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石,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 子夜
여사의 회고
李 東 洵
1.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이지만, 서울에서 경의선(京義線)을 타고 서른 네 번째 역을 지나면 운전(雲田), 고읍(古邑) 다음에 정주(定州)역이 나타난다. 한양서 북으로 천리길을 나귀를 타고 터벅터벅 가야 하던 옛 평안도 정원(定遠) 땅의 군청 소재지.
이른 아침이면 안개가
슬금슬금 기어내리던 북쪽의 독장산(獨將山), 동으로는 봉명산(鳳鳴山), 가뭄때 기우제를 지내던 묘두산(猫頭山), 큰 돌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다던
방호(防胡)고개, 서쪽으로는 임해산(臨海山)이 있어 곽산(郭山)가 경계를 이루고, 동남은 정족산(鼎足山)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기에 좋았다. 역시
그쪽으로 날망에 다섯 봉우리가 보이는 제석산(帝釋山)이 있었는데, 정주 사람들은 이 산을 일러 오산(五山)이라 했다. 춘원(春園)이 오산학교
선생 시절 '제석산인'이라 자호한 것도 이 산의 이름에 근거한 것이다. 서까래같이 굵은 뱀 한 마리가 살았다는 석가산(石假山)이 멀리 아련히
바라다보이는 서북쪽 기슭에는 마을사람들이 '약천(藥泉)'이라 부르는 약수터가 있었는데, 이 물을 마시고 바르면 피부병이 낫는다 해서 많은
부스럼장이들이 들끓었다. 정주의 동쪽으로는 달천(撻川)이 흘렀는데, 이 강은 구성(龜城)의 인산에서 발원해 남으로 흘러 봉명산 물줄기와 합류,
방호고개 밑을 꺾어 흐르다가 이윽고 정주 앞바다로 들어간다. 그 바다에는 고려적에 몽고군에게 쫓긴 김방경 장군이 피난해 숨었다는 위도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정양동 염전이 저녁 햇살 속에 가물가물 보였다.
정주역 앞에는
운해유기점이란 물상 객주가 있었는데, 납청장에서 만들어진 반짝반짝 윤이 나는 유기들은 대개 이곳을 한번쯤 거쳐가게 마련이었고 곽산, 노하,
선천, 동림 등지의 이른바 '예수쟁이 마을'에서 놋그릇을 사러 온 사람들로 항상 붐비었다. 정주는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의 영향으로
기독교 세력이 강했던 지역이었다.
이곳 갈산면 익성동에서
시인 백석은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이 지역의 기독교적인 분위기와는 무관했던 것 같다. 백석은 전형적인 산골 출생으로서 그의 어머니는
몸이 허약한 아들의 수명 장수를 기원하려고 강, 바위, 스무나무 따위에 비난수하는 치성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백석은 어린 시절 온통
전통적인 무속 샤머니즘의 환경에 두러싸여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소시적부터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어린 백석은 이곳에서
'호박떼기'(말타기와 비슷한 유희), '제비손이구손이'(다리를 서로 끼워넣어서 노는유희)'를 하며 자랐다. 정주 출생인 국어학자
이기문(李基文)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제비손이구손이'를 할 때 "한알 때 두알 때 상사네 네비오드득 뽀드득 제비손이 구손이 종제비 빠
땅!"하면서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열을 헤아렸다고 한다.
백석 시집 『사슴』에서 우리는 이 지방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시
「정주성(定州城)」의 '헐리다 남은 성문' 잠자리 조을던 성터'는 고구려 때에 말갈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고주(古州)의 장성과 그 옛터를
가리킨다. 이 성은 정주군 아이포(阿耳浦)면에서 시작하여 강계군 설한령까지 약 170리에 이른다. 정주성문이 있던 곳은 당시 정주군 정주면
성외동과 성내동 부근이다. 시 「성외(城外)」는 바로 고주 장성의 바깥쪽 마을이다. 시 「흰 밤」에서의 '옛성'도 바로 이곳 부근을 묘사한
것이다. 시 「여우난골족(族)」에 나오는 '예수쟁이 마을'은 정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어느 기독교인 성황지였을 것이고, '먼섬'은 정주
앞바다의 위도나 왜도쪽이었을 것이다.
시 「가즈랑집」에 나오는
무당 노파는 북방 관서지방의 어느 세습무였다. 이런 무격(巫覡) 행위와 관련된 의식이 나타나는 작품으로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며 굿을 한다는
「삼방(三防)」, 어디선가 서러웁게 목탁을 두드리는 무당집이 있었다는 「미명계(未明界)」, 바난수하는 모습이 있는 「오금덩이라는 곳」, 냅일눈을
받는다는 귀신 이야기와 치성드리는 의식이 들어 있는 「고야(古夜)」, 역시 애기무당이 등장하는 「산지(山地)」, 무당의 딸이 등장하는 「오리」,
'수무남ㄱ'과 '국수당고개'가 등장하는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이 시에는 백석의 출생과 관련된 태몽 이야기가 있다), 작품 전체가 온통
무속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는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등이 있다.
시 「추일산조」와 「절간의
소 이야기」에 나오는 사찰은 아마도 정주 봉명사의 상원암, 수도암이었거나, 지장사의 석천암, 백미산 기슭의 오용암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시
「여승」에서 말하는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더판"은 정주 금광을 끼고 형성된 광산촌이었거나 선천지방의 한 사금 채취장이었을 것이다. 시
「광원」에서의 "멀리 바다가 뵈이는 가정거장도 없는 벌판"은 아마도 고읍→정주→곽산→노하 이 철도 구간의 어느 한 지점일 것이다. 시
「동뇨부」에는 유아으 소변으로 세수함으로써 피부의 퍼런 반점이 치료된다는 정주지방 특유의 민간요법이 소개된다.
그밖에「미명계」,「성외」,「주막」등의 시는 목재, 유기, 소, 쌀, 대두, 소금 따위의 집산지였던 정주지방의 상공업적 화기를 말해주고 있다.
이런 고장의 배경에서 백석은 소년시절 오산학교를 다녔다. 그는 재학중에 처음으로 서울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이때의 기억을 한참 뒤에
《조광》지의 설문란에다 쓴 적이 있다. 맨 처음 서울 올 때의 차림새를 묻는 물음에 그는 "검은 고꾸라 중학생복을 입고 왔다"고 했으며, 그때
서울의 첫인상은 "건건쩝쩔한 내음새나고 저녁때 같이 서글픈 거리"라고 말했다.
백석의 아버지
용삼(龍三)씨는 사진을 매우 잘 찍고, 사진기술이 뛰어나서 조선일보의 사진반장으로 부임하였는데, 백석은 부친의 권유로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
선발에 합격하여 일본 유학길을 떠난다. 나중에 의사로서 문필가가 되었던 백석으 친구 정근양도 이때 백석과 함께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씨의 장학금을
방아 일본으로 갔는데, 정은 의과대학을 지망했고 백석은 아오야마(靑山)학원 영문과에 들어갔다.
그는 1934년 귀국하여
조선일보 출판부 기자로 정식 입사한다. 이때 그의 부모는 이미 서울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그는 조선일보에서 발간하던 계열 잡지인 《여성》지의
편집일을 맡아보면서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때 그는 벌써 자신의 고향마을을 배경으로 한
유년시절의 애틋한 추억들을 독자적인 호흡과 시 형태에 담아 여러 편의 작품을 써가고 있었다. 이듬해 정월에 이러한 그의 작업들은 한 권의 시집이
되어 문단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사슴』이었다. 이 시집이 발간되자 당시 조선일보 학예부에 재직하고 있던 시인 김기림은 곧 조선일보의 신간
소개란에다 「'사슴'을 안고」란 제목의 멋진 글을 써주었다.
1987년말 『백석시전집』이 창작사에서 나온 직후 시인 우두(雨杜) 김광균(金光均)은 필자에게 직접 서신을 보내면서 그때의 감회를 적었다.
백석 시집 『사슴』의 초판은 한지로 찍어, 하드카바 역시 한지, 케이스 역시 한지였습니다. 오장환군은 장정을 매우 중요히 생각하던 친구인데, 백석 시집 앞에서는 모자를 벗는다고 함께 좋아하던 생각이 나고 …… 백석 시집이 나온 다음해인지 분명치 않사온데, 황혼에 광화문 네거리를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지나가는 미목수려(眉目秀麗)한 시인을 먼 것으로 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시집을 내던 해인 1936년 백석은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가 되어 옮겨갔다. 이때 그보다 일년 먼저 영생학원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있던 평론가 백철의
천거가 있었던 것 같다.
다음은 백석과 함흥에서 만난 이후 3년 동안을 함께 살았던 子夜(자야) 여사의 회고이다.
2
나는 시인 백석과 1936년 가을 함흥에서 만났다. 그의 나이 26세, 내가 스물둘이었다. 어느 우연한 자리였었는데, 그는 첫대면인 나를 대뜸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자기의 술잔을 꼭 나에게 건네었다. 속으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의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그는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으 의식은 거의 아득해지면서 바닥 모를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했다. 그것이 내 가슴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애틋한 슬픔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함흥 교사시절 그는 하숙을 했고, 나도 하숙생활을 했다. 영생학교는 반룡산 밑에 있었고, 그의 하숙은 학교에서 한 오 리쯤 떨어진
함흥 근교의 중리(中里)라는 곳에 있었다. 그때 나는 함흥의 히라다백화점에 볼일이 있어서 갔었던 것이다. 그의 첫인상은 외국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스물댓밖에 안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란 말을 썼었는지 ……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 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했는데, 나는 그 말이 뜨끔하긴 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늦은 밤이면 반드시
내 하숙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때 하숙집 부근 길목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그곳 진열대에는 젊고 예쁜 여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그 앞에만
오면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지나갔다. 마치 '당신 밖의 아무 여자도 나는 싫소'라는 뜻을 나에게 보여 주려는 듯이……
어느 날 내가 서점에
들렀다가 『당시(唐詩)선집』하나를 사왔는데, 백석은 그 책을 한참 읽고 나더니 문득 나에게 '子夜(자야)'란 호를 지어주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백석의 '자야'가 되었고, 이 호는 아마 지금도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이름일 것이다. '자야'란 무론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란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시는 중국 동진의 한 여인 '자야'라는 이가 변경으로 수자리하러 간 남편과의
생이별을 서러워하는 민요풍의 노래이다. "長安一片月 / 萬戶 衣聲 / 秋風吹不盡 / 總是玉關情 / 何日平胡虜 / 良人罷遠征"
나의 이 깊은
외로움도 그때 백석이 이 '자야'란 호를 나에게 붙여 주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고 마련된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아직도 그의
원정(遠征)이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937년 늦가을이었다.
그는 어느 날 《여성》잡지 한 권을 들고 싱글싱글 웃으며 찾아왔다. 그는 책을 뒤적뒤적하더니 한 곳을 펼쳐 코밑에 쑥 들이밀었다. 보니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바다」라는 제목의 시였다. 자품으 아래쪽에는 한남자가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빈 백사장에서 우두커니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그림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시를 읽다가 문득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 당신이 이야기를 귾는 것만
같구려" 란 대목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는 대뜸 말꼬투리를 잡아 "내가 끊긴 무얼 끊어요?" 했더니 그는 "밤낮 날더러 장가들라고
했잖았소!" "당신 머리 속에서는 지금도 나를 떠나라 하고 있지?" "왜 내 말이 잘못되었소?"라며 연거푸 정색을 하고 빠른 말로 말했다. 사실
나로서도 그런 말 하는 것이 무척 싫었지만, 나는 그에게 장가들기를 권하곤 했다. 그럴 적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백석의 어머니는 그때 쉰이 넘어서 손자 없는 것을 늘 허전하게 여겼다고 한다. 겨울방학이 되어 백석은 서울 그의 부모 슬하에 가서 여러 날 있다
오게 되었다. 불과 며칠을 서로 떨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함흥으로 줄곧 편지를 써 보내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신문이 배달되어 오는 것처럼. 편지글은 다정다감한 문체였으며 '오늘은 누굴 만나고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소……'라는 식의
하루의 일과를 모두 깨알같이 써서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편지가
뚝 끊어지더니 열흘 정도 소식이 없었다. 몹시 궁금히 여기고 있던 어느 날 그가 에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부모가 하도 맞선을 보라 해서
강잉히 맞선을 보았다는 것과 그게 가책이 디어 편지를 못 내었노라는 내력을 말했다. 그는 평소 부모의 말씀을 퍽 두렵게 여기는 듯했다. 나와
함께 살면서도 부모가 새악시 선을 보라 하면, 그는 그것을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런 성품을 알면서도 자꾸만
울화가 치밀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서운했다. 나는 속으로 '흥, 그대가 총각이라지 …… 야,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그래, 내가 피해줄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허전한 마음이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뒤에 알고 보니 그는 편지가 끊어진 그
열흘 동안 맞선만 본 게 아니라 초례(醮禮)까지 치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장가든 지 사흘 만에 집을 나와 함흥의 나에게로 달려왔던 것이다.
각시의 얼굴을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행위가 너무도 야속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가 학교에 출근하는 걸 보고 그 길로
이불이랑 짐보따리를 꾸려서 낮 11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아주 내려와버렸다. 1937년이 저물어가던 무렵이었다.
그 몇 달 뒤인 이듬해
봄, 어느 주말 오후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청진동에서 11간짜리 아주 작은 집을 구해 살고 있었는데, 사동(使動)이 웬 쪽지를 들고 찾아왔다.
펴보니 백석이 보낸 메모였다. "몇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사동에게 물어보니 그는 지금
우편국 앞 제일은행 부근의 한 오뎅집에 있다고 했다. 내 가슴은 사뭇 그리움으로 두근거려 왔다. 부리나케 그의 앞에 가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노라니 그는 다시금 지난해의 사건을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반갑고 기뻤지만, 그의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그가 무작정 좋아지고, 또한 우쭐거려오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동안 쌓인 모든 含怨(함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튿날 그는 출근하기 위해 밤차로 함흥으로 떠났고, 나는 서울에 남았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절대로 갈라설 수 없는 하나임을 새삼 느꼈다. 그해 초여름, 서울에서는 전선(全鮮)고교대항축구대회가 열렸는데, 백석은 함흥
영생고보 축구부 학생들을 인솔하고 서울에 나타났다. 약 한 주일 가량의 출장인 것 같았는데, 그는 오던 첫날만 학생들을 연습장에 데려다주고는
줄곧 나의 청진동 집에서 기거하다시피 했다. 내가 "학교 아이들은 안 돌보고 왜 자꾸 여기만 계셔요?"라고 재촉도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인솔교사를 잃어버린 학생들은 모처럼 상경한 기분에 들떠 떼를지어 유흥장으로 몰려다녔다. 이들 중 몇몇이 서울의 학생지도 하동단속교사에
적발되었고, 교사는 학생들을 힐문하기 시작했다. "어느 학교 학생이야?" "함흥 영생고보입니다." "서울은 무슨일로 왔지?" "축구시합에
출전하러 왔습니다" "인솔교사는 어디 갔어?" "몰라요, 저희들두 오던 날 운동장에서 한 번 뵌 후론 다시 못 만난걸요." 일이 이렇게 되자,
함흥 영생학교는 온통 벌집 쑤신 듯하였고, 특히 고참교사들의 노여움은 대단하였다. 당시 영생학원 이사장으로 있던 이모씨는 평소 학교일에 매우
열성적이었던 백석을 퍽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다른 교사들 보기에도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일이라 해서, 같은 영생학원 계열의 여학교로
전보 발령을 시켰다. 그 난감한 경황을 무릅쓰고, 백석은 다시 함흥으로 돌아가 영생 여고보에서 한 학기인가를 근무했다. 방학 때 다시 서울에
왔었는데, 그때 이미 함흥으로 돌아갈 생각을 안했던 것 같다.
그는 사표를 써서 우편으로 부쳤다. 그런 며칠 뒤에 조선일보 출판부 옛
직장에서 나와달라는 연락이 왔고, 이로부터 백석의 서울 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함흥 영생학교 시절 아동문학가 강소천과 목사 김관석이 백석에게 영어를 배웠다. 지난날 함흥에서 거주한 적이 있는 시인 이기형은 그 무렵 백석이 '함흥 최고의 멋쟁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백석은 한 평범한 교사에 불과했지만, 이미 시집『사슴』을 내어 문학적 명성이 높았던 터라, 그는 함흥의 문학지망생들의 시뿐만 아니라, 습작소설까지도 자상하고 꼼꼼하게 지도해주었다고 한다.
3
백석가 나는 앞서 말한 나의 청진동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 함흥시절은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나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무데도 구애받지 않아서 좋았다. 마당 한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에 딸린 작은 찬방(饌房)이 하나 있어서, 우리들에겐 그지없이 단란한 보금자리였다. 그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청진동 집을 말한 것이다. 몇해 전에 나는 친구와 이 집을 일부러 찾아가보았는데, 뜻밖에도 그곳은 꼬리곰탕을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는 식당 안방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놓고 옛 청진동 시절의 추억에 젖었던 적이 있다.
그 시절 우리 둘은 참으로
행복하였다. 워낙 서로 만족하였고, 아무런 빈틈이 없었으며, 오직 서로에게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밖의 아무런 것에도 무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늘 나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려고 세심한 배려를 했던 것 같다. 그는 나의 어떤 일에도 절대 간섭을 하지 않았으며,
불편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단정한 젠틀맨이었고, 매사에 열정적이었다. 비록 밖에서 화난 일이 있었어도 혼자 가만히 참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언제 화를 내고 있었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았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말수도 적었고, 어떤
경우에도 남의 결점을 화제로 떠올리는 법이 없었다. 이런 그의 성격을 까다로운 편이라고 할까. 물 한 방울 종이 한 장조차 누구에세 신세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으며, 또한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때 청진동 집에는 늘 와서 부엌일을 보고 잔심부름도 해주는 찬모가
있었는데, 나는 그가 찬모에게 무엇을 시키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처럼 말수가 적던
백석도 일단 시에 관한 화제로 옮겨지면 갑자기 눈빛을 반짝거리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요절한 일본작가 아꾸다까와(芥川龍之介)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고, 또 다른 일본 문인들의 이야기도 재미있게 했던 것 같다. 내가 문학을 모르니 다만 웃기만 하고 들을 뿐, 절대 아는 척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 무렵 《삼천리(三千里)》지에 두어 편으 수필을 필명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종로 네거리 한청빌딩 부근에서
과일 파는 상인들의 밤 풍경을 쓴 것인데, 나의 글이 실린 책이 나오던 그날은 하루종일 함박눈이 펑펑 왔다.) 일본의 문인들을 화제로 떠올리긴
했지만, 그는 일본말 쓰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일찍이 일본 유학도 다녀왔으니 일본말도 잘했을 것이나, 그는 일본말을 써야 할 때, 거기에 바꿔
쓸 수 있는 우리말을 애써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보통 담화 때는 주로 표준말을 썻지만, 그의 억양은 짙은 평안도 말씨였다. 무슨 일로 기분이
상했거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때, 그는 야릇한 고향 사투리를 일부러 강하게 쓰는 습관이 있었다. 한 예를 들면 천정을 '턴정' 정거장을
'덩거장', 정주를 '덩주', 질겁을 '디겁', 아랫목을 구태여 '아르궅' 따위로 쓰는 식이었다. 그의 식사 공궤(供饋)는 매우 수월한
편이었다.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잘 들었지만, 육류보다는 나물반찬을 비교적 더 좋아했다.
한번은 함께 시내 나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푸줏간 앞을 지나는데, 그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시뻘건 고깃덩어리를 어떻게
똑바로 쳐다볼 수 있어?"하고 말했다. 정말 그는 푸줏간을 제일 질색했다. 함께 살면서 보니 그에겐 이처럼 드러나보이는 이상한 습관이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집 안방의 창문을 여닫을 때도 그는 잠금쇠 만지기를 피하여 손이 잘 닿지 않는 창문틀의 위쪽이나 아래쪽을 겨우 밀어서 여닫곤
했다. 한번은 함께 전차를 타고 어디를 가던 길이었다. 전차가 길모퉁이를 돌 때 갑자기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 쏠렸다. 그때까지 머리 위의
손잡이를 불결하다며 아무것도 잡지 않고 그냥 서 있던 그는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창유리에 갖다대면서 몸의 중심을 유지했다. 또 오랜만에 놀러온
친구와 악수하고 난 뒤에는 곧 그가 눈치채지 않게 수도간으로 나와 꼭 비누로 손을 씻곤 했다. 보다 못한 내가 몇 차례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수건을 달랄 때 일부러 안 주곤 했더니, 그 뒤 그 습관만큼은 조금 고쳐진 것 같았다.
그는 각별히 즐기는 취미나
오락은 없었다. 술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경음가(鯨飮家)는 아니었고 오히려 애주형에 가까웠다. 책으로는 모리악의 『예수전』, 중국작가
변윤(邊潤)의 『요불이전(了不以前)』을 즐겨 보았으며, 심심할 때면 잡지 《문에춘추》를 보거나 일본시집을 뒤적거릴 정도였다.
그의 목소리는
참 다정스럽고 부드러웠으며, 청으로서도 괜찮은 편이었으나, 내가 아는 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집에 빅터상표의 고급
유성기가 하나 있었지만 한번도 거기에 손대는 걸 못 보았고, 가요·창극 같은 데도 무관심했다. 그 무렵《조광》지가 요청해온 설문란에다 그가
자신의 취미를 '西道唱(서도창)'과 '타이프라이팅'이라 쓴 것을 보았는데, 이 '서도창'이 직접 부르는 걸 말하는 것인지 소리꾼의 노래를 듣는
걸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는 다만 말없이 묵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러다가는 잡지보고, 시집보고……하였을 뿐이다. 그의 본명이
백기행(白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무렵 청진동으로 그에게 부쳐져오던 편지의 겉봉에는 '백기연(白基衍)'으로 씌어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그가 몹시 기뻐하던
모습을 꼭 한번 본 적이 있다. 언젠가 내가 시내 본정(명동의 일제 때 이름) 부근엘 나갔다가 상점의 쇼윈도에서 넥타이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옅은 검은색 바탕에 다홍빛 빗금 줄무늬가 잔잔하게 박힌 것이었다. 얼핏 그것이 백석에게 매우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심코 사와서
드렸더니 그의 얼굴 표정에는 기뻐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튿날 그는 내가 사온 넥타이를 매고 출근 했는데, 저녁때 와서는, "여보, 오늘
××를만났는데, 이 넥타이 참 좋데" 라고 했다. 그는 그 뒤 여러 날 동안 줄곧 그 넥타이만 매었고, 퇴근 후에는 예의 그 말을 꼭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어제 그 소리 오늘 또 하네. 어쩌면 그게 그렇게도 좋을까' 했지만, 내심 그말이 듣기에 즐거웠다.
이 넥타이
이야기는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라는 시에서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흔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로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4
백석은 사람을 만나 그가 먼저 주도해서 교제를 이끌어간다거나, 누구를 새로 사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인간 백석이나 그의 시에 홀딱 반해버린 사람이 아주 그에게 제 스스로 엎어져오기 전에는 도무지 사교의 능력이라곤 없는 사람이다. 얼른 보기에 무심한 편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는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친밀감을 표시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한 중에서도 함대훈, 허준, 정근양, 그리고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조○○는 비교적 가까이 지내던 친구였다.
도쿄 외국어학교 노어과를
나온 일보(一步) 함대훈은 황해도 풍천 출생의 노문학자로서 소설도 몇 편 썼다. 그는 조선일보 출판부 주임으로 있었으며, 편집국장을 지낸
함상훈과는 형제지간이었는데,괄괄한 성ㄱ겨에다 대단한 호주(豪酒)였다. 당시 그는 청운동에 살았는데, 우리의 청진동 집에 가장 자주 놀러왔던
백석의 친구였다. 나중에는 그가 아무때건 불쏙 찾아오는 것이 너무 싫어서, 내가 백석에게 "함대훈 씨가 싫어요"라고 말하면, "그는 당신이
좋다고 하던걸" 하면서 꼭 친구와 나를 함께 두둔하곤 했다. 그래도 줄곧 내가 못마땅한 얼굴로 "함씨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에요?"하면 "아냐,
그는 정말 당신이 좋대"라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함대훈은 그때 무슨 잡지를 만들던 최남주라는 이의 여동생 최옥희와 열애에 빠져
있었다.
평안도 용천 출신의 소설가
허준은 1935년 10월 조선일보에 시 「모체(母體)」를 발표하면서 백석과 비슷한 시기에 문단에 나왔는데, 이듬해 《조광》지에 「탁류」란
단편소설을 쓴 후 아주 소설 쪽으로 돌아섰다. 백석과는 같은 직장에 있으면서 서로의 심지(心志)가 꽤 잘 들어맞았던 것 같다. 그는 낙원동에
살면서 자주 왔었는데, 매우 큰 체격으로 다정다감한 성격이었으며, 술을 좋아했다. 백석이 허씨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시까지 쓴 걸 보면, 그와
남다른 우정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의사로서 문필생활을 겸하던 정근양, 그는 앞서도 말한 바처럼 백석과 조선일보 장학생 동기였고 청진동 집에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나중에 백석이 만주로 떠났을 때, 정도 서울을 떠나 북지(北支)산서성 임분현 이라는 곳에 가서 병원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또 한 사람의 친구는
서울의 어느 중학 영어선생을 하던 조○○였다. 그는 우리집에서 놀다 밤이 늦어 돌아갈 때면, 그때마다 우리를 앞에세워놓고 "그대들 둘은 어찌
그리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인고……"하면서 부러운 듯 말했다. 사실 백석과 나는 서로 다른 기질 때문에 오히려 잘 맞았는지 모른다. 한쪽이 뾰족한
성품이면 다른 한쪽은 좀 둥글둥글한 것이 인간관계의 조화가 아닐까.
그밖에 백석과 평소 가까이
지냈던 이드은 문학평론가 백철이 있다. 그는 백석보다 네 살 위였지만 동향선배로서 친밀하게 지냈고, 함흥 영생학원에도 한때 같이
있었다.
1935년 시집『사슴』이 나온 직후, 서울 태서관에서 가진 출판기념회 발기인 명단의 이름들은 몇몇을 빼곤 대부분 백석과 조선일보에
함께 몸을 담고 있던 문인, 화가들이었다. 또 그들은 대개 백석의 시를 남달리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안석영(安夕影)은 서울
토박이로 본명이 석주(碩柱)였다. 일찍이 1921년 나도향(羅稻香)의 동아일보 연재소설『환희』의 삽화를 그렸던 그는 한국 삽화계의 선구자이다.
30년대 중반 안씨는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냈는데, 워낙 잘생긴 얼굴에 다재다능하여, 나중에는 언론계를 떠나 전적으로 영화에만 몰두하였다.
백석보다는 11년 위였는데, 서로 각별히 따르고 위하였다.
김규택(金圭澤)은
웅초(熊超)란 호를 가졌던 분으로,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나와 역시 조선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던 화가였다.
일본 호세이대학 불문과를 나온
여천(黎泉) 이원조(李源朝)는 경북 안동사람으로 시인 이육사(李陸史)의 아우였는데, 그때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다. 언제나 한복차림이던 그는 늘
자신이 양반고장 사람임을 자랑삼아 말했고, 그것을 날마다 들어온 사람들은 "여보, 그 양반타령좀 작작허우"하며 싫은 소리를 하였다. 깔깔한 샌님
같던 그도 일단 술이 취하면 주사(酒邪)가 대단해서 모두들 슬금슬금 뺑소니치는 모습이었다.
함경도 출신의 시인
편석천(片石村) 김기림은 백석보다 4년 위였는데, 그도 일찍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다. 『사슴』시집이 출간되자마자 즉시 서평을 써줄 정도로
그는 백석의 시를 좋아했다.
정현웅은 1931년
선전(鮮展)에서 작품「여인상」이 특선으로 뽑힌 서양화가로서 당시 백석과 함께 《여성》지의 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어느 잡지의 삽화로 백석의
프로필을 그리면서 "미스터 백석은 바로 내 오른쪽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오리기도 하고 와리스케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느 밤낮 미스터
백석의 심각한 얼굴만 보게 된다. 미스터 백석은 서반아 사람도 같고 필리핀 사람도 같다. 미스터 백석에게 서반아 투우사의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삽화의 말을 썼다.
한편 백석이 평소에 문학적 재능을 자주 칭찬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동문학가 강소천이다.
용률(龍律)로 함남 고원 태생인 그는 백석보다 불과 3년 밑이었으나, 만학으로서 백석에게 직접 문학을 배운
제자였다.
1939년 서울 명동입구 미도파 건너편에 '제일다방'이라고 있었다. 이 다방은 당시 경성일보 학예부에 있던 일본인 기자 기쿠지(菊池)으 아내가 경영하던 곳으로, 이른바 재경(在京)문인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언제 어느때건 가보면 낯익은 문인 몇몇은 꼭 눈에 띄었다. 공작새의 꼬리깃으로 장식한 세련된 실내장식에다, 이름있는 유화도 여러점 운치있게 걸려 있는 꽤 분위기 있는 다방이었다. 한번은 그곳으로 오라는 전갈이 와서 가보니 백석은 함대훈, 백철 등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정쩡하게 합석이 되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양인은 번갈아가며 나의 얼굴이 예쁘다드니 어떻다느니라는 말을 자꾸 거듭하여 면전에서 몹시 난처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백석은 혼자 웃고만 있었다. 나중에 백석이 만주로 떠난 후에 길에서 허준, 정근양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도 "김(金)은 어째 갈수록 예뻐져?" "백석이 장가를 두 번씩이나 들고도 곧장 도망나온 까닭을 인제야 알겠구먼."이라고 큰소리로 떠들어 그때도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른 적이 있다.
1939년 유월 어느
아침이었다고 생각된다. 백석은 그날 충청도 진천으로 한 주일 가량 출장을 다녀오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여자의 육감으로 그가 먼젓번처럼
필시 장가들러 가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약속한 한 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번에도 좀 늦어지긴
하겠지만 틀림없이 돌아오리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에 달갑지 않은 것에 대한 그의 차디찬 성질, 그리고 나를 향한 열정을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청진동 집에서 조선일보까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나는 찾아가기는커녕 전화 한 번조차 걸지 않았다. 점차
매섭게 타오르는 내 가슴속의 독(毒)과, 또한 나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나의 성격을 백석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또 몹시 초조하게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없는 빈방에 혼자 남아서 무척 공허한 심정이 들었고, 내 가슴 속의 공허감은 차츰 매몰찬
복수심으로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매몰찬 복수라는 게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기껏해야 연전에 내가 몰래 함흥을 빠져나오던 것처럼,
나는 그에게서 한동안 멀리 떠나 있고자 했던 것뿐이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채로…… 웬만한 살림을 대충 챙겨서 나는
명륜동 언덕으로 숨어버렸다. 지금의 성대 뒤쪽이었는데, 1930녀대 후반 그곳 부근의 앵두나무, 능금나무, 배나무 따위를 심어놓은 과수원이
많았고, 주택들도 드문드문 서 있는 변두리에 불과했다. 지난달 부통령을 지냈던 장면(張勉)씨의 집이 바로 길 건너편에
있었다.
어느 석양 무렵이었는데,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누가 "자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된 일일까? 그는 내가 잠적한 이곳을 모를텐데……(그가 어떻게 나의 거처를
찾아내었는지 나는 지금도 그것을 불가사의로 생각한다.) '자야'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백석뿐일텐데…… 부르는 소리는 두 번 세 번 거듭
들렸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망설이다가 '에라, 어찌 되었건 나가놓고 보자' 하고 중얼거리며 황급히 나갔더니, 그가 석양을 등지고 퀭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두 달 만에 다시 만났다.
나는 그때까지도 무척 독이
나 있었지만 막상 얼굴을 대하는 순간 다시금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좋아서 마음이 시루리 풀리듯 스르르 풀려 버렸다.
그러나 나는 백석의
부모가 못내 원망스러워졌고, 또 예의 그 독한 마음은 불쑥불쑥 치밀었다. 그는 본시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족두리를 풀어내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색시를 내버려두고 집을 나온 것이다. 내가 알기로 백석이 사모관대하고 장가를 든 것은 두 번이다. 그러나 그는 그 때마다
부모가 정해준 배필을 마다하고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1939년 동지달이었을 것이다. 나는 중국의 북경, 소주(蘇州),항주(杭州) 상해 등지를 거쳐 한 달 만에야 돌아왔다. 떠날 때 나의 행선을 백석에게 알리지 않았다. 다녀와서도 나는 그에게 여행 이야기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그 또한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알리지도 않고 중국을 다녀온 처사에 대해 상당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앵돌아진 속으로 '당신께선 지금 저 때문에 화나시게 해서 송구스럽지만, 당신도 제가 겪은 고통을 한번쯤 겪어보셔야 해요'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그저
묵묵해지기만 했고, 서로의 일과를 화제로 떠올리지도 않았으며, 이런 우리들 사이는 심상찮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하루는 그가 보낸 메신저가
왔다. 왕십리역 대합실 구내다방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때의 왕십리란 보잘것없는 초가와 들판뿐인 아주 시골이었는데, 동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종점인 왕십리까지 가서 내리면 사방에서 거름 썩는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그 변두리 먼곳까지 나오라 했던 것 같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대뜸 자기와 함께 만주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실 이러한 권유는 함흥시절부터 심심찮게 들어오던 터라 조금도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그의 표정은 너무도 심각한 듯 여겨져서, 나는 적지 않이 당황하였다. 나는 그때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그는 만주 신경(新京)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나에게 단 한마디의 그 어떤 기별도 남겨두지 않은
채…….
5
돌이켜보면 그의 만주행은 함흥에서부터 계획해오던 것이었고, 또 그가 재차 서울로 와서 옛 직장을 다시 나가고 한 해를 머무른 것도 결국은 나 때문에, 내가 마음에 걸려서였던 것 같다. 나 아니었으면, 그는 진작 함흥에서 만주로 곧장 떠나갔으리라. 그가 만주땅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깊은 속뜻을 내 얕은 여자의 소견으로 어찌 감히 짐작인들 했으랴만…… 그는 내가 자기 권유대로 쉽게 만주로 따라오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이런 대목을 본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그때 만주로 함께 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진작 그곳 생활이 지겨워진 나의 성화에 못이겨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를 만주에서 온갖 고생을 하게 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한 것도 나였고, 국토가 둘로 쪼개어져 그를 다시는 북에서 서울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도 모두 내가 미욱했던 탓이다.
만주 신경시절 백석과 같은
집에서 살았다는 작가 송지영(宋志英)씨의 술회로는 백석이 그때만큼은 고향의 부모에게 매달 약간의 송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괜찮았다고
한다. 그 무렵 항상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송씨가 "그 옷, 서울의 김이 보냈구려"하고 농을 걸면, 백석은 갑자기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 이후 백석은 실직상태가 되어서 만주의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몹시도 고달픈 생활을 하게 되었던가보다. 그가 이렇게도 모진
고생을 했었다는 생각을 하면 온통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 시절 만주의 쓸쓸한 하숙방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 그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를
통해, 나는 필시 나의 모습으로 짐작되는 부분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때가 해방 직전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생활의 외로움과 고달픔은 그의 마지막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낱낱이 그렁그렁 박혀있다. 깊은 밤에 그의 전집을
끌어안고 이 시를 혼자 목이 메어 읽어가노라면 주체할 길 없이 솟구쳐오는 뜨거운 눈물을 나는 참지 못한다. 이 시에서 그의 맑고 고결한 정신은
이미 세속을 훨씬 떠나 있는 듯하다.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흡사 그가 눈앞에 당장 되살아온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 말 속에는 평소의 그의 성품,
현실에 임하던 그의 모습 같은 것이 그대로 생생하게 스며 있다.
그와 헤어지고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러갔다. 시간이란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이날 이때까지 온갖 곡절을 겪으며 살아온것도 헤아려보면 모두가 백석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고, 또 그를 향한 반발심이 물끓듯
끓어넘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내가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고, 나 또한 서럽게 살아왔다. 어찌
모든 것을 이대로 마감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 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이었다. 그와 헤어진뒤의 텅빈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의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나온다.
사실 10여 년 전부터
나는 그의 전집을 내 손으로 엮어보려고 틈날때마다 흑석동 살던 백철 씨와 의논해왔었다. 그 무렵, 백철은 어느 신문칼럼에서 시인 백석을 일컬어
"한국시사에서 소월 다음가는 귀재"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후 병을 얻어 나의 포부를 도와주지도 못하게 타계해버렸다. 이미 그의 전집이
세상에 나왔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6
이제 이 글도 끝마무리에 이르렀고 필자는 '자야' 여사가 살아온 삶에 관한 짤막한 여담을 언급할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1916년 병진생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나이 열일곱에 여창명인 김수정의 안내를 받아, 조선권번 정악전습소 학감을 지낸 금하 하규일 선생의 넷째 양녀로 들어가, 이후 3년간 그 문하에서 가무를 배웠다.
국악사로서 진안군수까지 지냈던 하 선생은 일찍이 가곡의 천재 박효관에게 사사(師事)받아 일가를 이룬 구한말 남창명인으로 그때 이미 일흔이 훨씬 넘은 노인이었다. 그녀는 하 선생으로부터 여창가곡에 남보다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아 수창(首唱, 여창가곡을 부를 때 첫곡을 혼자 부르는 것을 말함. 두 번째 곡을 혼자 부르는 것을 亞唱이라 했다.)을 불렀고, 춤에도 소질이 두드러져 '무산향(舞山香)' '검무(劍舞)'따위의 정재(呈才)는 물론, 특히 '춘앵전'(春鶯전, 궁중의 마당에 화문석을 깔고, 한 사람의 무기(舞妓)가 그 위에서 유초신지곡(柳初新之曲)에 맞추어 돗자리 밖으로 나가지 않고 추는 매우 아름다운 독무의 이름)은 그녀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하규일 선생은 늘 그녀에게
"명창은 열이 나는데 명무(名舞)는 하나가 어려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수업 후 오래 국악을 중단하였다가 20여 년이 흐른 뒤인
마흔에 이르러 비로소 가곡의 진의를 깨달아 김수정과 더불어 몇 년간 여창을 불렀다. 그후 김수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난향과 수년간 여창을
불러 근 10년 이상 여창가곡에 대한 공부를 다시 계속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가곡은 남창과 여창으로 부르는 성악곡으로서, 고려적
'진작(眞勺)에서 유래된 노래인데 조선시대를 거쳐 대원군 집정기에 이르러 현재의 26곡 형식으로 정착되었다. 현행 가곡은 우조(羽調) 11곡,
계면조(界面調) 13곡, 반우반계면조(半羽半界面調) 2곡인데 대금, 세피리, 해금, 단소, 양금, 가야금, 거문고, 장구의 세악 편성으로
반주한다.
지금도 자야 여사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현듯 슬픔이나 한 같은 것이 솟구칠 때, 한국 정악 중에서 '여창계면 편수대엽(編數大葉) 모시편'을 그윽히 짚어간다. 옛
엄정한 법도 그대로 한 무릎을 곧추세우고 똑바로 앉아 두 손을 그 위에 포개어 얹는다. 고개는 다소곳, 눈을 반쯤 내리떠서 한 지점에다 꽂은
듯이 멈추어놓고, 맑고도 고요한 음색으로 가곡을 불러간다.
외로운 한 마리 학은
창공에 올라 끼룩끼룩 울고, 장구소리는 슬픔과 한데 어우러져 저절로 반주가 된다. "떵 더러러쿵 딱 기덕 쿵더떵 더러러 쿵
더!"
모시를 이리저리 삼아 두루 삼아 감삼다가 가다가 한가운데 똑 끊쳐지옵거든 호치단순으로 홈빨며 감빨아 섬섬옥수로 두끝 마조 잡아 배뷔쳐 이으리라 저 모시를 우리도 사랑 끊쳐갈 제 저 모시같이 이으리라
이제는 모든 것이 저 흘러가버린 물결 속으로
사라졌다. 자야 여사의 가슴속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시인 백석을 생각하는 저 깊은 한도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는다.
그러나 한
인간에게 있어서 지난 시절의 추억을 다시금 돌이켜 되새기는 일이란 얼마나 가슴 쓰리고도 아름다운 일인가.
필자는 여사의 댁을 나오며, 문득
그녀의 안방 벽 액자 속에 박제되어 들어 있던 한 마리 청람색 나비의 고운 나래를 떠올렸다. 무수히 많은, 그리고 자그마한 나비들에 의해
둘러싸인 그 커다란 나비는 맑은 유리판 밑에서 파아란 나래를 활짝 펴고 곧 창공을 날아갈 듯 파닥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지금
유리액자 속에 갇혀 있는 걸 어찌하리.
이루지 못한 꿈만 팔랑팔랑 날아올라 저 들판 등성이
너머로 건너간다.
지금 생사조차 알 길 없는 그의 님을 찾아서……
(《창작과비평》 복간호, 1988.)
백석의 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 동 순
인간의 말이라고 하는 것이 요즘처럼
그 품격을 잃어버린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말이 스스로의 품격을 잃어버리게 된 모습을 우리는 말의 타락이라고 한다. 말이란 원래 인간의
것이니 말의 타락은 곧 그 시대 그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 생활, 인간 정신의 타락과 다름아니다. 이러한 말의 타락 현상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선 가장 첫번째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식언(食言)일 것이다. 앞서 행한 자신의 말이나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다르게 말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실천보다 목적이 더 급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모든 분야에서 책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식언은
뭇사람의 도덕성을 마비시키고 근원적인 교란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감언이설도 말의 타락현상 중의 하나이다. 남의 비위에 맞도록 꾸민 달콤한 말과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 꾀는 말이니 식언의 앞단계에 해당하는 것이오, 식언 이후에도 무더기로 확산되는 현상이다. 이처럼 말의 타락 현상의 하위
개념들로 이어지는 것은 실속없이 오버액션으로 떠들어대는 훤사,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며 교묘히 둘러대는 교언, 껍질의 아름다움에만 집착하는
미사여구, 그 성질 자체가 천하고 더러운 비어, 난폭하게 내뱉아 버리는 폭언 따위라 할 수 있다.
러스킨이 말한 바 '가면을 쓴
외교관' '교활한 외교관' '표독한 독살자' 따위는 모두 이 말의 타락현상을 풍자하는 말일 것이다. 인간의 말이 요즘과 거의 버금갈 정도로
극심한 타락 현상을 보였던 것은 나라의 주권을 강도 일본에게 빼앗겨 유린 당하던 일제 말기가 아니었던가 한다. 전통적 가치를 포함한 기존의 모든
민족적 가치가 일제의 계획적 조직적 파괴로 깡그리 무너져 가던 어둡고 암울한 시대에서 우리는 시인 백석(1912∼?)의 민족언어를 위한 고결한
노력을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처럼 당시 식민통치자들의 주된 목표는 제국주의적 규격화, 규범화, 구별화의 강압적
개편으로 한반도에서 진작부터 살아온 토착민들을 일본 국민으로 동화시켜 버리거나, 아예 점령지 밖으로 추방해 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상당수의 기회주의적 지식인들은 일제의 정책을 고분고분 접수하여 자신들만의 살길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그 극단적인 모습들이 일제말 친일
문인들의 행각으로 표상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시인 백석은 민족의 주체적 자아를 문학 쪽에서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활동 영역을
농촌 공동체의 생활과 그 정서에서 찾으려 했다. 그무렵 도시공간에서는 이미 말의 타락 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 인간 의식의 붕괴 및 파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민중들이 믿어왔던 지식인들은 참으로 그 모습이 말이 아니게 달라져서 소일본인화되어 버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이라곤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는 강연,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선무성 시국강연 따위로 분주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었고, 신뢰할 수 있는
한 마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농촌만큼은 제국주의자들의 극악한 농촌파괴 정책에도 불구하고 혈연과 거주지로 함께 엮어지는
생활공동체의 끈끈한 유대를 여전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이다. 역시 동향인 시인
김소월과는 당시의 유명했던 사학 오산고보의 선후배 사이로 백석은 선배시인 소월의 문학세계를 매우 흠모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채로 소월이 먼저 요절하고 말았다. 소월의 문학에는 민요적 틀에 실어서 표현하는 관서지방 특유의 정서가 있지만 백석은 소월보다 어쩌면 더
짙게 마천령 서쪽 지역인 평안도 주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특이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헌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 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모닥불」전문
이 시의 첫연에 나오는 사물들은
생물, 무생물의 구분을 따로 나눌 것 없이 우리들의 유년체험과 친숙하게 맞닿아 있는 모닥불의 재료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요긴하고 쓸모있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거의 쓸모없게 되어 삶의 뒷전으로 물러나 있거나 아예 버려진 하찮은 사물들끼리 모여서 이처럼 따뜻한 모닥불의 광휘와 온기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1∼2연에 등장하는 각 낱말 끝에 '∼도'라는 특수조사가 낱낱이 붙어 있는 것은 모닥불이라는 공간이 애틋한 소외존재들이
서로 만나는 평등한 장소임을 일깨워주는 하나의 시적 장치로 여겨진다.
백석의 시세계에서 또하나 돋보이는 것은 농촌적 정서를 아주
현장감이 느껴지도록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시는 관서지방 농촌공동체의 여름, 저녁 풍경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휑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하늘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박각시 오는 저녁」 전문
백석은 분단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금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매몰되어온 시인이었다. 백석의 경우는 그 자신이 무슨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꼭 북쪽의 정치체제를 선택할 만한 어떤 필연성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단지 있었다면 그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라고 하는 사실, 해방 이후에 만주에서 돌아온 그가 줄곧 고향의 가족들과 기거해 왔다는 사실, 굳이 서울 쪽으로 월남해 내려와야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냥 고향에 눌러 앉았었고, 이 때문에 남쪽의 문학사에서는 '북쪽을 선택한 시인'의 명단에 올라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자료에서는 백석이 프로문인들의 몇 차 월북때 북으로 올라 갔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기록들까지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쪽에서의 백석의 시인으로서의 생활은 항시 불안정한 것이었다. 체제 정비를 끝낸 다음 김일성이 맨먼저 착수한 것이 언어의 통일이라는 명제였다. 이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지역간의 뿌리깊은 알력과 갈등이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에 막대한 장애를 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방 토호로서 대대로 살아오던 많은 주민들이 대량으로 집단 이주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함경도 주민과 평안도 주민을 서로 적절한 배수로 섞바꾸어 살게 하는 인위적 강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는 지역성을 가장 농도 짙게 포괄하고 있는 방언을 소멸시킴으로써 지역 감정을 무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소위 문화어 정책이라는 것을 실시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방언의 구획과 변별성을 일거에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였다. 정황이 이러하니 백석의 시세계가 지녀오던 방언주의가 제대로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백석은 실제로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의 각종 문학자료에 아주 드물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더 계속되지는 못했던 것이 바로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그것을 가로막는 문화어 정책 간의 충돌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백석은
북에서도 비운의 시인이었지만 남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운의 금지시인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7년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이 발간된 이후 백석의 시는 문학인에 대한 금지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조치인가를 그대로 일깨워 주었다. 동시에 백석의 문학에 대한 경탄과 더불어 백석처럼 그동안 금지라는 강제에 매몰되어 왔던 월북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봇물 터지듯 일거에 터져나오게 되었다. 전후 세대들의 상당수는 백석을 비롯한 이찬, 오장환, 임화, 이용악,
설정식, 정지용, 김기림, 박아지, 여상현, 조벽암, 조영출, 권환 등 많은 금지 시인들의 작품은 물론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왔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분단시대 남한의 문학인들은 개별적인 작품 활동에 종사했다.(위의 시인들 가운데 권환같은 시인은 고향인 마산에서 살다가 1950년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월북시인으로 간주해 버리는 넌센스까지 있었다) 그들의 학생 시절에 배우고 영향을 받았던 문인들이라곤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이 가장 주된 모범적 교본이었고, 이들 작품의 상당수가 일제말의 황민문학 계열이나 순수문학 계열, 또는 분단
이후의 반공 이데올로기 계열이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해금문인들의 작품을 대하는 전후 세대들의 정서적 충격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분단 이후 냉전시대의 남한 문학이 나타내 보여왔던 작품의 성향이란 대개 이러한 분위기의 연속이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이제
백석의 문학작품은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문학사에 편입되고 있다. 전국에서 많은 신진 문학연구가들에 의해 백석의 작품은 주요 단골 연구 테마로
각광받고 있으며 전집 발간 이후 가장 최근에 발간된『백석전집』(김재용 편)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편이 넘는 연구 논문, 학위 논문, 또는
평론들이 학계와 문단에 제출 발표되었다. 이와 동시에 문단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전후 세대 시인들에 의해 백석의 문학 작품과 시정신은 깊은
영향의 수수관계로 재창조되어서 계승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석 문학의
특징은 상실되어가는 고향의식의 회복, 이를 통한 제국주의 문화의 극복, 전통 문화유산에 대한 따뜻한 긍정,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북방정서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백석의 시는 우선 문체상의 개성이 다른 시인들에 비해 매우 뚜렷하다. 그가 즐겨 쓰고 있는 방법들은 대개 회고체,
방언체, 구어체, 의고체, 연결체, 만연체, 아동 어투의 독백체 등이며, 이는 민중적 정서를 농도짙게 풍겨나게 하는 기대를 갖고서 구사된다.
시인 자신의 유소년 시절의 체험과 고향 정서로써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방법들이 어김없이 회고체를 채택하게 하는 것이며,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지역의 방언이 그의 시작품의 방언적 토대가 되고 있다. 특히 구개음화가 되지 않은 구어체를 그대로 표기하므로써 생생한 현장감을 드높이고
있다. '금덤판,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 녕감, 니차떡, 석박디, 데석님, 디운구신, 녀귀' 따위가 그 사례이다. 더불어 작품의 서사적
구조로 독자들을 이끌어 들이는 하나의 장치로써 연결형이 구사되고 있는 듯하다. ∼고, ∼며, ∼는데, ∼도 등이 가장 빈도수가 높은 연결형
어미와 조사들이다. 백석의 시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표기형태는 '슳븐' '얹헜다' 등의 분철(分綴)과 '울ㄴ다' '알ㄴ다' '달ㄴ' 등에서
보여주는 ㄹ과 ㄴ의 자음겹침 형태이다. 이는 작중 화자가 사투리로 직접 말하는 듯한 생동감을 드높이기 위해 시도하는 형태로 여겨진다. 이러한
표기법들은 정서법의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 있지 못한 시기에서 의고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 시인 자신의 의도와 배려가 강력히 담겨 있는 부분이다.
백석의 시는 형태면에서도 독특한 변별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시가 대체로 서사성을 담보하고 있는 사례가 많으므로 담시, 서술시,
이야기시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그 외적 양식이 줄글 형태의 산문적 성격으로 구현되는 것은 당연하다. 띄어쓰기도 시작품의
내용이나 분위기에 따라서 낭송하기에 편리하도록 한 차례의
낭송호흡에 필요한 일정한 어절을 서로 통합하여 띄어쓰기 규칙성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 백석 시의 원문을 주의해서 지켜보면 이런 점들이 당시 정서법 체계의 무질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세심한 배려에 기인된 것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연(聯)에 관한 부분에서도 아예 연구분이 없는 비연시 형태와 분명하게 연 구분을 획정하고 있는 연시 형태가 거의 반반씩 균형을 이룬다. 비연시 형태에서는 시「비」의 경우처럼 단 2행으로 전체 형태가 완결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청시(靑枾)」「산비」처럼 3행 형태도 있다. 그런가 하면 4행형과 5행형 이상도 다수 있다. 연시 형태는 시「초동일(初冬日)」처럼 특이한 2연형이 있고, 기타 3연형에서 5연형 이상까지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으나 이 가운데 단연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3연형이다. 줄글 형태는 행구분과 연구분을 모두 벗어난 산문시의 형태인데 백석은 이러한 형태도 더러 구사하고 있다. 백석의 시를 곰곰히 읽다 보면 그의 시가 조선 후기의 서정적 분위기가 감도는 사설시조의 형태를 방불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1) 황정을 캐어들고 집으로 돌아 들제 방경에 나는 꽃은 의건을 침노하고 벽수에 우는 새는 유수성을 화답한다 문앞에 다달아는 막대를 의지하여 사면을 살펴보니… 뜰 가운데 들어서니 섬돌밑에 어린 난초 옥로에 눌러 있고 울가에 성긴 꽃은 청풍에 나부낀다… 대수풀 우거진데 이슬바람 서늘하다.
----안민영의 사설시조 중 일부
2) 한 십리 더 가면 절간이 있을 듯한 마을이다 낮기울은 볕이 장글장글하니 따스하다… 뒤울안에 복사꽃 핀 집엔 아무도 없나보다 뷔인 집에 꿩이 날어와 다니나 보다 울밖 늙은 들매남ㄱ에 튀튀새 한불 앉었다 … 어데서 송아지 매--하고 운다 골갯논드렁에서 미나리 밟고 서서 운다
----백석 「황일」 부분
장면을 따라서 포커스가 서서히 공간
이동을 해가는 관찰자의 시점도 그렇거니와 형태와 분위기에 있어서 유사한 부분이 서로 많이 느껴진다. 백석이 사설시조에 평소 애착을 가졌다는 그
어떤 자료나 기록도 남아 있지 않지만 전통적인 문학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체득하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백석의 시를 율격면에서
고찰해보더라도 여러가지 흥미있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전집을 두루 일별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행의 율격 형식들을 볼 수 있다.
1)장 ― 단 ― 장
2)단 ―
장
3)장 ― 단 ― 장 ― 단 ― 장 ― 단
4)장 ― 단 ― 단 ― 단 ― 장 ― 단 ― 단 ― 단
이러한 율격 형식들은 무작위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작품의 효과를 예견하고 있는 시인 자신의 치밀한 배려가 깃들어 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들은 나름대로의 어떤 질서를 갖고서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1)은 「산비」와 같은 전형성을 지닌다. 2)는 「청시」에서 그 본보기를 발견할 수 있다. 3)은 긴 행과 짧은 행을
규칙적으로 교체 반복해가는 방법이다. 4)는 한 줄의 긴 행 다음에 짧은 행을 세 줄 반복하고 나서 다시 긴 행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행
형식의 단조로움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고, 더불어 주제를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적절한 형태를 선택하고 있다.
「연잣간」과 같은 시는
2행 반복율이 특징이고,「바다」는 3행 반복율로 보인다. 운율법으로는 일종의 각운 형식을 방불하게 하는 것이 가장
많다.「대산동(大山洞)」「물닭의 소리」「넘언집 범같은 노큰마니」「안동」「목구(木具)」「수박씨 호박씨」「적막강산」등의 시작품에서 그러한 운율
형식을 느낄 수 있다. 또하나 특이한 점은 시「황일(黃日)」의 결말 부분처럼 줄글 형태의 끝에 부분적 정형율을 삽입하는 경우이다. 줄글을 곧장
읽어내려갈 때 발생될 수 있는 분위기의 따분함이나 단조로움을 극복시키려는 의도적 장치로 여겨진다. 이러한 계열의 한 갈래로서「오리 망아지
토끼」「오금덩이라는 곳」등의 시작품처럼 작중 화자나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삽입한 형태도 있다.
한편 백석 시의 특징적인 분위기 가운데는
이미지의 구사가 유난히 독특한 면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추억을 환기시키거나 토속적 분위기를 강렬하게 불러 일으킬 때 주로 사용하는 이미지는
회고적 상상적 이미지이다. 이와 더불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다섯가지 감각 기관의 민감한 반응을 작용시켜 현장의 생동하는
느낌을 더욱 실감나게 고조시킨다. 시「동뇨부(童尿賦)」와 같은 경우는 1연의 '누어 싸는 오줌이 넓적다리를 흐르는 따끈따끈한 맛 자리에 펑하니
괴이는 척척한 맛'으로 표현된 촉각적 이미지, 2연의 '첫
여름 이른 저녁 터앞에 밭마당에 샛길에
떠도는 오줌의 매캐한 재릿한 내음새'로 표현된 후각적 이미지, 3연의 '새끼오강에 한없이 누는 잘 매럽던 오줌의 사르릉 쪼로록 하는 소리'로
표현된 기발한 청각적 이미지, 4연의 '막내고무가 잘도 받어 세수를 하였다는 내 오줌빛은 이슬같이 샛말갛기도 샛맑았다는' 색채 형용의 이미지가
한 편의 시작품속에서 절묘하게 어우러져 기이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 「북관(北關)」에서 명태창란젓을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라는 후각적 이미지와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이라는 미각적 이미지로 연결 통합시키고 있는 부분들은 백석 시만의 독특한 방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백석의 시작품 세계에 전반적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는 이미지는 고향과 관련된 이미지와 바다와 관련된 이미지이다. 이것은 시인
자신의 고향이 정주(定州)라는 작은 포구이기도 한 사실과 시인이 교사 생활을 하던 곳도 함흥 바닷가 연안 지역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관심이 바다쪽으로 쏠리게 되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 세계와 그 분위기가 가장
일치되는 공간에 있을 때 심리적 안정감을 얻게 된다는 설명과도 관련된다.「가키사키(枾崎)의 바다」「이즈 코쿠슈(伊豆國湊)
가도」「통영」「바다」「삼천포」「함주시초(咸州詩抄)」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계절 이미지도 빈번히 등장하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계절은 시인 백석에게 있어서 그리움과 애틋함, 아름다움, 슬픔, 쓸쓸함 등으로 그 맥락이 닿아 있다. 따라서 백석의 시는
어떤 고정된 계절 이미지에 구속되어 있질 않고 모든 것이 온유함과 쓸쓸한 분위기로 연결되어 있다. 작품의 시제들도 대다수가 과거 시간이거나
현재의 시점을 지키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 특히 유소년 체험을 회상하는 과거 시제가 월등히 두드러진다. 현재 시제를 지키는 작품들은 대개 방황과
좌절을 표현하는 경우로 한정된다.
백석 시의 소재 제재
적 측면은 어떠한가?
백석의
시에서 다른 소재들에 비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소재는 음식물과 관련된 사례들이다. 그의 시전집을 통틀어 음식물 소재는 대략 150여종이나
된다. 이 음식물들을 살펴 보면 별반 특이한 음식이 많은 것은 아니나 아무튼 우리의 토착적인 음식 문화를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이는 외래
문화, 즉 제국주의적인 일본 문화의 침탈을 시인이 의식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민족적 분위기가 강렬히 풍겨나는 토속 음식들을 열거하고 집착을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 주된 음식물이나 기호물, 또는 그 재료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막써레기, 돌나물김치, 백설기,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물구지 우림, 둥굴네 우림, 도토리묵, 도토리 범벅, 광살구, 찰복숭아, 반디젓,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 두부, 콩나물, 뽂운 잔디, 도야지 비게, 무이징게국, 찹쌀탁주, 왕밤, 두부산적, 소, 니차떡, 쇠든 밤, 은행여름, 곰국, 조개송편, 죈두기 송편, 밤소, 팥소, 설탕든 콩가루소, 내빌물, 무감자, 시라리타래, 개구리의 뒷다리, 날버들치,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 미역국, 술국, 추탕, 엿, 송이버섯, 옥수수, 노루고기, 산나물, 조개, 김, 소라, 굴, 미역, 참치회, 청배, 임금알, 벌배, 돌배, 띨배, 오리, 육미탕, 금귤, 전복회, 해삼, 도미, 가재미, 파래, 아개미젓, 호루기젓, 대구, 건반밥, 명태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 힌밥, 튀각, 자반, 머루, 꿀, 오가리, 석박디, 생강, 파, 청각, 마늘, 노루고기, 국수, 모밀가루, 떡, 모밀국수, 달재생선, 진장, 명태, 꽃조개, 물외, 꼴두기, 당콩밥, 가지냉국, 싱싱한 산꿩의 고기, 김치가재미, 동티미국, 밤참국수, 게산이알, 취향이돌배, 만두, 섭누에번디, 콩기름, 귀이리차, 칠성고기, 쏘가리, 35도 소주, 시래기국에 소피를 넣고 끓인 술국, 도야지 고기, 기장차떡, 기장쌀, 기장차랍, 기장감주, 기장쌀로 쑨 호박죽, 보탕, 식혜, 산적, 나물지짐, 반봉과일, 오두미, 수박씨, 호박씨, 멧돌,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 얼얼한 댕추가루,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감주, 대구국, 닭의 똥, 연소탕, 원소라는 중국떡, 고사리, 가지취, 뻑꾹채, 게루기, 약물, 깨죽, 문주, 송구떡, 백중물
도합 148종이 넘는다. 이 음식물들의
종류를 가려뽑아서 보면 백석의 시에서 동원된 음식들이 모두 일반 서민들이 먹는 생활 음식들의 명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는 시골
아이들이 어릴 적에 주워 먹던 길바닥의 닭똥도 있고, 젓갈에 가자미식혜 등의 지역 음식도 보인다. 거의 대다수가 민중적 향취가 느껴지는
음식물들이며, 동물성보다는 식물성 음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특징이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동물과 식물의 구체적인 명칭도 상당수인 바
야생 동물, 가축, 물고기, 곤충 따위의 동물적 소재와 과수, 야생초, 약초, 해초, 채소, 과일, 곡식 등의 식물적 소재를 모두 추출하여
대비해보면 식물성이 약간 많다. 동물적 소재는 모두 72종 가량이 된다.
지렝이, 박각시, 주락시, 개구리, 자벌기, 거미, 찰거머리, 버러지, 노랑나비, 벌, 딱장벌레, 파리떼, 노루(복작노루), 곰, 멧도야지, 승냥이, 배암, 산토끼, 잔나비, 여우, 쪽재피(복쪽제비), 다람쥐, 도적괭이, 땅괭이, 호랑이, 당나귀, 오리, 개(강아지), 도적개, 얼럭소새끼, 도야지, 닭, 말(망아지), 토끼, 노새, 게사니, 소(송아지), 멧새, 물총새, 짝새, 까치(까막까치), 꿩(덜걱이), 멧비둘기, 어치, 제비, 물닭, 뻐꾸기, 갈새, 뫼추리, 갈매기, 물총새, 백령조, 꼴두기, 붕어, 농다리, 게, 굴, 소라, 조개(가무락 조개), 참치, 꼴두기, 전복, 해삼, 명태, 호루기, 대구, 칠성고기(칠성장어), 가재미, 도미, 반디, 미꾸라지, 쏘가리
대부분의 동물들이 맹수류가 아니라
평화스러웁고 양순한 성질의 동물들이다. 이러한 동물들의 선택에서도 시인의 기질이나 품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비해 식물적
소재들은 도합 79종이나 되는데 거의 모두가 시골 생활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것들이다.
돌나물,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도토리, 살구나무, 찰복숭아, 배나무, 무이, 찹쌀, 왕밤, 천도복숭아, 콩가루, 섭구슬, 박, 감나무, 산뽕, 땅버들, 석류, 수리취, 송이버섯, 도라지꽃, 옥수수, 아카시아, 미역, 수무나무, 아주까리, 밤나무, 머루넝쿨, 재래종의 임금나무, 돌배, 벌배, 다래나무, 갈부던, 복사꽃, 들매나무, 삼, 숙변, 목단, 백복령, 산약, 택사, 금귤, 파래, 동백나무, 진달래, 개나리, 당콩, 머루, 쑥국화꽃, 자작나무, 바구지꽃, 강낭, 귀리, 모밀, 피나무, 버드나무, 호박씨, 수박씨, 이깔나무, 바구지꽃, 오이, 마늘, 파, 감자, 쉬영꽃, 뻑꾹채, 게루기, 고사리, 갈매나무, 싸리, 이스라치, 가지, 함박꽃
이러한 식물들의 성격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물들의 이미지와 어울려서 작품 세계의 아늑하고 민중적인 삶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적어도 시작품속에서는
동물성과 식물성의 구별이 느껴지지 않는 합일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백석은 천부적으로 참된 슬픔의 의미와 진정한
가치의 고귀함 등을 타고난 시인적 기질의 소유자이다. 백석이 자신의 문학적 아포리즘을 구체적으로 밝힌 글은 거의 없다. 이런 가운데 만주의
신경에서 거주하던 시절 {만선일보(滿鮮日報)}(1940.5.9∼10)에 발표한 하나의 짧은 시평은 그의 문학적 지향이나 기질을 짐작하게 해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당시 시인 박팔양이 함께 신경에 와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발간된 박팔양의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에 대한
서평을 위의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백석은 '시인이란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영혼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진실로 높고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것이 마음을 제사들오어 이것이 아니면 안심하지 못하고 입명(立命)하지 못하고 이것이 아니면 즐겁지 않은 때에 밖으로 얼마나 큰 간난(艱難)과 고통이 오는 것입니까? 속된 세상에서 가난하고 핍박을 받어 처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혼은 복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슬프고 서름차지 아니하겠습니까? 시인은 슬픈 사람입니다.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안흔 것에 슬퍼할 줄 아는 혼(魂)입니다. '외로운 것을 즐기는' 마음도, 세상 더러운 속중을 보고 '친구여!'하고 부르는 것도, '태양을 등진 거리를 다떨어진 병정 구두를 끌고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는' 마음도 다 슬픈 정신입니다. 이렇게 진실로 슬픈 정신에게야 속된 세상에 그득찬 근심과 수고가 그 무엇이겠습니까? 시인은 진실로 슬프고 근심스럽고, 괴로운 탓에 이 가운데서 즐거움이 그 마음을 왕래하는 것입니다.
----백석의 서평 [슬픔과 진실](여수 박팔양씨 시초 독후감)의 부분
이 글속에서 백석이 말하는 '슬픈
정신'은 무엇일까?
아마도 세상과 뭇사물에 대한 크나큰 연민이 아닐까 한다. 모든 것을 다 내 마음속에 애틋하게 수용하고, 특히 모든
소외된 사물들에 대하여 따뜻한 가슴으로 끌어안으려는 불교적 자비심, 혹은 기독교적인 긍휼이나 사랑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혼'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 '생명을 아끼는 마음' 등은 모름지기 시인이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필수
덕목이자 품성인 것이다. 백석의 시가 유난히 작고 가냘프고 여린 것, 외롭고 못난 사물과 가여운 생명들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가지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점에 있을 것이다. 잘나고 거만하고 자신을 뻐기는 존재나 화려한 사물들은 적어도 백석의 문학적 관심에서 일단 벗어나
있다.
다음으로 백석의 시작품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은 아동 유희 및 무속적 의식이나 민속 행사, 민중 의약 등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백석의 시가 주로 농도짙은 설화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주로 이러한 소재들을 표현하고 결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분위기라 하겠다. 거의 25종이
훨씬 넘는 아동 유희와 의식, 의례, 행사들이 도입되어 있는 바 그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1)즘생을 쫓는 깽제미
소리
2)한 밤에 섬돌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3)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4)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어서 구신간 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5)자신을 신장님 딸년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6)뒤울안 살구나무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
7)밑구멍에 털이 멫자나 났나 보자고
한 가즈랑집 할머니
8)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신리고모
9)손자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두르는
귀먹어리 할아버지
10)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력사
11)날기멍석을
저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 아래 고래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가진 조마구, 조마구네 나라,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
12)이불우에서 하는 광대넘이
13)인두불에 구어먹는 은행여름
14)돌다리에 앉어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다 물총새가 되어버린 산골아이들
15)빨갛게 질들은 팔모알상 그 상우에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술잔
16)달밤에 목매 죽은 수절과부
17)섣달 내빌날 밤에 내리는 눈을 정한 마음으로 받아서 눈세기물을 만들어 고뿔, 배앓이,
갑피기에 쓰는 내빌물
18)남편은 행방불명, 딸은 병으로 죽고, 혼자 남아 기어이 여승이 되고만 여인
19)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 제 병을 낫게 할 약을 알고
있는 소
20)어스름 저녁국수당
돌각담 수무나무 가지에 녀귀의 탱을 걸어놓고 비난수하는 새악시
21)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에서는 다음날 으례히 흉사가 있다는
무서운말
22)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
23)아홉명이 회를 쳐먹고도 남아서 한 깃씩 나눠가지고 갔다는 크디큰 꼴뚜기의
이야기
24)방안의 성주님, 토방의 디운구신, 부뜨막에 조앙님, 고방시렁에 데석님, 굴통의 굴대장군, 뒤울안 곱새녕아래 털능구신,
대문간의 수문장, 연잣간의 연자방구신, 발뒤축의 달걀구신
25)칠월백중, 쥐잡이, 숨굴막질, 꼬리잡이, 가마타고 시집가는 노름, 장가가는
노름, 조아질, 쌈방이, 바리깨돌림, 호박떼기, 제비손이 구손이
무속의식, 구비문학적 설화, 민간
요법, 생활 설화, 유희, 노동과 관련된 서사, 자녀 교육과 관련된 훈계, 식민지의 험한 세월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가정의 불행, 속담, 전설
등으로 구성된 이 소재들에는 모두 우리 민족의 삶에서 발효와 숙성의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정서들이 짙게 배어 있다 하겠다. 그리하여 백석의 시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제는 잃어버린 옛 추억의 시간을 회상시키고, 동시에 현실의 각박한 세태로부터 자신을 반성하게 하는 묘한 작용력을 가졌다.
백석은 앞서의 아포리즘에서 '낮고 거즛되고 겸손할 줄 모르는' 세태를 비판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처럼 추억의 회상과 연민을 경험하고 나면
훨씬 맑고, 그윽하고, 슬퍼할 줄을 알며, 따스한 가슴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듯하다.
다음으로는 백석의 시에 나타나는
인물의 유형과 그 성격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것은 백석의 문학이 지니고 있는 지향과 가치관을 보다 확연히 꿰뚫어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이다. 앞의 소재 탐구에서도 알아본 바 있거니와 백석의 시는 민중적 삶의 정서와 그 분위기를 환기하는 일에 혼신의 문학적 정열을 기울였다.
그것은 인물 유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의 절대 다수가 낮고 평범한 민중적 신분들이며, 하나같이 외롭고 쓸쓸하며 가난한 서민들이다. 시인이 굳이
이러한 인물들과 그들의 구체적 생활을 담으려 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가장 다수의 사람들의 처지를 대변하며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하는 역할에 대한 자각을 분명히 갖고 있었던 듯하다. 친족 집단이나 혹은 그와 유사한 방계 집단을 중심 인물로 등장시켜서 우리
모두가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던 민족이었음을 강력히 환기하고자 하는데도 그 목적이 있다. 특히 식민지 시대의 제국주의 침탈과 문화적 유린속에서
민족의 주체성이 완전히 말살되어가는 위기에 직면하여 시인의 자기인식은 더욱 적극적으로 이러한 관심을 극대화시키도록 추동했을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점에서 동시대의 비평가 박용철이
누구보다도 먼저 시인 백석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정확하게 했던 것 같다. 박용철은 백석의 시를 '전반적으로 침식받고 있는 조선어에 대한 혼혈 작용 앞에서 민족의 순수를
지키려는 의식적 반발의 표시'로 보았던 것이다. 최원식 교수는 백석의 시가 방언을 다루되 그 방언에 머물러 있질 않고 오히려 방언의 경계를 넘는
보편성을 지적한 바 있다. 더불어 그는 섣부른 관념이 좀체 투과하기 어려운 놀라운 개체성, 즉물적 육체성으로 견고하기 때문에 백석의 시가 들큼한
낭만주의의 고향 타령이 결코 아니라는 점. 둘째 모더니즘에 의거하면서도 그 모더니즘을 도리어 비판하는 특이한 방법으로 식민지 자본주의의 여러
문제들을 침통히 응시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백석 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지방을 보는 눈], 실천문학 40호, 1995. 겨울호,
225면) 한편 백석의 시를 근대인으로서의 절실한 내면적 목소리로 해석한 김재용의 분석도 눈길을 끄는 해설로 평가된다.(「근대인의 고향상실과
유토피아의 염원」,『백석전집』, 실천문학사, 1997)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 유형들은 어림잡아 100여 사례가 훨씬 넘는데, 다음에
정리한 인물 유형들을 분석 정리하는 작업도 꽤 의미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1)쇠메든 도적 2)예순이 넘은 가즈랑집 할머니, 막써레기 피우는 무당, 구신의 딸 3)곰이 돌보는 산골 아이 4)진할머니 진할아버지 5)얼굴에 별자국이 솜솜난 곰보 말 수 6)하루에 베 한 필 짠다는 신리 고모 7)신리 고모의 딸 李女, 작은 이녀 8)열여 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같은 입 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고모 9)토산 고모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10)육십리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끝 에 설게 눈물을 짤 떄가 많은 큰골 고모 11)큰골 고모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12)배나무접을 잘하는, 술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쑥 뽑아놓는, 오리치를 잘 놓 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13)삼춘엄매(숙모), 사촌누이, 사촌 동생들 14)밤늦도록 유희하고 노는 친척 아이들 15)이른 아침에 부엌에서 함께 의좋게 일하는 시누이 동세 16)한번 찾아와선 갈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 17)술을 밥보다 좋아하는 삼춘 18)귀먹어리 할아버지 19)재당 20)초시 21)문장 늙은이 22)더부살 이 아이 23)새사위, 갓사둔 24)나그네 25)주인 26)손자 27)붓장사 28)땜쟁이 (29)어려서부터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자라나 불쌍하게도 몽둥발이가 된 할아버지 30)먼 타관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아배 31)산비탈 외딴 집에 사는 모자 32)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 소도적놈 33)닭보는 할미 34)밤오줌 마려워 잠깬 아이 35)시집갈 처녀, 막내 고모 36)마을의 소문을 퍼뜨리는 일가집 할머니 37)오리치를 놓으러 간 아배 38)물코를 흘리며 흙담벽에 붙어 서서 물감자를 먹는 아이들 39)논두렁에서 개구리 뒷다리를 구어먹는 아이들 40)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들어진 주막집 아들 아이 범이 41)말을 몰고 이 장 저
장 옮겨다니는 장꾼들 42)첫아들을
낳은 나이 어린 산부 43)컴컴한 부엌에서 미역국을 끓이는 늙은 홀아비 44)새벽에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물지게꾼 45)도야지를 몰고
시장으로 가는 사람 46)떠돌아 다니는 순례중(객승) 47)벌판의 간이역에서 경편철도의 열차를 막 내려서는 젊은 새악시 47)달밤에 목매
죽은 수절 과부 48)거적장사 49)남편은 행방불명, 딸은 병사하고 혼자 남아 비구니가 되어버린 여인 50)방안으로 들어온 거미새끼를
바깥에 버리고 불쌍한 생각에 젖는 시인 51)집터 치고 달구질하고 달밤에 노루고기를 구어 먹는 산골사람들 52)산나물캐는 수양산의 늙은
노장스님 53)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천희 54)어스름 저녁 국수당 돌각담 수무나무 가지에 여귀의 탱을 걸고
나물매 갖추고 비난수를 하는 새악시들 55)벌개늪 옆에서 바리깨를 두드리는 동네사람들 56)방뇨를 하는 잠없는 노친네들 57)물기에 젖은
왕구새 자리에서 저녁상을 받은 가슴 앓는 사람 58)얼굴이 핼쓱한 병든 처녀 59)메기수염을 한 청배장수 늙은이 60)머루넝쿨 속에서
키질하는 산골 여인 62)너무도 가난하여 열다섯 어린 나이에 늙은 말꾼에게 시집간 정문집 가난이 63)물에 빠져 죽은 건너마을 사람
64)작두를 타며 굿을 하는 애기무당 65)나무뒝치 차고 싸리신 신고 비에 젖어 약물을 받으러 오는 두메 아이 66)앓는 아비
67)무당의 딸 68)어장 주인 69)일본말에 능한 황화장사 영감 70)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 71)더꺼머리 총각 72)주막집 앞에서
품바타령 부르는 문둥이 74)당홍치마 노란 치마입은 새악시 75)시골마당에 볏짚같이 얼굴이 누우런 사람들 76)노루새끼를 팔러 장에 나온
산골 사람 77)자박수염난 공양주 78)저고리에 남색 깃동을 단 돌능와집의 안주인 79)산골여인숙에서 목침에 새까만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
80)석가여래같은 얼굴을 하고 관공(관우)의 수염을 드리운 북관의 늙은 의원 81)북관의 계집 82)봄날을 즐기려 길거리에 나온 사람들
83)맑고 가난한 친구 84)빚을 얻으러 온 사람 85)허리도리가 굵어가는 중년여인 86)꼴뚜기 회를 나누어 먹는 뱃사람들 87)여름밤
멍석자리에 나와 앉아 바람을 쐬는 사람들 88)밤참국수를 받으러 간 아배 89)플렛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귀이리차를 마시는 여행객들
90)옹기장사 91)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 92)털도 안뽑은 도야지 고기를 맨모밀국수에 얹어서 꿀꺽 삼키는 사람들 93)닭의 똥을
먹을 것으로 알고 주워 먹는 산골 아이 94)목욕탕에 앉아서 혼자 소리를 꽥꽥 지르는 중국사람 95)마음씨 좋은 중국인 지주 노왕
96)적막강산을 느끼는 작중화자 97)아내와 집을 잃고 부모형제마저 모두 이별한 외로운 사람 98)소수림왕 99)광개토대왕
100)일본인 주재소장 101)일본인 주재소장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다가 손등이 갈라터진, 삼촌을 찾아가는 어린 소녀 102)제사를 지내는
늙은 제관 103)수박씨와 호박씨를 익숙하게 까먹는 중국인들 104)시인의 친구 정현웅, 허준 105)도스토옙스키, 죠이쓰 106)촌에서
온 아이 몇몇 역사적 인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농민들이거나 중심에서 비켜난 주변적 인물 유형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착하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며, 오히려 남에게 고통과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호소하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저 평범하게 자신의 일상적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민초들인 것이다.
시인 백석은 영문학을 공부한 일본유학생 출신이었지만 귀국후 그의 활동은 이처럼 민족언어를 통한
민족본체성의 유지와 확보를 위한 노력에 바쳤다. 그의 시는 단 한마디도 민족주체를 말하지지 않았으나 동시대 어느 누구의 시보다도 더욱 진한
민족주체의 정신적 토양을 확고히 끌어안고 있었다. 그의 시에서는 1930년대 중후반에서 1940년대 초반까지의 황량한 시대를 배경으로 전형적인
한국인의 표상들이 그려져 있다. 메기수염을 한 늙은 과일장수, 앓는 아버지를 위하여 약물을 받으며 오는 갸륵한 산골소년, 굿판에서 날이 시퍼런
작두를 타는 애처러운 애기무당, 민물고기를 잘 잡는 뻐드렁니 소년, 주막집에서 왁자지껄한 떠돌이 장사꾼들, '여우난골'이라고 불리는 지역마을의
주민들, 객주집의 병들어 누운 창백한 소녀의 표정, 달밤에 고민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목매어 자결한 수절과부, 타관가서 돌아오지 않는 가장, 또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고향집의 아내와 아들, '가즈랑집'이라는 택호로 불리는 혼자 사는 할머니, 오리덫을 놓고 기다리는 아버지와 아들, 초겨울
양지바른 흙담벽에 붙어서 코를 흘리며 감자를 먹고 있는 산골 소년들, 논두렁 개구리를 잡아서 구어먹는 소년들, 평안도의 어느 금광 입구에서
옥수수를 파는 한 여인의 슬픈 생애와 그 내력, 산골 여인숙에서 반들반들하게 기름때가 오른 목침을 베고 하루밤을 자고간 한없이 마음이 참담했던
식민지의 백성들, 일본인 순사의 집에서 서름구덩이로 식모살이를 하면서 손들이 거북등처럼 얼어터진 불쌍한 소녀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사람들은 일제강점하를 살아갔던 민중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요, 또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원초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백석이 처음 등단했을 때의 작품은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었다.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대감이라고 불리는 아들과 과부인 그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이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과부가 온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미곡상을 하는 양고새의 아이를 배지만, 양고새가 바라던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을 출산하므로서 끝내 버림받은 몸으로 마을에서 멀리 쫓겨가서 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후에 발표한 소설 [마을의
유화(遺話)]에 등장하는 다리를 못쓰는 지체장애자 덕항녕감과 앞을 못보는 소경 저척노파에 관한 이야기도, 그리고 그들을 버리고 달아난 양아들
부부도 시인의 말로 표현하자면 '낮고 거짓되고 겸손할 줄 모르는 우리 주위'에 대한 시인의 신랄한 비판의식의 표현이다. 닭을 매개물로 하여 욕심
많은 디평령감과 농촌 청년 시생이 사이에 벌어진 묘한 갈등과 암투, 그리고 어부지리로 닭을 얻은 걸인 노파 바발할망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닭을
채인 이야기]도 [마을의 유화]와 같은 계열로서 가난하고 못생긴 사물, 소외된 존재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자 하는 백석 문학의 기본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할 것이다. 백석은 항상 힘없고 사는 것이 어려우며 고통스러운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의 아픔과 애환을 생생하게 그리고 정감이
감도는 필치로 그리려 하였고, 또 그것을 정감이 담뿍 감도는 필치로 그려서 보여주었다.
요즘같이 말이 타락할대로 타락해서 말이 지닌 본래의
질서, 본래의 기품이 현저히 상실되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지난 날 민족언어의 질서를 회복하려고 혼자서 안간힘을 쓰던 한 시인의 눈물겹고도
아름다웠던 시정신을 다시금 가슴으로 느끼며 오늘의 우리를 새로운 긴장으로 가다듬고 추스려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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