표자 225명 중 가 117표, 부 107표, 기권 1표를 얻어 제2공화국 초대 국무총리로 선출됐다.

나는 윤대통령에게 1차로 김도연 의원을 지명했던 이유에 대해 물어본 일이 있다. 대통령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누가 더 높은 지지를 받고 많은 표를 얻어낼 수 있을까 하는 판단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팽팽한 대결에서 끝까지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무소속 의원들을 불러 의견을 타진한 바, 그들은 장면씨보다 김도연씨를 지지하는 의원이 더 많다고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정확한 내용을 알아낼 방법이 없어 김도연씨를 지명할 수밖에 없었다.”

윤대통령의 판단은 빗나갔지만 설혹 당수가 아니라 하더라도 국회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의원을 총리 후보로 지명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윤대통령이 잘못 판단한 데는 그의 책임도 있지만 당시 윤대통령을 만났던 무소속 의원들의 배신 행위가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김도연 의원에 대한 총리인준 투표가 실시되기 전날 밤 25명의 무소속 의원들은 행동통일을 결의하고 다음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해 김도연 후보와 장면 후보의 확답을 요구했다.

첫째, 4·19혁명의 완수 방안이 무엇인가?

둘째, 원내 소수파(무소속)의 권한을 보장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셋째, 거국내각 구상 및 국방·내무장관의 중립 방안은 무엇인가?

넷째, 농어촌 및 경제대책은 무엇인가?

무소속 의원들이 제시한 위의 4개항 가운데 핵심은 내무·국방부장관에 대한 무소속 의원의 입각을 간접적으로 타진하는 데 있었다. 김도연 의원 진영에서는 논의를 거듭한 끝에 확답을 회피했으나 장면 의원측에서는 무소속측 요구에 대해 가능성을 회신에 담았다. 25명의 무소속 의원들은 총리 지명 전날 밤 장면 의원 지지로 태도를 굳혔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세 표차로 김도연 의원의 총리 지명이 부결됐지만 전날 밤에 있었던 무소속 의원들의 행동을 감안할 때 대통령의 판단이 크게 어긋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내무·국방장관의 무소속 할애 문제는 며칠도 못 가 정치문제로 대두됐을 뿐 아니라 장면 내각과 무소속의 관계를 냉각시킴으로써 장면 내각을 약체 내각으로 전락시킨 결정적 요인이 됐다.

 


 

 

약체로 전락한 장면 내각

   내가 청와대 대변인이 된 것은 장면 정부 출범 직후였다. 헌법은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을 상징적 존재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도연씨가 총리 지명에서 패하자 민주당 구파의 유진산 의원은 윤대통령을 구파의 실질적인 리더로 추대하고 최초의 조각 때부터 윤대통령을 정치일선에 개입하게 만들었다.

내 직책은 대변인이었지만 신문사에서 오랫동안 정당과 국회에 출입했던 경험이 있어 국회와 정당, 그리고 내각을 상대로 대통령을 보좌하는 정무관계 일까지 도맡게 됐다. 대통령은 처음부터 거국내각주의자였다. 4·19 후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도리 없이 거국내각을 택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김도연 의원이 총리 인준 직전에 “총리로 당선되면 거국내각을 실천하겠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한 것도 대통령의 의중을 미리 파악했기 때문이다.

8월21일 뜻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대통령은 돌연 유진산 의원을 청와대로 호출했다. 장면 총리와 곽상훈 민의원의장도 온다는 것이다. 조각 직전의 일이었던 만큼 청와대는 아연 긴장했다. 역사에 남을 4자 회담이 열리게 된 것이다. 언론의 관심도 대단했다. 4자 회담이 끝난 후 청와대는 다음과 같이 회담 결과를 발표했다. “앞으로 구성될 제1차 장면 내각은 거국내각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며 내각의 구성 비율은 민주당 신·구파 각각 5명, 무소속 2명으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인준 투표 전날 무소속 의원들의 요구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던 장총리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소속 입각을 합의한 것으로 생각됐다. 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온 국민이 그날의 청와대 발표를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영문일까? 다음날인 22일 장면 총리는 전날의 4자 회담 합의사항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신파 일색의 단독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구파 소속이었던 정헌주 의원이 총리 인준 투표에서 신파측에 가담한 공로가 인정됐던지 그를 입각시킨 것이 이색이라고 할까? 정국은 발칵 뒤집혔다. 청와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장총리가 약속을 파기한 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점잖기로 유명한 대통령 입에서 “허, 그 사람(장총리)이 우릴 배신했어” “속이 좁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이야” 하고 듣기조차 거북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총리 지명에서 패배한 민주당 구파측에서 ‘구파 민주당’이라는 별도의 교섭단체를 구성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민주당 신파의 반발 때문에 장총리는 만부득이 4자 회담의 약속을 깨버렸다는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과 국무총리, 그리고 국회의장과 야당의 실력자가 합의하고 국민에게 공개까지 한 내용을 하루 만에 그것도 일방적으로 파기한 장면 내각 앞에는 적지 않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대통령과 장총리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불신의 장벽이 쌓여갔다. 그런데 문제의 4자 회담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곽상훈 민의원 의장이었으니 민의원 의장이 대통령을 또 정치판에 끌어들인 꼴이 됐다.

 


 

 

장면의 약속 파기

   장총리가 1차 내각 명단을 발표하자 민주당 구파는 4자 회담의 합의사항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장총리에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더욱이 두 명의 입각을 약속받고 기대했던 무소속의 반발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소속 의원들은 장면 총리를 공공연하게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장면 총리 앞에는 의외의 복병까지 나타났다. 그것은 집권 민주당 신파 내에 이철승(李哲承) 의원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있던 소장파의 반발이었다. 장총리가 자신들의 건의를 무시하고 오이명씨를 중심으로 한 노장파의 건의에 따라 조각한 데 대해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장총리는 민주당 구파, 무소속, 그리고 신파 내의 소장파 등 전방위에서 공격을 받게 됐다.

조각을 발표하고 이틀째 되던 날 장면 총리는 청와대로 대통령을 찾아왔다. 조각 이틀 만에 대통령에게 구원을 요청해 온 것이다. 장면 내각은 출발부터 불안과 불행을 예고한 듯했다. 이유야 어찌됐건 4자회담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던 장총리의 방문에 대통령은 그의 행동을 강하게 질책했다. 대통령도 뾰족한 수습책이 없었다.

대통령은 4자 회담에서 약속한 대로 신·구파 각각 5명, 그리고 2명의 무소속 의원을 입각시키는 개각을 단행하도록 총리에게 권유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조각 이틀 만에 개각을 권유했던 대통령의 ‘훈수’가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니었느냐는 비난을 살는지 모르지만 내각책임제하에서 원내 다수를 기반으로 삼지 못하는 정권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민주당 구파와 무소속 의원이 합치면 과반수가 훨씬 넘었다.

그런데 나는 장내각의 불행과 불안이 예견됐을 뿐 아니라 대통령이 헌법에 규정된 상징적 위치에서 크게 이탈하고 있음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대통령을 정치에 개입시킨 최초의 인물은 민주당 구파의 실력자인 유진산 의원과 4자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던 곽상훈 민의원 의장이었다. 그런데 장면 총리까지 자진해서 청와대를 찾아와 개각을 협의함으로써 대통령은 꼼짝못하고 정치 개입에 대한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후 대통령은 4자 회담 결과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단독내각을 출범시킨 장총리를 크게 나무라고 약속한 대로 5·5·2 합의사항을 실현하도록 재차 권고했다. 대통령은 유진산 의원을 장면 총리에게 보내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민주당 구파 내의 김도연씨가 반발하고 나섰다. 김도연씨는 장면 총리의 약속 파기는 정치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장면 내각을 상대로 거국내각을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은 김의원을 청와대로 초청해 거국내각이 안 된다면 연립내각 형식을 빌려서라도 장면 내각을 도울 것을 권고했다.

 


 

 

정치군인들의 위세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국방에 권중돈, 부흥에 김우평, 보사에 나용균, 교통에 박해정, 체신에 조한백 등 5개부에 구파가 참가하기로 합의했다. 결국 장면 초대 내각은 발족한 지 20일 만에 개각을 단행했다. 큰 홍역을 치른 장내각에 대해 국민의 실망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대통령의 끈질긴 만류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구파는 1960년 10월13일자로 신당 발족을 선언하고 5·16 쿠데타가 발생하기 3개월 전인 1961년 2월20일 신민당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야당으로 새 출발을 했다. 집권당인 민주당은 완전히 두 동강이 났다. 여당에 민주당, 야당에 신민당으로 정계가 개편됨으로써 신·구파는 결별을 고한 것이다.

장면 내각은 자유당 정권하에서 오래도록 부정과 부패에 찌든 군과 관료 조직은 방치한 채 장관을 임명했다가 바꿨다 하는 일로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놀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내가 군통수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국방부를 찾았을 때 권중돈 국방부장관은 자기 소관에 국이 몇 개나 되는지, 법률 문제는 어디서 관장하는지도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행정 경험이 전혀 없는 장관들로서는 당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4·19혁명의 뒤처리를 맡기기에는 불안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장면 정부가 단독내각이니 연합내각이니 하면서 허둥대는 사이에 군 내부에서는 쇼킹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4·19 혁명 직후 군 내부에서는 3·15 부정선거의 책임론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혼란이 벌어졌다. 1960년 박정희 소장의 항의를 받은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그 후 김현욱, 길재호 등 8기생 영관급 장교들이 ‘정군연판장’을 돌리는 사태가 이어졌다. 그러한 행동에 대해 ‘국가반란 음모’라는 비난이 일며 군이 어수선해지자 결국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연판장을 돌린 일부 정치군인도 사직당국의 신세를 지는 불상사를 겪었다. 그런데 정치군인들은 엉뚱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장내각이 출범하자 순화동으로 장총리를 찾아갔다. 그들은 ‘국방장관을 임명하는 데 대한 고려사항’ ‘육군참모 총장을 임명하는 데 대한 고려사항’이라는 우리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의견을 개진했다고 한다.

아무리 군대가 민주화하고 학생들에 의해 혁명의 폭풍을 겪은 직후라 하더라도 ‘상명하복’을 철칙으로 삼는 군에서 장교들이 상사의 임명 조건을 왈가왈부했다는 것은 당시 세상이 얼마나 어지러웠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최영희 연합참모본부장의 사퇴를 요구했던 16명의 정치군인들은 현석호 국방부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하고 ‘정군계획 방침’을 건의하려 했다. 독재와 부정축재, 그리고 부정선거로 이어진 자유당 정권의 유산이 젊은 정치장교들로 하여금 5·16 쿠데타라는 상상할 수 없는 ‘씨앗’을 뿌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현장관은 그들의 면담 요청을 거부하고 그들에 대한 처리 문제를 논의하다가 개각 파동으로 20일 만에 물러났다.

 


 

 

소모적인 감정 대립

   솔직히 말해서 당시 청와대는 소용돌이치는 군 내부의 갈등에 대해 정식으로 보고받지도 못했으며, 그렇다고 해서 별도의 계통을 통해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장내각 출발 이후 20일 만에 단행된 개각을 통해 구파 소속의 권중돈 의원이 국방부장관으로 입각하자 사태는 달라졌다. 권장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청와대를 방문해 군 내부의 혼란상을 대통령에 보고했다. 권국방부장관으로부터 군 내부 상황에 대해 보고받은 윤대통령은 군통수권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대통령은 군대의 하극상 사건이 신문지면을 장식하자 하루는 나에게 권중돈 국방부장관을 만나서 국군통수권에 대한 그의 견해와 향후 대책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나는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군의 핵심인 영관급 장교들이 군의 실질적 최고지휘관인 연합참모본부장 물러가라, 육군참모총장 물러가라고 공공연하게 외치고 다니고, 심지어 자기들을 지휘할 국방부장관의 자격조건을 제시하는 판국에 군의 통수권자가 대통령인지 국무총리인지를 국방부장관에게 물어보라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국군통수권을 규정한 헌법 제61조를 다시 살펴보자. 헌법 61조는 ①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군을 통수한다 ②국군의 조직과 편성은 법률로 정한다고 돼 있다. 분명히 헌법은 국군통수권이 대통령에게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통수권을 행사하는 절차에 대해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라고 꼬리를 달아놓았다. 헌법 어느 구석을 찾아보아도 ‘국무총리에게 통수권이 있다’는 조문은 없다. 문제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라는 꼬리였다.

총리측 주장은 “아직 법률이 정해진 바가 없으니 통수권이 대통령에 있다고 볼 수 없으며 따라서 통수권 행사는 총리가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군통수권을 허공에 뜨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청와대가 참다못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나는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현 병무청 자리에 있던 국방부로 권중돈 장관을 만나러 갔다. 권장관은 성격이 온후하고 과묵하면서도 뚝심이 강한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으로서 유진산계의 중진의원이었다. 그에게 대통령의 뜻을 전하고 통수권을 규정한 헌법 제61조에 대한 장관의 견해를 물었다. 권장관은 확실히 답변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권위 있는 헌법학자를 초청해 61조를 정확히 해석한 후 장총리와 담판을 벌이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의 의사를 전달받은 권장관은 국무총리와 마찰을 피하기 위해 극비리에 장관실에 6명의 헌법학자를 초청, 그들이 개진한 헌법 61조에 대한 해석을 녹음 테이프 4개에 수록했다. 권장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나는 재차 국방부를 방문해서 문제의 녹음테이프를 청와대로 가져왔다. 대통령은 자정이 넘도록 녹음기를 틀어놓고 헌법학자들의 견해를 청취했다. 비서실장과 내가 배석했다.

 


 

 

총리 독재 막으려 군은 대통령에게

   결론적으로 6명의 헌법학자들은 다같이 국군통수권이 대통령에 귀속되는 것은 당연하며 절차법을 의도적으로 제정하지 않은 채 국무총리가 통수권을 행사하는 것은 명백한 위헌행위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 장면 총리는 절차법이 정해지지 않은 이상 군통수권은 자신에게 있다고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다. 뒷날 알려진 일이지만, 권중돈 국방부장관은 장총리에게 통수권에 대한 헌법학자들의 견해를 보고하고 절차법 제정을 서두를 것을 건의했는데, 그 일로 총리와 사이가 벌어져 장관 취임 4개월 만에 사임하는 단명 장관 신세가 됐다.

국군통수권이 대통령에게 있느냐, 국무총리에게 있느냐를 두고 청와대와 총리실은 정면 대립은 피하면서도 내부적으로 심한 갈등을 빚었다. 현석호 국방부장관 시절인 1960년 9월10일 ‘충무장’에 모였던 정치군인들은 ‘정군계획’이 관철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장면 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하고 행동요강까지 작성한 바 있다.

그런데도 장면 정권의 최고지도자인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누가 국군통수권을 갖느냐는 문제를 두고 5·16 쿠데타가 발발할 때까지 감정 대립만 계속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통수권을 놓고 빚어진 최고지도자들의 갈등은 법치국가로서는 이를 데 없이 창피한 일이었다. 아울러 쿠데타를 추진하던 정치군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그러면 왜 우리나라는 헌법 61조에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드문 통수권 조항을 규정한 것일까? 나는 문제의 헌법 61조가 1960년 6월15일 제4대 국회에서 내각제 헌법 채택과 동시에 개정된 경위를 잘 알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 국회 출입 기자로서 ‘헌법개정위원회’가 통수권 문제를 다루는 과정을 취재해 보도한 바 있기 때문이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나라에서 행정 수반은 전적으로 국무총리로서 모든 권한이 국무총리에 귀속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당시 우리 헌법이 행정권 범주에 속하는 국군통수권을 따로 떼어 ‘대통령에게 있다’고 규정한 것은 세계적으로 그 예가 드문 일이었다.

4·19 직후 4대 국회는 자유당이 지배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4·19혁명의 대상자였던 만큼 다수 의석과는 관계없이 ‘허물어진 고가(古家)’와 같이 무기력한 집단으로 전락했고 국회는 소수파인 민주당이 주도했다. 자유당 내 온건파인 이재학, 박세경 의원 등은 4·19 전부터 야당인 민주당의 유진산 계열과 암암리에 내각책임제를 협의하고 있었다. 4·19혁명이 발발하자 그들의 움직임은 즉각 표면화했고, 소수파인 민주당의 주도로 내각책임제 개헌이 급류를 탔던 것이다.

민주당 신파 소속인 엄상섭 의원(개헌을 주도하는 과정에 별세)이 위원장을 맡아 국회 내에 ‘헌법개정위원회’가 설치돼 자유당과 민주당이 동수로 개헌안을 심의했다. 초안에는 통수권 조항이 국무총리에 귀속되는 것으로 돼 있었으나 자유당측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은 이승만 정권의 경험으로 미뤄 총리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될 경우 독재의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이야기였다. 그뿐 아니라 내각책임제에서는 정부가 자주 바뀔 것이 예상되는 만큼 군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임기가 보장되고 정치적으로 중립인 대통령에게 통수권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권력을 분산시켜 독재를 막고 요지부동한 국방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자유당측 주장은 내각책임제의 본질을 떠나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민주당 신·구파 어느 쪽이든 집권을 한다 하더라도 대통령과 총리직을 독점할 자신이 없었던 만큼 권력 분산은 그들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졌다.

따라서 초안을 변경해 국군통수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방향으로 자유당과 민주당이 완전 합의해 성안됐던 것이다.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통수권을 행사한다는 조문은 지엽적인 절차 문제를 규정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신동아 2001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