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당시 청와대대변인이 40년만에 털어놓은 군사쿠데타의 숨겨진 진실<1> ] | ||
운명의 첫 대면! 윤보선, 박정희의 요구를 거부하다 |
글을 쓰면서 한국 현대사에 큰 획을 그었던 5·16 쿠데타가 올해로 40년째를 맞았다. 신문들은 기념일을 맞아 완전히 상반된 뉴스를 지면에 실었다. 동아일보를 예로 들면, 5·16 정신을 되새기는 ‘5·16 민족상’ 시상식에서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명예총재는 “5·16은 누가 뭐래도 나라답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일어난 국민 정신의 일대봉기였다”고 찬양한 사실을 실었다. 그러면서 동아일보는 바로 옆 지면에 “박정희 기념관 반대국민연대가 상암동에서 개최한 박정희기념관 반대집회에서 이관복(李寬福) 공동대표가 ‘동족을 학대하고 헌정 질서를 파괴한 범법자를 위해 기념관을 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역설했다”는 내용 등을 동시에 보도했다. 그날 밤 텔레비전 화면은 5·16 민족상 시상식 광경을 전한 다음 박정희 소장의 동상이 밧줄에 묶여 두 동강이 난 채 땅에 굴러 떨어지는 장면을 생생하게 방영했다. 40년 전에 발생한 일인 만큼 지금쯤은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질 법도 하련만 매년 그날이 오면 ‘5·16 흑백논쟁’이 되풀이되는 까닭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5·16과 관련된 많은 진실이 가려진 채로 오랫동안 권력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기록’과 ‘평가’가 진행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나는 행인지 불행인지 1960년 장면 정권에서부터 5·16 쿠데타 발발, 그리고 그후 10개월 동안 계속된 군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19개월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던 윤보선(尹潽善) 씨를 도와 ‘청와대 대변인’ 직에 있으면서 정권의 몰락과 쿠데타 현장을 직접 보고 경험했다. 5·16에서 윤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내가 겪은 진실을 가감없이 세상에 밝히기로 한 것은 앞으로 올바른 역사를 기록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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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準河 < 5 ·16당시 청와대 대변인 > | ||
1960년 5월16일 새벽 4시경. 총성
때문에 잠을 깼다. 총성은 차츰 요란해졌다. 우리집은 적선동 서쪽편, 그러니까 현재의 정부종합청사에서 200m 거리에 있었다. 처음으로 총성을
들었을 때 나는 이른 새벽에 강도사건이 발생해 추격하던 경찰관이 발포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총성은 멎지 않고 그 빈도는 더해가지 않는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횃불데모’다 ‘남북교류’다 ‘파업’이다 시끄러운 상태에서 청와대가 비상사태 선포문제까지 검토하던 무렵이었던 만큼 혹시나 불순세력들이 난동을 부리지 않았을까? 그래서 경찰과 그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 아닐까? 잠이 미처 깨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나라 국군이 서로 충돌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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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에 포위된 새벽의 청와대 | ||
총성은 더욱 격해지고 가까워왔다. 점점 불안한 생각이 들어 경비전화를 들었다. 당시 몇몇
비서관에게는 경비전화가 연결돼 있었는데 그 전화는 비서실과 경호실에 직통으로 연결돼 있었다. 경비원이 비서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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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통령은 피하지 않았나 | ||
청와대 정문이 헌병대에 포위된 것을 얼마 전에 체험했던 터라 피신이라는 말 자체가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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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권총을 뽑지 않은 장도영과 박정희 | ||
오전 9시. 장도영 장군과 박정희 장군이 권총을 찬 점퍼 차림의 군복으로 지프에서 내려 청와대
현관에 들어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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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정신으로 목숨을 걸고 거사했다 | ||
대통령은 군인들과 면담하기 위해 소회의실에 들어갈 때 몇 가지 마음의 정리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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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료들 처단하겠다” | ||
옆에서 대통령과 박 소장의 대화를 지켜보던 나는 아슬아슬한 위기감마저 느꼈다. 한쪽은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감행한 장군으로 수천 명의 쿠데타군을 거느리면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다다른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비서관 몇 명을 거느린 힘없는 노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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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인정 못한다” | ||
그러나 책을 좀더 읽어보니 30년 동안 악정에 억눌려왔던 서인이 인조를 왕으로 옹립, 권력을
장악한 뒤 철저하게 보복을 자행했던 기록이 그려져 있지 않은가. 4·19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지 9개월에 불과했던 장면 정권이 무능하다는
평을 들었을 망정 ‘폐모살제’와 같은 폭정이나 독재를 했다고 믿는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있을 것 같지 않다. ‘인조반정’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운 군인들의 처사는 처음부터 오류를 범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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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왔다”는 말 왜 나왔나 | ||
한마디로 말해 대통령은 약체 내각을 개편해서 강력한 거국내각을 만들고 ‘긴급조치권’을 발동해
나라의 혼돈 상태를 힘으로 수습하자고 했다. 그러나 총리측에서는 내각의 개조 요구를 일종의 도각운동(倒閣運動)으로 오해했고, 심지어 청와대를
음모지로 비유할 만큼 견해의 대립이 심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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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미군이 반란군을 진압해달라” | ||
먼저 입을 연 것은 매그루더 장군이었다. “지금 서울 시내에 들어온 반란군의 병력은 약
3600명이다. 야전사령부인 1군은 요지부동이고 대구 지방에 있는 국군 가운데서 약간의 병력이 반란에 참여하고 있으나 현재 속속 원대복귀 중에
있다.” 그리고 “제1군 산하 병력 가운데서 반란군 병력의 10배인 4만 명을 동원하면 혁명군은 항복할 것이고 진압할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결국 대통령에게 1군의 동원령을 내려달라는 취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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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동원령 내려라” | ||
매그루더 장군은 분명히 “현재 통수권을 행사할 장면 총리는 행방을 감추고…” 운운하면서
통수권이 총리에게 있음을 분명히 한 이상 총리 유고시 총리직을 대행할 수 있는 ‘합법적인 통수권자’에게 통수권의 발동을 요청하면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내각책임제를 규정한 당시 헌법 제 70조는 “국무총리가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순위에 따라
국무위원이 그 권한을 대행한다”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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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흘려선 안된다” | ||
심지어 대통령은 “매카나기 대사의 행동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지키기 위해서 한 짓이냐? 그렇지
않으면 미국의 헌법을 지키기 위해서 한 짓이냐?”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이와 같은 반문을 하게 된 것은 그린 대리대사가 몇 번이고
“대통령은 호헌을 해야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결론이 쉽게 나지 않자 매그루더 장군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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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에게 농락 당한 대통령의 충정 | ||
청와대는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듣고 비로소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혁명위원회의장으로 변신한 것을
알게 됐다. 장면 정권 각료 가운데 단 한사람도 군대의 반란을 알려오거나 대통령의 안위(安危)를 물어온 사람이 없었다. 새벽에 방송으로 발표된
‘혁명공약’도 박정희 소장이 청와대를 다녀간 뒤에야 청와대는 알 수 있을 정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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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박당한 국방장관 | ||
장도영 장군이 발표한 혁명공약에 대해 대통령은 크게 신뢰하는 것 같지 않았다. 군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이나 청와대는 당시 혁명위원회 멤버 가운데서 장도영 장군 이외에는 전혀 아는 사람이
없었던 만큼 장 장군의 급격한 변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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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방위 해야 할 군인들이…” | ||
박정희 소장의 계엄령 선포 인준 요청과 매그루더 장군의 한국군 동원 요청까지 거부했던 대통령은
16일 오후 최두선(崔斗善) 동아일보 사장,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 사장, 홍종인(洪鍾仁) 조선일보 주필 등 언론계 대표와 백낙준(白樂濬)
참의원의장 등 4명의 민간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긴급 초청했다. 대통령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고립무원인 대통령은 5·16 아침에 겪었던 일,
대화 내용 그리고 자신의 심경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에 대해 네 사람의 솔직한 의견을 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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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의 직업의식 | ||
그런데 이날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이 보였던 직업의식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기자라는
별명을 가졌던 장 사장은 청와대에 일찍 들어서기가 무섭게 경비하던 경찰관을 붙들고 “박 소장이 무슨 옷을 입었던가? 장도영 장군과 같은 차를
타고 왔던가? 경호원은 몇 명이나 대동했던가?” 등의 질문을 퍼붓는가 하면, 비서를 만나서는 “장·박 두 장군이 무슨 말을 했던가? 대통령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했던가?” 메모지를 들고 다니면서 기자 못지 않게 취재를 하고 다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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