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建國과 近代 - 전상인

이강기 2015. 10. 1. 22:36
[논단] 建國과 近代


[전상인 | 서울대 교수, 사회학]

全相仁 연세대학교 정외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사회학 석사 및 박사, 한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및 미국 워싱턴대학교 방문교수 역임 現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저서로는 『고개숙인 수정주의』, 『세상과 사람사이』, 『우리 시대의 지식인을 말한다』 등이 있음.


1. 序論

근대는 ‘역사적’ 사회변동의 산물이다. ‘근대성’(modernity)은 일반적으로 16-20세기 서유럽이 경험한 사회변동의 결과를 지칭하는 것으로, 그 핵심은 생산체제의 산업화, 사회의 구조적 분화, 시장상황 및 상품 교환관계의 확대, 국가통치의 탈인격화와 정당성의 국민적 검증, 개인적 합리주의의 확산, 사적 책임영역의 증가 및 시민권의 성장 등이다 (Waters, 1999:xii-xiii). 근대는 그 자체가 역사적 필연도 아니고 당위적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그 이후 점차 세계사적 대세가 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근대적 이행의 典範은 서구다. 그러나 무어(Moore, 1966)가 지적한 것처럼 ‘부르조아의 길’만이 근대에 이르는 유일한 루트는 아니다. 소련과 중국의 국가사회주의나 일본이나 독일의 파시즘 역시 나름대로 근대세계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들 세 가지 경로가 근대에 이르는 방식의 전부는 아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 방식이 훨씬 더 보편적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근대화가 시도되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모든 나라의 근대화는 세계사적 보편성과 개별 국가의 독특성이 결합된 형태다.

비교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근대화를 매우 단기간에 성취한 사례다. 이러한 소위 ‘壓縮的 近代化’가 흔히 의존하는 설명은 ‘국가주도’ 근대화다. 근대화에 대한 ‘국가중심적’(state-centered) 접근 자체는 타당하고 적절하나, 기존의 관행적 연구경향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난다. 첫째, 대부분의 연구가 다분히 근시안적이고 기능주의적이다 (전상인, 1991; Jun, 1992). 근대화 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1960년대 이후 산업화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근시안적이며, 근대화를 주도한 국가의 존재를 ‘주어진’ 것으로 가정한다는 점에서 기능주의적이다. 이에 반해 이 글은 한국사회의 국가주도 근대이행이 1948년 건국부터 고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의 근대화에 관련하여 박정희 정권이 결코 ‘신의 장치’(deus ex machina “갑자기 나타난 전지전능한 문제 해결사”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한국의 국가주도 근대화를 소위 ‘發展國家’(developmental state)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하는 관례도 최선이 아니다. 발전국가는 이른바 ‘약탈국가’(predatory state) 개념과 짝이 되어 후발산업화에 성공한 국가의 조건과 역량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각별한 유용성을 발휘해 왔다 (Evans, 1995:12 등 볼 것). 그러나 발전과 약탈이 근대국가의 유형을 가늠하는 유일한 또는 본질적 기준은 아니다. 이 글은 산업화를 근대화의 하위개념으로 놓고, 발전국가의 상위개념으로서 ‘근대국가’(modern state)에 주목한다. 그리고 근대국가의 핵심적 특징으로서 ‘공공계획’(public planning)의 개념을 제시한다. 요컨대 한국의 근대는 건국의 時點에서 혹은 건국의 視點으로 읽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2. 이론적 논의: 국가, 근대, 계획

근대사회의 또 다른 지표는 公共計劃 혹은 計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前근대사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계획이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권력의 정당성이 세습적 전통이나 카리스마와 같은 ‘내재적 권위’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국가에서는 외형적 업적이나 외부적 평가가 권력의 향배를 가늠하며, 바로 그런 이유로 공공계획의 중요성이 증가한다. 산업사회의 출현 또한 계획의 시대를 함께 열었다. 산업혁명 이후 각종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벤담이나 생시몽, 꽁트 등이 제시한 사회공학적(social engineering) 발상은 공공계획의 기원을 이루었고, 맑스의 사회주의혁명 이론은 급진적 사회계획을 의미했다.

흔히 1848년은 공공계획의 원년으로 인식된다 (Friedmann, 1987:61). 그것은 당시 유럽을 휩쓴 노동자혁명의 폭발 및 좌절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그 해 이후 지배세력은 체제의 안정적 재생산을 위한 공공계획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피지배계급은 민주주의를 얻는 대가로 자본주의를 수용했다. 2월 혁명 직후 시작된 파리의 근대도시계획은 본격적인 계획의 시대를 열었다. 프랑스 제2제정과 오스망 시장에 의한 파리 도시개조 사업은 자본축적의 효율성 제고 및 노동자 혁명의 사전예방이라는 목적을 동시에 겨냥한 것이었다 (하비, 2005). 당시 자본주의적 산업화에 따른 계급갈등의 핵심무대가 도시였던 만큼 도시계획은 물리적 공간계획이자 동시에 사회계획 내지 사회정책이었다. 서구의 계획이론이 주로 도시를 중심으로 개진된 것은 따라서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로써 지배권력의 입장에서는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가시적 업적 및 성과 창출에 노력을 경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권태준, 1998 참조). 물론 공공계획의 필요성이 그것의 가능성을 자동적으로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계획에의 의지와 희망을 실천적 역량으로 뒷받침한 것은 19세기 이후 근대 국민국가의 발전이었다.

근대국가의 이론적 대부는 막스 베버다 (Weber, 1968). 근대사회의 발전을 ‘形式的 合理性’(formal rationality)의 증가와 연관시킨 그는 근대국가를 “강제력의 독점을 통해 특정 영역 내에서 집합적 의사결정을 취할 수 있는 조직들의 집합”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속성은 국가를 사회로부터 분리시켰고 국가는 나름의 자율성과 독자적인 능력을 갖춘 존재로 정의되었다. 특히 근대국가의 핵심인 관료제는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에 입각하여 국가역량의 핵심을 차지했다. 근대국가는 또한 ‘전문성과 지식에 의한 지배’(rule of expert and knowledge)를 지향한다. 19세기 후반 이후 사회통계의 점진적 독점과 공공지식의 생산에 의한 소위 ‘지식국가’의 성립은 국가의 공공계획 역량을 획기적으로 제고시켰다 (최정운, 1992 참조).

초기 근대국가는 이른바 ‘합리적 종합계획’(rational-comprehensive planning) 이론의 본산이 되었다 (Allmendinger, 2002:41-67 볼 것). 그것은 인간의 이성적 노력을 통해 세상을 진보시킬 수 있다는 계몽주의 사상, 객관적이고도 보편적인 지식을 제공한다는 논리실증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효율적 수단을 모색하는 도구적 합리주의에 기초하였다. 합리적 종합계획은 엘리트 중심의 하향적 방식을 선호하며, 전문가의 판단을 중시한다. 선진자본주의 사회의 경우, 국가 주도 합리적 종합계획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주도형 산업화가 국가개입의 완전한 부재를 의미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처럼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국가개입이 보다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때도 있다. 베버의 전통을 계승한 만하임(Mannheim, 1968)이 자본주의체제의 시장만능주의와 全體主義的 統制體制를 동시에 배격하는 이른바 ‘민주적 계획’(democratic planning)을 주창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만하임의 계획관은 훗날 ‘계획합리성’(plan-rationality) 개념에 기초한 ‘발전국가’ 개념에 큰 영향을 미쳤다 (Evans, 1995; Johnson, 1982; Woo, 1999 등 참조). 계획합리성이란 ‘시장합리적’(market rational) 서구 자본주의와 ‘계획이념적’(plan ideological) 동구 사회주의를 동시에 거부한다 (Johnson, 1982:17-20). 대신 그것은 市場合理的 計劃行爲를 통해 국가가 산업화를 ‘발전적으로’ 주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럴 때 계획이란 결정(decision)이나 예측(forecasting), 정책(policy), 그리고 정부개입(governmental intervention)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강광하, 2000:3-4). 이는 전후 제3세계 국가들의 후발산업화 과정에 대해 높은 설명력을 구가했다. 근대국가로부터 발전국가로의 특성화 내지 전문화는 소위 “전환적 국가”(transformative state)로 귀결되었다 (Kohli & Shue, 1994:7, 13). 근대적 사회변동의 중심에 國家와 計劃이 위치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근대국가의 합리적 종합계획이 모두 효과적이거나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그것의 극단적인 형태에 해당하는 소위 ‘고도 근대주의’(high modernism) 사회공학이 20세기 인류문명에 수많은 폐해를 남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Scott, 1996). 우선 국가의 영향력은 원래 계획한 사회경제적 목표의 달성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성공적 실현과정에서 계급구조나 사회갈등 혹은 정치문화 전반에 걸쳐 ‘非意圖的 結果’를 초래할 수 있다. 국가주도 경제발전이 궁극적으로 계급사회를 형성하고 계급정치를 발생시키며, 또한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른바 ‘토크빌 효과’(Tocquevillian effect)다 (Skocpol, 1985:21). 또한 발전국가 체제하에서 경제성장이 사회적 불평등을 동반하는 경우 피지배계급의 불만은 시장과 자본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직접 겨냥할 수 있다 (Rueschemeyer and Evans, 1985:68-70). 소위 ‘부메랑 효과’(boomerang effect)다.

3. 건국과 근대기획

3-1. 건국과 개혁정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의의는 단순히 일제로부터의 해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건국이라는 역사적 의미에 더하여 그것은 근대화 프로젝트의 본격적 始動을 포함한다. 대한민국 정부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독립국가로서의 의무에 근대국가로서의 책임이 더해진 것으로, 韓國의 近代的 移行分析은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아닌 1948년 건국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사실 독립과 건국을 염두에 둔 정치세력은 일제히 한국사회의 근대적 이행을 염두에 두었다. 해방을 맞이하여 그 어떤 유력 정치집단도 왕조시대나 봉건사회로 돌아가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계획경제, 중요산업 국유화, 토지개혁 등의 건국과제들을 대부분 공유함으로써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의지와 각오는 사실상 대동소이했다. 특히 이승만은 사회사상의 측면에서 근대적 지향성이 매우 뚜렷한 편이었다. 그는 社會進化論的 관점에서 서구가 밟았던 근대산업주의로부터 한국의 미래를 발견했고, 사회유기체적 입장에서 국가지도자에 의한 계몽주의적 접근을 사회발전의 주요 방편으로 인식했다 (전상인, 2006b).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는 과정에 크고 작은 欠缺이 없을 리 없고, 이승만 정부의 정당성이나 정통성에 대한 시시비비 또한 전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건국의 근대기획적 의의까지 훼손하지는 않는다. 해방공간의 남한사회가 일종의 ‘사회혁명’(social revolution)을 지향했고 이에 대해 미군정이 ‘반혁명’(counterrevolution) 세력으로 임했던 측면 자체를 전적으로 부인하긴 어렵다 (대표적으로 Cumings, 1981). 하지만 그러한 ‘사회혁명―반혁명’구도가 초래한 궁극적인 역사사회학적 결과는 근대성을 지향하는 근대국가의 企劃性과 改革性으로 보아야 한다 (전상인, 1991).

우선 한국의 국가는 냉전체제하 미군정에 의해 형태와 역할이 확대·강화되었다. 곧, 중앙집권적 권력구조, 억압적 국가기구의 발전, 관료조직의 성장 등을 통해 국가의 자율성과 능력은 가일층 신장되어 강력한 ‘有機體的 行爲者’(corporate actor)로 재생산되었다. 또한 건국과 더불어 한국사회에는 역사상 최초로 근대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정치적 리더십이 등장했다. 정부수립의 또 다른 측면은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선택이었다. 이와 더불어 1948년의 건국은 농지개혁에 대한 헌법적 약속을 통해 전통적 계급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기도 했다. 끝으로 시민권이 전면적 확대와 함께 1948년 이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國民政治’(national politics)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국가의 강성 확대 재편, 이념지향적 정권의 태동, 전통적 지배세력의 집단적 몰락, 그리고 국민적 정치공동체의 형성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해방공간 3년의 정치적 결과는 스카치폴(Skocpol, 1979)이 프랑스와 중국, 러시아 등 소위 ‘고전적’ 사회혁명 연구에서 발견한 혁명의 역사적 유산들과 흥미로운 유사성을 보여준다. 좌절 혹은 미완으로 끝난 우리나라 해방공간의 사회혁명은 최종적으로 단순한 과거회귀가 아니라 건국과 더불어 근대적 이행을 위한 사회개혁으로 귀결하였다. 만약 북한이 해방과 함께 ‘社會革命’의 길로 갔다면, 남한은 건국과 더불어 ‘社會改革’의 길을 걸었다.

1948년 체제에서 ‘높은 국가성’(high stateness)과 ‘낮은 계급성' (low classness)은 뚜렷이 대조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직전에 시작된 농지개혁이 한편으로는 전통적 지배계급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방 직후 고조되었던 ‘농민정치’를 경제적으로 와해시켰기 때문이다. 보통선거권의 전면적 실시 또한 사회구성원을 원자화시킴으로써 계급사회의 구조적 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바야흐로 “국가가 ‘중심’인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권태준(2006:42-44, 60). 말하자면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면에서 “국가가 앞장서 새로운 사회구조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2. 사회·문화적 근대개혁

대한민국은 건국 직후부터 일련의 근대적 사회변동을 기획하고 추진하였다. 건국 초기 및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의 近代企劃은 주로 사회의식이나 사회제도 전반에 대한 일련의 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또한 이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사회적 평등과 정의를 지향하는 사회의 질적 개선 측면이 강했다. 이는 신생 독립국가의 역사적 사명이자 시대적 당위이기도 했지만 최고 통치자 개인의 사회사상을 일정 부분 반영한 결과이기도 했다.

우선 신생정부는 소위 ‘근대인’(modern man)의 창출을 위한 일종의 문화혁명 내지 제도혁명을 추진하였다. 해방이 근대적 개인 및 시민의 탄생에 기여한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상인, 2005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개인들의 正體性은 여전히 前근대사회에 속했다 (전상인, 2006a 참조).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새 나라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것은 새 정부와 함께 새 국민의 새 정신”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박명림, 2006:339). 이를 위해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文盲退治와 國民敎育이었다. 헌법이 교육관련 내용을 명문화한 것도 이례적이거니와 1950년대는 전반적으로 民力이 크게 신장하였다 (유영익, 2006a). 내용적 측면에서도 과학주의 및 실용주의 교육철학이 기반을 이루었다 (박명림, 2006:341). 교육이 근대적 ‘國民形成’(nation-building)에 기여한 바도 컸다.

당시 근대적 개혁은 평등사회를 목표로 한 측면이 많았다. 일찍이 이승만은 기회균등의 보장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 믿었고, 특히 사회적 불평등이 공산주의의 온상이라고 인식했다 (전상인, 2006b). 그 결과, 제헌헌법은 ‘사회주의 경제’를 지향하는 모습을 띠기도 했다 (Dull, 1948). 경제질서의 원칙으로 “사회정의의 실현”과 “혼합경제의 발달”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헌법은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천명하였다. “모든 교육기관은 국가의 감독을 받으며 교육제도는 법률로써 정한다”라는 규정도 교육의 공공성과 교육복지를 강조하는 정신의 발로였다 (박명림, 2006:349).

평등지향적 사회개혁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농지개혁이었다. 정부수립 직후 최우선적 시대적 과제로 설정된 농지개혁은 한국전쟁 직전에 시작되어 1950년대 후반에 종료되었다. 보수적인 방식과 불철저한 수준에 대한 일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의 농지개혁은 과거 전제적 사회질서를 일소하고 전통적 지배계급을 와해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상인, 1991 볼 것). 사실 농지개혁은 미군정 말기 미국이 착수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이승만의 손에 맡겨졌다면 보다 더 개혁적, 진보적, 근대적이 될 개연성도 높았다 (전상인, 2001 참조).

3-3. 계획적 산업화

일련의 사회구조적 내지 사회문화적 개혁이 일단락되는 1950년대 후반부터 근대기획의 방향은 점차 중·장기 국가계획을 통한 경제발전으로 이동하였다. 물론 정부수립 직전인 1948년 7월에 정부기구 가운데 하나로 ‘企劃處’가 설치되기도 했다. 또한 이듬해 1월 8일에는‘경제부흥5개년계획(산업부흥5개년계획)이 우선 1차년 계획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골자는 물자의 정부통제, 경제질서에 대한 정부개입 등이었다 (박태균, 2007:31). 하지만 그것이 어떤 실체를 가졌던 것은 아니며 그나마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이완범, 2006:36). 한편, 한국전쟁이 끝난 1955년 2월에는 ‘復興部’가 설립되었고, 이런 저런 경제계획들이 급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원조배분과 관련된 미국의 권유 탓이었고 경제성장보다는 전후복구가 주된 목적이었다.

먼저 1957년을 전후하여 한국경제가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또한 이른바 ‘뉴룩정책’(New Look) 정책에 의해 미국의 군사적 및 경제적 無償援助가 有償借款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경제계획 수립의 유력한 배경이 되었다 (박태균, 2007:39-41). 원조의 감소가 ‘다모클레스의 검’(Sword of Damocles)이 된 것이다 (우정은, 2006:537).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 정권의 경제계획은 몇 가지 근본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우선 그것은 내용상 경제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보다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더 많이 얻기 위한 계획”에 가까웠다 (이완범, 2006:45).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적 관심과 지원도 크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부흥부의 독립 방계기관인 산업개발위원회와 몇몇 개별관료의 개인적 열의의 결과였다 이승만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공산주의의 냄새”가 난다며 배척했다고 한다 (박태균, 2007:42; 이완범, 2006:39 볼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승만정권은 계획집행 능력이 절대 부족했다. 국가능력의 측면에서 그것은 “무능하면서 전지전능한”국가권력이었다 (권태준, 2006:88). 이승만 정부 붕괴 직전인 1960년 4월 15일, 경제개발3개년계획이 확정되었다. 이는 “한국정부가 독자적으로 만든 최초의 경제개발계획”이었다 (이완범, 2006:43)

제2공화국 장면 정부는 ‘경제제1주의’를 표방하면서 자유당 정부 말기의 경제계획을 사실상 계승하였다. 그 결과가 경제개발5개년계획(1961-65)의 수립이었다. ‘중앙종합계획기구’에 해당하는 ‘경제개발부’ 설치를 구상하기도 했고 ‘국토건설사업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를 맞이하여 제2공화국의 경제계획은 “하나의 案으로만 남았다”(이완범, 2006:59). 경제계획 프로젝트를 구체적 실천으로 옮긴 것은 박정희 정권이었다. 경제개발 아이디어는 박정희 개인의 것도 아니었고 5·16 군사쿠데타가 경제계획 수립을 구체적으로 구상한 것도 아니었다 (이완범, 2006:204). 이런 점에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계획은 건국과 함께 추진된 전반적 근대기획의 연속적 일부이자 전면적 강화였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 초기만 하더라도 박정희 정부는 균형성장과 내포적 공업화, 농업부문 강조 등 과거 자유당 및 민주당정부의 경제계획 기조를 대부분 승계하였다. 물론 박정희 정권이 경제계획을 본격화하는데 있어서 미국의 압력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완범, 2006:89). 미국은 5·16에 대한 지지 근거로서 조기 민정이양과 경제계획의 수립을 요구했던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행 중도인 1964년 무렵, 대외지향적 수출주도 혹은 외자의존형 성장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도 미국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박태균, 2007).

4. 근대기획의 제도와 이념

4-1. 국가제도

국가주도의 근대적 이행은 필요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을 특정한 정치적 리더십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근대기획은 반드시 국가역량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소위 ‘國家能力’(state capacities)은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된다. 일정한 영토를 대상으로 확보된 주권이나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은 국가능력의 당연한 전제조건일 것이다. 하지만 근대기획에 관련한 국가능력의 핵심은 관료제다. 이른바 발전국가의 구성요소들 가운데 베버형 관료제의 발전을 가장 중요하게 인식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Rueschemeyer and Evans, 1985; Skocpol, 1985 등 볼 것). 16세기 프랑스의 법률가 보당(Bodin)에 의하면 “재정은 국가의 중추”다 (Woo, 1999: 10 재인용). 하지만 국가의 재정 운용 역시 궁극적으로는 관료제의 역량에 속한다.

베버가 설정한 근대 관료제의 이념형은 “조직간 유기체적 결합, 사회적 환경에 대한 분화와 절연, 의사결정 및 명령계통의 명료화, 그리고 도구적 합리성 및 그것의 활성화를 자극하는 내부적 특성” 등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국가개입 및 국가계획의 효율성을 最適化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Rueschemeyer and Evans, 1985:50-51). 그런데 이러한 관료제의 존재는 결코 ‘주어진 것’으로 전제할 수 없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발전과 남미지역의 경제낙후를 갈랐던 결정적인 차이도 다름 아닌 관료제 여하에 있었다 (Woo, 1999:13-15 볼 것).

관료기구의 발전은 그것의 유지에 필요한 재정능력이나 그것의 기능에 소요되는 인재 확보로 끝나는 단기간의 조직적 차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대신 그것은 관료사회의 집단적 열정과 사명감을 배양하는 장기간의 제도적 차원을 포함한다. 말하자면 관료집단이 ‘독특한 단체정신’(a distinctive esprit de corps)으로 무장될 때 보다 유능해지는 것이다 (Rueschemeyer and Evans, 1985:51). 우리나라의 경우 유교적 정치문화와 관존민비의 전통은 관료사회에 대해 ‘選民意識’의 바탕을 제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엘리트주의를 효율성을 자극하여 그 능력을 경제발전 과정에서 최대한 동원한 것은 1960년대 초 이후 경제개발 과정에서의 일이었다.

196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한국의 관료사회는 단순한 ‘書記精神’에 충만한 집단이었다 (이한빈, 1969:123). 그러나 1960년대 초 일련의 정치적 격동은 한국의 관료제를 一新하였다. 4·19 직후 장면 정부가 소위 ‘국토건설대’를 조직하여 대졸자 2,000명을 일시에 공무원으로 채용하고, 5·16 직후 박정희 정권이 중앙관서의 국장·과장·계장급의 15% 이상을 군인으로 특채한 일은 비록 관료충원의 正道는 아니었지만 관료사회에 일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한빈, 1969:135-136). 특히 박정희 정부는 한국의 관료제에 군대식 규율을 도입했다 (권태준, 2007:132-133). 대통령은 “군대의 최고 지휘관처럼 지휘하는 식의 체제를 구축”했고 “정치가 곧 구체적 목표지향적 행정으로 전환”되었다. 경제개발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관심이 높아지고 그것의 성과 또한 가시화되면서 관료집단의 자부심과 헌신의 동기도 그만큼 커지게 되었다 (권태준, 2007:137-138).

경제계획의 본격적 추진은 정부기구의 변화를 동반하였다. 그 핵심은 장면 정부에서 불발로 끝난 경제계획 전담 기구의 설치였다. 1961년 7월 22일자로 상급 부처(superministry)인 經濟企劃院이 신설되었다. 당시 산업개발위원회가 속해 있던 건설부를 모체로 하여 설립된 경제기획원은 계획수립, 정책조정, 예산, 외자관리, 통계관리 등 계획과 관련된 거의 모든 업무를 통괄하게 되었다 (이완범, 2006:116). 경제기획원은 그 이전까지 분권화된 경제 및 행정기구의 기획, 집행, 조정 기능을 집중시켜 제도적 자율성을 극대화시켰다 (이만희, 1993:87). 경제기획원과 같은 국가기구가 한국에서 유일했던 것은 아니나 “한국의 경제기획원처럼 전면적인 권한을 부여받은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강광하, 2000:39).

경제계획에 부합하는 ‘知識國家’를 지향하려는 제도적 노력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의 창설도 이와 무관하지 않고, 통계기구의 발전과 자율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공식적 통계기구는 1948년 11월에 설치된 공보처 통계국이었다. 그리고 1955년 2월, 통계국은 소관 부처를 내무부로 옮겼다. 경제기획원이 신설되면서 통계국은 그곳 소속이 되었고 1963년 12월에는 조사통계국으로 개명되었다. 통계국이 통계청으로 독립·승격한 것은 한참 뒤인 1990년 12월의 일이었다. 이는 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1987-91)이 중앙통계기구 확충을 목표로 내 걸었기 때문이다 (강광하, 2000:105). 지식국가로의 道程은 인력개발의 측면에서도 활발했다. 1960-70년대에 걸쳐 한국과학기술원, 한국개발원, 국토개발연구원 등의 각종 정책연구기관이 설립되었다. 또한 미국의 지원으로 1959년에는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이 문을 열었다. 그 밖에도 많은 관료와 군인들이 유학이나 단기훈련, 시찰 등의 명목으로 미국 등지를 다녀왔다 (유영익, 2006a 참조).

4-2. 계획이념

국가주도의 근대적 공공계획에는 반드시 어떤 사상적, 이념적, 철학적 측면이 있게 마련이다. 크게 보아 ‘합리적 종합계획’(rational-comprehensive planning) 이론에 바탕을 둔 개발연대 한국의 공공계획은 다음 몇 가지를 사상적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첫째는 1950-60년대를 풍미했던 ‘近代化理論’(modernization theory)이다. 당시 대다수 제3세계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의 산업화 과정 역시 근대화 이론이 제시하는 ‘캐치 업’(catch-up) 방식의 발전을 추종하였다. 특히 한국에 근대화이론을 전파한 창구는 당시 MIT 경제학 교수였던 로스토우(Walt W. Rostow, 1960)였다. 미국이 후진국에 대해 보다 안정적이고 효과적이며 민주적인 사회로의 진화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대응양식으로서의 경제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박태균, 1997; 1999:275).

둘째는 ‘불균형성장론’이다. 근대화이론의 출발은 시장중심의 균형성장론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전세계에 걸쳐 경제적 낙후상태의 지속,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 정치적 불안 등 다양한 문제점들을 노정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련의 경제학자들은 그 대안으로서 不均衡成長論을 제시했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독일 출신으로서 남미경제 자문역의 경험을 가진 허쉬만(Albert O. Hirschman, 1958)이었다. 성장거점(growth pole), 이중경제(dual economy), 추진력(forward thrust) 등의 개념이 그로부터 나왔다. 한국의 경우, 이승만 정부는 상대적으로 ‘다부문 균형성장모델’을 추구했으나 경제계획이 현실화되기 시작한 민주당 및 공화당 정부에서는 ‘요소공격식 불균형성장론’으로 뚜렷이 이동하였다 (이완범, 2006:61).

끝으로 한국의 계획이념은 민족주의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처음부터 민족주의적 자립경제를 추구하는 가운데 “對美自主을 지향하는 민족주의”와 표리부동의 관계에 있었다 (이완범, 2006:93). 한국이 외향적이며 개방적인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추진하기 이전, 국가주도 경제발전의 전략은 이른바 ‘內包的 工業化’였다. 그것은 기초적 생산재 공업을 우선 건설하려는 자주경제 전략이었다 (박희범, 1968). 1964년을 전후하여 한국경제가 대외의존적 내지 수출주도적 방식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강력한 민족주의는 여전히 경제계획의 근저에 깔려있었다. 사실상 민족주의적 경제계획은 한국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에 있어서 공통적인 현상이었고, 이런 점에서도 동아시아의 성공과 남미의 실패가 뚜렷이 대비되기도 한다 (Woo, 1999 볼 것).

5. 結 論

건국 이후 우리나라는 근대적 이행을 근대국가의 공공계획의 일환으로 추진해 왔다. 이는 산업화를 포함한 한국의 본격적 근대화가 대한민국 건국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만큼 한국의 근대적 이행은 특정 정치적 리더십과 결부되기보다 국가제도 자체에 구조와 기능에 초점을 맞춰 분석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1948년 이후 대체로 10여 년 동안 국가주도 근대기획의 초점은 社會의 文明化, 制度的 改革 및 社會的 平等化 등 주로 질적인 차원에 맞춰졌다. 그 이후 1997년까지 대략 40년간 국가의 근대기획의 방향은 정권을 뛰어 넘어 산업화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개발, 곧 양적인 발전 차원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합하여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 국가는 근대적 이행 전반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대체적으로 유능했고, 그 결과가 단기간의 압축적 근대화였다.

하지만 근대화의 성공 이면에 한계나 폐해도 만만치 않았다. 대표적으로 1980년에는 광주의 비극이 있었고, 1990년대 말에는 총체적 경제위기가 있었다. 이로써 근대국가의 근대기획 자체는 시간구속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지금 1960-70년대 방식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건국 60년을 눈앞에 둔 오늘날 한국사회는 따라서 국가중심적 근대적 이행의 성과와 문제를 냉정히 점검하면서 근대의 완성 혹은 대안적 근대를 위한 새로운 발전전략을 모색할 때다. 1997년에 완료된 ‘신경제 5개년계획(1993-97)을 끝으로 대한민국의 국가는 장기종합발전계획에 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

10년째 추락하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혹시 현재의 국가적 無計劃 내지 無비전 상태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계획경제를 1947년부터 실시한 북한 역시 ‘제3차7개년계획’(1987-1993) 이후 ‘완충기’(1994-96)를 경과한 다음 계획에 관해 10여 년 째 감감무소식이다. 차이는 남한이 국가주도 계획시대 ‘이후’를 맞이하고 있다면 북한의 경우는 계획조차 ‘포기’한 근대국가 자체의 실패가 아닐까 한다.

(시대정신)