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을 논한다
1. 미당 서정주 가다 (한겨레 최재봉기자)
2. 미당의 죽음과 문인 의식 (시인
노혜경)
3. 미당선생 혹평 자제해야 (중앙일보 독자)
4. 미당집 대문앞에 놓인 임자없는 꽃다발 (조선일보)
5. 고 서정주
황순원을 말한다 (전상국, 문정희)
▣ 미당 서정주 가다
시인 미당 서정주씨가
2000.12.24 오후 11시7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생명파'라는 이름을 얻은 미당의 초기 시의 탐미적 관능의 세계와 불교로
대표되는 동양정신을 추구한 후기 시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하지만 미당 시를 관류하는 공통점은 우리말을 다루는 그의 천부적인 감각과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 그의 시언어적 특성이라고 평가된다. (한겨레 최재봉 기자)
24일 타계한 미당 서정주 시인은 한국
순수시단을 대표하는 문단의 거목이었다. 그는 등단 이후 60여년간 무려 1천편에 가까운 시를 양산해내며 한국 문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때 중촵고등학교 교과서에 무려 10편 가량의 시가 실렸다는 사실은 그의 위치가 얼마나 컸었나를 잘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전북
고창 선운사 부근에서 태어난 미당은 일찍 개명해근대교육을 받은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하게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입학 이후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면서 퇴학당했고, 편입한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도 권고 자퇴당하는 등 학교 생활이 평탄하지
못했다. 동국대 전신 중앙불교전문학원에 입학한 이듬해(193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를통해 문단에 나온 미당은 김동리, 이용희, 오장환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이끌며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30년대를 주름잡던 김기림과 이상의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를 극복 대상으로
삼는 한편 20년대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적 경향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이같은 시세계에 영향을 준 것은 고향의 원초적 서정과 외국의
문학세계였다.
이와 함께 광범위한 문학적 체험은 다양한 편력을 낳게 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출발해 짜라투스투라로
이어지는 신성과 초인정신에 관심을 가짐은 물론 보를레르와 이백으로부터는 인간의 질곡과 자연의 시심을 두루 섭렵했다. 그런가 하면 김영랑에게서는
우리말의 떳떳함과 황홀함을 배웠으며 이상에게서는 내심의 밑바닥에서 꾸밈없이 솟구치는 언어의 환희를 받아들였다.
41년에 첫 시집인
「화사집」을 내놓은 미당은 해방 후 순수문학 또는 순수시라는 개념을 내걸고 당시 문단을 주도한 좌파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맞섰다. 그는 극심한 좌우
대결 속에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 참여해 계급문학 또는 경향문학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의 시적 경향은 한국전쟁 후 반공 국시가 더욱 강화되면서
남한 문학사의 주류로 자리잡았고, 이후 교과서에 다수의 작품이 수록됨으로써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도 상당히 깊숙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시적
편력은 보를레르와 니체, 그리스신화에 몰두했던 초기와 순수시의 논리로 민족전통과 정신의 세계를 추구한 중기, 소박하고 진솔한 삶이 어우러진
고향이미지와 떠돌이 삶을 표현한 후기로 구분된다.
초기에는 「화사집」 등 해방 전까지의 작품이 해당되며 중기는 두번째 시집인
「귀촉도」에서 72년에 나온 「서정주 문학전집」까지를 일컫는다.
그리고 후기는「질마재 신화」 이후의 시 창작이다.
미당은 77년 이후 킬리만자로에서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까지 세계 곳곳을 떠돌며 그곳의 풍물과 사상, 종교, 철학 등을 시로
담았다. 특히 90년대에 펴낸 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나 「80 소년 떠돌이 시」는 만년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시세계를 생명파, 또는 인생파로 규정했다.
서씨는 49년 「조선명시선」을 편찬하며 ≪시인부락≫과 ≪생리≫의 동인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면서 이들은 인간 본연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휴머니즘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당은 한국시사를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영예와 일제 및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불명예도 함께 안고서 평생을 살았다. 일제 말기에 친일활동이라는 부끄러운 상처를 남긴
그는 80년 광주항쟁과 전두환정권 수립 와중에서 TV 방송에 출연, 군부 지지를 공개 선언함으로써 씻기 힘든 오점을 남겼다.
이같은 행적으로 그는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후배들의 따가운 비판 대상이 됐고,과거의 시 세계도 빛이 바랬다. 문학교육 현장에서도
부정적 인식이 확산돼 국정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잇따라 배제됐으며 검인정 교과서도 일부만이 제한적으로 수록됐다. 이 때문에 자신이 추천한 시인
고은씨 등이 차례로 등을 돌린 데 대해 서운함을 털어놓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의 와병을 계기로 일부 계간지와 언론이 미당의 부끄러운 과거와
문학과의 상관 관계에 대한 논의를 벌이는 등 우리 문단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끊이지 않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 미당의 죽음과 문인의 의식
▲ 대한매일
2001-01-08 / ▲ 노혜경 시인
옛날 천주교가 박해받은 시절의 기록을 보면,신자들이 관리들 앞에 끌려가 묵주에 침을 뱉든가
마리아상을 밟고 걸어보라는 요구를 받는 대목이 나온다. 스스로 신자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고 증명해야만 한다는, 존재의 신원에 대한 강요가 참으로
섬뜩하게 느껴진 대목이었다. 신앙의 자유가 개인의 권리가 아닌 시절 남다른 길을 택한 사람들이 도달해야 한 삶과 죽음 의 막다른 벼랑은 '진실과
죽음''거짓과 삶'이라는 기묘한 조합을 우리 생의 한 원리로 인식시키기에 족했나보다.
최근 문인들과 지식인들은 한 노시인의 죽음
앞에서 비슷한 질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학병입대 선동의 시를 썼고 5공 시절에는 독재자 얼굴이 "태양처럼 빛난다"라는 시를 쓴
바로 그 사람, 광주항쟁 피해자들을 향해 "공권력의 적법한 행위이므로 배상 불가"라고 망언을 퍼부은 바로 그 사람, 미당 서정주를 여전히 빼어난
시인으로 추모할 것인가, 아니면 버릴 것인가.
이것이 저 섬뜩한 질문과 닮아 있는 것은,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라는 점
말고도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그 선택을 한 바로그 사람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가 명백히 드러난다는 점에서이다. 나는 지난 여름 미당의
'국화옆에서'를 둘러싸고 벌어진 어용시비를 바라보며, 친일?친 독재 부역자들의 문학을 문학사 내부에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문학 가치평가의
메커니즘이 고장난 것이라는 요지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미당문학에 대한 성토나 비판이 그동안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에 미당은 분명 젊은 작가들에 의해 배척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슬그머니 복권된
미당을 둘러싸고 오늘 현장의 문학을 선택하고 평가할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 보여준 상찬이나 침묵은 도무지 그 이유를 가늠할 길 없는 신비로까지
보인다. 그 무거운 침묵을 타고 미당은 가장 찬양받는 국민시인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 그 미당이 죽었다. 당신들은 입을 열어 무슨 말이라도
적어야 한다. 미당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보입니까? 이제야말로 미당에 대한 논평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미당의
죽음은, 그 자체로서 바로 나 자신을 비롯한 문인?지식인들의 정체를 시험하는 리트머스용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당을 밟지 않는 것, 그것은
현재의 안락함을 그대로 이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자기 신앙을 배반한 대가로 목숨을 이어간 사람들, 살아서 영혼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현재형 판본인 것이다.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거행하는, 미당의 죽음에 대한 애도라는 의례의 성격과 수위를 감상하면서 나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부패한 정신에 의해 조직되는지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비애를 맛본다. 일반 시민의 목소리라 할 수 있는 인터넷상의 반응이
압도적으로 미당 문학에 대한 부정과 그의 삶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인 것과 비교해볼 때, 소위 주류언론의 꽃다발 바치기는 미당 옹호가 기득권
수호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미당에 대한 부정이 자기 삶에 대한 부정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찬양하기까지
하는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가스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낭만적으로 향수하며 바그너의 오페라를 듣는 아우슈비츠의 장교는 아름다운가? 한
사람의 생이 지금 우리사회 지식인의 신원을 결정짓는 척도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미당의 죽음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가 지금 너무나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아마도 앞으로는 생과 문학을 분리시키고도 당당할 수 있는 문인이 다시는 불가능하리라. 미당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예사롭지 않은 공방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 죽음이 던지는 질문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리고 지켜보아야
한다. 누가 미당을 옹호하는가, 그리고 왜? 바로 그 사람이 어떤 자인가를 우리가 아는 것은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당의 죽음이
가져올 파장은 바로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미당에 대한 추모의 수위야말로 조선일보 문제에도, 과거청산 문제에도 한사코 발언을 꺼려 온 문인들이 제
정체를 백일하에 드러내어 보이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 "의식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 미당선생
혹평 자제해야 - ▲ 중앙일보 2001-01-06 (독자)
서정주 선생이 돌아가신 뒤 여러 글에서 미당 선생에 대한 혹평을
접했다. 생전의 친일 행적을 잊지 않고 살펴야 할 필요는 있겠지만 지나친 혹평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당은 생전에 과거의 과오로 인한
고난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한번도 회피하지 않았다. 1994년에는 유언장 같은 참회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똑같이 친일행각을 보였으나 민족의
지성이라며 동상까지 세워진 어떤 이들이 참회의 글귀를 남겼다는 얘기를 나는 듣지 못했다.
파벌을 형성하지 않으며 문단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미당의 발자취는 허위가 섞인 개량주의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뇌가 녹아 있는 업적이다.
김상헌.동국대 국어교육과 3년
▣ 미당 집 대문앞에 놓인 임자없는 꽃다발 - ▲ 조선일보 2001-01-05
*"예술인 마을에 당신이 없습니다"
한국 시문학을 대표했던 미당 서정주 시인이 세상을 뜬 지 열 하루.
올 겨울
가장 춥다는 4일 서울 관악구 남현동 '예술인 마을'에 있는 미당 집 대문에는 고
인을 추모하는 꽃다발 2개가 꽂혀 있었다.
'예술인 마을에 당신이 없습니다―.
동네 주민이었을까? 아니면 그를 흠모한 문학청년이었을까? 길게 늘어뜨린 꼬리띠에는 몇 자
헌사가 적혀 있고, 그의 대표시인 '국화꽃 옆에서'를 떠올리듯, 꽃다발 안에는 추위에
바싹 마른 노란색 국화꽃 열 몇 송이가 갇혀
있었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ㅎ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편지함에는 미당이 후학들을 가르쳤던 동국대의 '동대신문' 그리고 '한국문예학술저작권
협회'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등지에서 날아온 우편물이 들어 있다.
보는 이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던 것은 2001년 1월분 도시가스요금 청구서다.
주인 내외가
74일간을 사이에 두고 앞서거니(부인 방옥숙 여사) 뒤서거니 세상을 뜨고 없건만 청구서는 '남현동 1071-11 서정주' 앞으로 돼 있다.
집안 마당에는 주인을 잃은 개 한 마리가 묶여 있고, 그를 만나러 온 동네 개 한 마리가 같이 어울리고 있다.
안전관리 시스템
회사가 관리하는 2층 빈집의 마당에는 키 큰 낙엽송들이 미당의 서재인 봉산산방을 어른거렸을 큰 잎새를 다 떨어뜨린 채였고, 대문 앞 동그마니
서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유독 많은 솔방울들을 매달고 찬바람에 손발을 비비고 있다.
미당의 처남인 방한열씨, 제자인 문정희 시인,
문학평론가 윤재웅 교수(동국대) 등은 유족들과 상의, 미당이 말년까지 30년 가까이 살았던 이 집을 기념관으로 만드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관악구청과 서울시 등이 예산 확보가 쉽지 않아 우선 노인정으로 만드는 아이디어도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당의
육신은 남현동을 떠났다.
그러나 예술인 마을에서 그의 혼이 어찌 발길을 뗄 수 있을까? 큰 시인의 서재를 흔쾌하게 기념관으로 만들 수
있는 나라이긴 하지만….
그가 떠난 뒤에도 이런저런 웹공간엔 그의 과거 행적을 시비삼는 칼 닮은 글들이 수런수런 한다는데, 미당의 시혼은
고향 질마재에, 이곳 남현동에도 정녕 깃들 수 있을 것인가?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 故 서정주?황순원을 말한다
▲
[만남] 전상국-문정희 교수
▲ 한국일보 입력시간 2000/12/29 21:43
"두 선생님은 문학이 인생이고 인생이 곧
문학이었죠"
새 천년의 첫해, 우리 문단에서는 두 거인이 스러졌다. 황순원과 서정주. 1915년 같은 해에 태어나 올해 나란히 타계한
이들은 '소설하면 황순원, 시에는 서정주'라 불릴 만큼 한국문학의 거목이었다.
황순원으로부터 소설수업을 받은 작가 전상국과 서정주로부터
시를 배운 문정희 시인이 만나 스승의 문학 세계를 이야기했다.
- 돌아가시던 날, 느낌이 특별하시겠어요.
▦문정희
= 24일 밤 저는 오후 9시30분까지 곁에 있다가 "오늘 밤은 괜찮을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집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1시간 30분
정도 있다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어요.
순간 아찔했습니다. 시신을 차마 볼 수 없을 것 같아 미당이 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을
읽었습니다. 그날 밤에는 눈도 참 많이 내렸습니다. 다음날 새벽까지 선생님의 시를 읽은 뒤 영안실로 찾아 갔습니다.
▦전상국 =
저는 올 9월 황순원 선생님을 떠나 보냈습니다. 춘천 집에 있는데 기자가 연락을 해왔습니다. 순간 하늘이 무너진 느낌이 들었지요.
- 두 분은 어떻게 해서 황순원, 서정주 선생님과 인연을 맺었습니까.
▦전상국 = 고 3때 제6회 학원문학상
대회에서 입상한 뒤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때 이미 '인간접목' 등 황순원 선생님의 단편 몇 편을 읽었는데 그 영향으로 선생님이
계시던 경희대로 진로를 정했습니다. 그게 1960년입니다.
▦문정희 = 65년 진명여고 3학년때 동국대 백일장에서 '플래카드'라는
시로 장원에 뽑혔습니다.
동국대에 계시던 미당이 제 지도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쓰냐"며
칭찬을 해주었어요. 그 한 말씀에 저는 동국대 입학을 결심했습니다.
그 해 고등학생 신분으로 시집을 냈는데 미당이 서문도 써주고 '첫
숨결'이라는 뜻에서 '꽃숨'이라는 제목도 달아 주었습니다. 그 뒤 제 주례도 서주었고 아들 이름도 지어주셨어요.
▦전상국 = 대학
2학년때 원고지 70매 정도 되는 소설을 하나 써 황순원 선생님께 보여드린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두 달 정도 후 "잘 썼더구먼"하시며
원고를 돌려 주셨습니다.
원고를 보니 틀린 문장과 틀린 낱말, 어색한 표현을 연필로 일일이 고쳐 놓으셨지요. 나는 어휘력도, 문장력도
떨어지는구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왔고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그 작품은 다음해 신춘문예에 당선된 '동행'의 초고였습니다.
스승께 글을 자주
보여주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데 그 일이 있은 뒤 그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더군요. 그래서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문정희
= 미당은 제가 쓴 시를 보시면 "상당해졌어" "더 솔직해야겠더라"등의 말로 평을 해주셨지요. 어느 부분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구체적 지적이
없어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의미를 알 것도 같습니다.
- 가까이서 본 두 분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전상국 = 흔히 문학 하다 보면 작품과 작가가 불일치하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황선생님은 작품과 작가가 완벽하게,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치한 분이었습니다.
▦문정희 = 미당은 제가 꿈꾸던 그런 시인이었죠. 어떤 사람도, 어떤 사물도 그는 시로
표현했으니까요. 한번은 조선 백자를 만지시더니 "우리의 살결과 숨결 같다"고 표현했어요. 또 한번은 바이칼호에서 사 온 옥칼을 귀에 대더니
"바이칼호의 억만년 세월이 들려온다"고 표현했어요. 말 한마디가 그대로 시어가 됐습니다.
▦전상국 = 황순원 선생님은 띄어쓰기나
맞춤법 등에서 우리말을 완벽하게 구사했습니다. 우리 말로는 어색하고 번역투에서 나온 서구식 3인칭 표현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사람 이름을 구체적으로 썼고 '그녀'라는 말 대신 '그네'라고 표현했죠. 독자를 중히 여기라는 말씀도 많이 하셨는데 책을 낼 때면 초교와
재교를 늘 손수 보셨습니다.
▦문정희 = 미당은 책을 건성으로 읽지 말고 치밀하게 읽으라고 했어요. 톨스토이의 인생론이나 각국의
신화, 삼국유사 등을 읽으라고 하고 그 책이 담고있는 정신을 잘 파악하라고 했지요.
- 스승 두 분은 생전에 교류가 잦았습니까.
▦문정희= 그럼요. 서울 관악구 남현동 예술인마을에서 함께 사시면서 자주 만났어요. 걸어서 5분 거리거든요. 미당은 황순원
선생님의 아드님인 황동규 시인의 문단 추천을 해주셨고, 미당의 따님인 승해씨를 문단에 추천하고 결혼 주례를 한 분은 황순원 선생님이지요.
▦전상국= 황순원 선생의 칠순잔치 때 미당이 황선생님을 위해 쓴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학두루미나 두어 마리 / 가끔
내려와 앉아서 쉬는 / 산골길의 낙락장송 같은 그대'라고 칭송하셨죠. 미당은 그만큼 황순원 선생님의 선비적인 이미지를 좋아하셨습니다.
▦문정희= 9월 황순원선생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미당께 소회를 여쭸더니 "서럽다", 한 말씀 하시더라고요.
- 황순원
선생님은 제자들과 정기적으로 '보신탕모임'을 가지셨지요.
▦전상국= 몇 달에 한번씩 제자들과 함께 보신탕을 먹는 자리를
가졌었는데요, 저를 포함해서 김용성 조해일 정호승 고원정 박덕규 하응백 등이 주로 참여했죠.
보신탕 모임은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인 올
여름까지 계속됐습니다. 여제자들이 기겁을 하고 먹지 않으려 하면 "이걸 먹지 않고 어떻게 문학을 한단 말인가"라며 농도 치시곤 했죠.
▦문정희= 저도 황순원 선생님으로부터 술을 얻어 먹었는데요, 참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당은 보신탕 모임 정도는 아니지만 조정래 김초혜 박재천 같은 동국대 출신과 서라벌예대(중앙대)에서 강의하던 시절의 제자인 유현종
이근배 천승세 같은 문인들과 어울렸습니다.
▦전상국= 미당을 뵌 적은 없습니다만 시를 보면 미당은 비오는 날 하얀 바지를 입고
물웅덩이를 저벅저벅 걸어가는 천진하고 장난기 많은 어린아이 같아요. (웃음)
▦문정희= 미당의 시 정신이 바로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모든 사물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 미당과 황순원 선생의 문학적 세례를 받은 제자로서 앞으로 두분 선생님의 문학적
성과를 어떻게 이어나가실 생각입니까.
▦전상국= 흔히 '문학의 종언' 운운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자기 문학에 정진하다 보면 이
시대에도 작가의 영역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80년대 초반 세상이 어지러울 때 선생과 둘이서 술 한잔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께서 "나는 소설도 예술이라는 것을 끝까지 보여주는 마지막 작가가 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소설이 예술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데,
새삼 '소설도 예술'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 의아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말은 상업주의와 문학의 효용성에만 치우치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문정희= 개인적으로 미당이 닦은 시의 터전 위에 제 목소리를 내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경지에 오른
스승을 모신 제자의 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 미당과 황순원선생의 작품은 모두가 주옥같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전상국= 황순원선생은 시 104편과 단편소설 104편, 장편소설 7편을 남겼습니다. 교과서에
실린 단편 때문에 단편 작가로 알고 있는데 황순원 문학의 정수는 바로 장편 7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일월' '신들의 주사위'
'움직이는 성'을 추천하고 싶네요. 독자들은 작가의 '부단한 형식 실험'과 '인간의 존엄성'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문정희=
어찌 감히 선생의 작품 중 좋아하는 것을 고를 수 있겠습니까. 15권의 시집에 1,000여편의 시를 남겼는데 모두가 절창(絶唱)입니다. 선생께서
제일 아낀 당신의 시집은 제5시집인 '동천(冬天)'입니다. 그래서 겨울 하늘로 떠나셨는지도 모르죠.
아, 미당이 남긴 미발표작이
하나 있습니다. 2년전 동국대에서 개교 90주년을 맞아 시 한 편 부탁드렸는데, 그 때 선생이 "쓰려면 100주년 기념시를 써야지" 하며 쓴
시가 있는데 지금 동국대에 보관돼 있습니다. 그 시가 공개될 날이 기다려집니다.
■전상국
1940년 강원 홍천에서
태어났다. 60년 경희대 국문학과를 나왔으며 소설가이자 강원대 국문학과 교수로 활동중이다. 단편집으로 '아베의 가족' '지빠귀 둥지속의
뻐꾸기'등이 있고 장편으로는 '유정의 사랑'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칭찬에 진로결정 어린아이같은
호기심이
미당 시정신의 출발 내 문학의 터전으로 자리
■문정희
1947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동국대 국문학과를
나와 현재 시인 겸 동국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로 활동중이다. 시집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남자를 위하여'등이 있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등의 소설도 썼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박광희기자 kwpark@hk.co.kr
김기철기자 kimin@hk.co.kr
이선우 홈페이지에서 퍼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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