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高建 서울특별시장 | ||
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40년만에 털어놓은 군사쿠데타의 숨겨진 진상<2> 이한림의 울분 “박정희가 말뼈다귀냐 개뼈다귀냐” |
5·16 직후 장면 정부의 각료들은 모두
숨어버렸다. 군 통수권이 없는 윤보선 대통령은 장도영 혁명위원회 의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야전군 지휘관들에게 친서를 보냈다. 친서를 받아본 일부
군지휘관은 쿠데타 지지의사를 밝혔으나 일부 지휘관은 진압의지를 내비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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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하 | ||
40년 전의 청와대는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의 청와대 건물은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헐렸지만 서울시청 본관 건물 3분의 1 크기의 개인 집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1급 별정직인 비서실장 밑에 두 명의 이사관과 두 명의 서기관이 각각 총무 공보 정무 등을 맡아 일을 했다. 가구나 책상 등 모든 비품은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하던 그대로였다. 악명 높았던 경무대 경찰서는 장면 내각 수립 이후 즉각 해체되고 시경 산하 100여 명의 경찰관이 청와대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청와대 경비 문제로 청와대와 총리실 사이에 분쟁이 일기도 했다. 대통령 취임 후 어느날 돌연 시경국장 명의의 공문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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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경비원 전원 교체 공문 | ||
청와대 경비원 전원을 교체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통령은 물론 비서실에 일언반구 사전 연락도
없었다. 섭섭하게 생각한 대통령은 장면 총리를 만나 경비원 전원을 원상 복귀토록 조처할 것을 내게 지시했다. 장총리는 나에게 시경국장을
만나보라고 했다. 시경국장은 “경무대 경호원들은 모두 4·19 때 발포한 경찰관들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불평을 늘어놓고 나서 하루 만에
‘전원교체’를 ‘전원복귀’로 바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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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비서 출신의 구조 요청 | ||
윤대통령과 나의 인연은 3대 국회에서 시작됐다. 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처음으로 국회에
등장한 국회의원 윤보선씨는 특출하게 눈에 띄는 정치가는 아니었다.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나는 조용하고 신사적이며 단정한 윤대통령을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신익희(申翼熙) 조병옥(趙炳玉) 장택상(張澤相) 이기붕(李起鵬) 의원 등이 리드하던 당시의 국회는 초선의원인 윤대통령을
부각할 만큼 한가롭지 않았다. 4대 국회에 들어서서 윤대통령이 민주당 최고위원에 당선되고 안국동 자택에서 최고위원회가 자주 개최되었기 때문에
그와 접촉할 기회가 생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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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터에 나타난 경찰 지프 | ||
나는 참으로 난처했다. 당시 이기붕씨의 비서를 돕는 것은 4·19혁명에 역행하는 행동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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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사가 발생하면 안 된다” | ||
5·16으로 바빴던 하루가 지나갔다. 나는 전날 밤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받은 친서의 초안을
마련하기 위해 또 하룻밤을 새웠다. 대통령이 일선 지휘관들에게 친서를 보내기로 마음을 정한 것은 자의가 아니라 장도영 혁명위원회의장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소장이 16일 아침 말한 바와 같이 수도 일원은 쿠데타군이 장악했다고 하지만 ‘미군의 출동설…’ ‘일선의
동요설…’ ‘후방의 동요설…’ 등으로 혁명주체들은 몹시 불안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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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지지도 반대도 아닌 대통령친서 | ||
말썽 많았던 친서 내용은 지극히 평범하고 훈시적이었다. 대통령은 친서에서 “작금 돌발적으로
발생한 사태에 처해서 우리 군의 행동은 국내외적으로 큰 파동을 주었으며 이 사태를 우리가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라고 5·16의 중대성을 강조하고 “더욱이 우리나라가 이 중대한 사태를 수습하는 데 불상사가 발생하거나 조금이라도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경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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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 | ||
청와대를 떠나기 직전 대통령은 서재로 나를 불렀다. “여보. 어제 당신도 박정희란 사람
보았지만 아주 간단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이한림 장군은 그를 잘 알고 있을 테니 이장군을 만나거든 박정희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고 오라고”
하며 신신당부를 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검은 안경을 쓰고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던 5월16일 아침의 박정희 소장에 대해 대통령은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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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말뼈다귀냐 개뼈다귀냐” | ||
대통령이라는 말을 듣고 대령은 약간 기가 죽은 듯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단히 죄송합니다.
사령관님께 안내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앞장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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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이가 약해서…” | ||
숨쉴 사이도 없이 민장군이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돌연 노크도 없이 덜컥 하고 출입문이
열렸다. 철모를 쓰고 권총으로 무장한 ‘원 스타’ 장군이 양해도 구하지 않고 들어왔다. 나는 무례한 ‘원 스타’ 장군을 나무랄 용기조차 없었고
무슨 불상사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만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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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분오열된 야전군 지휘관들 | ||
또 하나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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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 진압 출동명령 내려달라” | ||
5·16 당일 미 8군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이 “일선에서 4만명만 동원하면 서울에 들어온
3600명의 반란군을 소탕할 수 있다”고 대통령 앞에서 공언한 일이 얼마나 공허한 말인지를 일선의 군단장들을 만나면서
실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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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말한 것 취소합니다” | ||
전화기를 들어보니 약 두 시간 전에 헤어진 최석 장군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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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림은 지휘권을 잃었다” | ||
일선 방문을 마치고, 대통령과 박정희 소장 앞에서 결과보고도 끝났다. 17일 밤 8시30분경
나는 대통령과 단독으로 만났다. 박정희 소장 앞에서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대통령에게 추가로 보고했다. 이한림 1군사령관이 박정희 소장을
불신한다는 것, 민기식 군단장이 장면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것, 최석 장군은 민장군과는 정반대로 언제든 명령만 떨어지면 쿠테타 진압에 나설 것
같다는 등등. 보고 들은 대로 보고했다. 그리고 나는 야전군에 대한 나름의 결론도 진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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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 장관의 애원 | ||
언젠가 동아일보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기사를 잘못 쓰는(오식 사건) 바람에 1개월간 정간
처분을 받은 일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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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나타나는 각료들 | ||
대통령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장도영 의장은 “좋습니다. 청와대에서 마음대로 성명서를
작성해주십시오. 한 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방송하겠습니다” 하고 즉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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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국무회의 | ||
각의를 마치고 장총리는 청와대로 대통령을 만나러 왔다.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현관에서 나는 장총리를 직접 영접했는데 총리는 나에게 “여보 나는 좀 쉬어야겠어”라고 했다. 장총리는 대통령에게 “심려와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고 인사를 했고 대통령은 진심으로 그를 위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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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군 통수권 | ||
내가 만난 일선의 고위 장성들은 장면 정권의 실정과 무능에 대해 모두 등을 돌린 것 같았다.
군 조직은 와해되고 무너지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독단적인 판단이었는지 모르나 장총리가 태산같이 믿고 있던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이나 또
그렇게도 의지했던 매그루더 미 8군사령관이 명령을 내리고 싶어도 그 명령을 들을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
신동아 200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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