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40년만에 털어놓은 군사쿠데타의 숨겨진 진상<3> 박정희, 윤보선에게 대장계급장 요구하다 |
비상계엄령 선포 후 하야를 선언했던 윤보선
대통령은 한 외교관의 충언을 받아들여 이를 번복한다. 장도영을 실각시키고 최고회의의장에 오른 박정희는 민정이양 시기를 늦추는 등 점차 정치적
야심을 드러낸다. 분노한 윤보선 앞에 나타난 박정희는 미국 방문을 빌미로 대장 계급장을 달아줄 것을 요구하는데…
|
||
김준하 | ||
총소리를 들은 지 사흘이 지났다. 위험하고
주마등 같은 나날이었다. 장면 총리가 정권을 내놓고 순화동 자택으로 돌아감으로써 혁명위원회의 정권 인수가 완료된
것이다. 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내각수반에 장도영 장군을 임명했다. 새로운 각료 명단도 발표했다. 거의가 현역 군인이다. 내각 수반은, 헌법 어느 구석에서도 그러한 직책을 찾아볼 수 없지만 따지고 보면 국무총리직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내각책임제도 대통령책임제도 아닌 전무후무한 국가의 지도체제가 탄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각책임제 헌법은 공중에 떠버린 것이나 다름없었고 대통령의 위상 문제가 청와대에서 논의될 수밖에 없었다. |
||
대통령에게 비상계엄령 인준 요구 | ||
헌법에 대통령은 민·참 양원 합동회의에서 재적 3분의 2 이상의 투표를 거쳐 선출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을 선출한 근거가 되는 민·참 양원은 모두 해체되고, 대통령이 임명한 장내각은 소멸되지 않았던가. 입법·사법·행정권은
최고회의가 접수(?)해버린 것이 아닌가. |
||
대통령의 하야성명 | ||
하야성명을 내면서 대통령은 몇 가지 점에서 위안을 느꼈다. 그중 하나는 살기 넘치는 쿠데타
와중에도 피를 흘리는 일이 없었다는 것, 둘째는 형식이야 어쨌든지 장내각의 의결을 거쳐 계엄령 선포를 인준해서 최소한의 합법성을 초지일관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 셋째는 초헌법적이라고 하지만 정부 형태가 어느 정도 갖춰지고 18일의 한미 공동성명으로 미국이 한국의 혁명을 조건부로
용인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방위체제를 그런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한 외교관의 충언 | ||
김용식 차관은 윤대통령에게 먼저 “지금 우리나라는 혁명 정부가 들어섰다고 하지만 우리와 국교가
있는 50여 개국 가운데서 어느 나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외교상으로는 무정부 상태가 오늘의 현실이다”고 외교부의 견해를 설명했다.
|
||
하야 번복 | ||
오후 6시 전후해 역사적인 기자회견이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하야 기자회견을 준비하던 나는
‘하야 번의 회견’은 미처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장도영, 박정희 최고회의 정·부의장과 김용식 차관도 회견에 참여했다. 아무래도 쑥스러웠던
대통령은 “이거 하야 기자회견이 하야 번의 기자회견이 됐구먼” 하는 우스갯소리로 굳은 분위기를 풀었다. |
||
“조속히 민간에 정권 이양해야” | ||
그들은 6개항의 질문 요지를 정식으로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그 가운데에는 “9월 유엔 총회를
앞두고 민정이양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를 말씀해 주십시오”가 빠지지 않고 들어 있었다. |
||
청와대 기자회견과 동아일보의 수난 | ||
최고회의는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심흥선 공보부장 명의로 기상천외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지난 6월3일 서울 모 일간지가 대통령 기자회견 석상에서 대통령께서 하신 말의 일부를 고의로 사실과 유리되는 기사로 조작하여
보도했음은 용인할 수 없는 일이며 혁명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
||
“동아일보 기자 구속한 적 있나?” | ||
그리고 나는 나대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이 시승식에 가면 틀림없이 박정희 의장을
만날 것이고 그런 기회를 이용해 동아의 이만섭 기자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대통령은 마지못해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
||
윤대통령 뒷조사 | ||
또 이상한 일은 당시에는 도청장치 같은 것이 전혀 없었는데도 비서관 회의 내용이 어김없이
밖으로 새나가곤 했다. 앞으로 말하겠지만, 8·15를 기해 대통령이 하야할 생각을 하고 그 준비를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는데 주한미국 대사가
어떻게 알았는지 청와대를 방문해 대통령의 하야를 만류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정보정치의 무서운 그림자가 청와대를 둘러싼 듯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
||
민정이양 시기 약속 깬 박정희 | ||
박의장이 민정이양 문제를 대통령과 협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비밀사찰로 위축될 대로 위축된
청와대 분위기가 약간 부드러워지는 듯했다. 그러나 청와대를 다녀간 지 일주일이 되던 8월12일, 박의장은 국내외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내용은 “앞으로 2년 더 군정을 실시하고 1963년 여름에 민정이양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격노했다. 나는
점잖기로 유명한 대통령이 그때처럼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박정희 의장에게 배신감과 모멸감을 느낀 듯했다. 일주일 전 만부득이 해서 1년
반이라고 한 사람이 일언반구의 사전협의 없이 2년을 들고 나오자 대통령을 철저하게 무시한 행동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
||
케네디의 박정희 인정 | ||
군사정권은 언론에는 특히 잔인했다. ‘포고 11호’를 발동해서 ‘사이비 언론’이라는 미명하에
언론기관을 대량 정비하고 나중에는 ‘신문정책 10개 지침’이라는 것을 만들어 수많은 언론인을 현직에서 추방했다. 언론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공포에 떨었고 오직 혁명정부가 발표하는 내용만 보도하고 찬양하는 ‘메신저 보이(전달 소년)’로 전락했다. |
||
“철원 쌀을 사들이면 어떨까” | ||
또 언젠가 가을 추수가 끝날 무렵,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대통령은 나를 찾았다. 철원 지방의
농작 상황을 물어본 후 이런 얘기를 꺼냈다. |
||
1930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필자는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1953년 동아일보에 입사, 정치부 기자로 2·3·4대 국회를 출입했다. 4·19 직후 장면 정권이 들어서자 대통령으로 당선된 윤보선씨를 도와 청와대 대변인으로 장면 정권 9개월, 박정희 군사정권 10개월 등 모두 19개월 동안 청와대에 근무했다. 대통령이 하야한 후 민정당 임시대변인으로 야당 생활을 계속하던 중 1964년 10월15일 5대 대통령 선거에 관여했다. 윤보선 대통령이 은퇴한 후 언론계에 복귀, 일본 동경대 대학원 수학, 동양통신 부장, 고려대 강사, 국회부의장 비서실장을 역임한 후 우풍화학·동부고속·강원일보 사장을 거쳐 대한지적공사 감사를 끝으로 공직 생활을 마치고 현재 대한언론인회 이사로 재임중이다. (신동아 2001년 9월호)
|
'다시 읽고싶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5.16 회고(1) 운명의 첫 대면! 윤보선, 박정희의 요구를 거부하다 (0) | 2015.09.25 |
---|---|
5.16회고(2) 이한림의 울분 “박정희가 말뼈다귀냐 개뼈다귀냐” (0) | 2015.09.25 |
5.16 회고(4) 청와대 입성 군인들의 일성 “돗자리 깔고 위스키 가져와!” (0) | 2015.09.25 |
5.16 회고(5) 장면은 장도영의 이중플레이에 속았다 (0) | 2015.09.25 |
5.16 회고(6) 박정희 좌익시비로 사상논쟁 불붙다 (0) | 2015.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