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7권 제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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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7권 제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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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35-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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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朝鮮民族의 全盛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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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申采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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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논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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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의 古史를 연구하랴면 반다시 朝鮮 古文化의 源流를 탐색치 안코난 도저히 史의
根據와 史의 眞髓와 史의 體系와 統志를 작성할 수 업슬 것이다. 그러면 朝鮮 古文化를 강구함에는 先히 朝鮮 舊疆版圖範圍부터 劃定하여야 되리니
古代文獻의 考證을 어데서 차자낼 것이냐. 「神誌」의 九變震壇圖가 傳치 못하고 「檀君」系統인 扶餘가 祖業을 계승하야 滿蒙大陸에서 赫赫文化 1천여 년을 發揚하여 오다가 春秋列國時代에 及하야 漢族과
전쟁을 이르켜 或勝或敗하며 장기간에 亘한 戰雲이 息寧의 日이 無하더니 齊 桓公 때에 와서는 朝鮮族의 衰運期라 敗蹟이 날노 多하매 滿蒙西南部에 居하는 朝鮮族의 根據가 甚히 동요하야 永平府
以東까지 國域이 축소되엿스며 其後 「秦始皇」의 東南戰爭은 專혀 朝鮮族을 東北으로 驅逐함이라 「萬里長城」을 朝鮮支那에 國界로 하고 大工事를 起하야
萬餘 里를 延長한 것이다. 그런고로 古朝鮮의 文獻考證은 屢十百년 兵焚의 消失되고 또한 朝鮮의 國都가 敵禍로 因하야 자조 遷徒되엿스니
疆域의〈59〉 變縮함이 더욱 만을지니 中古에 至하야 愚儒輩의 曲解抑斷이 大華主義에 盲狂하야 「檀君疆域」을 마음대로 주리고 「扶餘國都」를 되는대로
遷徙하여 심지어 「寧邊妙香山」을 「白頭山」이라 하고 「阿斯達」을 「黃海道」라 하며 「箕子」를 「大同江」에까지 갓다 뭇어 노왓스니 엇지 痛恨할 배
아니리요. 소위 史家덜에 적어 노은 國史를 보면 붓끗마다 다를 말끗마다 맛지 아니하야 譬컨대 ?盲 終夜길에 헤매며 目的地의 소재를 찻지 못함과
갓도다. 萬里長城이 우리 朝鮮과 宿命이 깁흐니 만콤 萬里長城考는 곳 우리 古疆을 찻는데 一證據가 훌륭하다 하노라. 「淮南子」 가로대 萬里長城은
(北擊遼水東結朝鮮)이라 하엿으니 「淮南子」 당시에도 萬里長城이 朝鮮과 支那의 國防界로 싸은 것이 明白하니 長城을 아는 자 반듯이 古朝鮮을 알
것이다.
* 앞 高句麗 운운 이하 中國XX朝鮮史修編室에서까지 원본 없음.
「高句麗」 「蓋蘇文」이 가로대 (自扶餘로
築長城하야 南至海하니 長千餘里)라 (此國史上之最長城)이라 하얏고 「羅馬」 「該撒」이 가로대 (因北寇頻逼築城於萊因河北, 其長至數百里)라 하니
(此는 西洋史上城之最長者也)이라 하엿다. 그러나 「秦始皇」이 「蒙恬」으로 하여금 北으로 長城을 築하야 「臨?」에 起하야 「遼東」에 至하니 長이
萬餘里라 하엿으니 이곳 세상이 말하는 萬里長城이라. 東西史上의 最長城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有城以來로 오즉 始祖되는 長城의 巨擘일 것이다. 이제
萬里長城의 傳記를 考하건대 萬里長城이 「秦始皇」의 創築한 것이 아니오, 秦始皇 때에 至하야 固有한 長城을 擴大延長하야 加築함이며 또한 長城을
加築함이 秦始皇? 아니라 秦始皇 이후에도 長城을 修築한 者 多하얏다. 그러나 大工事를 가저 擴築하기는 秦始皇 以上에 出한 者 無함으로 마참내
秦始皇의 萬里長城이 되야 萬古에 獨雄한 것이다. 長城의 歷史가 甚히 晦寒하야 朝漢 양국 당시의 國境의 分界임을 명백히 分辯키는 어렵도다. 이제
「甲」 「乙」 「丙」 三者를 擧하건데 「甲」은 秦始皇 以前의 長城이니 「史記匈奴傳」 曰 「趙武靈王」 北破林胡, 樓煩, 築長城自代幷陰山下 至高闕
爲寒而置雲門 ?中)이라 햐엿스니 이는 「趙」의 長城이 오(燕有賢將 「秦開」 爲質於胡胡甚信之而歸襲破東胡, 胡却千餘里, 燕王喜時, 亦築長城,
自造陽, 至陽平, 置上谷, 漁場, 右北平 「遼西, 遼東, 郡以拒胡) 라 하엿으니 이는 「燕」의 長城이 오(「秦始王」 時殘殺 「義渠我王」
秦有?西北地上郡築城以拒胡)라 하엿으니 이는 秦始皇 以前의 長城이라 한다. 「乙」 秦始皇 以後의 長城을 말하건대 「北齊書」
(顯祖天保六年發民一??八十萬 築長城, 自幽州, 夏口, 西至恒州, 九百餘里)〈60〉 (七年自西河總秦戌築長城東至海) (後主, 大統六年,
自庫堆東距海隨山屈曲二千餘里塹山築城) 이라 하얏으니 이는 「高齊」의 長城이오. 「周書」 (文帝開皇六年二月發丁男十一萬修築長城)
(七年二月發丁男十餘萬修築長城)이라 하얏스니 이는 「隋」의 長城이오. 「熱河日記」에 「同徐中山築長城」이라 하엿스니 이는 「明」의 長城이니 秦始皇
以後의 長城이 또한 이러하며, 「丙」 秦始皇의 長城은 「史記秦本記」 (始皇 三十二年, 燕人盧生, 使入海還, 秦?圖書, 曰亡秦者, 胡也,
始皇乃使蒙恬渡河取高闕, 陶山北, 假中, 築亭障) 「三十四縣適治獄吏不直者築長城」 「匈奴傳」 (秦滅六國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衆北擊胡悉收河 「白羊河」
南地因河爲塞築四十四縣城臨河徙適戌以充之通直道自九原至雲陽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治之起臨?至遼東萬餘里라하고) 「蒙恬傳」 (起臨?, 至遼東, 延裏萬餘里)
이라 하엿으니 이는 곳 秦始皇의 萬里長城이 이니라. 以上의 所述은 中國歷代의 長城의 ?史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야 3개 문제가 復有하니 「一」
「秦始皇」의 長城이 「燕趙」와 밋 「昭王」의 舊址를 基因하야 繼修增築擴大함이냐. 또한 拓地를 廣遠히 하고 더욱히 北域에 移築함이냐. 「二」
秦始皇 以後의 長成은 다 秦의 舊城址를 修築할 ?이 엇느냐? 或內退外進하야 秦의 城基를 變遷한 것이냐? 「三」 그 西界는 本來臨?(嘉裕關)에서
起點하얏스나 그 東界는 다못 遼東에 至하얏다 하엿으니 遼東은 엇던 地界까지를 指稱함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魏書長孫陳傳」을 據하건대 「陳」
(爲羽林卽, 征和龍, 賊自西門出, 將犯外圍, 陳擊退之追至長城下)라 하니 이늊? 長城이 龍城 박게 잇는 것이 明瞭하고 「杜佑通典」 曰
「蘇州北至廢長成塞二百五十里」라 하고 「朴燕岩」이 가로대 (山海關의 長城은 「明」 時 「徐達」의 所築)이라 하니 可히 卓見이 되나니 이는 第一
問題가 解失됨이오. 秦皇以後의 長城이 만일 秦皇의 建築의 舊址을 仍川치 아니 하얏다 하면 秦皇의 長城이 한 반 다시 燕趙舊墟만을 限하지 아니
하얏을 것이다. 대개 국가의 盛衰强弱을 따라 可히 外地를 遠拓 할 수도 잇고 可히 國防을 縮短할 수도 잇섯슬 것이니 그런고로 「匈奴傳」에 가로대
「可繕者治之不可繕者別築之」라 함이 長城變移이 特證이 될 것이니 第「二」의 문제가 解明되얏고 第「三」문제는 「遼東」문제로 因한 因難이니 遼東문제를
말하랴함 반다시 二個 문제가 提出될 것이다. 「一」당시 朝鮮의 國情과 國境範圍 如何요 「二」 「燕」의 拓地의 遠近如何라 「紀年兒覽西郭雜錄」
等書를 보건대 (慕容魔의 扶餘侵入과 李勣의〈61〉 平壤入寇)가 朝鮮古史를 一炬에 灰燼하얏다 하엿고 「馬史」에 考하면 「六國史記」가
(燕史在內皆爲秦始皇燒之)라 하니 朝鮮과 燕의 古史를 考據할 處가 無하야 第二 문제의 鮮決이 甚히 因難하도다. 그러나 이제 斷爛餘燼한 중에서
古史의 片鱗을 採拾하리라. 「文獻考備」 曰 (孤竹(今永平府) 春秋時爲朝鮮所有)라 하엿으니 이는 「魚?魏?」의 말한바라. 「魏略」
(朝鮮見燕僭稱王欲與伐燕) 中? (燕將秦開詐而爲質於朝鮮朝鮮甚信之秦開歸言於燕伐朝鮮拓地二千餘里至滿潘汗爲界朝鮮遂弱) 「司馬氏史記」 (秦東胡拓地千餘里)라
하엿으니 「魚?」가 그때 累百年後의 사람으로서 무엇을 考據하야 「東胡」를 改하야 「朝鮮」이라 하고 千里를 改하야 二千里라 하며 또한 엇지하야 그
所拓의 地가 滿潘汗에 至한 것을 아랏난가. 가로대 이 무리는 「魏」의 「母丘儉」의 一類라 하리니 「三國史記」와 「三國志」를 按하면 「三國史記」는
우리史요 「三國志」는 곳 「中國」의 「蜀吳魏三國史」 이다. 「曹魏大將 母丘儉侵高句麗人入丸都城」 云云은 대개 「丸都城의 所藏한 「高句麗」史冊이
「母丘儉」의 手에 入하야 中國의 遺傳함이 多한고로 中國古人이 朝鮮의 史事를 안다는 者는 「魏」의 史官에 過할 者 無하니 「檀君王儉」의 名을
「魏?」에서 始見함이 아니냐. 「陳壽」가 魏에 仕할 때의 所作을 가저 「三國遺事」가 만히 引用한 고로 「箕否」 「箕準」의 事를 또한 魏?에서
보게 되얏고 「扶餘」의 風俗과 「三漢 7,80國」의 名稱을 「三國志」에서 始見케 되얏나니 이는 「陳壽」가 또한 「晉」에 仕하며 著作한 바라
「後漢書」에 비록 「三漢 7, 80國」의 名稱을 記 하엿으나 그러나 「後漢書」는 「范?」의 所作이니 곳 「陳壽」의 後人이라. 「秦開」가 朝鮮의
土地를 侵奪한 사실을 또한 「魏?」을 根據한 것일 것이다. 先儒덜이 「永平」以西는 燕이요 永平以東은 朝鮮이라 하여왓다. 「秦開」의 所拓한
地界二千餘里라 할진대 그 足跡이 반다시 「鴨綠江」을 過하야슬지니 「李栗谷」은 太遠하게 二千餘里를 一千餘里로 改하고 「丁茶山」은 太近하게
二千餘里로 正하다 하야 滿潘汗이 「大同江」以南에 在하다고 妄證하얏스니 嗚呼라 엇지 그리 偏見의 考執를 傳하엿는가. 「高句麗」 당시에도 항상
「奉天」을 據割하고 「直?」의 北半部와 「蒙古」 東部를 領有한 고로 史冊에 자조 「太原」(今山西省)을 侵入하엿슨즉 이는 東蒙古로부터 馳兵南下하던
形勢를 말핊?이라. 「唐人, 樊深」의 「高句麗城詩」 曰 「僻地城門啓, 空林?堞長, 居然朝市變, 無復管絃?」 朝鮮이 東蒙古로부터 南下하야 此地에
據하고 築城開都함을 일음이오 燕으로부터 싸우던 자최를 吟詠함이라. 朝鮮의 當時 用兵은 「永平」으로부터 「燕京」以北에 至하고 北으로 「匈奴」
(今蒙古地)를 接하고〈62〉 南으로 「上爲」 (今宣化府)에 及하얏다. 燕에 朝鮮을 反攻함을 보면 (北攻上谷, 南襲孤竹 「今永平府」 而至遼河)
「故史記」 (燕將秦開伐東胡拓地又言伐胡自造物至襄平築長城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等郡)이라고 하엿으니 이를 考하면 朝鮮이 燕과 接境하엿던 大槪를 볼
것이다. 「上爲」는 곳 「宣化府」요 「漁陽」은 금 「順天府」의 北部요 「右北平」은 今 「永平府」의 北部요 「遼西」 「遼東」은 今 「奉天」의
西半部의 北部이다. 「魏?」이 滿魏汗이라 함은 곳 「漢武帝」의 分設한 汶潘汗二縣이니 그 일홈을 「漢西遼東郡志」에 明載하니 卽今 蓋平海城等地라
拓地 二千餘里라 함은 「上爲」 (今宣化府)으로부터 「襄平」에 至하기까지 其程을 再折하야 南으로 蓋平海城까지 그 里數가 二千餘里라 그런즉 燕郡의
遼東과 秦의 長城所至한 遼東을 可히 알 것이니 第三의 문제도 解釋될 것이다. 「晉書太康地志」에 가로대 樂浪遂成縣碣石山이 長城이 所起한 地點이라
하얏으니 此一段이 讀史者의 疑點을 이르킬 것이다. 「樂浪」은 곳 「平壤」이오 「遂成縣」은 平壤南에 在하니 (廣寧金州에 古平壤을 云함이오 卽今
平安道와 平壤을 말함이 아니다.) 秦의 長城이 멀니 平壤를 過하얏다. 文法으로 보면 始點을 起라 하고 終點을 至라 하나니 秦始皇 長城의 始起點이
臨?이 엇나니 엇지하야 樂浪으로 所??地라 書하얏난가. 「北史」와 「隋書」를 考하면 「魏」와 「隋」가 일즉 「上爲」에 在하야 郡을 置하야
「樂浪」이라 하고 縣을 置하야 「遂成」이라 일홈 하얏스니 燕의 長城은 上爲谷에 起한 것이 明白하다. 「晉書」의 書載가 此를 指함이라.
「晉書」作者 「唐太宗」이 「隋」末에 生하야 「晉陽」에 家하매 항상 此를 見하고 燕의 長城을 이갓치 말함이라. 그러면 「碣石山」은 엇지 함이뇨.
(禹貢冀州가 夾右碣石이라 하고 其下又云太行王屋至於碣石)이라 하니 이는 一時에 二碣石이 有한 연고라. 「新唐書」에 (平州石城에 有碣石山)이라 하고
(營州柳城에 亦有碣石山)이라 하니 당시에 대개 衆石이 碑碣 갓치 立한 것이면 「碣石山」이라 名함도 그럴 뜻하나니 엇지 上谷인덜 碣石山에
無하리요. 日人歷史學雜誌에 甘氏博氏가 晉書에 樂浪年壤과 長城이 秦始所築임을 말함은 的確한 ?考를 加하지 못하야 前人의 誤를 그대로 써서 사실과
틀님이 多하뉀?라. 燕의 長城이 朝鮮과 如何한 관계되엿음은 이미 上述하엿거니와 「燕」의 관계는 眞蕃, 樂浪, 兩朝의 事이오. 「趙」의
관계는 「扶餘朝鮮」 時의 일이니 扶餘朝鮮이 三朝鮮 중에 最大國으로서 中國과 交通을 先開하얏나니 故로 「舜本記」에 가로대
(北山我發息愼〈63〉)이라 하니 發息愼은 扶餘朝鮮의 誤音이라. 「管子」 曰 (八千里之發朝鮮)이라 하고 又曰 (發朝鮮之文皮)라 하엿으니 發朝鮮은
또한 扶餘朝鮮의 促音이라. 「史記」에 「濊」 「?」 朝鮮 혹은 但稱 「濊」라 하며 「?」이라 하니 「?」이라 함은 그 文皮를 衣服함에
得名함이라. 濊는 곳 扶餘의 促音이니 其實은 다 同一하다. 趙가 扶餘朝鮮으로 관계되기는 「趙襄子」로 부터서니 「匈奴傳」에 (趙襄子가
破幷代臨胡?)라 하엿스니 其後에 扶餘의 屬民魏林, 樓煩이다. 强盛하야 趙의 邊境이 多事하엿다. 「趙武靈王」이 服을 變하고 騎射를 練習하야
扶餘로부러 자조 싸우며 長城을 築하야 防禦하엿스니 이는 趙의 長城은 扶餘朝鮮을 防하기 위하야 築한 바이다. 「史記趙世家」에 扶餘를 「東胡」라
하얏고 「匈奴傳」에는 「樂浪」을 「東胡」라 하엿다. 趙의 末棄에 「李牧」이 北邊의 良將으로 「林胡」와 「樓煩??을 破하고 走하엿다 하엿스니 다못
長城以內에만 禦하엿슬 뿐이오 能히 長城以外에 進出치 못함이니라. 趙가 이미 亡하매 夫餘 더욱 强盛하야지매 「匈奴」 「單于」 「冒頓」이 항상
美人良馬를 夫餘에 進貢하엿다 하며 「史記」에 (「冒頓」의 地廣을 書하야 曰 自上谷으로 東接濊?朝鮮)이라 하엿스니 그때는 扶餘朝鮮이 冒頓에 敗한
후임이 明白하다. 그런즉 趙의 長城은 專혀 朝鮮을 爲하야 築함이오 始皇의 長城이 上谷以來 까지는 또한 扶餘??鮮을 防禦함
이니라. 扶餘朝鮮이 燕으로부* ?怨을 ?할 뿐만 아니라 扶餘가 자조 燕을 伐하얏음으로 「管仲」이 「九合諸候」의 歸衆을 督率하야 「孤竹」을
破함이 그것이다. 數百年間에 扶餘가 三朝鮮의 盟主가 되야 中國을 侵하다가 燕趙가 亡한 뒤에 또한 亡하엿스니 嗚呼라 그 間에 「神誌高興之倫」의 그
顚末를 기록한 바 有하엿나니 野心만은 君主와 辣腕한 將相이며 忠義慷慨한 將士와 ?幄密勿하던 謀臣덜의 可歌可舞可哭可驚할 만한 사실이 다 하얏스나
朝鮮이 이미 板蕩되고 古書는 一傳이 無하엿스며 中國의 「史馬遷」의 「史記」가 有하나 專히 「尊華攘夷」로 排外적 思想을 取하야 史例를 紊亂하엿스니
도로혀 「布魯帶克」의 ?邦情形을 詳察하고 그 顚末를 具載함만 못하도다. 「馬史」는 그 一二次 隣邦과 接觸된 사실을 記한 外에 다만 自己中國人의
自尊好奇心의 玩賞物과 如할 뿐이다. 一國의 名을 訛하야 數國을 맨들엇스니 肅愼, 朝鮮, 扶餘, 濊東胡, 등의 國名을 訛함이며 혹 「甲」국의
사실를 「乙」國事로 記하니 「胡?」의 事를 다 「匈奴」傳에 記한 등이라. 戰를 記하매 勝敗를 顚倒하고 風俗을 論한즉 그 美惡을 變亂하엿나니
國都人名의 可考 할 資料가 되지 못할 뿐아니라〈64〉 그 國際의 交涉來往한 일을 一片의 記錄이 不存하엿스니 실로 慨嘆할 바라 이제 朝鮮國境所至와
燕趙秦의 長城을 築한 원인이 匈奴를 爲함보다 匈奴以前에 朝漢兩族의 관계되엿음을 비록 明確히 알기는 어려우나 萬里長城을 硏究함에 在하야 朝鮮古彊이
얼마나 크며 朝鮮의 强盛함이엇던 範團?지 발전되엿던 것을 半의 半을 아라낼 수 잇스며 萬里長城이 東洋硏究史上에 在하야 실로 위대한 實物의
?考됨을 確信하리라 하노라.
“附長城小話“
萬里長城이 東洋史의 最重한 秘藏의 寶庫요 建築上의 偉觀만 될뿐 아니라
東西兩洋에 역사적 影響이 至大하다 하노니 長城을 築하기 이전에 鑑하야 扶餘, 匈奴, 諸族이 長弓勁*로 鞭馬南下하야 漢族을 虜殺하며 財穀을
掠奪하야 甚하면 土地를 割據하고 自立國을 建設하는 등이라. 「春秋傳史記」의 보인 昆夷, 徐夷, 萊夷, 赤狄, 中山 등이 中國의 本土內에 在하야
建國稱王하며 橫行自姿하얏고 長城을 旣築한 후로는 東北의 大國인 扶餘로 故土에 還하야 다시 南下의 形勢를 取하지 못하고 蒙古의 匈奴族도 一枝로
西歐에 竄入하야 「峨特族」과 侵擾를 起하야 마참내 西洋史上의 民族적 大遷動을 이르켯나니 「聖羅馬」의 沒落과 「新文藝」의 發生이 萬里長城 有無에
關하야 國際文化 消長된 影響이 과연 엇더한가. 匈奴의 一枝가 ?한 東으로 扶餘에 爭抗한지 累十年에 마츰내 扶餘族도 遷動되야 東으로 徙하야
沃沮眞蕃이라 或稱하며 南으로 遷하야 辰韓六部가 되엿나니 其詳細는 此에 ?하고 讀史者가 다만 西歐의 民族大遷動만 알고 東西에 또한 同一한 現象이
有한 것을 아지 못함을 慨嘆하며 웃둑한 萬里長城을 바라볼 때마다 深刻한 늣김을 禁치 못하노라. 中國XX
朝鮮史修編室에서〈67〉 〈5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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