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1호 | |||
호수 | 제1호 | |||
발행년월일 | 1929-06-12 | |||
기사제목 | 자서전 | |||
필자 | 洪命熹 | |||
기사형태 | 회고·수기 | |||
緖言 나는 자서전을 지을 만한 자부심이 업는 사람이다. 엇지하야 자부심이 업시 자서전을 짓게 되엇는가? 대답으로 한가지 약점을 자백할 것이 잇다. 나는 고집을 세우지 못하는 약점을 가젓다. 어릴 때악지는 말하지 말고라도 20시절까지 좀처럼 남에게 지지 아니하든 내가 어느틈에 이 약점을 가지게 되엿는가? 고집을 악덕으로 깨달어서 수양한 결과인가하면 그러치도 아니하다. 내가 世變을 격게 된 뒤로 不知不識間에 성질이 변화되어 紛競心이 줄어지고 自信力이 적어저서 이 약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이 약점을 교정하랴고 다소 의식적 노력을 더하건만 20여년의 구든 버릇이 좀처럼 고처지지 아니하야 나날이 크고 적은 損을 보고 지내는 중이다. 巴人이 자서전을 쓰라고 꽤일 때에 나는 謝絶하얏다. 巴人은 根氣잇는 사람이라 내노흔 말을 거더치우지 아니하고 나를 성가시게 한다는 이보담 자긔가 성가시신 것을 참고 꽤인 뒤에 졸르고 졸른 뒤에 욱이어서 나는 마침내 사절할 용기를 닐코 자서전명색을 짓겟다고 승낙 하얏다. 구경 말하자면 나의 가진 약점이 나에게 損을 끼친 것이다. 損은 무슨 損인가? 『툴게니에프』의 발견한 處世秘術이 나의 약점을 숨기고 그 약점으로 남을 공격하는 것인데 이만 약점이라도 자백하게 되는 것부터 나에게 損이 아니고 무엇일가? 이것은 실업슨 말이다. 이왕 승낙한 바에 자서전을 엇더케 지을가? 고심초사 하느라고 정력과 시간을 함께 낭비하얏다. 룻소의 「懺悔錄」을 본바더 과거를 적나나하게 고백할가? 최후심판에 登據書類로 제공할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안는 일이지만 풋소의 적나나도 철저하지 못하다거니 룻소만한 결심도 업는 위인이 섯부리 붓질하다가는 남의 우슴거리만 될 뿐이고 늬이체의 「에츠 호모」를 흉내내어 철인적 氣?을 토할가? 알푸스 高峯에서 高峰으로 뛰엄질 할 주제가 아니니 황씨 뱀씨의 實例 하나를 더할 뿐이다. 나는 크로포트킨의 「혁명가의 지난 생각」을 보왓고 트로츠키의 「脫走記」를 보왓고 片山의 「자서전」을 보왓고 또 堺大杉 등 인물의 「자서전」이 잇다는 말을 들엇다. 듯고 본 것을 생각할수록 자서전과 밋 종류의 문자는 평범한 인물의 지을 것이 아니거니 하는 생각이 압흘서서 자서전을 지을 용기가 업서젓다. 사절할 용기가 업서 짓기로 하고 지을 용기가 업서 짓지 못하고 헛도이 시일만 延拖 하노라니 곤경이다. 할 수 업시 woud-be라고 형용사부터 부처노코 자서전을 짓기 시작한다. 오늘날 나의 몸이 40여년간 지나오는 길에 數多한 解皮를 머물럿스니 그 解皮들 중에 크게 보이는 것만을 주서 보랴고 한다. 解皮에 김을 너흐면 稚氣잇는 자랑이 나올 것이고 解皮에 채질을 더하면 엄폐한 수치가 들어 날 것이다만 초센남작의 바람을 쫏고자 하지 아니하니 헛김을 너허서 남의 우슴을 살리 업고 또리안, 그레이의 화상을 칼질하랴 아니하니 채질을 혹독히 하야 나의 고통을 더할 리 업슬 터이다. 그리한 즉 명색 자서전은 解皮를 주섯다 노핫다 하며 졸렬한 그림가티 그리는데 지나지 못할 것이니 졸렬한 중에 더욱 더 졸렬하게 될 것은 巴人에게 손목을 잡히고 그리는 까닭이다. 유소년시대 내가 세상에 난 뒤 세 살 되든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고 증조부가 돌아가고 여섯 살 되든 해에 할머니가 돌아갓다. 네 살에 새어머니가 생기엇스나〈10〉 나는 증조모와 대고모 손에서 자라낫다. 조모를 아래ㅅ방 할머니라고 불르고 증조모를 안방할머니라고 불럿는데 훨신자란 뒤에 증조모가 안방을 내노코 대방으로 옴기게 되어서 안방할머니란 칭호를 대방할머니라고 고치엇다. 그러나 그 때는 조모가 돌아간 뒤라 거처하는 방으로 할머니를 구별할 필요가 업섯든 까닭에 그저 할머니라고 불르기를 만히 하얏다. 대고모는 꼬까어머니라고 불럿스니 이 칭호는 내가 세 살인가 네 살 때에 대고모가 그 며누리 신부례ㅅ날 새 옷 닙은 것을 보고 꼬까옷 닙엇다고 지어낸 것이라고 한다. 그 뒤로 꼬까어머니 외에 대고모부를 꼬까아버지라고 불를 뿐 아니라 그 아들내외까지 꼬까아저씨 꼬까아주머니라고 불럿섯다. 꼬까어머니에게 가서 놀고 혹 자기도 하기는 륙칠세된 뒤에 일이지만 그 전에는 안방할머니 압흘 떠나지 아니하얏다. 나는 몰랏지만 나종에 말을 들으니 그 때 증조모가 어미업는 증손자를 길르느라고 애쓴 것은 이로다 말할 수가 업섯다. 젓 어더 먹이는 것만도 여간 일이 아니엇는데 어린 내가 몸이 약하고 병이 자저서 밤잠을 편히 잔날이 드물엇다. 증조모가 만년까지도 잠이 들 때는 항상 보기에도 거북하게 고개를 뒤로 저치는데 이것이 어린 나를 압헤 누이고 잘 때 입김이 혹시 얼골에 끼칠가하야 고개를 뒤로 저치기 시작한 것이 인해 버릇이 된 것이엇다. 우의 아버지로부터 아래 우리 여러 형제가 모다 할머니 손때로 자라낫건마는 내가 편벽되게 망극한 은혜를 닙은 것은 나의 처지가 그러케한 것이다 동경유학 당시의 홍명희(右) 〈10-12〉 二. 留學 나의 고향은 충청도 괴산이니 峽中에 잇는 적은 고을이다. 량반이 더러 살지마는 宰相家로는 우리집 한 집 뿐이엇다. 내가 우물 안 고기로 잘아날 때 괴산 외에 더 조흔 곳이 업고 우리집 외에 더 조흔 집이 업는 줄로 알엇든 것이 나히가 만하지고 문견이 늘어갈수록 괴산과 우리 집이 차차로 전만 못하야서 서울서 학교를 마치고 나려온 때 쯤은 우리집도 우리집이거니와 뎨일로 괴산이 갑갑하얏다. 낫잠으로 날을 보내게 되니, 우리 아버지가 보기 답답하든지 노느니 四傳春秋나 읽으라고 나를 달래어서 선뜻 시작하얏다가 50 여권을 졸업하느라고 나종에는 春秋에 진저리가 낫섯다. 이때 우리 동리에 양잠의 리익을 일즉이 께달은 사람이 잇서서 일본사람 내외를 양잠교사로 다려 왓섯다. 서울서도 일본사람 구경하랴면, 진고개를 가야만 하든 때라 괴산가튼 시골 구석에서는 이 일본사람 내외가 녀편네와 아희들의 구경거리가 될 만큼 희귀한 손이엇다. 우리 아버지가 나의 일본말 공뎡을 시험하야 보랴고 그 내외를 불러다 노코 딸어 단니는 롱사를 제치고 인사하라고 말슴하얏다. 내가 日語科의 졸업생 명색이지만, 이때까지 별로 일본사람과 대화해 본 일이 업는 까닭에 일본말로 초면인사는 처옴일이엇다. 배운 문서가 잇서서 초면이면 말한다고 「하지메데 오멘니 가가리마스」하고 다음에 성함이 누구시요 뭇는다고 「꼬세이메이와 난또 모오시마스까.」하얏더니 녀편네는 무어라고 종알종알하며 절하는데, 사나이는 말이 업시 웃기만 하얏다. 나는 아버지 압히라 서서 잇고 그 내외는 꿀어 안젓섯다. 그 뒤에 그 녀편네에게 초면 인사하는 법을 배우다가 이때 광경을 말하며 서로 우슨 일까지 잇섯다. 그 일본사람 내외가 양잠일을 마치고 가게 되엿슬 때 아버지에게 말슴하고 집에 다려다 두고 일어를 련습하얏더니 불과 몃달이 아니 지나서 3년 배운 결과가 나타나서, 일어로 어지간한 말은 서로 통하게 되엇다. 내가 시골 구석에서 잘앗지만, 어려서부터 어림풋이라도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엇섯스니, 이것은 리마두의 坤興全圖屛風의 덕이엇다. 「조그만 뎜이 倭國이다」 「큰덩이가 中原이다」하고 붓작란으로 屛風에 먹칠할 때 우리 조선 이외에 여러 나라이 잇는 것을 알엇섯고 증조모에게 泗溟堂이야기를 듯고 일가어른의 著作이라고 海東 名將傳을 건정으로나마 닑엇슬 때 倭國이 우리 조선의 이웃나라인 것을 알엇섯다. 이와가티 어렷슬 ?부터 알게 된 일본이요, ? 우연히 일어까지 배우게 되엇지마는 일본은 가보고 십흔 맘이 별로 업섯섯는데, 일본사람 내외 가티 지나게 된 뒤로 동경이 공부하기 조타는 말을 귀에 젓게 들어서 갑갑한 괴산에 업드려 잇는니 동경에 가서 공부나 할가하는 생각이 나기 시작하얏다. 마침 얼마 뒤에 그 일본사람이 양잠한 고치를 일본으로 팔러 간다고 하야 딸하갈 생각이 잇섯는데 공부를 간다면 아버지부터 선선히 허락할른지 몰으겟고 구경 갓다온다면 증조모까지도 구태어 말리지 아니할 것 가타서 구경간다고 거짓말하고 동경에 가서 떨어저 잇서 보랴고 속으로 작뎡하고 일본사람에게만 미리 이 뜻을 통하야 두엇다. 나따는 층층시하에 허락맛기가 어려워서 꾀를 쓰랴고 하얏든 것인데, 우리 아버지가 잠간 구경만 하고 오느니 몃해 동안 공부를 해보라고 말슴하고 시골잇서서 증조모의 허락도 아버지가 마터 주고 서울와서 조부의 허락도 아버지가 마터 주엇다. 그리하야 나는 동경 류학길을 떠나게 되엇섯다. 그때가 日露戰爭 끗나든 때라. 外部는 업서젓지마는 議政府總務局에 外事課인지 무엇이 잇서서 護照 卽 旅行券을 주엇섯다. 그때쯤도 日本가는 것은 서양 가는 것과 달러서 護照업서도 조타고 하는 것을 매사 불여튼튼을 주장하는 조부가 護照까지 어더 주어서 백 가지에 한가지 거침될 것이 업섯다. 나는 동행하는 일본사람의 지도를 조차서 부산서 大阪가는 輪船을 탓다. 玄海灘을 건너고 瀨戶內海를 지나서 大阪에 와서 下陸하야 3,4일간 逗留하고 그 다음에 바로 東京으로 왓섯다. 처음에는 新橋驛前 어느 여관에 들어서 몃칠 묵는 동안에 여관주인의 아들이 消日거리로 묵은 雜誌卷을 갓다 주어서〈26〉 短篇小說-그때는 그것을 短篇小說이라고 하는 줄도 몰랏지만을 몃편 보왓는데 이때까지 보든 漢文小說과 달러서 머리와 끗이 업는 것이 조금 맘에 서운하얏지만 짤은 이야니로 상당히 자미잇섯다. 新橋驛 여관에서 비용이 太過하야 本鄕區에 잇는 어느 여관겸 하숙으로 옴기어 와서 이 집에서 반 년 넘하 잇섯고 그 뒤로는 몃 동무와 가티 집을 어더가지고 지내엇다. 동행한 일본사람이 玄海를 건너온 뒤로 전에 업든 「기미」니 「고오꿍」이니 하는 홀한 언사를 써서 비위가 상하는 데다가 輪船에서나 여관에서나 누구든지 붓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한국이 엇더하다. 한국사람이 엇더하다. 우리의 잇는 흉 업는 흉을 늘어노흐니 엽헤서 듯기 괴란한 때가 만하서 그 사람과 단둘이 잇슬 때 낫을 불켜가며 말다톰한 일도 한두번이 아니엇다. 주위를 돌아보고 외로운 생각이 날 때에 고국을 그리는 정이 간절하지 안흘 수 업섯다. 本鄕下宿에 옴겨온 뒤에 이집에 당신과 가튼 한국사람들이 하숙하고 잇다는 말을 하녀에게서 듯고 눈물겨웁 도록 반가웟다. 그때 처옴으로 만난 고국사람이 湖巖 文一平군이요, 文군 다음에 만난 친구가 春園 李光洙군이다. 李군은 그때 일음이 寶鏡인데 14, 5세의 소년이엇다. 그 뒤에 차차로 고국사람들을 만히 만나게 되어 공부하는 이야기를 물어본 즉 대개 明治의 法科나 旱稻田의 政經科를 단니라고 권하는 사람이 만핫다. 그러나 나는 速成하랴고 애쓸 필요가 업슴으로 中學校부터 칠어 올라가랴고 작뎡하고, 中學校에 입학할 준비를 시작하얏다. 東京 안 허다한 中學校 중에 大成中學校를 취하게 되기는 달은 까닭이 업지 안헛지만 대개 下宿주인이 大成經營者와 同鄕關係가 잇서서 학생을 소개할 수 잇다고 말한 까닭이엇다. 내가 日本에 가 햇수로 5년 공부하는 동인에 힘지게 교과서를 공부한 일이 잇다고 하면 中學校 3年級 補缺入學을 준비할 동안이 뎨일이 되고 3年級에 입학한 뒤 1학기동안이 그 다음이 될 것이다. 준비할 동안에는 大成經營者가 경영하는 東洋商業學校 豫科를 단니면서 數學講習所, 英語講習所를 단니고 또 틈틈이 ?物植物의 개인교수를 바도러 단니엇스니 실상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교과서에 몰두하얏고, 3年級 1學期 동안에는 학교가 무서워서 교과서를 열심으로 복습하얏다. 3年 2學期末休暇 동안에 우연히 古書店에 들어가서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가 順禮紀行 何處에 (正宗白鳥의 作品) 靑果集 등 3책을 골라 산 일이 잇스니, 서점주인이 신간이라고 가르처 주는 것 중에서 書名이 맘에 드는 것을 골른 것이다. 이 3권 책이 연줄이 되어 되지 못한 흔책이 모이기 시작하얏는데 내가 書籍 選擇에 다소 안목이 생기기까지는 표지의 意匠 제목의 字體와 가튼 것도 일종의 遊?擇標準이 되엇섯다. 이 버릇이 나종까지 남아서 내용이 한번 볼만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표지가 맘에 들지 아니햐야 보지 안코 말은 책이 업지 아니하얏다. 이 책 저 책 보는 동안에 나의 독서방법에는 一種 집착이 생기어서 보기 시작한 책은 끗까지 보고야 말엇고 중간 질려보아 관계업는 책이라도 첫머리부터 시작한 후 결코 중간올 꺼들치어 보지 아니하얏고 책 한권을 보기 시작한 뒤에는 그 책을 마치기까지 달은 책을 시작하지 아니 하얏다. 이 까닭에 자미잇는 책은 자미잇다고 한숨에 내처보고 자미업는 책은 얼른 자미잇는 것을 시작한다고 모리 악쓰고 빨리 보앗다. 특별한 사고가 업는 한에는 한 권 책을 대개 하루나 이틀에 끗내고 3, 4일식 걸린 것이 도리여 적엇섯다. 밤을 깨우고 낫잠을 잔다고 또는 뒤ㅅ간이 길다고 한집에 잇든 친구들이 조명을 지엇스나, 이 두가가 다 독서에 필요한 수단이엇다. 밤은 방해가 업는 까닭에 자미잇는 소설을 단번에 읽기 조코 뒤ㅅ간은 방해군을 피하기 가장 쉬운 곳이다. 李大容군〈27〉 李海忠군, 河熙源군과 한집에 잇슬 때에 李大容군과 한방을 쓴 일이 잇섯다. 어느날 나제루듼의 번역인 浮草를 사다 두엇다가 저녁에 첫머리 몃 페이지를 넘기엇슬 때 당시 유학생계의 쟁쟁한 인물 몃 사람이 李군을 차자와서 나도 그 사람들을 아는 관계상 독서를 중지하지 안흘 수 업섯다. 책이 보고 십허 좀이 쑤시는 판인데 그 인물들의 氣?競爭은 끄칠 줄을 몰랏다. 주인측 李군이 端雅한 사람인 만큼 俯首謹聽하는 까닭에 기염의 도수가 올르고 나리지 아니 하얏다. 그 사람들 보담도 李군이 미웟다. 참다참다 못하야 한 손에 洋燈을 들고 한 손에 浮草를 들고 뒤ㅅ간오로 들어 가서 조금조금하다가 浮草 한 권을 다 마치고 한참동안 오곰이부터 고생하다가 나와서 본죽 氣?人物들은 다 돌아가고 李군이 자리깔고 누어서 前無後無한 굉장한 뒤라고 조롱하얏섯다. 나의 독서가 亂讀, 濫讀이라 종이 업섯지마는 대개는 文藝書類이고 그때의 日本文壇이 自然主義文藝 全盛時期라 文藝書類에도 대개는 自然主義작품이엇다. 그 결과는 肉的 思想中毒과 신경쇠약 뿐이라고 말할 수 잇섯다. 대개 내가 처음에 작뎡한대로 공부하지 못한 것은 달은 큰 원인이 잇지마는 졸업시험을 치르지 아니하랴고 5年 2學期末에 中學校를 고만둔 것은 신경쇠약이 유일한 원인이엇다. 학교교과서를 존중하지 아니하기는 3年級 2, 3學期 때부터 시작한 일이지만 文藝書類를 耽讀할수록 교과서를 경멸하는 정도가 심하야서 그날그날 課程冊을 보에 싸느라고 손에 대일 뿐이엇섯다. 처음에는 교과서 보지 안흘 뿐이엇지 학교에는 매일 출석하든 것이 밤잠을 잘 못자게 된 뒤로는 결석이 만하저서 출석 부정확한 자 퇴학시긴다는 교칙이 잇다고 生徒監에게 威?바든 일까지 잇섯다. 학교 공부는 이와 가티 불성실하얏지만 每學期 또는 每學年 시험성적은 번번히 조핫섯다. 소위 시험공부로 몃칠 동안만 애를 쓰면 이런 성적이 기적적으로 나타낫섯다. 나는 나의 시험성적을 기적적이라고 말한다. 고국에 잇서서 中橋義塾에 단닐 때 입학하든 해 첫 학기 시험에 둘재가 되엇슬 뿐이지 만 3년간 첫재 자리를 내노흔 일이 업섯고 일본에 가서 東洋商業 豫科 2年生 補缺試驗과 大成中學 3年生 補缺試驗으로부터 5년간 學期 學年 모든 시험에 첫재 아니면 둘재로 자리의 변동이 거의 업다십히 지낫는데 사실 성적이 절등하야 이러하야 이러하얏는가 하늩? 그러치 아니하다. 몃몃번 시험 이외에는 성적이 대개 중 이상 밧게 되지 아니하되 석차는 항상 이러케 조핫섯다. 시험장에서 한번도 강적을 만나지 아니한 것도 기적적이라고 말할 수 잇거니와 나의 성적이 조치 못할 때 동급생의 성적이 일개로 나보다 더 조치 못하고 동급생의 성적이 조흘 때 나의 성적이 우월하야지는 것은 확실히 기적적이라고 말할 수 잇섯다. 大成 4年級 學年試驗에 제1위 석차로 나를 壓頭한 關沼某는 지금 醫學博로 상당히 명성이 잇다 하나 염염치 못한 그 사람이 시험장에서 나의 적수되기는 사실 좀 부족하얏섯다. 기적적이란 말을 증명하기 위하야 우수운 예를 들어보일 것 이 잇다. 東洋商業 豫科 2年에 補缺入學할 때의 일이 엇다. 補缺試驗에 역사는 十字軍의 原因 及 結果와 孔子의 ?傳과 두 문제이엇는데 十字軍은 정직하게 「와까리마센」이라고 하야 노코 孔子는 「魯昌平鄕人云云」이라고 아는대로 젹엇스니 한 문제는 불완전하게나마 한 셈이고, 地理는 韓國 13道 首府와 支那 東海岸 重要都市 10개를 열거하라는 두 문제이엇는데, 13道 首府는 나를 살리는 문제라 말할 것이 업고 支那都市는 上海밧게 들은 것이 업서서 10분1로 塞責하얏스니 한 문제는 완전하게 한 셈이고, 博物은 十字科植物花의 부분을 도형으로 설명하라는 것과 棘皮動物의 특징을 열거하라는 두 문제이엇는데 식물은 개인교수의 덕으로 無事通過하얏스나 동물은 배우지 못한 것이라 또 청직하게 「와까리마센」으로 센을 닥고 닐어서랴고 한 즉 돌아다니며 감시하든 선생이 특징을 몰으거든 예라도 들라고 친체히 말하야 선생의 말을 존중히 하느라고 다시 안기는 안젓스나 海蔘가튼 알기 쉬운 예를 들 주제가 되지 못하야서 고숨 도치가 棘皮라고 「하리네쓰미」를 예로 적엇스니 역시 한 문제를 겨우 한 셈이다. 수학, 영어, 국어, 한문 여러가지 중에 한문 한 가지는 비교적 좀 나핫슬 것이나 답안이 대개는 다 충분치 못하얏다. 그러나 성적발표에 나의 일음이 1번에 올랏섯스니 당시 수험자가 나까지 합하야 두 사람인데 그 한 사람이 나만도 못하얏든 모양이다. 운명론자가트면 1번 될 운명을 타고 낫다고 설명할 일이 아니랴? 교사가 사정을 두엇거나 경쟁자가 실력이 부치엇거나 나의 알지 못하는 이유로 구태어 설명할 것이 업는 일이고 당시당시 의외의 조흔 성적에 놀라든 것을 표시하랴면, 기적적이란 말을 借用하지 안흘 수 업다. 시험성적이 항상 기적적이 결과로 才子秀才이니 칭찬을 밧게 되엇스니 그 칭찬은 멸시당하는 것과 가튼 불쾌한 감정을 닐으키는 칭찬이라 칭찬하는 것이 고맙지 못하얏다.〈28〉 고맙지 못한 칭찬도 칭찬이려니와 학교에서는 다소의 증오를 밧지 안흘 수 업섯다. 못난니 영어선생 한 분이 敎授時間에 너의들이 저 한국인만 못하다는 것은 일본 남자의 수치라고 學生勉學 한답시고 나의 대한 증오심을 격동시긴 일이 잇섯고 올곳지 못한 지리역사주임선생이 아무개는 한국의 總理大臣감이라고 한국을 경멸하는 口氣로 말한 일이 잇서서 가튼 학생 중의 증오심이 풍부한 자는 나를 모욕하랴는 의사로 「總理」라고 별명지어 불으기?지 되엇섯다. 성적조흔 것이 나에게는 一種 고통의 種子라 조키를 바라지 안케 되엿건만 부모의 맘을 위로할 것으로 보더라도 낙제는 면하요야 한다고 생각한 까닭에 시험공부만은 廢할 수가 업섯다. 평균 70, 80에도 석차가 첫재 둘재가 되엇슨 즉 동급생의 低劣은 덥허줄 수가 업는 일이엇다. 苦의 반면에 樂이 잇다. 고통의 種子인 성적이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도치엇다. 3년에서 1번으로 4년에 昇級하얏슬 때 萬朝報에서 각 학교 우등생을 소개하는 틈에 나의 사진이 게재되엇섯다. 大成經營者가 호들갑스럽게 나를 칭찬한 것 가텃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泰仁郡守로 잇섯는데 아버지의 편지를 보니 萬朝報 독자인 일본인 巡査가 4號제목의 적은 기사를 발견하고 아버지깨 보이어 드린 모양이엇다. 우리 아버지가 신문의 흐린 사진이나마 보고보고 조하하야 나종에 자세한 편지와 가티 자기의 사진 한 장을 보내 주엇섯다. 이것은 나의 종생 니치지 아니할 자랑의 하나이다. (次號繼續)〈29〉 〈26-29〉(未完) |
'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人生의 香氣 - 春園의 회고수기 (0) | 2015.09.27 |
---|---|
나는 웨 僧이 되엇나? - 韓龍雲 (0) | 2015.09.27 |
人生은 아름다운가 - 金晋燮 (0) | 2015.09.15 |
苦惱의 一夜, 나의 日記의 한토막 - 朴英熙 (0) | 2015.09.15 |
成造記(感想) - 春園 (0) | 2015.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