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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開化黨事件 甲申大變亂의 回想記, 그 일도 벌서 44년이 되얏다 - 李圭完

이강기 2015. 9. 27. 22:13
잡지명 별건곤 제3호
호수 제3호
발행년월일 1927-01-01
기사제목 朝鮮開化黨事件 甲申大變亂의 回想記, 그 일도 벌서 44년이 되얏다
필자 李圭完
기사형태 회고·수기

당시 朝鮮의 정국과 소위 事大黨
당시 朝鮮의 정국은 내가 지금, 새삼스럽게 말하지 안어도 일반이 다 안는 바와 가티 극히 문란하야 궁중으로부터 정부의 각 관서에 이르기까지 백주에 賄賂가 公行하고 지방의 탐관오리는 인민의 膏血을 함부로 착취하야 인민이 擧皆塗炭의 境에 빠젓스며 政界要路人物은 대개 陳腐老敗한 外戚이 아니면 문벌가의 族黨으로 因循姑息에 단꿈만 뀌고 혁신 개조의 생각이 조금도 업슬뿐 아니라 一層自家의 私口私腹을 보충하기 위하야 국권을 擅弄하며 加之 壬午軍亂 이후에 만만의 야심을 가진 淸國의 군대는 依然이〈2〉 京城에 주재하야 朝鮮 사람에게 가진 횡포를 자행하는 동시에 狡獪無雙한 袁世凱는 심지어 국가의 내정까지 無不干涉하니 조금이라도 피가 잇고 쓸개가 잇는 朝鮮사람치고야 엇지 그것을 감수할 수 잇섯스랴. 其中에는 당시 外戚勳臣으로 소위 淸米양국을 巡*하야 외국의 신풍조를 맛보왓다는
閔泳翊, 閔應植 일파는 독립 자주의 사상이 조곰도 업고 사대주의 즉 大淸의 忠奴되기만 甘心하야 袁世凱와 밋 淸정부에 추파를 相送하고 그 세력에 의하야 자가의 권세만 확장하는 데는 혈기잇는 청년의 분노와 원한과 唾罵가 실로 형언하기 어려웟섯다.

開化黨의 蹶起와 14壯士의 態度
그러나 당시 事大黨의 세력과 淸兵의 외압이 원래 강대함으로 비록 의혈이 方湧하는
金玉均, 洪英植, 朴泳孝, 徐載弼, 徐光範 가튼 諸氏라도 감히 경솔하게 반항의 기를 들지 못하고 다만 암암리에서 비밀결사를 하야 천하동지를 규합하며 시기의 도래를 엿보앗섯다. 그러자 그때에 日本에서 새로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14인조의 청년무관이 잇섯스나 그는 林殷明, 朴應學, 申重模, 申福模, 尹景淳 등 諸氏이다. (餘略-원문) 나도 또한 그 14인 중 한 사람이다. 이 14인은 혈기 방강한 강골한일 뿐 아니라 모도 ?力이 過人하얏다. 그 중에도 林殷明가튼 이는 江原道 洪川 사람으로 ?力이 감히 강하야 십 수인을 능당하는 사람인데 徐載弼씨 문하에 잇고 나는 朴泳孝씨 문하에 잇섯스며 또 尹景淳은 형제가 다 東大門 내 유수한 力士로서 尹景淳은 특히 驍勇하야 다라나는 개를 쪼차서 한 번 적여차면 그 개가 공중으로 수십장 식을 올나가고 또 그 개가 나려올 즈음에 한 번 다시 차면 그 개가 아모 소리도 못하고 걱구러저 죽엇섯다. 그런데 그때에 事大黨의 巨首 閔應植, 韓圭稷 등은 군권을 잡은 고로 이 14인을 무관으로 채용 매수하야 자기 우익을 삼으랴하고 徐載弼, 金玉均 등 獨立黨은 이 14인으로 자기의 동지를 삼아 반란군의 전위를 삼으랴고 하얏섯다. 그러나 金力과 세력에 팔닌 몃몃 사람이 먼저 閔派에 매수되야 나까지도 引用하랴고 백방으로 勸誘하니 일시 나의 입장은 매우 곤란하얏다. 그리하야 외면으로 거짓 승낙을 하고 또 말하기를 現 今 獨立黨의 巨首는 金玉均, 朴泳孝 兩人이니 내가 그 부하에 아즉 잇다가 시기를 보와 그 두 사람을 除害한 후 기치를 선명이 하리라 하니 閔氏一派가 또한 나의 말을 그럴듯시 信聽하얏다. 그러나 원래 事大黨은 목전에 비록 세력이 크나 根本主義思想이 나와 반대되는 이상에야 엇지 용허할 수 잇스리오. 나는 다만 의연히 朴씨 부하에 잇섯슬 뿐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朴씨는 나를 但히 무식소한으로 생각하고 內意를 잘 말치 아니하며 또 내가 언제인가 朴씨의 집에서 백미 일석 준 것을 부친의 명령에 의하야 감사의 예를 하엿더니 그는 나를 「쥐뼉장사」 라고 별명까지 지여서〈3〉 만흔 경시를 하엿다. 그러다가 하루는 徐載弼씨의 집에를 갓더니 徐씨가 나를 보고 국사를 한참 의논하다가 눈물을 흘니며 長歎하야 曰 目下 閔泳翊은 事大黨의 수괴일 뿐 아니다. 소위 외국까지 갓다 온 자가 사상주의가 腐敗頑固하야 국가의 대사를 그릇트린 즉 그의 죄악이 더욱 큰지라 그 자 한아만 제거하면 대사를 可圖할 터이나 감히 하수할 사람이 업다 함으로 나는 내가 하겟다고 일언에 壯談快諾하니 그는 당시에 나에게 감사의 예를 하며 李將軍이라 경칭하고 미리 예비하얏든 日本長? 한 口를 나를 주엇스니 그것은 원래 尹鮮烈씨가 日本에 갓슬 때에 數十口의 日本寶刀를 비밀이 사온 것인데 나를 준 것은 其中에 제일 크고 무겁기도 하려니와 광채가 閃閃하야 그야말로 만장의 靑虹이 백주에 이러나는 것 가튼 바 한 번만 치면 제아모리 項羽 張飛가튼 놈이라도 대번에 목아지가 천당으로 갈 것 가텃다. 그의 부탁을 밧고 또 칼까지 바든 나는 맛치 秦始皇을 죽이랴고 咸陽市에 간 荊軻 모양으롊? 한족으로 조심도 되고 한쪽으로 의기가 충천하얏다. 그러든 다음 날이다. 나는 다시 金玉均씨를 방문하니 金씨는 전에 보지 못하든 환대를 하야 밥도 가티 먹고 잠도 한 이불 속에서 가티 잣다. 그때에 金씨는 나와 팔쓰름을 하엿는데 나는 그짓 젓섯더니 金씨는 우수면서 이와 가티 약한 사람이 엇지 국사를 하겟느냐 함으로 나도 또한 웃고 말엇슬 뿐이엇다. 그리고 나는 다시 金씨에게 申重模를 薦하엿더니 金씨는 申이 무력하다고 불응함으로 나느 소리를 지르며 말하기를 대사를 도모하는데 먼저 그 사람의 주의와 지모를 볼 것이지 엇지 완력만 논하리오. 만일에 완력을 위주할진대 東大門이나 鐘路로 통행하는 우마를 다리고 할 것이지 하필 동지의 사람을 구할 필요가 잇스리요. 하니 겻헤 잇든 洪英植씨가 극구 찬성하야 申씨까지 다시 가입하게 되엿다.

天?地覆의 十二月 四日
이에
金玉均, 洪英植, 朴泳孝, 徐光範, 徐載弼씨 외 우리 동지 일동은 비밀이 결사하야 혹은 僧房 혹은 江亭 혹은 남의〈4〉 內舍로 도라다니며 10여 개월을 두고 대사를 의논하며 시기를 살피다가 甲申年 6월에 至하야 淸國이 佛國과 安南문제로 戰端을 개시한 바 8월에 淸國 함대가 福州에서 佛軍에게 격침되야 그의 패보가 京城에 喧傳하니 이 패보는 淸國을 세계최대 최강의 國으로 신망하든 事大黨의 심기를 일전케하는 동시에 近百革命兒의 열혈을 일시 躍動케 하야 急轉直下의 勢로 火花의 蓋를 개시하게 되얏다. 12월 4일(陰 10월 17일)이다. 京城典洞에 郵政局이 새로 落成되야 祝宴을 開하게 되엿는데 總辦 洪英植씨의 명의로 米國公使 「후드」, 日公使 竹添進一郞을 위시하야 某某 외국 사신을 초청하는 동시에 정부 요로 대관을 초청하게 되니 이는 開化黨의 積年間 企待하든 千載一遇의 호시기일 뿐 아니라 加之 總辦 洪英植은 역시 開化黨의 한 수령인 고로 물론 심기가 서로 상응하야 事大黨 撲滅의 대계획이 완비되엿든 것이다. 그 계획은 물론 郵政局落成宴을 한참 할 시기에 그 부근인 安洞別宮에다 불을 지르면 別宮은 重地인 까닭에 의례 대관들이 몰녀 올 터인고로 別宮 대문 근처에 力士를 매복하얏다가 일거에 事大黨을 전멸식히고 정부를 개혁코자 함이엿다. 그리하야 연회 시간도 洪英植씨가 특별히 야간으로 정한 것이다. 이 계획은 천지 귀신과 우리 동지 이외에는 별로 아는 사람이 업섯다. 지금에 생각하야도 그때 우리들이 비밀을 잘 직힌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엿다. 이와 가티 만반을 상의한 후에 反革運動의 用務를 각각 分掌하야 동지 柳赫魯씨는 궁내에 잇는 金朴 兩氏와 재외 당원 간의 통신을 맛고 나와 尹景淳 외 삼인은 徐載弼씨 지휘 하에 別宮에 방화하기를 맛고, 기타는 매복하얏다가 직접으로 某某 대신을 살해하기로 분담하얏다. 나는 柴油를 준비하야 가지고 야간을 乘하야 別宮 후문으로 달녀가 섯다. 그 후문은 매우 단단히 폐쇄되고 팔뚝과 가튼 굴근 철사로 금줄을 매서 여간하야는 파쇄하기가 어려웟다. 그럼으로 큰 끌을 가지고도 약 30분이나 辛苦하야 억지로 철사와 鐵?을 파쇄하고 문으로 돌입하야 첨아에 방화하얏다. 불이 막 타랴고 시작할 즘에 林殷明은 화약을 가지고 와서 庭內에 撤布하얏다.
어느듯 화약은 폭발되야
林殷明은 면부의 중상을 당하고〈5〉 나는 愴惶 중에도 두루맥이로 얼골을 가리고 공중으로 두어 길이나 뒤여 소사서 첨아 우에 올나섯다. 林씨의 그 부주의로 인하야 이 別宮의 방화는 실패에 도라갓섯다. 이에 이르러 일반은 愴惶罔措하야 엇지할 줄을 몰낫다. 그리하야 혹은 그만두고 도망하자는 사람도 잇고 혹은 다시 방화하자는 사람도 잇섯다.
그러나 시간은 벌서 느저서 근10시경이나 되얏다. 나는 중의를 배척하고 第二計로 다시 郵政局 배후에다 불을 놋코 비록 외국 공사까지 玉石俱焚이 될지라도 국제 문제는 추후로 밀고 爲先大事의 위급을 위하야 일망타진으로 연회장을 직격하자고 극력 주장하얏다. 나의 이 주장은 幸인지 不幸인지 일반이 聽從하야 즉시 실행하게 되얏다. 제일회 방화에 실패한 나는 최후의 결심으로
崔恩同과 가티 다시 郵局 후 민가로부터 방화를 하니 화염이 일시 天을 衝하야 북부 京城의 일대가 백주와 가티 되고 연회장은 수라장으로 화하얏다. 연회 중에 잇든 내외 빈객은 청천벽력과 가티 이 변을 당하매 愴惶히 문외로 나오랴고 하얏다. 竹添日公使는 물론 內應이 되야 이 변이 잇슬 것을 예측한 고로 그날에 칭병하고 오지도 안코 기타 외국빈객도 다행히 무사하얏다. 다만 事大黨의 巨魁인 右營使 閔泳翊이 먼저 나오다가 매복한 장사에게 저격되엿스나 또한 죽지 안코 도망하얏섯다. 이 閔씨가 살게 된 것은 事大黨의 幸인 동시에 우리 開化黨의 대실패엿다. 엇지되엿든지 이 급보를 궁내에 잇는 金朴 諸氏에게 報하매 金朴 兩氏及 徐光範 諸氏는 급히 太皇帝의 침전에 赴하야 龍眠이 方?한 太皇帝에게 그짓 告謁하되 淸兵이 亂을 作하야 위기가 임박하얏스니 속히 景祐宮으로 移御하자 하고 또 竹添公使에게 使를 遣하야 왕명으로 궁내 수호할 事를 청하니 日公使는 미리 예비하엿든 일개 중대를 率하고 궐내로 馳入하야 국왕을 옹호하고 다시 桂洞宮으로 移御한 후 왕명으로 閔泳穆(外衙總辦), 閔台鎬(內衙總辦), 韓圭稷(前營使), 李祖淵(左營使), 尹泰駿(後營使), 趙??夏(吏判) 등 事大黨의 중요 인물을 급히 詣闕케 하니 저들은 그것이 모도 開化黨의 계획인지도 모르고 屠場에 드러가는 牛羊 모양으로〈6〉 궁내로 드러오다가 매복한 開化黨의 ?頭驚魂이 되니 일시 궁내는 腥風血雨가 충만하야 극히 비참하엿다. 나의 칼에도 죽은 대관이 삼사인이나 되얏다. 이것은 午午軍亂 후 일대 반란으로 세상에서 이르는 바 十月大變이라 하는 것이다.

三日天下의 開化黨內閣
開化黨은 이와 가티 疾風迅雷의 勢로 일야간에 事大黨을 일소하고 新內閣을 조직하야
李載完은 左議政, 洪英植은 右議政, 金玉均은 戶?, 朴泳孝는 前後兩營使, 兼漢城判尹, 徐光範은 左右兩營使兼署理外務督辦으로 兵權及財産을 장악케 되고 5일 오후에 國權伸張及政界革新의 二大綱領을 내외에 선언하고 同日深夕에 太皇帝는 다시 還御하얏스니 당시 천하는 일조에 開化黨의 천하가 되고 말엇다. 그러나 6일에 至하야 일대 난 문제가 돌발하얏스니 이것은 淸將袁世凱의 간섭이다. 즉 袁世凱는 開化黨이 승리하고 事大黨이 몰락됨은 日本의 對朝鮮세력이 커지는 동시에 자국의 세력이 실추되는 것으로 認하고 무엄하게도 수하병을 率하고 국왕에게 문안한다 칭하고 宣仁門으로 襲入하니 守禦하든 朝鮮의 좌우영병은 此를 亂射하다가 勢孤難敵하야 모다 패주하고 궁내를 수위하든 日兵과 다시 交火하게 되야 탄환이 正殿에까지 飛入하니 당시의 위험은 실로 형언하기 어려웟다. 其時 日公使는 大駕를 옹호하야 校洞의 신축한 공관으로 잠시 移御하얏스나 淸兵의 세력이 원래 강대한 까닭에 능히 지지치 못하고 加之 몽매한 난민은 事大黨일파의 선동으로 淸兵에게 가담하야 日本거류민을 박해하니 日公使는 거류민과 공히 仁川으로 피난하고 太皇帝는 다시 淸將吳兆有의 옹호한 바가 되야 그 營門에 留御하얏다가 그 익 7일에 下都監에 잇는 袁世凱의 병영으로 다시 留御하고 洪英植, 朴泳敎( 朴泳孝兄)는 淸兵에게 피해하니 원래 근거가 깁지 못한 開化黨은 一敗塗地하야 그 내각이 근히 3일만에 와해되고 중요 인물들은 모다 仁川으로 도망하야 日兵의 보호 하에 日本으로 망명하얏다. 나도 또한 가티 망명하얏다. 선혈이 淋?한 나의 寶?도 日本人에게 매도하고 말엇다. 이것은〈7〉 천고의 恨事요 또한 朝鮮의 운명이라 볼 수 밧게 업다.

大事失敗는 미리 覺悟하얏다
그러나 대사의 실패될 것은 나도 미리 짐작하얏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제일에 開化黨의 수령이 모다 연소한 까닭에 비록 인물이 특이하다 할지라도 일의 경험과 훈련이 업섯고 (其時
金玉均은 33, 洪英植 30, 朴泳孝는 24, 徐光範 23, 기타도 불과 25, 6세 내외) 제이는 인민의 정도가 유치하야 開化黨 이외에는 響應하는 자가 업슬 뿐 아니라 도로혀 事大黨의 세력 하에 附從하는 자가 多하엿고 제삼에 事大黨의 배후에 잇는 淸兵은 세력이 강대한 동시에 開化黨의 후원인 日兵의 세력이 약하고 또 竹添日公使는 그 권모술략이 도저히 袁世凱를 필적치 못한 까닭이다. 그러면 우리는 엇지하야 그 여러 가지의 불리점을 보고도 감히 거사하엿는가. 그것은 다만 국가 민족의 장래를 위하야 鞠躬盡?에 死而後己하자는 열성이 잇슬 뿐이요 事의 성패여하는 不顧함이엿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비록 목전에 일대 실패를 할지라도 국민의 腦髓에 영원히 自主自立의 정신을 주고저 함이엿다.

白首餘生感慨多
세월이란 참으로 빠른 것이다. 그일도, 벌서 이럭저럭 44개의 星霜이 되엿다. 憶昔 당시에 紅顔소년들이 지금은 모다 백발이 성성하야 별로 이러노흔 사업도 업고 다만 築城餘石 모양으로 한 구석에 蟄伏하야 잇슬 뿐이다. 당시에 死生을 가티 하든 동지들은 동서로 飄泊하다가 혹은 이역의 고혼이 되고 혹은 지금까지 망명의 몸이 되야 잇는 이도 잇다.
朴泳孝씨도 지금은 병석에 누어 기식이 奄奄하다. 나와 申應熙, 柳赫魯 등은 근래에 소위 道長官으로 잇다가 老?物이 되야 그나마 퇴직을 하얏다. 나는 다만 †?사에 자미를 드려 두 손이 북두 갈구리가 되도록 날마다 노동을 하며 녀름이면 고기잡기, 겨울이면 산양하기로 취미를 삼는다. 그리고 자녀교육에 전력할 뿐이다. 지금에 와서 녯일을 생각하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 더욱히 新年을 당하고 보니 녯 생각이 간절이 이러난다. -(談·文責在記者)-〈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