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문학과 철학 사이에서 비교문학의 균형잡기

이강기 2015. 9. 30. 16:55

문학과 철학 사이에서 비교문학의 균형잡기

 

- 연대 비교문학 이은정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 이성복의 ’, 남해금산중에서

 

 

문학과 철학은 저 먼 기억의 끄트머리에서부터 한번도 화해되어 본 적이 없다. 그리스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앞에 놓고 제자들과 나눈 유명한 대화편에는 그래서 시와 철학의 싸움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철학은 반드시 시와 구분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소크라테스는 문학으로 대표되는 시 장르가 담당하고 있던 시민들의 교육을 철학이 맡아야 하며 철학을 통한 교육이야말로 훌륭한 인성과 보다 높은 진리를 시민들에게 선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를 위시해 그 이후 서양 철학의 계보는 문학을 자신의 최대 경쟁자로 설정하면서 교육과 진리의 영역을 다른 학문에 내어주지 않았다. 근대 인식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마련해 준 칸트의 업적은 문학과 문학을 아우르는 예술이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상상력과 창조능력을 지성능력과 연관된 인식능력으로 포섭한 것에 있다. 그리고 세계 지식의 방대한 분야들과 이것들의 역사적 변천들을 하나의 논리체계로 묵어내려 하였던 헤겔 역시 철학을 가장 높은 진리의 영역에 올려놓았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 또한 영미권 분석미학은 미적판단에 사용되는 감수성과 평가적 어휘들을 논리학의 분지인 언어분석을 통해 정의 내리고자 한다.

 

하지만 문학은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마력을 갖고 있었으며 몇 천년간의 도전과 싸움 속에서도 그 가치를 손상 당해 본 적이 없다. 독배를 마셔야 하는 날 아침 자신이 살아온 길과 일궈 놓은 흔적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갔을 소크라테스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삶을 노래 해 줄 시가를 짓는 것이었다. 단 한 줄도 시도 결국 지을 수 없었지만 문학은 분명히 죽음을 목전에 둔 나약한 존재를 유혹하는 마지막 손길이었다. 무한한 어둠과 마주한 찰라적 존재가 생명의 빛을 마지막으로 태워낼 수 있는 유일한 출구, 혹은 자신의 유한성을 끌어안아 줄 인간적 무한성의 세계. 문학은 살아있음을 너머서는 또 다른 살아있음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문학은 항상 철학의 곁에서 철학을 비판해왔으며 철학을 너머서면서 철학을 독려해 왔다. 철학자들에게 있어 문학은 완성에 다다르고 있는 세계적 구상에 흠집을 내고 자신들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벌래같은 존재였지만 이 작은 흠집과 실패를 통해 철학은 더욱 가열차게 자신을 비판하고 새로운 모색을 탐색할 수 있었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을 통해 서양 철학사 전체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나 싸르트르가 문학을 향한 열정 때문에 인식론과 논리학으로 점철되어 있던 기존의 철학에 실존론을 보탤 수 있었던 것 등은 문학의 이러한 철학과의 관계에 기반한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과 문학의 싸움이 해결될 수 없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다시 철학사의 아버지 소크라테스에게 돌아가 본다면 그가 철학의 뼈대가 될 기본 관념들과 질문들을 사람들에게 묻고 다녔을 당시 그리스 희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들이 한낱 말장난에 불과하며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내용의 일종의 패러디 희극을 상연한 바 있다. 희극작가의 이러한 비판은 다수결에 의해 죄의 유무를 물었던 당시 그리스 법정에 소크라테스가 기소되고 또한 패배하는 이유들과도 일치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들보다 소크라테스가 너무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혹자는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시대의 요구를 소크라테스가 묵과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솔직히 틀린 대답은 아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의 주장들은 이후 그리스가 패망하게 된 간접적인 영향이 되었으며 다신교의 그리스 문화가 일신교의 기독교에 의해 억압되는 결과를 낳았다. 소크라테스의 다음 계보를 잇는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다분히 국가독점적인 권력구조를 띄고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관 역시 귀족정치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마케도니아의 속국이 된 본토 그리스인들은 호시탐탐 그를 살해하고자 쫓아 다녔다. 이들의 작은 흠집들은 그러나 개인적인 실패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 시대와 정신이라는 토양에서 나온 것인데 반해 철학은 현실의 부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높은 곳의 이상만을 염두 해 둘 뿐 낮은 곳에 돋아난 작은 풀들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철학이 교육/윤리와 진리/논리의 영역에다 사회적 실천이라는 항목을 추가하게 된 것은 겨우 20세기 초입의 맑스에 의해서이며 맑스에 의해 철학은 처음으로 사람들이 먹고사는 인간적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문학이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던 대지의 향기를 말이다.

 

하지만 철학이 문학과 타협하지 못한 것은 단순한 지상에 대한 애정결핍 때문만이 아니다. 슐라이허마허에 의해 성서 해석학에서 철학적 해석학으로 발전한 20세기 초반의 철학적 사유는 딜타이에 의해 삶 자체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로 확대되었다. ()철학이라 명명된 그의 해석학은 그러나 예술이라는 영역, 그 중에서도 시 장르에 다다르면서 최고의 빛을 발했고 곧바로 무너져버린다. 그는 삶과 예술을 철학 안으로 들여놓고자 했고, 이를 위해 내면적 체험들을 분석하고 대상과 자아, 세계와 사회와의 연관성에 몰두했다. 모든 삶은 객관화가 가능하며, 예술은 이런 삶의 객관적 정신의 표출이므로 정확하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예술적 감동은 이런 객관적 정신의 어떤 공통성에 기반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자신했다. 하지만 철학의 집은 보편성과 객관성만이 들어갈 수 있어서 이 집에 들어선 예술과 문학은 모양을 본뜬 조화처럼 향기나 감각이 전혀 없었다. 꽃의 존재이유를 갖지 못한 꽃처럼 철학으로 해석된 예술과 문학은 누구의 눈물도 받아낼 수 없었고 시들어버릴 자유조차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문학이 작가의 주관성과 체험의 특수성에만 자신의 자리를 잡고있다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보듬고 또 현실을 박차 오르려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동일한 역사적 경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작가의 익명성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사명을 다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글쓰기의 스타일은 작가의 호흡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들이마시고 자신을 밖으로 뱉어내는 호흡은 모두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문학의 정신은 작가의 호흡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호흡이 독자와 세계, 그리고 지금이라는 순간에서 어우러져 보다 거대한 화음이 된다는 것에 놓여있다. 철학이 문학을 포섭할 수도, 능가할 수도 없었던 이유는 이런 개별성과 독창성이 하나도 예외 없이 삶에 대한 궁극적인 갈증과 결부되어 있으며 추상적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는 보편성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소크라테스 이후의 철학을 지워내고 시를 통해 새로운 철학하기를 모색했던 이유도 수면 위의 종이배처럼 끝내는 문학 위에서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철학을 근본적으로 수정해 보기 위해서였다.

 

철학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문학에게 몇 천년간 걸어왔다면 문학 역시 철학을 자신의 적대적 동반자로 멀리 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문학은 위장의 규칙을 알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이 위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말라르메는 사물과 언어를 지워내고 이것들이 전달하는 의미의 덩어리를 잡아내려 했지만 시라는 위장이 아니고서는 단 한줌의 의미도 길어낼 수 없었다. 카프카 역시도 문학 안에서 완전하게 구현된 자신을 찾아 보려했지만 그의 소설들은 모두 그리고 언제나 실패로 끝나고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문학이 철학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점은 이렇게 끊임없이 미완성으로만 끝나버리고 마는 자신의 흔적들을 모아줄 수 있는 것이 철학이기 때문이다. 객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이를 표현하는 언어인 논리적 사고는 철학만이 가진 힘이고 흩어진 의미들을 응결시켜 자신에게 되돌려주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또한 문학과 마찬가지로 철학 역시 궁극적인 존재의 완성을 목표로 하며, 실패와 좌절을 자신의 양식으로 가지고 있다. 철학과 문학의 밀고당기는 시소게임이 어느 쪽으로도 무게가 전담되지 않는 것은 존재의 깊이와 유한성이 이 둘 모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과 문학 양편에 한 발씩을 걸치고 있는 비교문학이라는 학문은 이런 점에서 문학의 무한성을 자신의 주제로 가지면서 철학을 이에 다가가는 방법의 길로 택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비교문학은 논리적인 철학의 그물망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언어의 낱알들 속에서 미처 발굴되지 못한 문학의 의미들을 캐내 올리고 이것들의 빛을 모아 철학에게 되돌려주면서 시대를 지탱하는 정신의 뼈대들을 짚어내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도 있다. 문학은 항상 철학이 그어놓은 경계선 바깥에로 시선을 옮기고 철학이 잡을 수 없는 삶의 모순들에 집착해 왔다. 인간의 삶은 어떤 순간, 어떤 시대에서든 존재의 삶으로 빛을 던져왔으며 문학은 이런 순간의 빛을 영원의 빛으로 탈바꿈시켜왔다. 비교문학이 해야 할 궁극적인 사명이 있다면 이런 영원의 빛이 보여주는 존재의 중심, 즉 문학이 도달하려 하는 미지의 중심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이 미지의 중심에 다가서는 과정은 그리고 분명히 철학이 일구어낸 존재의 진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철학과 문학 사이에서 비교문학은 이 둘에 대한 끊임없는 긴장을 삶 한가운데로 좀 더 깊게 밀어 넣으려는 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