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란 무엇인가? - 김화영
인간이 저 아득한 과거 속에서 잃어버린 <낙원>은 안락과 풍요의 세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 <낙원>을 그리워하는 까닭은 안락과 풍요 이외에도 그 세계에는 오직 한 가지 언어만이 존재하여 완벽한 의사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낙원은 근원적 보편적인 하나의 언어만이 존재했던 의사 소통의 낙원이다. 그러나 그것은 꿈에 불과하다. 낙원은 사라지고 저마다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면서 남의 말은 알아듣지 못하는 <바벨 이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인간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다양한 언어의 존재,
즉 언어의 장벽은 이제 형벌이 되고 말았다. 번역은 바로 그 근원적 형벌의 조건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원래는 오직 신만이 보편적
오성(悟性)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신의 사도들은 최초의 번역가들이었다. 성신 강림 대축일날 군중들 앞에서 사도들이 설교를 하면 각자는
자신의 언어로 이해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번역을 한 것이 아니라 신(神)의 언어로 말했고 군중들이 자신의 언어로 알아들었을 뿐이다. 이제
사도들의 시대는 끝났다. 바야흐로 통역사, 번역가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번역을 뜻하는 프랑스 어의 , 영어의 라는 말 속에는
공간, 시간, 혹은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과 여행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어원인 라틴 어 는 <통과시키다>, <어떤 언어로 된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옮기다>의 의미이다. 독일어에서도 번역에 공간적 시간적인 이동의 의미가 포함된 점은 같다. 프랑스 어에서 라는 동사가
처음 등장한 것은 1539년이고 명사 은 1540년에 처음 나타났다.
인류 최초의 번역은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 귀족들의 묘비에
두 개 언어로 동시에 새겨진 비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떤 텍스트의 <번역>이 존재하려면 그 텍스트가 누군가의 소유여야 한다.
소유권이 없다면 <표절>의 개념도 <번역>의 개념도 없다. 그래서 여러 세기 동안 번역traduction,
번안adaptation, 모방imitation, 풀이paraphrase, 개성적 창작이 이렇다 할 구별 없이 사용되어 왔다.
태초에는 신만이 텍스트의 소유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원문에 충실한> 최초의 번역은 역시 성서의 번역이었다.
4세기에는 성 히에로니무스가 성서를 라틴 어로 번역했다. 그것이 바로 『불가타Vulgate』라는 것으로 역사상 최초의 저작권이었다.
인쇄술의 발달과 인간주의의 발달(인간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의 소유자가 되고 오직 영혼만을 신에게 남겨 놓는다)과 더불어 신이
말씀의 보편적 소유자이기를 그친다. 이리하여 텍스트는 저자의 소유로 신성시되면서 성서와 동등하게 충실한 번역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 이제부터
번역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고 철학적으로 필수적인 것이 된다.
서구에서 문자로 씌어진 텍스트가 애용되기 시작한 역사는
4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중세 시대,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번역한다는 것은 그리스 어나 라틴 어로 씌어진 글을 이른바 속어로 옮겨 놓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구어 번역>, 즉 통역이 주된 일이었다. 프랑스 어에서 <번역가traducteur>라는
말은 16세기에야 등장한 새로운 현실을 가리키기 위하여 에티엔 돌레Etienne Dolet가 처음 만든 것이다. 한 가지 언어로 글을 쓸 줄
아는 식자도 많지 않은 시대나 사회에서는 두 가지 언어를 동시에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으므로 외국어를 몇 마디 할 줄 안다면 누구나 번역가,
통역사로 자처하기에 충분했다.
역사상 위대한 번역가들은 흔히 초서, 드라이든, 알렉산더 포프, 괴테, 보들레르 등 위대한
시인들이었다. 그리고 저명한 번역서로는 흔히 자크 아미오Jacques Amyot의 프랑스 어 역 『플루타르코스 영웅전La vie des
hommes illustres』, 루터의 성서 번역, 성서의 영역Authorised Version, 앙드레 슈라키Andr?Chouraqui의
현대 프랑스 어 번역, 슐레겔의 셰익스피어 작품의 독일어 번역, 스코트 몬크리프Scott Moncrieff의 프루스트 영역 등이
손꼽힌다.
그렇다면 번역이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번역에 관하여 원론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부정적 견해가 더 자주 입에 오른다. 그
중 하나가 <번역은 반역(反逆)이다>라는 격언으로 번역의 근원적 불가능성을 대변한다. 세르반테스는 <번역이란 거꾸로 뒤집어 놓은
양탄자 같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무늬는 다 있지만 본래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없는 번역의 운명을 개탄한다. 한편 슐레겔은
<번역이란 사생결단의 결투로 거기서는 번역되는 자 아니면 번역하는 자 둘 중 하나가 죽게 되어 있다>고 했고 볼테르는 <번역으로
인하여 작품의 흠은 늘어나고 아름다움은 훼손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번역은 엄연히 존재한다. 번역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세상의 아름답고 유용한 텍스트들이 모두 사장되고 말 것이다. 번역은 바벨 이후의 시대에 있어서 필요악이다. 번역은 문화의 교환과 전파 및 이동에
없어서는 안 될 활동이다. 그래서 번역의 가능성과 유용성, 나아가서는 그 아름다움을 긍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스윈번은 <바이런은 번역을
통해서야 겨우 읽을 만하다>고 말했다. 어쨌든 번역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고 이론가들이 뭐라 하든 번역은 가능해야 한다. 비판이 있다면
그것은 나쁜 번역자, 잘못된 번역에 관한 것일 뿐이다.
번역자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원어langue-source, 일차어langue de d럓art 쪽에 무게 중심을 두는 태도다. 이는 <원문에 대한
충실성>을 중요시하는 태도일 것이다. 성서의 번역이 이에 해당한다. 번역자는 무엇보다도 신의 말씀을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흔히 단어 대 단어식 번역에 이를 만큼 극도로 형식을 존중한다. 참다운 번역은 원작의 가치에 대한 이해에서 생겨난 존경과
감동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못한 번역은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노동일 뿐이다. 그러나 원작에 대한 존중 때문에 그 반대의 번역 방식을 택할 수도
있다. <단어 대 단어가 아니라 의미 대 의미의 번역이 중요하다>고 지적한 키케로의 유명한 말은 원어 존중자와 번역어 존중자에게 다
같이 귀중한 충고가 될 수 있다.
또 어떤 번역자는 번역어langue-cible, 이차어langue d’arriv럆,
번역문texte traduit 쪽에 더 큰 무게를 둔다. 키케로는 그리스 어의 텍스트를 <라틴화>(라틴 어로 번역)함으로써 로마
지상주의를 확립하고자 했다. 저작권 개념이 오늘날과 같지 않았던 중세에는 번역 텍스트는 원작에 대하여 독립성을 지닌 완전한 창작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초서는 그의 저서에서 직접 쓴 것과 번역을 구별하지 않았다. 번역을 원작의 연장으로서 중요시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특히 루터의
성서 번역에서는 무엇보다 민중이 알기 쉬운 말로 번역해야 한다는 점을 중요시했다. 그리하여 독일어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구문과 어휘는 그런
목적에서 수정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한편 17,18세기의 번역은 그와 반대되는 이유로 원전을 수정했다. <자유>가 구호였고 번안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번역 텍스트의 가독성>을 중요시한 데서 연유한다.
타이틀러Alexander F.
Tytler는 그의 저서 『번역의 원칙에 대한 소고Essay on the Principle of Translation(Edinburgh,
1791)』에서 다음과 같은 번역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1)번역은 원문의 내용을 완전하게 옮긴 것이어야 한다(내용에의 충실).
(2)번역의 문체와 글쓰기의 방식은 원문과 동일한 성격이어야 한다(형식의 충실). (3)번역은 원작의 용이함을 지녀야 한다(번역의 기술적인
분야).
위의 두 원칙은 원작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충실성의 요구>와 번역문의 <가독성의 요구> 두 가지로
다시 요약될 수 있다. 실제 번역에 있어서는 이 두 가지의 동시 만족이 가장 어려운 문제다. 충실성을 희생하여 가독성을 높이느냐 아니면 가독성을
희생하더라도 충실성을 기해야 하느냐가 고민이다. 그 결과 문학 텍스트의 경우 언어학자들이나 문학 비평가 혹은 교수에 가까운 원문 충실파와
문학인에 가까운 <아름다운 불충실belles infid뢬es>, 두 가지의 극단적 태도가 서로 갈라질 수 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번역에 의고주의를 적용함으로써 번역문 속에 해당 시대의 기호를 재생시키려는 경향으로 인해, 종종 독자들이 번역문을 읽고 이해하기가 원문의
해독보다 더 어려워지기도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7세기 프랑스에서는 그리스 시대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작품 속의 가구나 의복까지도 프랑스
식으로 바꾸어 전달하려는 경향이 있어 독자들의 비판을 샀다. 원칙적으로는 충실성과 가독성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번역자는 그의 성향에 따라 그 중 어느 쪽에 어느 정도의 무게를 두어야 할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태여 필자의 생각을 다소
과장하여 말해 본다면, 번역서는 우선 번역서 안에서 이해의 문제가 독자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세상에는 원래 난해한 원서가 얼마든지
있다. 게으른 독자는 그 어려운 원서가 쉽게 번역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동시에 지나친 요구다. 그러나 어려운 번역서도 깊이
있는 정독과 반복된 독서로 그 자체 내에서 이해가 가능해야 한다. 독자로 하여금 매순간 원서의 표현과 내용 자체가 궁금해지게 만드는, 그리하여
급기야는 번역서를 포기하고 원서를 찾아가게 만드는 번역서는 그 존재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너무나 빈번하게 마주치게
되는 이런 번역들은 다른 역자의 보다 나은 번역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문화적 해악이다.
바이올린 연주를 하려면 물론 바이올린이
있어야 하고 소설을 쓰려면 종이나 컴퓨터가 있어야 하고 단어와 문법을 알아야겠지만 음악과 문학의 핵심은 그런 것을 초월하는 다른 데 있다.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물론 우선 두 가지 언어를 동시에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출발점에 불과할 뿐이다. 초보자는 언어의 장벽을 넘는 데
급급하다. 단어와 문장의 뜻을 그럭저럭 해독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다. 우리 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번역>을 외국어 습득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그것이 바로 외국어 교실에서 흔히 말하는 <해석>과
<작문>이다. 그러나 번역은 언어 습득 수준을 훨씬 초월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문학 작품(시, 고전, 연극, 아동물 등), 기술적,
상업적, 행정적 텍스트, 영화의 더빙, 회의 통역 등 각 장르마다 고유한 법칙과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번역에서는 그 독자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의 번역이다. 문학 번역은 언어학 이상으로 문학에 속하는
것이고 시의 번역은 시에 속한다. 각 장르의 특성이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만 언어학적 번역론은 의미가 있다.
번역은 형식적인 언어
개념에서 벗어나 텍스트의 언어와 그 다양한 구성 요소들을 문화적 맥락과 관련된 사실로 인식한다. 두 문화 사이의 거리는 순전히 언어적인 관계
이상이어서 번역하는 방식에 그 불가피한 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러므로 번역 이론가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번역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번역의
재능은 언어학적 지식의 산물만이 아니다. 또 같은 텍스트가 같은 언어로 다시 번역된다 해도 번역하는 시기가 몇 세기 떨어져 있다면 그 번역은
크게 다를 것이다. 번역은 언어와 관련된 것이지만 그 이전에 어떤 특수 분야의 문맥과 상황에 크게 좌우된다. 번역은 그러므로 1차 언어를 2차
언어로 옮기는 것이라기보다는 1차 문화 환경을 2차 문화 환경으로 해석하여 옮기는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언어란 문화라는 몸체 안에
있는 심장이다. 어떤 번역자도 문화를 도외시한 채 작품을 다루면 올바른 번역에 이르지 못한다. 번역이란 번역이 이루어지는 시대와 사회의 문화적
맥락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것이 궁극적이고도 이상적인 번역이라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번역은 하나의 언어
기호에 담긴 의미를 사전과 문법을 충분히 이용해 다른 언어 기호로 옮기는 일이라는 협의의 언어학적 개념을 넘어서서 언어 외적인 기준 전체를
포함한다.
문학 번역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결국 두 문화, 두 사고 방식, 두 가지 감수성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복잡한 문맥으로
요약된다. 무슨 언어에서 무슨 언어로 번역하는가? 무엇을 번역하는가? 언제, 누구를 위하여 번역하는가? 번역자는 바로 이런 일련의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번역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어나 중국어 텍스트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과 프랑스 어, 영어, 독일어 텍스트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또 30년대의 독자를 상대로 번역하는 것과 오늘의 신세대를 위한 번역은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 취향의 진화와 변화,
사회 환경의 변화는 번역자가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번역에서는 텍스트의 전체적 톤과 성격의 해석과 판단이 우선이다.
새로 나온 약품의 사용 설명서 번역을 운율과 리듬에 맞추려다가 정확한 용법의 전달에 실패할 경우, 흥미 진진한 탐정 소설을 충실하지만 무겁고
느리게 번역할 경우, 프루스트를 짧고 경쾌한 문장들로 읽기 쉽게 끊어서 번역할 경우를 상상해 보라. 특히 문학 작품의 경우에는 무엇보다 원작이
주는 최초의 불꽃과 빛, 즉 감흥과 분위기, 속도, 감성에 대한 핵심적 파악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 불꽃과 빛 속에서 번역은 이루어져야 한다.
단어의 정확한 뜻이나 소리의 유사성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그 정신적 불꽃의 자장 속에 놓이지 않는다면 그 번역은 만족스러운 것이 못 될 것이다.
그러면 이 지난한 역할을 떠맡은 번역자는 누구인가? 외국어와 모국어의 동시적 해득이 첫째 조건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완전한
이중 언어 사용자bilingual>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종 사전들이 문제를 보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자는 무엇보다
먼저 <독자>다. 특히 문학의 경우 글과 문학에 대한 취향과 안목과 지식을 갖지 않고는 훌륭한 번역을 하기 어렵다. 번역자는 단지
원작을 읽는 독자에서 더 나아가 원작에 대한 다원적인 체계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문학적 해석과 번역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여
번역가의 역할이 번역만 하는 것이지 원작의 해석은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번역은 우선 무엇보다 먼저 텍스트의 약호 풀이를
요구한다. 2개 국어를 사용하는 모든 독자가 다 번역자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음으로 요구되는 것이 <쓰는 작업>, 즉 약호
조립 과정이다. 언어 상호적 번역에는 원작에 대한 번역자 자신의 창조적 해석이 반영되어야 한다. 특히 시의 경우 번역자가 운율이나 리듬, 어조
등을 어느 정도 재창출해 낼 수 있는가는 1차 언어뿐만 아니라 2차 언어의 체계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번역은 다시 쓰기도
아니고 옮겨 쓰기도 아니고 다만 같이 쓰기다.> 문학 번역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번역 학교에서 양성하는 사람은 통역사와 기술
번역사일 뿐 문학 번역자가 아니다. 문학 번역자가 번역을 주 수입원으로 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들은 대부분 다른 지적 직업(가령 대학)에
종사한다. 작가가 번역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들은 자신의 글쓰기를 더 좋아한다. 번역자가 창조적 글쓰기의 재능을 가진 작가나 시인일 경우는
매우 바람직하지만 예외에 속한다.
번역은 받는 대가가 인색한 작업이다. 엄청난 노력이 요구되지만 수입은 매우 적다. 게다가 초기의
성서 번역자들을 제외하고는 후세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번역자는 드물다. 작자가 A이기 때문에 책을 선택하는 독자는 많지만 번역자가 B이기
때문에 선택하는 독자는 매우 드물다. 보들레르는 탁월한 번역자였지만 그는 번역자이기 이전에 위대한 시인이었다. 문학 번역가가 되는 이유는 문학에
대한 취미, 수입, 외국의 어떤 책, 작가, 문학, 문화를 알리려는 열정,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나 자신의 이름이 활자화되는 즐거움
등 다양하지만 번역자는 저자와 출판인 양자에게 이중으로 매인 몸이어서 권리는 적고 책임은 막중하다.
박식한 학자와
기술자(언어학자)와 영감 넘치는 예술가(작가)의 중간쯤에 위치한 수공업자인 번역자는 고통스럽고 고단하지만 대개의 경우 자신의 고통과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보다는 실수에 대한 비판을 더 많이 거두어들이는 딱한 존재다. 번역자는 한번도 다른 평범한 독자들처럼 독서의 흐름에 마음을 싣고
느긋하고 즐겁게 흘러가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괴로운 독자다. 그러기는커녕 보통의 독자 같으면 무심히 건너뛰거나 무시하는 디테일들까지도 예외
없이 다 이해해야 하고 온갖 사전들을 펼쳐 놓고 단어 하나, 문장 하나의 뜻을 가늠해 보고 옮겨 보고 고쳐 보느라고 끊임없이 독서의 속도를
늦추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전체의 흐름과 리듬과 톤과 속도, 분위기를 또한 살펴야 한다. 텍스트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나뭇잎들도 고려해야 하고 땅속에 깊숙이 박힌 뿌리들과 토양까지도 광범하게 살펴야 한다. 원작에 대한 감격과 사랑 그리고 존경이 없다면 번역,
특히 문학 작품의 번역은 시작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세계 저작권 협회에 가입하여 그 구속을 받게 된 시점의 이 나라에서 지금
심각하게 문제되는 것이 바로 번역이다. 종래와는 달리 번역 출판사는 원작자나 원작의 출판사에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출판
비용이 그만큼 추가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윤을 추구하는 출판인은 당연히 비용이 적게 드는 번역을 선호할 가능성이 있다. 저렴한 비용을
요구하는 번역자는 이타적인 사명감에 불타는 문화인이거나 불성실한 번역자 양자 중 하나일 확률이 높다. 이제 국제 저작권 발효로 인하여 이
나라에서는 조잡한 번역이 양산될지도 모른다. 타 출판사와 경쟁하며 높은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저작권을 획득하여 출판한 악역, 오역, 졸속 번역들은
그것들을 개선된 번역본으로 다시 출판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할 것이다. 그것이 일과성의 베스트셀러라면 모르겠지만 우리의 지적 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저작이라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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