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40년 만에 털어놓은 군사쿠데타의
숨겨진 진상<4> 청와대 입성 군인들의 일성 “돗자리 깔고 위스키 가져와!” |
윤보선은 끝내 쿠데타군에 굴복, 정치활동정화법을 인준한 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앞세워 청와대에 몰려든 '혁명주체'들과 그 경호원들. 누군가 청와대 비서들을 향해 외쳤다.
"이봐, 위스키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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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하 | ||
정치활동정화법은 이 나라 정치인뿐 아니라 구정권에 관여한
공직자를 합해 4369명을 일단 법으로 묶어 놓고 ‘최고회의 정치정화위원회’가 한 사람씩 심의해 정치를 할 수 있는 사람과 정치는 물론 선거 때
입후보도 할 수 없는 사람을 가려낸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 나라 역사상 인권을 말살하는 전무후무한 악법이었다. 청와대는 이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의 용납할 수 없는 폭거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은 그들로부터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것조차 혐오하는 듯했다. 대통령은 하야를 굳게 결심했다. 그런데 최고회의는 ‘정정법’을 의결 공포한 후 박일경 법제처 차장을 청와대로 보내 대통령에게 정정법 인준을 요구했다. 박차장은 법의 개요를 설명한 다음 “정정법이 시행되더라도 대통령께서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고 말했다. ‘본법 시행 당시의 대통령은 본법의 적용을 받지 아니한다’는 정정법 부칙 조항을 지적하는 말인 듯했다. 박차장은 자타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공법학자다. 그의 입에서 “대통령은 해당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떨어지자 대통령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평생을 정치활동으로 보낸 대통령만 유일하게 정정법에서 제외한다면, 4000여 명의 정정법 해당자들은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것은 분명 대통령과 국민을 이간하려는 고도의 술책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나는 당시 대통령은 정정법을 인준하는 서류에 형식일지라도 절대 사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건의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대통령은 박차장에게 자신이 정정법 제정에 반대해온 사실을 일러주고 “만일 대통령이 인준 결재를 안 했을 때 법의 효력은 어떻게 되는가”고 하문했다. 박차장은 최고회의에 관한 법률에 따라 최고회의가 결의하고 공포하면 그 순간부터 법의 효력이 발생하며 대통령의 인준절차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박차장은 대통령의 인준행위는 헌법에 규정돼 있기 때문에 ‘인준의 거부행위’는 헌법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대통령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진퇴유곡에 빠졌다. 대통령은 그날 정정법 서류에 결재하지 않고 박차장을 돌려보냈다. 박차장이 청와대를 떠난 이후 청와대 전화에는 불이 붙었다. “대통령은 결재를 했는가?” “대통령은 이 판국에 무엇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오늘 즉각 그만두고 청와대를 떠나라.”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들이 줄줄이 청와대에 찾아왔다. “혁명군인들이 그 정체를 드러낸 마당에 대통령은 하루빨리 하야하라”고 건의했다. 대통령은 이미 하야를 결심한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1962년 3월21일 오전 대통령은 박정희 의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하야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박의장은 혼자 청와대로 왔다.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되는 날이다. 박의장은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깍듯이 거수경례를 하고 대통령의 말을 기다렸다. 대통령은 “더 이상 대통령자리에 머물러 있기가 싫어,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박의장은 “지금 그만두실 때가 아니다. 내년 여름 민정 이양 때까지 유임하시기를 바란다”고 의례적인 하야 만류의사를 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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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장, 앉으세요” | ||
인사말이 끝난 후 두 사람은 정정법을 사이에 놓고 마지막 담판을 벌였다. 대통령은 “정정법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정치에
참여했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제재를 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정정법이
결과적으로 국민총화를 해치고 국가 이익에도 배치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하야하려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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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박정희에게 굴복한 윤보선 | ||
마침내 대통령은 비서실장과 윤교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기자회견 전에 문제의 ‘정정법’을 인준하는 서류에 사인했다. 그뿐 아니라 윤교수의
건의에 따라 최고회의 앞으로 ‘대통령 사임서’까지 제출했다. 대통령은 하야를 결행하면서 어떤 장애물도 제거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직 가시방석과도
같은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은 일념뿐이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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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시중 드는 청와대 비서관 | ||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자 초상집 같은 공허감과 적막이 청와대에 흘렀다. 나는 책상을 정리하고 사표를 썼다. 한시도 이 근처에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난 지 세 시간이 지났을까. 바깥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느닷없이 지프 행렬이 청와대 정문으로
밀어닥쳤다. 나는 비서실장과 몇몇 비서와 함께 나란히 현관에 서서 그들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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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타이피스트의 피아노 | ||
박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결정되자 청와대 비서들은 모두 사표를 냈다. 그러나 추상 같은 최고회의의 지시가 떨어졌다. “비서실 직원
전원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정시 출퇴근해야 하며 만일 이를 어겼을 때에는 공무원법에 따라 엄벌할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윤대통령의 대변인이었던
만큼 박의장의 대변인 노릇은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신문사들은 청와대 사정을 알고 싶어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가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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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야식비 배상하라” | ||
하야는 했으나 윤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계속됐다. 장기간에 걸친 비서실 조사가 무위에 그치자 직접 대통령을 걸고 넘어갔다. 5·16
이후 청와대는 100여 명의 경찰이 경비했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그들의 일부는 이승만 정권 당시 악명 높은 ‘경무대 경찰서’에 근무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근무태도는 성실하고 충실했다. 경비 경찰에게는 1일3식 기준의 식비가 지급됐지만 야간근무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그들에게는 ‘야식’ 지급이 불가피했다. 윤대통령은 이러한 사정을 보고받고 야식을 관급으로 지급할 것을 지시한 일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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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장교들의 쿠데타 계획 | ||
40년이 지난 2001년에 “박정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야당 당수에게 질문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만일 그 사람이 내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분명히 대답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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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 지령문 입수 | ||
나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서 3·15 선거를 겪었다. 투표를 며칠 앞두고 중요한 정보가 입수됐다. 민주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출마한
장면 후보(당시 이승만 정권 밑에서 부통령직에 있었다)가 내무부가 비밀리에 지시한 ‘부정선거 지령문’을 입수해 보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밤늦게 부통령 공관 근처에 살고 있던 조재천 의원(당시 민주당 대변인)댁을 불시에 찾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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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대립 | ||
나는 민주당의 탄생 과정을 신문기자의 처지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장면 정권의 산모격인 7·29선거에서는 입후보자로서 직접 참가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에 비교적 소상하게 그 내막을 알고 있었다. 장면 정권을 탄생시킨 민주당은 1954년 11월 이승만 정권의 3선 금지 개헌
파동, 일명 ‘4사 5입’ 개헌파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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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장벽은 높아지고 | ||
4·19혁명 후 내각책임제 개헌을 관철시킨 민주당의 당내 투쟁은 1960년 7·29총선에서 절정에 이른다. 한 사람이라도 더
공천후보를 확보하기 위해 무자비한 포섭 공세와 금전 공세를 서슴지 않았다. 내 경우만 보더라도 대표최고위원 장면씨 명의로 공천장을 받았지만,
장면씨는 신파의 내부 공천을 받은 한아무개씨에게 막대한 선거자금을 공공연하게 우송했다. 그뿐 아니라 엄연히 당 공천자가 입후보한 지역이라
하더라도 무소속 후보가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공천후보를 제치고 무소속 후보를 경쟁적으로 후원하기까지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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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에 대한 장면의 배신감 | ||
당시 내각책임제하의 헌법 제69조는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해 민의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단, 대통령이 민의원에서 동의를 얻지
못한 날로부터 5일 이내에 다시 지명하지 아니하거나 2차에 걸쳐 민의원이 대통령의 지명에 동의를 하지 아니한 때에는 국무총리는 민의원에서 선거로
뽑는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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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의 판단 착오 | ||
앞으로 기술하겠지만 1963년 10월15일 실시된 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와 박정희 후보가 ‘민정이냐? 군정의 연장이냐?’를
놓고 숙명의 대결을 벌였을 때, 실각한 장면 총리와 그를 추종하던 민주당 신파는 분명히 윤보선 후보에게 등을 돌렸고 윤후보는 15만표 차이로
대선에서 패배했다. 군정을 종식하려는 국민의 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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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체로 전락한 장면 내각 | ||
내가 청와대 대변인이 된 것은 장면 정부 출범 직후였다. 헌법은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을 상징적 존재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도연씨가 총리 지명에서 패하자 민주당 구파의 유진산 의원은 윤대통령을 구파의 실질적인 리더로 추대하고 최초의 조각 때부터 윤대통령을 정치일선에
개입하게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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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의 약속 파기 | ||
장총리가 1차 내각 명단을 발표하자 민주당 구파는 4자 회담의 합의사항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장총리에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더욱이 두
명의 입각을 약속받고 기대했던 무소속의 반발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소속 의원들은 장면 총리를 공공연하게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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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인들의 위세 | ||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국방에 권중돈, 부흥에 김우평, 보사에 나용균, 교통에 박해정, 체신에 조한백 등 5개부에 구파가 참가하기로
합의했다. 결국 장면 초대 내각은 발족한 지 20일 만에 개각을 단행했다. 큰 홍역을 치른 장내각에 대해 국민의 실망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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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적인 감정 대립 | ||
솔직히 말해서 당시 청와대는 소용돌이치는 군 내부의 갈등에 대해 정식으로 보고받지도 못했으며, 그렇다고 해서 별도의 계통을 통해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장내각 출발 이후 20일 만에 단행된 개각을 통해 구파 소속의 권중돈 의원이 국방부장관으로 입각하자
사태는 달라졌다. 권장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청와대를 방문해 군 내부의 혼란상을 대통령에 보고했다. 권국방부장관으로부터 군 내부 상황에 대해
보고받은 윤대통령은 군통수권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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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독재 막으려 군은 대통령에게 | ||
결론적으로 6명의 헌법학자들은 다같이 국군통수권이 대통령에 귀속되는 것은 당연하며 절차법을 의도적으로 제정하지 않은 채 국무총리가
통수권을 행사하는 것은 명백한 위헌행위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 장면 총리는 절차법이 정해지지 않은 이상 군통수권은 자신에게 있다고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다. 뒷날 알려진 일이지만, 권중돈 국방부장관은 장총리에게 통수권에 대한 헌법학자들의 견해를 보고하고 절차법 제정을 서두를 것을
건의했는데, 그 일로 총리와 사이가 벌어져 장관 취임 4개월 만에 사임하는 단명 장관 신세가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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