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注: 이 글은 2002년 3월 서울 大世연구원에서 「公人의 역할과 사명」이라는 主題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趙淳 교수가 발표한 기조 연설문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공직자 및 CEO들이 모인 자리에서 趙교수는
정치·경제·사회·對北(대북)관계·외교 등 거의 모든 부문에 있어 기존의 패러다임이 대부분 낙후되어, 국가 발전에 많은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처럼 낡은 패러다임 속에서 「公人」이 빚어내는 非理 또한 적지 않기 때문에 公人, 특히 지도층의 역할과 사명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절실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趙교수는 지도층이란 公人과는 좀 다른 개념으로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국민의 모범이
됨으로써 장래의 진로에 대한 指針이 될 수 있는, 知性과 德性을 갖춘 사회 各界의 人士들」을 말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어떤 정치체제를 막론하고,
나라의 흥망을 가늠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그 나라의 지도층이라고 했다. 이 연설은 1년 뒤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예언한 것처럼 느껴진다.
趙淳 교수는 요사이 사정을 감안하여 1년 전의 글을 약간 수정·보완했다] 민주주의 나라의 命運도 지도층이 결정 지도층이 중요하기는 옛날 君主(군주)
체제에 있어서나 현대의 독재 체제에 있어서나 민주주의 체제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다. 君主시대나 독재 체제 나라의 흥망이
지도층,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한 사람의 지도자에 달려 있다는 것은 새삼 지적할 나위가 없다. 민주주의 나라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흔히, 민주주의 체제에 있어서는 나라의 主權은 국민에게 있고,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기 때문에
「지도층」이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皮相的인 견해이다. 민주주의 나라에 있어서도 나라가 잘 되자면 지도층의 질이 좋아야
한다. 나라의 命運(명운)이 나라의 리더십에 달려 있다는 것은, 현재 미국 부시 정권의 역할_그것이 좋든 나쁘든_을 생각하면 당장 이해가 간다.
부시 한 사람이 등장함으로써, 미국이 사뭇 달라진 것이다. 민주주의 나라에서 국민 각자가 나라의 主權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물론 옳다. 그러나 主權을 국민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그 主權을 국민이 직접 「行使」할 때, 항상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반 국민들의 지식과 판단력의 수준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일반 국민의 능력과 지식의 平均이
나라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는 국민의 주권행사는 일반 국민의
水準보다 높은 두뇌와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의 지도와 濾過(여과)를 거쳐야 할 것이다. 그 지도와 濾過가 없을 경우, 민주주의는 衆愚(중우)정치를
가지고 오기 쉽다. 代議體制(대의체제·representative system)을 가지고 衆愚정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皮相的인 견해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衆愚가 인간사회의 현실이라면 衆愚의 대표들도 결국 愚人들로, 賢人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이 나라의 主權을 가지고는 있지만, 나라가 잘 되려면, 그 主權의 行使는 나라의 知性과 德性을 대표하는 소수 엘리트의 리더십에 의하여
유도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元祖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것을 알 수 있다. 이 나라가 중심을 잡고 비교적
건전하게 운영되어 온 것도, 국민의 主權 행사가 훌륭한 교육을 받은 건전한 지도층에 의하여 유도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실 영국의 지도층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한 것은, 君主의 專橫(전횡)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 大衆을 信賴(신뢰)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18세기 영국 최대의 知性人 중의 한 사람인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ㆍ1707∼1785) 박사는 『한 사람에 의한
통치의 형태는 조그마한 사회에는 不適切하나, 큰 나라에 있어서는 그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독재를 찬양한 것은 물론
아니고, 大衆이 정치를 주름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서, 이 말에는 暴民(폭민ㆍmob)에 대한 짙은 不信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 나라 영국은 대중 민주주의가 아니고 엘리트가 중심을 잡는 나라이다. 영국은 지금도 일종의 계급
사회이며, 아직도 사회의 지도층과 평민 사이의 현격한 차이가 여러 가지 형태로 많이 남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미국에 있어서도
비슷한 사회상을 볼 수 있다. 건국 당초부터 귀족이 없는 나라였지만, 이른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身分을 가진 인사들이 사회의 확고한 중심을 잡아 왔다. 최근에 와서는 WASP의 영향력도 상당히 준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각 부문에서 엘리트의
구성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고, 엘리트 자체의 중요성이 줄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을 돌이켜 보면 상황은
딴판이다. 이 나라에는 「元老」가 없다는 한탄의 소리를 많이 듣는다. 사회 각 부문에서 나라의 길잡이가 될 만한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가끔 自稱(자칭) 他稱(타칭)으로 元老라는 사람들이 등장하기는 하나, 그들의 이 지위를 인정하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이
나라에는 어른이 없다는 말인데, 따라서 이 나라가 만들어 내는 文化도 基準(기준)과 連續性(연속성)이 없는 衆口難防(중구난방)의 양상이
엿보인다. 우리가 사는 격동의 세계 속에서, 이 문화적 특성은 때로는 국민의 力動性(역동성)을 자아내는 장점도 있을 수 있다. 반면
건전한 지도층이 지혜와 판단력의 기준을 공급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국민은 半萬年을 자랑하는 歷史로부터도 아무런 교훈을 받지 못하고 중심을 잡지
못하며, 갈팡질팡 남의 꽁무니만 쫓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고 있는 한국의 지도층 이 같은 빈약한 정신 기반으로 좋은
나라를 만들어 내기는 어렵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도층이 빈약하다는 것이 당장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나라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하는 최대의
취약점이라 할 수 있다. 건전한 지도층이 없는 곳에는 진정한 의미의 保守도 없고, 진정한 의미의 進步도 없다.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改革도 잘 안 된다. 나는 이것이 남북한 양쪽에서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남한에서는 사회의 중심을 잡는
지도층이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중심이 없다 보니 형식만 쫓지 않을 수 없고, 형식만 쫓다 보니 비용만 많이
들고 실질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북한에는 良識(양식)을 가진 지도층이 없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전혀 自己改革(자기개혁)을 하지 못하고, 기형적인
체제로 치닫고 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 대단히 아쉬운 점은, 미약한 지도층이나마 自己增殖(자기증식)을 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오히려 쇠퇴해 가는 느낌을 준다는 사실이다. 광복 직후에 비해서도 지도층의 지위에는 상대적으로 개선된 것이 없다. 쉴 새 없이
진행되는 拜金主義(배금주의)와 교육 문화의 下向 平準化의 흐름 속에서 이 나라의 지도층은 質的으로 계속 沈下(침하)하고 있다. 국민의
學歷(학력)은 높아가고 있으나 지도층은 자라지 않고 있다. 사회의 지도층이란, 대단히 중요한 정신적 「인프라」인데, 이
인프라를 한국은 길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프라가 약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경륜이 있든 없든, 지식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이 1대 1이다. 목소리가 높은 사람이 유리하기 때문에 나라가 요란하고 흥분이 가라앉을 날이 없다. 흥분 속에 나라의 기운이 빠지고
있다. 한국의 지도층이 멸시와 혐오 속에 埋沒되는 이유 한국의 지도층은 왜 이렇게
矮小(왜소)하게 되었는가. 이 나라의 지도층이 멸시와 혐오 속에 埋沒(매몰)되고 있는 것은 단순한 한두 가지의 要因 때문은 아니다. 오랫동안의
슬픈 歷史가 빚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亡國과 더불어 지도계급이 몰락한 데에 있다. 둘째는 광복 이후
이 나라의 상류층이 민족정치를 잃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開發獨裁(개발독재) 시대 이후, 교육의 理念과 方向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넷째는 그동안
다소나마 형성된 각계의 지도층이 사명감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 나라가 국권을 빼앗긴 것이 당시
지도층의 잘못 때문이라는 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나라를 잃으면서 지도자들이 지도력을 유지할 수는 없다. 亡國으로 당시 지도층이 완전히
沒落(몰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부 애국자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함으로써 民族正氣(민족정기)를 드높이기는 했으나, 애석하게도
끝내 그분들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沒落의 길을 걸었다. 국내에 남은 兩班들은 日帝와 協力 내지 妥協(타협)함으로써
식민지下의 사회적 지위를 보존하기는 했으나, 그들에게 지도력이 있을 수는 없었다. 3·1 운동의 지도자들도 나중에는 대부분 親日로 전향함으로써
一身을 보존하였으나, 국민의 존경을 잃었다. 한마디로 亡國은 끝내 지도층이 될 수 있는 양반계층을 沒落시키고 말았다. 둘째,
광복 이후 이 나라에는 쟁쟁한 지도층이 있었으나, 피비린내 나는 左右鬪爭(좌우투쟁)의 激浪(격랑)과 同族相殘(동족상잔)의 6·25 전쟁으로
左右를 막론하고 모두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 건국 이후, 신생 대한민국을 주도하는 세력에는 親日 행적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경제력과
학식을 가지고 국정에도 많이 참여하기는 했으나 民族正氣를 고취할 수가 없었고, 나라를 위하여 헌신할 자세는 처음부터 희박했다. 국민이나 국가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 사람은 지도층이 될 수 없다. 셋째, 제3공화국 이후로는 國政의 焦點(초점)을 오로지 경제발전에 두었고,
정신에 관련된 모든 것, 이를 테면 文化나 교육 등은 「第2의 經濟」로 치부되었다. 교육과 문화가 「제2의 경제」밖에 안 되는 빈약한 교육理念,
文化理想을 가지고 지도층을 기를 수는 없다. 또 그 당시, 민족 정신의 高揚(고양)을 표방하며 추진된 한글專用(전용)과 교육
平準化(평준화) 정책은, 결과적으로 자라나는 世代로 하여금 이 나라 지도층이 필요로 하는 文化 意識(의식), 歷史 意識의 함양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나라를 망치는 한글專用주의자와 平準化주의자 특히 한글專用 정책 때문에 젊은이들이
이 나라(그리고 중국, 일본)의 역사와 전통을 이해할 수 있는 語文 能力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데, 歷史 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지도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平準化 정책으로 이 나라 젊은이들이 알토란 같은 靑少年 시절을 놀면서 지나게 해놓고, 이 나라가 앞으로 좋게 될
것을 바라는 천박한 文化 意識 속에서 제대로 된 次世代 지도층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개발 독재 당시에 구축된 政治의
틀, 경제의 틀, 교육의 틀, 行政의 틀은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사실 거의 原型 그대로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틀은 지금에 와서는 거의 모든 부분이 쓸모 없게 되어, 그 대부분을 뜯어고치지 않고는 나라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지도층이
허약하기 때문에, 개혁의 말만 무성할 뿐, 실천은 거의 없다. 경제에 있어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가 있어, 많은 무리가 있기는 하였으나 우선 당장 떨어진 발등의 불은 끌 수 있었지만, 정치, 교육, 행정, 사법 등에 있어서는 IMF
조차도 없어, 그 틀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에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발연대에 구축된 구태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1970년대 이후, 많은 젊은 학생들이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 유학하여, 새로운 知識을 국내에 도입함으로써, 이 나라의 지식 수준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人文 社會에 관한 한, 대부분 외국의 이론과 제도를 직수입하는 데 급급하여 그것을 이 나라의 현실에
접합시키지 못하고 있다. 표방하는 이론은 대부분 외국(특히 미국)의 이론이고, 드는 事例(사례) 역시 외국의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이들의 한계
때문에, 이들의 능력으로 국민의 절실한 소망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교육이 붕괴상태에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좋은 지도층이 형성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한글專用주의자와 平準化주의자들은 이 나라의 후진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을 바랐는지 알 수 없으나, 한글專用 이후 우리의 젊은이들이 내비치고 있는 性向을 보면 나라의 장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글專用이 과학기술의 촉진제가 되리라는 기대와는 정반대로 理工系 지원은 해마다 줄고 있고, 기초과학은 쇠퇴일로에
있다. 人文社會系에도 法科에만 학생들이 몰리고 그밖의 학생들도 전공 과목을 버리고 사법고시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앞으로
국민의 모범이 될 만한 지도층이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지도층은 나라의 정신적 「인프라」 이상에서 우리는 이 나라에서 지도층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만일, 이 나라에 지도층이 형성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들이 수행하여야 할 使命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그 나라의 지도층은 그 나라 사람들의 思考(사고)와 행동의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국민을 醇化(순화)하고 나라를 통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국민들의 利害(이해)와 感情(감정)에는 항상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다. 그들의 이해와 감정의 대립을 융화하기 위해서는 지도층의 感化力(감화력)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지역 간의 갈등과 대립이 세계 어느 곳에 있어서보다도 첨예하고, 냉전을 방불케 하는 南北間의 대결도 다른 나라에는 찾아볼 수 없이
치열한 이유는, 서로 간에 신뢰와 理解의 架橋(가교)를 건널 수 있는 지혜와 아량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東西와 南北의 리더들이 진정한 지도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스스로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고 이용하려고 하니, 국민의 통합이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지도층은
秩序를 잡고 비전을 제시하며 사회의 防腐劑(방부제) 역할을 한다. 둘째, 훌륭한 지도층이 있는 나라에는 秩序가 잡히고 不法과
부패가 횡행할 수 없다. 국민들에게 행동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被害意識(피해의식)이 완화되고 준법정신이 확립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여러
가지 게이트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앞을 보면 大盜, 뒤를 보면 小盜」의 도적 공화국이 되어 가고 있다. 일찍이
마키아벨리가 말한 바 있다. 『正義가 없어도 秩序가 있는 나라와, 正義가 있다 해도 秩序가 없는 나라와의 사이에
兩者擇一(양자택일)을 하라고 한다면, 나는 前者(전자)를 택할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아마도 正義가 있고
없고는 비교적 소수의 사람한테 소중한 데 비하여, 秩序가 있고 없고는 모든 국민한테 아주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秩序는 나라를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건전한 지도층이 중심을 잡아야 秩序가 잡힐 수 있다. 어떤 신빙할 만한 정치학자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국민이 교육을 존중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법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법을 회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연구 결과에 一理가
있다면_나는 있다고 느꼈다_이 나라에서는 교육이 보급되면 될수록 범법자는 많아진다는 것이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셋째, 나라의 지도층은 마치 큰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이다. 배가 암초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는 나침반이 있어야 하듯이,
국정에 방향과 일관성이 있기 위해서는 확고한 哲學을 가진 지도층이 국정을 뒷받침해야 한다. 나라의 책임자에게 통치의 비전과 戰略(전략)이 있고
그것을 지도층이 잘 뒷받침해야 국민이 안심하고 국정을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지도층은 사회가 길러 낸다 끝으로 지도층의 역할과 사명 중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 나라의 소금, 즉 防腐劑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지도층은 국민의 사고와 행동의 기준이 된다. 그 기준이 확실할
때, 사회에는 自淨力(자정력)이 생기는 것이다. 지도층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터무니없는 행동이 영웅시되거나 기괴한 言論이 국민을
어지럽게 할 때, 나라는 썩어 들어가는 것이다. 한국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보기에는 지도층이 엷어지고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 있다. 李栗谷(이율곡)은 1579년(宣祖 12년), 東西分黨(동서분당) 조짐을 봉합할 것을 임금에게
건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士林이란 국가를 보존하는 元氣입니다. 士林이 번성하고 화목하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士林이
과격하고 분열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지며, 士林이 몰락하고 없어지면 나라가 망합니다』 시대는 물론 다르지만, 栗谷이 말한 사람은
이 글에서 말하는 지도층과 기능면에서 비슷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지도층이 몰락하고 없어지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오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栗谷이 오늘날의 한국에 다시 태어난다면 이 나라의 상태는 그에게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믿을 수 없는 지도층이 정치 지도층인 것 같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현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국민이 그런 정치인을 뽑았으니 누구를 나무랄 수도 없다. 정치 지도층은 국민에 의하여 선출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국민이 건전한 시민의식을 가지고 선거에 임하는 경우에는 정치 지도자들의 질이 좋아지지만, 국민의 시민의식이 박약하고 지역감정이나
금품수수에 의하여 선거에 임하는 경우에는 선출되는 정치인들의 질은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서양의 속담에 「일국의 정치는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는데, 一理 있는 말이라 하겠다. 어쨌든, 오늘 우리의 정치 현실에서 국민이
정치권으로부터 새롭게 만들 수 있는 비전과 전략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평소에 없던 비전과 전략이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정치의 틀을 가지고는 그런 사람은 아예 국민의 눈에 띌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정치가 좋아지려면 국민이 좋아져야 하는데, 국민이 좋아지려면 교육이 좋아져야 한다. 교육이 좋아지려면 교육부를 포함한 행정이 좋아지고 국민의
가치관이 좋아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정치가 좋아져야 한다. 우리 국민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단절하지 못하고 그 桎梏(질곡)에서 신음하고
있는 형국인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 악순환이 가동되는 과정에서 惡貨가 良貨를 구축하게 되기가 일쑤이니, 정치가 좋아지고 교육이 좋아지고
국민이 좋아지기는 매우 힘든 일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악순환 고리의 어디인가에서 사회를 좋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과연 이러한 淨化劑(정화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있다면 어느 곳에 있어야 하는가. 특히 중요한 세
군데에 있어야 한다. 첫째는 학자들이 사는 학계이고, 둘째는 法官들이 사는 법조계이고, 셋째는 저널리스트가 사는 언론계이다.
학자, 법관, 언론인은 나라의 소금이자
기둥이다 학자는 조그마한 기득권에 만족하지 않고 曲學阿世(곡학아세)의 유혹을 떨쳐버리며 용기와 신념으로
나라와 국민에게 방향을 제시하여야 학문이 살아난다. 그들이 교육을 행정으로부터 해방시켜야 교육이 살아난다. 학문과 교육이 살아나야 국가의 기준이
서고, 국민의 정신이 바로 선다. 李栗谷의 말대로, 士林은 나라의 元氣이다. 학자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경제학자 케인즈(J. M.
Keynes)가 말했다. 『경제학자나 정치학자의 힘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 실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제일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의 생각은 이미 빛바랜 지난날의 경제학자나 정치학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회의
소금이 되어야 할 존재는 法官이다. 法은 곧 正義인데, 만일 法官이 권력에 눌려서 정의를 지키지 못한다면, 사회의 非理와 부패를 막을 수는
없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法이 權力과 타협하는 예를 많이 보아 왔다. 소금이 먼저 썩는 나라에서,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셋째로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존재가 저널리스트들이다. 저널리스트의 사명은 말할 나위도 없이 보도와 평론의
공정성 및 타당성이다. 저널리스트의 힘은 사회의 어떤 힘에 못지않게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언론사들은, 엄청난 권력 기관이 되어
있다. 그러나 언론이 과연 이 권력에 걸맞은 식견과 사명감,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고 할 사람이 많지 않을까.
이러한 세 가지 부문의 사람들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정치나 행정하는 사람에 비해 보다 지식이 많고, 남한테 아첨하거나 인기를 구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무너지면, 국민은 의지할 데가 없다. 이 사람들이 제자리를 확실히
지켜야 사회에 自淨力이 생기고, 국민의 수준이 높아진다. 국민의 수준이 높아져야 국회의원 또는 대통령을 옳게 뽑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나라의 기둥은 대통령이나 행정부 또는 입법부라기보다는 오히려 학자, 법관 그리고 언론인들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사회의 지도층이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차지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진정한 사회의 지도층이 돼야 할 사람들이 허약한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