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憑虛(현진건)君의 『貧妻』와 牧星君의 『그날밤』을 읽은 印像

이강기 2015. 10. 1. 13:03
잡지명 개벽 제11호
호수 제11호
발행년월일 1921-05-01
기사제목 憑虛君의 『貧妻』와 牧星君의 『그날밤』을 읽은 印像
필자 星海
기사형태 문예평론

1. 貧妻
開闢 신년호에 난 것인데 그 내용으로 말하면 어떠한 무명작가의 빈궁한 생활의 기록이다.
주인공 K가 예술적 충동에 타오르는 열정과 예술의 동산에 동경을 두고 世間을 不知하고 시일을 보내엇다. 물질의 곤란을 바다서 가정에 小風波가 일어나는 것과 그 신경질인 성격의 소유자 K의 심적 변화가 일어나서 나종에는 衣服 什物까지 전당포에 집어너코 입을 것이 업게된 자기의 처를 괴롭게 하엿고 깨처서는 천사와 가티 여기고 찬미하게 된 것이 此作의 梗槪이다. K가 자기의 처에 대한 동정이던지 측은히 여기는 맘이 그와 가튼 빈궁한 생활의 過中에서 ?弄을 당하는 동안에는 자연히 잇슬것이 인정의 떠떳함이라 할 것이다. 표현한 바 사실이라던지 심리의 묘사에는 심각한 맛이 확실히 잇다. 결코 유탕적인 것이 업다. 우리 가슴에서 울어 나오는 내적 생활의 고민과 모든 갈등이 이러한 작품에서 어든 바 인상에 자연히 울리움이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결점과 美點이 상반하다 할 수 잇다. 내용을 자세히 삷히건대 작품에 표현된 인물의 성격과 행위가 互相 모순 되는 것이라던지 또한 『폼』도 일사불란한 통일을 缺한 듯 하다. 이것으로 보면 작자에게 표현에 숙련한 수완이 아즉 업는 듯 하다. 나는 이〈115〉 작가가 아즉 노련한 맛이 업고 생생한 기운이 뵈이는 것이 즉 장래에 큰 囑望을 두게 하는 것이다.
K의 성격으로 말하면 자만도 강하고 또한 德義心도 상당하게 잇는 듯 하다. 近者 예술가로서의 突飛하고 偏奇한 개성은 그러케 뵈이지 안코 그 이면에는 이 세간과 융합하랴는 微症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모르는 세간을 비웃으며 서로 세간에 반항하지 못하고 追隨하는 듯하다. 일로보면 K는 예술가로서는 넘우 본능을 억압하고 그 창조의 특성이 암만해도 부족치 아니한가 한다. 退?적인 인생관 『빌어먹을 것- 되어가는 대로 되어라.』하는 중얼거림이라던지 자기의 四圍 사람들이 자기를 惡評한다고 그것에 불평과 불만을 품는 것이던지 남이 인정해 주지 안는 것을 心苦로 여기는 것이던지 世間과 自己의 처지가 背馳되는 것을 알며서도 여하한 특수의 각오가 업는 듯한 것은 모도 K의 성격의 약점인가 한다.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에 대한 작가의 동정이 넘우 농후한 듯 하다. 넘우 K의 행위를 미화 시키랴고 하고 그것을 호의로 해석하랴고 함이 과도하지 안흔가 한다.
K는 처가덕으로 생활을 하여왓고 나종에는 廉恥가 업서서 自家의 什物衣服 등을 전당포나 고물상에 맛기고 생활하게 된 결과 자기의 처의 아끼던 毛本緞 저고리 한 벌까지 잡히게 되엇다.
여긔에 작자의 小主觀이 넘우 나타나지 아님인가 한다. 말하면 우리 조선에는 가족끼리나 친척끼리 상호 扶助하는 것을 자고로 美風으로 알앗섯다. 이러한 의미에서 K의 처가에서 K의 생활을 保障하여 온 것이다. K는 자기의 예술에 열중함으로 세간을 모르고 먹으면 밥이요. 입으면 옷으로 알 줄도 표현되엇다. 그러나 이러케 생활하기를 수 3년 동안이나 되엇고 그 작품을 통하여는 자기의 처가와는 이러한 동안에 하등의 갈등이 난 것도 보이지 안코 조석을 걱정하게 되엇고 입을 의복이 업서서 출입을 못하도록 된 것은 나의 처의 결백한 성격을 純化시키랴함이 아닌가 한다.
생일에 K 夫妻를 청한 것이며 K가 아모 안이꼽은 생각이라던지 창피한 빗 업시 자기 처와 동부인해서 자기의 처가에 간 것으로 말하면 K와 그의 처가와는 아모 갈등된 일도 업섯고 圭角난 것이 업는 것을 알 수가 잇다. 또한 자기 처가의 대문에 들어갈 때에 아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흔 것이라던지 『이 사람은 누구인가 아마 이 집 차인인가 보다.』하는 것이며 그들이 『輕侮를 아니히는가.』하고 의심한 것과 기타 모든 것으로 보면〈116〉 K의 처가는 얼마큼 饒富한 줄을 알 수가 잇다. 그런데 아모 상반되는 일도 업시 갈등난 일도 업시 자기의 혈육인 딸의 單家 살림을 不顧하게 되어 입을 옷이 업게 되고 밥을 굶게 된 것도 몰랏다 하면 조선의 현실사회에서 반듯이 잇슬 현상으로 관찰하면 그러할가 하는 생각이 少하다. 작자가 K에게 동정함이 넘우 깁흔 까닭에 그 고상한 성격을 넘우 誇張함이 아닌가 한다. 차라리 지금까지 처가의 救護를 바다왓스나 의식의 外에는 다른 것을 청구할 수 업는 고로 世間什物과 의복이 고물상에로나 典當局에로 점점 나아가고 말앗다고 하면 작품에 솔직한 맛이 잇슬 듯 하다. 이것은 작자가 더 一層 올라가지 못한 것이라고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결백한 성격의 소유자가 자기의 처가에 가서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亂酌하고 전후를 不顧하고 酒?한다는 것이며 인력거에 실려 자기의 집으로 온 것이며 장모가 인력거삭 줄때에 그 돈을 나를 주엇스면 책을 한 권 사 보겟다고 취중이라도 그와 가튼 卑劣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전에 표현된 바 순결한 K의 성격과 서로 모순이 아닌가 한다.
보통인의 음주심리로 말하더래도 못먹는 술을 넉잔이나 마셧다 하지마는 劫懶한 K의 所爲로는 생각나지 못한다. 이것은 아마 작자가 飮酒에 대한 경험이 업는가 한다. 아모리 不酒客이라도 死藥으로 알고 마시지 안흔 이상에는 실신하도록은 넘우 과장이요. 추상적인가 한다. 저항하고 堪耐할 수 업시 頹倒하기까지에는 명료한 의식이 반듯이 잇다는 것은 처음으로 술먹는 이들의 고백이다. 그러면 K가 못먹는 술을 넉잔이나 먹엇다고 손을 내젓는다던지 안돼요 안돼요 집에 가겟소』하고 자기의 장모 압헤서 참으로 주정군 놀읏을 한 것은 아모리 생각하여도 부자연함이 아닌가 한다.
또한 얼마큼 「쎈치멘탈」을 면할 수 업는 嫌이 잇다. 自妻의 늘- 『아! 나에게 위안을 주는 천사여- 援助를 주는 천사여!』하고 찬미하는 것이던지 『후-』 한숨을 늘 쉬는 것이던지 『그렁그렁한 눈물이 물끌틋 넘쳐 흐른다.』하는 것은 다 그러하다. 자기가 그와가티 사랑하고 찬미하는 愛妻에게 맘에 족음만 틀리면 『계집이란 할 수 업다.』하는 것이며 『나를 菽麥으로 알우』하는 것이며 『막벌이군 한테나 시집을 갈것이지 누가 내게 시집을 오랫서 저 따위가 예술가의 처가 다 무엇이야.』하는 것은 어떠한 히쓰데릭한 여성이나 다름업다.〈117〉
K의 처로 말하자. 그는 구식가정에서 자라난 여자인 듯 하다. 그가 그와 가튼 구차한 살림에도 실증을 내지안코 자기 良人에게 順從하는 것은 참으로 良妻의 전형이라 할 수 잇다. 그러나 예술가의 妻 노릇하랴고 독특한 결심을 하엿다 함에는 그 性格素行에 대하여 疑訝하지 안흘 수 업다. 구식여자로서 예술을 了解한 듯 한 것이며 예술가라는 것이 어떠한 것을 양해한다는 것도 부자연 함이 아닌가 한다. 내 생각에는 K의 妻는 차라리 現今 도덕의 관념으로 자기의 良人의 그 애쓰고 노력하는 대에 애처러운 생각을 하고 동정하며 焦憫히 여기고 자신의 苦勞를 망각하게 되고 모든 것을 희생에 바친다는 것이 더욱 자연함이 아닌가 한다.
苦勞하는 남편에게 『당신도 살 도리를 하셔요.』하고 구박한다는 것은 그와 가티 窈窕한 K의 안해의 입으로 나왓다는 것은 의외의 감이 不無하다. 『웨? 맘을 조급히 하셔요? 저는 꼭 당신의 이름이 이 세상에 빗날 날이 잇슬줄 미더요. 우리가 이러케 고생을 하는 것이 장래에 잘 될 將本이야요.』 이러한 ¸°특한 말을 하며서 다른 산 아이가 그의 처에게 사다주는 양산 한 개의 刺激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그의 남편에게 괴로운 생각을 주는 것은 다만 작자가 묘사하기 위하여 묘사함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을 읽는 누구던지 주인공 K가 문예에 특별한 취미를 가즈고 잇는 것을 알 수 잇다. 작품중에 예술가니 예술가의 처니 하는 명사를 부티지 안터래도 그가 無報酬한 독서와 창작으로 시일을 보낸다 하면 예술가 되랴는 것은 알 수가 잇슬 것이다. 주인공이 예술가이고 아닌 것은 독자의 판정에 맛기는 것이 당연함이 아닌가 한다. 그러한 말을 남용하여서 作에 대한 진실하고 솔직한 맛을 減하게 하는 것은 한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전체로 말하면 수긍할만한 점도 만타. 글을 쓰는 그 調子가 沈潛하고 穩和한 것과 붓이 부들업게 나아간 것이며 제재가 금일 우리 문단에서 볼 수 업는 우리 생활과 부합되는 것이며 딸아서 독자로 하여금 심각한 기분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슴을 그대로 두고는 말지 안햇다. 내 생각에는 이상의 나의 말한 바를 더 구상화 하엿더면 결점이 少한 예술품됨이 확실하엿슬 것이다. 모처럼 그 조흔 재제를 가즈고 그대로 거긔에 끄친 것은 참으로 유감으로 생각하는바이다.
작중에 감출수 업는 작자의 寓意는 근래 조선청년들이〈118〉 新女子와 가정을 짓는 것에 동경하고 자기의 현재 가정생활을 파괴하랴는 것이 일대 운동이 되고 유행이 된 것을 풍자하고 이상의 가정은 반듯이 新女子만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잇다. K가 외국에도 돌아단일 때에 소위 신풍조에 띠어 까닭업시 구식여자가 실혓다하는 문구에 『所謂』라던가 『띠어』라던가 『까닭업시』라던가를 보면 확실히 그러하다. 또한 『그러나 나ㅅ살이 들어갈스록 그러한 생각이 업서지고 집에 돌아와 안해를 격거보니 의외에 그에게 따뜻한 맛과 순결한 맛을 발견하엿다.』함과 『그의 사랑은 이기적이 아니요. 헌신적 사랑이라.』함과 가튼 것은 자기가 표현시킨 바 작품의 전체를 일언으로 고백한 것에 不外한다. 모처럼 好題材를 가즈고 노력한 작품에 蛇足을 加하여 근대적 상징의 맛이 잇슬 작품을 은유화시킨 嫌이 不無하다. 나는 이 작자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즈고 잇다. 그러나 現今이 작가의 도의적 관념과 구식여자에 대한 동정이 何時까지 계속할는지 이것은 한 의문으로 두자.

그날밤
이것은 어떤 청년 남녀의 연애로 그들의 가정에 풍파가 일어나고 그들의 어린 가슴에는 肉과 靈의 충돌 글로 말미암아 번뇌·고통·질투·실망·자살 모든 인생의 暗黑面의의 사실을 그대로 끌어 집어내인 것이라.
英植이 貞淑과 서로 사모하고 사랑하는 새가 되엇고 그들은 자기네의 가슴에서 물결치는 본능을 억압하고 신성한 영적 사랑을 꿈꾸엇섯다. 그러나 肉적 충돌에는 靈의 순결한 것도 微塵처럼 破碎되고 말앗다. 野合까지 하게 되엇다. 英植은 이것을 후회하고 양심에 부끄려 하엿다. 그러나 이러한 회한은 일시적이요. 어떠한 氷坂을 달아가는 砂礫과 가티 표면을 지내어 가고 말앗다. 그러할스록 그는 본능적인 愛를 요구하여 말지 안핫다.
英植의 4圍의 형편이 자신이 요구하는 바와는 배치되는 행동을 그에게 강요하엿다. 결과에 실연 자살까지에 이르럿다.
그러나 나는 英植이가 자기의 생명가튼 연애에 불충실함을 알치 안흘수 업다. 또한 연애가 둘새에 성립된 동기가 넘우 충동임으로 破裂이 곳 오지 안햇는가를 말하려한다. 그들은 웨? 자기의 부모네가 결혼을 강요할때에 맹렬히 반항하는 태도를 取치 아니하엿는가. 금일 상당한 교육과 신풍조에 저즌 청년으로는〈119〉 넘우 因循하고 屈從的인가 한다. 이것이 주인공의 弱味를 나타내는 동시에 작품에도 어떠한 瑕疵를 더지지 안햇는가 한다. 아모리 因循하고 심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과 결합한 異性에 대한 愛가 진실하다 할 것 가트면 당연히 반항적 태도를 가즐 것이다. 그와 가티 소극적 수단을 취하여 小切手帖을 훔친 것이며 자기의 삼촌의 전당포 鐵櫃를 엿보랴는 맘이 나오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반항함이 인정에 떠떳한 일인가 한다. 가정이 아모리 엄격하다기로 그만한 말도 못해본다는 것은 그들의 愛가 넘우 착실치 못함인가 한다. 자기가정이 이러한 말하기에는 형편이 그러케 어렵지도 아니한 듯하다. 그는 이와가튼 불성실한 愛에 실패한 뒤에 모든 사물에 대하여 病적 사상을 품게 된 것이 어떠한 회심의 作이라고 할수 업다. 電車나 거리에서 여학생을 보면 반듯이 그들에게는 비밀이 잇는 것처럼 생각하고 인생이란 것은 모다 추악한 것으로 보앗다. 더욱 여자를 죄악의 덩어리로 보앗다. 이 인생과 세간을 저주하고 증오한 결과 이 세계보다도 비밀도 업고 여자도 업는 천국을 구하여서 仁川해안에서 몸을 더지게 된 듯하다. 그의 연인이엇던 貞淑은 자기의 애인을 버리고 미국 유학생이란 美名에 취하여 결혼을 하고 말앗다. 그는 『나도 안가겟다. 실흐니 안가겟다』는 단단한 盟誓도 다 이저버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귀하를 그리다가 죽겟다던지 암만해도 인간의 일이 操縱하는 운명의 실줄이 미리 매어서 잇는다던지 하는 斷念하기에 고흔 말을 들이고 그대로 다른 사람의 품에로 들어간 것은 어찌햇던지 둘 사이에는 성실한 愛가 잇섯다구는 생각할 수 업다.
이러케 생각하여 보면 불충실하고 불순수한 愛에 애착하고 미련을 두어 失望悶煩한다는 것이며 그 우유부단하던 英植이가 생명을 희생한다는 것은 아모리 생각하여도 부자연함이 아닌가 한다.
英植의 성격으로 보면 자살을 결정하기까지에는 다수한 時日을 요하여야 할 것인데 전차에 貞淑을 맛나며 바로 죽을 장소를 차저 인천까지 간 것은 넘우 「로맨틱」하다 할 수가 잇다. 仁川해안의 그 악마가튼 파도와 수평선에서 환멸하는 모든 神秘的의 암시가 그 약하고 因循한 성격의 소유자 英植에게 아모 공포를 주지 안코 종용히 죽음에 나아가게 하엿슬는지도 의문이다.
이 作을 一言으로 말하면 작자가 넘우 결말을 급히 하지 안햇는가 한다. 어찌햇던지 죽음에까지 일으기에는 좀 더 곡절이 잇고 波瀾이 잇서야 할 것이다. 작자가 심리묘사에는 상당한 수완과 예민한 신경을 가젓스나 좀 더 냉정한 태도를 가즈고 주도히 관찰하엿더면 이 작품에 심각한 맛을 어덧슬 것인가 한다. 사실의 전개가 마치 활동사진 『필님』처럼 連하게 나온듯한 嫌이 不無하다. 또 한 가지 감동될 것은 작자의 어휘가 만흔 것이다. 우리들의 누구던지 곤란으로 여기는 우리나라 말에 상당한 다수의 말을 適所에 적용하는 것은 작자의 큰 强味인가 한다. 딸아서 문장도 상당한 洗練을 바든 듯하다. 2월 20일〈120〉
〈11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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