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20세기를 정리하고 21세기를
전망하는, 前(전)총리 세 사람의 鼎談(정담)을 마련했다. 姜英勳(강영훈) 南悳祐(남덕우) 盧在鳳(노재봉) 전 총리는 다양한 사회 활동과 학문적
지식, 그리고 國政(국정)을 총괄해 본 경험에서 나오는 깊은 經綸(경륜)으로 우리 민족의 1백년 발자취를 되짚어면서, 다음 세기를 맞는 데
얻어야 할 교훈들을 추출해 냈다. 11월 11일에 있은 좌담은 4시간 동안 쉼없이 이어졌다. 사회 20세기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1백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국주의 침략과 國權(국권) 상실, 식민주의, 공산주의, 민족 분단, 전쟁, 군사쿠데타, 독재,
경제개발, 민주화, 정권교체…. 여기에다 북한에서는 최악의 飢餓(기아)와 통제 체제를 겪고 있습니다. 20세기 인류가 경험한 모든 思想(사상)과
체제, 도전과 응전이 한반도에 집약돼 나타난 양상입니다. 20세기 한국 역사의 話頭(화두)로 事大(사대)냐 自主(자주)냐의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우리 근-현대사는 외세로부터 강요된 開化(개화)에 어떻게 대응해 왔느냐의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방후의 근대화도 그렇습니다. 38선으로 남북이 끊어져 버리니까 남한은 섬 아닌 섬이 돼 버렸습니다. 그같은 강요된
地政學的(지정학적) 조건에서 우리는 해외로 진출해 활로를 찾는 海洋化(해양화) 전략이 불가피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경제적 군사적 수단을 어느 정도 확보하게 됐습니다만, 또다시 IMF 사태로 개방과 개혁을 강요당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南悳祐 약 1백년 전에 우리나라는 심한 開化의 진통을 겪었습니다. 19세기 4/4 분기부터 개화의 소용돌이를 겪었는데, 금세기에도 1980년대
중반무렵부터 국제화다, 세계화다 해서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백년전 開化의 진통 이후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간략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세기 말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국제 정세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청국, 일본, 러시아 3국이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해 서로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는 판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淸日전쟁(1894∼1895)과 露日전쟁(1904)에서 이겨 한반도를 약탈한 거죠. 그러는 동안 국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丙寅洋擾(병인양요·1866), 辛未洋擾(신미양요·1871), 壬午軍亂(임오군란·1881) 등으로 표출되는 쇄국주의에다,
甲申政變(갑신정변·1884) 乙未事變(을미사변·1895) 俄館播遷(아관파천·1896) 등 외세의 암약과 국내 政爭(정쟁)이 맞물리는 대혼란을
겪었고, 이는 결국 淸日, 露日 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나라의 운세가 기울어 질 때 高宗(고종)은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의 개입을 기대해 보기도 했으나, 미국은 일본과 이른바 태프트-가츠라 비밀 조약(1905)을 맺어,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하지
않는 대가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한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국권을 잃고 말았습니다. 왜
우리가 이런 비운을 겪게 되었습니까. 당시에 우리 朝廷(조정)이 너무나 바깥 세상, 국제 정세에 어둡고 무능하여 자주적으로 외국의 문물을 받아
들이고 근대화에 필요한 개혁을 스스로 하지 못한 탓입니다. 힘 없는 나라니까 그렇게 된 것이지요. 지도자들의
無能-無識이 국가 불행 自招 姜英勳 20세기가 우리 민족에게 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느냐를 총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1백년 전 西勢東漸(서세동점)의 물결속에 列强(열강)의 이해 관계가 한반도에 침범, 대립 교차하는 가운데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무능하고 무식해서 여기에 잘 대처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말씀하신 대로 강요된 開國(개국)이지, 우리 스스로가 어떤 주체성을 가지고 개국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甲午更張(갑오경장·1894)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일본 사람들이 한 것이지 우리 주체성이 없었어요. 그러니 國政(국정)이 극히
문란했죠. 서로 싸움질만 하고…. 그래서 나라가 결국 망하지 않았습니까. 日帝(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이것도 강요된 국토 분단을
가져왔습니다. 모두가 우리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역시 민족이 힘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지요. 이
자각이 우리 민족에게는 큰 힘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힘이 없게 된 원인은 어디서 찾아야 하느냐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지도자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랐던 겁니다. 일부 지도층에서 개화 운동을 시작했지만, 이 역시
타락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집어먹기 위해 大韓帝國(대한제국)이라는 國號(국호)도 갖게 하고, 皇帝(황제) 칭호도 만들고 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남의 장단에 춤추고 있었던 거예요. 개화 세력은 타락 하고, 타락한 세력은 국력을 배양하지 못하고 서로 싸움질만
했습니다. 賣官賣職(매관매직)이 횡행했지요. 그러니 民亂(민란), 軍亂(군란)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13개월씩이나 군인들
보수를 못 줬어요. 먹고 살게 해주지도 않으면서 군인 생활을 하라는데 亂이 안 일어 나겠어요? 나라를 잃고 독립 운동을 할 때도 左右(좌우)로
갈라졌습니다. 그게 해방후에는 결국 국제 패권의 물결속에 38선으로 갈라진 것이지요. 金九(김구)선생이 나라를 가르지 않고 통일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 점은 애국심이라는 견지에서는 아주 높이 평가하여야 하지만, 당시 국제 정세를 그 분이 올바로 보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單政(단정)을
수립했다고 해서 李承晩 박사를 깎아 내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盧在鳳 단순히 시간 개념으로 20세기를 논하는 것은
編年史(편년사)적인 것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역사는 시간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원칙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南 총리께서 말씀하신대로 1900년부터 한국의 20세기가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굳이 시간 개념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19세기의
4/4분기부터 한민족의 20세기는 시작됐습니다. 또 현재 우리는 21세기를 앞두고 있다고 하는데, 이미 한국의 20세기는 끝났습니다. 시대적인
개념에서는 이미 21세기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에서 20세기를 본다면 유교적인 국가 질서가 서양의 국가
질서로부터 도전을 받고 무너지는 시기입니다. 한국은 유교적인 질서에서 떠나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떠난다고 하는 것이
서양에서 불어닥친 막강한 힘을 받아 새로운 政治體制(정치체제)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곧 민족 국가 건설이었습니다. 민족 국가를
만드는 데는 여러가지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잘 안되면 쿠테타(甲申政變)까지 벌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건 向日派(향일파)였지,
親日派(친일파)는 아니었습니다. 개혁 이념의 連綿性 南悳祐 1945년에 해방이
되었지만 이때에도 또 다시 外勢(외세), 이번에는 美蘇(미소) 양국에 의해서 남북이 분단됐습니다. 다행히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李承晩 대통령은
남한을 자유민주체제로 이끌면서 미국과 더불어 공산주의 赤化(적화)통일 야욕을 물리치는 데 큰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남한이
자유민주체제에 기초한 國權을 회복하자 그동안 억눌려 왔던 민족적 에너지가 일시에 분출하여 우리나라는 모든면에서 역동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정치적으로는 4·19와 5·16, 군사정권과 이에 반대하는 민주화 투쟁을 거쳐 지금의 민주체제로 발전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朴正熙(박정희)대통령이 국민적 에너지를 경제개발로 집결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20세기 후반부는 2차대전 후의 새로운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가 역사상 처음으로 민족적 에너지와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의
차이지요. 돌이켜 보면 우리는 20세기를 줄곧 외세에 시달리고 외세에 의존하면서 살아왔습니다. 19세기 말 자주 독립을
위한 개화 운동이 있었지만 우리의 힘으로 개혁을 이루기 보다는 甲午更張처럼 외국의 압력과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1백년이 지난 오늘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1백년 전 조상들이 내세웠던 개혁의 이념과 지금의 개혁 이념 사이에는
連綿性(연면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兪吉濬(유길준), 金玉均(김옥균) 등의 開化주의자들은 法治주의, 민주주의, 자유민주적 경제체제를
개혁의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1백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도 이들 목표는 未完(미완)의 과제로 남아있지 않습니까. 개혁의
방법에 관해서도 지금과 비슷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兪吉濬은 「虛名的(허명적) 開化」와 「實狀的(실상적) 開化」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虛名的 개화는 남의 것을 보고 앞질러 헤아릴 능력도 없이 무조건 이에 따라서 재물을 소비하는 것이고, 實狀的 개화는
사물의 이치와 근본을 살펴서 자기 나라의 실정에 합당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문제 의식하고 똑같아요. 開化에 관한 이념은
1백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끝장을 못 본 것이지요. 自强, 세력균형, 自主
이렇게 돌이켜 볼 때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로, 自明(자명)한 것이지만 힘 없는 나라는 외세의 지배를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1백년 전의 선각자들은 自强(자강)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둘째로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항상 강대국간의 力學(역학) 관계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들의 세력 균형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의 세력 균형이 깨지면 한반도는 또 위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결국 집단 안전 보장 체제를 추구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합니다. 셋째, 세계 정세와 역사적 변화 방향을 정확히 잃고 능동적인 적응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自主(자주)의 참뜻입니다.
옛날에는 세계정세를 너무 몰랐어요.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守舊(수구)는 自主가 아니라 예속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1백년 전 자주적 開化에 실패한
원인을 되새겨 지금의 세계화 개혁에 성공해야 합니다. 지금 사회 風潮는 나라 기울 때와 비슷
姜英勳 朴대통령의 軍政(군정)하에 산업화를 이루고 우리 사회가 달라졌습니다만, 나는 그것이 비정상적인 산업화의 과정이라고
봅니다. 政經(정경)유착이다, 官治(관치) 금융이다 해서 비리, 불법, 부패의 온상이 되었거든요. 페어뱅크라는 교수가 동양 사회의 부패는 윤활유
역할을 해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말도 했지만, 어쨌든 우리가 부패한 사회라 해도 군사 혁명이 일어날 때 1인당 국민소득이 1백 달러 미만인데,
1995년에는 1만 달러 이상 돼 물질적 면에서는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지요. 그것이 朴대통령의 업적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도시화, 대가족 제도의
붕괴, 도덕 윤리의 황폐화, 물질 만능주의 풍조 등이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이 얼마나
있습니까. 요즘 젊은 세대들은 전쟁나면 도망가겠다는 말까지 합니다. 학교는 교실 붕괴라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국회에서는 민주주의라는 간판을
내걸고 싸움질이나 하고 있고,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도 누가 지켜야 말이지요. 사회는 부패하고, 법을 안 지키고, 사치 향락이 만연하고…. 이런
사회 풍조는 1백년 전 나라가 기울 때하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국민성이 어떻게 되었길래 이런 풍조가 반복되고 있습니까. 국제 정세도
반복되는 측면이 많습니다. 우리 스스로 주인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나와서
목표를 갖고, 선두에 서서 비전을 제시하고, 모범이 되면 우리 국민은 마음을 합쳐서 國運(국운)을 이겨낼 수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3·1운동과
6·25 등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20세기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교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盧在鳳 우리의 민족국가
건설은 20세기 전반에 성공을 못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李承晩 대통령에 의해 성립됩니다. 그래서 李承晩 대통령의 업적이 역사적으로 아주
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민족 이름으로 국가가 형성되는 것이 1948년이 처음입니다. 물론 분단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지만, 北에서는 민족국가라고
스스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국제 공산주의에 의해서 민족국가라는 것은 반동적인 존재로 정의됐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민족을 부르짖는 것은
1970년대에 들어 와서,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서입니다. 그 이전에는 북한사전 등에도 민족국가를 부르조아 반동적인 역사체, 혹은 민족을 죽이는
반동 이데올로기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민족국가적인 체제를 갖춘 것이 李承晩 대통령 때입니다. 이 점에서 李대통령은 한국의
역사에서 큰 위치를 가집니다. 그러나 민족국가를 만든 것 자체만으로 문제가 다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민족국가가 작동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야
했습니다. 민족국가를 세우고 난 뒤에는 그것이 작동을 하게 해야 하는 과제가 남은 것입니다. 이것의 기초가 만들어지는 것이 朴대통령 때입니다.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근대 산업화를 기초로 하는 민족국가가 다져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李承晩 대통령과, 朴正熙 대통령이
20세기에 갖는 역사적 의미는 대단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각 시대에 필요한 것을 충족시킨 역사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봅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처칠과 맞먹는 지도자 사회 月刊朝鮮(월간조선)이
인터넷으로 20세기 20명의 대표적 한국인을 제시하고 여론 조사를 실시한 결과, 1등은 朴正熙 대통령으로 약 52%, 2위는 金九(김구) 선생
16.6%, 3위는 金大中(김대중) 대통령 10.7% 등입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1%에도 미달합니다. 건국과 독립 운동의 상징인 이승만 대통령이
20세기 전반부의 대표적 인물이 되어야 할텐데도 일반의 평가는 전혀 다르게 나옵니다. 여기에는 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만….
南悳祐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일반의 낮은 평가가 대단히 의외인데, 해방 이후 좌파적 이데올로기가 강한 시대를 지나면서 근 20년 동안
그를 독재자로 매도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그런 의식을 가지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李대통령이 아니었더라면 남한만이라도 자유 민주체제로
이끌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쓴 「국제화 시대와 한국경제」라는 책에 李박사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내가 왜 그런 걸 썼냐 하면, 李대통령 고문을 지낸 올리버를 하와이에서 만나서 나도 몰랐던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李박사는 정말 자주적이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러시아는 한국을 赤化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것을 막지 못하면 미국이 나중에 크게
후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자주적이고 앞을 내다보고, 국제 정치를 올바르게 판단한 것이지요. 올리버는 李대통령이 처칠이나 루스벨트에
맞먹는 지도자라고 썼어요. 그런데 그런 전체적인 이야기를 우리 젊은이들이 잘 몰라요. 그래서 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읽히기 위해서 내가
요약을 좀 했어요. 姜英勳 李대통령이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反共(반공)주의자로 사니까 공산주의자들이 비판하고, 매도한
것입니다. 민족을 반역했다든가, 친일파라고 욕했습니다. 1956년인가, 내가 육군 본부에 근무할 때(관리부장 중장)인데 어느날 갑자기 李
대통령에게 불려갔어요. 중동과 남미 지역 특사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느라 특사로 가지는 못했지만 그때 그분이 하신
말씀은 이랬습니다. 『우선 중동으로 가는 길에 오키나와에 들러 독립정신을 고취해 줘. 옛날에는 오키나와가 우리나라와 제일
가까운 나라인데, 다시 일본에 붙어서 살겠다고 하니 정신들이 어떻게 된 것인가. 중동에 가서는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철저히 가르쳐 주어야
해. 우리 경험을 통해서 말이야. 내가 군인들을 특사를 보내는 것은 공산당하고 직접 싸워보았기 때문이야. 우리가 전쟁을 통해서 얻은 귀중한
경험을 세계 평화를 위해 써야 해. 공산주의자들의 음모가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라고…』 李대통령은 한반도 안에 가두어두기
어려운 분이에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언제나 세계를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한 분입니다.
朴대통령은 민족국가의 경제바탕 완성 盧在鳳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내가 직접 들은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내가 유학을 가 있을 때인데, 그 때는 李대통령이 정치에서 물러난 후입니다. 비교정치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한 교수가
『李대통령은 20세기 최고의 지도자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상당히 놀랐어요. 또 한번은 金九선생을 극진히 모시던 분인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金九 진영은) 李박사에게 足脫不及(족탈불급)이었다. 그분은
群鷄一鶴(군계일학)이었다.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었다. 지금 李대통령을 低(저)평가하지만 다 쓸데없는 이야기다. 아무도 그 사람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李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들쭉날쭉인 것은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보느냐라는 기본 시각의 문제입니다.
權力史(권력사)의 시각에서 보자면 李대통령의 평가가 낮을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福祉(복지)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압도적으로 朴대통령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민족국가적인, 민족사의 시각에서 보면 李대통령과 朴대통령 중 누가 더 중요한가 하는 차이를 가릴 수 없게 됩니다.
왜 이런 시각이 중요하냐 하면, 1백년 동안 우리가 싸우고 고통받고 해 온 것이 결국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로 살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민족국가이고, 그것이 세계에서 제자리를 잡도록 하는 노력이었습니다. 李박사가 민족국가를 성립시키고, 朴대통령이
경제적인 바탕을 완성시켰는데, 1991년 국제 사회에서 우리가 정회원으로 인정이 됩니다. UN 가입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독립국가라 해서 나가도 인정이 안 돼요. 그러다 국제 사회에서 완전한 자격을 얻게 됩니다. 민족국가로서 하나의 큰 기초 여건과 역사적인
과제가 매듭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사회 20세기 세계의 발전과 한국의 발전이 어떠한 과정을 걸어왔는지를 10년 단위로 끊어
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옵니다. 1900년에서 1910년 사이 우리는 러일전쟁의 결과 식민화가 결정되었고, 세계는 미국의 시대가 열리고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면서 인간이 하늘을 날게 됩니다. 1910년대는 우리에게 국권상실과 3·1 운동이라는 저항의 시대이며, 세계적으로는
제국주의가 1차 대전으로 몰락하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시기입니다. 1920년대에 국내는 민족 언론이 등장하면서 문화적 계몽이 이루어지는
시대이고, 세계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가 시작됩니다. 1930년대는 일본이 조선을 兵站基地(병참기지)화하고, 세계적으로는 파시즘, 스탈린이즘,
나치즘, 군국주의가 등장합니다. 1940년대에 우리는 우리 말과 글을 빼앗겼다가 해방과 분단을 겪고, 세계는 2차대전의 「불타는 세계」를 거쳐
전후 美蘇 양극 체제로 갑니다. 1950년대에 우리는 전쟁과 복구, 세계는 냉전이 심화되는 시기입니다. 1960년대는 우리의 근대화가 시작되고,
세계는 고속 성장 시대입니다. 1970년대에 우리는 해외로 나가 민족의 활동 공간이 넓어지고, 세계는 오일 쇼크를 겪고 환경운동이 시작됩니다.
1980년대에 우리는 민주화 진통을 겪고, 세계는 공산주의가 붕괴됩니다. 1990년대에 와서 한국은 정보화 시대를 맞았고, 세계도 정보화
시대입니다. 우리가 세계의 흐름에 비로소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20세기가 시작될 때 세계가 하늘을 나는데 우리는 비로소
개혁을 시작하는, 엄청난 격차로 출발해 같은 세기에 따라잡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물질적·경제적 차원일 뿐입니다.
그동안 말씀을 정리하면 20세기 우리에게 강요된 開化와 分斷(분단)의 와중에서도 우리가 이룩한 가장 큰 성과는 민족국가를
만들고 또 이 민족국가가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물질적, 군사적 바탕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IMF를 맞으면서
우리가 스스로 개혁해야 할 것을 못하고 강제적인 개혁을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20세기를 열 때 가지고 있었던 문제, 즉 자주성과 주체성의
문제가 아직 풀리지 않고 있지 않은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IMF를 맞아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합니까. 80년대 개혁 못해 IMF 사태 불러 盧在鳳 우리 사회가
초고속으로 산업 사회로 바뀌면서 세계와의 연관이 밀접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정부에서 이를 추진하고 기초를 다졌습니다만,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전환을 하게 되면, 기술 인력이 들어가야 하고, 두뇌 인력이 들어가야 하고, 이렇게 되면 지배 방식이 과거와 같아질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전환되어 나가야 하는데, 그 전환이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하고 그대로 나가면 나갈수록 低능률, 非효율적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정부에서 보니까 이미 이렇게는 한 발자국도 못나가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때문에 IMF사태가 온 것은 한국 경제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데
사회적인 기초가 안된 데서 온 결과입니다. 자율과 타율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굳이 시기적으로 보면 1987년부터
전반적으로 새로운 기초가 깔아져야 했고 깔려는 노력이 시작되어야 했는데, 이것이 계속 지연돼 오다가 결국 IMF사태라는 것이 터진 거지요.
IMF사태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外貨(외화)의 유동성 문제로 터진 것이 아니고 펀더멘탈(경제 기반) 전체의 동맥 경화에서 온 결과라고 봐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IMF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경제의 투명성라든지, 합리성, 계산성, 그런 것들이 빨리 시정되지 않으면 그 당시부터 이미
희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南悳祐 1980년대 중반부터 국제화 세계화 그리고 금융개방에 대비하여 경제 운영의 패러다임을
고쳐야 한다는 識者(식자)들의 소리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정치력, 행정력의 부족으로 개혁이 지연돼 오다가 1997년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국제 금융계는 한국의 구조적 취약점으로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과연 한국이 외환위기의 예외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의구심이
표면화하자 우리 금융, 기업, 정부에 대한 신뢰가 일시에 무너지면서 외환 파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1990년 초에 미국
압력에 의해 자본 시장을 조금 개방 했습니다. 그때 한국의 금리가 국제 금리의 두 배나 됐습니다. 외국 은행의 지점에서 봤을 때 자국에서 금리
6~7%로 자금을 조달해서 한국에서 13~14%로 운영하면 곱배기 장사가 되는 겁니다. 물론 환율이 일정하다는 전제는 있어야 하지만…. 여하튼
이후 외국의 단기 자본이 대거 몰려 왔습니다. 추산을 해보니까 1996년까지 5백억 달러가 들어 왔습니다. 이 돈을 한국에서는 어떻게 했느냐?
그것은 단기자본이었는데, 우리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경험이 없으니까 장기투자를 했어요. 인도네시아, 러시아의 정크 펀드(부실채권)까지 샀어요.
단기자본을 가지고 장기투자를 한 거지요. 그러니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 불안을 느끼고 자본을 회수해야겠다고 했을 때 내줄 돈이 없는 겁니다.
정부가 외환보유고를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없으니까 파탄에 이른 것은 필연적인 것이지요.
민주화-개방화-정보화의 「3化」에 제대로 적응 못해 자본시장을 개방하기 전에 우리 금융 산업의 전체적인 취약점을
개선하고, 금리도 국제시장과 비슷하게 만들었어야 합니다. 금융이라는 것은 한 나라의 자본의 배분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금융기관은
대기업, 특히 재벌 중심으로 대형 투자가 있으면 경제적 타당성이나 리스크는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치중했습니다. 책임경영 체제가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정부의 감독도 불충분했습니다. 단기투자를 종금사들이 굴렸는데, 당시 개혁이다 자유화다 해서 정부가 감시의 고삐를 놓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당한 것입니다. 설사 IMF 위기가 없었다고 해도 우리는 커다란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는 게 사실입니다.
姜英勳 일부에서 IMF가 와서 우리를 망치고 있다는 시각도 있는데, IMF에 도와달라고 한 것은 우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美제국주의자들의 금융 지배」 같은 시각은 위험합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우리가 너무 빨리
들어갔어요. 적어도 OECD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선진국들간에 적용되는 룰(규칙)을 우리가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일단 들어가고 나면 그 룰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들어가고 나니 정부의 규제도 자유화다 뭐다 해서 풀 수밖에 없게 된 거지요. 종금사가 난립하게 된 것 아닙니까.
우리가 급하니까 IMF 보고 도와달라고 했는데 밑빠진 독에 물 붓기로 도와 줄 수는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선 투명성부터
확보하고, 재벌들의 정치자금도 없애라는 겁니다. 시장원리를 강조해서 정당하게 돈을 벌고,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망하지 않는 그런 식의 기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돈을 빌려주면서 병을 고칠 처방을 주는데, 그걸 우리를 망치게 하려는 것 아니냐고 보는 것은 문제입니다. 물론
해외자본이 국내에 들어와 주식투자에서 이익을 빼 가고 하는, 헤지펀드 등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사회 1980년대에
우리가 새로운 틀을 짜야 했고, 문제의식도 있었지만 실천이 되지 않아 IMF사태가 왔다고 지적들 하셨습니다. 이것을 해야 할 문제의식이 있었으면
그것을 실천, 또는 개혁해야 할 책임은 정치적 리더십의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1980~90년대는 민주화의 시기입니다.
민주화된 리더십이 이를 못했다면 우리의 민주화에 문제는 없었는지 반성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시대는 3金이 권력을 놓고
다투면서 한편으로는 권력을 分占(분점)해서 우리나라를 이끄는 「3金 리딩 시대」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南悳祐 우리가
「3化」 시대, 즉 민주화, 개방화, 정보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결국 이런 사태가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주화라고 해서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을 겪지 않았습니까? 전직 대통령들과 현직 대통령 아들이 형무소를 갔습니다. 임금이 오르고 노사분규는 늘었습니다. 외부에서는 한국에 대해 점점
불안을 느끼고, 국내적으로는 기업이 앞을 내다보고 사업을 꾸려 나갈 수 없게 됐습니다. 또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우리가 국내 체제를 개혁하지
않고 개방을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정보화 시대에 세계 흐름에 맞게 빨리 산업구조를 바꿔 나가야 합니다. 그 적응이 여의치 않았고, 상당히
진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당면한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代議(대의) 정치는 제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언제 나아지겠느냐? 3金시대가
가고 새로운 지도자가 나와서 정말 능률적이고 생산적인 代議정치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3金시대가 우리 정치의 발목을 잡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文民정부」 「국민의 정부」는 修辭에 지나지 않아 姜英勳 金泳三(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화가 된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민주화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盧泰愚(노태우) 정권 때부터라고 해야 합니다. 그때의
헌법은 여야 의원들이 앉아서 담소하면서, 샴페인을 터뜨려 가면서 의논해서 만들었습니다. 대통령 선거법도 여야 의원들이 오순도순 만든 겁니다.
그래서 선거를 해서 盧泰愚 후보가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그가 軍 대장 출신이라고 해서 군사정권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내가 盧정권 때
행정부에 있었지만, 국회에 나가면 밤낮 盧정권은 민주정권이 아니라는 거예요. 야당들이…. 도대체 그런 인식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3化」 이야가 나왔는데 우리 나라가 개방된 것도 盧대통령 때입니다. 그때 소련, 중국하고 수교하고, UN에 들어갔어요.
盧정권 때 민주화, 개방화가 완성된 것은 아닐지라도 시작은 한 것입니다. 시작을 하면서 문제가 많았지요. 그때 정부에 들어가 보니 매일 데모가
일어나요. 노동 운동하는 사람들이 데모, 학생들이 데모…. 데모 좋습니다. 민주화하는 데에는 데모가 필요하지요. 국민 여론의 반영이니까. 그러나
데모는 법에 의해서 해야 합니다. 그때는 주로 不法(불법) 데모였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간판을 가지고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했습니다. 자기들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잘못이라고 누구도 강하게 말도 못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노조 사람들이
생산시설에 들어가 다른 사람이 조작을 못하게 시설에 주저 앉고….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盧在鳳
민주화 문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초기에 산업화를 한 방식을 여러 가지 개념으로 나타낼 수 있겠지만, 나는 이를
新重商主義(신중상주의)적인 체제와 신중상주의적인 정책방식으로 개발을 해 나갔다고 말합니다. 산업화를 시작할 당시 우리 나라 직업 종류가 몇 안
됐습니다. 농경사회였으니 많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내가 정부에 있을 때 보니까, 지금은 더욱 많아졌겠지만, 직업 종류가 2만4천 정도가
됩디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부지런만 하면 된다는 그런 시대가 지나간 거지요. 산업 연관이 복잡해지고, 두뇌와 고급 인력이
대폭 투입되면 더 이상 신중상주의적인 방식으로 국가와 경제를 운영해 나가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각 섹터(분야)가 자율성을 갖고,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시스템으로 이루어 나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산업사회는 분화가 되는데, 이 분화되어 나가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이 자율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고, 말을 바꾸면 민주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의 한계가 설정되고,
기업은 기업 나름대로 정부의 통제도 받고 협력도 하면서 또 비켜 나가기도 하고, 이런 것이 민주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민주화가
시작되는 것이 6共(공) 1期(기)입니다. 지금은 헌법상으로 6共 3期입니다. 6共 2기, 3기를 문민 정부, 국민의 정부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정책으로 규정하면 좋아요. 정책으로 이 정부는 무엇을 하기 위한 정부다 라고 하는 것은 좋지만 어떻게 문민 정부, 국민의
정부식으로 命名(명명)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레토릭(修辭·수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쨌든 과거에 신중상주의적인
권위주의식으로 국민을 모빌라이즈(동원) 하고, 또 불균형 발전 정책을 강행했는데, 더이상 이것이 불가능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율성를
확보해주고 하는, 소위 민주화라는 것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이것이 빨리 충족이 안되면 그 다음 발전이 안되는 거지요. 그래서 역사적인 과제는
권위주의와 발전의 컴비네이션(결합) 문제에서, 민주주의와 발전의 문제로 옮겨갔습니다.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어떻게 발전을 도모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 발전의 기초가 되는 여러가지 조건이 1980년대 중반에 한계에 들어왔다는 것은 南총리께서 지적하신 대로입니다.
그런데 6공 2기, 3기 정부가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YS 때는 순수한 권력투쟁적인 측면만
강화되었어요. 통치나 권력 행사라고 하는 것이 본질은 원래 寡頭的(과두적) 입니다. 그러나 과두성이 度(도)를 넘쳐버리면 안 됩니다. 무엇을
위한 과두성이냐는 인식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경제는 한계에 부닥쳐서 빨리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金泳三 대통령은 외국만 나가면
『당신네들 민주화해라. 우리 돈 많으니까 도와주겠다』는 식으로 큰소리만 쳤습니다. 밖에서는 우리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다음 6공 3기가 지금 정부인데, IMF 극복이라는 「불행한」 과제가 없었으면 지금 이 정부도 어디로 튀었을까 싶어요. 지금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래요. 민주화-산업화의 순서가 유럽과는 반대 姜英勳 민주화는
영국이나 유럽의 예를 보면 重商主義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개인 단위로 돈을 벌려니까 합리주의 정신이 배양돼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 위에
문예부흥이나 종교개혁 등의 과정을 통해 개인의 성숙기를 거치게 됩니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사회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절실히 알고
느끼고 실행하는 그런 개인입니다. 그런 시대를 거쳐 민주정치 문화가 먼저 정착이 되고, 산업화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개인의 성숙기, 즉
개인이 정직하고 성실하고 합리적이 된다는 단계를 거치지 못하고, 산업화를 먼저 했습니다. 산업화를 하면서 중산층이 생겨나고, 민주화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유럽의 역사 과정과 거꾸로 되었습니다. 요즘, 말로는 민주화한다, 또 제도도 많이 민주주의적으로 되어가고
있지만, 의식은 과거 권위주의 그대로 입니다. 문제는 민주정치 문화, 민주시민 의식을 어떻게 함양해 나가는가 입니다. 그것 없이 아무리
구조개혁을 해도, 나무 위에 올라가 물고기 잡는 격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金대통령이 구조개혁에 애를 쓰고 있고, 또 제2의 건국을 위해
의식개혁을 이야기하지만, 의식개혁이 국민운동으로 전개되어 가면서 해야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보조가 잘 맞아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사회 시민윤리가 정착된 바탕 위에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민주주의가 생활화되고, 그래야
法治로 구현된다는 말씀이시지요. 姜英勳 우리는 그런 기본이 없이 산업화를 했어요. 영국의 명예혁명은 1688년입니다.
산업혁명은, 아담 스미스가 國富論(국부론)을 발표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1776년이에요. 1백년 후에 산업화가 된 거지요.
盧在鳳 민족국가를 창건한 李대통령, 경제 발전의 산업화 기초를 놓은 朴대통령, 그후 과도기를 지나 6공 1기에서 민주화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의 큰 역사적 과제가 대충은 이루어졌는데, 남은 것이 있었어요. 통일 문제입니다. 그러나 통일 문제를
가지고 민족적 업적을 남기겠다는 욕심이 문제였습니다. 나라가 통일에 접근할 수 있는 기초가 되어 있느냐 없느냐는 不問(불문)에 부치고 나간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6공 2기, YS정권에서 본격적으로 청사진이 제시되었어야 했고, 또 역대 대통령 중 YS처럼 좋은
조건으로 상속을 받은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전부 다 놓치고 말았어요. 그것이 결국 IMF사태로까지 연결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정부에서
일을 해 본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지금도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정보화 시대라고 하면 벤처기업을 양성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新지식인이 양성되어야 합니다. 新지식인이 무엇입니까. 얼마 전 청와대
장면이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신지식인이라고 식당 쉐프가 모자 쓰고 나오고 합디다. 이런 게 신지식인입니까. 정보화, 과학화 시대에
휴머니티(인간적 요소)는 빼고, (기술적으로) 직접 투입할 수 있는 그런 무엇, 그런 형태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지금 나아가고 있는 것은 달라요.
정보화 시대에 따라갈 수 있는 기초는 돼 있습니까? 한 예로 지금 교육이 다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벤처기업에 투입할 신지식인을 어디에서
구한다는 이야기입니까?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행정부에 있어 봤지만, 행정체제도 이래서는 안됩니다. 과거 생산을 독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체제가 일정 시기에 방대한 효력을 발휘했죠. 그런데 민주화가 되고 자율성을 보장하자고 하는 지금에는 행정 자체가 서비스 체제가
돼야 해요. 아직 그것이 안되고 있어요. 6공 2기, 3기 정부 들어와 행정개혁을 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위한 개혁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민주화 플러스 발전」이라는 역사적인 과제가 상실돼버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사회 流動性 높아
프로정신도 부족 南悳祐 지금 정치 권력자들의 중요한 통치 수단이 세무조사와 검찰, 그리고 監査(감사)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과거보다 더 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나라 민주주의의 척도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개선될 수 있겠느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경험과 自覺(자각)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별 도리가 없어요. 시간이 걸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직접 겪어보고 지쳐서야 바꿔나가는,
그런 과정입니다. 길게 인내를 가지고 바라보아야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盧在鳳 합리성의 결여도 지적돼야 합니다.
경제에서 말하는 합리성이란 계산성을 이야기하는데, 이 합리성의 결여로 망한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유교적인 전통 윤리를 가지고
있었고, 농경사회가 그렇게 계산성이 필요없었던 사회였어요. 그러다가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우리나라의 사회 유동성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유동성이
높다보니 자기가 지금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생각은 다른 데에 가 있습니다. 프로정신이 없다는 것이지요.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격입니다. 프로정신의 결여가 우리 사회 발전의 커다란 장애 요소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정착시키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급속한 압축 성장을 해왔는데, 그때는 농경사회라는 단순사회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행정이라는 것도 생산 독려 체제였습니다.
민주화 사회에서는 행정도 서비스 체제로 나가야 합니다. 또 한가지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우리 나라는 대통령제인데
대통령의 유형이 문제입니다. 李대통령부터 盧대통령까지는 非직업 정치인이 대통령을 했어요. 그뒤에 6공 2-3기에 직업 정치인이 대통령이 됐지요.
그런데 권력 행사의 특성을 본다면 대체로 非직업 정치인이 대통령이 됐을 때에는, 힘과 확신이 기초를 이루어요. 반면 직업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는 詐術(사술)과 정보, 이 두 가지가 통치 수단의 기초가 돼요. 문제는 여기에서 생겨납니다. 한국 경제나 사회
조직, 모든 면이 합리적으로 정착되고, 계산성으로 나아가야 하고, 프로정신이 있어야 하는데, 통치하는 방식은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통치 권력층과, 한국이 안고 있는 과제가 충돌하고 있는 겁니다. 사회 역사의 한 단계를 생략하고 뛰어
넘는 것이 어렵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최근 李光耀(이광요) 前 싱가포르 총리가 全經聯(전경련) 세미나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문화를
바꾸기는 어려우나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쉽다고.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바꿨지만, 그에 따른 문화는 바꾸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르네상스的인 개인의 自覺 단계를 지금 민주화를 하면서 비로소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셈인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것을 먼저하려고 민주화를 미룰 수도 없는 일이고…. 결국 동시에 갈 수밖에 없다는 데에 우리 고민이 있는 것 같습니다.
軍事문화를 軍事독재와 같이 보는 것은 문제 姜英勳 우리가 과도기에 있는 거예요. 전통적인
권위에서 이상적인 형태로 가는 도중에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게 막스 웨버의 이야기입니다. 이상적 사회로 가는 데 필요한 경험과 自覺을
위해서는 지도자의 절대적인 先導(선도), 지도, 모범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그것이 부족해요. 여기서 군사문화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우리 나라가 군대를 60만이나 가진 때가 역사상 없었어요. 그것도 국토의 절반인 대한민국에만 말입니다.
6·25때만 해도 군대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기업이고, 가장 큰 조직체였지요. 전통사회에서 민주사회로 만드는데 미국 사람들은 憲法(헌법)만
만들어주면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헌법 만들었는데 쿠데타 일어났어요. 터키 희랍에서도 그래…. 왜 이러느냐? 그래서 소위
정치발전 이론이라는 것이 미국의 정치학계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개발도상국가가 어떻게 민주화할 수 있느냐? 여기서
두 가지 전제 조건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경제 발전 수준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교육 수준입니다. 여기서 개발도상국의
과도적인 단계에서는 군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군대가 농경사회에서 조직사회로 넘어가는 발판을 제공한다는 거예요.
군사독재라고 하는데 몇 사람의 군인들이 정치에 간여한 것뿐이지, 군인 전체가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군사문화란
무엇이냐? 우리 나라가 산업혁명을 할 때에 기초적인 기술을 제공한 것은 군대입니다. 내가 군대를 그만둘 때 軍 보유 차량이 2만 대였는데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차량이 모두 2만 대였어요. 군대에서 나오는 자동차 부속품을 사회가 썼어요. 운전 기술을 배워준 것도 군대였습니다. 통신,
공병, 포병 이런 게 모두 기술입니다. 소총도 半(반)자동이에요. 낫 놓고 기역字(자)도 모르는 청년들에게 이런 기술교육을 시킨 거예요. 군대가
국민 기술훈련 道場(도장) 역할을 한 것입니다. 전쟁 때 논산 훈련소에 매일 6백명씩이 들어오고 나갔어요. 그중 40%가 문맹자예요. 문맹자가
어떻게 자동화 기계를 다룹니까? 그래서 각 사단에 학교를 만들어 가나다부터 가르쳤습니다. 최소한 6개월을 가르치면 편지를 집에 쓸 수 있고,
글을 읽을 수 있었어요. 이걸 군대가 한 겁니다. 그걸 군사문화라고 하면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나 독재로 국민을 억압하고, 민주주의에
反動(반동)된 것을 군사문화라고 하면 이해할 수 없어요. 이런 잘못된 인식이 국민들의 머리 속에 들어가 있는데, 언론 기관도 책임이 있어요.
국민이 軍을 배척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회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직면한 과제는, IMF 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하는 당장의 문제와, 통일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하는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현재의 IMF 극복 방식은 적절하다고 보십니까.
南悳祐 정부의 경제 관리 방식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농구에 비교를 했는지, 레만 교수는 감독형, 코치형, 레퍼리형으로
나누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대개 이 3단계를 거친다고 봅니다. 기업 구조개혁 너무 서두르면 부작용
감독형은 정부가 경제를 장악해 主(주)역할을 합니다. 유치산업을 보호하고, 무역에서도 보호주의를 합니다. 반면 政經(정경)
유착이 있고, 부패가 많아집니다. 우리가 겪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이 단계를 지나면 코치형인데, 정부가 한 발짝 물러서요. 그러나 필요한 부문에
지원을 해주고, 또 경우에 따라 산업 보호도 해 줍니다. 여기도 역시 정치와 경제가 하나가 되고, 아직 부정 부패도 남아 있습니다. 일본이
대표적입니다. 레퍼리형은 정부는 심판자의 역할만 합니다. 경제에는 간섭하지 않고, 게임의 룰만 정해 줍니다. 그 룰을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산업자본이 금융자본과 분리되고, 모든 경영의 투명성이 높습니다. 부정 부패도 적지요. 대개 앵글로 색슨계인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는 과거 감독형에서 1994년부터 코치형 단계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면
과제는 레퍼리형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IMF사태에서 비교적 빨리 회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구조조정의
목적에 대해서도 국민적 합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조개혁의 방법과 남아 있는 과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異見(이견)이 있습니다.
우선 방법에 있어 정부가 너무 서두는 것 같습니다. 단시일 내에 뭔가를 이루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비현실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때문에 필요 이상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가령 금융기관에 대해 불과 1∼2년 내에 BIS 자본비율을
현재의 4%에서 최소한 8%까지 높이라고 하고, 대기업에 대해서는 금년 말까지 부채 비율을 일률적으로 2백%까지 낮추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비현실적입니다. 나도 세계은행 강연과 세미나 등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비현실적인 조건을 강요하면 기업들은 편법을 쓰게 됩니다. 실제로
株價(주가) 조작 등이 있었지 않습니까. 또 장부상의 숫자만으로 부실 낙인을 찍어 버리면 그 기업은 더욱 부실화해서 이를 처리하기 위한
금융기관과 정부의 부담이 더욱 커집니다. 목적을 분명히 하고 목적 달성에 필요한 제도적 장치와 집행을 감시하는 체제를 만들어 놓으면 기업들이
필연코 그에 적응하게 될 것입니다. 꼭 2년 안에 해야 한다, 3년 안에 해야 한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실
무시한 원칙 내세우다 일관성 잃어 姜英勳 지금 南총리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구조조정을
빨리 하면 사람들의 의식이 따라 변할 것이냐? 소위 唯物史觀(유물사관)으로 우리가 나갈 수 있느냐? 아니면 意識(의식) 구조를 알고 바꾸면,
그에 따라 구조가 바뀌고 살아나는 唯心史觀(유심사관)적으로 나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구조조정과 의식개혁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현실의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南悳祐 나 자신의 경험으로 보면, 기업인은 죽여도 기업은 살린다는 정신으로 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면 대출금의 출자전환이 불가피합니다. 출자전환을 하면 경영권이 은행으로 넘어가는데 은행은 채권 확보에 신경을 쓸 뿐 부실기업을
정상화할 경영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실기업을 은행에 맡기면 더욱 부실화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때문에 나는 금융단, 세계은행, 정부 등이
출자하는 가칭 「기업갱생공사」라는 持株(지주)회사를 세워 부실기업을 매입해 국내외 전문 경영인들을 선발하여 구조조정을 하게 하고, 그 조건하에
출자전환을 하라고 제안한 일이 있습니다. 은행이 그 많은 부실기업을 끌어 안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걱정입니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금융과 기업의 자율화, 규제 축소, 시장원리 존중 등 좋은 말들을 많이 합니다만 정부 당국자는 원칙과 현실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마련입니다. 삼성자동차 문제도 결국 부산 시민들의 반발이나 노사의 반발 등 여러 가지 정치적 현실에 부닥친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현실을 감안한 처방을 쓸 것이지 왜 獨也靑靑(독야청청) 원칙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가 현실에 부닥쳐 이탈하는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부
정책이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하여튼 기업의 구조조정을 빨리 매듭짓고 정작 21세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궁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나라를 투자 왕국으로 만들겠다고 했는데 과연 어느정도 그 목표에 접근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제적 측면은
두고라도 날로 심해지는 환경오염, 범죄 증가, 노사갈등, 열악한 교통질서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해결하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합니다. 朴대통령은 그것을 새마을 운동으로 했습니다. 뭔가 그런 메커니즘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식 사회다, 과학기술 사회다 하면 정말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있느냐가
문제인데, 그쪽 분야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지금의 교육상태도 아주 어지럽고…. 우리가 올바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21세기에는 정말 인류가 위기에 처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첫째로 식량, 토지의
문제로, 지금 토지가 인간을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습니다. 식량 위기가 온다는 것이지요. 또 물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벌써 用水(용수)가
부족해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같은 곳은 문제가 터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또 환경보존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21세기는 중대한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 포석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대체적인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데 요즘 정부가 너무
바빠서인지…. 이런 진짜 중요한 문제에 들러 붙어야 합니다. 사회 경제개혁은 정치가 한다고 볼 때, 그러면 정치는 누가
개혁을 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과거에는 軍이 정치를 뒤집어 놓기도 했지만 이제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고, 결국 시민, 국민들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국민들의 수준이 높아지기는 어렵습니다. 국민의 의식 수준에 영향을 주는 것은 교육과 언론 등인데, 그것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도 없고…. 지금 시점에서 가장 현명한,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21세기 국가像은 강하고, 살기 좋고, 통일된 나라 姜英勳 지도자들이 모범이
돼야 합니다. 南悳祐 지금 정보화 시대라고 하는데, 정보화와 의식개혁을 연결시키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즘 NGO(비정부기구)가 많이 생겨나는데, 이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회 감시하러 갔다가 쫓겨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것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요즘 인터넷을 아이들이 다 잡고 있는데, 정부가 인터넷을 잡는 것도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盧在鳳
지금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어떤 체제이든 그 체제에 맞는 의식이 결합돼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이 잘 되지 않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立憲的(입헌적) 자유민주주의 체제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되려면 무엇보다 경쟁이 제대로
돼야 합니다. 민주주의 체제는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경쟁을 전제로 합니다. 경쟁의 룰이 제대로 확립돼야 하고, 책임을 지는
경영, 절제있는 주장, 근검성,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만족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像(상)이 무엇이냐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한정하게, 세계적인 제국으로 나갈 수 없는 것도 사실이고, 어떤 像을 그려야 하는 것인가?
다른 나라가 한다고 무조건 우리도 따라가야 할 것인가? 물질적으로는 어느 정도가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像의
설정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그것이 있고 난 뒤에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南悳祐 그것은 결국
21세기 국가 목표가 무엇이냐의 문제가 됩니다. 그 像이 뭐냐? 나는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강한 나라, 살기 좋은 나라, 통일된 나라
입니다. 강한 나라의 국력에는 知力(지력), 도덕력, 경제력, 국방력이 포함되는데 금세기 전반의 쓰라린 경험이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살기
좋은 나라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돌이켜보면 1870∼1940년대의 국가주의는 영토의 확장을 목표로 하였고, 2차대전 이후 약 반세기
동안의 국가 목표는 경제력 혹은 산업력으로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는 세계화의 시대요, 「국가 후퇴의
시기」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국가목표는 침략적인 것(aggressiveness)이 아니라 국가의
매력성(attractiveness)을 높이는 것이라는 겁니다. 다국적 기업들은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서로 경쟁할 것이고, 정부는 투자를
비롯한 성장요인을 국내로 유치하기 위해 매력적인 나라를 만드는 데 서로 경쟁하게 될 것입니다. 살기좋은 나라는 곧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매력적인
나라는 생활, 知力(지력), 문화, 도덕 수준이 높고 환경이 깨끗하고 법과 정의가 존중되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북통일에 관하여는 북한을
국제사회로 이끌어 내 점진적 개방과 내부 개혁을 유도하되, 감상적이고 안이한 통일론은 경계해야 합니다. 세계화
시대에도 기본은 민족국가가 돼야 姜英勳 거기에 하나 덧붙였으면 좋겠어요. 「살기 좋은 나라」이되 「더불어」 살기
좋은 나라였으면 좋겠어요. 우리 나라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더불어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정보화 시대, 세계화의 시대에 국경선 개념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국가 주권의 성격도 변하고 있습니다. 환경에서의 기후의 변화, 지구 온난화 등의 문제는 단독 국가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좋든 싫든 국가간에 함께 해야 해요. 이제 인류 사회가 더불어 살고 번영할 수 있느냐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우리도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盧在鳳 이는 결국 超(초)국가적 차원 또는 汎(범)국가적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超국가적 차원과 汎국가적 차원이 왔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외교나 국가정책의 기본단위는 국가 위주입니다. 문제는 EU(유럽연합)가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등장하면서 민족국가의 단계를 넘어가는 수준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럽보다 민족국가 건설이 3백년 늦었고,
분단으로 인해 아직 완결된 단계라고 할 수 없는데, 유럽은 이미 이 단계를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우리는 이만큼 늦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超국가적, 汎국가적 차원도 따라가야 하지만, 우선은 민족국가를 완성하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남한 중심의 통일이 된다고 전제하고, 北을 흡수해도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을 정도의 國力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선적인
미래의 像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국력은 경제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국력의 가장 밑에는 철학이 들어서야 하고, 그 위에 차례로
과학,기술,경제,군사력,행정력이 들어서야 합니다. 이런 것이 총체적으로 들어서지 않고는 국력이 신장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느
것은 아주 죽어 있고 엉망이에요. 만일 우리가 이런 걸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면 역사를 다시 거꾸로 가야 합니다. IMF 사태가 상당히 극복되긴
했지만 후진국으로 안 간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통일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런 역량이 있습니까? 그래서, 거기에 총력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는 길이고, 우리의 역사적인 숙제에 대한 바른 접근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사회
자연스레 북한 문제로 넘어왔습니다. 북한은 1995년부터 식량 배급이 중단됐습니다. 배급을 포기한 것은 사실상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실제로 주민들은 생필품의 80% 정도를 시장을 통해 구입하고 있습니다.또 지난 5년 사이 많으면 3백만, 적어도 1백만명 이상이
飢餓(기아)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 역사상 최악의 慘事(참사)이고, 전쟁이 북한에서 한번 더 일어난 것과 같은
피해입니다. 그런데도 남한의 지식인, 정치인들은 무관심한듯 합니다. 우리 국회가 온갖 청문회를 하면서도 탈북자 문제에 대해서는 청문회 한 번 한
적이 없습니다. 탈북자들이 큰 위험 없이 두만강을 넘고 있는 것을 보면 북한의 뒷문이 열린 것 아닌가 싶습니다. 북한 내에
기독교도 번져가는 양상입니다. 개방을 거부하면서 외국 원조로 식량문제 등을 해결하다 보니 대외 의존도도 높아가고 있습니다.
식량배급이 끊어지니까 주민들이 식량을 구하러 이동하게 되고, 당국도 이를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보도 많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북한은 붕괴의 과정, 또는 본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듯합니다. 정책의 변화가 아니라 밑바닥부터 바뀌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남한에서는 통일을 하더라도 가장 안전한 방향으로, 또 통일비용은 우리가 부담하지 않겠다는 쪽으로 통일론이 흘러가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이 통일의 결정적 기회라고 생각하는 견해와, 이 시기를 그냥 넘기자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21세기 남북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자유민주체제 발전이 평화통일의 첩경 南悳祐 북한의 현 상황은 공산독재
정권의 필연적 귀결이지요. 역사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자꾸 북한을 끌어내야 합니다. 開放(개방)쪽으로 유도를 해야지요. 외부에서 북한에
들어가고, 또 나오게 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도 돌발 사태가 없다고 가정할 수가 없어요. 북한이 미사일을 가지고 어떻게
한다는 식으로 나오니 이쪽에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충분히 대비하고 안보 태세에 조금도 허점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미국이나 일본이 북한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그 사람들이 접촉을 하게 되고, 접촉을 하면 바깥 세상을 알게 되고, 그러면 생각도 바뀌어 내부 개혁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姜英勳 4대 强國(강국)의 이해관계는 1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학회 등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우리
통일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현 상태로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金正日(김정일) 정권이
무너지더라도 과연 우리가 원하는 흡수통일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은 별도 문제입니다.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가 우리의 통일을 흔쾌히 지원할 것인지,
또 미국도 과거에는 대한민국의 정책 노선에 따라 지원하는 입장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4대 강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국제 상황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부적으로는 우리가 훌륭한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잘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평화통일의 첩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햇볕 정책을 쓰되 저 사람들이 무력 도발을 하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현재는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밖에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현정부는 對北(대북) 정책 3원칙 중 하나로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때문에 국민들 사이에는 적잖은 인식의 혼란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통일을 한다면 자유민주주의 방식의 통일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 정부의 최종 지향점이 과연 통일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대통령까지 나서 흡수통일을 하겠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흡수통일을 안 하겠다는 말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을 의식하다가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가
됐습니다. 北韓은 1990년부터 흡수통일 위기감 느껴 盧在鳳 흡수통일이라는 말을
남북 관계에서 처음 접한 것은 1990년, 청와대 비서실장 때였습니다. 그때 소련의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해 고르바초프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너희식대로 계속 가면 동유럽처럼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동유럽이 난리가 날 때였습니다. 평양과 세바르드나제간의
메모랜덤(비망록)은 서로 발표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가 평양을 떠나자말자 평양이 발표를 해버렸습니다. 거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우리는
흡수통일을 절대 반대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걸 보고, 아하, 저쪽이 상당히 위급한 상황이라고 인식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너희가
계속 고집을 피우면 남쪽으로 흡수시킬 수도 있다는, 소련의 메시지가 들어갔던 것이지요. 저도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전까지는 하나의
조선이니 해서 북쪽이 이쪽을 들이삼킬 기세였지 않습니까. 金大中 대통령이 흡수통일을 반대한다는 뉘앙스는 金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에서 본다면 평화공존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화공존이란 무엇이냐? 레닌이 이 말을 잠깐 쓴 적이 있고 흐루시초프가
사용했는데, 이는 현상 유지를 뜻합니다. 궁극적 목표는 다른 곳에 있지만 우선은 현상을 유지하자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평화공존이라고 해서
흡수통일을 안 한다고 할 때, 이것이 현상유지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현상유지도 평화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이는 분단의
長期化(장기화)라는 이야기도 됩니다. 南悳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북한의 개방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목표만은
뚜렷해야지요. 결국 체제의 통일이고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입니다. 이를 국가 원수가 드러내놓고 말을 못하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뭐를 안 한다고 해서 혼란이 온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는 것은 비슷해요. 盧在鳳 또 하나, 북한이 개방을 한다고
해서 통일이 될 것이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거 우리 나라에서도 경제가 발달하고, 소득이 증가하면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온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소련이 세계 2위의 강국으로 행세할 때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경제가 발달하고 소득이 높아지면서
사회가 다양화되면 통제하기 어렵다는 문제는 나오지만 그것이 바로 민주화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즉 하나의 조건은 되지만, 북한이 개방한다고 해서
통일로 간다고 단순하게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이란 궁극적으로 체제의 통일입니다. 소련도 스탈린이 죽고 나서 문화가 바뀌고 집단지배
통치로 바뀌고 했지만, 체제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바뀐 것은 내부 와해에 의해서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이냐? 통일은 결국
전쟁이냐, 내부 와해냐 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체제가 다른데 협상으로 통일되는 것이 아닙니다. 金日成(김일성)이 죽으면 북한이 바뀔 줄
알았지요? 그런데 뭐가 바뀌었어요? 사람만 바뀌었지, 체제는 안 바뀌었습니다. 내부 와해가 되면 국제적으로도 그걸 저지하기 굉장히 힘듭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국제적으로 난리가 날 상황이 되지요. 자유민주주의 체제통일임을 분명히 해야
이렇게 볼 때, 통일은 체제의 통일이 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우리 내부의 합의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 통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체제를 월등히 강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쪽의 체제 자체가 바뀌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저쪽에 金正日이 없어지면 체제가 무너질 것이냐? 나는 그렇게 낙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쪽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우리가 가는 방향은 오히려 저쪽 체제를 유지 또는 강화시켜 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가는 거지요. 姜英勳 일부 진보주의 입장의 사람들이 공산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제3의 사상-체제가
나와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지도층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우리는 어디까지나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평화적으로 통일이 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赤化혁명은 전쟁을 이야기하지만, 전쟁에서 직접 싸우지 않아도 남한이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이 소위
민족해방전술이요, 통일전술입니다. 자기들에게 동조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어서 어떤 단계에 가서 민주주의적으로 투표를 해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체제 통합은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것임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제3의 체제로 통일한다는 발상은 문제가 많습니다.
盧在鳳 과거 통일이라면 어떤 통일도 좋다는 풍조가 한때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현대사를 권력사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이쪽도 민주주의가 아닌데, 사람 사는 저쪽 동네도 大同小異(대동소이)하겠지, 그러면 이러나 저러나 그냥 통일이 되면 되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이 민주화를 하는 데 상당한 고초를 겪고 지금도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 있지만, 대한민국에 권위주의는 있었지만, 전체주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착각하고 있어요. 북쪽은 전체주의이지만,
한국에는 전체주의는 있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통일될 경우 우리가 어떤 삶의 방식을 가질 것인가라는 궁극적인 문제입니다.
사회 21세기 과제로 국제적인 페러다임은 정보화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고, 국내적인 페러다임은 정보화이면서도 동시에 민족
통일국가 건설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정보화 혁명이 전세계적으로 번지고 있고, 유럽은 脫민족국가화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추세인데, 우리
나라는 정보화가 상당히 진전되면서 동시에 통일 민족국가를 완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로서는 국가와 國益(국익), 국민 전체의
복지를 중심으로 하고 세계 시민 의식을 갖추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姜英勳 세계화라는 말들을 많이 하지만, 그 기초
요소는 어디까지나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정부가 들어서고 민족국가가 없어지는 것은 현재로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민족국가를 떠나
코스모폴리탄적인 것만으로 세계화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민족국가로서의 기틀을 튼튼히 해서 그 안에서 세계화에 합당한 정치문화를 배양해 가야
합니다. 그게 안되면 세계화에 우리가 기여할 수도 없습니다. 경제개발 때의 비장한 노력 다시 해야
南悳祐 세계화와 관련해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우리 나라 민족의식과 문화입니다. 한국같이 문화적으로 단일한 나라가
없을 거예요. 이것이 세계화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느냐? 세계화 되더라도 한 나라의 문화적 특징은 오히려 더 중시된다고 봐요. 우리의 여러 가지
문화적 특징들, 예를 들어 孝(효)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 한국적 특징이 있단 말예요. 이런 보편적 특징을 살려나가는 운동을 했으면 합니다.
盧在鳳 세계화라고 하는 것은 국가적인 단위에서 모든 것이 과거보다 훨씬 다양화돼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과거
계절마다 갈아 입던 옷을 이제 거의 매주 갈아 입을 수 있도록 다양하게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 입니다. 한국에서는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2대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없던 일이에요. 이 세대는 나면서부터 텔레비전과 자동차가 있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 보면 다음 발전을 위한 기본 조건들을 새롭게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 와 있습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朴대통령
시절에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발전시켰던 노력, 이것과 비등하거나 그 이상의 노력을 지금 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의 전환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만족 하다가는 큰일난다는 얘기죠. 과거에 우리가 산업 사회로 올 때 이상의 각오로 지금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걸 위해서 특히 지도층,정치 계층이 인식을 빨리 해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회 학식과
경륜을 겸비하신 세 분께서 장시간 좋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 독자들이 이 좌담을 통해서 과거를 돌아본 뒤 더 자신 있게, 그리고 정확하게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