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생태계연구 빌미로 사냥꾼 동원해 마구잡이 동물 남획 .스텐베리만(Sten Bergman) 지음 '한국의 야생 동물'(In Korean Wilds and Villages, London, 1938).
중국의 고전인 '회남자'를 보면, 늘 새와 대화를 나누며 함께 노는 한 청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그가 새와 함께 놀다 왔다는 말 에 너무도 어이가 없던 아내가 그러면 자기와 함께 가서 새와 노는 장 면을 보여 달라고 했다. 이에 응낙한 그 젊은이가 바닷가로 나갔으나 그때는 새들이 오지 않았다. 새들은 이미 그의 마음에 순수함이 없음 을 알았기 때문에 몰려들지 않았으며 그 후 그는 아내로부터 더 많은 구박을 받았다고 한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것이 하나의 우화인 줄로만 알았다.
워싱턴에서 공부할 당시인 1986년에, 'Korea라는 글자만 나오면 무 슨 고서이든지 나에게 연락해 달라'는 부탁을 해 놓은 고서점으로부터 한국 고서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고 허둥지둥 달려가 보니 그것은 역 사학도, 사회과학도 아닌 자연사, 즉 한국의 야생 동물에 관한 글이었 다. 우선 70장에 이르는 한국의 야생 동물의 사진과 민속 사진이 나를 놀라게 했다. 나의 전공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지만 이 책은 한국에 있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김수일 박사를 생각하며 월 800 달러의 국비장학금으로 쪼들리는 주머니를 털어 거금을 주고 이 책을 샀다.
그러한 목적으로 선발된 사람이 바로 여기에 소개하는 "한국의 야 생 동물"의 저자인 슈텐 베리만이다. 캄차카와 쿠릴열도의 생태계 연 구학자로 이미 문명을 날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사냥꾼인그 가 스웨덴 자연사박물관의 진열을 위해 한국의 야생 동물을 잡으러 13 일에걸친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여행 끝에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35년 2월21일이었다. 그가 도착한 날 저녁에 당시의 조선 총독 우가키 가츠 시가 저녁 만찬을 베풀어 준 것을 보면 그의 지위가 어느 정도였던가 를 미루어 짐작할수 있으며, 일본의 대한 정책의 일면을 볼 수도 있 다. 그는 한국에 오면서 스웨덴의 일류 박제사인 쇼크비스트(Harald Sj qvist)를 데리고 왔다.
그들이 도대체 얼마나 잡아갔을까에 대해서는 통계가 없지만 이 책 에 수록된 사진을 보는 것이 백문이 불여일견(백문불여일견)이다. 이 들이잡은 짐승으로는 곰, 멧돼지, 영양, 꿩 등의 조류, 해조,스라소니, 날다람쥐, 갑각류, 어패류 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그가 본국 스웨 덴에 보낸 조류만 380종이었다니까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북부 지방에서의 사냥이 끝나자 지리산을 탐사했고 제주도에까 지 건너가 야생 동물을 포획했으며 신의주에 캠프를 차리고 압록강의 조류생태를 조사했다.
이들은 당시에 쉐볼레(Chevrolet)를 타고 21개월 동안 전국을 종횡 무진했다. 요시무라의 말을 빌리면 그는 한국에서 25년 동안 주로 꿩 을 사냥했는데 그가 잡은 꿩의 숫자는 대략 5만 마리 정도였고 하루에 가장 많이 잡은 것은 300마리 정도였다고 하니까 그 실력을 알만 하 다. 그들은 매사냥(해동청)을 시험해보기도 했으며, 주로 최신형 장총 을 이용했다. 멧돼지를 잡을 경우에는 150kg 이하는 '쓸모 없는 것'으 로 처리했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그러면 그들이 백두산 호랑이를 잡았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나도 이 점이 궁금했고, 필자인 베리만도 호랑이를 잡으려고 백두산 숲속을 헤맨 것이 두 차례나 되었다. 그러나 그는 끝 내 백두산 호랑이를 잡아가지는 못했다. 탐문을 해본 결과 백두산 호 랑이를 보았다는 사냥꾼은 가끔 있었지만, 잡지는 못한 것을 끝내 아 쉬워하며 그는 백두산을 내려온다. 그가 만난 사냥꾼들의 말에 의하면 이때 이미 호랑이는 멸종된 것 같다는 것이었다. 베리만은 나쁘게 말하면 밀엽꾼이었지만 스스로는 박물학자요 민속 학자라고 자칭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는 간간이 일제 치하 한국의 민속도 소개되고 있다.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민속의 핵심은 혼속과 장례이다. 우선 혼속에 대한 그의 글을 보면, 아기를 낳아 주 는 아내(씨받이)가 별도로 있다는 것과 그와 정실 부인의 사이가 매우 인간적이라는 것이 희한하게만 느껴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씨 받이의 시세는 대체로 일화 60∼70엔(원)이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한국의 남자들은 아내의 죽음을 그리 서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 할 수가 없다고 그는 고백한다. 한국의 남자들은 아내가 죽으면 마치 새 장가를 갈 수 있는 축복(?) 정도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는 동양 문화의 이해의 벽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일제 시대나 그 당시에 빚어진 민족적 비극을 원료나 노동 력의 수탈 또는 민족적 자존심의 훼손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미 그 당시에 엄청난 생태계의 파괴가 이뤄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만 그것이 그 당시로서는 가시적이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본다면 그것 이 얼마나 끔찍스럽고 치명적인 착취였던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 다. ( 신복룡 건국대 정외과 교수 ).
1895년 10월 20일 스웨덴의 란세테르(Rans ter)에서 태어남 1914년, 스톡홀름에서 고등학교 졸업 스톡홀름 대학에서 1917년 학사, 1925년에 석·박사 사 학위 마침 1920년에 린드(Dagny Lindhe)와 결혼. 1920∼1923년, 캄차카를 탐사한 후 "캄차카에서의 3년간에 걸친 탐사 여행기"(1923), "캄차카를 가로지르는 개썰매를 타고서"(1924) 를 출판, 13개국어로 번역됨. "극동 지역의 수천 개의 섬"(1931) 출판 1929∼1930년, 쿠릴열도(Kuril) 탐사 1935∼1936년, 한국의 야생 동물을 포획함. "쿠릴열도의 새"(1931), "캄차카에로의 다람쥐의 이동"(1931), "멀리 떨어진 나라들로부터"(1934), "동북아시아의 조류에 대한 연 구 : 쿠릴열도의 조류의 생태·체계·분포"(1935), "유명한 탐험 여 행"(1939, 1941) 등의 저술을 남김. 수집한 동물학적 수집품을 스웨덴 국립자연사박물관에 기증 린네(Linne) 메달을 받음. | ||||||||||
주간조선1999.06.10 /155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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