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筆禍와 論戰

이강기 2015. 9. 27. 17:05
잡지명 삼천리 제6권 제11호
호수 제6권 제11호
발행년월일 1934-11-01
기사제목 筆禍와 論戰
필자 金明植
기사형태 회고·수기


河馬는 河水에 溺死한다고 하지마는 文筆家 中에는 그로써 生活하는 者도 업지 안타. 또 그러되지 아니하면 文筆家가 잇슬 수 업는 일이다. 그러나 나의 짤은 文筆生活은 筆禍와 論戰으로 始終하엿다.
그 까닭에 一時的 同情者도 잇섯스나 感情은 持久的이다. 感情的 動物의 일로서 그래는 것이 必然이겟다. 그리고 論壇의 現場에 나갈 수 업게 된 후 낡은 事實을 들추어내면서 被告의 闕席을 幸으로 생각하는 者도 업지 아니한 모양이다. 或은 勞動共濟會問題에 잇서서 或은 新幹會問題에 잇서서 事實과는 다른 記述이 흔히 보이는 것은 그 一例이다. 내의 文筆生活은 東亞日報時代 新生活時代 第2次東亞日報時代 朝鮮之光時代 無定處時代로 區分되엿다. 그리고 그 間에〈32〉 생긴 事件의 수와 內容과 그때 그때의 形便을 詳述하자면 月刊雜誌 記事로는 좀 張遑하겟다. 그럼으로 발서 記憶에 衰微한 것은 그만두고 이제 오히려 또렷시 나타나는 것만 簡單히 收拾하야 이에 記錄하려하는 바이다.


合倂以后 近代的 意味와 色彩를 가진 筆禍와 論戰은 東亞日報가 先進일 듯하다. 그리고 東亞日報 創刊時代의 朝鮮靑年은 思想的 飢饉이 極度에 達하얏섯섯다.
在來 思想으로부터서는 離脫하얏지만은 그 빈자리에 채울 만한 新思想은 엇지 못하얏다. 새로 國際聯盟이 생겻다고 하지만은 그의 構成 意識이 무엇인지 아는 者 적엇고 또 알려주는 者 업섯다. 윌손의 平和原則은 드럿지마는 무슨 自由이니 무슨 自決이니 하는 意味를 아는 者 적엇고 또 알려주는 者 업섯다. 일즉 文藝復興이니 宗敎革命이니 하는 말과 米國에 獨立戰爭과 南北戰爭이 잇섯고 佛國에 大革命이 잇섯고 英國에 産業革命이 잇섯단 말은 드럿지만은 그들이 모다 무슨 思想과 主義의 實現인지 아는 者 적엇고 또 알려주는 者 업섯다. 더구나 露西亞의 新事實은 무를 곳이 업섯다.
이러한 時代에 東亞日報는 나왓다. 그리하야 國際聯盟과 윌손의 平和原則을 알려주엇다. 또 룻소와 몬테스규를 傳하고 아담스미스와 존스차드밀을 傳하고 또 루터와 칼빈을 傳하얏다. 그럼으로 思想에 주리든 靑年들의 東亞日報로 向함은 奔川하는 渴馬와 恰似하엿고, 東亞日報는 靑年思想의 源泉인 觀이 잇섯다. 그러나 靑年層의 歎迎하는 自由思想은 當X과 對立함은 勿論이오 父老와 儒林과도 對立하얏다. 그 뿐만 아니라 社內 一部 先輩와 對立하엿다. 그런데
張德秀君은 新聞社 創立事務에 奔走하야 執筆할 餘暇가 넉넉치 못하엿고 張德俊君은 執筆할 만한 健康이 업섯다. 그럼으로 弱馬의 짐은 輕하지 아니하얏다. 더구나 當時 新聞의 編輯體裁는 現在와 달라서 電報를 3面에 실고 1面에는 時事評論과 思想問題에 關한 論文만 揭載하엿는데 每日 平均 6,7段의 論文이 잇서야 1面編輯이〈33〉 되엿다. 그럼으로 1面에 揭載할 만한 投稿가 잇는 때에는 좀 짐이 덜엿지마는 1面記事에 原稿料까지 줄 수 업든 그때 現實에서 그러한 投稿가 만히 잇슬 수 업섯다. 그리하야 張君과 둘이서 거의 每日 1面 6,7段 記事를 쓰지 아니할 수 업섯고 또 張君이 일이 잇는 때에는 혼자 쓰는 수밧게 업섯다. 그럼으로 쓰는 量이 만흔만쿰 張君보다 더 만히 筆禍를 當하엿고 또 張君은 論戰은 삼갓고 修養論과 時事解說을 만히 쓰기 때문에 社內社外의 先輩와 父老의 忿怒를 산 일이 업섯지만은 나는 比較的 思想問題를 만히 썻슴으로 社內 先輩에게서까지 만흔 非難을 밧엇다. 그런데 「假明人頭上에 加一棒」이란 記事로 말미아마 社外騷動은 社內에 미첫다. 이때 「父老에게 告함」이란 社說이 엇섯는데 이 社說이 「假明人頭上에 加一棒《?이란 論文보다 內容이 더 險惡하니 그 筆者를 退社식히지 아니하면 自己가 退社한다는 先輩 두 분이 잇섯다. 그리다가 그들이 自退하엿다.
이때 나의 젊은 가슴은 압핫다. 平素에 崇仰하든 先輩들로부터 無父無君한 惡徙라는 말을 듯고 그리하야 그들과 正面衝突하게 됨애 엇지할 줄을 알지 못하엿다. 그리고 이때 石?先生의 明答은 이처지지 안는다.
儒林 밋 父老의 質問隊가 모혀와서 「父老에게 告함」이라는 社說에서 저들 所謂 無父無君의 句節을 指摘列擧한 聲討文을 내노앗다 그 중에 「彼等」이란 文句도 잇섯다.
여기서 石?先生은
「하늘은 父老보다 더 놉흔데 彼蒼者天이라는 古文이 잇다. 父老를 彼等이라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소리를 놉헛다. 古文이라 하면 머리를 들지 못하는 그들은 먼저 여기서 氣가 껴겨서 다른 것은 번번히 質問해 보지 못하고 도라갓다.


東亞日報의 第1次 論載은 每日申報와 拮抗이다. 創刊 初期에 「齋藤總督의 1年間政治」라는 社說이 잇섯는데 이 社說에〈34〉 對한 每日申報의 駁論이 나왓다. 이제 그 內容은 記憶할 수 업스나 每日申報에서 駁論을 發表한 方法이 奇妙하얏다. 原文을 諺文으로 飜譯하야 記事四號活字로 社會面全面에 揭載하얏다. 勿論 一般 讀者에게 널니 읽키기 爲함이엇다. 그리치 아니하야도 우리는 機關紙의 態度를 注視하고 잇섯는데 이 駁論을 보고 더욱 그 機關紙의 使命을 밝힐 수 잇섯다. 그리고 每日申報의 一般 讀者에게 널리 읽키려고 한 發表方法은 그 內容과 함께 東亞日報를 널니 廣告해 주엇슬 뿐이엇다. 社友들은 깁버하고 社外 人士들은 聲援하얏다. 그리하야 東亞日報는 民衆의 支持로 記事나 編輯이나 部數가 작구 向上發展하엿고 그들은 한갓 抽手傍觀할 뿐이엿다.
그러나 東亞日報의 發展飛躍을 同業者로서는 觀望하엿지마은 다른 關係로는 그럴 수 업는 그들의 地位가 잇서다. 그럼으로 從來 月刊雜誌 一種도 업는 現實에서서의 主張은 持鹿爲馬이라도 抗議하는 者를 보지 못하든 저들이 論戰에 失敗한 것을 삭이지 안이할 수 업섯다. 그리고 朝鮮人이 新聞을 맨들고 또 그것을 繼續 維持해 갈가 疑心하든 그들은 이제 져의 疑心을 疑心하게 됨애 複雜한 생각이 잇섯든 모양이다.
그러나 東亞日報가 民衆의 속에 뿌리를 심고 그 뿌리가 蔓延해 감을 따라 敵이 생기고 또 當局의 注意는 緊張하얏다. 그리고 每月 平均 6, 7回의 押收를 當하엿는 데 그 6, 7割 以上이 일면기사로 말미암은 것이엇다. 그럼으로 同人 中에 나를 敬遠하는 者가 잇섯다.
勿論 財政은 極度로 困難하고 當局의 注意는 滋甚함으로 그런 것이엇다. 그럼으로 나는 論調를 緩和하려고 努力해 보앗스나 되지 아니하엿다. 이리든 즘에 東亞日報는 停刊處分을 바덧다. 그것은 張君이 쓴 「三種 XX問題」가 忌諱된 것이엿다. 그럼으로 나는 적이 不安이 덜엇다. 그러나 當局에서 表明한 停刊理由에는 從來論調가 너무 不穩햇다는 것도 잇섯다. 그리고 東京에서 工夫한 張君으로서 國體觀念에 對한 注意不足은 서로 未安한 말이엿다. 그리하야 東亞日報가 停刊됨애 社會는 廖寂하얏다.〈35〉
나는 下鄕하야 數個月 동안 놀다가 서울왓다. 新聞은 解停되여 續刊하얏다. 一般의 心情은 變한 것이 업스나 財政問題와 論調에 對한 注意는 前보다 더하엿다.


그런데 東亞日報 續刊時代의 靑年思想은 吳下의 阿蒙이 아니엿다. 그리고 自由思想을 了解하게 된 저들은 좀더 剌戟性잇는 思想을 要求하엿다. 이때 西伯利亞에 駐屯하얏든 日本軍과 米國軍이 撤退하게 되매 新露西亞의 事情은 日本에 더 잘 알려젓다. 그리하야 社會主義 硏究, 社會問題 硏究 等 雜誌가 생기고 또 改造, 解放 等 雜誌도 號마다 露西亞에 關한 記事를 揭載하얏다. 그럼으로 이들의 雜誌에서 抄出하야 新聞에 揭載하면 靑年層의 思想的 要求에 副應함은 어러운 일이 아니엿다. 그리하야 社說로는 間或 그러한 內容의 것을 내엿섯지마는 長篇論文을 자조 써서 繼續하게 어럽게 되엇다. 또
勞?共濟會서 發行한 共濟와 聯合靑年會에서 發行한 我等도 關係가 잇섯스나 그들의 雜誌로는 그러한 일을 해볼 수 업섯다. 그리고 그 二種雜誌는 繼續 發行할 수도 업게 되엿다. 東亞日報社가 株式會社가 된 뒤에 나는 退社하야 新生活社와 關係를 지엇다.


新生活은 처음 米國人 月雅德의 일홈으로 發刊하얏다. 原稿 先檢閱을 避하기 爲하야 저의 일홈을 빈 것이다. 月刊, 旬刊 하다가 新聞紙法으로 認可된 뒤에는 週刊하얏다. 그리고 新聞紙法으로 認可가 나오기 전까지는 여러가지 事情으로 말미아마 穩健하엿다. 이때 論戰은
幸日鎔君의 李光洙君의 民族改造論에 대한 駁論이 잇섯고 金益斗의 迷妄이란 論文이 잇섯다. 그 까닭에 耶蘇敎徒와 拮抗하엿다. 나와 耶蘇敎徒와의 拮抗은 前后 3回이다. 東亞日報에 잇슬 때에 祭祀問題로 論爭하얏다. 耶蘇敎의 一神思想은 다른 多神思想보담은 進步한 것이지마는 朝鮮의 祭祀를 多神思想의 發露로 理解하는 것은 獨斷이라고 하엿다가 얼골에 血潮를 올닌 몃분의 耶蘇敎徒의 來訪을 맛낫다. 또〈36〉 聯合靑年會發刊 「新個人 新國家」라는 小冊子에서 耶蘇敎의 古典思想을 論難하엿다가 그들의 抗議를 바닷다. 牧師 金益斗 迷妄을 論하얏다가 그러한 抗議를 바덧다.
그런데 新生活이 週刊하게 된 때에는 다른 雜誌의 競爭이 猛烈하엿다. 이때 新聞紙法으로 認可된 雜誌는 東明, 開闢, 朝鮮之光, 新天地, 新生活의 5種이엇는데 그중 東明은 新生活과 가튼 週刊이오 또 主旨가 對立하엿슴으로 무엇이나 競爭하게 되엿다. 그리하야 兩紙間의 論戰은 白熱的인 것이 잇섯다. 그러나 主張하는 意識에 대한 造諧가 깁지 못한 때이엇슴으로 氣分的에 흐른 憾이 업지 아니하엿다. 오즉 靑年層의 思想的 要求에 대하여는 얼마만한 效果가 잇섯스리라.
그러나 某事件으로 말미암아 新生活의 發刊은 繼續할 수 업게 됨애 약간 經營하든 것은 모다 水泡로 化하엿다. 그리고 新生活時代에 女子들의 忿怒를 산 일이 잇다.
女子敎育會에서 女子講演隊를 組織하야 全鮮을 說破하엿는데 그들의 美擧와 壯志와 勇敢을 讚揚한 論文을 내엿다. 그 중에 「女子도 사람인가」라고 한 句節이 잇섯다. 이것이 女子들 侮辱한 文句라도 數三人의 質問隊가 數次 來訪하얏다. 그러나 그것은 過去의 女子는 眞正한 意味의 사람이 아니요 또 그러한 現實에서는 사람이 될 수 업섯다. 그러나 元來 女子도 사람이요 또 사람이 될 수 잇다. 今番 女子敎育會의 勇敢한 實踐은 이를 立證한다는 意味를 高調한 句節이엿다. 그리고 나는 文筆關係 以外에도 이와 가튼 誤解 又는 曲解로 質問隊와 接見한 일이 잇섯다.


數年 后 나는 다시 東亞日報에 執筆하얏다. 이 때 某君이 가치 執筆하엿는데 그의 思想은 나와 距離가 멀엇다. 그럼으로 東亞日報는 거의 隔日하야 正反한 論旨의 社說을 내엿다. 이때 두 사람은 괴로웟다. 그리고 이때
前進會와 民衆運動者大會와의 抗爭이 잇섯는데 「和同할가 飮毒할가」 「社會運動者에게 與함」의 社說을 내엇다가〈37〉 民衆運動者側의 忿怒을 삿다. 그 까닭에 「社會運動者에게 與함」 등이라는 論文은 結論을 내지 못하얏다. 萬一 結論을 내엇드면 前進會側의 怒忿까지 살번하얏다. 그리고 怒忿을 말하는 理由는 업섯다. 오즉 웨 우리를 寫眞하얏느냐는 것뿐이엿다. 또 朝鮮銀行券 問題로 朝鮮銀行과 相當히 張遑하고 緊張한 論戰이 잇섯다.


다시 東亞日報社에서 나와서 朝鮮之光에 執筆하얏다. 이 때
崔南善君이 東亞日報에 執筆하엿는데 佛敎的 虛無主義의 立地에서 國粹主義와 軍國思想을 高潮하얏다. 이에 對하야 論戰을 始作하얏다. 이때 東明 對 新生活時代와 달라서 彼此 論戰에 대한 經驗도 잇고 또 主張하든 意識에 대한 造諧도 잇섯슴으로 서로 緊張味가 잇섯다.
그리하야 論戰이 4, 5回에 미첫고 또 第3者의 加入도 協力도 업섯슴으로 그야말로 兩人의 疑念接戰이엿다. 그때 奉直戰爭에 廓松齡이 破함에 國民黨은 理想的이요. 憑玉祥 廓松齡輩는 羊質虎皮 見草而悅하는 卑?者이다. 大衆力者가 아니면 中國은 統一할 수 업다고 하야 暗히 張作霖을 추어 노흔 論文이 나왓다. 論戰은 다시 緊張하엿다. 이 때 나는 時代日報에도 執筆하엿고 開闢에도 投稿하엿는데 이들의 新聞과 雜誌에 그에 대한 나의 意見을 자조 發表하엿다. (彼此 指名도 안코 署名도 아니하엿다) 그리고 崔君이 某學者의 擅君抹殺論에 對한 駁論을 쌈으로써 論駁을 두룸에 論戰은 中止하얏는데 未幾에 李光洙君이 東亞日報에 文堂을 생각한다는 時調를 몃 回 내고 또 中庸과 徹底라는 題의 隨筆長篇을 내엿다. 그것은 文學評論인데 中庸思想을 讚美하고 左傾思想을 非難하면서 靑年文士의 左傾하는 것을 嘲笑하얏다. 그럼으로 李君은 崔君의 代로 先陣한 것이 아니라고 하야도 나는 ?過할 수 업섯다. 그리하야 나는 中庸과 及中庸, 英雄文學問題로 李君의 생각과 다른 것을 數次 發表하엿다. 그런데 李君과는 論駁이 되지 안는다. 저는 저의 主張에 대한 論難이 잇스면 그에 對한 答論은 쓰지 안코 沈?해 버린다.
그럼으로 나는 저를 論壇의 無抵抗主義者라고 하얏다. 그리고 三千里 9月號에 民族改造問題로 李君과 나와의 論戰이〈38〉 잇섯다는 것은 事實相違이다. 그것은 辛日鎔君과의 일이오 또 幸君의 論文은 開闢이 아니오 新生活에 揭載하얏다.


얼마 뒤에
新幹會問題로 左翼論客들과 論戰하엿다. 新幹會問題가 나오기 전에 나는 各層의 힘을 集中하야 政治的 集團을 組織할 必要를 말하얏다. 그러나 그것이 左翼陣營이 아니오 또 되여서은 아니된다고 하엿다. 그런데 저들은 新幹會를 左翼陣營으로 規定하고 左翼의 影響下에 잇는 여러 集團을 모다 부서버렷다. 武漢政府 時代에 잇서서 오히려 左翼의 헤게모니는 理想이오 現實이 아니엇는데 그것을 現實로 생각한 左翼은 慘敗를 當하엿다. 그리고 그것이 左翼陣營이 되면 左翼戰線은 問題가 되지 아니할 수 업고 또 實際運動은 展開되지 안는다. 그리하야 그것은 直線運動이 되지 안코 도로혀 曲線만 그리고 만다고 하엿다. 그후 經過는 누구의 主張이 올흘가를 잘 說明해 주엇다. 그리고 三千里 9月號에 이때 安在鴻君과의 내와의 論戰이 잇섯다고 하얏스나 그것은 그릇한 말이다.


그 후 나는 京城을 떠나서 여긔 저긔로 流離하얏다. 따라서 執筆할 機會도 업섯거니와 執筆할 形便도 되지 아니하얏다. 그런데 나의 生活을 걱정하는 이 잇서 다시 執筆함을 勸하고 또 原稿를 請하는 분도 잇섯다. 그럼으로 設問에 答도 썻고 間或 짤막한 論文도 썻다. 그리고 滿洲事變 時 東光의 設問의 簡單한 意見을 말하엿더니
金若水, 朴日馨君 等의 駁論이 나왓다. 그럼으로 그들과 數次의 論戰이 잇섯는데 彼此 不快한 것뿐이오 아무러한 所得이 업섯다. 元來 論戰할만한 問題가 아니엿스니 그러케 될 수박게 업섯다. 이 때 나는 다시 執筆아니 할 것을 盟誓하고 1年間 바둑으로 時間을 보내엇다. 그런데 또 執筆을 勸하는 이 잇서서 日本外交의 轉機라는 論文을 今年 初에 某新聞에 내엿다. 몃칠 후에 同新聞에 廣田外交의 本領이란 社說을 내엿는데 나의 觀察과 相克하엿다. 그것이 나의 觀察을 論難하기 爲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업스나 그리고 論旨는 매우 淺薄하고 또 觀察은 聰明하다고 할 수 업섯다. 그럼으로 나는〈39〉 外交基調論이란 題로 그에 대한 論文을 써서 某誌에 보내엇더니 내지 아니하엿다.
다시 當者만은 알만한 程度의 것을 써서 某新聞에 發表하고 다시 執筆할 생각이 되게 되엿다.
그리고, 執筆을 권하는 이에게 原稿를 쓴다고 하야도 生活이 도음이 되지 안니하는 것을 事實로 알려주엇다. 그러나 권함을 따라 三千里에 이 小論을 썻다. 그것은 양쪽에 대한 防牌를 삼기 위함이다. (九月 二十四日)
〈3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