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 허난설현과 그의 시"

이강기 2015. 9. 30. 16:32
" 허난설현과 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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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ㅁ자 배치를하고 있으며
외부를 둘러싼담이있다.

 

남녀의 구별이 엄격하여 남자들은 솟을대문으로
, 여자들은 우물간과 방앗간옆의 협문으로 출입하였으며

 

사랑마당과 구분하는 내외 담을사랑채 옆에 쌓아서

출입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사랑마당, 행랑마당, 뒷마당을담으로 넓게 나누어 놓아

한국의 아름다운조경을 볼수 있으며

 

 주변의 소나무 숲이
 전통적인 한옥으로

 한옥의 멋을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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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난설헌,  
    
조선이 낳은 비운의 여류시인. 허난설헌.
    본명은 허초희다.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의 누나다.
양천허씨 집안의 귀재로 태어났다. 
   그의 친정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를 배출한 집이였다..
   율곡선생도 부러워했을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 집안이였다고 한다. 
  아버지인 초당 허엽과 그의 자식들인
  
허성, 허봉, 허초희, 허균
  모두 당대 최고의 문인이였다.
  아버지는 딸에게도 글을 가르쳤고, 
  12살 위인 오빠 허봉이 주로 맡았다. 
  그리고 오빠의 친구인 손곡, 이달, 에게 시를 배웠다.
손곡은 서출이라 재주는 뛰어났으나
서출이라는 이유로 출세하지못했다.

허균 역시 손곡의 영향을 많이 받은듯하다.
그의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은
손곡일지 모른다는설이있다.

부친 허엽은 그녀가 18살때 경상감사 벼슬을 마치고
서울 상경도중 상주 객관에서 세상을 떠났고,

오빠 허봉은 귀양을 갔다가 돌아와 세상을 등지고
술이 지나쳐 그녀의 나이 26세에 세상을 떠났다.

      
 

        
  대문을 들어 서자 양담이 쌓여 있고,  

          오른편담 출입문이  열려있다.

           이문이  당시 여인네들의 전용 출입문이라 한다.
           남존 여비의 이조 봉건사회에서 

 

           여인네들이 별도로 기거하도록
           건축한 조선시대  사대부 건축물 

           "ㅁ"자형과 정원 구조가 눈에 띤다.
             
                                                             
              
  여인네들의 전용 출입문을통과 마당에 들어서니
                남향 퇴마루에 따스한 햇살이 내리 쬐이고 있고
                 아담하게 쌓아 올린 꿀뚝이  정겹게 보인다.
                정원에는  초겨울이라 꽃들이 말라 버렸지만
                조용하고 아늑한 안마당  포근하게느껴 졌다.
                허난설헌은 안동김씨 김성엽과 15살에 결혼했다. 
                    남편의  가문은5대를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의 집안이었다.

             남다른 재능을 가졌던 그녀의 불행은 
             혼인을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용렬한 남편은 부인에 대한열등감으로 그녀를 냉대했고
             그녀는 남편을 기다리며 
            독수공방하는 외로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던 두 아이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야 하는 비운의 여인이였습니다.
           자식의 잃은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많은 시를 썼지만, 
           남존 여비의 봉건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더 없이 냉혹했습니다
               

그녀의 나이 27세 되던 해에 홀연히 의관을 정제하고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의 수(27세)에 해당되니


,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하고는 눈을 감았다. (1589)

그녀가 죽기 전(1385)에 꿈 속에게 선계인 광산산에 올랐다가


두 선녀의 청으로 시를 썼는데,

잠에서 깨어나 그때 읊은 시를 생각하며


위 시비에 있는 시를 지었다.

그는 죽으며 그가 쓴 시를 모두 불태우게 했다


그러나 그의 주옥같은 시는 그의 동생 허균에 의해 수집되어

시집으로 발간되었다.

중국에서 일본에서도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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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 군락

                수령이몇백년 이상은 되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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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당  허난설헌  생가 옆을 흐르는 개울

        지금도 이곳에 붕어를 낚는 태공이 가끔눈에 띠인다.
        붕어를 낚는것인지, 아니면 유서깊은이곳허난설헌의생가 에서 

        한많은 인생을 詩로서 남기고간  詩心을 낚고있는지 ....

우리 사회는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

우리 역사속 여성인물에 대해서도 평가가 보수적이다.



허난설헌은 그의 시로 평가받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사대부가의 여성으로서 훌륭한 시를 남겼던

허난설헌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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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이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잃고
      피눈물로 울며 목이메이도다 ...

<곡자(哭子)>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去年喪愛女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今年喪愛子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哀哀廣陵土

두 무덤이 마주 보고 있구나.

  雙墳相對起

백양나무에는 으스스 바람이 일어나고

  蕭蕭白楊風

도깨비불은 숲속에서 번쩍인다.

  鬼火明松楸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紙錢招汝魂

너희 무덤에 술잔을 따르네.

  玄酒存汝丘

아아, 너희들 남매의 혼은

  應知第兄魂

밤마다 정겹게 어울려 놀으리

  夜夜相追遊

비롯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縱有服中孩

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라리오.

  安可糞長成

황대노래를 부질없이 부르며

  浪吟黃坮詞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이도다.

  血泣悲呑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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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드러낸 한시이다.

  자식을 생각하는 모정의 피눈물은 듣고 보는 이의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특별한 비유나 수식 없이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었다.
 

        
寄夫江舍讀書 (기부강사독서);

강사에서 책 읽는  낭군에게 부치는 글.


燕 掠 斜 ? 兩 兩 飛 (연 략 사 첨 양 양 비)

제비는 비스듬한 처마에 쌍쌍이 날아들고,

落 花 ? 亂 拍 羅 衣 (락 화 요 란 박 라 의)

떨어지는 꽃잎은 어지러이 비단옷을 때리네,

洞 房 極 目 傷 春 意 (동 방 극 목 상 춘 의)

깊은 규방에서 가는 곳마다 봄을 잃어 버렸다네,

草 綠 江 南 人 未 歸 (초 록 강 남 인 미 귀)

풀은 벌서 푸르렀는데 강남 갔던 님은 돌아올 줄 모르는구나.




제비가 사람 사는 처마까지 노략질해 가며

쌍쌍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니


사랑의 표현을 제비처럼 과감하게 하지 못하는 인간

으로 태어난 것이 오히려 원망스럽기까지 하구나.


떨어지는 꽃잎 하나하나에 내 청춘의 시간도

일각일각 헛되이 지나가고 마는데,


저 꽃잎이 날 보라는 듯이 내 비단옷에만 떨어지니

내 마음은 정말 찢어지는 듯이 괴롭고 답답하구나.


아무도 찾지 않는 동굴 같은 깊은 규방에 홀로 있으니,

님과 함께 지내던 꿈같은 추억의 흔적마저

하나 둘 살아지고 잊혀져 가는구나.


풀빛이 파래지면 강남 갔던 제비도 돌아온다는데

저 강가의 공부방에 책을 읽으려 간

우리 님은 왜 돌아올 줄 모르는고.


이 시는 허난설헌이 신혼시절 남편이 공부한다고

강가의 집 으로 갔을 때,

  공부하는 남편이 보고 싶어서 지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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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물은 최근 신축한  허난설헌 생가옆에 위치한  

                       허균, 허난설현 기념관이다.





       임진왜란시  지원병과 함께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온
오명제


      그는 조선의 시와 문장을 수집 중이었다

   . 그를 맞이한 허균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누이의 시를 건네게 되는데....


     오명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간 난설헌의 시.

     그 후 허난설헌 의 시는 중국의 조선시선을


       비롯한 여러 책에 수록되고,

      중국 에서 최초의 한류(韓流)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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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시 허난설현 기념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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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원가(閨怨歌)-허난설헌-고금가곡(古今歌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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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   늙고 초라한 신세를 한탄함

엊그제 젊었더니 어찌 벌써 이렇게 다 늙어버렸는가?

어릴적 즐겁게 지내던 일을 생각하니 말해야 헛되구나.

이렇게 늙은 뒤에 설운 사연 말하자니 목이 멘다.

▶ 늙음을 한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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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낳아 기르며 몹시 고생하여 이 내 몸 길러낼 때,

높은 벼슬아치의 배필은 바라지 못할지라도


군자의 좋은 짝이 되기를 바랬더니,

전생에 지은 원망스러운 업보요, 부부의 인연으로(불교의 윤회 사상)

장안의 호탕하면서도 경박한 사람을 꿈같이 만나,


시집간 뒤에 남편 시중들면서
조심하기를 마치 살얼음 디디는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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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가하던 젊은 시절(회상)


열다섯 열여섯 살을 겨우 지나 타고난 아름다운 모습 저절로 나타나니,

이 얼굴 이 태도로 평생을 약속하였더니,


세월이 빨리 지나고 조물주마저 다 시기하여 봄바람 가을물,

곧 세월이 베틀의 베올 사이에 북이 지나가듯 빨리 지나가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 어디 두고 모습이 밉게도 되었구나.

내 얼굴을 내가 보고 알거니와


어느 님이 사랑할 것인가?

스스로 부끄러워하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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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자신에 대한 한탄

승 ㅡ   임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애닯은 심정

여러 사람이 떼지어 다니는 술집에 새 기생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꽃 피고 날 저물 때 정처없이 나가서 호사스러운 행장을 하고

어디어디 머물러 노는고?

집안에만 있어서 원근 지리를 모르는데


님의 소식이야 더욱 알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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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에 출입하는 남편에 대한 불안과 괴로움


겉으로는 인연을 끊었다지만 님에 대한 생각이야 없을 것인가?

님의 얼굴을 못 보거니 그립기나 말았으면 좋으련만,

하루가 길기도 길구나.



한 달 곧 서른 날이 지리하다.

규방 앞에 심은 매화 몇 번이나 피었다 졌는고?

겨울 밤 차고 찬 때 자국 눈 섞어 내리고,



여름날 길고 긴 때 궂은 비는 무슨 일인고?

봄날 온갖 꽃 피고 버들잎이 돋아나는 좋은 시절에

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아무 생각이 없다.



가을 달 방에 들이 비추고 귀뚜라미 침상에서 울 때

긴 한숨 흘리는 눈물 헛되이 생각만 많다.

아마도 모진 목숨 죽기도 어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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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내내 끊임없는 임에 대한 그리움



전 -     외로움을 거문고로 달래 봄

돌이켜 여러가지 일을 하나하나 생각하니

이렇게 살아서 어찌할 것인가?


등불을 돌려 놓고 푸른 거문고를 비스듬히 안아

벽련화곡을 시름에 싸여 타니,

소상강 밤비에 댓잎 소리가 섞여 들리는 듯,



망주석에 천 년만에 찾아 온 특별한 학이 울고 있는 듯,

아름다운 손으로 타는 솜씨는 옛 가락이 아직 남아 있지마는


연꽃 무늬가 있는 휘장을 친 방이 텅 비었으니

누구의 귀에 들릴 것인가?

마음 속이 굽이굽이 끊어졌도다.


거문고로 시름과 비애를 달래 보지만,

      적막함은 더욱 애를 끊는 듯함

결 -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임을 기다림

차라리 잠이 들어 꿈에나 님을 보려 하니

바람에 지는 잎과 풀 속에서 우는 벌레는

무슨 일이 원수가 되어 잠마저 깨우는고?

하늘의 견우성과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을지라도

칠월 칠석 일년에 한 번 씩 때를 어기지 않고 만나는데,

우리 님 가신 후는 무슨 장애물이 가리었기에

오고 가는 소식마저 그쳤는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님 가신 데를 바라보니,

풀 이슬은 맺혀 있고 저녁 구름이 지나갈 때

대 수풀 우거진 푸른 곳에 새소리가 더욱 서럽다.



세상에 설운 사람 많다고 하려니와 운명이 기구한 여자야

나 같은 이가 또 있을까?



아마도 이 님의 탓으로 살동말동 하여라.

잠을 자지 못하고 임을 기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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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전 백옥루 상량문

抛梁東(포양동)            어영차, 동쪽으로 대들보를 올리세.
曉騎仙鳳入珠宮            새벽에 봉황 타고 진주 궁궐에 들어가,
平明日出扶桑底            날이 밝자 해가 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萬縷丹霞射海紅            일만 가닥 붉은 노을 바다에 비쳐 붉네.

 

抛梁南(포양남).          어영차, 남쪽으로 대들보를 올리세.
玉龍無事飮珠池          옥룡이 하염없이 구슬 연못의 물 마시는데.
銀床睡起花陰午          은 평상에 잠자다가 꽃 그늘 짙은 한 낯에 일어나, 笑喚瑤姬脫壁衫          웃으며 아름다운 미녀 불러, 푸른 적삼 벗기네.

 

抛梁西(포양서).         어영차, 대들보를 서 쪽으로 올리세.
壁花零落彩鸞啼         푸른 꽃 시들어 떨어지고 오색 난새 우짖는데,
春羅玉字邀王母         비단 천에 아름다운 글씨로 서왕모 맞으니,
鶴馭催歸日已低          날 저문 뒤에 학 타고 돌아가길 재촉하네.

 

 

抛梁北(포양북).         어영차, 대들보를 북 쪽으로 올리세.
溟海茫洋浸斗極          북해 아득하여 북극성에 젖어드는데,
鳳翼擊天風力?         봉새 날개 하늘 치니 그 바람 힘으로 물 높이 치솟아,
九?雲垂雨氣黑          구만리 하늘에 구름 드리워 비의 기운 어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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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

그녀는 고되고 쓸쓸한 생활을 수없이 썼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고독만을 한탄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세상 여인들의 여러 가지의 고충을 동정하고
, 특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다는 이유로 학대받고
굶주림에 울어야 하는 사람들의 비애와 분노를
자신의 고통으로서 노래하고 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노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불합리와 신분 차별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국가의 운명을 염려하는 백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국토 방위를 위한 공사에 동원된 서민들의 애국심을 노래하였다.


그녀는 생각하고 느끼고 모든 것을 마치 일과처럼 시로 쓰려고 하였다.
그렇게 쓴 시고(詩稿)는 커다란 장롱으로 가득 찼다고 한다
. 그러나 주부로서 항상 고독하였던
그녀는 1589년 겨우 스물 일곱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숨을 거두기에 앞서 그녀는 생명을 불태우듯이 써 왔던
시고를 전부 태워 버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유언대로 그녀가 죽자 그 주옥같은 시들은 모두 불태워졌다.
물론 시댁 사람들이 한 일이지만, 통탄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녀가 친정에 남겼던 시고가
그녀의 동생인 허균에 의해서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었다.

천부적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은 그녀였지만,
그녀가 세상을 뜨고 열 일곱 해가 지난 1606년,
그녀는 우연히 일약 국제적인 존재가 되었다.

때마침 그해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과,
부사 양유년(梁有年)이 시작을 좋아하여 허균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허균이 보여준 죽은 그녀의 유고를 보고
그 훌륭한 시에 경탄하였다.
주지번은 허균에게 부탁하여 허균이 준 허난설헌의 시고를

명나라에 가져가조선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집」을 발간하였다.

그 시집은 명나라 도처에서 크게 환영받아 각지에서
시집의 주문이 쇄도하여 문자 그래도 낙양의 종이 값을 올렸다는

 평판을 얻었다.


그 중에서도 명나라의 유명한 문인 조문기(趙文奇)는 그녀가 일곱 살 때 쓴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읽고 절찬하였다.

이 문장을 읽으니 흡사 신선이 되어 백옥루에 올라 있는 느낌이 들었다
." 명나라에서 그녀의 시집이 대단한 평판을 받자 곧 조선에 역수입되었지만
, 허균이 1618년 반역죄로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녀의 시집도 그대로 매장되고 말았다.


그리고 1692년이 되어서야 다시 조선에서 그녀의 시집이 출판되었다.
그것은 명나라에서 출판된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도 서울에서 출판된 것이 아니라 동래(東來)에서 간행되었다.

무역차 부산을 왕래하던 일본의 사신과 상인들도

이 시집을 일본에 가지고 가서,


1711년 분다이야 지로베에등에 의하여 간행되어

일본에서도 널리 애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