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왜 쓰는가 - 박범신

이강기 2015. 10. 1. 12:54

2005년 10월 22일 토지문화관 강연 녹취)

왜 쓰는가

박범신

 

진행 : 정현기(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진행] 

    1930년대는 문학적으로 위대한 시대였고 거기에 버금가는 시대가 1970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적으로 위대한 시대였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참혹한 폭력과 야비한 관념이 한 시대를 뒤덮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설명이 됩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대개 70년대를 잘 아시는 분들이겠지만, 우리 학생들에게 70년대 작가를 얘기하면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말씀드렸듯이 70년대가 1930년대에 버금가는 위대한 문학의 시대였다고 말씀은 드린 것은, 아무래도 70년대의 조직적인 정부폭력과 개발 이데올로기가 모든 사람들을 들끓게 하면서 가치를 변화시킬 때, 양심 있는 작가들이 거기에 대항하는 작품을 썼다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70년대 작품은 두 계열로 얘기를 합니다. 하나는 리얼리즘으로 정면 승부를 걸겠다는 작가, 조세희라든지 이문구, 황석영 같은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70년대 작가군 중 찬란한 작가군이 바로 박범신 선생님에 해당됩니다. 그 당시 폭력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부스러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치열하게, 불꽃같은 언어로 그 시대를 보여줬던 작가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최인호, 박범신, 조선작 등의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박범신 선생이나 최인호 선생 같은 경우, 초기의 작품이 리얼리즘으로 시작합니다. 작품 가운데 지금도 선명한 「시진읍」이라든지 「읍내 떡빙이」라든지 「그들은 그렇게 잊었다」등의 작품들은 아주 불꽃같은 정면 승부를 거는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70년대 후반에 들면서 박범신은 장편소설로 승부를 보기 시작했고 또 그 이후에 얼마 동안 침묵을 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아픔이 있었겠습니다만 침묵 후에 이이가 다시 언어를 조련하는 불꽃같은 작품을 내고 있는데, 「흰소가 끄는 수레」라는 작품은 다시 정면 승부를 내는 작품으로 빛을 내고 있습니다. 박범신 작가는 문단에서 참 독특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 작가의 작품세계는 우선 상당히 많은 작품들, 또 초기 중기로 나누면 상당히 얘기가 많아지는데, 제가 박범신 소설 세계의 철학적인, 가장 빛나는 것으로 본 건 이런 것입니다. 세상 읽기 가운데 우리의 존재 ‘있음’을 안과 바깥으로 잇는 환상입니다. 우리 삶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안과 바깥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와 지방대학교, 젊은 사람은 안에 있고 늙은 사람은 밖에 있는 등등. 이런 식으로 안과 바깥이라고 하는 세상읽기를 아주 날카롭게 보여주면서 비판을 하는 그런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진 자와 안 가진 자 등등 많은 것들을 안과 밖으로 생각하게 하는 시대를 그리면서 촌철살인의 작품을 보여주는 작가입니다.


[박범신]

    지금 사회를 보시는 분은 저보다 문단 선배시고 평론하시는 정현기 선생님인데요, 연세대학교 교수로 계시지요. ‘박범신론’도 쓰신 적이 있고 제가 사적으로는 형님이라고 늘 부르는 분입니다. 노래를 무지하게 잘하세요. 지금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소주나 한잔하고 노래나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여기는 박경리 선생님 계시는 곳이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왔습니다. 오랫동안 직업 작가로 살았으니 독자인 여러분들이 질문을 하시면 대답을 하고, 이런 편한 마음으로, 가족들 만나는 마음으로 있다 오면 되겠지 하고 왔어요. 그랬는데 문간에 오니까 전에 했던 분 강연을 채록해서 책으로 만들어서 주네요. 완전히 공포에 질려 가지고 기록에 남는구나, 큰일 났는데, 무슨 얘길 하나, 잠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짧게 말해도 여러분이 나중에 질문을 많이 해 주세요. 대답하는 건 쉬운데 일방적으로 뭐라고 막 떠드는 게 쉽지가 않아요. 제가 교수도 했었고 말을 하면 또 하지만, 나이 들수록 점점 할 말이 없어지는 것 같고 그렇습니다.

    제가 작년 12월에 토지문화관 창작실에 들어왔었어요. 석 달을 못 채우고 두 달 조금 넘게 있다가 이월 말쯤에 갔어요. 토지문화관이 유명한 뎁니다. 박경리 선생님이 안 듣고 계시니까 말씀드리는 건데, 여기 틀림없이 귀신이 살고 있다고 그래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을 해요. 작가들이 오면 저녁 먹으면서 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침대를 한번 돌려놓고 자 보라는 둥, 저녁에 잠이 잘 안 오니까. 뒤에 있는 산이 오봉산입니다. 여기 터가 세다는 걸 침대에 누워 보면 느낄 수 있어요. 박경리 선생님 같은 거인이나 맞겨루면서 사시는 거지 나처럼 심약한 범인들은 귀신하고 맞장 뜨는 데 밀릴 가능성이 많거든요.

    원래 토지문화관은 겨울에는 문을 안 열었다고 합니다. 작년에 제가 있을 때는 세 명의 작가가 있었는데 노래하는 김민기씨까지, 그러니까 네 명의 손님이죠. 문간에, 입구 들어오는 그 건물에 있었거든요. 이층에 두 명이 있었고 아래층에 두 명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여류작가 였어요. 서울에서 다 아는 사람들이었는데, 나 내려가면 안돼요? (객석으로 이동) 서로 잘 알지만 여기까지 와서 술이나 먹고 그렇게 지낼 수도 없고 처음에는 서로 상대편에게 방해가 될까 봐 서로 조심하고 지내요. 그러니까 이제 서로 밥만 딱 먹고 먼저 방에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들어가죠. 차 한 잔도 안 나누고. 못 본 것처럼 들어가요. 혹시 상대편에게 방해가 될까 봐 그러는 것이었는데, 아따 이 사람들 독이 올라서 무지하게 쓸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죠. 제가 제일 선배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람들도 별로 쓸 맘도 없는데 내가 쓸려고 할까 봐서 그랬다는 겁니다.

부엌에는 낡은 텔레비전이 한 대 있었어요. 아시다시피 여기는 텔레비전이 잘 안 나와요. 지금은 바꿨나 모르겠는데 하여간 낡은 텔레비전이에요. 줄도 가고 잘 안 나와요. 그래서 다들 조용히 글 쓰는 것처럼 방으로 가면, 나는 글은 안 써지고 심심해서 놀고 싶은데 가서 두드려 깨울 수도 없고, 놀자고 하면 미움받을까 봐 각자 방에 있지요. 그때 연속극이 ‘대장금’을 할 때예요. 잠도 안 오고 이제 ‘대장금’을 봐야겠는데 행여 방해가 될까 봐 발소리를 죽이고 살살 부엌문을 열었더니 세 명의 작가가 다 와 있어요. 내가 문 열고 들어가니까 ‘아니, 당신까지’ 하면서 다 낄낄 웃고. 그래서 네 명이 쭈그려 앉아서 텔레비전을 봐요. 그리고는 ‘대장금’ 또 끝나면 ‘올라갑니다’ 하고 올라가고. 그래서 며칠 있다가 제가 그랬지요. 세상에 말이야, 작가들이 와 가지고 내가 조국의 장래를 걱정해서 9시 뉴스를 본다면 이해를 하겠지만 아홉시 뉴스도 안 보고 ‘대장금’ 할 때만 다 집합하다니 원. 그래도 작가니까 그러는 거지요. 작가야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마침내 술이나 한잔하자고해서, 술을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까 오봉산에는 귀신이 있다, 여기 오니까 글이 안 써진다, 그러더라고요. 그럼 당신들 다 들어가서 뭐했냐 그랬더니, 방마다 제가 굽어다 보니까 맥주병 소주병이 엄청 나와요. 그러니까 글 쓰는 척하고 들어가서 다 혼자 술 마시고 그랬다는 거죠. 특이한 것은 낮에는 다 글 쓰는 것처럼 조용해요. 이층 바닥이 다 마루거든요. 아래층도 물론 마루지요. 그러니까 아무리 발소리를 죽여도 깊은 밤에는 남에게 들키지 않고 걸어 다닐 수가 없어요. 이상하게 낮에는 조용한데 밤에 한 시나 두 시가 되면 러시아워예요. 발소리가 막 나요. 들락날락하고 문소리가 나고. 이 산골에서 왜 한 시나 두 시 되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할까. 나도 나와서 왜들 그러냐고 했더니 귀신을 영접하러 나왔다고.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여기 토지문화관은 밤이 되면 캄캄합니다. 직원들이 불을 다 끄고 가요. 가로등 외등조차 다 끄고 가거든요. 작가들이 궁벽진 곳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기도 하고 누구나 다 바쁘고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서울의 삶에서 빠져나와 여기 앉아 있으면 억압됐던 본성이 올라오지요. 내가 소설 속에 다뤄야 되는 문제들, 갈등들, 그런 것들하고 한 인간으로서의 본성하고 동시에 들락날락해서 굉장히 혼란을 느껴요. 본성을 따라서 바라보다 보면 어렸을 때 떠나간 친구,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내 청춘의 못다 했던 어떤 정한들, 내가 꿈꿨던 것, 내가 꿈꿨던 것과 현재 내가 놓여 있는 자리의 거리, 또 내가 사십이면 사십, 오십이면 오십이라는 나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름답게 사는 게 그게 가능할까, 뭐 이런 것들. 또 앞으로 생로병사의 사이클이 또 올 텐데 어떻게 노년을 맞이하고 어떻게 죽고 해나갈 것인가 이런 것들이 다 아우성치면서 떠오르거든요. 여기 들어오면서 우리는 그런 걸 만나러 오는 게 아니고 글을 쓰려고 들어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쓰고자 했던 소재나 이런 것도 내 머릿속에 있지요. 글을 쓰는 자에게는 쓰고 싶은 세계가 현실이 되는 것이고, 본성으로서 추억하고 과거를 생각하고 자기 현재의 자리와 꿈의 자리 거리를 재 보고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말해 오히려 가공의 세계같이 느껴질 수 있어요. 또 한편으로서는 소설을 써야 된다는 현실적인 역할이 있고. 서울에 두고 온 사람들도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일시에 올라오기 때문에, 다 스스로 있는 귀신 없는 귀신, 귀신을 만나는 거지요. 그래서 굉장히 혼란을 느끼고 적응을 하는 데 좀 시간이 걸립니다. 더군다나 밤이 되면 캄캄해요. 아무 불빛도 없고 그래서 어떤 때는 그런 본성과 현실적인 어떤 리얼한 삶 사이에 놓여 있어서, 막막해서, 밤에 나와서 산책을 할 때도 있고 저물녘에 산에 올라갈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차를 가지고 다니니까 못 견디면 옆방 친구들한테 신세 안 지려고 쪼르르 흥업면에 나가서 소주를 마셔요. 여기서는 음주 운전 체크가 거의 없기 때문에 흥업면이나 연세대학교 앞에 가서 술을 좀 거나하게 하고 차를 몰고 들어오거나 어떤 때는 산에 갔다가 밤늦게 걸어서 들어오지요. 근데 깜깜한 토지문화관에 밤새 불이 켜져 있는 곳이 한 군데 있어요. 그게 박경리 선생님 서재예요. 이 어른이 의도적으로 불을 켜 놓는지, 훌륭한 분이라 밤새 책을 읽고 계신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 시간에 들여다본 적이 없기 때문에. 노인 양반이 잠도 없으신가 어쨌든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어요. 유일하게 불이 켜진 방이지요. 물론 작가들 있는 방도 불이 켜져 있기도 하지만 뭐 끄고 자거나 서울에 왔다 갔다 하니까 꺼져 있을 때도 많지요. 근데 항상 켜져 있는 것은 박경리 선생님 불이에요. 그럼 나는 산에 갔다 오거나 술을 한 잔 먹고 밖에서 들어올 때마다 차츰 박경리 선생님 서재의 불빛에 적응을 해요. 멀리서 눈으로 불빛을 찾지요. 설령 그 불빛이 박경리 선생님 불빛이 아니라도 한참 지나니까 무조건 하고 박경리 선생님 서재의 불빛이 돼요. 나는 거기서부터 마음속으로 불빛이 보이면 ‘아, 저건 선생님 서재야. 그럼 내 방은 이를 테면 서재에서 조금 내려와서 현관 어디쯤 있겠구나’ 이런 것들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져요. 서울에 돌아가 토지문화관을 생각할 때는, 박경리 선생님 서재의 불빛이 어둠 속을 ‘걷는’ 나한테는 지도였다, 등대였다라고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지도라고 하는 건 앞서간 사람이 그리는 것이지요. 먼저 가 본 사람이 그리는 지도. 박경리 선생님 서재의 불빛이 주었던 어떤 위로, 어떤 계몽, 죽비를 내려치는 것 같은 충격, 이런 것들이 토지문화관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거예요. 아마 박경리 선생님이 나 같은 놈 있는 줄 알고 일부러 불을 켜 놓으리라고는 생각 안 해요. 암튼 늘 그 불빛을 보면서 아 저분은 어쨌든 문학의 재단 앞에서 평생 불을 켜 놓고 사셨겠구나. 나보다 앞서서 길을 걸어갔던 사람이 보여주는 지도, 이런 것들이 주는 것. 나는 이것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좋은 문학이 주는 어떤 한 상징, 또는 어떤 은혜라는 생각을 해요.

    내가 그때 명지대에 한 십 년 동안 교수로 봉직하고 있었는데, 교수가 철밥통이잖아요. 월급도 괜찮고 직업으로는 좋아요. 좋은데 불현듯 때려치웠어요. 이 토지문화관에 와 가지고 토지문화관 떠나기 전에 가서, 부르르 쫒아가서 사표를 냈어요. 아, 나도 저 등불이 돼야지. 나이 오십도 훨씬 넘은 놈이 이렇게 충동적으로 살면 안 된다는 걸 사표를 내고 나서 알았는데, 어쨌든 부르르 가서 사직부터 했어요. 나도 지금부터 어떤 이들에게 서재의 등불이 돼야겠다, 열심히 써야지, 교수 정년까지 월급 다 찾아먹고 언제 쓰겠냐, 그런 생각으로 사표를 냈는데 바로 고백하면 학교 그만 둔 지 일 년 반 됐는데 지난 일 년 반 동안 소설을 가장 안 썼어요. 작년에 제가 「나마스테」라는 소설을 쓰긴 썼는데 한겨레에 연재했던 것이고. 나 같은 작가는 연재에 익숙하기 때문에, 훈련을 많이 받은 작가기 때문에 할 수 있지요. 최근 한 십 년 사이에 한 해를 넘길 때까지 단편을 한 편도 안 쓴 건 작년뿐이에요. 교수를 할 때는 오히려 방학 때라도 평소에 못 썼다는 생각 때문에 단편 두 개는 쓰지요. 써서 제 제자들도 보여주고 그랬는데, 해마다 방학이 끝나면 소설을 공부하는 학생들한테 첫 시간은 무조건하고 방학 동안에 쓴 소설을 읽어요. 강의도 안 하고 읽어주면서 ‘나는 방학 때 이걸 썼다. 늙은 나는 이걸 썼는데 젊은 너희들은 얼마나 썼냐? 이걸로 기를 죽이는 거지요. 그러니까 나중에는 이게 전통이 돼 가지고 방학 때 안 쓸 수가 없어요. 제자들 여러 명을 다스리고 관리하고 카리스마를 갖는 게 쉽지 않아요. 나름대로 노력이 있어야 돼요. 내가 정현기 선생님처럼 공부를 많이 하면 애들한테 한 번도 안 들어본 좋은 공부로 가서 기를 죽이겠는데 이건 뭐 아는 것도 없고, 그러니까 소설을 써 가지고 ‘야 이거 발표도 안 한 뜨끈뜨끈한 소설이야’ 한 편 읽어 주고 다음 주 컨디션 봐서 한 편 더 읽고. 두 편이면 벌써 이백 매쯤 되잖아요. 아 난 방학 때 두 편 밖에 못 썼다. 사이사이에 칼럼 쓰고 수필 쓰고 한 거 보니까 삼사백 매 쓴 거 같은데 니들은 젊으니까 한 팔백 매 썼겠지? 하면 기가 다 죽어요. 그렇게 살았는데 작년 올해는 그렇게 써야 할 일이 없으니까 전혀 단편을, 단편소설도 안 쓰고 장편도 안 쓰고 그랬어요. 원고 청탁은 받은 것이야 많았었지요. 전부 다 펑크 냈어요. 심지어 잡지에 연재소설을 쓰기로 해 놓고 거의 일 년을 미뤘지요.

    작가는 일종의 사이클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마흔 일곱 살, 여덟 살 때 절필을 했지요. 정현기 선생님이 이미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른바 절필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때 나는 이른바 인기 작가였어요. 지금은 시세가 없어졌는데, 젊은 사람들은 집에 가서 엄마한테 물어보면 잘 알아요. 내 독자들이 다 엄마가 됐기 때문에. 그때가 지금보다 시세가 더 좋았지요. 책도 잘 팔렸어요. 절필하기 전에 마지막 낸 책이 「마지막 연인」이라고 해서 한 십육만 권정도 팔렸으니까, 책 내면 십만 권 넘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불현듯 그냥 관뒀어요. 못 견디겠더라고요. 뭐라고 할까 그냥 내가 쓰고 있는 내 소설과 독자들이 알고 있는 내 소설 사이의 거리, 또는 작가인 나와 독자들이 알고 있는 작가 박범신 사이의 거리, 나는 내가 생각하는 소설이 이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읽은 독자들은 이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거리를 여러분은 아시겠어요? 작가는 이게 늘 괴롭지요. 또 작가 박범신, 나는 이렇게 생겼는데 독자들 머릿속에 있는 작가 박범신은 다르게 생겼어요. 뭐 괴물 같을 수도 있고 미남 청년일 수도 있고 형편없는 소설을 쓰는 자일 수도 있고. 작가에 대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이미지가 다 똑같은 건 아니니까. 그런 것들이 굉장히 괴롭고 또 이십 년, 절필 전에 작가로 살았던 시간들, 내가 중고등학교, 대학교 때 꿈꾸었던 어떤 작가의 표상이 있잖아요. 그것과 이십 년 이상 작가 노릇을 한 현재의 나 사이의 거리, 그건 굉장히 아픈 거리지요. 고통스럽고 아픈 거리예요. 그런 거리들이 고통스러웠고 동시에 또 앞을 보니까 더 깜깜해요. 박경리 선생님 서재의 불빛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고. 아, 인제 늙고 병들고 죽어갈 날만 남은 것 같고, 사십대 오십대가 되면 당연히 그렇게 되잖아요. 감기 걸려도 꼭 암 걸린 것 같고 그렇게 되거든요. 공포가.

    젊을 때 나는, 「흰 소가 끄는 수레」에도 썼지만, 원고지 앞에 앉으면 머릿속이 막 현란해요. 수많은 나비 떼가 날아다녀요. 형형색색의 나비 떼가 아주 역동적으로 날아다녀요. 난 굉장히 역동적인 사람이라고 내가 스스로 생각해요. 그리고 각자 가진 상상력의 스타일이 있겠는데 나는 굉장히 역동적인 스타일의 상상력을 갖고 있다고 여기죠. 수많은 형형색색의 나비들이 따라다녀요. 너무나 많은 낱말들이 일시에 떠오르지요. 원고지 공간 속에 무슨 말을 쓸 것인가. 쓸 것이 없어서 걱정이 아니고 이 수 많은 말들 중에 어떤 놈을 갖다가 잡아서 핀셋으로 거기다 끼워서 채집할 것인가 하는 것이 고통이었어요. 비명을 지르게 되지요. 이를 테면 십대 때 아주 사랑하는 여자를 딱 만나면 말문이 막히잖아요. 그렇지만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낱말들이 용솟음치고 아우성치겠어요. 사랑한다, 그립다, 너뿐이야, 넌 아름다워, 너하고 함께 죽고 싶어, 너하고 섹스하고 싶어, 뭐 온갖 욕망과 꿈과 어떤 감수성의 말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니까 오히려 여기 목젖에서 딱 막히지요. 그 많은 언어 중에 하나를 못 골라서 말을 못하는 거예요. 이를 테면 나는 그렇다고 봐요. 그런데 젊은 작가 시절에 제가 딱 그랬어요. 소설을 쓸 때 마다, 버려야 하는 것이 고통이었어요.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고통이 아니고 너무나 많은 나비 떼가 날아다니는데 그 어떤 나비를 잡아서 핀셋으로 꼽아 가지고 원고지에 들어앉히느냐의 문제.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상상력이 그만큼 왕성하고 세상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들이 넘쳐났다 이런 얘기예요. 사십대 후반으로 오니까 나비가 뜨문뜨문 날아요. 뭐 전혀 없지는 않은데 이제 뭐 고르고 말 것도 없어요. 날아봤자 매력 없는, 무채색의 나비일 수도 있죠. 핀셋을 꽂다 보면 짜증이 나요. 내가 원하는 건 이 정도의 나비가 아닌데, 더 화려하고 더 멋진 나비가 있을 텐데. 재수 없게 회색의 나비, 아주 재미없는 나비, 아무 색깔도 없는 나비, 그런 나비를 주저앉혀서 원고지를 메우고 있다면 그 작가가 행복하겠습니까? 내가 정말 열렬하게 원해서 갖다 앉히는 낱말들이 작가를 참으로 살아 있게 하는 것이지,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 그놈이 우연히 떠올라서 원고지 안에 집어넣어야 된다면 행복하지 않지요. 사십대 후반에 제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소설쓰기를 뚝 끊었지요.

    소설쓰기를 뚝 끊고 용인에 집필실이 있었지요. 거기 가서 한 삼 년 농사도 짓고, 명지대학생들 불러서 술이나 먹고 글을 전혀 안 썼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때로부터 다시 꼭 십 년만이예요. 오십구세, 제가 올해 정확한 나이로는 오십구세거든요. 우리나이로는 육십세에요. 내년에는 환갑이지요. 한 십여 년 만에 다시 그때하고 똑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이제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는 저 같은 작가는 일종의 마스터를 했다고 볼 수 있지요. 저는 우리나라 작가로서는 독특하다고 봐요. 소위 칠팔십 년대 인기 작가라고 불리우던 사람이니까요. 칠팔십 년대 인기 작가라고 하는 것은, 문단 안에서 보면 너무 대중과 가깝다고 해서 팔매질도 많이 당했어요. 욕도 비판도 많이 들었지요. 문단 안에서 이것을 복권하는 게 또 쉽지 않아요. 아직도 문단이 보수적인 곳이라서 저처럼 소문난 인기 작가의 한 사람으로 한 십 년 이상 살아버리면 문단 안에서 복권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런데 저는 절필 이후 어쨌든 복권했습니다. 문단 안에서 이제 대중적이라고 생각 안하지요. 뭐 열심히 쓰는 좋은 작가다, 그래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한 작가가 두 개의 어떤 세계를 같이 살아 왔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쉽지는 않아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칠팔십 년대 인기 작가들은 아직도 인기 작가인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안 쓰고 둘 중 하나예요. 저처럼 인기 작가 버리고, 열심히 또 쓰고 그러면서, 소위 칠팔십 년대의 대중적 인기 작가와 반대되는 길로 문단 안으로 돌아온 이런 케이스는 제가 알기로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 경험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떻게 쓰느냐, 문학의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지요. 기량, 방법론, 형태, 형식, 그런 것들은 연습을 많이 한 케이스지요. 지식인들 비위에 맞추는 소설도 쓸 수 있고 대중들 비위를 맞추는 소설도 쓸 수 있다고 난 생각해요. 연습이 돼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이 들수록 요즘에 제가 소설을 못 쓰는 이유는 무엇을 쓸지, 무엇을 쓰느냐의 문제에 있어요. 젊을 때는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가 저를 압도하고 있었어요. 물론 무엇이라는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작가로 살아오면서 해 볼 짓을 많이 해 봤기 때문에 지금은 무엇을 쓰나, 이런 시대에.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다시 절필했던 사십구세, 그때처럼 요즘에는 눈앞이 캄캄한 생각이 들어요. 토지문화관에서는 박경리 선생님의 등불이 뭔가 나한테 시사해서 교수도 때려치웠는데, 그런데 그것도 서울 가니까 불 밝은 데 많잖아요. 그러니까 그것도 약효가 오래 안 가요. 오래 안 가가지고, 다시 깜깜한 무명 속에 있는 것 같아서, 작년 올해 글을 못 쓰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강연도 민망하지요. 문단에 있으면서 제가 하기 싫은 게 사실은 강연하고 사인회였어요. 사인회, 서점이나 도서 전시회장 이런 데 가서 사인회 하잖아요. 그건 과감하게 한 십년 전에 제가 끊었어요. 책 내면 사인회하자고 하는데 난 안 합니다. 끊었는데 강연은 해요. 한 가지 경우는 토지문화관같이 내가 신세진 곳, 또 존경하는 박경리 선생님이 이곳에 계시니까 오지요. 또 한 가지 경우는 돈을 또 많이 준다고 하던가 둘 중의 하나예요. 돈을 많이 줘서 가는 강연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뭔가 인간 관계가 있어서 가는 강연이 있지요.  사람이 살다 보니까 안 하고 싶다고 다 안 할 수는 없고, 사인회는 끊었는데 강연에는 이렇게 불려 다니네요. 작가라고 하는 게 일 년 이상 소설 하나 쓰지 않으면 이미 작가가 아니지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난 평생 계속적으로 써왔기 때문에, 늘 내 안에 아우성치는 말들에 밀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바쁘긴 했지만 행복했다고 봐요. 괴로운 점도 많았지만 언제나 내 안에 말들이 쌓이고 있다, 아우성치고 있다, 언어들이 날 봐 달라고 말한다, 그런 경험은 후회 없는 행복이었다고 봐요. 작가로 살 때, 쓰고 있을 때, 비명이 절로 나오지만 그래요, 행복했어요. 깨어있다는 느낌, 썩지 않고 생생히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요즘에도 쓰질 않고 있으니까 강연 가서 무슨 말들을 할 건가. 무엇을 쓸 것인지 몰라 아직 어둠 속에 있으니 사실 난 작가도 아닌데 가서 또 쪽팔리게 뭐라고 사기를 치고 오나. 그래서 여기에 와서 그냥 이렇게 잡담이나 하고 가려고 그랬는데 아, 기록을 해 가지고 찌라시를 만들어가지고, 찌라시라고 하니까 좀 이상한데, 문간에서 나눠주니까 다음에 오는 사람들한테는 내 찌라시가 배부되겠구나, 기가 죽었습니다. 나중에 혹시 내가 말한 찌라시가 나왔을 때 오늘 말한 내용과 조금 다르면 양해해 주세요. 내가 좀 고칠 거거든요. 기록에 남는 거니까 양해해 주시고요. 제가 교수도 한 십 년 했으니까 언변으로 어떻게 말을 계속해야 한다면 할 수도 있지요. 물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내가 계속 뻥이나 칠 수는 없고요. 여러분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요? 너무 짧았나요? 뭐 물어보면 내가 하고 싶은 말, 질문이랑 상관없는 말도 할 수 있으니까 누가 한번 물어봐주세요.


[질문] 

선생님께서 절필하시는 동안 마음은 편하셨습니까? 충분한 휴식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박범신] 

    사실 절필이란 말을 내가 쓰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갖다 붙였어요. 전에 93년에, 문화일보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어요. 굉장한 무력증에 걸려가지고,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문학적 한계도 고통스러웠지만 문학적 한계라기보다 인생의 한계였다고 생각해요. 아홉수가 있는지 어쨌는지 뭐 늙는다는 느낌, 청춘이 지나갔다는 느낌. 나는 역동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그래서 늘 청춘으로 살 수 있으리라고 꿈꿨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래요. 예순 먹은 노인네처럼 안 보이잖아요. (웃음) 내 성격을 반영하는 거예요. 갑자기 돋보기를 써야 되고 생리적인 현상들이 굉장히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고요. 아, 인제 늙고 병들고 죽어갈 텐데 난 아무것도 아닌 인생으로 살아온 것 같고, 그러니까 어떤 실존적인 문제 본질의 문제 이것이 그때 괴로웠던 겁니다. 그것 때문에 결국은 글을 안 쓰게 된 것이지 단지 어떤 문학적인 한계를 느껴서만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요. 한 인간으로서의 어떤 실존적인 갈등과 번뇌가 주범이었던 것 같은데, 암튼 글을 못 쓰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끊었어요.

    연재하는 일곱 장 여덟 장 원고를 하룻밤 새워도 못 쓰겠고, 그래서 제가 ‘연재를 중단하며’라는 열두 장짜리 원고를 써가지고 문화일보에 갔죠. 새벽인데 십이월, 그날 비가 왔어요. 뭐라고 시작되냐면 ‘지구의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나는 세계를 알 수가 없고 역사 연대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나 또한 역사를 알 수 없다’ 이렇게 시작해요. 그러니까 작가가 이게 뭔가, 이렇게 무지하고 이렇게 어둡고 이렇게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도 글을 계속 쓸 수가 있겠는가, 써야 된단 말인가. 내 머릿속에 있는 나비 떼는 다 죽었다. 상상력의 불은 꺼졌으니 이제 글쓰기를 멈춰야겠다고. 무당도, 족집게 무당도 점괘가 떨어지면 산으로 들어가서 칩거하고 한달 두 달 수도하는 것처럼 나도 작가로서 이제 잠시 쉬고 산으로 들어가야겠다. 이런 내용을 써가지고 문화일보에 새벽에 갔지요. 가서 사장님한테 제가 꼭 이렇게 말했어요. 연재소설이라는 게 수많은 독자와의 약속이고 그때는 연재도 삼분의 이쯤 해서 한 두 달만 하면 끝나요. 두 달만 하면, 그때 내가 연재소설 출판도 약정하고 돈도 몇 천만 원 출판사에서 갖다가 쓴 것도 있고, 두 달 그냥 어영부영 하면 되는데, 그러나 이게 아주 비겁한 짓이잖아요. 나는 내가 스스로 비겁하다고 생각하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예요. 비겁하면 안 되지. 그때 내가 문화일보 객원논설위원이었어요. 사장님을 만났지요. 다짜고짜 딱 내려놓으면서 ‘권총으로 사장님께서 뒷꼭지에 대고 나보고 원고를 쓰라고 해도 나는 지금부터는 단 한 줄도 못 쓴다. 그러니까 양해를 해주쇼.’ 워낙 비장하게 뻥을 치니까 사장이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아휴 신문사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몸조리나 잘하시라’고 그래서 양해 받고 다음다음날 문화일보에 기사가 났지요. 신문사에서도 독자들에게 설명은 있어야 되니까 내가 잠정 절필한 기사를 한 면 전체를 할애해서 냈어요. 화려한 기사지요. 그 중간 제목이 이겁니다. ‘박범신 잠정 절필하고 입산’ 신문 제목을 붙이는 것은 편집부에서 붙이는데 이 사람들이 내용도 잘 모르면서 쓱 읽어 보고 붙여요. 문화부 기자가 붙이는 게 아니고. 뭐 산으로 간다고 쓰여 있으니까 전화가 빗발같이 오더라고요. 왜 중이 됐냐고. 사실 이 얘기는 「흰소가 끄는 수레」에 상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용인으로 들어가서 살았어요. 일 주일에 한 번 집에 나올 때도 있고, 못 나오면 어디쯤에 나랑 같이 사는 여자친구가 밑반찬을 만들어서 갖다 주고. 텃밭이 한 백여 평 있는데 고추심고 감자 심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요. 내가 선택해서 글을 안 쓰기로 했는데 처음 육개월 동안은 나 괜히 관뒀다, 돈도 더 벌어야 되겠고, 독자들 사랑도 더 받아야되겠고. 누군들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지고 밀려나는 것이 좋겠어요? 내가 선택한 거지만 자리를 내놓고 밀려나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대문짝만하게 신문에 났으니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마치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어요. 나는 칠십 년대 팔십 년대 한 십오 년 사이에 거의 삼사십 권의 소설을 썼습니다. 매년 소설책을 두 권씩 썼지요. 산문도 쓰고, 사회 활동까지 생각하면 거의 한 십년, 십오 년 동안 매달 삼백 매씩은 썼다고 보면 돼요. 그러면서 또 작가들이 하는 짓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강연도 해야 되고, 사인 판매도 가야 되고, 방송도 나갈 때도 있고, 그런 모든 일을 하면서 한 달에 삼백 매 이상을 썼으니까 정말 열심히 했지요. 그랬던 작간데 그걸 딱 끊어버리니까, 뭐 죽은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관 속에 들어간 느낌요. 그런 일종의 실존이지요. 여러분이 가령 신랑이 내 인생의 전부다, 그래서 이십 년 동안 신랑한테 헌신했는데 어떤 날 보니까 내가 구층 아파트에 사는데 십층에다가 작은 마누가 얻어 놓고 신랑이 매일 왔다 갔다 했다는 걸 알게 돼봐요. 언제부터 그랬냐. 결혼 직후부터 그랬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겠어요. 삶의 의미가 한꺼번에 없어져버리죠. 그때 여러분은 실존적 자리에 서게 되지요. 실존은 매우 위험한 거예요. 위험한 거지만 동시에 새로 출발하고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찬스이기도 하지요.

    티베트에 가면 이걸 ‘바르도’라고 불러요 바르도. 직역하면 바르도는 ‘거꾸로 매달린 틈’이라는 뜻이에요. 거꾸로 매달린 틈이니까 굉장히 위험하지요. 떨어져 죽을 수도 있고, 아니면 거기서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을 살면서 여러 차례 경험을 하지요. 가장 원초적인 바르도는 태어나는 순간이에요. 태어나는 순간이 가장 실존적인 시간이지요. 엄마 자궁 속에서 이 험한 세상 속으로 나올 때 모든 아이들은 본능적인 공포감이 있지요. 그렇지만 그걸 나와야, 머리가 깨지는 아픔을 참고 나와야 한 세상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잖아요. 그러니까 그 과도기, 위험한 과도기, 어떤 것의 종말, 어떤 것의 출발, 이게 실존인데 내가 글을 안 쓰기로 했을 때 그런 실존 같은 걸 느꼈죠. 글 쓰는 게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거 하나를 위해서 평생을 바치기로 했었는데 불현듯 그걸 안 하기로 해버리니까 내가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느낀 것은 아, 세상이 나를 밀어냈다. 세상을 원망하게 되요. 자기가 해놓고.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로 쫓겨 가서 처음 몇 달 동안은 무슨 생각을 했냐. 전두환 대통령 대답 왈 아, 내가 내려가서 손 볼 놈, 살생부 작성했다고 그랬죠. 나를 여기다 밀어 넣은 자들,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죠. 아직 세상에서의 독기가 안 빠져서 그래요. 전두환 대통령하고는 경우가 다르겠지만 나도 똑같더라고요. 내가 스스로 거기 가서 유폐됐는데도 불구하고 아, 내 소설보고 욕했던 놈들, 별 볼일 없는 작가라는 시선을 보냈던 자들, 또 상업적 대중주의라고 욕도 많이 먹었으니까 그런 평론 쓴 자들, 나 문학상도 안 줬으니까 문학상 심사하는 놈들, 그렇잖아요. 이런 것들만 주마등같이 스쳐지나가면서 상처가 커져요. 전두환은 기운이 세니까 손볼 생각이라도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손볼 생각도 못하죠. 그냥 원망만 하게 되고 이게 독기지요.

    나는 이 나라의 삶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다 미치광이로 살고 있어요. 우리가 가진 역량은 열밖에 안 되는데 이 사회는 우리한테 오십의 속도로 살라고 요구하고 있으니 미칠 밖에요. 누구나 똑 같아요. 내가 숨쉬고 인간적으로 살려면 힘을 열만 쓰면 되는데 내가 이 사회에 맞추고, 내가 가족들에게 맞추고 이 사회구조에 맞춰서 살려면 오십의 힘을 써야 되니까 항상 그 사십이라는 것은 역량보다 오버하는 거지요. 그게 뭐 조금 오버하는 것도 아니고 배 이상을 오버하면 제정신으로는 절대 못 살아요. 과부하된 상태 있지요. 그게 조금 더 심하면 어떻게 되요? 불나지요. 전기 과부하되서 불 나기 직전 상태로 살아요. 아슬아슬하게 살지요.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 때문이라고 봐요. 자본주의라는 건 결국 경쟁 속에 사는 게 아니겠어요? 자본주의라는 건 자본을 모시고 사는 건데 만고불변에 모든 자본의 속성은 이윤추구예요. 이윤을 늘려야 돼요. 내가 일억의 돈이 있으면 일억 이하로 줄면 큰일난다구요. 어떻게든지 늘어나야 되거든. 그러면 이윤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기냐, 소비해야 생기죠. 생산과 소비가 이윤을 만드는 거니까요. 그러면 소비는 어떻게 시키냐, 어떻게 시키겠어요? 어떤 여자분이 멋진 원피스를 입었는데 다른 친구분이 하나도 열 안 받는다면 원피스 안 팔려요. 그러니 자본주의 시장이나, 그 회사나, 경제 구조나, 사회 구조는 한 여자가 좋은 원피스를 사 입으면 다른 친구들이나 그 주변의 여자들이 마음 아프도록 조작을 해놔요. 그게 자본주의 전체의 구조예요. 모든 경제 구조부터 사회 시스템이 그렇게 돼 있어요.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온 국민을 잘 경쟁시켜야 나라가 잘돼요. 온 국민을 경쟁을 시키고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와 일본하고 중국하고 또 경쟁을 해야지요. 회사 사장도 마찬가지예요. LG전자 사장이 삼성전자하고만 경쟁하는지 압니까? 사장은 항상 사내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경쟁시킬까. 그래서 열심히 하는 사람 포상하고 월급 올려주고 잘 못하면 월급 깎고 연봉제 이런 거 하잖아요. 다 경쟁시키는 거예요. 경쟁을 한다는 건 뭐냐, 친해질 수 없게 만드는 거지요. 간단하지 않겠어요? 친해질 수 없게 만드는 거. 여러분 집에 들어가서 부부싸움 하는 것의 대략을 생각해 봐요. 또는 가정에서 아이하고 언짢고 가족하고 언짢고 한 것을 하나하나 분석해 봐요. 삼분의 이는 여러분 가족간의 사랑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에요. 이 자본주의 경쟁논리가 가족 속에 들어와서 싸우는 거예요. 왜 학교에서 숙제를 안 해가지고 점수를 육십 점 받아왔냐. 아이를 때리고 우리 또 마음 아프잖아요. 그럼 왜 때리냐, 육십 점 맞았기 때문이 아니고 육십 점 이상 받는 놈들이 많기 때문에 때리는 거예요. 모든 놈들이 육십 점 받으면 내가 왜 내 자식을 질타해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집에 앉아서도 알거든요. 너 육십 점? 육십 점 이상 받은 놈이 삼십 명은 될 텐데 넌 삼십일 등이다, 이거 때문에 때리는 거지요. 그렇지요. 우리가 십칠 인치 텔레비전으로 연속극을 볼 때, 요즘 최진실이 나오는 연속극이 뭐지요? ‘장미빛 인생’ 나 요즘 그것만 보네. (웃음) 재미있지요. 내가 아파트에서 십칠 인치 텔레비전으로 열심히 ‘장비빛 인생’을 재미있게 보는데 옆집의 순이 엄마가 와가지고 영숙이 엄마, 우리 텔레비전 한 번 바꿨는데 좀 봐 줄래? 딱 갔더니 오십이 인치 HDTV를 딱 들여놨어요. 그것 보고 오면 십칠 인치로 보는 연속극은 그날부터 재미가 없어요. 그럼 그 옆집 여자하고 나하고 친해지지 않게 누가 만들었어요? 텔레비전 회사가 만든 거예요. 텔레비전 회사가. 또 텔레비전 회사의 백그라운드에는 세계자본주의의 거미줄 같은 구조가 있지요. 우리는, 개인은 그걸 이길 수 없어요. 이게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죠. 그래서 가족까지도 이간질시켜요. 반인간화의 길을 걸어야 소비가 경쟁적으로 되니까. 사이좋게 서로 니 것 내 것도 없이 우리가 옛날에 살았듯이 이웃사촌으로 다 살아봐요. 안 팔려요. 자본주의 망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살려면, 근데 내가 말을 왜 옆구리로 나와서 길게 하나? 뭐 상관없어요. 질문을 빙자하고 내가 하고싶은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 양해하세요.

    암튼 절필하고 한 이 년쯤 혼자 살고났더니 자본주의가 준 그 독성이 빠지고 원망은 없어지는데 그때부터 눈물이 그렇게 나요. 독기가 빠지면 사는 게 또 그렇게 슬프더라고요. 그래서 술 먹으면 울고, 어린 제자들 손 붙잡고도 내가 많이 울었지요. 한 삼 년 지나니까 괜찮아지더라고요. 회복이 되고 그러면서 내 안에 새로운 나비들이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어떤 때는 꼭 밭두렁에 앉아가지고 고추밭을 매고 있으면 내가 막 중얼거려요. 처음 육 개월은 문학상 심사하면서 나 상 뺀 놈들 욕하느라고 중얼거렸는데, 그 다음에 한 일 년쯤 되니까 아이고 나 어떻게 살지, 우리 엄마 보고 싶다고 중얼거리면서 울고. 한 삼 년 되니까 ‘그 여자는 말했다 너 왜 이래. 남자는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중얼거려요. 그 뭐냐면 소설을 주둥이로 하는 거예요. 못 쓰니까. 보통 사람 중얼거리는 거는 자기 삶에 대해서 중얼거리는데 나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가지고 밭을 매면서 말로 소설을 쓰는 거예요. 막 원고지에 쓰듯이 똑같이. 그럼 한 이삼십 분씩 막 쓰면 별 장면을 다 그리죠. 주둥이로. 그래서 아, 내 안에 언어들이 연어 떼처럼 돌아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죠. 그때는 무지하게 행복해요. 쓰지 않더라도 막 기운이 뻗쳐요. 충만감이 들고. 어제 보았던 망초꽃 하나도 새롭게 보이고. 그 뭔가 한 가지 가지고 세계가 변화할 수 있거든요.

    나는 왜 소설가가 됐냐면, 원천적으로 중학교 때까지는 전과 외에는 책을 본 적이 없어요. 중학교 이학년 때 중학교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고, 선생님이 한 오륙백 권 책이 있는데 소설책 빌려주는 거예요. 그렇다고 뭘 읽을지 아나요? 그래서 구경만 하는데 선생님이 책을 한 권 권해주시는 거예요. 집에 와서 등잔불 밑에서 책을 보는데 처음에는 무심코 그냥 봤지요. 내가 감수성이 예민했는지 삼분의 일도 보지 않아가지고 세계가 다 없어져요. 세계는 멸망하고 책만 남아요. 아버지 어머니도 눈에 안 들어오고. 지금 밖에 마당이 있다던가, 어떤 세계, 학교가 있다던가, 이런 것도 깡그리 잊어버리고 나중에 한 반절 넘으니까 눈물이 나가지고, 너무나 슬픈 책이야. 어떻게 내가 울면서 읽어댔는지 책장이 너덜너덜해. 그러고는 그 시골에서 밤을 꼬박 새웠지요. 내가 그때 시골에서 읍내 중학교로 자전거로 통학을 했어요. 팔 킬로예요. 이십 리를 중학교 이학년짜리가 자전거를 몰고 둑길로요. 잠을 못 잤지요. 눈물 젖은 책을 끼고 자전거를 타고 그 들을 달려오는데 잊을 수가 없어요. 어제까지 보았던 세계가 아니에요. 완전히 다른 세계에요. 천지개벽하고 보는 것 같아요. 그런 걸 인생에서 나는 몇 번 경험을 했죠. 절필하고 용인에서 한 삼 년 살고 그 어떤 날 갑자기 뭔가 막 떠났던 연어 떼들이 내 갈비뼈를 차고 들이치는 것 같아요. 어떤 맑은 물이 내 안으로 막 들어오는 것 같아요. 밤새 책을 읽다가 새벽에 창문을 열면 바로 앞이 논이거든요. 새떼들이 지저귀고 자연이 주었던 놀라운 생생한 일들. 한 삼 년 되니까 그런 느낌이 듭디다. 아 이제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안 쓴다고 거짓말했다고 하더라도 써야겠다. 썼죠. 「흰소가 끄는 수레」가 바로 절필 때 얘기고 절필 이후 처음으로 낸 책이에요. 그러고 한 십 년은 재미있게 했어요. 그리고 재작년 작년 글 쓰는 것이 재미가 없는 것 같고 다시 재탕인 것 같고, 그러니까 아 내가 우물이 좀 마른 거야. 기다려야지. 내 마음이 요즘 그래요.

    작년 올해는 사실 교수 그만두고 집에 별로 안 있었습니다. 올 봄에는 히말라야 가서 두 달 반 넘게 하루에 제가 이십 킬로씩 설산을 걸었으니까 천오백 킬로 정도를 몸으로 걸었죠. 몸무게도 좀 빠지고, 지금도 뭐 뚱뚱하진 않지만, 암튼 그렇게 돌아왔고요. 작년에는 연재소설이 있어서 멀리 가지는 못했지만 국내에서라도 늘 떠돌고 있었어요. 거의 뭐 집은 왔다 갔다 하면서 떠돌았지요. 집에 있는 시간도 난 늘 떠도는 것 같았어요. 올 가을에는 날도 춥고 하니까 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있거든요. 집사람은 오십대 후반인데 오십대 후반의 전업주부들은 뭐가 그렇게 바쁜지 모르지만 핸드폰 하나씩 차고 굉장히 바빠요. 아침 열시면 부리나케 어딜 가고, 아줌마들끼리 만나가지고 파티도 많은 것 같아요. 또 배우러 다니는 것도 많고 그래서 아침에 열시쯤 아내를 배웅하고 혹시 설거지를 잘못해놨나 미진한 것 있으면 싹 치우고 거실 싹 치워요. 청소기 착 돌리고 진열장 먼지도 닦고. 그리고 요즘 햇빛이 좋잖아요. 남쪽으로 햇빛이 쫙 들어와요. 햇빛과 그늘 그 사이에 몸을 반절씩 나눠서 몸의 반절은 햇빛 속에 두고 몸의 반절은 그늘 속에 둔 다음에 믹스 커피 있잖아요. 맥심 노란 딱지, 그거 한 잔 타고 텔레비전을 탁 틀어요. 동시에 담배를 하나 물고 커피 한 모금 담배 한 모금 하면서 텔레비전을 봐요. 뭐 ‘장밋빛 인생’ 재탕 이런 거 보지요. 난 요즘 그 시간이 제일 행복이에요. 그 말 했더니 모든 주부들이 다 그 시간에 행복하다데. 출근시켜 놓고 애들 등교 시켜 놓고 그래서 완전히 주부됐구먼, 누가 그래요. 그렇게 지내고 있지요.

    문학이라는 게 별거 아니에요. 어떤 이에게는 목숨을 걸 일이기도 하겠지만요. 저도 젊었을 때 신춘문예 당선했을 때 문학을 이렇게 불렀어요. ‘문학,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 그러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 말은 끔찍해서 이젠 듣기도 싫어요.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가 어디 있겠어요.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좀 더 따뜻한 말로 바꿔서 말하고 싶지만 젊을 때는 그런 야망과 패기가 저한테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건 무슨 말인가 하면 글을 쓰는 일이 나한테 유일한 길이었던 거지요. 다른 길이 없었던 거지요. 어떤 절대적인 길이었던 거예요. 돌아보면 저한테는 평생을 관통하는 어떤 이데올로기라고 그럴까, 표본이라고 할까, 있어요. 문학적으로 나는 소박하게나마 일종의 문학순정주의가 있는 것 같아요. 그냥 문학청년 같은 순정 있지요? 문학하면 부르르 떨고 이러는 거. 문학에 대한 어떤 단심, 그 붉은 마음은 내가 문학을 출발했던 삼십 년 전과 농도가 별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게 고통이에요. 그런 문학순정주의적 성향은 나를 담금질하고 괴롭히기 때문에 개인인 나한테는 짊어지고 가기가 힘든 짐이지요.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더 있었다면 단독자주의 같은 거죠. 작가들이 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짧은 내 생애 이력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 텐데, 나는 문학 판에서 어디 속했던 적이 없습니다. 난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고 어떤 문학단체에 속했던 적도 없고 어떤 잡지에 귀속된 적도 없어요. 내 세대의 작가들은 커나올 때 저 사람은 어디 출신 이란 느낌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창비출신, 문지출신, 저 사람은 연세학파, 고려학파 이런 것도 있을 수 있지요. 저 사람은 좌파, 문인협회파 그런 것들이 대개 있어요. 난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정체성이 없는 거냐, 난 그냥 집단에 대한 불신감이 있어요. 어떤 선한 목표를 가지고도 집단화하면 악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좌우간 그런 편견이 나한테 있는 것 같아요. 굳이 작가로 이데올로기가 없었냐, 이데올로기가 없이 어떻게 작품을 써요?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예요. 생각이 없이 쓰는가, 그걸 뭐라고 말할 것인가, 굳이 말하면 나는 인간주의 이데올로기다 그렇게 생각해요. 일종의 인간주의 이데올로기를 내가 견지해온 거예요. 

    돌아보면 후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로서는 진짜 행복하게 살았지요. 적어도 두 가지에서 자부심을 느끼는데 하나는 작가로 살았기 때문에 육십이 되는 나이까지 인생을 연애하는 기분으로 사는 것 같아요. 대학에 있을 때도 학생들하고 늘 연애하는 기분이었어요. 소설을 쓸 때도 그렇지요. 우리 집사람이 내가 옛날 많이 쓸 때는 밤을 꼬박 새우고 그러니까 집사람이 걱정을 해요. 자야할 텐데, 당신은 밤새우는데 나는 매일 잠만 자서 미안하다고. 그럼 아내의 뒤꼭지에 대고 바로 그러지요. 웃기네, 당신 재워놓고 밤새 예쁜 애하고 노는 줄 모르고. 난 내 소설의 주인공들하고 사랑을 했었어요. 연재 끝내고 나면, 연애소설도 끝나면 저절로 술이 당겨요.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고독을 참고 악을 쓰면서 그걸 그리겠어요. 물론 작가는 사랑만으로 되는 건 아니지요. 작가는 대상과 일정의 거리를 둬야 돼요. 그러니까 사랑하지만 거기에 흥분하거나 그 여자한테 부화뇌동하지 않고 그 여자를 철저하고도 차갑게 바라볼 수 있는 거리는 둬야지요. 그게 두 가지 양면성이지요. 그렇지만 거리만 두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대상을 그릴 수 없다고 봐요. 그러니까 이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사랑해서 마음은 뜨겁고 슬프고 지랄 같은데도 사랑 안 하는 척 거리를 두고 냉철하게 현미경으로 보듯이 그 대상을 봐야 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돌이켜볼 때 작가가 된 이후 인생, 그 전의 인생도 연애하면서 산 느낌이 들어요. 거기서 울고 불고 연애하는 게 좋기만 한 것은 아니잖아요. 때려죽이고 싶고 살인의 충동도 때로 느끼고 목 졸라 죽이고 싶고 그래도 신새벽에 한 번씩 오는 오르가즘에, 코피 나는 오르가즘 때문에 모든 걸 다 용서하고 이게 반복되는 거예요. 그런 기분으로 살았다 하는 것이 작가로서는 행복이었고.

    두 번째는, 문학은 작가 자신에게는 놀라운 방부제 노릇을 해요. 나도 끼도 많고 욕망도 많고 또 재능도 있다면 있지요. 무엇보다 난 부지런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소설 팔아서 자동차도 굴리고 그러니까 출세했다고 그러는데, 나는 가끔 생각하는 게 소설 안 쓰고 다른 분야로 나갔으면 진짜 부자 됐을 것 같아요. 그리고 또 대한민국에서 부지런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못살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오히려 소설을 썼기 때문에 항상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어떤 것이 바른 것이고 어떤 삶이 깨어 있는 삶인가, 어떤 삶이 고여 있지 않고 어떤 것이 정말 날이 선 삶인가 늘 생각할 수 있지요. 그것도 살아가는 내게는 개인적으로 고통이 될 수 있어요. 나는 아랫목에 누워있는 걸 싫어해요. 나는 노래방에 가서 흘러간 십팔번을 계속 부르는 것도 싫어해요. 나는 새 노래를 배워야 돼요. 그런 사람이에요. 나는 그래서 김건모도 배우고 서태지도 배워요. 듣는 사람은 다 ‘뽕짝화’라고 말을 하지만 어쨌든 나는 가사를 외우고 배워요. 그게 내 사는 스타일예요. 작가로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나한테는 힘든 일이지만 어차피 고여 있고 정체돼 있는 것은 싫고, 작가라는 건 문제의식을 갖고 현실을 봐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현실이 잘 돼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는 거니까. 뭔가 뒤집어서도 봐야 하고 새롭게도 봐야 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썩지 않는 삶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물론 나보다 훨씬 더 안 썩은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나마 내 경우에 다른 분야로 나갔으면 좀더 썩어서 살지 않았을까. 적어도 정체됐거나, 적어도 고정관념에 파묻혀 살았거나, 적어도 세속적인 욕망만을 따라가 살았거나, 뭔지는 모르지만 지금보다는 더 나쁜 모습이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의미가 있다면 항상 연해하는 기분으로 살 수 있었던 것 열렬하게 살 수 있었던 것. 그 다음에 썩지 않고 이 방부제 문학과 함께 이 나이에도 눈빛 형형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거. 그런 것이 작가로서의 행복이죠.


[질문] 

    소설 속에는 개인과 개인의 갈등 외에도 개인과 사회, 많은 갈등의 양상이 나타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고 또 작품 속에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박범신] 

    나도 갈등을 느끼지요. 신춘문예에 데뷔하고 그해 두 잡지에서 신춘문예 당선자 특집을 했어요. <현대문학>하고 <문학사상>인데요, 먼저 <문학사상>이었죠. 제가 소설을 최초로 청탁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당선하고 그해 가을인가 최초로 이어령 선생이 <문학사상>을 할 때니까. 그래서 내가 소설을 써서 줬어요. 최초로 청탁받았으니까. 새로 쓴 건 아니구요 그 전에 썼던 거였는데 고쳐가지고 최초로 발표한 단편소설이지요. 그게 「호우주의보」라는 소설이에요. 개발주의 시대, 부잣집과 그 옆의 판잣집 사람이 겪는 갈등관계를 쓴건데, 라스트가 좀 폭력적이었어요. 판잣집 청년이 부잣집 피아노를 때려부수는 장면이 나와요. 계급갈등을 그린 소설이지요. 이어령 선생이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갔지요. 그랬더니 라스트를 좀 고쳤으면 좋겠다고. 왜냐고 했더니, 상징성은 알겠는데 너무 과격하다. 그래서 제가 소설을 고쳤지요. 그 시대의 어려웠던, 어두웠던 독재, 유신때였으니까요. 뭐 이런 것에 있어서 이어령 선생은 나보다 철이 든 분이니까, 감이 오니까 이게 아무래도 말썽이 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셨던가 봐요. 그리고 나도 현실을 살아야 되고 그러니까 이어령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부분을 손을 봐서 발표했지요. 작가생활 시작이지요.

    팔십 년대에 「불의 나라」라는 소설을 썼어요. 6.29선언 나오기 전에 시골에서 올라온 촌놈이 서울에 권력 가진 자, 돈 가진 자, 지식 가진 자, 이 소설에는 그렇게 나옵니다. 수원백씨 이십팔 대손인데, 그 소설이 두 개의 낱말을 유행시켰죠. 하나는 ‘특별시’라는 말이고, 하나는 ‘거시기’ 나중에 거시기는 개그에서도 남자 그걸 상징하는 말처럼 됐잖아요. 그 전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내 소설 때문에 그렇게 됐어요. 「불의 나라」가 정말 그때 인기가 좋았고 ‘거시기’가 많이 나오지요. 그 소설에 시골 어머니가 상경해서 구경을 시켜주는데, 수원백씨 이십팔 대손 이놈이 지 어머니를 어디로 데리고 가냐면 이태원을 데리고 가요. 이태원에 데리고 가서 이 시골 노파가 한복 꾀죄죄한 거 입고,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복장으로 돌아다니니까 미국 놈들이 막 사진을 찍어요. 그러니 촌놈이 왜 우리 어머니를 니들 동물원 원숭이 보듯이 사진 찍고 그러냐고 성질을 내는데 어머니가 그러지요. ‘야 임마, 사내 자식이 쪽팔리게 그놈의 성질 말고, 자 찍으라고’ 그런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태원에 대한 이야기가 연재 삼 회쯤에 나와요. 책으로 두 페이지쯤 되지요. 그래서 서울에 좋은 땅들은 다 미국 놈들이 가지고 있고 코쟁이들이 가지고 있다는 그런 대목, 비판적인 그런 내용으로 3회에 연재를 해서 나갔는데 이게 걸려서 종로경찰서 대공과에 조사를 받으러 갔죠. 처음에 저한테 어필이 온 것은 안기부에서 왔었는데, 안기부에서 문제로 삼지 않기로 하면 경찰서에 이첩을 해준데요. 그땐 또 시퍼럴 때니까 가족에게도 안 알리고 마구 달고 갈 때잖아요. 그때 내가 소설가 김성동씨하고 친하게 지낼 때에요. 그래서 어디로 붙잡혀 가는지는 알아야 되니까, 둘이 상의를 했지요. 대공과 형사가 다방으로 나오래요. 종로 구청 앞 삼호다방인가 뭐 지하에 우중충한 다방이었어요. 경찰서로 오라고 안 하고 다방으로 오라고. 그래서 김성동씨가 한 오십 미터 뒤에 따라오고, 다방에 가서는 김성동씨는 저쪽 자리에 앉아 있지요. 혹시 백차에 태워 가면 어디로 붙잡혀 가는지 알아야 되니까. 그래서 진술 받고 조사받은 적이 있지요. 다행히 큰 고생은 안 하고 넘어가고 뭐 그런 정도의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80년대에는 문학을 하면서 늘 그것이 괴로웠지요. 현실 문제와 내가 쓴 글 사이에 괴로워서 그런 것들을 쓴 소설이 있어요. 「그해 내린 눈 지금 어디에」. 팔십년에 내가 중앙일보에 「풀잎처럼 눕다」라는 연재소설을 쓰고 있었어요. 그때 광주가 터지지요. 광주에서 사람들이 죽고 있을 때 밥 먹고 살기 위해 연재소설이나 쓸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고통, 뭐 이런 것들을 써 냈지요. 그때에는 두 가지 금기가 있었어요. 작가들이 군인 얘기를 쓰면 안 됐어요. 무조건 군대 얘기를 쓰면 달려갈 때라서, 한수산이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소설이 반체제 소설이 아니에요. 그냥 연애소설이에요. 근데 다만 군대 때 얘기를, 군대 갔더니 뭐 군대에서 엿됐다 그런 말들이 좀 있었거든요. 그래서 달려가 가지고 죽도록 두들겨 맞고 나왔지요. 문제 삼을 건 없으니까. 군대 얘기를 쓰면 안 됐고 체제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면 안 됐지요. 그리고 미국에 대해서 욕하면 무조건하고 붙잡혀가고. 어느 시대에나 금기가 있으면 하나의 금기로 끝나는게 아니라 다른 상상력도 굉장히 억압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요. 작가로서는 고통스러운데, 그러나 많은 좋은 문학들이 오히려 그런 사회적 억압 구조 아래서 생산됐다는 역설도 우리가 알잖아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그 사회를 뚫고 나오려는 힘이 강해지게 되죠. 솔제니친 같은 작가에서도 보다시피 사회적 억압 구조가 문학 발전에 근본적으로 저해가 된다, 이렇게는 생각 안 합니다. 팔십 년대 칠십 년대 살면서 나도 한 작가로서 고통 받고, 스트레스 받고, 또 어떻게 해야 붙잡혀 가지 않으면서 세상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들을 좀 하고 이럴 수 없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런 것, 뭐 짐작해 볼 수 있잖아요. 예수님도 붙잡혀 가기 전에 예수를 얽어 넣으려고 하는 유대인들과 또 감옥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예수 사이에 머리통 싸움이 여러 해 동안 굉장히 벌어지잖아요. 예수라고 얼른 붙잡혀 가고 싶었겠어요? 그런 것처럼 팔십 년대 대부분 작가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그렇게 살았었다 그런 얘기예요. 회한이 많지요. 생각하면 팔십 년대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을 때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걸 항시 잊어버린 적이 없이 생각을 해요. 어떤 때는 그게 아프게 생각될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작가라고 하는 건 광장에서 글을 쓸 수는 없어요. 쓰는 행위라고 하는 것은 유리창 안쪽에 앉아서 창밖을 보면서 쓰는 거예요. 글은 화염병을 던지는 그 거리에서 쓸 수는 없어요. 어차피 화염병을 던진 자가 쓰더라도 화염병을 놓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쓰는 거거든요. 무슨 말이냐, 그러니까 독재를 그리든 억압된 사회를 그리든 간에 우리가 산 속에 들어가서는 그 산을 그릴 수 없는 것처럼 그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한다는 거예요. 글을 쓰는 건 일차적으로는 본다는 것이죠. 흔히 뭐 글 쓰는 것을 보고 상처받고 꿈꾼다 그러잖아요. 일차적으로 보는 거거든요. 꿰뚫어보는 거죠. 겉 구조만을 보는 게 아니라 겉을 걷어낸 그 내용, 그 심층구조까지를 작가가 들여다봐요. 그런데 보려면 대상과 거리가 있어야 돼요. 그 대상 속으로, 화염병 들고 거리 안으로 들어가서는 볼 수가 없는 것이거든요. 글 쓰는 것이 가지고 있는 운명이 있어요. 그는 밀실로 돌아가야 돼요. 어떤 때는 이제 그런 걸로 자기 합리화나 자기 변명을 하기도 하고요.


[질문] 

    말씀하신 내용 중에 중학교 때 밤새워 처음 읽었던 그 소설이 어떤 소설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박범신] 

    아, 중학교 때, 그게 김내성씨가 쓴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라는 소설이에요. 지금은 이제 초등학교 이삼학년된 애들이 읽지요. 쌍둥이 자매가 나와서 운명이 바뀌는, 슬픈 얘기지요.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고요. 나는 그게 그렇게 슬프더라고요. 그걸 읽고 완전히 세계가 변해서 그때부터 중학교 졸업하기까지 그 도서관에 있는 소설을 거의 다 읽었지요.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대여소라고 있었어요. 지금도 있지요 만화방. 옛날 대여소는 지금의 만화방이랑은 수준이 달랐어요. 옛날에 대여소는 대개 문학을 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 중늙은이들이 했기 때문에 자기가 아껴서 사 뒀던 책들을 죽 꽂아놓고 빌려주고 하니까 명작들을 주로 빌려주지요. 책 한 권 빌리는 데 십 원인데 내가 고등학교 때는 얼마나 책에 빠져서 살았나 하면 아침에 기차 통학을 하는데 기차에서 내려가지고 학교를 가는 도중에 대여소가 있어요. 거기서 책을 한 권 빌려요. 그래서 여섯 시간 수업하고 다섯 시 반이나 돼서 기차로 돌아오는데, 하교해서 내려올 때 그 책을 갖다 주고 딴 책을 바꿔요. 그러니까 여섯 시간 수업하면서 뭐 했겠어요. 쉬는 시간 십 분씩 읽어 가지고 책 한 권을 독파했겠어요? 그때는 내가 쭉 순서대로 독파한 게 <정음사 세계문학전집>이었는데 굉장히 두꺼워요. 그걸 다 읽으려면 여섯 시간 계속 읽었어야 된다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늘 갈 때 바꿔요. 바꿔서 기차 타고 가면서 보기 시작해 가지고 밤에 또 읽고 아침에 가면 그걸 또 바꿔요. 그래서 제가 ‘도서관’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었어요. 또 고등학교 이학년 때 수학여행을 가는데 우리는 경주로 갔어요. 옛날에는 전화기도 없고 그래서 어디 간다 그러고 친척 집에 며칠 있다 와도 엄마 아버지는 모르고 그랬잖아요. 우리 오촌 어른이 금마라는 곳에서, 우리 집에서 한 십오 리쯤 떨어진 곳에서 사셨는데요. 서로 연락하는 게 없으니까 수학여행비를 받아가지고 경주 가는 수학여행을 안 갔어요. 금마 오촌 집에 가서 한 사흘 있었죠. 왜 그랬냐, 그걸로 그때 <사상계>라고 하는 잡지가 아주 지식인 잡지에요. 고등학생들은 읽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걸 왜 내가 보고 싶었냐면 그해 <사상계>가 특별구독자를 확장하기 위해서 구독 신청을 일정 기간 안에 해 주면 심지를 뽑아서 오 년 보게 하는 사람, 삼 년 보게 하는 사람, 이게 굉장히 많았어요. 내가 가난하니까 수학여행비로 그걸 해가지고 삼 년짜리 당선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독서는 굉장히 조숙했지요.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들이 보는 잡지를, 그 찬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수학여행을 포기했으니까.

    그래도 소설을 구체적으로 써야겠다든가 작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그리고 저는  가난했기 때문에 교육대학을 들어갔지요. 대학을 갈 형편이 아닌데 그래도 어딘가 가야 먹고 산다고 그래서 교육대학을 갔지요. 이 년만에 끝났는데 등록금이 쌌지요. 그러고 나서 무주로 발령을 받았어요. 전주교육대학을 나왔거든요. 옛날엔 성적순으로 발령을 냈거든요. 무주를 받았다는 건 꼴지에 가깝다, 꼴찌에서 한 열댓 명 끊어가지고 무주로 딱 나는 거예요. 일등은 이제 전주시로 내니까. 무주로 발령받아서 거기 가 보니까 정말 짜증나는 자들만 있더라고요. 내가 저자 수준이었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서로. 걔가 생각할 때는 내가 그랬겠지. 무주교육청에 가니까 발령장을 주지요. 거기서 다 흩어지지요. 내가 괴목국민학교로 발령을 받았는데 괴목국민학교로 발령받은 선생님만 남고 나머지 분들은 다 임지를 찾아서 가라고 그래요. 나 혼자 남았어요. 그래서 왜 그러나 그랬더니 학무과장이 골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젊은, 내가 스물두 살이니까 우리 나이로 스물두 살, 만 스물한 살이에요. 박선생, 어려워도 가서 일 년만 견디면 학교를 바꿔주겠다. 누가 뭐라고 했나요? 나는 괴목이 뭔지도 모르는데. 딴 사람은 다 찾아 들어가라고 그러고 나만 따로 불러서 아, 일 년만 참으면 학교를 바꿔 줄 테니까 일 년만 참고 있으라 그러니까 공포감이 확 들어요. 대체 어떤 학굔데. 그래서 처음에 간 게 괴목국민학교라는 데였죠. 처음에는 사학년 담임을 육 개월 맡고 이 학기 때는 교장선생님이 내가 유능하다고 육학년으로 바꿨는데, 그때 육학년이 삼사십 명 됐는데 한글을 못 읽는 애들이 반절이 넘어요. 가만히 보니까 그 학교가 꼭 작거나 워낙 산골이어서가 아니예요. 그 옛날에 50년대 60년대나 자유당 때는 사고 교사들, 교사는 교사여서 월급은 받아먹는데 엉망진창인 교사들이 많았어요. 특히 그런 산골로 가면 그 산골 지역 출신은 외부에서 온 교장선생님이 나무라지도 못해요.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낮에도 다 논밭에 가 있어요. 애들은 뭐하냐, 담임선생님이 전과지도서를 한 권 던져 주면 반장이 나와서 계속 써요. 전과지도서는 애들이 못 사니까. 그럼 애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계속 써요. 선생이 논농사 실컷 하다 와가지고, 다 썼냐? 노트 검사하면 땡이에요. 그러니까 육학년인데 반절 이상 한글을 유창하게 못 읽어요. 참 마음이 아파요.

    그때 또 젊은 나이고 그러니까 겨울방학이 되면 그 산골이 얼마나 깊습니까. 한 마을에 라디오 한두 대 있고, 텔레비전은 물론 없고, 전기 물론 안 들어오고, 정기적인 차 노선 없고, 읍내에서 한 팔 킬로, 장날이나 되면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차를 타고 들어가지만 걸어서 들어가야 되는. 겨울방학 때 내가 과외를 시켰어요. 과외비가 없는 과외지요. 한글도 못 읽고 학교를 졸업하면 되겠냐. 과외를 시키려고 그 긴 방학 때 집에를 못 가요. 그러면 솔직히 과외를 낮에 시키지 깜깜한 밤까지 할 수 있습니까? 그 전부터 학기가 끝나기 전에도 과외를 시켰어요. 호야불을 켜놓고 밤에도. 겨울방학에는 아침 열 시쯤 나오라고 해서 세 시나 네 시쯤 보내지요. 얼마나 적막한지 진짜 갈 데가 없고 읽을 것도 없어요. <현대문학>을 정기 구독하는 데 일 주일이면 두 번 세 번 읽어요. 기운은 좋을 땐데 워낙 할 일이 없으니까, 시간은 또 얼마나 천천히 갑니까. 원주시 저기 신도시 불야성 가서 하룻밤을 보내는 거야 금방 가지만, 토지문화관 이층에 혼자 앉아 있어 봐요. 시간 안 가요. 시간이란 것은 상대적인 거예요. 거기서는 더 안 가요. 나는 스물한 살 피 뜨거운 도시에서 살던 젊은인데, 거기는 한 세 시나 네 시 되면 다섯 시쯤 되면 겨울이면 해가 다 떨어져요. 무주는 밤이 되면 새카매요. 다섯 시쯤 되면 하숙집에 저녁 밥상이 와요. 저녁 밥상 뚝 따먹고 나면 갈 데가 없지요. 눈도 얼마나 많은지, 지금은 스키장이 있지만 옛날에는 노름꾼 빼고는 밤마실을 안 가는 것이 산골의 불문율이에요. 들동네하고는 달라요. 이웃집에도 안 가요. 산에는 짐승도 많고. 생각해 보세요. 여섯 시에 혼자 하숙방에 앉아 있는데 읽을 책도 없고 뭘 하겠어요. 미치고 환장하겠더라고요. 거기다가 내 친구들은 다 서울에서 대학 다니고 나만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이 산골에서 스물한 살에 유폐되어 있으니까 참 고독감이라는 게, 존재론적인 고독감, 타고나는 고독감은 젊을 때 그래도 괜찮은데 비 맞고 소주 한 병 먹으면 되는데 이 소외감 있잖아요. 내가 저 새끼보다 똑똑한데 저 새끼가 더 잘 살 때 느끼는 고독감 있지요? 내가 저 새끼보다도 열심히 일을 더 많이 하는데 나보다 근무시간은 두 시간 적은데 저 새끼가 월급을 많이 받을 때 그렇지요. 나는 군대 가서 죽어라고 고생하는데 저 새끼는 애비가 똑똑하다는 이유 때문에 군대에서 면제받을 때 그렇지요. 뭐 이런 걸 많이 경험하잖아요. 이런 걸 우리는 소외감이라고 그러잖아요. 사회적인 고독감, 소외감. 소외는 젊을 때 잘 다뤄야지 잘못하면 거기에 치여 가지고 스스로 병신 돼 버려요.

    처음에는 서울에 있는 친구들한테 편지를 썼어요. 외로우니까. 편지를 두루마리로 한 이미터 반 쓴 편지도 있어요. 깨알 같은 글씨로 앞뒤로 썼더만, 내 친구가 그걸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따져보니까 이백자 원고지로 한 이백오십 매 되겠더라고요. 그것도 남자한테 이백오십 매씩 편지를 쓰고 있는 이게 미친놈이지요. 반대로 얼마나 그때 내가 소외감을 느끼고 젊은 내가 갈 곳 없이 고독했었는가. 그렇지만 고독에 치여서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니라 격렬하게 그것과 만나고 있었구나 라고 생각을 해요. 근데 도시의 년놈들이란 게 답장을 안  해요. 아주 친절한 놈이 엽서 한 장 보내와요. 그것도 반쯤은 삽화고, 차츰 그러다 보니까 너무너무 쪽이 팔려요. 저들은 매일 미팅이니 뭐니 이런 거나 하고 돌아다닐 텐데 나는 여기 쭈그려 앉아서 과외비 없는 과외를 시키고, 기운을 어디 쓸 수가 없는 거예요. 매일 고독해 하고. 그래서 나중에 생각했어요. 이렇게 쪽팔릴 것이 아니라 그냥 길게 쓰자. 난 어차피 절망적인데 부치지 말고 그냥 혼자 쓰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우표값 들이고 이 새끼들한테 왜 쪽만 파나. 그래가지고 노트에다 그냥 쓰는 거예요. 어떤 때는 편지처럼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탄을 쓰기도 하고, 그때 나는 소외받았다고 느끼니까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득차있었지요. 내 안은 격렬했어요. 세계는 산골이니까 아주 고요했지만 나는 인생에서 그때처럼 내가 격렬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두 번째 해에는 국민학교를 다른 데로 옮겼는데, 내가 국민학교 선생을 이 년 했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 백리씩 내가 마라톤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두 번째 있던 학교가 내도국민학교고, 충북 영동역까지 오고 가는데 약 팔십 리가 조금 넘어요. 그걸 일 주일에 두 번씩 하숙집에서 저녁 먹고 달려갔다가 달려와요. 내가 무슨 마라톤 선숩니까? 미쳐 가죠. 기운을 쓸 데가 없으니까. 고독해서. 그러니까 인생에 그 고독과 격렬하게 만나고 있던 그런 땐데 그래서 편지를 길게 썼어요.

    이미터 반짜리 두루마리 편지를, 내가 보낸 친구가 있었는데 우수한 친구였어요. 지금도 큰 회사 부사장입니다. 나보다 문학도 우수했었어요. 글도 거의 나만큼 같이 읽어온 친구였고 머리도 좋았죠. 그 친구가 겨울방학때 놀러 왔어요. 그때 내가 애들 수업하러 가면서 ‘놀고 있어 나 수업 갔다 올게’ 그러니까 지가 뭐 그 근처 산도 헤매고 그랬는데 갈 데가 없었겠죠. 하숙방에 와서 서랍도 빼보고 어쩌고 그랬나 보죠. 그 노트를 찾아냈던가봐요. 내가 쓴 것을 쫙 읽어봤나 봐요. 내가 방에 쏙 들어가니까 그 놈이 누워있다 일어나면서 ‘범신이 너 소설 쓰는구나?’ 나는 그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이 썼어요. 왜냐하면 도시에 있는 친구한테 편지쓰는 게 너무 쪽팔렸기 때문에 그냥 혼자 쓰는 거예요. 뭐 넋두리였는지 뭔지 모르지만 길게 쓸려니까 뭐 소설처럼 썼겠지. 소설이 그래도 길게 쓰는데 유리하잖아. 사람이 있으니까 소설은 길게 쓸 수 있거든. 그냥 뭐 수필은 길게 쓰기는 어렵잖아요. 머릿속에 든 것도 별로 없는데 백장 천장 막 이렇게 쓰기는 어렵지. ‘너 소설 쓰는구나’ 그때 그 ‘소설’이란 말, 눈이 번쩍 해요. 가슴이 막, 내가 쓴 것이 소설이었구나. 일단 멋있잖아. 나는 그냥 괜히 외로워서 했는데 그걸 소설 쓴다 그러니까 내가 갑자기 멋있어져요. 내가 뭔가 된 거 같고, 내가 무위한 짓을 한 게 아닌 것 같고. 그래 괜찮은 짓을 하고 있었구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이거든요. 나는 그 전까지 그게 소설이라고 생각 못할 때는 무의미한 짓을 하고 있었어요. 근데 그것을 친구가 소설이라고 불러줘 버리니까 유의미한 걸로 바뀌는 거죠. 우리가 의자, 의자라고 이름을 붙이면 앉는다는 의미가 생기잖아요. 근데 의자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쓰레기인지도 몰라요. ‘너 소설 쓰는구나’라고 하는 어떤 개념, 의미, 그것을 부여한 거죠. 그리고 나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감동적으로 그야말로 너무나 순수한 어린아이가 그냥 가르쳐준 백 프로를 흡수하는 것 같은 마음으로 그 소설이란 말을 빨아들인 거예요.

    그 친구가 돌아가고 나서 나는 완전히 흥분해 있었지. ‘그래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작가가 되기를 구체적으로 꿈꾸진 않았지만 어쨌든 어저께까지는 쓸데없는 낙서나 하던 놈이 갑자기 소설 쓰는 사람이 된 거예요. 엄청나게 의미가 있지요. 거기서 십오 리를 걸어가지고 무주 읍내를 나와서 노트를 새로 샀어요. 신삥으로 사가지고 들어가서 표지에 딱 썼어요. 볼펜으로 악을 써서 눌러가지고, ‘소설’이라고 썼어요. 나는 이제부터 소설을 쓴다. 그러고 나니까 유배당해 있다는 느낌도 안 들고, 나 혼자 버려져 있다는 느낌도 안 들고, 왜? 나는 의미 있는 짓을 여기서 하고 있으니까. 뭔가 살아가는 의미가 있는 생생한 짓을 하는데 내가 왜 거기서 버림받았다고 느끼겠어요. 밤마다 앉아서 쓰는 거예요. 어제까지는 하루에 열 장도 썼는데 소설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쓸려니까 안 나가더라고. 그 다음날부터는 밤을 새워서 써도 한 페이지도 못 쓰고 찢고 별 엄한 짓을 하게 되더라고, 그걸 소설이라고 의미를 붙여놓고 나니까. 그냥 어린애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쓸 때는 막 썼거든요. 이름을 붙이니까 안 나가요. 그렇지요 글이라고 하는 게. 왜냐하면 소설이든 시든 어떤 이름을 붙이면 어떤 구조를 요구해요. 우리들에게 구조, 그냥 수다처럼 말할 수는 없어요. 그걸 끈으로 꿰야 돼요. 어제까지는 그냥 수다를 떨었던 거지요. 수다가 뭐예요? 수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의미 없이 떠드는 거지요. 아줌마들하고 오늘날의 과학에 대해서 토론을 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한 여자가 그러는 거예요. 토론을 막 진지하게 하는데, 근데 말야 침대가 과학이래잖아. 그러면 아줌마들이 열심히 침대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을 해요. 좀 전에 과학에 대해서 말하려던 걸 까맣게 잊어버려요. 아무도 거기로 돌아갈 줄 몰라요. 침대 얘기를 열심히 하다가, 근데 그 침대에서 자던 아무개 신랑이 바람 피웠대 하면 또 바람에 대해서 또 일제히 몰려가면서 침대에 대해서는 잊어버려요. 이게 수다라는 거예요. 글은 이렇게 쓰면 큰일 나요. 글은 반드시 과학에 대해서 시작을 했으면 헤매는 척하다가도 과학으로 돌아와서 매듭을 지어야 돼요. 이게 수다하고 다르죠. 그러니까 플롯이라고 하는 건 구조화예요. 수다는 구조화가 아니지요. 그냥 병렬구조로 늘어놓는 거예요. 근데 플롯이라고 하는 건 뭐냐, 플롯은 쌓이는 거지. 이렇게 쌓아서 올리는 것. 뭐 하나만 빼면 무너져요. 이걸 쌓으려면 뭘 알아야 돼요? 무너지지 않게 쌓아야지. 무너지지 않게 쌓는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각자의 무게 중심을 알아야 되는 거지요. 이게 여기다 놓으면 안 떨어져지는데 이 끝에다 놓으면 무너져요. 이러면 망하는 거거든요. 이걸 안 떨어지게 쌓으려면 밑에 받치고 있는 책상과 무게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간파하고 그 무게 중심을 고려해서 놓는 것, 이게 글쓰기예요. 이걸 못 하면 수다가 돼버리고 이걸 못 하면 완성도가 떨어져요. 그러면 무게 중심이라고 하는 건 뭐냐, 무게 중심이란 건 그 구조를 컨트롤하는 어떤 축 같은 거지요. 좋은 말로 하면 주제라고 말해도 돼요.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 글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어떤 것. 목걸이 가운데 있는, 진주목걸이라고 하면 꿰고 있는 실 같은 것 있잖습니까. 그게 바로 쌓는 거예요. 그 실을 중심으로 쌓는 걸 구조화라고 할 수 있죠. 근데 ‘소설’ 하고 이름을 붙여놔 버리면 그 이름 자체가 우리에게 구조화를 요구해요. 구조를 만들어서 써라, 그냥 수다를 떨 수는 없다. 그게 안 나가죠. 굉장히 힘들죠. 고통스럽고 지옥에 빠진 것 같고. 그러니까 가끔 또 오르가즘이 와요. 그런 소설을 썼어요.

    모든 작가가 다 그렇겠지만 기본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기 구원에 관여하게 됩니다. 자기를 구원하는 거지요. 조금 더 쓰고 프로가 되면 내가 쓰는 글이 타인에게 읽혀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친구가 와서 소설이라고 불러주기 전에 나의 글은 타인에게 읽힌다는 전제가 전혀 없었어요. 그러니까 편안하게 쓸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 친구가 소설이라고 불러주니까 의미가 생기고 다음에 그 친구가 와서 또 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하지요. 나는 한 명의 독자를 확보하게 됐어요. 그러면 내가 쓰고 있는 글이 그 친구에게 동의를 얻을지 말지를 생각 안 할 수가 없어요. 그 친구도 내가 쓰는 말을 알아들을까 통할까 하는 거지요. 그건 무슨 말인가 하면 글 쓰는 행위 자체가 나를 구원하는 일차적인 것을 넘어서 상대편 구원에도 욕망을 갖게 돼요. 타인의 구원에까지 작가자신의 욕망이 확대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자기 구원에서 시작한 글이 타인의 구원이라는 문제까지도 확대되는 과정을 글쓰기에서는 누구나 다 겪게 되는 경로라고 할 수 있어요.

    어쨌든 시간이 많이 됐는데요, 내가 일관되게 준비를 잘 해 와가지고 딱 부러지게, 원래 나는 그런 성격이에요. 가까운 문단 친구들이 나를 ‘칼박’이라고 부릅니다. 칼 같다고 해서. 난 명쾌한 게 좋거든요. 그런데 여기 오면서는 준비가 없었어요. 그냥 잡답처럼 말을 해서 정말로 죄송하지만 꾸며서 한 말을 없으니까 양해를 해주시구요. 그 다음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작가를 만나보고 책을 읽으면 재밌어요. 훨씬 낫습니다. 그 사람 얼굴도 보고 말하는 폼도 보고, 아 그 자식 대갈통에서 이런 게 나왔구나. 이런 거 있잖아요? 나는 강의하는데 나도 뭐 떨어지는 게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내 목표는 여러분들에게 내 책을 읽히는 거예요. 솔직히 얘기할게요. 뭐 옛날에는 수줍어가지고 내 책 아니라도 좋으니까 소설을 읽으라 그랬는데 늙어서 이제 물불 가리지 않고 염치도 없어요. 적어도 오늘 제 목소리가 귀에 쟁쟁한 것이 가셔지기 전에 돌아가셔서 없으면 사시고, 내 책 한 권만 읽어주세요. 재미있을 거예요. 이상입니다.


[진행]

    이것으로 끝을 내겠는데, 작가들은 항상 트릭을 쓰지 않습니까. 박범신 선생도 준비를 안 해왔다라고 하지만 그것도 트릭이라고 봅니다. 오늘 박범신 선생도 자기의 작품 세계에 관한 것을 이미 다 얘기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당시대에 우리를 덮고 있던 폭력이라고 하는 것, 곳곳에 있던 거대한 포위 관념에 대항해서 끊임없이 말글을 찾아 고민해 온 여정을 재미있게 얘기해 주셨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박범신과의 대화를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