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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눈에 비친 한국지도자들 - 5·16쿠데타 터지자 도망가고 계산하고 눈치보고…

이강기 2015. 9. 26. 16:13
5·16쿠데타 터지자
도망가고 계산하고 눈치보고…

 

 

 

【발굴】美국무부 비밀외교문서(1부)
미국눈에 비친 한국지도자들

 

 

 

【발굴기사】<<미국 국무부는 96년 9월하순, 케네디 대통령 시절 한국 중국 대만간의 외교관련 문서들을 모은 『미국의 외교 1961∼63 동북아』를 내놓았다. 여기에 실린 문건 가운데 상당수는 80년대 이후 비밀분류에서 해제된 것으로, 한국현대사의 획기적 전환점인 5·16쿠데타 전후에 벌어 진 급박한 상황을 미국의 시각으로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신동아」는 이 문건의 주요내용을 두 차례로 나누어 싣는다>>

 

    「과거는 미래의 전주곡」 「과거를 공부하라」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 북쪽 현관 좌우에 각각 서 있는 남녀 좌상 기단에 새겨진 이 두 구절은 고위관리들이 업무상 주고 받은 메모 하나도 미국 정부가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는 이유를 말해 주고 있다.

    지난 9월 하순 美 국무부는 케네디 대통령 시절 한국 중국 대만과의 외교와 관련된 각종 문서들을 한데 모은 『미국의 외교 1961∼63 동북아』를 내놓았다.

    국무부 역사과에서 현지 대사관과 본부사이에 오간 문서는 물론 장관이 대통령이나 관련부처 장관들과 주고 받은 메모나 서신까지 간추려서 친절하게 각주까지 달아 놓은 이 문서집은 8백23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여기에 실린 문건들 가운데 상당수는 80년대 이후 비밀분류에서 해제된 것들로 한국 현대사의 획기 적인 전환점인 5·16 쿠데타 전후에 벌어진 상황을 미국인의 눈으로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2백7 6쪽에 이르는 한국편의 첫장을 여는 순간 국립문서 보관소 현관에서 본 격언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면 위한 행정협정, 펜타곤 거부

 

    61년 3월 2일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보낸 서한은 주한미군의 지위를 다루는 협정 체결을 한국정부와 추진토록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러스크 장관은 이 서한에서 한국정부가 55년부터 제기해온 이 문제가 4·19혁명 이후 주요쟁점으로 부상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우리가 전세계의 많은 나라들과 주둔군 지위협정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 며, 자신의 주권적 지위도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들은 특히 우리가 유럽 동맹국들과 체결한 협정들과 동등한 형사관할권 협정을 포함 한 주둔병력 지위협정을 일본과 마무리지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민감하다.

    불가피하게, 많은 한국인들은 우리의 현재 입장을 공산 침략에 대항하는 공동 목적을 위해서 2차대 전 이후 어떤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은 피를 흘린 나라에 대한 일종의 차별로 간주하고 있다』

    러스크 장관은 이어서 한국인들이 볼 때, 주둔국 지위협정 타결이 민족주체성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장기적으로 보면 장면 정부와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가장 유리할 것이라 고 맥나마라 장관을 설득한다.

    『현정부는 온건하고 보수적이며 국민들의 합당한 기대에 부합하고자 노력중이다. 현재 한국정부는 우리가 앞으로의 발전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해온 인기 없는 일련의 경제개혁과 관련해서 무거운 압력 을 받고 있다.

    이런 정부를 주둔군 지위 문제를 제기하는 강력한 여론에 맞서도록 하고, 우리 정부를 광범위하고 중요한 계층의 한국인들의 비판에 노출시키는 것은 우리의 국익을 저버리는 처사가 될 것이다』

    러스크가 맥나마라에게 한국과의 주둔병력 협정체결을 촉구하기에 앞서 주한 미국대사관은 2월 하순 협정체결을 요구하는 한국민의 압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이 문제에 대한 협상을 개시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한국과 고위급 탐색회담을 가질 것을 세 차례에 걸친 전문보고를 통해서 건의했다.

    월터 매카나기 대사는 2월28일자 전문에서 카터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이 협정체결을 요구하는 한국여 론의 압력을 대사관에서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예비검토가 필요하다는 대사관의 건의에는 동의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한국과의 주둔군 협정을 체결하자는 국무장관의 협조요청에 대해 펜타곤 수뇌부는 협정의 필요성 자 체는 인정하면서도 형사관할권이 포함되는 데 대해선 강력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난색 을 표명했다.

    3월17일에 열린 국무부와 합참의 연석회의에서 합참의장 라이먼 렘니처 대장은 형사관할권이 협정에 포함되는 데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렘니처는 『한국에는 「전쟁이 중지된 상태」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 국민들은 한국 법정에 미군 장병들을 넘겨주느니 차라리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을 보고 싶어할 것』 이라고 말했다.

    렘니처의 발언은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지금도 미군 범죄자의 신병을 한국 사법당국에 넘겨주는 시 기를 놓고 두 나라가 팽팽히 맞선 가운데 한국정부와 국민들이 요구하는 행정협정 개정을 미국이 외면 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을 잘 설명해 준다.

    러스크 국무장관은 장면정부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 단호하고 건설적인 길을 택해 움직이면 훗날 한 국에서 보다 강한 민족주의 감정이 형성되는 시기에 들어설 후속 정권과 체결하는 것보다 미국에 보다 유리한 협정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국방부가 형사관할권 문제를 놓고 한국과 만족할 만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끝날때까지는 협상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장면 정권이 안고 있는 큰 부담 한 가지를 덜 어주려던 국무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장면정권이 뒤이어 등장할 후속정권의 성격이 보다 강력한 민족주의 색채를 띨 것으로 내다 본 러스크의 예측은 맥나마라에게 서신을 보낸 지 불과 3개월만에 현실로 나타난다.

 

장도영 5·16 새벽 미군투입 요청

 

    61년 5월16일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케네디 행정부의 수뇌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외국에 나가 있었다. 국빈 자격으로 캐나다를 방문중이던 케네디는 오타와에 체류하고 있었다.

    린든 존슨 부통령은 동남아 순방으로 방콕에 머물고 있었으며 러스크 국무장관은 라오 스 문제에 관한 제네바회의에 참석중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이 16일 오후 5시45분 합참의장 앞으로 띄운 전문 보고서를 백악관을 통해 전달받았다.

    이 전문 첫머리에 매그루더 장군은 16일 오전 3시경 한국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이 전화를 걸어 한국군 일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사실을 통지하면서 한국군 해병대에 대항 하기 위해 미군 헌병의 투입을 요청했지만 거절했다고 밝혔다.

    모두 15개항으로 된 이 전문에서 매그루더 장군은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혁명군이 김포 주둔 해병 제1여단을 선봉으로 한강다리에서 한국군 헌병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시내 로 진입했고, KBS라디오에서 오전 5시부터 혁명위원회 이름으로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했으며, 이날 오전 10시까지 혁명군이 서울 중심부의 대부분을 장악했다고 보고했다.

    전문에 따르면 매그루더 장군은 서울 중심부가 혁명군의 수중에 떨어졌다고 판단한 직 후인 오전 10시18분 직권으로 미8군 공보처로 하여금 모든 휘하 장병들에게 장면 총리가 이끄는 한 국의 합법정부를 지원할 것을 호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한국군 수뇌들이 정부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해 군의 질서가 유지될 것으로 예상했다.

    매그루더 장군과 거의 동시에 미국대사관 마샬 그린 공사(부대사 겸임)도 자유롭고 합 법적으로 수립된 한국 정부를 지지하는 유엔군사령관의 입장에 동의하며,미국이 60년 7월 한국 국민 들이 선출한 대한민국 합법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은 매그루더 성명을 읽고 정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면서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내리면, 싸우지 않을 부대가 일부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이 전투에 가담할 것 이라고 밝혔다.

    오전 10시30분경 장도영 중장은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 윤보선 대통령과 가택연금 상 태에 있는 현석호 국방장관을 방문했다. 대통령은 장총장에게 계엄령 선포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과 혁명 움직임을 제거하기 위한 어떤 확고한 조치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방장관은 1군 예하부대들이 혁명 진압에 사용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매그루더는 또 오전 11시15분경 (2군)사령관 최경묵(최경록의 오타) 중장이 자신에게 연락, 정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면서 대구를 장악한 2개 공병대대에 부대로 돌아가도록 호소해 철수시켰다고 밝혔다.<계속>




 

김종환기자<부산매일신문 워싱턴특파원>


신동아 1996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