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記事를 읽는 재미

외국인이 기록한 한말의 한국 야생동물 수난사

이강기 2015. 9. 26. 12:31

한반도 생태계연구 빌미로 사냥꾼 동원해 마구잡이 동물 남획 .

스텐베리만(Sten Bergman) 지음 '한국의 야생 동물'(In Korean Wilds and Villages, London, 1938).

 

중국의 고전인 '회남자'를 보면, 늘 새와 대화를 나누며 함께 노는 한 청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그가 새와 함께 놀다 왔다는 말 에 너무도 어이가 없던 아내가 그러면 자기와 함께 가서 새와 노는 장 면을 보여 달라고 했다. 이에 응낙한 그 젊은이가 바닷가로 나갔으나 그때는 새들이 오지 않았다. 새들은 이미 그의 마음에 순수함이 없음 을 알았기 때문에 몰려들지 않았으며 그 후 그는 아내로부터 더 많은 구박을 받았다고 한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것이 하나의 우화인 줄로만 알았다.

▲ 러시아 일급 사냥꾼 G 얀콥스키가 백두산 표범 두 마리를 매달아 놓고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내가 아끼는 후학인 김수일 군 (그 후 그는 위스콘신대학에서 조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교원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다)과 나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광릉으로 소위탐 조 여행을 다녀 온 후 나는 '회남자'에 등장하는 그 청년이 우화의 주 인공이 아니라 실존 인물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 박사는 각종 새의 목소리를 내어 새를 불러 나의 아이들과 함께 놀아 주었으며, '이 새 와 얘기를 나눠 보니 충청도에서 올라온 미조 같다'느니,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보며, '저 새는 암놈으로 지금 4살인데 시베리아로 가고 있 는 중'이라느니, 하는얘기를 들으며 그의 경지가 중국의 그 청년에 결 코 못지 않다고 생각하며 한없는 경이로움에 빠진 적이 있다.

워싱턴에서 공부할 당시인 1986년에, 'Korea라는 글자만 나오면 무 슨 고서이든지 나에게 연락해 달라'는 부탁을 해 놓은 고서점으로부터 한국 고서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고 허둥지둥 달려가 보니 그것은 역 사학도, 사회과학도 아닌 자연사, 즉 한국의 야생 동물에 관한 글이었 다. 우선 70장에 이르는 한국의 야생 동물의 사진과 민속 사진이 나를 놀라게 했다. 나의 전공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지만 이 책은 한국에 있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김수일 박사를 생각하며 월 800 달러의 국비장학금으로 쪼들리는 주머니를 털어 거금을 주고 이 책을 샀다.

▲ 함경도 인근 숲에서 스텐 베리만(왼쪽)과 발레리 얀콥스키(G 얀콥스키 아들)가 사냥한 멧돼지들
스웨덴과 한국은 역사적으로 인연이 없을 듯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 도 아니다. 1926년 10월에 고고학자이며 스웨덴의 왕자인 구스타프(Gustav) 부부(지금의 스웨덴 왕의 부왕)가 한국의 고고학에 관심을 가지고 내 한하여 경주의 고분을 발굴하고 그를 기념하여 이 무덤을 서봉총이라 명명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는 그 후에도 한국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던 차에 한국의 야생 동물을 수집하여 스웨덴 왕립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하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목적으로 선발된 사람이 바로 여기에 소개하는 "한국의 야 생 동물"의 저자인 슈텐 베리만이다. 캄차카와 쿠릴열도의 생태계 연 구학자로 이미 문명을 날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사냥꾼인그 가 스웨덴 자연사박물관의 진열을 위해 한국의 야생 동물을 잡으러 13 일에걸친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여행 끝에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35년 2월21일이었다. 그가 도착한 날 저녁에 당시의 조선 총독 우가키 가츠 시가 저녁 만찬을 베풀어 준 것을 보면 그의 지위가 어느 정도였던가 를 미루어 짐작할수 있으며, 일본의 대한 정책의 일면을 볼 수도 있 다. 그는 한국에 오면서 스웨덴의 일류 박제사인 쇼크비스트(Harald Sj qvist)를 데리고 왔다.

▲ 사냥에서 잡은 꿩을 메고 있는 한국인 인부
그는 서울에 1개월 동안 머물면서 도쿄를 통하여 필요한 장비를 구 입하고 함경도의 지리에 능숙한 일본인 사냥꾼 후지모토 겐지를 고용 하여 북쪽으로 떠났다. 그는 주을 온천에 캠프를 치고 함경도, 특히 백두산 일대의 사냥을 시작했다. 함경도에서 극동 러시아의 일급 사냥 꾼인 얀콥스키(G Jankovski)의 3부자와 일본의 사냥꾼인 요시무라를 다시 고용한다. 이들의 장비를 보면 말이 50필이었고, 백두산 일대의 마적들로부터 약탈당하지 않기 위해 관동군의 호위를 받으며 백두산 탐사와 사냥을 전개한다. 통신은 주로 전서구를 이용했다. 훌륭한 짐 승을 잡으면 쇼키비스트가 현지에서 박제를 한 후 즉시 본국으로 탁송 했다.

그들이 도대체 얼마나 잡아갔을까에 대해서는 통계가 없지만 이 책 에 수록된 사진을 보는 것이 백문이 불여일견(백문불여일견)이다. 이 들이잡은 짐승으로는 곰, 멧돼지, 영양, 꿩 등의 조류, 해조,스라소니, 날다람쥐, 갑각류, 어패류 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그가 본국 스웨 덴에 보낸 조류만 380종이었다니까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북부 지방에서의 사냥이 끝나자 지리산을 탐사했고 제주도에까 지 건너가 야생 동물을 포획했으며 신의주에 캠프를 차리고 압록강의 조류생태를 조사했다.

▲ 설날 색동옷 차림으로 대문앞에 선 어린이들
물론 이들이 생태계 조사 차원에서 야생동물들을 포획,수집한 측면 도 없진 않겠지만 한편으로 망국의 설움속에 살다간 백성들처럼 주인 잃은 이 땅의 동물들의 비애를 보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이들은 당시에 쉐볼레(Chevrolet)를 타고 21개월 동안 전국을 종횡 무진했다. 요시무라의 말을 빌리면 그는 한국에서 25년 동안 주로 꿩 을 사냥했는데 그가 잡은 꿩의 숫자는 대략 5만 마리 정도였고 하루에 가장 많이 잡은 것은 300마리 정도였다고 하니까 그 실력을 알만 하 다. 그들은 매사냥(해동청)을 시험해보기도 했으며, 주로 최신형 장총 을 이용했다. 멧돼지를 잡을 경우에는 150kg 이하는 '쓸모 없는 것'으 로 처리했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그러면 그들이 백두산 호랑이를 잡았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나도 이 점이 궁금했고, 필자인 베리만도 호랑이를 잡으려고 백두산 숲속을 헤맨 것이 두 차례나 되었다. 그러나 그는 끝 내 백두산 호랑이를 잡아가지는 못했다. 탐문을 해본 결과 백두산 호 랑이를 보았다는 사냥꾼은 가끔 있었지만, 잡지는 못한 것을 끝내 아 쉬워하며 그는 백두산을 내려온다. 그가 만난 사냥꾼들의 말에 의하면 이때 이미 호랑이는 멸종된 것 같다는 것이었다.

베리만은 나쁘게 말하면 밀엽꾼이었지만 스스로는 박물학자요 민속 학자라고 자칭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는 간간이 일제 치하 한국의 민속도 소개되고 있다.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민속의 핵심은 혼속과 장례이다. 우선 혼속에 대한 그의 글을 보면, 아기를 낳아 주 는 아내(씨받이)가 별도로 있다는 것과 그와 정실 부인의 사이가 매우 인간적이라는 것이 희한하게만 느껴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씨 받이의 시세는 대체로 일화 60∼70엔(원)이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한국의 남자들은 아내의 죽음을 그리 서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 할 수가 없다고 그는 고백한다. 한국의 남자들은 아내가 죽으면 마치 새 장가를 갈 수 있는 축복(?) 정도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는 동양 문화의 이해의 벽을 느끼고 있다.

▲ 1930년대 백두산의 야생동물들. 좌로부터 영양, 올빼미, 넙적부리 카나리아
서구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장례의 풍습은 우선 그것이 가세를 기울게 할만큼 낭비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 러나 베리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국의 장례 풍속 중에서 자식이 부모의 죽음에 대비하여 관을 미리 장만해 두는 것이 효도로 인식되고 있고, 당사자는 장롱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수의를 꺼내어 보면서 행 복감에 젖는다는 것을 베리만은 신기한 듯이 기록하고 있다. 부모의 상사를 미리 준비하는 것은 몽골리안계의 공통된 습속인데 아마도 북 구라파인인 그로서 그것을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는지 도 모른다. 한국인의 의식 속의 부모의 죽음은 헤어짐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수의나 관은 살아 생전의 효의 연장에 불과했을 따름인데 그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일제 시대나 그 당시에 빚어진 민족적 비극을 원료나 노동 력의 수탈 또는 민족적 자존심의 훼손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미 그 당시에 엄청난 생태계의 파괴가 이뤄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만 그것이 그 당시로서는 가시적이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본다면 그것 이 얼마나 끔찍스럽고 치명적인 착취였던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 다. ( 신복룡 건국대 정외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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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만(1895∼?)

1895년 10월 20일 스웨덴의 란세테르(Rans ter)에서 태어남 1914년, 스톡홀름에서 고등학교 졸업 스톡홀름 대학에서 1917년 학사, 1925년에 석·박사 사 학위 마침 1920년에 린드(Dagny Lindhe)와 결혼.

1920∼1923년, 캄차카를 탐사한 후 "캄차카에서의 3년간에 걸친 탐사 여행기"(1923), "캄차카를 가로지르는 개썰매를 타고서"(1924) 를 출판, 13개국어로 번역됨.

"극동 지역의 수천 개의 섬"(1931) 출판 1929∼1930년, 쿠릴열도(Kuril) 탐사 1935∼1936년, 한국의 야생 동물을 포획함.

"쿠릴열도의 새"(1931), "캄차카에로의 다람쥐의 이동"(1931), "멀리 떨어진 나라들로부터"(1934), "동북아시아의 조류에 대한 연 구 : 쿠릴열도의 조류의 생태·체계·분포"(1935), "유명한 탐험 여 행"(1939, 1941) 등의 저술을 남김.

수집한 동물학적 수집품을 스웨덴 국립자연사박물관에 기증 린네(Linne) 메달을 받음.


주간조선1999.06.10 /155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