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李光洙氏와 交談錄

이강기 2015. 9. 27. 17:04
잡지명 삼천리 제5권 제9호
호수 제5권 제9호
발행년월일 1933-09-01
기사제목 李光洙氏와 交談錄
필자
기사형태 대담·좌담

1. 東亞에서 朝鮮으로
기자 「오늘(8월 28일) 세상에 전하는 소식을 듯건대 창간 이래 16년 동안을 休戚을 가치하여 오든 東亞日報를 그만두시고 朝鮮日報 副社長으로 취임하신다 하니 轉變은 人生社會의 常事겟지만, 돌연히 그리하심에는 무삼 이유가 잇섯슴니까.
李 「글세요, 지금도 東亞日報社에 와서 과거의 신문 장을 뒤저보고 잇는 중인데 어느 날 신문에나 내 쓴 글이 아니 실닌 날이 거지 반 업소이다 그러. 참 今昔의 感이 잇다고 할는지 감개무량하다고 할는지요, 정으로는 東亞를 참아 못 떠나겟지만. 도리켜 생각하면 東亞는 柱礎도 잡히고, 완성하여가는 도중에 잇는 公器니까, 나의 조고마한 힘이 아니라도 넉넉이하여 나갈 줄 아나 朝鮮은 아직 창업 초에 잇서 힘과 정성을 다할 곳일 것 갓하여 가기로 하엿슴니다, 더구나 사장
方應謨氏라거나, 편집국장 朱耀翰君 그밧게 여러 동지의 관계로 보아 朝鮮으로 아니갈 수 업서 그리한 것임니다.
記 「東亞에서 16년을 늙고, 또 朝鮮가서 한 십년 늙게 되면 신문사 속에서 일생을 다 업새버림니다 그려, 어듸 이제는 實際運動에 투신하실 생각은 업슴니까, 신문사 일도 중요하기야 하지만도-.
李 「건강이 허락한다면, 그러나 이러케 늘 알코 잇스니 마음뿐이지요.」

2. 孤兒되든 이야기
記者 「화제를 돌니겟슴니다, 어릴 때 고아되든 말슴을 하여주세요.」
李 「그것이 내가 열한 살 되든 해 8월이지요. 한 열흘 좌우 두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急病으로 도라가섯서요, 그때 자녀라고는 나와 내 누이동생 그리고 젓먹이 어린애와- 그래서 나는 全州 李氏家門의 장손이지만 부모를 묘소에 모신 뒤 도라와서 곳 사당에 불을 노아 홍패장도 文籍도 位牌도 다 태워 버렷지요. 어린 생각에 이제는 부모도 다 도라가섯스니 고향을 떠나버리자, 자식들이 떠나가면 누가 잇서 부모 제사 드리랴, 일즉 생전에 積德도 못하여, 동리 사람들이 봉제사 하여 줄 이도 업스니, 에익 다 업새여 버린다고 태워 버렷지요. 그리고 또 이러한 생각도 하엿서요, 이제는 科擧制度도 업서저서 神主를 위하여 家名도 날니지 못할 터바에 사당은 작고 두어 무얼하는가고-
그러고는 우리 조부가 小室을 하여 가지고 사시는데 그리로 가 잇섯지요, 그러나 역시 마음이 붓지 안코 압날이 각갑하여 서울 갈 생각을 품고 조부압헤 가서〈58〉
서울 가겟슴니다.
서울 가서는 무얼하겟느냐.
요새 무슨 일이 잇다하니 가서 공부도 하고 지내겟슴니다.
이래서 그날 밤에 고향를 떠나 진남포를 거처 仁川 지나 서울로 올너왓지요, 그때 路需는 도라가신 어머니가 내가 장가들 때에 주신다고 세목 두 필, 명주 세 필, 언목 한 필을 두고 간 것이 잇섯는데 그것을 내어다가 팔엇지요, 일흔 냥에 즉 7원을 밧엇지요, 이것이 내가 밧은 부모의 유산 전부여요.
우리 집은 원래 내가 다섯 살 되기까지는 잘 사랏스나, 점점 家運이 기우러저서 그 뒤에는 훨신 가난하게 생장하엿서요, 어릴 때에 긔와집에서 초가집으로, 큰집에서 오막사리로 세 번채나 이사하든 기억이 지금 남니다, 그래서 나는 7, 8세 때부터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신도 삼엇지요.
記 「그런데, 그 누이동생들은 지금 다 어듸 갓서요.」
李 「어린애는 죽고, 내 누이동생은 滿洲營口땅으로 시집가서 살지요, 몃해 전에 고향이라고 차저가니 집은 다 헐니어 형체도 업더군요, 다만 우리 遠近親戚되는 全州 李氏만이 만히 살고 잇섯지만, 고향은 定州邑에서도 남방으로 약 40리 드러가는 산골에 잇담니다.
記 「그러면 소년시절에 고아되기 전후하야 나무하고 신 삼고 그러고는 또 딴 일은?」
李 「장사를 하여보앗지요, 그때 「히-로-」라는 卷煙草가 잇섯슴니다, 동리사람이 돈 3원을 불상하다고 주길내 그것을 미천 삼어가지고 이 「담배장사」를 하엿담니다, 그것이 한 곽에 2원 40錢을 주고 사서는 등에 질머지고 도라다니며 한 통 한 통 다 팔고 나면 한 1원 이익이 나뭐요, 그것도 담배를 가튼 定州邑에서 사오면 利가 薄하여지니까, 새벽 일즉이 동트기와 가치 조반을 하여먹고 미천 돈을 꾸리어 가지고는 平壤으로 나려 감니다, 그래서 늘 평양서 한 곽씩 사서 질머지고는 다시 定州로 가서 팔엇는데, 그것을 엇더케 부즈런하게 하엿든지 나종에는 돈이 수중에 모다 20여원 모여젓습데다. 그것이 뒷날, 서울 가고, 東京가서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엇지요.

3. 五山學校時代 이야기
記 「東京서 나와서 五山學校에서 교편들 때가 몃살 때서요.」
李 「그것이 열 아홉 살 때 엇지요, 그 해가 庚戊年인데 나는 東京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려 준비하고 잇는데 돌연히 조부가 병이 급하니 어서 나오라 하여서 나왓지요. 그 뒤 일개월이 다 못가서 祖父는 별세하엿스니, 東京으로 더 갈수 업서서 五山學校 일을 보게 되엇지요, 그때는 全身이 오직 「理想と野心に 燃える若き少年」이 되어서 교육에 全心力을 다하엿슴니다, 참으로 五山學校時代는 나의 일생 중 가장 로맨틱하고, 가장 「思ひ出深き」한 곳이엇슴니다, 그때 학교에서 글 배우든 이로 知名의 人士가 만히 낫섯는데 가령 醫專의
白麟濟 博士 金輿濟, 徐椿, 岸曙 徽文高普의 金道泰君 等이 모다 그때의 사람들이엇지요. 〈59〉
記 「몃 해 동안을 게섯서요.」
李 「4년 동안을.」
記 「언젠카 「靑春」에 그때 추억을 쓰신 적이 잇섯지요, 석양이 빗길제 학교 뒤 교정 숩풀 속을 거닐면서 낙엽을 바다보고 잇슬 때에 多情多恨한 여러 학생들이 前後左右로 모아와서 「자연과 인생」에 대한 여러 가지 懷疑를 뭇더란 것을 인상적으로 쓰신 것이. 五山學校時代는 아마 선생의 「하이델벨히」인가 보외다.
李 「그러타고 할 만치 이상이 깁슴니다.」

4. 西伯利亞 時代 이야기
記 「五山學校에서 나와 가지고는?」
李 「西伯利亞로 갓지요, 나는 원래 방랑하기를 조와해요, 소년시대에 廣漠한 西伯利亞 벌판을 도라 다니든 인상이 정말 진정으로 이즐 수가 업서요, 먼-지평선에서 해가 소사 다시, 먼- 지평선 속에 사라지며 白樺나무가 끗업는 벌판을 덥흔 涯しなき 西伯利亞를 오늘은 東으로 내일은 西으로 하고 흘너다니든 생각! 아름다운 꿈 갓지 늘 내 기억을 흔듬니다, 그러다가 결국「치따」에 가서 正敎會에서 발행하는 正敎報의 主筆로 잇스면서 몃 해를 지냇지요.」
記 「그때도 고생 하섯슴니까.」
李 「치따에 간 뒤로는 그러케 고생은 업섯슴니다. 그러고 吉林省 穆陵에 갓슬 때에 병석에 게신
李甲 氏를 맛나 몃 달을 모시고 잇섯지요.」
記 「무슨 생각으로 西伯利亞를 가섯서요.」
李 「米國가려고, 米國가서 공부하려고,」 그때 소문에 米國은 文明햇고 자유의 나라고, 또 돈 업시도 공부할 수 잇다기에 米國行을 열망하여, 五山學校도 나오고, 西伯利亞도 지나 도라다녓지요.」

5. 作品이야기
記 「지금까지 쓴 작품 중에 엇던 것이 가장 會心의 作임니까.」
李 「글세요, 전체가 渾然하게 조흔 것은 어느 것일지 모르겟스나, 대체로 일부분 일부분식 조타고 생각되는 것은 잇서요, 가령 「흙」속에도 어느 일부분과 再生이나 開拓者에도 어느 일부분이 괜찬쿠나 하고 생각되여지는 것이 잇서요.」
記 「그러면 누구의 작품을 愛讀하서요.」
李 「역시 露西亞의 톨스토이 것이올시다, 杜翁 作品은 20年來 늘 읽어 옴니다, 이밧게 露西亞 作家의 것으로는 꼴-키-, 푸-시킨 것도 조와해요, 그리고 트루게넵흐의 작품도 거지 반 다 보앗는데 퍽 아름다워요, 그러나 엇전지 그 사람 것은 有閑階級的 藝術이라는 늣김이 나요, 이를터이면 화려하게 장식하여 노은 서재에서 「하마끼」나 태이면서 읽을 예술인줄 알어요, 최근 것으로는 「하-듸-」도 조와요, 하-듸의 「테스」는 과연 조트군요, 日本人의 것으로는 夏目漱石과 國木田獨步의 작품인데 지금도 夏目 것은 그러케 再讀하고 십지 안으나 國木田獨步의 예술 만은 늘 보고 십허요, 슬혀하는 작가 그는 빠나드, 쇼-의 것!
記 「쓰신 작품 속에 실재 사실을 취급한 것과 실재 모델이 잇는 것이 어느 것, 어느 것임니까. 아조 녜전 것이지만 小品文에 「내 소와 개」(時文讀本所載)의 사실은 선생자신의 소년 때 체험임니까.
李 「아녀요, 그것은
徐椿?君이 당한 일이라나 보지요.」
記 「그러면 「어린 벗에게」(靑春所載) 그것은 선생자신의 격근 일이여요, 저 上野公園 噴水池까에서 연애하고, 上海 가서 애인 만나고, 黃海 바다에서 獨逸潛航艇을 맛나, 탓든 배가 침몰되고-
李 「다 업는 사실이여요, 다만 그런 사실이 잇섯스면 조왓겟구나 하는 생각에서 쓴 것이지요. 獨逸潛航艇이 무슨 潛航艇임니까, 上野公園은 또 무슨 上野公園이고, 다 거짓말이여요, 呵呵.
記 「그래도
金一蓮이란 여성은 사라 잇다는데.
李 「그것은 자긔가 공연히
金一蓮이로라 하고 자처하고 다니며 그리는 것이지요.」
記 「全然 가공의 사실을 쓰섯다면 만흔 사람을 속여 오신 셈이얘요,〈60〉 지금도 그것이 선생 자신의 과거 기록이거니 하고 信之無疑하는 독자가 엇더케나 만타구요,
李 「그야 내 죄가 아니겟지요, 하하」

6. 交友, 趣味이야기
記 「선생은 엇든 범위와 태도로 交友하심니까.」
李 「나는 일부러 동무를 사괴려고는 하지 안슴니다, 또 사괸 동무도 엇더케 하면 오래 交誼하여 나가는 법을 모릅니다, 가령 누가 當故하엿다고 하여도 처저 갈 줄이나, 누가 결혼한다 할지라도 축전 칠 줄이나 그리고 누구를 방문다닐 줄도 모름니다, 그것은 동무에 대한 내 정성도 부족한 탓이겟지만 원체 건강이 업서서, 부즈런히 차저갈 건강이 업서서요, 그리고 우리는 淸濁幷含式의 성격을 못 가지고 잇슴니다, 그러타고, 내 자신이 맑다는 뜻은 아니외다 만은,
그래서 친구를 몹시 그리워하며 심중으로는 존경하면서도 그를 표현 할 줄을 모름니다,
記 「死生을 함께 하여 줄 만한 동지는 몃 분이나 되심니까.」
李 「퍽 갓갑게 밋고 지내는 벗은 여러분이 잇슴니다.」
記 「취미는? 음악을 하서요.」
李 「듯기는 퍽으나 조와하지만 할 줄은 몰나요, 풍금으로 讚美歌 정도는 갓금 치지요.
記 「또 花草는?」
李 「조와는 하면서도 내 손으로 화초를 심을 줄은 몰나요, 책상에 꼿을 꼿는다든지, 화분을 마루에 놋는다든지 다 몰나요, 日本 사람 집에 가면 「床の間」에 청초한 분재 가튼 것을 노흔 것이 퍽으나 쓀?름답게 생각되면서, 이내 내 자신은 실행하여 본 적이 업서요,
記 「운동은?」
李 「테니스도, 뻬스뽈도 아모 것도 할 줄 몰나요, 대체로 화초를 사랑한다든지, 운동을 즐긴다든지 음악을 조와한다든지 하는 것이 모다 생활이 餘裕한 집안에서 태어나고서 할 말이지요. 우리가치 어릴 때부터 貧寒과 고독으로 자라난 자에게 무슨 꼿이요, 노래요 하고 취미를 길너 가질 사이 잇섯겟슴니까,
記 「그러면 무엇이 소원이서요.」
李 「방랑이지요, 아직 가보지 못한 곳으로, 아모 근심업시 작고 작고 도라 다니는 것이 조와요. 원래 나에게는 放浪性의 피가 흘너 잇는가봐요, 이번에도 滿洲로 도라다니며 왓는데, 그 인적 업는 너르나 너른 曠野로 작고 작고 도라다녓스면 얼마나 조흘는지 몰낫겟서요.」
(次號에는 政客이요 文人이신 碧初
洪命憙 氏와의 交談錄이 실니겟슴니다)〈61〉
〈5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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