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성 독문학자 전혜린의 삶과 글쓰기에 대한 조명
- 장 순 란
(서강대)
Ⅰ. 들어가는 말
1950?60년대 한국은 전쟁 및 분단을 통한 전통과의 단절 및 근대사회로의
도약이라는 새로운 자각이 중첩적으로 대두되었던 시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 전후 젊은 지식인 세대는 스스로 전쟁이라는 한계상황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내면의식에는 언제나 불안의식과 강박관념이 잠재되어 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의식적으로 새로운 미래 세계를 향해 꿈틀거린다.
1934년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을 체험하고 서구 근대문물을 접한 60년대 한국 지식인 전혜린은 이들 전후 세대에 속한다. 그녀는 전후 혼돈의
시기에 ‘한편의 완벽한 문학작품 창작’을 갈망한 문학적 자의식과 자아구현의 욕망이 매우 강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후의 암울한 공간을
넘어서 근대 세계에 이르지 못하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전혜린은 자신의 존재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짧은 생 내내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했지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에 끝내 적응할 수 없었다.
본고는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한순간 생을 마무리한 한국 최초의 여성
독문학자전혜린의 삶과 문학을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새로운 연구대상의 가치가 새로운 인식을 통하여 창출된다면, 이미 역사 속에
묻혀버린 전혜린의 삶에 대한 조명은 우리의 과거 역사 속에서 또 다른 다양한 근대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시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성 자체가 개인적 존재에 대한 실존적 자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전혜린은 당대의 암울한 가부장적 현실 속에서 자신이 만든
폐쇄적 인식틀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삶을 향한 그녀의 힘겨운 추구는 역설적으로 전후 근대성 지향의 또 다른 하나의 좌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첫 장에서는 전혜린의 자의식 형성과정을 그녀의 유년기, 청년기의 독일 유학시절과 연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삶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자의식의 모순과 갈등을 페미니즘 성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글쓰기 행위를 ‘여성적 글쓰기’의 관점에서
특징짓고자 한다. 본 논문은 그녀가 이미 설정된 그 무엇을 찾아가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진일보한 근대적 세계에 이르기 위한 그녀의
처절한 몸짓을 살펴보는 일이 될 것이다.
Ⅱ. 한국 최초의 독일 여성 유학생: 전혜린
1. 자아추구로서의 지적
인식욕
전혜린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고급관리의 한사람으로 전혜린을 서너살 때부터 직접 데리고 앉아 일본어와 한글을 가르쳤다.
고등교육을 받은 아버지는 여성도 교육을 통하여 남성못지 않은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얻을 것으로 기대하고 장녀인 전혜린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전혜린은 딸을 대성시키려는 아버지의 기대를 만족시키려고 유년기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으로 결코 행복하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본질적 존재로서 채워질 수 없는 자신의 현존재에 대한 무의식적
자각이었다. 전혜린은 비록 “손에 물 하나 안 튀기고 방에서 공부만” 할 수 있는 당시 한국의 보통 딸들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누렸으나,
그녀는 분명히 50년대 가부장제 한국사회의 여자아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949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시몬느 드 보브와의『제2의
성??에서 보브와는 남녀 성차이의 규정을 이렇게 밝혔다.
“남성, 여성이라는 이 대칭적인 항목이 관청의 기록이나 또는 신분증명서에서
동등한 위치에 놓여져서 나타난다는 것은 단지 외적일 뿐이다. 이 두 성의 관계는 전기의 음극, 양극의 관계와 똑 같지는 않다. 남성은 양극인
동시에 전체이기 때문이다. (...) 여성은 (...) 남성과의 관계에서 규정되고 구별되지만 남성은 여성에 대해 그렇지 않다. 여성은 본질적인
것과 구별되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남성은 주체이며 절대자이다. 여성은 타자이다.”
‘타자’는 여성의 주체화를 최초로 호소한
보브와의 여성주의적 사고의 기본 범주이다. 그녀는 왜 여성들은 수백년동안 타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저항 없이 받아들였는가를 질문하면서 “여성은
남자들 가운데에 분산되어 살고 있다. 즉 여성들은 주거, 노동, 경제적인 이해관계 및 사회적인 지위들을 통해 다른 여자들보다는 개별남자들 즉
남편 또는 아버지와 보다 긴밀하게 결합되어 살고 있다. (...) 여성을 압제자에게 연결시키는 굴레는 다른 굴레와 비교할 수 없다”라고
언급한다. 전혜린이 일찍부터 자신의 존재 문제에 천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낌없이 책을 사주며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부유한
아버지 덕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유년시절은 엄밀히 말해 아버지라는 막강한 권위와 엄명에 의한 통제의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아버지의
굴레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유년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흔히 딸이 그렇듯 아버지를 숭배하고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버지 마음에 들고
싶다는 욕망이 의식 밑에도 또 의식표면에도 언제나 있었다. (...) 이 욕망은 아직도 내 의식의 심층에 남아있다. 아마 일생동안 나는 이런
의미로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 의식의 세계에서 나는 결국 언제나 아버지를 대상으로 지식을 쌓아올렸던 것
같다. 마치 제단 앞에 향불을 갖다 쌓듯.
” 여성으로서의 전혜린은 가장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한국의 전근대적 가부장적 사회에서
분명히 보브와가 규정한 것처럼 ‘타자’이었던 것이다. ‘타자’라는 의식은 무의식적으로 유년기의 전혜린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자리잡는다. “먼 데에 대한 그리움, 어디론지 멀리멀리 미지의 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은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싹튼 것 같다.”
보브와에 의하면 타자는 본질적 존재가 아닌 비본질적인 존재이며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하나의 타자를 대립시키지 않고서 바로 본질적
존재인 일자(一者)를 규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성이 스스로 서기 위하여 여성은 남성에 맞서 남성에 필적할만한 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여성 특유의 의존성으로부터 벗어나 결핍으로 정의되는 자기 존재와의 무한한 투쟁을 통하여
스스로를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혼자 살고 싶었다. 내 일생을 인식에 바치고 싶었다. 자유롭게... 대학생이 된 후에도 그런 결심을
되풀이했었다.” 아버지가 삶을 통제하던 억압의 상황에서 본질적 존재가 아닌 비본질적 존재인 타자로서의 결핍감을 채우기 위하여 전혜린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적부터 맹렬히 인식욕에 매진하며 자신의 지적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스스로 인식욕에 정진하며
어렸을 적부터 지식탐구에 열정을 쏟는다. “밤을 새고 공부하고 난 다음날 새벽에 닭이 일제히 울 때 느꼈던 생생한 환희와 야생적인 즐거움도 잊을
수 없다. (...) 완벽하게 인식에 바쳐진 순간이었다.” 유년기부터 시작된 전혜린의 인식욕은 한편으로 보브와의 의미에서 타자가 아닌 주체적
존재가 되기 위한 그녀의 자발적 의지로 규정할 수 있다. 보브와에 의하면 본질적 존재로서의 주체가 초월에의 고귀한 소망을 지닐 때 세계에 대한
행동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한다. 이에 반하여 비본질적인 존재는 자기의 주체성 속에서 절대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적극성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내재를 운명으로 여기는 존재는 행위에 의해 자기를 구현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결코 본질로 복귀할 수 없는 비본질적 존재로
간주해 버리는 것, 주체로서 자기를 내 세우려고 하지 않는 것은 보브와에 의하면 자신의 실존적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유년기부터
결코 평범하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 전혜린이 주부, 어머니, 아내라는 여성의 전통적 인습적 역할에 안주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유년기부터 싹튼 전혜린의 인식욕은 보브와의 의미에서 비본질적 존재를 본질적 존재로 고양시키고자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혜린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강요된 인습적 여성의 삶에 순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유년기부터 마치 불나방처럼 인식을 향해 뛰어들며 본질적
존재로서의 자아를 추구하였다. “여학교에 들어오면서 세계는 조금씩 좁아져 갔다. (...) 이유 없는 모순과 고뇌가 싹텄고 무서운 인식욕에
사로잡혔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었다. 파우스트처럼” 그녀가 죽은 후, 동생 전채린은 “그녀는 끈기와 탄력과 집중력으로 생을 긍정하고 생의
완벽성을 구했고, 매순간마다에 포함되어 있는 가장 강렬한 것 또는 그 어떤 짙은 것을 끄집어내려 했다”고 짧은 삶 동안 그녀가 전력투구했던
인식욕을 증언한다. 전혜린이 한국어로 번역한『생의 한가운데??의 주인공 니나의 독백 “그 당시에 내게 있어선 생이란 아는 것, 무섭게 많이 아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모든 것에 파고드는 것이었어. 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어”는 보브와의 의미에서의 타자가 아닌 본질적 자아를 찾으려는
전혜린 자신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년기부터 시작된 전혜린의 집요한 인식욕은 보브와의 의미에서 아버지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타자가
아닌 일자가 되려는 그녀의 존재론적 충동과 소망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2. 독일 체류와 서구 근대성
체험
1955년 10월 다니던 법대를 그만두고 전혜린은 미지의 ‘새로운 땅’ 독일로 떠난다. 이 장에서는 미지의 땅 독일에서
과연 전혜린이 그토록 열망했던 본질적 삶의 의미를 채울 수 있었는지를 살펴본다.
전혜린의 독일체류기간은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만 5년간이다. 먼 이국땅 유학생활의 체험은 그녀의 후반기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이 기간에 그녀가 접했던 서구 근대성
체험중의 하나는 독일 지식인들의 자유분방한 정신적 자유였다. “하여간 슈바빙은 이 무서운 날카로움으로 발전해 가는 기계문명 속에 아직도 한군데
남아있는 낭만과 꿈과 자유의 여지가 있는 지대 (...) 본질을 파악,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신선한 바다바람 같은 자유의 냄새로 사람을
매혹하고 마는 곳.” 전혜린은 형식 및 물질에 구애받지 않는 서구 젊은 지식인의 자유와 단호한 저항정신을 찬양하고 경외한다. “외계에 현혹되지
않고 근본적으로 타자(자기와 이념이 다른 자)를 회의하고 지나치리만큼 솔직하고 아무런 주저도 없는 생활태도 (...) 야말로 뮌헨대학생의 기질이
나에게 옮겨준 가장 커다란 낙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가 인상깊게 받아들이고 높이 평가한 독일 지식인의 해방적 자의식과 저항정신은 결코
현실적으로 그녀가 소유할 수 없는 동경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유년기부터 싹튼 ‘영원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애초부터 그녀의 인식욕이 빚어낸
상상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삶의 소외와 결핍을 채우고자 날아갔지만 그녀의 의식은 육신의 고향 한국이라는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비록 고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녀의 삶은 한국에서의 삶의 연장이었다. “자유, 청춘, 모험, 예술, 사랑,
기지...등 (...) 어떤 외국사람에게도 정신적 고향만을 같이 한다면 지리적 고향은 의식하지 않게 해주고 잊게 만드는 곳”이라고 그녀가 언급한
독일에서도 전혜린은 결코 자유로워 질 수 없었다. 그녀는 먼 이국 땅에서 아버지의 강한 통제와 의존에서 벗어나 홀로 설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나, 50년대 한국의 딸인 그녀에게 그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의 운명에 비극성이 드리워진 것은 바로 전근대적 한국사회의 인습적 결혼의
굴레였다.
전혜린은 독일에 도착한지 6개월만에 아버지가 정해 준 사람이 바로 뒤이어 유학을 와서 거의 반강제적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반년 후에 예상을 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뜻밖에 후에 나의 남편이 된 T가 뮌헨에 왔다. 그간 두 집사이에서는 교류가 생겨 우리를
결혼시킬 것을 합의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국에서의 아버지에 이어 독일에서도 남편인 한 남성에 의해 보호되고 통제 받는 상황이 된다. ”내가
현재까지 미혼이었다면 나는 물론 계속하여 미혼일 것이다. 만약에 23세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남보다도 빨리 결혼해 버리지
않았더라면....“하고 훗날 회상하듯이 그녀는 원래 독신을 꿈꾸었다. 그러나 전혜린은 부모가 자녀의 결혼에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전근대적
한국의 결혼풍습에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50년대의 한국의 인습적 결혼제도에 순응해야 했으며, 이후 3년 뒤에 딸을 출산하게 된다.
삼종지의와 칠거지악이 여전히 기세를 떨치고 있던 한국의 전후 공간에서 이렇듯 여성이 ‘근대성’을 추구하기에는 어려웠던 것이다. 근대성이
기존체제의 보수성 및 응집성과 새로운 것의 대립형태로 본다면 전혜린의 경우 여전히 이러한 대립형태에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왜냐하면 근대성은 그저 단순한 관념 및 제도의 이식형태를 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신이 속한 구체적 물질적 삶의 토대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벽을 의식한 전혜린은 이곳 독일에서도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존재론적 인식욕에 불타며 내면적 정신적 공간으로 움츠리며 들어간다.
이 당시 그녀가 접한 것은 절대세계를 지향하는 사변적 독일문학이었다. 당시 독일을 비롯한 서구의 정신계에는 실존주의가 풍미하고
있었다. 실존주의는 양차세계대전을 겪은 서구 근대사회의 딜레마에 대한 지식인의 대응물이라는 점에서 전쟁을 체험한 한국의 전후세대들에게도 절실하게
공유되었던 의식체계였다. 분단된 한국사회의 전근대적 폭력성에 그대로 노출된 전후세대의 한사람인 전혜린에게 서구 실존주의에 대한 관심이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실존주의가 종전후 폐허 속의 암담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젊은 세대들의 파시즘 과거에 대한
자각 및 반성으로 궁극적으로 서구 근대사회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라고 한다면, 전혜린에게 실존주의는 현실과 차단된 다분히 보편적
형이상학적 인간의 문제의식으로 수용된다. 이러한 서구 근대사상의 편협적 수용은 독일유학시절 평탄하지 못했던 결혼생활과 더불어 그녀를 현실과
단절하여 죽음으로 몰고 간 요인중의 또 하나의 요소로 지적할 수 있다. 독일지식인들의 실존주의적 자기성찰은 과거 그들 역사와 사회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란 점에서 그들의 정신적 고뇌는 구체적 역사적?사회적 현실과 분리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50년대 독일의 실존주의적 자각과 각성은 60년대
중반 경부터 하인리히 뵐, 귄터 그라스 등 사회참여 작가의 등장과 더불어 ‘문학의 정치화’가 촉구되면서 전후 독일사회의 민주화와 휴매니즘에
입각한 독일 사회 발전의 동인이 되지만,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조건이 전혀 다른 한국사회에서 이중적 타자적 삶을 살아온 여성 전혜린에게는 그러한
의미가 들어올 수 없었다. 오히려 당시 독일 대학의 상아탑적 분위기는 전혜린에게 그녀가 독일에 오기전 정신만을 중시하고 파고 든 관념론적
인식욕을 더욱 더 강화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동양인이며 동시에 여성인 그녀는 이 곳에서도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부장적 상징질서에서 배제된
이방인 즉 타자였다. 그녀는 자기만의 정신세계로 몰입하면서 니체와 루 살로메의 관념적 절대적 사랑에 몰두한다. 동시에 그녀가 관심과 전력을
기울인 것은 독일문학의 번역작업이었다. 번역작업을 통한 헤르만 헤세나 루이제 린저 문학의 관념론적 수용은 그녀를 더욱더 현실과 차단시키고 절대적
정신세계에 몰입하는 삶으로 일관되게 하였다.
전혜린은 아이를 출산함으로써 유학생활을 중단하고 귀국하게 된다. 양육의 의무가 전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당시 한국의 전근대적 현실은 자아추구와 인식욕이 유난히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로 하여금 학업을 중단하게 한다. 1959년
5월 젖먹이를 데리고 혼자 귀국한 전혜린은 아이를 키우면서 시간강사로 여러 대학을 전전하는 동안 남편은 계속 학문을 위해 독일에 체류하였으며 그
이듬해 귀국한다. 전혜린은 한국에 돌아온 남편과 1964년 이혼함으로써 평탄하지 못했던 결혼생활을 끝마친다. 전혜린은 귀국후 1960년부터 대학
강단에 서기 시작하여 만 4년동안 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하다가 1964년 전임교수로 발령 받게 된다. 그러나 가부장적 한국사회에서의 그녀의 “먼
것에 대한 그리움”은 그녀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처절한 갈등과 고뇌를 수반하면서 그녀의 삶을 지속적으로 쫓아다녔다.
Ⅲ.
전혜린의 욕망과 좌절
1. 분열된 자아
전혜린은 소녀시절부터 “절대 평범해서는 안 된다”라는 명제를 숙제처럼
안고 살았다. 그런데 “중학교 때의 나의 글에 역설을 이루려는 듯, 나는 지금 가장 평범한 과정을 밟은 가장 평범한 직업인 아내, 어머니로서
가장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라고 그녀는 결혼이후 변화된 삶에 대해 체념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결혼 이후 쓴 일련의 글들이 증명하듯이
그녀는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불안해하며 고통스러워했으며 간혹 히스테리적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겉으로 볼 때 가정?직업적으로 성공한
전혜린은 내면적으로 지극히 불행한 이중적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 장에서는 그녀의 좌절된 삶의 욕망과 갈등을 유년기부터 싹튼 그녀의 강렬한
인식욕을 중심으로 페미니즘 성심리학적 관점으로 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전혜린의 인식욕은 처음 아버지의 소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지식을 높이 평가하는 이상주의자인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귀여워해 주셨다. 아버지는 장녀인 나를 학교에도 종종 데리고 갔고
이발소에도 꼭 아버지가 데리고 가서 머리를 깎는 것을 지켜보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소년은 아버지의 근친상간 금지의 영향하에서 거세공포를
발전시키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며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팔루스적인 나르시시즘을 발전시키지만 소녀는 결핍된 거세 콤플렉스로 인해
능동적인 성적 태도로부터 수동적인 성적 태도, 다시 말하면 공생관계였던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로의 의존으로 변화를 수행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소녀의
아버지 선망은 이때부터 여성으로서의 삶의 길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전혜린에게 남다른 기대와 애정을 기울였을 때, 아버지는
그녀에게 프로이트의 의미에서 이상화된 초자아로 군림하며 절대적 권위를 가지게 된다. “나는 또 젊고 아름다웠던 남들이 천재라 불렀던 아버지를,
그리고 나를 무제한하게 사랑하고 나의 모든 것을 무조건 다 옹호한 아버지를 신처럼 숭배했었다.” 전혜린은 아버지의 ‘엄명’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순종적인 딸이 되었으며 그녀는 또한 아버지의 마음에 들고자 당시 여성이 드물었던 법대에 진학한다.
이때 아버지의 영향하에 어렸을
적부터 전혜린이 추구한 지적 인식욕은 육체를 배격하고 정신을 숭배하는 남성적 자아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혜린이 유년기부터
본질적 존재에 도달하고자 추구한 지식, 앎은 금욕주의적, 절제적 삶을 목표로 하는 남성적 상징 질서체계와 관계된 것이었다. 바로 여기에 전혜린이
짧은 생 내내 기울인 본질적 존재의 추구란 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삶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요인을 살펴볼 수 있다. 필자는 이미
전장에서 유년기부터 싹튼 전혜린의 인식욕을 보브와의 견해에 입각하여 분석하였다. 보브와에게 있어 여성이 자의식을 추구한다는 것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여성됨의 극복을 의미한다. 전혜린의 인식욕은 보브와의 의미에서 여성들이 내재로서의 자신의 제한된 현존재를 극복하고 주체로서 스스로
서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브와는 남성들 역시 자신의 제한된 현존재를 극복하고 스스로 본질적 존재로서 긍정해야 한다는 점을 요구하는 것을
망각했다. 그렇게 요청하는 대신 오히려 보브와는 정신과 물질의 가부장적 위계질서 체계를 받아들여 여성에게도 적용시킨다. 보브와에게 있어 정신,
극기, 초월 같은 남성적 가치들은 긍정적인 함의를 지니지만 이와 반대로 감각, 육체, 자연 등은 부정적 함의를 지닌다. 전혜린은 “관념에 투철한
맑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결혼이나 시민적 생활을 피해야 한다고 확신했었다”며 유년시절과 대학시절의 자신을 회상한다. 그것은 철두철미 금욕주의적
자기인식에 정진하는 남성주의적 인식욕이었으며, 바로 여기에 그녀의 삶이 종국에는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인식론적 딜레마가 놓여 있다.
왜냐하면 전혜린은 강력한 주체적 존재로서 자신을 정립하여 남성중심의 상징질서에 진입하고자 하나 본질적으로 여성인 그녀는 결코 중심이 될 수 없는
주변부적 타자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보브와의 이론은 본질적으로 남성성과 다른 여성성에 대한 다른 사유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
자신은 이러한 사유가능성을 본격화하지 못했으며 차세대 페미니스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차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육체와 삶을 정신과 분리하여
폄하하거나 부정하지 않게 될 다른 여성적 주체를 모색한다. 보브와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으로 이런 생각에는 이르지
못했다.
전혜린은 자신이 열성적으로 추구했던 지식을 부성과 동일시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남성화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가부장적 사회질서로부터 내쫒김을 당하지 않으려면 가부장적 상징질서에 적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전혜린은 유년기부터 무의식적으로 정신과 육체의 분리로 인한 결핍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질, 인간, 육체에 대한 경시와 정신, 관념,
지식에 대한 광적인 숭배, 그리고 그 내부에서의 그 두 세계의 완전한 분리는 그러니까 거의 유아기부터 내 속에 싹트고 나에게 붙어있는 병이다.”
페미니즘 성심리학자는 외디푸스단계에서 소녀가 사랑의 대상을 아버지로 바꾸게 되는 과정을 공생관계에 있었던 어머니로부터의 도피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과정을 여아가 거쳐야 할 필연적 과정으로 분석한 프로이트를 비판하며 그의 분석과 정반대의 견해를 주장한다. 페미니스트들은 프로이트에게
‘분열’의 증상으로 분석된 어머니와의 공생적 단계에서 발생한 성의 미분화에 의한 여성의 양성의 환상(bisexuelle Phantasien)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가령 이리가레이에 의하면 프로이트의 성심리학에서는 여성의 성이 남성의 성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한 관계를 통하여 정의된 적이
없으며 또한 사회적?문화적 기능을 조정하는 상상적이고 상징적인 과정에 있어서 차이가 드러나는 두 개의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이리가레이는 남성의 입장에서 비롯되지 않은 여성성을 드러내는 가능성이 여성적 상상력의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양성의 환상을
전혜린의 문제의식이나 의식의 갈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자 친구 주혜에 대한 집착적 사랑은 그 예이다. “동화의 무대처럼 내 오직 소중한
친구, 주혜 (...) 나의 가장 깊은 잠재의식 속에 너의 이름을 나는 써 왔다. 너는 나의 영혼의 쌍둥이(Zwillingsseele)다.”
유년기에 각별하게 애정을 기울인 친구 주혜와 더불어 전혜린이 관심과 애착을 가진 대상은 동생 전채린이었다. “동생을 존경할 수 있는 기쁨은
아무나가 맛볼 수 있는 기쁨은 아니다. (...) 나는 한 동생을 가졌고 사랑했고 존경했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전혜린이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고 집착하며 애정을 기울인 친구, 동생, 딸은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다. 전혜린은 유년기부터 아버지를 모범으로 삼으며 경외하며
남성성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과 같은 성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그녀의 무의식적 심층에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모성애! 난 그것을
얼마나 미친 듯이 아쉬워하는가! 난 그것을 받아보지 못하고 자랐고 그래서 의식하지 못하는 새 모성애의 동경도 내 가슴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인간에게 최초의 고향은 아마도 어머니의 자궁일 것이다. 그 속에서 경험한 합일의 체험은 출산과 함께 파괴되지만 그 충만한 느낌은
무의식에 깊이 각인 된다. 어렸을 적 존경, 숭배, 경외의 대상이었던 아버지가 이제 출산을 경험한 전혜린에게 적대적 대상이 된다. 1959년
일기에 ”나는 어머니가 나를 위해 하신 모든 것에 대해 어머니께 감사한다. 어머니는 사랑스럽고 선량한 분이다. 인간으로서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훨씬 가치를 지니고 계시다. 나는 아버지를 동정할 수 있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그를 사랑하거나 존경할 수는 없다. 아버지는
어머니같이 한 인간을 위해 공헌하지 않는다.“ 남성인 아버지에 대한 전혜린의 감정은 이렇듯 양가적이다. 전혜린은 한편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상징질서에 순응하여 살아가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 그녀의 억눌린 무의식에는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상징질서로 부터 도피하고 싶은 무의식적 충동이
내재한다. 전혜린의 초자아로 군림한 아버지는 그녀의 유년기 자아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계실 때는 나에게 심부름 한번
못시켰다“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전혜린은 아버지가 전권을 행사하는 전형적 가부장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이것은 그녀가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가부장적 상징질서내에 편입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끔 인습에 벗어난 남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은 그녀의 유별나고 특이한 행동은 이러한
상징질서에 저항하고 반항하는 억압된 자아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전혜린은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사회의 질서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의 법인 상징계가 요구하는 질서, 규범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저항, 항거의 몸짓을 보인다. 남의 시선을 두려워
않는 대담한 그녀의 일탈적 행동은 가부장적 상징질서에 대한 의식적 저항이라 할 수 있다.
”먼데 대한 그리움, 어디론지 멀리
미지의 곳으로 가고싶은 충동“은 아버지의 법에 의하여 자신의 여성성이 억압된 유년기부터 전혜린을 일생 따라다닌다. 아버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려는 억압된 무의식은 인습적 결혼제도로 남편이란 또 다른 남성에 종속됨으로써 깨어진다. 공개적 글을 통하여 조심스럽게 간간이 토로하는
전혜린의 결혼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이국에서의 결혼 후에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했고 귀국 후에도 소위 ‘맞벌이’인가를 하고 있는 우리는
얼굴을 보는 시간이 서로 적다. (...)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생활 면에서의 이야기이고 정신면에서 한 남자를 완전히 포괄적인 의미로
알게되고 공존하게 된 것은 물론 커다란 내적 변화를 나에게 가져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좀더 나은 결혼생활이 흘러감에 따라 이윽고 일반적인
만사에 대한 관용과 타협과 비속화와 체념... 그리고는 숙명론과 마침내는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의 운명에...”
전혜린은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한 체념적이고 회의적 시각을 이렇듯 솔직하게 언급한다. 결혼이란 제도는 그녀에 의하면 인간을 속되고 타율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녀는 현실이 본질적 존재로서의 자아를 채워주지 못함에 미치도록 괴로워한다. 그녀는 죽기 전 우울증에 시달리며 늘상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그녀의 정신적 갈등과 고통이 어떠한 심리적?육체적 증후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여성적 자아의 상실 - 불안, 병, 죽음
1965년 1월 11일 경향신문은 전혜린의 죽음을
“수면제 과용으로 변사”한 것으로 보도했다. 며칠후 1월 17일자 한국일보는 전혜린의 죽음에 다음과 같은 해설을 달았다. “신춘의 여성계에 적지
않은 화제와 파문을 일게 한 소식이 있다. 우리나라의 희귀한 여류 법철학도요, 독일 문학가인 전혜린(31)씨의 죽음과 그 앞뒤의 이야기-
(...) 부음이 전해지자 항간엔 구구한 억측이 돌았다.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사고사다-과도의 저혈압으로 인한 자연사다-자살인지도 모른다-
등등.” 실재로 죽기전 전혜린은 매일 밤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고서는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극도의 정서적 불안과 신경장애에 시달렸다. 이
장에서는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요인을 심리학적 용어 ‘히스테리’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제가 원하는 것은 (...) 미칠
듯한 순간의 세계와 자아가 합일되는 느낌을 주는 찰나, 충만한 순간...이런, 손에 잡히지 않은 것들이 나의 갈망의 대상입니다.” 전혜린은
순간만이라도 좋으니 행복하고 충만한 감정의 절정, 희열을 갈구하면서 유년시절을 회상한다. “예전에는 완벽한 순간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 노을이 새빨갛게 타는 내 방의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운 일이 있다. 너무나 광경이
아름다워서였다. (...)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었고 그것은 아늑하고 따스한 기분이었다.” 심리학자에 의하면 히스테리 여성환자들은
과거의 회상들로 인해 언제나 불안해하고 괴로워한다. 그들은 경험된 것을 무의식적으로 기록하며 또한 늘 새롭게 상기시키는 수집된 증상들이 그들에게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억들은 억압되어 자신의 무의식에 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히스테리적 증세를 갖게되는
사람들의 사춘기를 보면 이들은 발병이전에는 대부분 활기있고 특별한 자질을 소유하고 있으며 풍부한 정신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의 에너지는 종종 주목할 만한 것이다.”
전혜린의 우울증은 유년기에 형성된 초자아, 즉 아버지의 엄명 속에서 형성된
절제된 금욕주의적 남성적 자아가 자신의 본질적 여성적 자아에 의하여 분열되면서 일어난다. ’절대로 평범해서는 안 된다‘라는 지상명제는 결혼해서
아이 낳고, 강단에서 타성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사는 평범한 일상적 여성적 삶을 못 견디게 만들었다. 그녀는 매순간 충만 됨으로 꽉차오르는
완벽한 삶을 갈망했음으로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타성적 생활이 숨통을 죄는 권태의 굴레로 느꼈다. 그녀의 대학 후배였던 이덕희가 언급하듯이 그녀가
죽기전 자주 입에 올린 단어가 바로 권태와 광기이다. 치열하게 살고 싶다는 삶에 대한 광적 욕망을 가졌으나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인습적 굴레에
의한 원치 않은 일상적 소시민적 삶은 그녀에게 참을 수 없는 권태와 무의미로 나타난다. “피라도 흐르고 흘리는 그런 강렬한 자극이 얻고 싶다.
비정상적인 일을 하고 싶어 죽겠다. (...) 후회의 극치까지를 행위로 규명해보고 싶다. 지킬박사는 하이드일 수밖에 없었어.” 어렸을 적부터
길들여진 남성적 자아와 억압된 무의식적 여성적 자아 양자의 충돌가운데 전혜린은 끝없는 우울증에 빠져든다.
그녀의 우울증세는
히스테리의 특징을 나타낸다. 히스테리는 정신분석학에서 여성의 불안정한 정서를 명명할 때 사용되는 용어다. 히스테리적 증상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영혼의 내용이 육체적 증상으로 전환된 것이라고 보며, 이것은 육체를 손상하고 파괴시킨다고 한다. 전혜린은 일생동안 우울증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예를 들면 출산을 앞두고 불안해 하는 그녀의 모습은 평범한 여성과 다른 특별한 모습이다.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 미지의 것, 어두운 것에
대한 불안을.... 바로 그것을 여자는 출산 앞에서 감지한다. 무엇을 이 세상에 가져오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알지 못하고 이해 못하고 있는 그 무엇 앞에서 여자는 불안하고 두려워한다.” 한편으로 그녀는 임신, 출산과정에서 생명잉태라는 여성의
고유한 생산적 능력을 체험하면서 모성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숭고하고 고귀한 것으로 절대화된 모성적 가치에 대하여
회의한다. 이것은 그녀가 결코 모성의 역할에 만족하면서 안주하지 않으려는 것을 의미한다. 아내, 어머니라는 전통적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고 그것의
일상적 속박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내면적 갈등이 그녀의 일기 군데군데 피력되어 있다. “결혼이란 확실히 인간을 좁힌다. (...) 여자의
생은 모방이지 참 생은 아니다. 여자는 자기를 잊을 수도 초월할 수도 없으므로 위대함에는 부적당하다. (...) 나 자신 속에서 발견한 여자가
나를 절망케 한다.”
전혜린이 두려워하고 회의하고 거부한 모성은 역사적으로 가부장제를 통해 규정된 모성 개념이다. 18세기 서구
성담론은 여성을 단지 아내와 어머니로서 규정하였다. 이때 그들은 자연을 매개로 여성성을 규정하였는데, 여성의 히스테리적 증세를 자연과 연관하여
여성의 육체와 결부하여 설명하였다. 여성의 육체는 본질적으로 남성과 다르다는 전제하에 여성은 수동적이고 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규범에서 벗어나는 능동적?적극적인 여성을 비정상적으로 간주하며 이들이 보이는 예민하고 신경질적 증세를 히스테리로 명명하였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본질적 육체의 구조를 인식하고 경탄해라. 현존의 질서를 존중하게 여기고 존경하는 것을 배워라. 그것들의 조화가 깨지는 것을 피하라...“
남성들에 의한 서구 성담론은 수동적 연약한 여성상과 함께 예민하고 신경질적?공격적 여성상을 대립시키며 모성성을 구현하는 여성은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모성을 거부하는 여성은 병적으로 단죄하였다. 자연적 여성의 삶의 방식은 육체적 열정과 격정을 억누르고 체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끓어오르는 열정은 기존의 사회구조에서 필연적으로 짜증과 신경질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히스테리를 부리는 신경질적이고 반항적인 여성은 “부끄러움의
표정이 아니라 눈을 크게 부릅뜨고 불타오르며 거칠고 무서운 눈길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나서지 않고 말수가 적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을 여성의 미덕으로 간주한다. 여성의 체념적 순응적 삶은 순결, 순수, 정상 등을 의미하고 열정적, 격정적 자유분방한 삶은 위험, 불순,
비정상 등을 의미한다. 서구의 성담론에 의하면 히스테리는 여성의 자연적 본질로부터 벗어나는 징후로 간주되므로 치유되어야 할 병적 현상으로
간주된다. 히스테리를 부리는 여성들은 자연의 균형이 깨어졌으므로 자연으로부터 규정된 질서를 다시금 회복시킴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여성의
자기구현은 가정에 국한된 지평 내에서 움직이지 결코 그것을 넘어갈 수 없다. 그리하여 남편에게 봉사하고 가족에게 헌신하는 여성은 히스테리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성의 속성인 자연적 정적 본질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히스테리는 자연의 본질에
거역하는 여성의 불필요하고 위험한 열정으로 파악되었다.
이 관점에 의하면 전혜린의 존재론적 열망과 인식욕은 필연적으로 히스테리적
증후로 설명된다. 유년기부터 강렬한 인식욕을 가진 전혜린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여성의 삶에 안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온갖 일상적인 것, 비속한
것, 평범한 것에 대하여 반발하며 혐오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녀에게 그러한 자유와 일탈을 허용하지 않았다.
가부장적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전혜린의 자아추구의 욕망을 방해하였다. 그녀의 갈등과 저항은
필연적으로 히스테리적 증후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녀는 얘기를 시작했다. 쉬지 않고 줄곧, 큰소리로 빠르게, 그처럼 격렬한 억양과 몸짓으로.
화제는 이것에서 저것으로 연결도 없이 이어지고 무궁무진 숨가쁘게 흘러나왔다. (...) 그녀가 어째서 그처럼 격렬하게, 마치 항거하는 것처럼
쉴새없이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를. 그녀가 이룩하는 온갖 시선과 몸짓은 공허를 충만으로 바꾸기 위한 의식적인 항거였다는 것을. 대화는
언제나 그녀를 구출했던 것이다. 일상성의 피로로부터, 권태와 공허로부터, 또한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신의 삶의 욕망을
포기하고 한 남자의 아내로서,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가정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소시민적 직업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녀가 유년기부터 그토록
열망했던 본질적 삶이 아니었다. 그녀는 애초부터 결혼제도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그것은 여성을 사회가 요구하는 인습과 규범에 맞추어 비본질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전체로 보아서 아직도 하인의 신분에 있다. 그 결과 여성은 자기로서 살려고 하지 않고 남성으로부터
이렇다고 정해진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선택하도록 된다. 남자의 손에 쥐어진 경제적 특권, 남자의 사회적 가치, 결혼의 명예, 남자에 의존하는
것에서 얻는 효과, 이러한 모든 것이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의 마음에 들도록 애쓰게 하고 있다. (...) 여성의 가장 본질적 약점으로 나는 생
전반에 대한 비본연적 태도를 들고 싶다. 자기 자신을 순간마다 의식하고 사회와 세계에 대해서 자기를 투기하고 초월하면서 사는 것이 본연적인
생활태도라면 태반의 여성의 생활은 그와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남긴 글에는 남성에 의하여 규정된 여성의 속성, 한계 등에
관하여 근본적으로 저항, 항거하는 내면의 의지가 들어 있다. 그러나 50, 60년대 굳건한 가부장적 현실에서 자유로워 질 수 없었던 그녀는
죽기전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이를 수 있었고 또한 알코올을 마셔야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전혜린의 평전을 쓴 이덕희는 “표면적으로 볼 때
그녀는 가정과 직업을 가진 온건한 시민이었으며 그녀의 기질은 반항적이라기 보다 차라리 타협적이었고 적극적이고 도전적이라기 보다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편이었다”고 언급했듯이 그녀는 이중적 삶을 살며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혜린은 자신의 자아를 속박하고 구속하는 사회적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본질적 삶의 추구에 안간힘을 썼으나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현실의 규범에 순응할 수 없었던 그녀의 죽음은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전혜린에게서 보여지는 불안, 공포, 초조 등 히스테리적 증후는 실제적이며 현실적인 당시 한국의 전근대적 사회의
구조적 조건에 기인한다. 히스테리를 여성의 삶을 규정하는 가부장제 조건이 빚어낸 결과로 파악될 때 전혜린의 내면적 갈등구조의 이해는 한층 깊은
차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3. 자아구현으로서의 글쓰기
자아추구욕이 유난히 강한 전혜린의
존재론적 열망은 유년기부터 글쓰기를 통하여 나타난다. 그녀는 유년시절 단짝이었던 친구와 매일 편지교환을 했다. “주혜와 나는 당장에 회색노트를
교환하기로 하여 매일 한사람이 집에 가져가서 일기를 쓰고 다음날 그 노트를 상대방의 책상 속에 넣고 있었다. 이 노트를 우리는 몇 년이나
교환했었다.” 유년기부터 작가를 꿈꾸었던 전혜린이 후세에 남긴 글들은 거의 모두 자전적 수필형식들이다. 평범한 일상적 삶에서 시작하는 그녀의
글들은 대부분 자신의 주관적 사적 이야기이며 유년기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했던 것들이 회상적 고백체의 형식으로
서술된다. 그녀의 문체는 때로는 격정적이고 감정적이어서 독자를 동요시키며 불안하게 하지만 때로는 비가적, 목가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안하게
해주기도 한다. 그녀의 글쓰기는 이렇듯 다소 주관적, 감정적, 자기중심적인 독백체이지만 자신의 감정, 소망, 생각을 솔직하고 여과없이 표현하기
때문에 절실함과 진정성이 있다.
전혜린 문체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자신의 일상적 삶을 소재로 서두를 꺼냈다고 할지라도 이를 곧
추상적 관념적 표상으로 전이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구체적 정치?사회적인 테마가 언급되더라도 내적 심리적 동기에 의하여 이내 추상성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전혜린에게 훗날 전쟁중의 피난지 부산에 대한 회상적 기록도 그녀에게는 혼란한 현실에 대한 추상적 사변 그 자체였다. “자극과
흥분, 충동과 정열, 그리고 미침을 안겨주는 부산의 바다, 거리, 사람들, 항구.....” 뛰어난 감수성, 예민함과 지적 명민함을 갖춘 그녀가
구체적 현실을 하나의 관념적 이미지로 추상화해 버리는 그녀의 글쓰기는 두 가지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그녀가 살았던 한국의 불행한
시대적 상황이다. 전혜린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그녀는 한국사회의 격변기를 두 번 겪었다. 하나는 초등학교시절 겪었던 8?15해방이고, 또 하나는
중학교시절에 겪은 6?25전쟁이다.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터부화가 우리 삶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던 전후 남한의 시대적 상황에서 전혜린의 세대만큼
기존적 권위나 가부장적 가치관에 혼란을 겪은 세대도 드물다. 좌우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첨예화되던 이 시기에 지식인들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마음대로 피력하고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자유롭고 창조적인 자의식의 발전을 끊임없이 저해하고 방해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암울하고 혼돈적
현실은 지식인을 필연적으로 역사적 사회적 현실로부터 관념적 세계로 도주하게 하였다. 이데올로기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지고자 하는 것이 당시 시대적
현실이었으며 이것은 전혜린의 60년대 글쓰기에 필연적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한다. “1950년 부산에서, 나는 서울이 북괴군에게 점령되어 폭격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쓰라리게 울었던지, 나는 참상을 그렸고 주혜가 죽었을 거라고 울고 또 울었었다”라고 전혜린은 과거를 더듬어
회상하지만 이 글을 쓸 당시, 한국 지식인의 한 사람이기도 한 그녀는 과거 한국의 역사적 비극에 대한 자신의 판단은 한마디도 피력하지 않는다.
전혜린의 글쓰기에 영향을 준 또 한가지 요소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맨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남성담화를 모방한다. 남성담화 체계 속으로 편입됨으로써 여성적 자아는 남성적 자아로 정립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로서의 여성적
존재를 의식하며 쓰는 여성의 글쓰기는 기존의 남성담화에 편입되는 것을 방해받는다. 왜냐하면 여성성을 의식하며 쓰는 여성적 글쓰기는 남성과 상이한
여성의 육체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며 아울러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여성의 고유한 의식과 경험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전혜린은 일생동안 하나의
‘작품다운 작품을 쓰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긴 소설 (또는 짧더라도 소설)을 쓰고 싶다. 올 해안에 꼭 한 개는 써
보겠다.” 그러나 작품을 쓰려는 그녀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고 유고집인 두 편의 수필집과 몇 편의 번역물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풍부한
감수성, 예민한 관찰력, 강렬한 인식욕 등 남다른 문학적 소질과 재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작품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은 ‘통일성,
논리성, 완결성’에 입각한 이성중심적 남성적 문학 규범에 적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성적 글쓰기 규범을 결코 전유할 수 없는 그녀의 상상적
여성성이 남성적 관점에 입각한 예술작품의 생산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이리가레이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여성은 결코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상징적 질서체계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녀에 의하면 여성이 배제된 상징계의 전복을 위하여 여성은 로고스 중심의 남성적
언어가 아닌 여성의 고유한 육체적 체험에 입각한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리가레이에 의하면 여성은 머리와 육체의 위계질서적 분리를
없애는 육체적 여성언어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차이에 입각한 이러한 여성 고유의 글쓰기는 상징질서를 교란시키고 파괴할 수 있는 거대한
폭발력을 지닌다고 한다. 바로 여기에 남성의 글쓰기와 다른 여성적 글쓰기의 고유성과 차별성이 있다. 그러나 전혜린의 경우, 그녀의 글쓰기를
남성적 규범에 입각한 글쓰기와 등치시킬 수 없음은 분명하나 여전히 그녀는 이리가레이가 요청하는 전복적 글쓰기를 시도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전혜린은
활화산처럼 활활 타오르는 여성적 상상적 삶의 욕망을 표현하려는 소망과 충동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코 그녀가 속한 가부장적 상징질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영향하에 길들여진 남성적 자아가 그녀의 상징질서의 전복적 시도를 끊임없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일생동안 그녀를 괴롭히며 그녀의 삶을 동반했던 정신적 갈등과 고뇌, 그것이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는 전혜린의 글들은 바로 남성적 자아와 여성적
자아간의 괴리와 갈등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전이나 오늘이나 가부장제 하에서 글을 쓰는 많은 여성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적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여성들의 글에는 한편으로 가부장적 구조가 만든 여성성으로 부터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여성성을 표출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이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구조가 만들어낸 가부장적 규범과 가치관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이율배반성이 나타난다. 이러한 양면성이 전혜린의
글에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전혜린은 한편으로 남성적 규범이 지배하는 상징적 질서인 가부장제로의 편입을 위해 고군분투하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녀의
내면에서는 ‘결핍된 존재’, ‘내쫒긴 자’, ‘타자’를 의식하며 글을 쓰는 고유한 여성적 자아가 내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의 배제 하에
이루어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국가?민족?사회문제 등 ‘거대담론’은 전혜린의 글속에 지워져 있거나 언급되더라도 곧장 추상화 과정을 거쳐서
무화된다. 그녀가 남긴 일기, 편지 또는 잡지 등에 실린 글들은 모두 자신의 사적 일상적 체험과 주관적 감정을 기록한 것으로, 여기에 그토록
열망한 본질적 자아가 충족되지 못함으로 일어나는 고통과 아픔이 처절할 정도로 배어있다. 이것은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적 글쓰기를 추구하는
모든 여성작가들의 공통된 글쓰기의 어려움과 한계를 보여준다. 크리스타 볼프는 여성적 글쓰기는 “여성들이 역사적?생물학적 이유로부터 남성과 다른
현실을 체험하는 한” 여성적 글쓰기는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볼프는 여성은 가부장제적 규범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긴장 속에서 살면서”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혜린의 글쓰기는 가부장적 규범에 적응하지 못하는 억압된 여성적 자아의 문학적 드러남이다. 평론가 김윤식은
전혜린의 글쓰기를 60년대를 뒤덮고 있었던 지식인의 허무주의적 의식에 대응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글쓰기는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고난도, 해방공간의 갈등도, 전쟁도 그녀의 의식세계에는 발을 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혜린의 글에 시대적, 역사적 모순들의 객관적
성찰이 부재하다는 이유로 비난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이성?남성중심주의 문학적 척도에 근거한 것일 수 있다. 타자를 의식하며 쓰는 그녀의 글쓰기는
애초부터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가부장적 사고방식과 동떨어진 영역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녀는 당시 한국사회의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철저히 거부한
채 자신이 구축한 고독한 섬에서 살았다. 전혜린은 결코 시대적 체험의 방관자로서 나르시시즘적으로 침묵했다고 할 수 없으며, 그녀의 글쓰기는
시대에 동참할 수 없는 타자로서의 그녀의 여성성이 남성적 언어가 아닌 여성의 육체적 언어로 은밀하게 표출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우리는
그녀의 글에서 가부장적 사회구조들의 모순을 여성의 시각으로 내면화한 그녀의 문제의식과 심리적 갈등에 주목해야 한다. 전혜린의 글이 사적,
주관적, 감상적이며 미성숙한 소녀문체라고 폄하한다면, 이는 가부장적 남성규범에 입각한 것으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Ⅳ. 나가는 말
본고는 결코 불행하다고 할 수 없는 삶의 외적 조건을 갖춘 한국 최초의 여성
독문학자 전혜린이 세속적 행복이 보장된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왜 그토록 처연한 삶을 살며 종국적으로 좌절해야 했는지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죽기 바로 전 그녀는 어느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죽음은 - 누구의 죽음이나 엄숙한 사실이다. 더구나 그것이 의식적으로 선택되고
논리적으로 사유된 결과인 경우 우리는 무엇이 그를 죽음에 던져 넣었는가를 알고 싶어해도 마땅할 것이다”라고 서술하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아니면 수면제의 과다 복용으로 인한 사고사였는지 죽음의 원인은 불명확하나 그녀의 죽음은 결코 행복하지 못한 자신의 존재론적 삶에 대한 치열한
저항과 반성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타자가 아닌 본질적 존재로서 존재해야 함을 자신의 글을 통하여 누누이
역설했지만 전근대적인 한국의 전후 공간은 그녀에게 주체적 존재의 구현을 허용하지 않았다. 인식욕이 유달리 강한 그녀는 언제나 고독을 지향했고
세속적인 것, 비속한 것에 등을 돌리고 순수와 절대를 지향했다. 그러나 그가 속했던 세계는 엄연한 남성중심적 가부장적 체제이었으며 그 세계에
속한 그녀는 언제나 타자이었다. 그녀는 유년기부터 자아실현을 위해 정진했으나 그것은 남성들에 의해 구축된 금욕주의적 관념적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었으며 남성이 아닌 여성인 그녀의 무의식에는 동시에 억압당한 여성성이 언제나 꿈틀대고 있었다. 현존재적 삶과 상상화된 여성적 삶과의 괴리는
필연적으로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비록 안타깝게도 삶에서 좌절했을지라도 전근대적 전후 한국사회의 암울한 공간에서
여성으로서 결코 쉽지 않은 주체적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필자는 그녀를 오늘날 페미니즘적 의미에서 선구적 길을 걸었던 한국
여성 독문학자의 한사람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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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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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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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ammenfassung
Hye-Rin Chun als die erste koreanische
Germanistin
- eine Studie zu ihrem Leben und Schreiben
Chang, Soon-Nan
(Sogang Univ.)
Hye-Rin Chun ist die erste koreanische Germanistin, die in
den 50er Jahren in Deutschland studiert hat. Sie gehort zur
Nachkriegsgeneration, die den Korea-Krieg erfahren hat und dadurch vom
Verlustgefuhl gepragt worden ist. Wahrend des Aufenthalts in Deutschland hat sie
neben dem Studium der deutschen Literatur einige literarische Texte aus dem
Deutschen ins Koreanische ubersetzt. Sie gilt als die erste der wenigen
Koreaner, die deutsche Literatur nicht auf dem Umweg uber Japan, sondern direkt
durch Deutschland kennen gelernt und nach Korea ubertragen haben. Nach ihrer
Ruckkehr aus Deutschland arbeitete sie in Korea als Deutschlehrerin und
Germanistin. Trotz ihrer besonderen literarischen Begabung und ihres
leidenschaftlichen Lebenswillens hat sich ihr Wunsch, Schriftstellerin zu
werden, nicht erfullt. Leider ist sie schon im Alter von 31 Jahren gestorben.
Obwohl die Ursache des Todes nicht geklart wurde, ist es eine Tatsache, dass die
damalige koreanische Gesellschaft ihr keinen Raum zur Verwirklichung ihres
Lebenswunsches gelassen hat.
In der vorliegenden Arbeit wird anhand eines
feministischen Ansatzes untersucht, warum und woran Hye-Rin Chun in ihrem Leben
psychisch gelitten hat und schließlich im Leben gescheitert ist. Im ersten
Kapitel soll die Identitatsbildung Chuns in ihrer Jugendzeit im Mittelpunkt
stehen, wobei der Einfluss des Vaters auf die Bildung ihres Unterbewusstseins in
Betracht gezogen wird. Im zweiten Kapitel wird ihre Studienzeit vor dem
Hintergrund der gesellschaftlichen Nachkriegssituation Deutschlands betrachtet.
Im anschließenden Kapitel werden die krankhaften psychischen Symptome Unruhe,
Pathos, Uberempfindlichkeit in Bezug auf die Probleme des Weiblichen analysiert.
Abschließend wird Chun als eine schreibende Frau vorgestellt, die ihre
weiblichen psychischen Probleme durch das Schreiben auszudrucken versucht.
키워드:
?전혜린 Hye-Rin Chun
?페미니즘 Feminismus
?여성문학
Frauenliteratur
?여성적 글쓰기 Weibliches Schreiben
?자아구현
Identit1tsbildung
?투고:2003년 4월 21일
?심사:2003년 5월 7일
?심사완료:2003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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